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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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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李麟佐亂)
조선 영조(英祖) 4년(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반란이다. 난이 일어난 영조 4년이 간지로는 무신년이었기에 무신난(戊申亂)이라고도 하고, 난의 주요 지역이었던 경상도(영남)의 이름을 따서 영남란(嶺南亂)이라고도 한다.
▣ 지식지도
◈ 요약정보
이인좌의 난 (李麟佐亂) 조선 영조(英祖) 4년(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반란 신임사화 이후 실각당하였던 노론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앞서 노론 4대신을 무고한 바 있는 소론파 김일경·목호룡이 죽음을 당하자, 1727년(영조 3년) 음력 7월 1일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음력 3월에 이인좌·김영해·정희량·박필현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 지식지도
이인좌의 난 (李麟佐亂) 남인 노론 소론 균역법 북인 사색 당파 서인 예송 논쟁 탕평책 1728년 1721년 1722년 1724년 1690년 조선 경종 영조 윤휴 이인좌 이준경 고려 경종 기대승 김상철 김안로 김일경 김재로 김치인 단의 왕후 송시열 조선 숙종 류성룡 유형원 윤선도 윤증 이덕형 이원익 이이 이이명 이익 이황 장헌 세자 희빈 장씨 정경세 정성 왕후 정약용 조선 정조 정철 정호 조광조 조식 조지겸 최규서 허목 홍봉한 이광좌 윤선거 김상로 한익모 김창집 이연경 정탁 허적 유척기 목호룡 한태동 조태채 선의왕후 이담명 경종실록 동국문헌비고 백호독서기 속대전 영조 어진 신임사화 기묘사화 을묘왜변 경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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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 (13) 백과 노론 (11) 백과 신임사화 (7) 백과 1728년 (5) 백과 영조 (5) 백과 1721년 (4) 백과 1722년 (4) 백과 이인좌 (4) 백과 1724년 (3) 백과 나주 괘서 사건 (3) 백과 정미환국 (3) 백과 천의소감 (3) 백과 해유록 (3) 백과 1719년 (2) 백과 1727년 (2) 백과 1755년 (2) 백과 김일경 (2) 백과 김창집 (2) 백과 목호룡 (2) 백과 민유중 (2) 백과 민진후 (2) 백과 이건명 (2) 이광좌 (2) 백과 이이명 (2) 백과 인현 왕후 (2) 백과 장헌 세자 (2) 백과 조선 경종 (2) 백과 조태채 (2) 백과 탕평책 (2) 백과
▣ 백과사전
조선 영조(英祖) 4년(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반란이다. 난이 일어난 영조 4년이 간지로는 무신년이었기에 무신난(戊申亂)이라고도 하고, 난의 주요 지역이었던 경상도(영남)의 이름을 따서 영남란(嶺南亂)이라고도 한다.
 

배경

신임사화 이후 실각당하였던 노론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앞서 노론 4대신을 무고한 바 있는 소론파 김일경·목호룡이 죽음을 당하자, 그 당의 나머지는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1727년(영조 3년) 음력 7월 1일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음력 3월에 이인좌·김영해·정희량·박필현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먼저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해 병사(兵使)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칭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격문의 요지는 경종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흉악한 무리(즉 영조와 노론 세력)에 의한 독살이고, 연잉군(영조)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군사들은 경종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상복과 같은 흰옷을 입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 · 총융사 김중기 · 금군별장(禁軍別將) 남태징 등과 통모(通謀)하여 내외상응(內外相應)하려 하였으나, 용인(龍仁)에 퇴거하고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가 이를 조정에 고변해 반군의 계획은 무너지고, 새로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비록 단시일의 내란이긴 하였으나, 청주성을 중심으로 진천(鎭川)·죽산(竹山)·안성(安城) 등지는 그 형세가 몹시 위태로웠으며,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의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押送)되어 처형되었고, 밀풍군 탄도 사사된다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6일 천하로 끝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지역을 조선 후기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거병지는 청주였지만 남인들의 고장 영남에서 모의자와 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안동 등 일부 지역의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거사에 심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이인좌는 선조 때 붕당을 예견했던 명재상 이준경의 후손이자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여서 영남 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난이 평정된 후 영조는 대구부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박았다.
 

영향

소론(완론)이 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긴 했다. 그러나 이 난의 주동자의 대부분도 소론 강경파(준론)이기에,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지역차별은 정쟁대립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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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