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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朝鮮)
14세기 초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번영했던우리 나라의 마지막 왕조.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조선 (朝鮮) 대명률 대원군 성균관 아악 일제 강점기 판소리 한성부 형조 6조 간경 도감 국악 당악 대명령 동편제 동학 운동 물시계 서편제 석전 속악 신문고 제도 중고제 측우기 해시계 향악 혼천의 홍범 14조 대한 민국 법주사 북한 위화도 화엄사 고려 대한 제국 1443년 1446년 1420년 1388년 1114년 김홍도 조선 세조 조선 세종 신윤복 신재효 안견 장승업 정선 강순 고수관 공민왕 김득신 김병연 김종서 김홍집 노사신 조선 단종 조선 문종 박연 성삼문 소헌 왕후 송흥록 신숙주 심사정 안평 대군 이용 양녕 대군 우왕 윤두서 윤자운 이날치 장영실 정인지 정창손 정창업 창왕 최영 조선 태조 조선 태종 한명회 황보인 흥선 대원군 덕흥 대원군 김창집 박유전 강맹경 김찬업 정춘풍 송우룡 박만순 김세종 주덕기 김계철 신만엽 염계달 모흥갑 권삼득 신한평 비변사 사헌부 의금부 의정부 통리기무아문 포도청 관습 도감 국자감 군국 기무처 도화서 사간원 삼군부 정음청 집현전 홍문관 겸재정선미술관 경국대전 강릉 매화 타령 정선필 금강전도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대전속록 몽유도원도 변강쇠타령 세조실록 세종실록 수궁가 심청가 옹고집 타령 적벽가 춘향가 훈민정음 흥부가 광대가 인왕제색도 갑오개혁 위화도 회군 갑신정변 삼포 왜란 을미개혁 요동 정벌 법주사 팔상전 숭례문 화엄사 각황전 대성악 영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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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초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번영했던 우리 나라의 마지막 왕조.
 
고려 말의 혼란을 수습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건국되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 관료 사회를 이룩하였으나, 중기 이후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서유럽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건국 후 519년 만에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건국과 발전

고려 말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사대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 반대 세력을 물리친 다음,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1392년).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겨 민심을 새로이 수습하고, 유교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원리로 삼았으며,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국력을 기르고 국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이어 건국 초의 세력 다툼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강력한 정치를 펴서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 뒤 세종세조 때에는 민족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산업이 발달하고 국력이 크게 자라났으며, 성종 때까지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현실 문제를 소홀히 생각하게 되어, 대외 정세의 변화에 따른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왜란과 호란의 큰 국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온 국민의 단결된 힘으로 국난을 이겨 낸 조선은 현실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크게 일어나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면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어느 정도 정치가 안정되고, 산업 이 복구되어 경제 활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한 속에서 실학이 일어나고 서민 문화가 자라났으며, 신분 제도에도 변화가 일어나 양반 중심 사회에 대한 비판이 일게 되었다.
 
한편, 서양 문물이 들어옴에 따라 세계를 보는 눈도 넓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대대로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외척 문벌들에 의한 세도 정치가 실시되자, 농촌은 다시 황폐해지고 정치, 사회적 기강이 무너져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안으로 세도 정치를 뿌리 뽑아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쇄국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민씨 세력에 의해 10년 만에 물러나고 새로 정권을 잡은 민씨 세력은 개항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청나라와 일본 및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서로 분열되어 다투기만 함으로써 마침내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1910년).
 

통치 조직

조선은 갖추어진 법전에 따라 제도를 마련하고 행정을 펴 나간 국가였다.
 
건국 초부터 기본 법전을 갖추려고 힘썼는데, 성종 때에 이르러 《경국대전》이 완성됨으로써 유교적 법치 국가의 기틀이 확립되었다.
 

중앙 관제

국가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의정부를 두고, 그 기관에서 정승들이 모여 나라의 여러 중요 정책을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였으며, 그 아래에 6조를 두었다.
 
그 밖에 의금부, 승정원,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춘추관, 한성부 등의 기관이 각기 특수한 임무를 맡아 보았으며, 문무 관리는 모두 18 등급의 품계로 구분되었다.
 
그 뒤 명종 때 설치된 비변사가 양란(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그 기능이 커져 군사 및 행정의 실권을 모두 잡게 되어 의정부의 기능은 유명 무실해졌는데, 대원군은 그러한 폐단을 개선하기 위하여 비변사와 의정부의 업무 한계를 나누고, 국방이나 치안 관계 이외에는 모두 의정부에 맡겼다.
 
그러나 차차 국내 문제가 복잡해지자, 1881년(고종 18년)에 다시 최고 정책 기관으로 통리 기무 아문을 두고, 그 아래 12사를 두어 행정을 나누어 맡게 하였다.
 
그러다가 갑오개혁 때 다시 개혁이 이루어져 왕실과 정부의 일을 나누어 궁내부와 의정부를 두고, 의정부 아래에 8 아문을 두어 이를 내각이라 하였다.
 

지방 조직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관찰사를 두었으며, 그 아래 부, 목, 군, 현을 두고 중앙에서 수령을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
 
향·소·부곡 등의 천민 집단 거주 지역은 없어졌고, 지방의 행정 실무는 중앙의 6조와 같이 6방으로 나누어 각각 향리가 맡아 보았으며, 지방의 양반들로 이루어지는 향청을 두어 수령을 돕도록 하였다.
 
이러한 지방 제도는 갑오개혁 때 전면적으로 개편되어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그 아래 군을 설치하였으며, 을미사변 후에는 다시 13도로 개편하여 일제 때까지 이르렀다.
 

교육·과거 제도

모든 관리는 원칙적으로 과거를 통해 등용되었다. 과거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으며, 그 가운데서 문관 시험인 문과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문과에는 주로 양반 자제가 응시했으나, 무과에는 향리나 평민들도 응시할 수 있었고, 잡과에는 주로 중인 계급이 응시하였다.
 
조선 시대의 교육의 목적은 유교적 학식의 수양과 함께 유능한 관리의 양성에 있었다.
 
초등 교육은 가정이나 서당에서 받고, 초보적인 지식을 쌓은 다음, 서울에서는 4부 학당, 지방에서는 향교 에 들어가 중등 교육을 받았다.
 
서울의 성균관은 최고의 국립 교육 기관으로서 소과에 합격한 사람과 그 밖의 학생들을 모아 수준 높은 유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중기 이후에는 서원이 성하여 지방의 교육 기관 노릇을 대신하였으나, 이러한 교육 및 관리 선발 제도는 갑오개혁에 이르러 폐지되고, 새로운 관리 등용법과 근대적인 교육 제도가 새로 마련되었다.
 

군사 제도

양인 개병과 병농 일치를 원칙으로 하여 16~60세의 남자들은 누구나 군역을 치러야 했다.
 
무관의 최고 기관으로는 중추원 이 있었으나 실무는 맡지 않고, 5위 도총부가 최고 지휘권을 가지고 중앙군인 5위를 통솔했다.
 
지방 각 도에는 병사와 수사를 보내어 육군과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군사상 중요한 곳에는 진과 보를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밖에 잡색군이라는 예비군이 있었는데, 각계 각층의 자제들이 평소에는 본업에 종사하면서 일정기간만 훈련을 쌓아 유사시에 향토 방위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왜란을 겪으면서 그러한 군제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에 대한 개편을 단행하게 되었다. 먼저 중앙군으로는 5군영을 새로 설치하고, 지방에는 진관을 그대로 두었으나 종래의 진관 중심 방어 체제를 속오군 체제로 바꾸어 국방의 허술함을 보충하였다.
 
이러한 군사 제도는 후기까지 그대로 계승되어, 개항 후 별기군의 설치 등 근대적인 군제의 개편이 여러 번 시도되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907년에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었다.
 

사회·경제

조선은 유교 중심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서 농본주의 정책을 취함으로써 상공업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어 민중의 자각이 싹트면서 신분 제도 에 동요가 일어나고, 경제 생활에서도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져 상업 자본가가 성장하고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신분 제도

조선은 중간 계층 출신의 사대부와 무인들이 하층민의 지지를 얻어 세운 나라이다. 그래서 중간 계층과 하층민의 지위를 어느 정도 향상시키고 국가 수입의 기반을 늘리는 방향으로 신분 질서를 다시 세웠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양인과 노비를 세습 신분으로 명확히 나누고, 권문 세족과 지방 지주들의 특권을 제약하는 한편, 노비의 수를 줄이고 그 지위도 보다 개선하였다.
 
그러나 사림이 진출한 16세기 이후 양반이 세습 신분으로 굳어지면서 초기의 양천제는 무너지고, 신분 계급은 양반, 중인, 평민, 천민의 넷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더욱 양반 계급은 그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계급의 양반으로의 진출을 막고, 모든 사회 제도 를 양반 중심으로 이끌어 갔는데, 그러한 신분 체제는 양란(왜란과 호란)후 끝없는 도전을 받으면서도 불구하고 1894년의 갑오개혁 때까지 그대로 계속되었다.
 

사법 제도

조선 시대에는 사법 기관과 행정 기관이 분리되어 있지 않아 중앙과 지방의 여러 기관에서 사법권을 함께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일반 관리들이 어느 정도 법전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했다.
 
중앙의 사법 기관에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 한성부, 포도청 등이 있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 와 수령이 맡아 다스렸다. 형벌에는 고려 시대와 같이 태형(대쪽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 장형(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 도형(감옥살이 형벌), 유형( 귀양 보내는 형벌), 사형의 5가지가 있었으며, 형벌을 내릴 때에는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따르고, 거기에 없는 부분은 중국의 《대명률》을 참고하였다.
 
한편 조선 시대부터 삼심제가 생겨 사형 에 해당하는 죄는 먼저 형조에 보고하여 의금부가 재심 하고, 다시 왕에게 보고하여 의정부에서 삼심하도록 하였다.
 
가장 엄하게 다스린 죄는 나라에 대한 반역죄였고, 인륜과 도덕을 어긴 죄도 엄하게 다스렸다.
 

토지와 조세 제도

초기에는 고려 말의 과전법을 계승하였으나, 차차 관리에게 줄 토지가 모자라게 되어 세조 때에는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주는 직전법으로 바뀌었다(1451년).
그러나 직전법 의 실시는 관리들의 토지 사유화 현상을 가져오게 되어 성종 때에는 다시 나라에서 조를 거두어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는 관수 관급제를 실시하고, 왜란 후에는 그 제도마저 폐지하여 관리들에게 봉록만을 주게 되었다.
 
조세 제도는 조(租 : 토지를 대상으로 한 세금), 용(庸 : 공역의 의무 를 치르는 대신에 현물로 내는 세금), 조(調 :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양란을 거치면서 모든 제도가 무너져 토지세는 공법(貢法)에 대신하여 영정법 (永定法)으로 통일하고, 공물은 쌀로 바치는 대동법으로, 군역은 균역법으로 바뀜으로써 모든 세금을 전세(田稅)로 일원화하였다.
 

문화

조선은 유교를 정치, 사회, 문화의 바탕으로 삼게 되면서 학문 활동이 진전되어 민족 문화가 크게 번영하게 되었으며, 거기에다 왕성한 민족적 자각과 전통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원동력이 되어 한글을 창제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발전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학문과 종교

조선 시대의 지배적인 학문은 유학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이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황과 이이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학문 으로 발전시켜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의 명분에 치우친 성리학의 유행은 부정적인 면으로도 작용하여 중기 이후 학자들 간에 붕당을 빚게 되었고, 그 배타적인 성격 때문에 다른 학문의 발달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양란 후에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실학이 크게 일어났으나 그것이 실제로 응용되지는 못하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양명학 의 학풍도 꽃피우지는 못하였다.
 
종교에서도 역시 성리학 의 배타적인 성격이 작용하여, 성리학자들은 유교 이외의 다른 사상은 이단으로 배척하여 이를 멀리하였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 신앙과 불교가 민중 속에 널리 퍼져 있었다.
 
후기에는 서양 문물과 함께 카톨릭교가 들어와 일부 양반들과 중인 계급에 퍼지고, 이에 대한 우려에서 일어난 동학이 민중 사이에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문학

사림들은 중국을 숭배하는 면이 강하여 한글이 창제된 조선 시대에도 문학은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한글의 창제는 국문학 발달을 촉진시켜 한글 소설이 나오게 되었으며, 양반 계급에 의해 한글로 된 시조와 가사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어 대한 제국 말기에는 서양 문물의 영향으로 신소설이 나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적인 소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술

성리학자들은 예술 활동을 천하게 여겨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사대부의 취향에 맞는 소박하고 담백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서예는 사대부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할 교양으로서 중시 되어 뛰어나고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이가 적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서 안평 대군, 양사언, 한호와 후기의 김정희 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림은 궁중에 도화원을 두고 화원을 양성하여 초기에는 인물화와 산수화가 많이 그려졌으나, 후기에는 서민에 대한 의식이 커져 그들의 생활을 그린 풍속화도 나왔고, 19세기에는 서양화의 기 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안견, 정선,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 등이 있었다.
 
한편 음악은 세종 때 궁중 음악 인 아악이 정리되면서 민간 음악도 많이 발달되었는데, 말기에는 신재효판소리를 정리하여 창극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건축에서는 학교 건축이나 서원 건축을 중심으로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도 위엄을 갖추었으며, 주위 환경과의 조화를 중요시했다. 숭례문(서울 남대문), 법주사 팔상전화엄사 각황전 등의 건축물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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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