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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운전(崔孤雲傳) ◈
해설   본문  
시대 :
조선 말기 :
1
옛날 신라시대 최충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매 일찌기 벼슬에 올랐으나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하더니 늦게 서야 문창령을 제수 받았으나 그는 슬픈 생각을 금치 못하더라.
 
2
그의 아내가 근심하는 까닭을 물으니 최충 답 왈
 
3
"다행히 벼슬을 제수 받았으므로 이것은 기쁜 일이온데 당신은 어찌하여 근심을 하시나이까?"
 
4
"벼슬을 제수 받은 것은 다행이오 마는 문창에는 괴변이 있어 영이 되어 간 사람으로서 마귀에게 그 아내를 빼앗긴 사람이 거의 십여 명에 이른다고 하는 고로 그래서 근심이오."
 
5
이에 아내도 그 말을 듣고는 또한 근심하기를 마지않더라.
 
6
충은 이튿날 곰곰 생각해 보기를
 
7
"대체 귀신이란 것은 사람을 해칠 뿐이오 능히 물건은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니 어찌 빼앗길 리가 있으리요 실로 황당한 말이리라. 만약 그렇다면 한 계교가 있다."
 
8
충은 부임하는 날 색실을 금 부인의 발목에 매어 두고서 변이 있으면 그 실을 찾아가면 곧 간 곳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더라.
 
9
가족을 데리고 문 창에 이르러 곧 고을의 늙은이들을 불러 묻기를
 
10
"이 고을에 아내를 잃는 변이 있느뇨?"
 
11
"네 있사옵니다."
 
12
충은 더욱 두려워져서 시비에게 명하여 내와를 굳게 지키라 하고는 색실의 계교를 쓰기로 하더라.
 
13
하루는 객세에 앉아 공사를 듣고 있는데 오정쯤 되어서 별안간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천지가 캄캄해지며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우렛소리가 땅을 무너뜨리는 듯 하더라.
 
14
집안을 지키고 있던 시비들은 모두 놀라고 넘어져서 정신을 잃었으며 바람이 그치고 구름이 흩어지고 나서 본즉 문과 창은 전과 같았으나 부인(夫人)이 간 곳 없더라. 시비들은 쫓아가서 원님한테 아뢰되 충은 소리 없이 슬피 울다가 실을 따라 찾아 가 본즉 뒷산 바위틈으로 들어가 있더라. 그 바위는 천길 이나 되어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하며 하리 이적이 말하기를
 
15
"사또께서는 너무 슬퍼 마옵소서. 일찍이 늙은이들의 말을 들으니 이 바위가 밤중에는 스스로 열리고 굴 안은 환히 밝다고 하오니 밤을 틈타서 와 봄이 좋겠나이다."
 
16
이에 충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곧 돌아 오니라.
 
17
밤이 되어 바위 밑에 가 보니 밤중이 되자 바위가 열리는데 밝기가 대낮과 같더라. 충은 크게 기뻐하고 드디어 틈을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가니 광대하고도 비옥하여 꽃나무가 우거졌을 뿐 사람의 자취는 전혀 볼 수 없고 이상한 짐승 기이한 새들만이 놀고 있으매 최충은 돌아보면서 이적에게 말하기를
 
18
"세간에 어찌 이 같은 곳이 있겠느뇨?"
 
19
"예, 정말 별다른 천지이옵니다."
 
20
오십보 가량 들어가니 큰 집이 있는데, 그 방 안이 웅장하고도 화려하며, 그 방안에서 선악의 묘한 소리가 들려 오매, 찬란한 꽃밭을 헤치고 들어가 창틈으로 엿보았더니, 누런 금돼지가 있어 최충의 아내의 무릎을 베고 넘어져 자고 있고, 미녀 수십 명이 앞뒤로 늘어서서 풍악을 울리고 있는데, 그 여인들은 옛날 대대의 현령들이 잃은 아내들이더라.
 
21
충은 언제인가 아내와 더불어 서로 안띠에다 약주머니를 차고서 요괴로운 것을 물리치자고 한 약속이 있었으매, 이에 충은 그 주머니를 열고 약을 풀어, 아내가 창 구멍의 바람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더라.
 
22
이 때 금돼지가 잠에서 깨어나 향내를 맡고 묻되,
 
23
"어찌 세간의 약내가 나느냐?"
 
24
충의 아내는 남편의 꾀인 줄 짐작하고는 곧 말하기를,
 
25
"제가 여기에 온지 오래지 아니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냄새가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그러하옵니다."
 
26
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금돼지는 의아하여 묻기를,
 
27
"그대는 어찌하여 슬퍼하는고?"
 
28
"제가 이 땅을 보니 인간 세계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우는 것이옵니다."
 
29
금돼지는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30
"여기는 인간 만사와 다름이 없지 않느뇨? 다른 근심은 없으니, 원컨대 슬퍼하지 마오."
 
31
충의 아내는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묻기를,
 
32
"제가 인간에 있을 때 들으니, 신선 세계의 사람들은 사슴의 가죽을 보면은 죽는다고 하던 데 과연 그러하옵니까?"
 
33
"나는 알지 못하나, 다만 사슴 가죽을 꺼리기는 하오."
 
34
"어찌하여 꺼리는지요?"
 
35
"사슴 가죽을 씹어서 머리뒤에 붙인즉 바보와 같이 죽소."
 
36
말을 마치자 다시 자는고로 충의 아내는 비록 원한을 씻고자 하나 사슴의 가죽이 없었으매, 갑자기 생각해 보니, 차고 있는 칼집 끈이 사슴의 가죽으로 되어 있음을 생각하고 가만히 풀어 씹어 가지고 금돼지의 목 뒤에다 붙였더니, 과연 금돼지는 의식을 잃은 채 한 말도 하지 못하고 죽더라.
 
37
이에 충은 아내와 더불어 같이 돌아왔으며, 그 나머지 미녀들도 최충의 덕을 입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니, 그 여인의 가족들은 깊이 최충에게 감사를 하고,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라 하더라.
 
38
충의 아내는 임신한지 넉달 만에, 금돼지의 변을 입었다가 돌아온지 여섯 달만에 아들은 낳으니, 손톱과 발톱이 좀 이상하더라.
 
39
충은 그 금돼지의 아들인가 의심하고, 시비를 시켜 큰 길에 갖다 버리게 하매, 어린애는 길 가운데 죽은 지렁이를 보고는 "ㅡ"자라 하니, 시비는 들어가서 아뢰었으나, 충은 다시 갖다 버리라 하더라. 시비는 눈물을 뿌리며 어린애를 안고 가는데, 또 개구리 죽은 것을 보고 "天"자라 하더라. 이에 시비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와서,
 
40
"어린애가 죽은 개구리를 보고 '天'자라 하였나이다."
 
41
라고 아뢰었으나, 충은 성을 내며,
 
42
"네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마땅히 칼로 대하겠노라."
 
43
고 하더라.
 
44
이에 시비는 솜으로 포근히 싸 가지고 길에 갖다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해 가며 밟지 아니 하고, 밤이 된즉 천녀가 내려와서 안고 젖을 먹이는 것이었으니, 관리나 백성들이 거두고자 했으나 큰 죄를 입을까봐 두려워 하더라.
 
45
충은 이 소문을 듣고 어린애를 못에 갖다 던지라 했더니, 연꽃 한 송이가 별안간 생겨나서 공경히 받들었고, 백학 한 쌍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날개로 어린애를 덮어주더라.
 
46
두어 달이 자나매, 어린애는 바닷가를 거닐면서 놀았는데, 지나가는 모래 위엔 글자가 문득 이루어졌고 우는 소리는 다 글 읽는 소리로 변하더라.
 
47
충의 아내가 이것을 듣고 충에게 말하기를,
 
48
"당신은 그 어린애가 정말로 금돼지의 자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버렸으므로, 하나님이 그 애매함을 아시고 선녀를 시켜 젖을 먹여 키우게 했사오니, 원컨대 빨리 사람을 보내어 도로 데려오는 것이 좋겠나이다."
 
49
충도 깊이 감동하고는 말하기를.
 
50
"이제 데려오고자 하지만, 그러나 처음에 그 어린애를 금돼지의 자식이라 하여 버리고서,
 
51
이제 만약 데려온다면 곧 이러한 일은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52
"당신이 만일 남의 웃음을 살까봐 곤란하다면, 병이라 일컫고 방안에 피해 있으면, 제가 도모하여 사람의 웃음을 사는 기틀이 되지 않도록 하겠나이다."
 
53
이에 부인은 신통한 무당을 찾아가서 돈과 베를 많이 주고는 유인해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54
"나를 위하여 여러 관리들에게 선언하기를, 사또께서 자기 아들을 가지고 금돼지의 아들이라 하고서 바닷가에 버린 까닭으로 하나님이 죄를 주셨으니, 그대들이 급히 가서 데려오면 사또의 병이 곧 나을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사또가 죽을 뿐만 아니라, 화가 이민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는가?"
 
55
무당은 그렇게 하겠노라 하고는, 나가서 부인이 가르쳐 준 말로써 여러 관리들에게 사또가 병이 난 이유를 설명해 주매, 여러 관리들은 놀라고 두려워하는 나머지, 사또의 관사로 와서 울면서 그 이유를 이뢰니, 이에 충은 일부러 놀라면서 말하기를,
 
56
"정말로 그 아이를 버린 까닭을 인하여 죄를 하늘에 얻었다면, 그 아이를 데려오는 것 같은 것은 무엇이 어려운 일이 있겠나?"
 
57
하고는 즉시 이적을 시켜 명하여 보내더라.
 
58
이적 등 일행은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까지 들어가서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장차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지 글 읽는 소리가 구름 밖에서 들려 오매, 바라본즉 어린아이가 높은 바위 위에 홀로 앉아 글을 읽고 있더라.
 
59
이적 일행은 바다를 건너가서 배를 멈추어 놓고, 바위 밑에서 우러러 보며 외치기를,
 
60
"공의 부모님 병세가 위중하여 공을 한번 보고자 하시는 고로 우리들이 공을 모시러 여기까지 이르렀사오니, 바라건대 공은 빨리 내려옵소서."
 
61
"부모님이 처음에 나를 금돼지의 자식이라 하고 버려 놓고, 이제 와서 마음이 부끄럽지도 아니 하오신지 나를 보고자 하실까? 옛날 진나라 때 양적대란 자는 여불위하란 미녀를 사서 미희로 바치려고 하였는데, 임신을 시킨 후에 진황에게 바쳤더니, 일곱달 만에 아들을 낳았으나 진왕은 실로 여씨를 위하여 그 아이를 버리지 아니하였거니와, 하물며 나의 어머니는 나를 밴지 넉달이 되어 문창에 오셨다 얼마 안 되어 금돼지에게 납치되었다가 곧 돌아와서 여섯달만에 나를 낳았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더라도 어찌 금돼지의 자식이 되겠는가? 내가 만일 금돼지의 자식이라면, 이목구비가 어찌 하여 금돼지와 같지 아니하고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집의 아버님이 나를 자식이라 하지 아니하고 길에 갖다 버렸으니, 내 무슨 면목을 돌아가서 부모님을 만나 보겠소? 강제로 나를 보고자 한다면, 나는 마땅히 무인도로 들어가 버리고 말겠소."
 
62
이때 그 아이의 나이는 세 살이더라.
 
63
이적은 어찌할 수가 없어, 돌아가서 사또께 그대로 보고하니, 충은 도리어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을 책망하더라.
 
64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로다."
 
65
하고는, 고을 사람 수백 명을 데리고 바닷가에 이르러, 아이를 위하여 바닷가에다 대를 쌓아 올리고 아울러 높은 다락을 짓기 시작하더라. 다락이 다 이루어지고 나서 아이를 불러 오니
 
66
아이는 말하기를,
 
67
"일찌기 멀리 버려진 바 되었다가 이제 저를 위하여 여기까지 오셨으니, 어찌 하늘에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겠나이까?"
 
68
하고는, 엎드려 울더라.
 
69
충은 더욱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말하기를,
 
70
"내 너 보기가 매우 부끄럽구나. 다시는 이런 과실을 말하지 말아 다오."
 
71
하고는, 그대의 이름을 월영대라고 해 주었으니, 충은 곧 석자가 되는 쇠 지팡이를 모래 위에서 쓰는 붓을 삼으라고 아들에게 주고 돌아오더라.
 
72
그날 하늘의 선인 수천 명이 대 위에 구름같이 모여 앉아 각각 배운 바를 다투어 가르치니, 이로 말미암아 문리를 크게 깨닫게 되고 마침내 문장가가 되더라.
 
73
그 아이는 언제나 철장을 가지고 대 밑의 모래 위에서 글씨 연습을 하니, 석자나 되는 철장이 닳아서 반자가 되더라.
 
74
그 아이의 됨됨이 음성이 청아하고 매양 시를 읊는데 있어서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더라.
 
75
하루는 밤에 달빛이 낮과 같고 또한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기맥힌 소리더라.
 
76
이 즈음 마침 중국천자가 후원에 나와 달을 완상(玩賞)하고 있을 때, 멀리서 시 읊는 소리가 들려 오는데 청아(淸雅)하고도 담백(淡白)하더라. 이에 천자는 시신에게 물어보았느니,
 
77
"시 읊는 소리가 어디서 들려 오느뇨?"
 
78
"거년 이래 달 밝고 바람이 맑은 밤이면 시 읊는 소리 신라로부터 들려 오나이다. 천상을 우러러 보았더니 귀성이 동국에 나타났사오니, 생각건대 동국에 현자(賢者)가 있는 것 같나이다."
 
79
"신라가 비록 편소한 나라이지만, 현자가 옛날부터 있으나, 수만 리 떨어진 바깥 땅에서 시 읊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리니, 하물며 가까이 들을 때에는 어떠하겠는가?"
 
80
하면서 칭찬하기를 마지 않더라. 천자는,
 
81
"재사(才士)를 보내어 신라의 선비와 더불어 서로 재주를 견주어 보게 하리라."
 
82
하고는, 즉시 군신을 불러 여러 학사 가운데서 문예가 탁월한 자 두 사람을 뽑아서 보내라하더라.
 
83
중국 학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월영대 밑에 이르니, 날이 저물어 배를 대 밑에 정박시키더라.
 
84
이 때는 바야흐로 중추 삼오야를 당하여, 밝은 달은 물결 속에 잠겨 있고 맑은 바람은 서서히 불어오는데, 밤은 고요하고 고기가 뛰놀아 맑은 흥취가 나는 듯이 일어나니, 이 때 중국 학사는 곧 시 한 수를 지어 읊기를,
 
85
삿대는 물결 밑 달을 꿰이네
 
86
이 때 다락 밑 모래 위에서 놀던 아이가 따라 읊더라.
 
87
배는 물 가운데 하늘을 누르네
 
88
이에 학사는 돌아보면서,
 
89
"그 누가 읊었을까?"
 
90
그 아이가 화답하였는 줄은 알지 못하고 또 읊더라.
 
91
물새는 떴다 다시 잠기네
 
92
그 아아는 또 화답하더라.
 
93
산 구름은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네
 
94
학사는 깜짝 놀라고 멸시하는 듯 말하더라
 
95
"쥐와 새는 어찌하여 짹짹하느냐?"
 
96
"돌과 개는 어찌하여 멍멍합니까?"
 
97
"개 짓는 소리가 멍멍함은 옳으나 돌도 또한 그러하냐?"
 
98
"새우는 소리가 짹짹함은 옳으나 쥐도 또한 그러합니까?"
 
99
이에 학사는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는 묻기를.
 
100
"어디에 있는 아이기로 갚은 밤 여기에 있느뇨?"
 
101
"나는 신라의 나 승상 천업의 창두로, 명령을 받들고 여기에 와서 바둑돌을 줍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가지 못하였나이다."
 
102
"너의 나이가 몇이뇨?"
 
103
"여섯 살이옵니다."
 
104
이에 학사는 아이가 글을 잘하는 줄 알고 생각하더라.
 
105
'나이가 겨우 여섯 살 되는 아이로서 재능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하물며 신라 선비들의 재주를 어찌 능히 당해내리오?'
 
106
학사는 또 묻기를,
 
107
"나라 안에 재사(才士)가 많이 있느뇨?"
 
108
"재명이 특달한 자가 수백 명이오, 그리고 문사는 쌀을 수레에다 실을 정도로 그 수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나이다."
 
109
이에 학사는 생각해 보더라.
 
110
'문인과 재사가 일국에 가득하여 들어간들 문재가 되지 않을 것이니, 들어가지 말고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겠다'
 
111
하고는, 드디어 중국으로 되돌아가서 황제에게 아뢰기를,
 
112
"신라의 문인 재사들의 학문이 높고 깊은 자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으며, 또 신동과 같은 자가 수백 명이나 있어서 감히 대적할 수 없었나이다."
 
113
황제는 크게 노하고, 까탈을 잡아 치기 위하여 달걀을 속으로 여러번 싸고 싸서 돌함에 넣고, 황초를 불로 녹여 그 안을 채워 흔들리지 않도록 하고, 또 구리쇠를 녹여 돌함의 틈에다 붓고 열어 보지 못하게 하고는, 옥새 찍힌 봉서와 함께 신라에 보내면서,
 
114
"너희 나라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바다 구석에 있으면서 재주로써 대국을 업수이 여긴 까닭으로 돌함을 보내니, 이 함 속의 물건을 알아 내어 시를 지어 바치면 죄를 용서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마땅히 살육의 화를 받으리라."
 
115
고 하더라.
 
116
중국의 사신은 조서를 받들고 계림에 도착하매, 국왕은 친히 나가 맞이하고 조서를 받아 읽어 보시고는, 즉시 나라안의 유명한 선비들을 불러 가지고 명령을 내리기를,
 
117
"여러 신학 가운데서 능히 이 물건을 알아 가지고 시를 짓는 사람에 대하여 일품의 벼슬을 주고, 군을 봉하여 녹을 후히 하여 그 공을 길이리라."
 
118
했으나, 수많은 선비들은 아무도 알아내지 못하고 온 조정이 들끓더라.
 
119
이 때 그 아이는 서울로 굴러 들어와, 거울을 고치는 장인이라 일컫고 나 승상 집 문에 이른즉, 나 승상의 딸이 듣고 수은 벗겨진 거울을 유모를 주어 내보내고는 문틈으로 엿보더라.
 
120
그는 나 승상 딸의 얼굴을 선뜻 보고 마음속으로 예쁘다 생각하고는, 다시 보고자 눈을 그쪽으로 돌리면서 거울을 고치다가 그만 거울을 돌 위에 떨어뜨려 깨치고 말았으니, 유모는 크게 놀라 발을 구르고 머리를 저으면서 꾸짖되, 그는 울면서 애걸하기를,
 
121
"거울은 이미 깨졌사옵니다. 책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다시는 합치기 어려우니, 원하건대 이 몸으로써 노복이 되어 이 거울을 보상해 드리겠나이다."
 
122
이에 유모는 들어가서 정승에게 아뢰니, 승상은 허락하고 불러들여 묻되,
 
123
"너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에 살고 있느뇨?"
 
124
"거울을 고치다 깨쳤으니 이제 저의 이름은 마땅히 파경노라 불러 주옵소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또한 갈 만한 곳이 없나이다."
 
125
고, 그는 답하더라.
 
126
승상은 파경노로 하여금 말을 먹이게 하더라. 그가 말을 타고 나가면 여러 말들이 열을 지어 뒤따랐으며, 조금도 싸우는 일이 없더라.
 
127
이러한 후로 여러 말들이 다 살찌고 하나같이 마른 말이 없더라.
 
128
그는 아침에 말떼를 이끌고 나가 사방 들에다 흐트러 놓고는 숲속에 누워서 하루 종일 시를 읊으니, 청의동자 수 명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혹은 말에 풀을 먹이고 혹은 채찍으로 말을 몰기도 하고, 저녁이 되면 말들이 그의 앞에 구름같이 모여 머리를 숙이고 열 지어 서니, 보는 사람들은 그 신이 함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더라.
 
129
여기에 있어 승상과 부인은 이 소문을 듣고 승상에게 이야기하더라.
 
130
"경노는 얼굴 모습이 기이하고 말을 다루기가 또한 기묘하매, 실로 보통 아이가 아니오니, 천한 일을 맡게 하지 마옵소서."
 
131
이에 승상도 그렇게 여기더라.
 
132
이전에 돌산에다 꽃나무를 많이 심었으나 거칠어지고 더러워져서 가꾸지 않았기 때문에 잡풀 속에 묻혀 버렸는데, 승상은 경노로 하여금 꽃밭을 손질하는 소임을 맡기라.
 
133
경노는 또 꽃밭 속에 누워 시만을 읊을 뿐 아무런 손질도 아니하는데, 선녀가 밤에 내려와서 혹은 거름을 주어 가꾸고 혹은 풀을 뽑으니, 선경의 명화와 인간의 계화는 그전보다 배나 더 아름답고 무성하더라.
 
134
경노가 꽃을 손질한 후로 구슬 같은 꽃이 난만하여 봉황새와 누런 학은 꽃가지에 와서 집을 짓고 누런 벌 흰 나비는 잎 사이를 왔다갔다 하더라.
 
135
경노는 봉황의 우는 소리를 듣다가 슬픈 노래를 지을대에 승상은 꽃이 번성하였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동산에 들어와서 꽃을 완상하면서 경노를 보고 묻되,
 
136
"너의 나이 몇이뇨?"
 
137
"예, 열 한 살이옵니다."
 
138
"글자를 잘 아느뇨?"
 
139
"알지 못합니다."
 
140
"내가 열 한 살 때 오히려 글을 잘했거니와, 어찌하여 아무것도 모르느뇨?"
 
141
"일찌기 부모를 잃었삽기에, 비록 글을 배우고자 했던들 어찌 배울 수 있었겠나이까?"
 
142
"배우고자 한다면 내 마땅히 가르쳐 주리라."
 
143
"감히 청할 수는 없사오나 정말로 원하던 바입니다."
 
144
승상이 웃음을 띄며 놀리더라
 
145
"저놈이, 저놈이."
 
146
경노도 또한 웃으며 물러가서는,
 
147
'우습도다. 글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 승상이 어찌 능히 나에게 글을 가르칠 수 있겠나? 정말로 우습도다.'
 
148
하며, 혼자 중얼거리더라.
 
149
그 후 경노는 승상의 딸이 동산의 꽃을 완상하고자 하나 경노가 항상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아직 꽃을 완상하지 못했다는 소문을 엿듣고 곧 승상에게 고하더라.
 
150
"제가 여기에 온지 거의 수년이 되었으므로, 한번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척을 찾아보고 오겠사오니, 며칠 동안의 여가를 주실 수 없겠나이까?"
 
151
이에 승상은 허락을 하더라. 경노는 물러가서 다시 꽃 속으로 들어가 숨더라.
 
152
나 소저는 경노가 여가를 얻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동산에 들어가 꽃을 완상하더라.
 
153
이때 맑은 바람은 산들거리고, 꽃 향기는 온 몸에 스며들고, 붉은 꽃봉오리 푸른 잎사귀에는 벌과 나비들이 꿀물을 빨고 있을 때, 나 소저는 시 한 수를 지어 읊기를,
 
154
난간 아래 핀 아름다운 꽃
 
155
웃어도 소리는 들리지 않은고야
 
156
꽃 속에 숨어 있던 경노는 곧 뒤를 이어 읊기를,
 
157
숲속에서 새는 울건만
 
158
눈물은 볼 수가 없는고야
 
159
나 소저는 깜짝 놀라 부끄러움을 머금고 집을 돌아가버리더라.
 
160
이 해에 여러 선비들은 표를 올렸는데
 
161
"돌함 속의 물건을 능히 알아내지 못하였사오니, 엎드려 죄를 청하옵나이다."
 
162
라 하더라.
 
163
국왕이 크게 근심하고 있는데, 시신이 상계하기를,
 
164
"현신은 구하고자 해도 쉽게 얻을 수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여러 신하 가운데서 가장 문학이 뛰어나고 벼슬이 제일 높은데 있는 사람인 승상 나 천엽에게 전적으로 맡기면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는 힘이 있을 것 이옵니다."
 
165
이에 왕은 즉시 나 승상을 불러 돌함을 맡기면서 말하되,
 
166
"과인이 부덕으로 의함히 중기를 받았다가 불의에 천조가 가장 어려운 문제를 보냈으니, 여러 신하 가운데 경의 글재주가 가장 뛰어나서 능히 풀어 시를 지을 수 있으리라. 이럼으로써 맡기노니, 연구해 가지고 시를 지어 올리기를 바라오. 만일 연구해 내지 못한다면 경의 가족은 관비를 삼을것이며, 경을 천조로 보내어 또한 연구해 내지 못한 죄를 당하도록 할 것이오."
 
167
나 승상은 엎드려 명령을 듣고는 석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니, 온 집안이 모두 노래어 통곡하더라. 나 승상은 몸을 기대고 근심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먹지 아니한지가 여러 날이 되더라.
 
168
경노는 일부러 알지 못하는 것같이 사람들에게 물어 보기를,
 
169
"상전 일가는 어찌하여 슬퍼하고 있으며, 승상은 먹지 아니하고 있나이까?"
 
170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 근심하고 있노라."
 
171
경노는 겉으로는 근심하는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뻐하더라. 먼저 나 소저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꽃가지를 꺾어 들고 나 소저가 있는 창 밖으로 갔더라.
 
172
이 때 나 소저는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다가, 벽에 걸린 거울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언뜻 보고, 창틈으로 내가보니 곧 경노가 꽃가지를 꺾어 안고서 문밖에 홀로 서있으매, 나 소저는 괴이쩍게 여겨 물어 보니, 경노는 대답하기를,
 
173
"낭자께서 이 꽃을 좋아하시기로 시들기 전에 꺾어 가지고 왔사오니, 받아 가지고 한 번 완상해 보옵소서."
 
174
나 소저는 크게 한숨 쉬면서 받지 아니하더라. 경노는 위로하는 말로,
 
175
"거울 속에 떨어진 그림자가 도리어 낭자로 하여금 근심을 없게 할 수 있을는지 누가 알 수 있겠나이까? 아무 근심 마시고 어서 이 꽃이나 받으소서."
 
176
하고 말하더라.
 
177
나 소저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일어나, 얼굴을 가리우며 꽃을 받아 가지고 부끄러운 듯이 들어가 곧 아버님 앞으로 가서 여쭈더라.
 
178
"경노가 비록 어리지만 재주와 학문이 사람에 뛰어나고 또한 신기롭고 호협한 기상이 있사오니,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능히 함속의 물건을 알아 내고 시를 지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179
"너는 어찌하여 함부로 그와 같은 말을 하느냐? 만약 경노가 능히 알아낼 수 있을진대 일국의 명유들이 어찌하여 알아내지 못하고, 끝내는 나에게 맡기겠느뇨?"
 
180
"부엉이는 낮엔 보지 못하나 밤에는 잘 보고, 꾀꼬리는 밤엔 보지 못하지만 낮에는 잘 보는데, 이것은 각각 소장이 달라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어찌 뜻이 있어서 새가 새끼를 낳겠어요? 경노가 비록 작으나 큰 재주가 있는 줄을 어찌 알겠나이까?"
 
181
하고는 이에 대하여 경노가 근심하지 말라는 말과 꽃밭에서 화답한 싯귀를 말하고 또 말하기를,
 
182
"제가 능히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어찌하여 능히 그러한 말을 하였겠나이까? 소원이오니 한 번 불러서 시험해 보옵소서.
 
183
나 승상은 자못 그도 그러할 듯하므로, 곧 경노를 불러 깨우칠 수 있는 말로 이르기를,
 
184
"나라가 불행하여 대국이 견책을 보내 왔는데, 왕께서는 근심만 하시기로 불행히 석함을 받아 가지고 왔거니와, 내가 거의 죄를 당하게 되어 망설인지가 여러 날이 되었지만, 이제 너에게 줄 것이니 네가 만약 알아 가지고 시를 지으면 특별한 상과 벼슬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근심도 없어질 것이라."
 
185
경노는 명령을 듣고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186
"일국의 문장가들이 다 못하는 것을 하물며 석자밖에 안되는 어린아이가 배우지도 못하고 아는 것도 없는 제가 어찌 알아내겠나이까?"
 
187
이에 나 승상은 다시 기쁜 마음은 가시고 나 소저는 여쭈더라.
 
188
"지난 일을 보통으로 묻는데 대하여 누가 즐거이 응하겠어요.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앉아서 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형리가 묻기를 네가 만일 시를 지으면 마땅히 용서해주리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한자도 알지 못하였지만 명에 따리 능히 지었다고 하니, 하물며 경노는 문학이 뛰어나서 능히 시를 지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일부러 할 수 없다고 한 것이오니, 아버님께서 경노로 하여금 만약 듣지 않을 것 같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시면, 경노가 어찌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없어서 복종하지 아니하겠나이까?"
 
189
승상은 그 말도 그럴 듯하므로 경노를 불러 협박하더라.
 
190
"네가 이미 내 집에 종이 되어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하겠다."
 
191
하고는, 다른 종에게 명하여 죽이려고 하더라. 경노는 일부러 두려운 듯이 승낙하고 석함을 가지고 중문 안에 앉아 혼자 중얼거리기를,
 
192
'내가 품고 있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별안간 생각 밖의 일을 당하였으니, 시 짓기는 어렵지 아니하나 생각할수록 분함을 이길 수 없구나'
 
193
이 때 승상 부인이 이와 같은 말을 엿듣고, 들어가서 승상에게 말하기를,
 
194
"경노의 말한 것이 이러하오니, 반드시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을 것이옵니다."
 
195
승상은 유모에게 명하여 경노한테 가서 의논해 보라고 하더라.
 
196
"너의 문예가 뛰어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거부하고 있으니, 아마 하고자 하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만일 하고자 하는 것이 있거든 나한테 숨기지 말고 바른대로 말하면, 내 마땅히 너를 위해 도모해 주겠노라."
 
197
유모가 말하니 경노는 말 없이 한참 있다가,
 
198
"승상이 나를 사위로 삼아 준다면 곧 시를 짓겠나이다."
 
199
유모는 들어가서 승상에게 아뢰었더니, 승상은 소리를 날카롭게 하고 말하기를,
 
200
"어찌 창두로 사위를 삼는 도리가 있느냐? 너의 말이 어긋났겠지."
 
201
하고는 또 유모에게
 
202
"신선의 모습을 그린 채화를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네가 능히 시만 지으면 이와 같은 미인에게 장가를 보내주겠다."
 
203
고 하라.
 
204
유모는 곧 가서 그대로 전하더라.
 
205
이 말을 들은 경노는
 
206
"종이 위에 그린 떡 하루 종일 본들 어찌 배부를 수 있겠나이까? 반드시 먹은 연후나 배가 부를 것이옵니다."
 
207
하고는 문제의 석함을 발로 차 버리고 비스듬히 누워서 말하기를,
 
208
"나를 비록 마디마디 하더라도 시를 짓지 못하겠나이다."
 
209
유모가 들어가서 그 말대로 아뢰니, 승상은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더라. 이에 딸 운영은 눈물을 닦으면서 여쭈기를,
 
210
"우리 집의 성패가 도시 이번 일에 달려 있나이다. 옛날에 제영이란 여자는 관비가 되어 들어가서 아버지의 죄를 속하였다 하옵나니 아버님께서 딸을 사랑하사는 마음을 가지고 좇지 않는다면, 이 화는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이 몸으로 아버님의 화를 속하겠나이다. 이제 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후회하시고, 건지시고자 해도 그 때는 이미 미칠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고금 천하에 있어서 몸밖에 다시 사랑하고 귀한 것이 있겠나이까?"
 
211
"너의 말이 기특하구나. 부모의 마음은 사랑하는 딸을 차마 빈천한 가문에 허락할 수 없고, 또한 종신토록 원한이 있을까 봐 두려워하는 까닭으로 눈썹을 불사지르는 눈앞의 화를 면하고자 함인데, 너의 말이 정말로 그렇다면 어찌 근심을 하겠느뇨."
 
212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딸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는 정성은 본래 한가지이옵니다. 오늘의 사태는 반드시 제가 몸을 더럽힌 연후에라야 도모할 수 있겠나이다."
 
213
"이제 너의 말을 들으니 정말로 효녀의 정성이라."
 
214
이에 승상과 부인은 혼사를 정하고 친척한테 통지를 하니, 친척들도 모두 좋다고 하더라.
 
215
승상은 즉시 시비에게 명하여, 경노를 목욕시켜 때를 벗기고 비단옷으로 몸을 꾸며 주라 하더라. 그리고 날을 받아 예를 이루어 주고는 사위로 삼으니,
 
216
이튿날 아침에 승상은 시비로 하여금 난방서 시를 짓는 모습을 엿보라 하더라.
 
217
이에 경노는 자기 이름을 지어 치원이라 하고, 자는 고운이라 하더라. 나씨는 치원의 옆에 앉아 빨리 시짓기를 재촉하더라. 치원은,
 
218
"시는 내일 사이에 지을 것이니 재촉하지 마오."
 
219
하고는 나씨로 하여금 종이를 벽 위에다 바르라 하고, 스스로 붓대롱을 잡아 발가락에 끼고 자더라.
 
220
나씨도 또한 근심하던 나머지 고단하여 자 버리니, 꿈속에 쌍룡이 하늘에서 내려와 석함 위에서 얽히어졌고, 무늬 옷을 입은 동자 열 명이 석함을 받들고 서서 소리를 같이 하여 노래를 부르니, 석함이 열려지려는 듯하는데 오색 서기가 쌍룡의 콧구멍으로부터 나와 함 속을 환히 비치고 붉은 옷 입고 푸른 수건을 두른 사람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혹은 시를 지어 읊고 혹은 붓을 쥐고 글씨를 쓰는데, 승상이 사람을 불러 시를 재촉하는 소리를 듣고 나씨가 놀라 깨니 곧 한 꿈이더라.
 
221
치원이도 또한 깨어나서 시를 지어 가지고 벽에 붙여 놓은 종이에다 쓰니, 용과 뱀이 놀라 움직이는 것과 같았으며 그 시는 이러하더라.
 
222
둥글고 둥근 함 속의 물건은
 
223
반은 희고 반은 황금인데
 
224
밤마다 때를 알아 울려고 하건만
 
225
뜻만 머금을 뿐 소리를 토하지 못하는도다.
 
226
치원은 나씨를 시켜 승상 앞에 바치게 하더라. 승상은 오히려 믿지 않다가, 운영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야 대궐로 들어가서 왕에게 시를 바쳤더니,
 
227
왕은 크게 놀라며 묻기를,
 
228
"경은 어떻게 해서 이것을 알아 가지고 시를 지었느뇨?"
 
229
"신이 지은 바가 아니옵고, 신의 사위가 지은 것이올씨다."
 
230
이에 왕은 사신을 보내어 중국 황제에게 바치매, 황제는 보고 말하기를,
 
231
"둥글고 둥근 함 속의 물건은 반은 희고 반은 황금이라고 한 싯귀는 맞거니와, 밤마다 때를 알아 울려고 하건만 뜻만 머금을 뿐 소리를 토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틀렸노라."
 
232
하고 석함을 열고 달걀을 보니, 여러 날 따뜻한 솜 속에서 안겨 병아리가 되어있더라.
 
233
황제는 탄복하면서 말하더라.
 
234
"이는 천하의 기재로다!"
 
235
하고 학사를 불러 보이니, 학사도 또한 칭찬하기를 마지 않다가 조금 있다가 황제에게 아뢰기를,
 
236
"상대편의 소매 속에 있는 물건도 오히려 알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만리 절역(絶域)에서 능히 이 물건을 구명하기를 이와 같이 자세히 알았으니....옛날부터 중국에서는 이와 같은 기재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나이다. 오직 두려워하는 바는 소국이 대국을 능멸할 단서가 될까 하오니, 바라옵건대 시를지은 사람을 불러 들려서 밝혀내기 어려운 일을 능히 풀어 낸 이유를 물으심이 좋을까 하옵니다."
 
237
황제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곧 신라왕에게 시를 지은 선비를 보내도록 지시하더라.
 
238
왕은 크게 두려워하고 승상을 불러 의논하기를,
 
239
"천자가 우리 나라를 침공하고자 하고 또 시 지은 선비를 부르니, 경의 서랑은 나이가 어려 만리밖에 보내기가 난감하고, 경이 대신 가는 것이 어떠하오?"
 
240
"바라옵건대 분부를 받들겠나이다."
 
241
하고는 집에 돌아와 울면서 집사람들에세 말하더라.
 
242
"중국 황제가 시를 지은 선비를 부르시나, 최랑은 어려서 보낼 수가 없고 내가 장차 대신 가려니와, 살아서 돌아올 계교가 없으니 장차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243
하니 온 집안이 통곡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매, 나씨는 최랑을 보고 말하기를,
 
244
"중국 황제가 시를 지은 선비를 부르는데 아버님이 대신 하시면 만리 장도에 돌아오시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반드시 큰 화가 있을 것이니, 부녀간의 정의에 측은함을 참을 수 없나이다."
 
245
"승상은 대신 갈 수 없소. 내가 마땅히 가야지."
 
246
"이제 당신이 나를 버리고 만리밖에 가시면 어찌 능히 다시 돌아올 수 있겠나이까?"
 
247
하면서, 나씨는 슬픈 듯이 눈물을 흘리며,
 
248
"그대는 이태백의 시를 들어 보지 못했는가? 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반드시 나를 쓰리라 하였으니, 이때 중국에 들어가면 특별한 대우를 받아 승상이 될 수 있는 때이오. 금의로 환향하는 영광을 그대에게 보일 것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 하겠소! 하물며 천하는 두루 돌아 다니는 것은 진실로 대장부의 할 일이거늘, 어찌 돌아오기 어려움이 있겠소. 그러니 나의 말을 의심하지 마오. 승상한테 가서 자세히 아뢰시오."
 
249
나씨는 들어가서 승상에게 아뢰기를,
 
250
"최랑이 스스로 가겠다고 하면서 이같이 말하옵니다."
 
251
승상은 그 말을 듣고 말하더라.
 
252
"어질도다 우리 최랑이여! 나 어린 몸으로 문득 그러한 말을 하니, 어질지 않고는 어찌 능히 그와 같겠느뇨."
 
253
하고, 승상은 대궐로 들어가서 아뢰기를,
 
254
"신의 사위 최랑이 스스로 가기를 청하옵고, 대신 갈 수는 없다고 하옵니다."
 
255
"경이 이미 사위를 대신 보내기로 결정하였다면 사위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256
"만약 대신 갔다가 황제가 다시 시를 지으라고 하여 감히 시를 지을 수 가 없으면, 전일 우리 나라의 빛남이 도리어 헛된 곳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오니, 이러므로써 최랑을 보내고자 하옵니다."
 
257
왕도 그렇게 여기고 허락하더라.
 
258
이튿날 치원이 나아가 왕을 뵈오니, 왕이 묻기를,
 
259
"너의 나이가 몇이뇨?"
 
260
"열 두 살이옵니다."
 
261
"나 어린 아이가 중국에 들어가서 능히 감당해 내겠는가?"
 
262
"만약 나이가 많음으로써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도 능히 그 석함 속의 물건을 밝혀내지 못하고 어찌하여 저를 곤란하게 하셨나이까?"
 
263
왕은 깜짝 놀라면서 묻기를,
 
264
"네가 중국에 들어간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중국 황제를 상대하겠느뇨?"
 
265
"어른이 어린이를 대함에 있어서 어른의 도로써 어린이를 대접하지 아니하면, 곧 어린이는 어린이의 도로써 어른을 섬기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제 중국이 대국의 도로써 소국을 대접하지 아니하면, 어찌 소국의 도로써 대국을 섬기겠나이까? 그런데 이제 그렇지 아니하고, 도리어 치고자 석함에다 달걀을 넣어 우리 나라에 보내어 시를 지어 바치라 하고, 또 시 지은 것을 질투하여 지은 선비를 부르고 있으니, 그 무슨 뜻으로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대국의 도를 반복하기를 이같이 하고, 소국으로 하여금 소국의 도로써 섬기게 하고자 하니, 이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무리와 같기로 이것으로써 황제를 상대하고자 하옵니다."
 
266
왕은 그 말을 기특히 여기고 옥좌에서 내려와 손을 잡으면서 말하기를,
 
267
"네가 중국에 들어간 후 너의 가족은 짐이 마땅히 맡아서 돌보며, 의복과 식음을 주어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거니와, 이제 떠남에 있어서 어떠한 물건을 원하느뇨?"
 
268
"다른 것은 원치 않고, 다만 오십 척 되는 사모를 원하옵니다."
 
269
이에 왕은 즉시 만들어 주매, 치원은 이에 이르러 천은을 배사하고 나와서, 자칭 신라 문장 최치원이라 하더라. 치원은 중국으로 떠남에 있어서 먼저 패문을 보내니, 빛나는 명성이 원근에 전파되어, 중국의 모든 사람들은 재주가 뛰어남이 천하에 있어서 드문 일이고, 고금에 있어서 들어보지 못한 일이라고 하며 모두 보고자 했으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하더라. 바닷가에 이르러 온 집안 식구들이 잔치를 베풀어 치원을 전송하며, 나씨는 이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시 한수를 지어 읊더라.
 
 
270
백조 쌍쌍 짝을 지어 구름 속에 나부끼고
 
271
돛단배는 가다가다 푸른 하늘 닿았어라
 
272
이별 술에 노래 곱건만 기쁜 생각 전혀 없고
 
273
오랜 세월 등불 앞에 이내 시름 쌓이리라
 
 
274
치원이 화답(和答)하기를
 
 
275
동방에 밤마다 시름말고 괴로 마오
 
276
화장한 고운 얼굴 ?첸沮該? 두려워라
 
277
이번 가면 빛난 공명 물론 응당 가져와서
 
278
그대 함께 부귀하며 즐거움에 살아 보리
 
 
279
여러 사람과 작별을 하고,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첨성도란 섬 밑에 이르니, 배가 돌며 가지 않더라.
 
280
치원이 사공에게 그 까닭을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281
"용신이 이 섬에 있다더니, 아마 용의 장난으로 그러한가 하오니 한번 올라가 봅시다."
 
282
하더라.
 
283
이에 치원이 배에서 내려서 섬으로 올라가니, 섬 위에 한 소년 선비가 손을 마주 쥐고 단정히 앉아 있으매, 치원은 괴이쩍게 여겨 묻기를,
 
284
"너는 어떠한 사람이뇨?"
 
285
하니, 일어나 공손히 절을 하고 꿇어 앉아 대답하더라.
 
286
"저는 용왕의 둘째 아들 이목이올씨다."
 
287
"어찌하여 여기를 왔느뇨?"
 
288
"이제 들으니 선생이 천하 문장으로서 여기를 지나신다 하기에, 왕께서 한번 뵈옵고자 하시와 저를 시켜 맞이해 오시라고 하시기로, 여기에 와서 기다리고 있나이다."
 
289
"용왕은 수부에 있고 나는 양계에 있어 물과 땅의 길이 달라 소, 말이 미치지 못하는데, 가서 한번 뵈옵고자 한들 어찌 얻을 수 있겠나? 그러나 행색이 또한 바쁘매, 어찌 여가가 있어 가서 놀겠는가?"
 
290
"제가 사는 곳은 인간계와는 달라서 공자의 학문이 없는 까닭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가, 이제 다행히 선생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나이까?"
 
291
치원이 갈 길이 바쁘다고 하면서 사양하니, 이목이 간청하며 말하기를,
 
292
"잠시 동안이오니, 선생은 잠깐만 눈을 감으소서."
 
293
치원이 시키는 대로 하니, 이목은 치원을 업고 바위 밑으로 들어가서 어느덧 용궁에 이르더라.
 
294
이목이 들어가서 용왕에게 아뢰니, 크게 기뻐하며 나와 맞이하고는 마주앉아 주연을 베푸니, 소반에 차려 놓은 음식과 그릇은 다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르더라.
 
295
용왕이 학문을 청하기에, 치원은 시서 수 편을 내어 보이니, 용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인하여 용궁의 서책을 보이는데, 그 글자가 전주와 같아서 알 수 없더라. 치원이 갈 길이 바빠 곧 떠나려 하니 용왕은 말하기를,
 
296
"문장이 다행히 수부에 오시와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총총히 돌아가시려고 하니, 나의 마음에 매우 서운한 바가 있오이다. 나의 둘째 아들 이목은 재주와 기운이 사람에 원등하므로, 만일 데리고 가신다면 비록 위급한 일이 있더라도 능히 당해낼 것이오."
 
297
치원이 허락하고 작별을 하고는 이목과 함께 돌아오니, 사공이 배를 바위 밑에 대어 놓고 울고 있다가, 치원이 돌아옴을 보고 말하기를,
 
 
298
(중략)
 
 
299
치원은 마침내 사마를 타고 가니 서울 동문 밖에 이르매, 마침 국왕이 출유하다가 치원이 사마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잡아 오라고 하였던바 바로 치원이더라. 국왕은 꾸짖어 말하기를
 
300
"그대가 국왕 앞에서 말을 타고 지나간 죄는 마땅히 죽여야 하겠으나 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이므로 용서해 주거니와 이후로는 이와 같은 짓은 다시 하지 말지어다."
 
301
고 하더라.
 
302
치원이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나 승상은 이리 죽고 없었으매, 그는 마침내 나씨를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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