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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부 조씨는 전라도 수령현(遂寧懸) 사람이다. 지원(至元) 경오(庚午) 5월 26일 충경왕(忠敬王)이 강화로부터 송도로 다시 환도(還都)하였다. 이 때에 장군 홍문계(洪文系)등이 권신(權臣)으로 나라일을 그르친 자를 죽이고 복정(復政)시켰다. 6월 1일에 권신 집의 사병(私兵)들이 신위(神衛) 승화후(承化侯)를 옹위하고서 장차 반역을 꾀하려고 하여, 채 강을 건너지 못한 신하와 군사들을 몰아 싣고서 항해하여 남쪽으로 가는데, 큰 배들이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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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생(曺生)은 6살의 아이로 대위(隊衛)의 아들인 그의 아버지 비(丕)를 따라 갔다. 적이 반쯤 가는 도중에 가짜로 벼슬을 정하여 두었는데, 위로는 재상, 집사로부터 장교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에게 따라가도록 협박도 하며 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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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丕)는 지모와 여력( 力)이 있다하여 계급을 뛰어 별장(別將)을 주었으나, 계교를 부려 탈출하여 송도로 돌아갔다. 뒤에 적들이 패하여 부녀자와 아이들은 칼과 화살에 맞아 죽고, 또 바닷물에 빠져 죽었으며 남은 자는 원(元)나라 병정이 다 잡아갔으나, 오직 비(丕)와 같은 배를 타고 온 사람만이 늙은이나 젊은이나 다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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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돌아와서 관군에 예속되어 탐라에 적을 치러 갔다가 신미년 겨울에 죽었으나, 그의 딸 조씨는 그 때 나이 13세로 대위 한보(韓甫)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다. 시아버지는 수령궁(壽寧宮) 녹사(錄事)로서 이름이 광수(光秀)인데, 일본으로 정벌 갔다가 신사년 여름에 죽었으며, 신묘년 여름에는 한보가 또 합단(哈丹)의 군사와 싸우다가 죽었다. 조씨는 과부가 되어 언니에게 따라가 살다가 딸이 시집간 뒤로는 딸을 따라갔다. 딸이 1남 1녀를 낳고 또 요사(夭死)하므로 그 외손자와 손녀를 데리고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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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30세가 못 되어 남편과 아버지와 시아버지를 전쟁으로 여의고, 50년동안 과부로 살면서 주야로 여공(女工)에 힘써서 외손자와 손녀를 먹이고 입혀서 그들이 다 잘 자라게 하였다. 손님을 접대하고 혼인을 시키고 장례일과 제사 비용에 아쉬움이 없이 지내 왔는데 지금은 나이가 벌써 77세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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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강건하고 강장하며 또 총명하고 영리하여 지난날 적중에 지내던 일과 근세의 치란(治亂)에 대한 일, 의관, 세족(世族)의 일들을 역력히 빠짐없이 자세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곧 조씨가 예전에 살던 옛 집이고 또 그 손녀 사위인 전 감찰 규정(監察糾正) 이양직(李養直)은 나와 동년(同年)인 수재이므로 그 사실을 자세히 얻어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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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찍이 중국에 갔을 때 정절로 문려(門閭)에 정표를 받은 곳이 너무 많은 것을 괴이쩍게 여겼다. 엎드려 생각하니, 조정에서는 정절이 없으면서 재산이 많거나, 정려(旌閭)의 이름을 받아서 세납과 부역을 피하려는 사례가 있어서, 매양 감찰관과 헌사(憲司)를 시켜서 유사에게 정표할 자를 묻고 있다 하였다. 이로써 인륜을 도탑게 하고 풍속을 돈독히 하려는 아름다운 뜻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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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조씨의 사행(事行) 같은 것을 조정에 주문(奏聞)케 한다면, 장차 대서 특서하여 간책에 올리고, 그 고을 문려를 빛나게 할 것이니, 어찌 끝내 인멸케 하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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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이 삼종(三從)의 의(義)를 지켰다면 이로써 그 도는 다한 것이다. 조씨는 그 아버지와 남편이 다 국가를 위하여 전쟁에 나아가 죽고, 아들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절개를 지키면서 늙었다. 관에서 돌보아 주지 않고 사람들도 알아 주지 아니하니 슬픈 일이라 하겠다. 오직 하늘의 이치는 거짓이 없을 것이나 마땅히 강녕(康寧)하고 굳세게 수(壽)하여 오래 사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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