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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지식창고】 2017.12.11. 12:05 (2017.12.11. 12:05)

탑골공원의 함성 (2016. 6. 2)

 
서울 종로 3가에 있는 탑골공원(사적 제354호)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탑골공원 노인문제나 3,1절을 맞이할 때 언론에 부각되는 곳이지요. 그러나 약 1세기전의 탑골공원은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독립만세운동의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오늘은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3.1 독립선언서와 3.1운동 그리고 3.1 운동 기념부조에 대하여 포스팅합니다.
▶3.1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①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1,762자로 된 독립선언서에는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②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합된 뒤, 국내외에서 비밀리에 전개되고 있었던 항일 구국운동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W)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할 기회가 왔다라고 생각하여 이를 추구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났다.
③ 1918년말부터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인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을 주장한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 등의 천도교 측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으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국권반환 요구서 등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불교·유림(儒林) 등 각 종교 단체를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 인사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우기로 하였다.
④ 1919년 3·1운동 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1918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이 모여 작성한 〈2.8독립선언서〉가 있다. 특히 2.8독립선언서는 춘원 이광수가 작성하였고 3.1운동에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2.8독립선언서 작성한 춘원 이광수(1892~1950)와 3.1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1890~1957) 모두 일제 강점기 말에 일제 협력자인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⑤ 고종이 일제의 독살로 승하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자, 항일 감정이 절정에 다다르게 되면서 천도교 측은 기독교 측의 이승훈(李昇薰), 불교 측의 한용운(韓龍雲,1879~1944))과 합심하기로 하였지만 유림 측 참가를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⑥ 이때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을 두고 천도교의 최린은 “청원서나 건의서를 내는 것은 일본 정부에게 독립을 시켜달라고 청원한다든지 건의해보는 것이므로 민족 자결의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국내적으로 전민족을 분기시키고, 국외적으로 전세계에 향하여 독립해야 하는 이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는 중대한 선언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되었다.
⑦ 독립선언서의 작성자 최남선은 독립운동가로서 전국에 이미 알려졌고, 서구적 교양과 재래의 학문을 모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뛰어난 사람이므로, 최린은 “전민족의 의사를 표시할 독립선언서와 같은 중대한 글을 지을 사람은 그 밖에 없다”고 하였다. 최남선 자기 자신이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라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선언서는 작성하겠다.”고 함으로써 선언서의 작성 문제는 일단 그에게로 낙착되었다.
⑧ 뒷날 한용운이 독립운동에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으나, 이미 선언서의 초안이 완성되어 손질이 끝난 뒤였다. 지금 전하는 독립선언서 끝에 있는 공약 3장(公約三章)은 후에 한용운이 추가한 것이다.
⑨ 이렇게 하여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인, 기독교측 16인, 불교측 2인 등 33인이 민족 대표로 서명하였다고 하는데 서명 날인 된것을 아직 보질 못했다. 독립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吳世昌)을 통해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인쇄소 사장 이종일(李鍾一)에게 전달되었다.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金弘奎)와 함께 21,000매를 인쇄하여 경운동(慶雲洞) 자기 집으로 운반하였다. 선언서는 28일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배포되면서 거족적인 3·1운동의 전개에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 3.1운동 기념비
 
▼ 독립선언서
 
▼ 육당 최남선과 만해 한용운이 쓴 독립선언서와 공약 3장 -독립기념관 자료-
 
吾等(오등)은 慈(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 좌측 동상
 
▼ 우측 동상
 

 
▶ 3.1 운동
 
☞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사건이다.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각 민족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였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 2.8 독립 선언서의 영향으로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일방적으로 인사동 태화관(요리집)으로 장소를 변경하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후 축배를 들고 종로경찰서에 스스로 연락하여 잡혀갔다. 탑골 공원에서는 정재용 전도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 운동은 전국과 해외로 확산되었으나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하였다.
 
☞ 민족대표 33인 명단 (대표 선정 기준과 대표들이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손병희(孫秉熙)·길선주(吉善宙)·이필주(李弼柱)·백용성(白龍城)·김완규(金完圭)·김병조(金秉祚)·김창준(金昌俊)·권동진(權東鎭)·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나인협(羅仁協)·양전백(梁甸白)·양한묵(梁漢默)·유여대(劉如大)·이갑성(李甲成)·이명룡(李明龍)·이승훈(李昇薰)·이종훈(李鍾勳)·이종일(李鍾一)·임예환(林禮煥)·박준승(朴準承)·박희도(朴熙道)·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신석구(申錫九)·오세창(吳世昌)·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최성모(崔聖模)·최린(崔麟)·한용운(韓龍雲)·홍병기(洪秉箕)·홍기조(洪基兆)
 
▼ 33인중 29명이 모인 태화관
 
 
▼ 탑골공원 팔각정
 
☞ 3ㆍ1운동의 전개 과정은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ㆍ진남포ㆍ안주ㆍ의주ㆍ선천ㆍ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2단계(도시확산기)에 운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농촌확산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하였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총독부의 기록에 의하면 3월 1일에서 5월 말까지 시위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7,979명, 부상자가 15,961명, 검거자가 46,948명 정도였다.
 
☞ 3.1 운동이 대내외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1910년대 일본 식민 정책인 무단 정치가 문화 정치로 바뀌었다. 그리고 독립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인식하여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무장 항일 운동의 필요성으로 만주에서 1920년대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 3.1운동 기념 부조(浮彫)
 
▼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 처음 만나는 3.1정신 찬양비 -월탄 박종화-
 
▼ 탑골공원에 모인 수천명 앞에서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팔각정 밑의 정재용
 
▼ 3월 2일 함경도 함흥의 만세다리에서 외치다.
 
▼ 3월 1일 평양 장댓재에서 만세를 부르다.
 
▼ 3월 10일 황해도 해주에서 여자 머리채를 말꼬리에 잡아매 끌고가다.
 
▼ 3월 10일 강원도 철원에서 총,칼에 굴하지 않았다.
 
▼ 4월 15일 수원 화성 제암리 학살 묘사
 
▼ 3월 1일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
 
▼ 3월 23일 진주에서 논개의 후신이라며 칼에 맞선 수백명의 기생
 
▼ 4월 3일 남원에서 남편이 살해당하자 아내와 모친은 자결
 
▼4월 23일 제주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 1967년 세운 탑골공원 사적비 -노산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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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골공원 찾아가기 : 연중무휴, 09시~18시 개방
서울 종로구 종로1.2.3.4가동
 
출처: 만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위키백과 , 서울시, 문화재청, 독립기념관,유튜브
• 활동 지역 : 강서구(江西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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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