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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지식창고】 2018.04.05. 23:17 (2018.04.05. 23:17)

세종대왕릉(英陵) (2017. 12. 24.)

 
세종대왕릉(英陵)은 공사중(2019.12월까지 무료입장)이라 효종대왕릉(寧陵) 입구에서 왕의 숲길를 따라 (왕복40분) 걸어 다녀오면 됩니다.
세종대왕릉(英陵)은 공사중(2019.12월까지 무료입장)이라 효종대왕릉(寧陵) 입구에서 왕의 숲길를 따라 (왕복40분) 걸어 다녀오면 됩니다. 조선왕릉중에서 봉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왕릉은 많지 않은데 여주의 영릉은 모두 갈 수 있어 좋으며 여주의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둘다 영릉이라고 한글로 표기되며 다른 곳에서 여주로 천장하였는데 세종대왕릉은 대모산에서, 효종대왕릉은 동구릉에서 옮겼습니다. 차이점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세종대왕릉)과 동원상하릉(효종대왕릉)이며 특히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릉은 곡장(曲墻)이 없습니다.
 
 
▼ 숙종, 영조, 정조가 걸은 숲 길
 
 
 
 
세종대왕릉은 봉분 앞까지 올라가 볼 수 있습니다. 봉분을 멀리서 봐야 하는 대부분의 왕릉과는 다르지요. 덕분에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을 가깝게 보고 참배할 수 있으며, 살아 생전에 많은 후궁을 들였지만 죽어서는 단 한 명의 왕비와 나란히 누워계신다. 능을 등지고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좋은데 살아서도 죽어서도 애민(愛民)정신이 아닐까?
 
 
 
▼ 경기도 광주(현재 서울 서초구) 대모산에서 여주로 천장한 영릉 전경
 
 
▼ 무석인
 
▼ 문석인
 
 
 
옛 사진
 
▼ 공사현장
 
대모산에서 천장하면서 묻었던 구 영릉 신도비는 1973년에 발굴하여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으며, 그 곳에 있는 구 영릉 석물의 진위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세종대왕 구 영릉 신도비 : 대리석
 
▼ 연지(蓮池, 공사중으로 방문 불가)
조선시대의 풍수지리사상은 음택(陰宅)풍수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는 왕릉의 연지(蓮池) 조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양택인 경우에 그 혈장(穴藏)이 넓어야 하고 음택인 경우에는 혈장이 꽉 짜이게 입구가 좁아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따라서 왕릉의 입구는 오므라진 산세를 하고 있는 곳이 많으며, 오므라들지 않은 곳은 기(氣)를 보충하기 위해 인공산[假山]을 조성하거나 숲과 연못[池塘]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비각내 표석(공사중으로 방문 불가)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부좌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은 홍무 30년인 정축년(태조6, 1397) 4월 10일에 탄생하였다. 영락 16년인 무술년(태종18, 1418)에 선위를 받고, 경태 원년인 경오년(세종32, 1450) 2월 17일에 승하하여 6월에 광주 헌릉 서쪽 능선에 장사지냈다가 성화 5년인 기축년(예종1, 1469) 3월 6일에 여주 서쪽 북성산 자좌(북쪽을 등진 방향)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재위가 32년이고 향년은 54세이며, 명나라에서 ‘장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 선인 제성 소헌왕후 심씨는 홍무 28년인 을해년(태조4, 1395) 9월에 탄생하였다. 영락 16년인 무술년(태종18, 1418)에 경빈으로 책봉되었다가 이윽고 공비로 봉작이 올랐으며, 선덕 7년인 임자년(세종14, 1432)에 왕비로 고쳐서 봉해졌다. 정통 11년인 병인년(세종28, 1446) 3월 24일에 승하하여 7월에 헌릉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예종1, 1469) 3월 6일에 세종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으로 이장하였으니, 향년은 52세이다.
 
숭정 기원후 118년인 을축년(영조21, 1745)에 세우다.
 

 
▣ 영릉 개요
☞ 1446년 왕후릉 , 1450년 왕릉 , 1469년 여주로 천릉
☞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 세종대왕릉이 여주로 천장(예종1)하면서 신륵사를 원찰로 지정하여 보은사로 개칭을 하였고. 성종때 신륵사를 200칸 규모 건물로 중창불사했습니다.
 
▼ 팜플릿
 
 
 
 
 
 
 
 
☎ 031-884-9286 대원고속 여주 영업소.
 
▼찾아가기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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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지식백과, 문화재청
• 활동 지역 : 강서구(江西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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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