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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일보 태화강     【이일걸의 지식창고】 2018.06.29. 11:55 (2018.06.29. 11:55)

가막못안의 경주 최씨 가문

 
경주 최부자 가문의 기틀 세운 장본인 / 정무공과 송정공의 묘 UNIST 인근에 / 중용과 상생의 최씨 가문 철학 배워야
울산과학기술원(UNIST) 안의 못을 지금은 가막저수지라 부르지만 그 전엔 가막못(烏池淵, 釜池)이라 불렀고, 이 지역을 가막못안이라 했다. 이 못 서편 뒷산에 정무공 잠와(潛窩) 최진립(貞武公 崔震立)과 셋째 아들 송정공 최동량(崔東亮)의 묘가 있다. 이들은 세칭 9대 진사 10대 만석의 경주 최부자 가문의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무려 300년이 넘도록 부를 지탱하도록 해 후손들로 하여금 살아가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토록 한 선구자였다.
 
정무공 최진립은 최치원의 17대손이며 사성공파 최예(崔汭)의 6대손이고 참판공 최신보(崔臣輔)의 3남으로 1568년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최계종(崔繼宗)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을 했으며, 정유재란 때도 왜군을 무찔러 선무공신이 되었다. 그 후 3도수군통제사 등 당상관으로 승차했으며, 공조참판의 임명을 받았지만 무관임을 내세워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하니,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12대 최준은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했고 동생 최완은 임정 수립에 참여했다. 광복 후 최준은 전 재산을 인재육성을 위해 대구대학 설립에 희사했다. 정무공 묘 뒤에 묻힌 송정공 최동량은 먼저 세상을 떠난 장형과 요절한 큰 조카를 대신해 큰 집안을 잘 보살피고 정무공의 선양사업에 매진했다. 송정공 최동량은 가거십훈(家居十訓)을 지어 후손들의 처신을 경계토록 했다.
 
실제 만석의 부를 이룬 이는 최동량의 아들인 3대 최국선이었다. 최국선은 이앙법을 도입했으며, 차용문서를 불태우고 흉년에 빈민을 구제했다. 최국선의 큰 아들 최인기는 동생 최의기에게 분가 시에 준 나락 볏섬에 따라간 솥뚜껑만한 두꺼비를 큰 집에 다시 가져오지만, 내 집에서 나간 것은 네 것이라며 다시 동생 최의기에게 두꺼비를 돌려주는 형제간의 우애담이 전한다. 이후 만석의 가통은 내남면 이조리에 분가해서 살던 4대 최의기의 후손으로 전해지며, 7대 최언경 대에 교촌으로 이주해 12대 최준 때까지 거주했다.
 
특히 정무공의 기제사를 지낸 후 자리를 옮겨 주인을 위해 목숨을 던진 옥동과 기별의 하인 제사를 400년이 가까운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송정공의 가거십훈(家居十訓)이 바탕이 돼 전해지는 최씨 가문 6훈(六訓)과 6연(六然)은 300년 동안 만석의 부를 지키는 디딤돌이 됐다. 즉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며,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며,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고,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며,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고,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혔다. 또한 6연(六然) 중 ‘스스로 초연하며, 실의에 빠졌을 때 태연하라’는 철학은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같은 최씨 가문의 철학은 중화(中和)의 사상에 입각해, 공공의 선인 중용(中庸)의 덕을 실천,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의 상생의 철학을 추구했다. 이미 경주시에서도 최부자 가문의 철학을 배우기 위해 ‘경주 최부자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정무공과 후손들은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의병을 일으켰고 결국 나라를 위해 순국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아래 사람을 배려하고, 진실로 나라 및 인간을 사랑하는 정신을 실천했다. 현재의 우리는 최부자의 중용과 상생의 철학을 배워야 할 것이다. 다행히 300년 최부자의 부의 기틀을 만들었던 정무공 최진립과 송정공 최동량의 묘가 내 고향 울산 가막못안에 있다하니 영광스럽지 아니한가.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 활동 지역 : 관악구(冠岳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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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