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1대 왕 영조가 당쟁을 없애기 위해 편 정책.
당쟁을 몸소 겪고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해를 막고, 양반 계급의 세력 균형을 위해 각 당파의 인재를 고루 뽑아 썼으며, 유생들에게 당론을 금했다. 이어
1742년(영조 18년)에는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워 유생들에게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 당파를 이루지 않는 군자의 도를 익히게 권하였다.
탕평이란 《서경(書經)》의 탕탕 평평(蕩蕩平平)이라는 데서 나온 말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탕평책의 실시로 당쟁의 폐해를 어느 정도 없앴으나, 사도 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시파와
벽파의 대립 이후 외척과 연결되면서 당쟁은 다시 세도 정치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