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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지식창고】 2017.12.26. 23:43 (2017.12.26. 23:43)

왕(족) 유배지 강화 교동(喬桐) 섬 (2017. 9. 25)

 
교동 섬은 강화도 본섬과 연결된 최북단 섬으로 조선시대 왕(족)들의 수난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은 이곳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였으며, 많은 왕족이 유배 왔거나 죽었는데, 교동 섬으로 유배 보낸 것은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고 육지보다 접촉하는 사람들을 파악, 관리가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동 섬은 강화도 본섬과 연결된 최북단 섬으로 조선시대 왕(족)들의 수난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은 이곳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였으며, 많은 왕족이 유배 왔거나 죽었는데, 교동 섬으로 유배 보낸 것은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고 육지보다 접촉하는 사람들을 파악, 관리가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곳에 유배되어 온 왕과 왕족 리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희종(고려 21대 왕으로 최충헌에 의해 쫓겨남)
안평대군(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 : 유배후 사사
③ 폐위된 연산군(1476∼1506, 조선의 제10대 왕, 묘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 유배후 병사
임해군(선조의 첫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형님) :유배후 살해
능창대군(인조의 동생) : 유배후 살해
숭선군(인조의 다섯째 아들)
익평군(철종의 사촌)
이준용(흥선대원군의 손자)
 
흔히 왕과 실세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산 사람들이 유배를 당하는데, 될 수 있으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어서 다른 음모를 꾸밀 수 없도록 만들지요. 그래서 함경도나 평안도의 오지로 보내거나 전라도의 오지나 먼 섬, 제주도가 유배지로 정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폐위가 된 왕들과 왕자들은 도성에서 가까운 강화도나 교동도로 유배를 보냈는데 이들은 자칫하면 다시 역모를 꾀할 수도 있는 요주의 인물들이라 특별 관리의 필요성에 의해 가까운 거리의 섬을 유배지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한양에서 가까우니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는데 죄목이 역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화도가 가시적인 거리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멀게만 느껴졌을 것인데 그것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유배의 길이었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연산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임해군과 능창대군 등이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쳤고 모두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권력 앞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 교동 연산군 유배지 (복원)
 
▶ 연산군
조선조 제10대 왕이며,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해에 어머니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는데, 곧 20세가 되므로 섭정을 받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초기 4년은 그런대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무오년과 갑자년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으로 강등된 그는 강화도의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재위 기간은 12년이었으며,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강화도로 유배를 오는 그들에게는 굴욕과 죽음만이 남아 있었으며 언제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는, 파리 목숨과 매한가지였을 그들에게 내일의 기약은 없었으니 그들은 회한과 두려움으로 도성을 떠나 강화까지 끌려왔을 것입니다.
 
▼ 교동 대교 개통(2014년) 전의 월선포(교동 선착장) 항구
 
▼ 월선포 풍경(2017. 9월)
 
 
▼ 교동도를 가려면 교동 대교 전에 있는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신분증 지참 필수)
 
▼ 이제는 교동 대교가 뱃길을 대신해 주고 있다.
 
 
▼ 연산군 유배지 찾아가기
연산군유배지 (인천 강화군 교동면)
 
▶교동도의 연혁
고구려 때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교동이라 불려 혈구현(穴口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교동이라 일컬었으며, 고려 명종 때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395년(태조 4)에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으며, 그 뒤 이를 고쳐 현감이라 일컬었다.
 
1629년(인조 7) 화량진(花梁鎭)으로부터 수영(水營)을 교동 원권진(현 읍내리)으로 이전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의 주사(舟師)를 통괄하게 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이르러 교동부사를 격을 낮추어 현감으로 하였다가, 1779년에 통어사가 강화로 이속되면서 교동현감은 다시 부사 겸 방어사로 승격되었다.
 
1789년에 통어영(統禦營)이 다시 교동으로 옮겨왔다.
 
1866년(고종 3) 통어사가 다시 강화로 이속되면서 부사 겸 방어사로 하였다가, 같은 해 8월 또다시 통어사를 두었다.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어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내려갔다.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읍을 폐하여 강화에 이속하였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강화군에 속하게 되면서, 개화·수정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1995년 강화군강화군 전체가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출처: 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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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