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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수의 세상이야기     【오문수의 지식창고】 2018.01.03. 16:26 (2018.01.03. 16:26)

내 삶을 뒤돌아보게 한 이환희 여사

 
한국 근현대사를 몸으로 체험한 이환희 여사... 약자와 소외된 자들의 어머니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창립 3주년 기념식장 연단에 선 이환희여사. 돌아가시기 4년전 촬영한 사진이다.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환희 여사 아들인 박상천 교수가 보내준 세 권의 책을 읽고 열흘 동안 가슴앓이를 했다. 잠자리 머리맡에 놓고 잠들기 전에 펼쳐보고 새벽에 일어나 또 다시 읽었다. 족욕을 하며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내 가슴을 짓누르는 생각. "나라면 저런 생각을 하며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를 고민에 빠뜨리게 했던 사건(?)은 20여일 전에 일어난 일 때문이다. 아내가 몸이 불편해 서울 모 병원에서 검진받기 위해 새벽 5시 KTX를 탔다. 배웅하고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머리맡에 있는 책꽂이를 살펴봤다. 그곳엔 못 보던 책 한 권이 있다. 자주 보던 책이면 키 높이에 있는데 책장 맨 밑 칸에 있었으니 보일 리가 없었다.
 
<한 줄의 편지> 저자 이환희. 이환희 여사? 오래전에 두어번 뵌 기억이 났다. 온화한 미소를 띤 이환희 여사. 그땐 그냥 훌륭한 분이라는 얘기만 들었다. 심심하니 읽어보기로 했다. 책머리 일부분이다.
 
▲ 이환희 여사의 수필집 <한 줄의 편지>로 한글본과 일어본이 동시에 수록되어 있다. 유려한 문체로 쓴 이환희 여사의 글이 미야자끼 일대에 출판되자 카다란 화제를 낳았다고 한다. ⓒ 오문수
 
"내가 일본 미야자끼의 계간지 <혼돈>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4년이었다. 그곳 일행들이 백제 유적 답사단을 구성하여 현지 심포지엄을 개최하기 위해 부여를 방문했을 때 '혼돈회'의 대표 야마시타 미치야씨를 만난 인연으로 <혼돈>지에 투고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사치레로 써 보냈던 것인데 <비>라는 작품이 혼돈상 가작으로 선정되었고 독자들이 독후감을 써주었기 때문에 계속 원고를 보내게 되어 <혼돈>과의 연이 깊어졌던 것이다"
 
그녀는 '혼돈회' 대표들과 교류하며 미야자끼 계간지 '혼돈'에 <1995년의 어떤 상념>, <창씨개명> 등 15편의 글을 실었다. 명문인 그녀의 글이 일본어로 실리자 미야자끼 일대에서는 일대 센세이션으로 받아들여졌다.
 
<1995년의 어떤 상념>은 학교에서 조선어사용을 전면금지 당하면서 겪었던 아픔과 경성여자사범학교 시절 겪었던 일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폐교 당한 일부 사립학교문제, 황국신민이라며 징용 당한 조선인과 위안부 문제 등을 자세히 기록한 글이다.
 
<창씨개명>은 그녀가 학창시절 개명을 강제 당했던 이야기로 그 중에는 끝까지 개명을 반대한 한 할아버지의 일화도 적혀있다. 60이 훨씬 넘어서 쓴 글이지만 유려하고 세심한 필치에 일본인들도 감동해 독후감을 보내왔다.
 
그녀가 다녔던 경성여자사범학교는 학년당 100명(2학급)이 정원으로 학급당 50명이 정원이었다. 50명 중 30명은 일본인이고 조선인은 20명이다. 전국의 수재들이 모였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말 말살 정책 속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요당하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일본어를 배웠다.
 
한국근현대사의 산 증인, 쓰라린 상처 치유 위해 대중 앞에 서다
 
▲ 돌산대교 앞에서 남편인 박영철씨와 기념촬영한 이환희 여사. 두분 모두 작고하셨다 ⓒ 박상천
 
▲ 돌산대교 준공탑 앞에서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한 이환희 여사(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돌산대교 준공기념탑에 있는 시는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박상천 교수의 작품이다. 박상천 교수의 작품을 기리기 위해 가족들이 기념촬영한 사진이다. ⓒ 박상천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여수에서 태어나 2001년 6월 29일 영면한 이환희 여사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일어난 변란을 몸으로 체험했다. 그녀가 겪은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는 다음과 같다.
 
▲일제강압통치 ▲8.15해방 ▲여순사건 ▲6.25전쟁 ▲ 4.19의거 ▲ 5.16쿠데타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격동기 시절 남보다 많이 배운 신여성인 그녀 친구들은 교수나 교육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향인 여수에 내려와 유치원과 초·중등학교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한 여성 단체 활동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필자는 그녀의 수필집 <한 줄의 편지>를 단숨에 읽었다. 정갈한 필치와 소외된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인류애가 꿈틀거리는 글들. 책장이 끝날 때까지 손을 놓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동안 여러분들이 보내준 수필집속에는 미사여구와 자기미화가 많았었지만 그녀의 진솔한 글이 가슴을 후볐기 때문이다.
 
 
▲ 이환희여사를 추모하기 위해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출판한 <눈물이 아름다운 사람>. 여수시민회관 광장에서 열린 이환희여사의 장례식은 여수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양심있는 지식인들도 참석해 가시는 길을 애통해 했다. ⓒ 박상천
 
<한 줄의 편지>는 9남매의 외아들인 남편이 임지로 떠날 때 한 번쯤 따라가고 싶었지만 시부모님들 때문에 말 한번 못하고 냉가슴을 앓으며 매주 남편을 그리워하며 보낸 편지에 대한 글이다. 평생 단 한번 답장을 보낸 남편 편지에는 "달 밝은 밤이면 나 역시 그러하오"라고 쓰여있었다. 요즘 같으면 당장 이혼감이다.
 
또 하나 필자를 사로잡은 <하얀 고무신에 어린 눈물>이 내 가슴을 후볐다. 여수 신월리(현 신월동)에는 폐결핵 환자 300여명이 사는 결핵환자촌이 있었다. 1964년 9월, 그녀는 뜻을 같이 하는 여성 15명과 함께 '작은 꽃'을 의미하는 '소화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소화회는 주변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모임이다. 그 해 12월 자활촌을 방문하고 다음해 6월 딸기를 사 설탕에 재운 뒤 자활촌 중환자실에 들어가 힘없이 누워있는 환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먹여주었다.
 
잠시 후 구석에 있는 한 사람이 그만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 사람 옆에 다가가 등을 쓰다듬으며 울음이 그치도록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울음을 터트렸던 사람이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 함경북도 성진이 고향인 김응관씨의 유고시집 <나는 벙어리>. 김응관씨는 여수 신월리 결핵환자촌에서 39세에 요절한 시인이다. 이환희 여사가 속한 '소화회' 회원들은 그를 치료하기 위해 매달 1천원을 모금해 송금했고, 건강이 회복되어 가던 중 요절했다. 김응관씨가 죽기전 시집을 내주겠다고 한 약속은 30년 만에 지켜졌다. 여수에서 책을 구하지 못해 이환희 여사의 아들인 박상천 교수(한양대학교)가 택배로 보내줬다. ⓒ 박상천
 
"저 고무신을 꼭 다시 한 번 신어 보겠다고 투병하고 있지만 오늘 같은 온정을 접하고 보니 인자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환희 여사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소원을 이루게 해줬으면 좋겠다며 방법을 고민했다. 몇 회원들과 매달 1천원씩 모금을 해 그 청년에게 송금해 호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얀 고무신의 주인공 김응관. 그는 북한땅 성진이 고향이고 선산 김씨 영춘씨의 장남이다. 가끔 시나 수필을 써서 월간지 등에 발표하기도 한 인텔리였다. 소화회원들의 온정으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내며 열심히 요양하던 1971년 8월 각혈을 하던 김응관씨가 39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김응관씨에게 시집을 출판해주겠다고 한 약속을 30년 만에 지켰다. 김씨가 남긴 유고집 <나는 벙어리> 속에는 "할말이 너무 많아 나는 벙어리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젊은 병사들이 죽어간 얘기며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그리는 내용이 절절히 들어있다. 유고시집 일부분이다.
 
▲ 김응관씨 모습. 북한땅 성진이 고향으로 결핵에 걸려 여수 신월리에 있던 결핵환자촌에서 요양하다가 39세로 요절했다. 이환희여사는 그의 생전에 시집인 <나는 벙어리>를 출판해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지 30년이 지나고서야 출판됐다. 여수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 이환희 여사의 아들인 박상천 교수(한양대학교)가 보내주셨다. ⓒ 박상천
 
"포성이 하늘을 찌르고 젊은 병사가 피를 토하고 죽어간 산과 들과 마을의, 그리고 고향의 이야길랑 더 더욱 말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하루빨리 남북통일이 되어 그의 부모나 형제들에게 그의 육필 유고를 보내 줄 수 있기를 기원하며 통일을 원했다. 이환희 여사는 돌아가시던 날까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계셨다. 당시 76세다. 그녀의 글을 읽고 오랫동안 교류했던 일본인 미오카즈코씨가 그녀를 회상하는 글을 보내왔다.
 
"내가 여순사건에 대해 전혀 무지였다는 것을 말하자, 이 선생은 사건의 처음부터 참극에 이르는 경위를 자신이 그때 겪은 상황을 말하며 이야기해주었다. 조선민족의 비원인 남북통일운동에 대해 시민이 무차별하게 총살되었던 폭행이 행해졌다는 것에 전율하였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 이 선생은 고령의 자신이 연구소 이사장직을 수락한 것은 사건으로 가족이 학살당한 사람들이 연좌제가 무서워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그 희생자 가족의 가슴 아픈 추억을 이해하는 작업에 산증인으로서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사상이 다름을 초월하여 희생자는 동등한 명예회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복해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선생의 역사에 대한 맑은 눈과 인간애의 한없는 애정을 느껴 가슴이 뜨거워졌다."
 
▲ 이환희 여사가 일본 미야자끼 계간지 <혼돈>에 일어로 쓴 <1995년의 어떤 상념>글을 읽고 일본독자들이 보내준 독후감(왼쪽)과 한글 번역본(왼쪽). 그녀의 글은 미야자끼 일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오문수
 
"여순사건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다음 시대를 짊어진 어린아이들에게 우리들이 건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하셨다는 그녀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환희 여사의 사람됨과 글이 얼마나 명문장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양심적인 일본인 가이치즈꼬씨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머니, 천국의 생활은 어떠신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시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고 계시는 것이겠지요.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지금까지의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힘들어 하고 있어요. 그만큼 어머니의 위대함과 자상함이 제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한 달여전 일이다. 10여년간 시민운동을 하며 대표를 맡았던 나에게 후배들 몇 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년에는 아무 직책도 없이 쉬지요? 우리 단체의 대표를 맡아주시지요"라는 간곡한 전화였다. 능력도 부족하거니와 건강회복과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사양했다. "흘러간 물로 수레바퀴를 돌리지 말라"며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후배들에게 미안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태어난 필자의 어린 시절, 이웃집에는 폐결핵 환자가 살고 있었다. 먹을 것과 약이 없어 거의 죽어가는 그분의 뒷모습은 옷만 걸친 유령 같았다. 소외받은 이들과 아픈이들을 위해 돌아가시는 날까지 최선을 다한 이환희 여사의 생을 보며 내 한 몸 편하자고 주위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작성】 오문수 oms114kr@daum.net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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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