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의 전통과 도덕 사상. 유교는 중국 춘추 시대 말기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을 받드는 가르침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덕(德)을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을 그 중심 사상으로 한다.
그리고, 공자의 사상을 근본으로 삼고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경전으로 하여 정치·도덕의 실천을 가르치는 학문을 유학(儒學)이라고 한다. 따라서 유학은 유교를 성립시키는 학문을 일컫는다.
엄밀히는 철학이라고도 종교라고도 할 수 없고, 철학·종교·정치·윤리·역사 등을 분화되지 않은 채로 아울러 지닌 인간의 가르침으로서 발전하여 중국에서는 2,000여 년, 우리 나라와 일본에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정신 문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 왔다.
유교의 시작과 공자
기원전 5세기경인 중국 춘추 전국 시대에 태어난 공자는 실로 뛰어난 학자요 사상가였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두루 돌며 왕도(王道 : 인덕으로 다스리는 정치 사상)를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이상을 펴지 못하고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이 모아 엮은 그의 언행록인 《논어》에 잘 나타나 있다.
공자는 인(仁)을 가장 중히 여겼으며, 인은 곧 효(孝 : 효도)요, 제(悌 : 우애)라 하여 인의 근본이 가족의 윤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육친 사이에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어울림의 원리로 삼아 정치에로 발전시켰다.
맹자와 순자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맹자(孟子)와
순자(荀子)가 나타나 유교는 더욱 체계화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맹자는 인(仁)을 실천하기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아울러 주창했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선(착함)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이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정치로서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유교 는 맹자에 의해 더욱 깊이 있게 정립되었으며, 인간 윤리 에 대한 오륜(五倫)도 제창되기 시작하였다.
얼마 뒤에 순자가 나타나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 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악(악함)하므로 예(禮)에 의해서만 수양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고 예(禮)를 강조하였다.
유교의 사상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요약하면 삼강 오륜(三綱五倫)과 인의 예지(仁義禮智)라고 할 수 있다.
‘삼강’이란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의 도리를 가리키고, ‘오륜’이란 인간 관계의 질서를 다섯 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 유친(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친애), 군신 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 부부 유별(남편과 아내 사이의 분별), 장유 유서(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차례와 질서), 붕우 유신(친구 사이의 신의)이 그것이다.
또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 몸을 닦아 집안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된 뒤에야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라 하여 먼저 자신의 수양을 강조하였다.
우리 나라와 유교
유교가 우리 나라에 전해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에
태학을 세웠으며, 백제는 고이왕 52년(
285년)에 이미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어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태조의 숭불(불교를 숭상함) 정책 으로 유교가 한때 떨치지 못했으나 성종 11년(992년)에 국자감(國字監)을 세웠고, 문종 때에는
최충이 구재(九齋)를 세워 학생을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이 날뛰고 전란이 잦아 유교는 240여 년이나 침체 상태에 빠졌다가, 충렬왕 때
안향이 중국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지고 온 후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유교 부흥에 힘썼다.
조선 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숭유 억불(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함)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며, 명종· 선조 시대에는 많은 유학자가 나와서 우리 나라
성리학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고,
이황(퇴계),
이이(율곡)와 같은 큰 학자들이 나와 그 학풍은 후세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