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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익모 (韓翼謩) (ENCY040686)
요 약 : [1703(숙종 29)∼1781(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자는 경보(敬甫), 호는 정견(靜見)이다. 성우(聖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배의(配義)이고, 아버지는 진사 사범(師范)이며, 어머니는 유명흥(兪命興)의 딸이다. 형은 대사헌 현모(顯謩)이다.
분 류 :
인물 : [926 자]
     

[1703(숙종 29)∼1781(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자는 경보(敬甫), 호는 정견(靜見)이다. 성우(聖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배의(配義)이고, 아버지는 진사 사범(師范)이며, 어머니는 유명흥(兪命興)의 딸이다. 형은 대사헌 현모(顯謩)이다.
 
1731년(영조 7) 용강현령(龍岡縣令)을 지내고, 17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수찬·이조정랑·승지·광주부윤(廣州府尹)·대사간 등의 관직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1762년 판의금부사로 나경언(羅景彦)의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고변이 있자, 이를 사주한 배후를 철저히 가릴 것을 적극 주청하였다. 이어 대제학으로서 사도세자가 죽은 경위를 밝히는 교서의 작성을 끝내 거절하여 삭탈관작 되었다. 그러나 그 뒤 그 기개가 높이 평가되어 1766년 좌의정에 제수되어, 백두산의 망사(望祀)를 설행하게 되면서 갑산의 망덕산(望德山)에 제각을 세우게 하였고 1772년 영의정이 되었다. 얼마 뒤 정조가 즉위하여 사도세자의 처벌을 주장한 홍인한(洪麟漢) 등을 국문할 때, 불참한 죄로 삭직되고 이어 풍천에 유배되었다가 연안으로 이배되었다. 이듬해 귀양이 풀렸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묘표는 외손 심이지(沈頤之)가 찬하고, 아들 태유(泰裕)가 썼는데, 주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한익모의 충의와 의리를 조목하여 서술하고 있다. 월암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오면 대촌마을에 묘소가 보인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 『정조실록』, 『순조실록』,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韓國人名大辭典』, 『韓翼墓碑銘』, 『의왕의 전통과 문화』(의왕시, 1991), 『의왕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의왕시·세종대학교박물관, 20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의왕문화원 > 의왕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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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익모 (韓翼謩)
최종수정일 :   2015-11-19 작성자 :   XPI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