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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수의 세상이야기     【오문수의 지식창고】 2018.06.29. 15:25 (2018.06.29. 15:25)

조선 5대 명산이었던 회문산, 왜 '죽음의 땅' 됐나

 
빨치산으로 유명한 회문산 자락 회문리 출신으로 살아남았던 조종래씨의 증언
▲ 회문산정상에 서있는 조종래(왼편. 84세)씨와 임실문화원 최성미(70세) 원장 모습. 지역의 숨어있는 역사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보석같은 분들로 두 분 모두 전직 면장출신이다 ⓒ 오문수
 
전라북도 임실과 순창, 정읍에 걸친 회문산은 자연경관 좋기로 소문난 곳이며 한국의 5대 명당으로 손꼽힌다. 회문산은 홍성문 대사가 지은 '회문산가'라는 노랫말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는 회문산 정상 24명당과 오선위기(五仙圍碁)에 묘소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갈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난 6일 회문산 정상으로 가는 길 주변에서도 수많은 무덤을 볼 수 있었다.
 
▲ 회문산굴 모습 ⓒ 오문수
 
▲ 조종래씨가 전북도당 빨치산사령부 모형도를 가리키고 있다 ⓒ 오문수
 
회문산은 정상인 장군봉을 중심으로 좌청룡에 해당하는 천마봉이 있다. 또 깃대봉의 동쪽 산줄기는 말이 하늘로 날아가는 형상의 천마 승공형이다. 우백호에 해당하는 돌곳봉과 시루봉의 남쪽 산줄기는 말이 안정천의 물을 먹는 형상의 갈마 음수형이다. 이 때문에 화문산은 조선시대 5대 명당 길지로 알려졌다. 전국의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구한말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 양윤숙 의병대장이 일본군과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였던 격전지이기도 하다. 6.25전쟁 당시에는 남부군 사령부가 있어 700여 명의 빨치산이 주둔했던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회문산 동쪽에 솟은 깃대봉의 이름엔 유례가 있다. 학문과 창의에 빛난 조평 선생에게 나라에서 1000 정보의 사패지를 하사하고 깃대를 꽂도록 했다. 그래서 '조평선생사패지'라는 깃대를 꽂았고, 이곳이 깃대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패지'는 고려와 조선시대 임금이 내려준 논밭이란 뜻이다.
 
 
빨치산 주둔시기 무수한 죽음을 목격했던 조종래씨
 
▲ 회문산 표지석과 석축으로 성벽을 쌓아올린 천혜의 요새지 노령문 모습 ⓒ 오문수
 
시간이 있다며 필자를 임실로 초대했던 임실문화원 최성미(70세) 원장이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해 줄 분이 있다"며 조종래(84세)씨와 동행했다. 그는 덕치면장을 지내다 퇴직한 지 19년째다.
 
"나이가 들어 회문산 정상까지는 못 올라갈 것 같다"고 한 조종래 면장을 모시고 일행이 차에서 내린 곳은 야영장이다. 봄기운을 벗어난 산에는 화려한 산야초와 짙은 녹음이 우거져 아늑하고 평안하다. 삼림욕이라도 하고 싶은 곳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안한 곳이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곳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다리가 아파 헬기장까지만 가겠다"고 하시던 조종래씨가 "언제 또다시 오겠는가. 어쩌면 이번이 회문산 마지막 산행이지 않을까?"라고 말하며 가다쉬다를 계속하며 정상까지 안내한다.
 
고마운 분들이다. 주변마을에도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살아계시지만 체계적으로 증언해줄 분이 거의 없다. 총탄자국이 있는 바위가 보인다. 바위가 치열했던 당시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두 번째 헬리포트를 거쳐 조금 올라가니 주변에 돌무더기가 많다. 과거 빨치산들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란다. 조종래씨가 바위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계속했다.
 
▲ 홍성문대사가 명당으로 여겼던 바위 중앙 움푹 패인부분에 흙을 채워만든 묘가 보인다. 지름 8미터쯤으로 아래에는 석축을 쌓아 흙이 쓸려가지 않도록 했다 ⓒ 오문수
 
"이곳이 홍성문대사가 '석산보토혐의말소'라고 하며 명당이라고 했던 바위입니다. 움푹 팬 바위 부분에 흙으로 보토해 석축을 쌓고 묘를 쓴 곳입니다. 이 지역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59대까지 정승이 안 떨어질 것이라고 불렀던 곳입니다."
 
나뭇가지를 헤치고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과연 지름 8m 정도의 바위 중간 움푹 팬 부분에 흙을 채워 묘를 썼다. 아랫부분은 토사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석축을 쌓았다. 조금 올라가니 등산로에 나체로 누워있는 형상의 여근목이 눈길을 끈다. 조종래씨의 증언이다.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미군기가 폭격한 후 산에 불을 질렀지만 이 소나무만 살아남았어요. 당시는 3미터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컸네요."
 
▲ 여근목. 조종래씨 증언에 의하면 미군기의 폭격 후 온산을 불태웠지만 이 소나무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 오문수
 
 
회문산 최고 볼거리 음문석굴
 
회문산의 최고 볼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음기가 가장 강하다는 음문석굴(陰門石窟)이다. 석굴 옆 암벽에는 천근월궁(天根月宮)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인체의 24마디와 12경락, 남녀의 생식기, 삼라만상을 표현했다고 한다. 글은 동초 김석곤씨가 1900년 초에 모악산 수왕사 옆에 있는 무량굴과 함께 새긴 것으로 알려졌다.
 
▲ 회문산 최고 볼거리 중 하나인 음문석굴 모습 ⓒ 오문수
 
정상인 장군봉(837m)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쪽으로 깃대봉, 서쪽으로 투구봉이 보인다. 산 너머 준령들이 보인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들이 겹쳐있다. 이곳이 70여 년 전 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빨치산들이 지배한 회문산 일대가 맞는가? 만감이 교차한다.
 
"오 선생 때문에 다시는 못 올라올 줄 알았던 회문산 정상에 올라왔다"며 말문을 연 조종래씨가 수많은 살육이 있었던 당시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종래씨 아버지는 집안이 면장 집안이라는 이유로 빨치산에 끌려가 교통호를 팠고 토벌군에 희생됐다.
 
 
낌새를 챈 아버지가 피신시켜 살았지만 아버지는 희생당해
 
빨치산들이 회문산에 전북도당사령부를 설치하고 독수리병단이 들어오자 중학교 입학을 앞둔 조종래(당시 15세)씨 친구들은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초등학교 교사였던 정종화씨가 독수리병단 정찰참모 직책을 맡아 동네를 방문해 동네사람들에게 인사한 후 학생들에게 절골로 찾아오라고 했다. 회문리에서 1㎞쯤 떨어진 절골에는 10여 호가 살고 있었다.
 
▲ 회문리 절골에 서있는 조종래씨 모습. 당시에는 빨치산 전북도당사령부가 있었고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가득했었다고 한다 ⓒ 오문수
 
"동네 사는 7명의 친구와 절골로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우리를 앉혀놓고 공산당 세뇌교육을 시킨 후 우리들이 할 일을 제시해줬어요. '연 날리다 연이 떨어진 척하거나 팽이치기하는 척하면서 군인들 수와 주둔지 위치 등 동태파악을 해서 보고하라고 시켰어요.
 
3회 정도 교육받으러 갔다 왔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너 요새 뭐하냐?'고 물어 자세히 얘기했더니 소등에 쌀을 실어주며 5㎞쯤 떨어진 외가집으로 보냈습니다. 외삼촌한테 '어떤 일이 있어도 보내지 말라, 소만 키우도록 해라'고 지시했어요. 당시 빨치산 연락병이 되어 지리산까지 따라갔던 9명의 친구들 중 한 명만 살아남고 다 죽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날 살려놓고 당신은 43세에 돌아가셨어요."
 
희생자 조사에 참여했던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의 얘기에 의하면 "당시 덕치면에는 성한 집이 거의 없었다"고 증언했다. 빨치산사령부 전북도당이 있었던 회문산 역사관을 둘러본 일행이 점심을 기다리는 동안 조종래씨의 증언이 계속됐다.
 
"회문산 근처 마을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산밑에 굴을 파고 숨어 살았어요. 낮에는 모두 굴 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살짝 집에 돌아가 밥을 해 먹고 굴로 돌아왔어요. 일가친척이나 이웃에게도 굴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어요. 집에 있으면 군인이 불쑥 찾아오고 빨치산이 불쑥 찾아오기도 해서 불안해 못 살았어요."
 
 
빨치산에 끌려갔던 조당래 시인... 구들장 파고 숨어 살아나기도
 
조종래씨의 집안 형님인 조당래 시인은 빨치산에 끌려가 총살당하기 직전 학창시절 알았던 정종화씨가 얼굴을 알아보고 살려준 후 빨치산에 편입됐다. 빨치산이 군경토벌대에 쫓겨 지리산으로 본거지를 옮길 때,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회문산에서 지리산으로 옮기는 걸 반대하는 빨치산을 사살하라는 것이었다.
 
▲ 강제로 끌려가 빨치산이 됐다가 회문산에 있던 빨치산들이 지리산으로 이동하자 조당래(작고)씨가 방 구들장을 파고 열흘동안 숨었다가 살아난 산지기 집 모습. 산지기는 지게짐에 조씨를 숨기고 거름을 덮어 위장해 10여킬로미터를 운반해 살려줬다 ⓒ 오문수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임무를 수행하라는 말을 들은 그는 빨치산들이 모두 떠난 뒤 산지기집 작은 방 구들장을 파고 숨었다. 산지기는 일부 공간만 남기고 장판으로 덮은 채 열흘 동안 누워있는 그에게 밥만 넣어줬다.
 
바깥이 조용해진 어느 날 산지기는 지게 짐 밑에 그를 뉘인 채 거름을 덮고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회문리까지 지고 갔다. 의경대장이었던 집안 형님의 도움으로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 회문산 안내를 마친 조종래씨가 손을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으면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누가 전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이 땅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또다시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작성】 오문수 oms114kr@daum.net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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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