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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성덕왕릉(聖德王陵)
성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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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릉 (聖德王陵)
[사적 제28호] 경상 북도 경주시 정래동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능. 사적 제28호로 지정되었으며 통일 신라 초기인 736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성덕왕릉 (聖德王陵) 신라 737년 702년 성덕왕 효소왕 효성왕
▣ 백과사전
경상 북도 경주시 정래동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능. 사적 제28호로 지정되었으며 통일 신라 초기인 736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능은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완비된 모습을 갖춘 능묘로 특히 둘레돌의 형식이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능의 네 귀퉁이에 돌사자를 세웠으며, 능 앞에는 돌로 만든 인물상인 석인을 배치하였고 능의 앞쪽 왼편에는 능비를 세운 형태이다. 분구 가장자리에 놓여진 둘레돌은 높이가 90㎝ 정도의 판석과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려 놓았으며 판석들 사이에는 돌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탱주를 끼워 고정시켰고,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석주를 세워 단단히 고정하였다. 이 삼각형의 석주들 사이에는 십이지신상을 환조로 조각하여 세웠는데 모두가 네모 반듯한 기단 위에 올려져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아주 심하게 파손된 상태이다. 십이지신상은 머리는 짐승의 모습이고, 몸체는 사람으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무기를 든 채 똑바로 서 있는 형태이다. 또한 둘레돌의 가장 바깥쪽으로는 수십 개의 석주들이 세워져 있는데, 석주 사이에는 위 아래 2개씩의 관석을 끼우기 위한 홈을 팠는데 아마도 능묘 안으로 마음대로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분구 가장자리에 둘러진 판석과 석주들 사이에는 깐돌이 있다. 한편, 능 주위에 세워진 돌사자는 능 뒤에서 좌·우로 하나씩, 능 앞 석인 밖으로 좌·우 하나씩 모두 4구를 배치하였는데 서 있는 자세와 얼굴 모습 등 매우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능의 앞쪽으로는 앞뒤에 2좌씩, 그리고 좌우에 1좌씩 안상(얼굴)이 있는 훌륭한 솜씨로 직사각형의 석상을 놓았는데 석상의 윗면은 2매의 판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능 앞에는 원래 문인석과 무인석 각 2구를 양쪽에 세웠지만 지금은 무인석 1구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 1구만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무인석은 네모 반듯한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모습은 의장용 갑옷인 양당개를 입고 양손으로는 칼을 짚고 서 있는 형태이다. 능의 앞쪽 왼편으로는 능비가 놓여져 있는데 비문을 새긴 빗돌인 비신과 비 머리에 올려놓는 뿔 없는 용이 서린 모양을 새긴 이수는 손실되었고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만이 목이 부러진 채 남아 있다. 귀부는 웅장하고 규모가 큰 편이지만 몸체는 대체로 납작하게 조성되었다.
 
성덕 왕릉은 통일 신라 초기에 조성된 임금의 능과 묘로 십이지신상 를 비롯하여 석인과 석수를 제대로 갖춘 우리 나라 최초의 능묘로서 평가를 받고 있다.
 
성덕 왕릉 북서쪽에는 성덕왕의 형인 효소왕의 능으로 보이는 원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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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