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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윤선거(尹宣擧)
윤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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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거 (尹宣擧)
[1610 ∼ 1669]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 시인, 정치인이다.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김장생,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윤선거 (尹宣擧) 기호 학파 남인 노론 문묘 서인 성리학 소론 예송 논쟁 예학 정묘호란 금산군 1686년 1636년 김장생 김집 송시열 윤증 윤휴 권상하 김석주 김자점 봉림 대군 소현 세자 송익필 송준길 윤선도 이원익 이이 이황 임경업 정제두 정호 최명길 허목 효종 민유중 허적 박세채 이홍유 임의백 이담명 산천재서원 백호독서기 산성 일기 송자대전 병자호란 경신환국 갑술환국 조선 효종의 북벌 계획 남한 산성 화양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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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충남 예학의 으뜸, 논산 돈암서원(論山 遯巖書院)
【여행】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었으며, 사계 김장생(金長生,1548~1631)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1574~1656)의 문하에서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1672),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비롯하여 이유태, 유계, 윤원거, 윤문거, 윤선거 등 수많은 명유(名儒)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의 사림과 예학의 산실이자 본거지로서 17세기 동안 충청도 서인계의 으뜸 서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았다.
 
◈ 등록순
2020.01.31
충남 예학의 으뜸, 논산 돈암서원(論山 遯巖書院)
【여행】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었으며, 사계 김장생(金長生,1548~1631)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1574~1656)의 문하에서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1672),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비롯하여 이유태, 유계, 윤원거, 윤문거, 윤선거 등 수많은 명유(名儒)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의 사림과 예학의 산실이자 본거지로서 17세기 동안 충청도 서인계의 으뜸 서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았다.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서인 (5) 백과 윤증 (5) 백과 소론 (4) 백과 송시열 (4) 백과 윤선도 (4) 백과 권상하 (3) 백과 김장생 (3) 백과 김집 (3) 백과 노론 (3) 백과 민유중 (3) 백과 민정중 (3) 윤휴 (3) 백과 이단하 (3) 이여 (3) 정호 (3) 백과 경신환국 (2) 백과 송이창 (2) 신임사화 (2) 백과 예송 논쟁 (2) 백과 유계 (2) 백과 효종 (2) 백과
▣ 백과사전
[1610 ∼ 1669]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 시인, 정치인이다.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김장생,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신독재 김집의 제자이며, 인조 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당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자살하였고 그는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하여 살았다.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錦山)으로 내려가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스승 사후에도 출사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학문에 정진하였다.
 
절친한 송시열(宋時烈)윤휴(尹鑴)가 학문적 문제로 대립하자, 중립을 취하여 오히려 오해를 산다. 그 뒤 예송 논쟁 직후에도 양자의 의견을 조정하려다가 송시열에게 윤휴와 결별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송시열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사돈이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혼자 피신한 것과, 예송 논쟁 당시 그가 윤휴의 의견을 두둔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죽은 후 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아들 윤증의 현달로 증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나 1715년 유계(兪棨)와 함께 펴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놓고, 노소론이 싸움을 벌여 아들 윤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당했다가 1722년(경종 2) 복관되었다.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에 산천재서원이 건립되어 배향되었다.
 
이후 산천재서원은 영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1741년(영조 17년)에 훼철되었다.
 
저서로 <노서유고>, <노서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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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정보
백과 참조
자 : 윤증
 
스승 : 김장생, 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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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