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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지식창고】 2018.04.05. 00:35 (2018.04.05. 00:31)

신륵사 알아보기 (다층전탑과 古木) (2017. 12. 14.)

 
고려말 三隱(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중 이색은 신륵사에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대장경(大藏經)을 대장각에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를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층전탑, 대장각기비, 봉미산 소나무 길에 대하여 올립니다.
경기도 여주 남한강의 신륵사(벽사:甓寺)를 다녀와 포스팅하고 있습니다. 흙으로 구운 벽돌로 탑을 만든 다층 전탑(多層塼塔)에 대해 조선의 서거정과 정약용은 멋진 풍경을 글로, 정조 때 화가 정수영은 그림을 남겨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말 三隱(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중 이색은 신륵사에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대장경(大藏經)을 대장각에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를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층전탑, 대장각기비, 봉미산 소나무 길에 대하여 올립니다.
 
▼ 신륵사 배치
 
▼ 다층전탑(多層塼塔)
① 보물 제226호
② 여강(남한강)이 보이는 커다란 바위(동대:東臺)위에 건립한 벽돌탑으로 높이 9.4m
③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벽돌탑)으로 신륵사를 벽절, 벽사(甓寺)라고도 합니다.
④ 화강암 기단과 계단위에 벽돌로 쌓은 탑으로 몇층인지 잘 모를 때 다층이라고 하네요.
 
▼ 1796년, 지우제 정수영(鄭遂榮. 1743~183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륵사의 다층전탑과 3층 석탑과 사찰이 보이지만 강월헌(江月軒) 정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여주 팔영(驪州八詠)"
 
긴 강물은 흰 비단 폭을 쏟는 듯하고 / 長江瀉疋練
한 오솔길은 강가를 따라서 났는데 / 一徑緣江湍
내가 예전에 벽사(신륵사)를 찾아가 보니 / 我昔訪甓寺
지경이 깨끗해 속세 같지 않았네 / 界淨非人間
보제(나옹화상)의 영정 앞에 향을 사르는데 / 燒香普濟眞
오랜 세월에 구름은 장 한가롭구나 / 歲月雲長閑
 
 
▼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밤에 신륵사 앞에다 배를 대고 동대에 오르다(夜泊神勒寺登東臺)"
 
밤에 홀로 동대 탑(다층전탑)에 올라 / 獨夜東臺塔
오사모 쓰고 멀리 보며 섰노라니 / 烏紗立逈然
무심한 소나무에 속삭이듯 바람 불고 / 松虛風淅淅
강이 고요하여 달빛 유난히 밝네 / 江靜月娟娟
남은 길 무슨 별수 있다던가 / 末路無長策
뜬인생 이미 늘그막인 것을 / 浮生已晩年
조각배를 여기다 댄 것이 / 扁舟有歇泊
구름 연기 좋아서가 아니라네 / 不是愛雲煙
 
 
 
▼ 신륵사, 현석 이호신(1957~ ), 1995년
 
▼ 설경
 
▼ 흐린 날이라 사진을 보정합니다.
 
소원 성취를 위하여 탑돌이 하시는 분이 보였다.무엇을 이루어 달라고 비는 것일까?
 
▼ 전탑 안내판
 
▼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① 보물 제230호
② 높이 1.33m, 폭 0.88m
③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대장경을 만들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것을 기록
④ 1383년 대리석에 이숭인(李崇仁) 글과 권주의 글씨
⑤ 목은 이색은 동향 선배인 나옹화상의 신륵사 부도비 글을 지었고, 고려 신하로 조선개국에 협조하지 않았으며 신륵사(여강)에서 죽음.
 
 
 
 
☞ 대장각에 소장중이던 대장경은 1414년(태종14) 배불(排佛)정책으로 일본으로 보냄.
 
☞ 신륵사 보제존자(나옹) 부도 비문도 이색을 썼으며, 나옹화상(1320~1376)과 이색(1328~1396)은 영해(寧海.지금 영덕) 출신
 
▼ 여주 봉미산 신륵사 구룡루(九龍樓) 중수비(重修碑)가 어떤 연유로 대장각기비 앞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구룡루 옆에 있어야 하는데 아쉽다.
 
 
▼ 봉미산(鳳尾山) 소나무 길
신륵사 위치가 봉미산(봉황의 꼬리)이라면 오대산 정기가 여기까지 왔다는 말을 들었다.
 
쉬는 의자​
 
▼ 조사당 앞에 무학대사가 스승인 나옹화상의 향기로운 삶을 그리며 심었다는 600년 된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 나옹화상의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는 은행나무가 큼직하다.
 
▼신륵사 연혁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
1376년(우왕2) 중창, 나옹화상 입적
​1379년(우왕5) 보제존자 석종비 건립
1382년(우왕8) 대장각 건립하여 대장경 보관
1414년(태종14) 배불정책으로 소장중이던 대장경 일본으로 보냄
1440년(세종22) 중수
1469년(예종1) 세종의 영릉을 대모산에서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지정
1472년(성종3) 건물 200칸 규모로 중창불사
1473년(성종4) 보은사(報恩寺)로 개칭
1592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페허.
1671년(헌종12) 중건
1678년, 1689년, 1700년(숙종26), 1702년 중수
1726년, 1749년 중수
1773년(영조49) 범종주조​
1796년(정조20) 중수
1800년(정조24)​ 극락보전 중수
1858년(철종9)​ 중수
1860년(철종11) 중수
1900년(고종37), 1908년(순종2) 탱화 봉안
 

 
신륵사 찾아가기
경기도 여주시 오학동
 
여주(신륵사,여강)와 부여(고란사,백마강)를 비교해봅니다.
★ 부여 부소산 고란사와 백마강 탐방기 (클릭)
 
출처: 여주시,신륵사, 민족문화대백과, 한국고전종합DB,네이버, 구글, 문화유산채널,조선왕조실록,네이버지도,전통사찰보존회
• 활동 지역 : 강서구(江西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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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