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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신유한(申維翰)
신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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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申維翰)
[1681 ~ 1752] 밀성(密城) 죽원리(竹院里)에서 출생.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 가야초수(靑泉, 伽倻樵叟)이다. 1719년 제술관으로 일본을 일본을 다녀와서 지은 『해유록(海遊錄)』은 기행문의 백미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 지식지도
◈ 요약정보
신유한 (申維翰) [1681 ~ 1752] 밀성(密城) 죽원리(竹院里)에서 출생.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 가야초수(靑泉, 伽倻樵叟)이다. 1705년(숙종 31) 진사시에, 그리고 1713년 증광시에 합격 평해군수로 재직할 당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맞아 반란군이 평해의 진영으로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평해와 울진 두 군의 병마를 거느리고 경계를 지킴 1719년 제술관으로 일본을 가게 된 때부터였다. 일본에 갔을 당시 사람들이 그로부터 시를 얻기 위해 길을 메우고 대문을 막을 정도였다 일본을 다녀와서 지은 『해유록(海遊錄)』은 기행문의 백미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 지식지도
신유한 (申維翰) 남인 노론 소론 1736년 1719년 1728년 조선 경종 영조 윤휴 이인좌 이준경 해유록 이인좌의 난 신임사화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해유록 海游錄 고전 수필 신유한 (395)
▣ 백과사전
[1681 ~ 1752] 밀성(密城) 죽원리(竹院里)에서 출생.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 가야초수(靑泉, 伽倻樵叟)이다.
 
신유한은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리고 대여섯 즈음에 남들을 따라 마을의 선생에게 공부를 배울 때 여느 아이들과 다르게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을 배우고자 했다. 그러자 선생이 「이소경」은 그 뜻이 깊고 말이 모호해서 어른들도 잘 이해할 수 없으니 아이가 어찌 배우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신유한은 배우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비록 뜻을 명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혀가 있지 않습니까? 그 소리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선생은 그의 말이 기특하여 수시로 「이소경」의 글귀를 읽어주었다. 그렇게 얻어들은 글귀가 십여 일이 지나 한 편이 완성되면, 너무 기뻐 앉을 때나 놀 때나 입이 붙을 사이도 없이 외우고 또 외웠다. 그리고 어린 손으로 그리듯 글씨를 써서 책을 만들어 소매 속에 품고 다니며 너무 자주 꺼내보아 종이가 닳아 수십 번을 다시 써야만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신유한은 어릴 적부터 시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단지 시문만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선비들이 읽어야 할 유학(儒學)의 경전들과 함께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그 결과 1705년(숙종 31) 진사시에, 그리고 1713년 증광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벼슬길에 나간 신유한은 그가 가진 재주만큼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주로 지방을 전전하며 대부분의 관리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흉년이나 재해로 인해 이재민이 생기면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특히 평해군수로 재직할 당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맞아 반란군이 평해의 진영으로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평해와 울진 두 군의 병마를 거느리고 순국의 각오로 경계를 굳건히 지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용감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유한이 어릴 적부터 보인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꽃피우고, 그것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1719년 제술관으로 일본을 가게 된 때부터였다. 일본에 갔을 당시 사람들이 그로부터 시를 얻기 위해 길을 메우고 대문을 막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써준 시가 6,000여 수에 이른다고 하니 그 재주가 얼마나 놀라운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가 일본을 다녀와서 지은 『해유록(海遊錄)』은 기행문의 백미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신유한은 일본에 다녀온 후 재주와 이름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의 벼슬은 그다지 오르지 않고 여전히 지방을 전전하며 관리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시 가운데 관직이 낮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불만을 토로한 작품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736년(영조 12) 봉상시판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신유한은 가야산 기슭에 은거하며 자신의 호를 ‘청천’(靑泉)에서 ‘가야초수’(伽倻樵叟)로 바꾸었다. 이렇게 가야산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그가 흠모하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말년을 보낸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꿈속에서라도 고운을 만나고 싶어 할 정도로 사모했다. 가야산 기슭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한 신유한은 많은 작품을 지어냈다. 그리고 이때 지은 시가 질적으로도 우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외롭고 쓸쓸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들에 버려진 늙은이로 초목이나 깨어진 기왓장과 같네.”라고 친구에게 하소연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가야산 기슭 고화동(高花洞) 경운재(景雲齋)에서 1572년(영조 28)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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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