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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 고재완의 지식창고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지식창고】 2018.07.02. 14:36 (2018.07.02. 14:20)

감악산 산신(山神)을 찾아

 
한국 100대 명산에 포함된 감악산(紺岳山, 紺嶽山. 675m)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積城面) 소재의 산이다. 흙산이 아닌 돌산이며 계곡을 타고 오르는 길은 태양을 피해 정상까지 갈 수 있다.
한국 100대 명산에 포함된 감악산(紺岳山, 紺嶽山. 675m)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積城面) 소재의 산이다. 흙산이 아닌 돌산이며 계곡을 타고 오르는 길은 태양을 피해 정상까지 갈 수 있다.
 
감악산 정상에는 감악산 비석이 있고, 정상과 감악정((紺岳亭)과 임꺽정봉에서 멋진 전망을 볼 수 있지요. 문헌에 따르면 감악산 정상에는 서울의 남산(목멱) 산신(山神)처럼 감악 산신을 모시는 신당(神堂, 神祀)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합니다.
 
검푸른 감악산은 신당(神堂), 신암사(神巖寺) 등의 사찰과 거란군이 쳐들어 오다 멈췄다는 전설이 있는 신령스런 산이었다. 조선 왕조 실록에 따르면 국가 제사를 지내는 명산(名山)에 포함 된 감악산은 감악 신당에서 감악산신께 제사를 지냈고(1422년. 세종3), 수많은 기우제(祈雨祭)와 기양제(祈禳祭. 재앙을 쫓고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 곳이다. 오늘은 감악산 출렁다리, 감악산 범륜사에 이어 감악산에 대해 알아보며 마무리합니다.
 
​▼ 감악산 정상 표지석과 감악산비
 
▼ 감악산 출렁다리
 
▼ 운계사터에 다시 지은 감악산 범륜사(梵輪寺)
 
▼ 감악산은 흙산이 아닌 돌산으로, 그날 119 대원이 다친 등산객 구조하는 모습을 보니 미끄러 넘어짐에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금낭화(金囊花. 여인들이 치마 속에 넣고 다니는 주머니를 닮았다 하여 지은 이름)
 
▼ 감악산(675m) 정상보다 높은 676m의 임꺽정봉 정상
 
임꺽정 봉을 매봉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매가 살았다거나 모양이 매와 같다 하여 붙여졌다. 임꺽정봉 밑의 동굴은 설인귀(613~683,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굴, 임꺽정(1504~1562, 명종때 도적)굴 또는 고려 말의 충신 남을진(南乙珍,1331~1393)이 은거한 남선굴(南仙窟)이라고도 전하는데 현재 임꺽정 봉 밑의 골짜기를 남선골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 감악정에서 본 풍경
 
▼ 감악산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1121]에 처음 등장한 이후 『고려사(高麗史)』[145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대부분의 지리서와 읍지(邑誌) 및 관찬(官撰) 문헌에 나온다. 아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로 감악산이라 표기됨.
 
▼ 감악산비(紺岳山碑. 높이 170cm, 두께 19cm, 너비 78cm) : 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로 하단부를 시멘트로 마감한 것이 보기 그렇다.
 
① 비스듬히 서 있어 ‘삣뚤대왕비’라고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빗돌대왕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설인귀(薛仁貴)를 기리기 위한 사적비라고 하며, 글자가 보이지 않으므로(12~13자는 파악) 몰자비(沒字碑)라고도 한다. 설인귀와 무슨 관계이고 왜 그렇게 부르는지?
 
②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3척(尺)[90.91㎝] 높이의 석단(石壇)이 있고, 오래된 비석과 설인귀 사당[설인귀사.薛仁貴祠]이 있다”고 하였고, 『적성현지(積城縣誌)』[1871]에서는“1년에 3차례 제사를 올리는데 향(香)·축(祝)·폐(幣)는 영문(營門. 관아)에서 받아온다”고 하였다.
 
③ 비(碑)가 감악산 정상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빗돌대왕비는 원래 양주시 남면 황방리 북쪽의 눌목리(訥木里)에 있었다. 근방의 농민들이 어느 날 같은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막무가내로 소를 빌려 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 꿈속에서 빌려 주겠다고 한 농민들의 소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거절한 농민의 소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그런데 평상시 산모퉁이에 있던 비석이 어느새 감악산 꼭대기로 옮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감악산 신령의 행동이라 여기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되었다고 한다.
 
▼ 헬기장이 감악산사(紺岳山祠) 또는 감악사(紺嶽祠)터로 추정됨
 
ⓐ 감악산 정상에는 감악사(紺嶽祠)라는 사당이 있었으며, 신라 시대 이후 감악산 사우(祠宇)가 있어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정기적으로 산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 1010년(고려 현종顯宗 2)에 거란군(契丹軍)이 장단악(長湍嶽)에 이르매 신사(神祠)에 정기(旌旗. 깃발)와 사마(士馬)가 있는 것 같아 거란군이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한 까닭에 사당을 수리(修理)하여 신사(神祠)에 보답하는 등 국가적인 제사와 민간 신앙의 숭배처로 자리 잡게 되었다.
 
ⓒ 1409년(태종 9) 기록에 감악산 신당(神堂)이란 단어가 보인다. 여기서의 사당은 감악사를 지칭하는 말로 짐작된다. 조선 초기 이 신당에는 위판(位版,위패)은 없고 단지 이상(泥像)[진흙으로 만든 상]이 6개 있었으나 나중에 감악산지신(紺嶽山之神)이라는 위판을 따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 1419년(세종2)내시 별감을 보내어 감악(紺嶽)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 1500년(연산군 6)에는 신당의 제청(祭廳)을 수리하는데 자그마치 140일이 걸렸다고 하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공사를 강행한 것으로 보아 그만큼 국가적인 차원에서 감악산 산신제를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 세종 때 기양제(祈禳祭.(재앙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제사)와 선조, 광해군, 숙종 때 감악산(紺岳山)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 조선 후기 정계 거물이자 당대 제일의 명필인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이 현장을 답사하고 남긴 글을 보면 그때도 비석엔 글자가 없었다.
 
" 1666년 9월29일…(송상사<宋上舍>)라는 분과 함께 감악산을 유람하니, 저녁엔 견불사(見佛寺)에서 밤을 새고 새벽에 깎아지른 벼랑 정상에 올라 신정(神井·우물 이름)에서 물을 마셨다. 그 위가 감악사(紺嶽祠)다. 돌로 쌓은 단이 세 길인데, 단 위에는 산비(山碑)가 있으니, 오래되어 글자가 없어졌다. 옆에는 설인귀(薛仁貴) 사당이 있는데 왕신사(王神祠)라고도 한다.
 
 
▼ 감악산 정상 부근의 항공 사진
 
▼ 임진강이 보이는 정자의 지붕 수리, 보수가 필요
 
▼ 정자에서 본 임진강 방향
 
▼ 까치봉
 
 
▶마무리하면서
전망이 좋은 산 정상은 대부분 군사적 요충지다. 검푸른 바위산인 감악산(정상에 군부대 주둔)도 마찬가지로 임진강과 개성 송악산 그리고 동두천 방향과 삼각산(북한산)이 다 보이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감악산(紺岳山)이 있는 적성면(積城面)은 쌓을 적積, 재성城에서 볼 수 있듯이 돌로 성을 쌓은 듯한 모습으로 삼국시대부터 6.25 전쟁까지 있었던 곳이다.
 
신라시대부터 감악산 정상에 산신을 모셨을 것이며, 봄과 가을에 산신에게 기양제나 기우제 등 국가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감악산 신암사(神巖寺)라는 이름처럼 신령스런 산으로 비록 산신(山神)은 못 만났지만 감악산의 정기를 받아 좋은 일이 많았으면 한다.
 
 
▶ 접근 정보
 
☞ 대중교통
ⓐ 1호선 양주역 → 25번 버스, 주말 25~35분 간격 배차, ☎031-845-5171, 범륜사 입구 하차. http://www.gbis.go.kr/로 조회
 
ⓑ 출렁다리 정류장에 하차하는 2층 버스 12회 운행(경의 중앙선 문산역 → 7700번 버스, 2500원/편도)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 향토대사전, 구글,네이버, 고려사 지리지,조선왕조실록,국토지리원
• 활동 지역 : 강서구(江西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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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