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었으며, 사계 김장생(金長生,1548~1631)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1574~1656)의 문하에서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1672),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비롯하여 이유태, 유계, 윤원거, 윤문거, 윤선거 등 수많은 명유(名儒)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의 사림과 예학의 산실이자 본거지로서 17세기 동안 충청도 서인계의 으뜸 서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았다.
【여행】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었으며, 사계 김장생(金長生,1548~1631)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1574~1656)의 문하에서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1672),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비롯하여 이유태, 유계, 윤원거, 윤문거, 윤선거 등 수많은 명유(名儒)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의 사림과 예학의 산실이자 본거지로서 17세기 동안 충청도 서인계의 으뜸 서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았다.
[1607 ~ 1664]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무중, 호는 시남,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과 화의를 주장하여 유배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다시 등용되어 부교리가 되었고, 장례 절차를 예론에 따라 시행토록 조선 효종에게 건의하여 그대로 실시하였다. 그는 특히 예론에 대해서 매우 뛰어난 학자였다. 1715년 숙종 때 그가 지은 《가례원류》로 인해 노론·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