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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趙)
성(姓)의 하나. 본관은 《증보문헌비고》에 210여 개의 본이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몇 본이 전하여 오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김제(金堤)· 배천(白川)·순창(淳昌)·양주(楊州)·임천(林川)·직산(稷山)·평양(平壤)·풍양(豊壤)· 한양(漢陽)·함안(咸安)·횡성(橫城) 등 10여 본이 이 성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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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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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姓)의 하나. 본관은 《증보문헌비고》에 210여 개의 본이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몇 본이 전하여 오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김제(金堤)· 배천(白川)·순창(淳昌)·양주(楊州)·임천(林川)·직산(稷山)·평양(平壤)·풍양(豊壤)· 한양(漢陽)·함안(咸安)·횡성(橫城) 등 10여 본이 이 성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성씨는 같은 성을 한 시조의 후손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이들 성씨는 다른 성씨와는 달리, 동성 동본의 경우만이 아니라 본이 다르더라도 서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
 
이 성씨의 시조에 대하여서는 전하여 오는 이야기가 많다. 《증보문헌비고》의 평양 조씨 편에는 고려 말의 유학자 이곡이 "조씨의 선대는 본래 은나라 사람으로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 나라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전하여 오는 다른 이야기는 북송이 금나라에 망하자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후손들이 고려에 망명함으로써 우리 나라에 조씨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양주·평양·임천· 배천 조씨 등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귀화인들로 알려져 있다. 《양주 조씨 세보》에 송나라 태조의 7대손인 조익 (趙翼)·조기(趙冀)·조이(趙裏)· 조광(趙廣) 4형제 가운데 셋째 조이와 넷째 조광이 고려에 귀화하여 각각 평양 조씨와 임천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첫째 조익 의 아들 4형제 조지린(趙之璘)·조지수(趙之壽)·조지청(趙之淸)·조지말(趙之末)이 고려 의종 때 고려에 귀화하여 각각 배천 조씨· 한양 조씨·풍양 조씨·양주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증보문헌비고》나 《조선씨족통보》 등에는 배천 조씨는 송나라 태조의 첫째 아들의 후손들, 임천 조씨는 둘째 아들의 후손들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풍양 조씨와 한양 조씨들은 《양주 조씨 세보》가 나타내고 있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풍양 조씨들은 시조 조맹(趙孟)이 본래 성이 없었는데,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워 조씨(趙氏)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고 있다.
 
조씨는 조선의 개국 공신 40여 명 가운데 8명이나 되며,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가 602명에 이르고 있다. 1985년에 실시된 국세 조사에서 인구 87만 7,050명에 가구수 20만 7,895가구였으며, 전국 274성 가운데 제7위였다.
 
 

김제 조씨

고려 고종 때 대장군이었던 조연벽(趙連璧)을 시조로 한다. 조연벽은 벽성군으로 봉하여졌는데, 벽성군은 김제의 옛이름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로 알려져 있다. 후손으로는 조선 단종 때 절개 높았던 조수량(趙遂良)이 있고, 조선 중종 때 정국 공신 조원륜(趙元倫) 등이 있다.
 

배천 조씨

고려 현종 때 좌복야를 지낸 조지린이 시조이다. 조지린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였다. 조지린의 아들 조양유(趙良裕)는 공신이 되어 배천군에 봉하여졌다. 그 이후 후손들이 배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후손으로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왜병과 싸우다 순절한 의병장 조헌(趙憲)이 있다. 그리고 조선 효종 때 대제학을 지냈으며, 《인조실록》을 편찬한 조석윤(趙錫胤)이 있다.
 

순창 조씨

순창 조씨에는 고려 시대에 문하시중과 평장사를 지낸 조장(趙璋)을 시조로 하는 호남파와 고려 시대에 호장을 지낸 조자장(趙子長)을 시조로 하는 호서파가 있다. 순창의 옛이름이 옥천이어서 순창 조씨는 옥천 조씨라고도 한다. 호남파로, 고려 말기 절개 굳은 신하로 목은· 포은·도은· 야은과 함께 '오은'으로 불리는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이 있으며, 조선 세종 때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숭문(趙崇文) 등이 있다. 호서파로는, 조선 명종 때 목사 등을 지낸 조유성(趙惟誠)이 있다.
 

양주 조씨

고려 시대에 호장을 지냈으며, 판중추부사로 추증된 조잠(趙岑)을 시조로 한다. 조잠의 증손대인 조선 중기에 양주 조씨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정평공파·문강공파·제학공파·강화공파로 4형제가 각각 파를 이루었다. 그런데 정평공파와 제학공파는 단종 때 일어난 계유정난에 김종서의 일파로 몰려 살해되어 후손이 귀하였다. 계유정난이란 1453년 수양 대군이 세종 때부터 조정을 지켜온 원로 대신들을 없애고 스스로 왕권을 잡은 사건이다. 수양 대군이 난을 일으킨 표면적인 이유는 안평 대군을 중심으로 하여 김종서· 황보인 등이 역적 모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은 수양 대군이 어린 왕 단종을 보호하는 세력인 원로 대신들을 없애고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이었다. 그 뒤 양주 조씨의 대부분은 문강공파가 차지하게 되었으며, 문강공은 양주 조씨의 중시조가 된다. 한말에 을사조약 체결 후 기우는 국운에 비분 강개하여 자결한 조병세(趙秉世)가 있다.
 

임천 조씨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을 격파하고 가림백에 봉하여진 조천혁(趙天赫)을 시조로 한다. 가림은 지금의 임천이다. 조천혁은 중국 송나라 태조의 손자 기왕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로, 고려 에 귀화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3대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원(趙瑗)·조희일(趙希逸)·조석형(趙錫馨)이 있다. 조원은 선조 때 정언을 지냈으며, 저서에 《독서강의》 등이 있다. 조희일은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문집 《죽음집(竹陰集)》을 남겼다. 조석형은 인조 때 진사시에 장원을 하였지만, 벼슬을 거부하고 학문에만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당시에 뛰어났다. 조선 중종 때 황해도사 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낸 조응공(趙應恭), 성균관 사성을 지낸 조원경(趙元卿), 우승지·이조 판서 를 지낸 조명정(趙明鼎)이 있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문신 조병호(趙秉鎬), 한문 소설 《창선감의록》을 쓴 조성기(趙聖期)가 있다.
 

직산 조씨

백제의 개국 공신으로 금오대장군이었던 조성(趙成)이 시조이다. 금오대장군 조성은 경양군에 봉하여졌다가 예성부원군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하남백으로 옮겨졌다. 하남은 직산의 옛이름이며, 직산은 본래 위례성으로 백제 온조왕이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백제 건국과 함께 시작된 직산 조씨는 현재의 여러 성씨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성씨의 하나이다. 후손으로는 임진왜란 때 왜적에 맞서 동래성을 죽음으로써 지킨 조영규(趙英圭)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양산 군수로 있던 그는 동래부사와 함께 동래를 사수하다 순국하여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평양 조씨

고려 예종 및 의종 때의 금자광록대부 의병상장군 조춘(趙椿)을 시조로 한다. 조춘은 금나라를 정벌하는 남송을 도와 공을 세우고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조춘을 중국 은나라 사람으로, 기자의 후손으로 보는 설과 중국 북송 왕자의 후손으로 보는 설이 있다. 그러나 기자의 후손이라는 설은 역사적 사실이나 연대상 큰 차이가 있어 북송 왕자의 후손이라고 보는 입장이 우세하다. 중국 북송이 금나라에 망하자 북송의 세 왕자가 고려에 망명하였으며, 그 후손이 번창하여 배천 조씨· 한양 조씨·양주 조씨·평양 조씨·임천 조씨 등 여러 조(趙)씨로 나누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평양 조씨는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 시작한 뒤로 몽고어 통역관으로 출세하여 최고위 관직에까지 오른 조인규(趙仁規)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시조 조춘의 5세손인 조인규를 중시조로 보기도 한다. 후손으로 유명한 사람은 조선의 개국 공신 조준(趙浚)이 있다.
 

풍양 조씨

고려의 개국 공신 조맹(趙孟)을 시조로 한다. 후삼국 시대에 풍양현에 은거하여 있던 조맹은 왕건을 만난 뒤 고려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그 공로로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다. 조맹의 원래 이름은 바위〔巖〕였는데 왕건이 '맹(孟)'이라는 이름을 조씨 성과 함께 하사하였다고 한다. 풍양 조씨는 고려 시대에는 그렇게 유력한 가문이 아니었던 듯하나,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상신 7명, 대제학 4명, 공신 7명, 장군 7명 등을 낸 유력한 가문이 되었다. 헌종 때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풍양 조씨 세도 정치'를 하는 데까지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후손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은,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조상우(趙相愚)가 있으며, 영조 때 좌의정 조문명(趙文命)·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형제와,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온 조엄 등이 있다.
 

한양 조씨

고려 명종· 신종· 희종· 강종 등 4대에 걸쳐 벼슬을 하여 조순대부·첨의중서사에 이른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한다. 한양 조씨는 시조의 아들대에 이르러 유력한 가문 이 되었다. 시조의 아들 조휘(趙暉)가 쌍성총관이 되었고, 그 아들들 용천부원군 조림(趙琳)과 용성부원군 조돈(趙暾) 등이 뒤를 이었다. 그 후 한양 조씨는 고려 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래서 조선 개국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조선 초에 가장 번성하였던 한양 조씨는 이후 많은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가문 이 되었다. 후손으로는 조선 중종 때 도학 정치를 폈던 조광조(趙光祖)가 있다.
 

함안 조씨

고려 때 대장군 원윤을 지낸 조정(趙鼎)을 시조로 한다. 조정은 중국 후당 사람으로, 신라 말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으며,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벽상 공신이 되었다. 후손들 가운데에는 조선 세조 때 생육신 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가 있으며,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의병장 조종도(趙宗道)가 있다. 그 외에 조선 영조 때 시·서·화 모두에 뛰어나 삼절로 이름난 조영우(趙榮祐), 조선 후기 화가로 산수와 인물에 능한 조정규(趙廷奎)와 조희룡(趙熙龍) 등이 있으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조소앙(趙素昻) 등이 있다.
 

횡성 조씨

고려 때 한림학사를 지낸 조익(趙翌)을 시조로 한다. 조익 은 고려 정종 때 중국에서 와 평장사를 지낸 조첨(趙瞻)의 아들이었는데, 조첨은 중국 주나라 때의 제후국이었던 조(趙)나라의 군주 후예였다. 후손으로는 고려 신종 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조영인(趙永仁), 고종 때 추밀부사와 한림학사를 지낸 조충(趙庶) 등이 있다. 그리고 조선 명종 때 공조 참판을 지냈으며, 저서로 《월천집》을 남긴 조목(趙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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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 시대 7웅의 하나(기원전 403 ~ 기원전 222년). 산시성에서 하북성에 걸쳐 있던 나라이다.
조(-)
벼과에 딸린 한해살이 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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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과에 딸린 한해살이 작물.
성(姓)의 하나. 본관으로는 창녕(昌寧)·가흥(嘉興)·남평(南平)·능성(陵城)· 수성(壽城)·안동(安東)·영암(靈巖)·옥주(玉州)· 인산 (仁山)·장흥(長興)·창평(昌平)·청도(淸道) 등 10여 본이 전한다. 그러나 모두 창녕 조씨의 분파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거의 창녕 조씨 하나의 본으로 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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