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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운몽 (九雲夢) ◈

◇ 구운몽 상 ◇

해설목차  1권 2권 
목 차   [숨기기]
 1. 구운몽 상
 
1
양소유는 초나라 양치사의 아들이니 승명(僧名)은 성진이라.
2
팔선녀라.
3
정경패는 정사도의 딸이니 영양공주라.
4
이소화는 황제의 딸이니 난양공주라.
5
전채봉은 진어사의 딸이니 숙인(淑人)이라.
6
계섬월은 낙양사람이라.
7
가춘운은 유인(孺人)이라.
8
적경홍은 하북 사람이라.
9
심요연은 검객이니 양주 사람이라.
10
백능파는 동정용왕의 딸이라.
 

1. 구운몽 상

 
1
천하에 명산이 다섯이 있으니 동쪽은 동악 태산이요, 서쪽은 서악 화산이요, 남쪽은 남악 형산이요, 북쪽은 북악 항산이요, 가운데는 중악 숭산이다. 오악 중에 오직 형산이 중국에서 가장 멀어 구의산이 그 남쪽에 있고, 동정강이 그 북쪽에 있고, 소상강 물이 그 삼면에 둘러 있으니, 제일 수려한 곳이다. 그 가운데 축용, 자개, 천주, 석름, 연화 다섯 봉우리가 가장 높으니, 수목이 울창하고 구름과 안개가 가리워 날씨가 아주 맑고 햇빛이 밝지 않으면 사람이 그 근사한 진면목을 쉽게 보지 못하였다.
 
2
진나라 때 선녀 위부인이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선동(仙童)과 옥녀(玉女)를 거느리고 이 산에 와 지키니, 신령한 일과 기이한 거동은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3
당나라 시절에 한 노승이 있어 서역 천축국에서 와 연화봉 경치를 사랑하여, 제자 오륙백 인을 데리고 연화봉 위에 법당을 크게 지었으니, 혹 육여화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육관대사라 하기도 하였다.
 
4
그 대사가 대승법(大乘法)으로 중생을 가르치고 귀신을 다스리니 사람이 다 공경하여 생불(생불)이 세상에 나왔다 하였다. 무수한 제자 가운데 성진이라 하는 중이 삼장경문(三藏經文)을 모르는 것이 없고 총명한 지혜를 당할 사람이 없으니, 대사가 극히 사랑하여 입던 옷과 먹던 바리때를 성진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5
대사가 매일 모든 제자와 함께 불법을 강론하는데 동정(洞庭)용왕이 백의(白衣)노인으로 변하여 법석(法席)에 참예해 경문을 들었다.
 
6
대사가 제자를 불러 말하였다.
 
7
"나는 늙고 병들어 산문(山門) 밖에 나가지 못한 지 십여 년이니 너의 제자 중에 누가 나를 위하여 수부(水府)에 들어가 용왕께 보답하고 돌아오겠는가?"
 
8
성진이 두 번 절하며 말하였다.
 
9
"소자가 비록 불민(不敏)하오나 명을 받아 가겠습니다."
 
10
대사가 크게 기뻐 성진을 명하여 보내니 성진이 일곱 근이나 되는 가사(袈裟)를 떨쳐 입고 육환장(六環杖)을 둘러 짚고 표연히 동정을 향하여 갔다. 얼마 후에 문을 지키는 도인(道人)이 대사께 고하여 말하였다.
 
11
"남악 위부인(衛夫人)이 여덟 선녀를 보내어 문밖에 왔습니다."
 
12
대사가 명하여 부르시니 팔선녀가 차례로 들어와 인사하고 끓어 않자 부인의 말씀을 여쭈어 말하였다.
 
13
"대사는 산 서편에 계시고 저는 산 동편에 있어 떨어진 거리가 멀지 아니하지만 자연히 일이 많아 한번도 법석에 나아가 경문을 듣지 못하오니, 사람을 대하는 도리도 없고, 또한 이웃과 교제하는 뜻도 없기에 시비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하늘 꽃과 신선의 과일 그리고 칠보문금(七寶紋錦)으로 구구한 정성을 표합니다."
 
14
하고, 각각 선과(仙果)와 보배를 눈 위에 높이 들어 대사께 드리니, 대사가 친히 받아 시자(侍子)를 주어 불전에 공양하고, 또 합장하여 사례하며 말하였다.
 
15
"노승이 무슨 공덕이 있기에 이렇듯 상선(上仙)의 풍성한 선물을 받겠는가?"
 
16
하며, 이어서 큰 재(齋)를 베풀어 팔선녀를 대접하여 보냈다.
 
17
팔선녀가 대사께 하직하고 산문 밖에 나와 서로 손을 잡고 말하였다.
 
18
"이 남악의 물 하나 산 하나가 다 우리 집 경계인데 육환대사가 거처 기거하신 후로는 동서로 분명히 나뉘게 되어 연화봉 아름다운 경치를 지척에 두고도 구경하지 못한지 오래되었다. 이제 우리 부인의 명을 받아 이 땅에 왔으니 만나기 힘든 좋은 기회라, 또 봄빛이 좋고 해가 저물지 아니 하였으니 이 좋은 때를 맞아 저 높은 대에 올라 흥을 타며 시를 읊어 풍경을 구경하고 돌아가 궁중에 자랑하는 것이 어떠한가?"
 
19
하고, 서로 손을 이끌고 천천히 걸어 올라 폭포에 나아가 흐름을 보고 물을 쫓아 내려가 돌다리 위에 쉬니 이때는 바로 춘삼월이었다. 화초는 만발하고 구름과 안개는 자욱한데 봄새 소리에 춘흥이 호탕하고 물색이 사람을 붙잡는 듯하여, 팔선녀가 자연 몸과 마음이 산란하고 춘흥이 일어나 차마 떠나지 못하여 편안히 웃고 말하며 돌다리에 걸터 앉아 경치를 희롱하니, 낭낭한 웃음은 물소리에 어울리고 아름답고 고운 얼굴은 물 가운데 비치어 완전히 한 폭의 미인도라 하면 미인도를 잘 그린 주방(周昉)의 손 아래에 갓 나온 듯하였다.
20
온갖 희롱하며 떠날 줄 모르더니, 이때 성진이 동정에 가 물결을 헤치고 수정궁(水晶宮)에 들어가니 용왕이 크게 기뻐하여 몸소 문무(文武)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문 밖에 나가 맞아 들어가 자리를 정한 후에 성진이 땅에 엎드려 대사의 말씀을 낱낱이 아뢰니, 용왕이 공경하여 사례하고 잔치를 크게 베풀어 성진을 대접할 때, 신선의 과일과 채소는 인간 세상의 음식과 같지 않았다.
 
21
용왕이 잔을 들어 성진에게 삼배(三盃)를 권하여 말하였다.
 
22
“이 술이 좋지는 않으나 인간 세상의 술과는 다르니 과인(寡人)의 권하는 정을 생각하라.”
 
23
성진이 재배하여 말하였다.
 
24
“술은 사람의 정신을 헤치는 것이라 불가(佛家)에서 크게 경계하니 감히 먹지 못하겠습니다.”
 
25
용왕이 지성으로 권하니 성진이 감히 사양치 못하여 석 잔 술을 먹은 후에 용왕께 하직하고 수궁에서 떠나 연화봉을 행하였다. 연화산 아래에 당도하니 취기가 크게 일어나 갑자기 생각하여 말하였다.
 
26
‘사부(師傅)께서 만일 나의 취한 얼굴을 보면 반드시 무거운 벌을 내리실 것이다.’
 
27
하고, 가사를 벗어 모래 위에 놓고 손으로 맑은 물을 쥐어 얼굴을 씻는데, 문득 기이한 향내가 바람결에 진동하니 마음이 자연 호탕하였다.
 
28
성진이 이상히 여겨 말하였다.
 
29
“이 향내는 예사로운 초목의 향내가 아니다. 이 산 중에 무슨 기이한 것이 있는가?”
 
30
하고, 다시 의관을 정제하고 길을 찾아 올라가니, 이때 팔선녀가 돌다리 위에 않다 있었다. 성진이 육환장을 놓고 합장하여 재배하고 말하였다.
 
31
“모든 보살님은 잠깐 소승(小僧)의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천승(賤僧)은 연화 도량 육관대사의 제자로서 사부의 명을 받아 용궁에 갔다 오는데, 이 좁은 다리 위에 모든 보살님이 앉아 계시니 천승이 갈 길이 없어 부탁합니다, 잠깐 옮겨 앉아서 길을 빌려주십시오.”
 
32
팔선녀가 대답하고 절하며 말하였다.
 
33
“첩 등은 남악 위부인의 시녀인데 부인의 명을 받아 연화 도량 육관대사께 문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다리 위에 잠깐 쉬고 있습니다. <예기(禮記)>에 ‘남자는 왼편으로 가고, 여자는 오른편으로 간다.’ 하였습니다. 첩 등이 먼저 와 앉았으니, 원컨대 화상(和尙)께서는 다른 길을 구하십시오.”
 
34
성진이 답하여 말하였다.
 
35
“물은 깊고 다른 길이 없으니 어디로 가라 하십니까?”
 
36
선녀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37
“옛날 달마존자(達磨尊者)라 하는 대사는 연 꽃잎을 타고도 큰 바다를 육지같이 왕래하였으니, 화상이 진실로 육관대사의 제자라면 반드시 신통한 도술이 있을 것이니, 어찌 이 같은 조그마한 물을 건너기를 염려하시며 아녀자와 길을 다투십니까?”
 
38
성진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39
"모든 낭자의 뜻을 보니 이는 반드시 값을 받고 길을 빌려주시고자 하는 것이니, 본디 가난한 중이라 다른 보화는 없고 다만 행장에 지닌 백팔염주가 있으니, 빌건대 이것으로 값을 드리겠습니다.“
 
40
하고, 목의 염주를 벗어 손으로 만지더니 복숭아꽃 한 가지를 던지거늘, 팔선녀가 그 꽃을 구경하니 꽃이 변하여 네 쌍의 구슬이 되어 그 빛이 땅에 가득하고 상서로운 기운은 하늘에 사무치니 향내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41
팔선녀가 그제야 일어나 움직이며 말하였다.
 
42
“과연 육관대사의 제자구나.”
 
43
하며, 각각 하나씩 손에 쥐고 성진을 서로 돌아보고 웃으며 바람을 타고 공중을 향해 갔다. 성진이 홀로 돌다리 위에서 눈을 들어보니 팔선녀는 간 곳이 없었다.
 
44
한참 후에 채색 구름이 흩어지고 향내가 사라지니 성진이 마음을 진정치 못하여 홀린 듯 취한 듯 돌아와 용왕의 말씀을 대사께 아뢰자, 대사가 말하였다.
 
45
“어찌 늦었는가?”
 
46
성진이 대답해 말하였다.
 
47
“용왕이 심히 만류하기에 차마 떨치지 못하여 지체하였습니다.”
 
48
대사가 대답하지 아니하고,
 
49
“네 방으로 가라.”
 
50
하였다. 성진이 돌아와 밤에 혼자 빈방에 누우니 팔선녀의 말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얼굴 빛은 눈에 아른거려 앞에 앉아 있는 듯, 옆에서 당기는 듯 마음이 황홀하여 진정치 못하다가 문득 생각하였다.
 
51
‘남자로 태어나서 어려서는 공자와 맹자의 글을 읽고, 자라서는 요순 같은 임금을 섬겨, 나가면 백만 대군을 거느려 적진에 횡행하고, 들어서는 백관(百官)을 장악하는 재상이 되어 몸에는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에는 황금으로 만든 도장을 차고,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달래며, 눈에는 아리따운 미색을 희롱하고, 귀에는 좋은 풍류 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당대에 자랑하고 공명을 후세에 전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대장부의 일일 텐데 슬프다, 우리 불가는 다만 한 바리때 밥과 한 잔 정화수요, 수삼 권 경문과 백팔염주일 따름이요, 그 도가 허무하고 그 덕이 사라져 없어지니, 가령 도통한 들 넋이 한번 불꽃 속에 흩어지면 뉘 한낱 성진이 세상에 났던 줄을 알리오.’
 
52
이럭저럭 잠을 이루지 못하여 밤이 이미 깊었다, 눈을 감으면 팔선녀가 앞에 앉았고 눈을 떠보면 문득 간 데가 없었다. 성진이 크게 뉘우쳐 말하였다.
 
53
“불법(佛法)공부는 마음을 정하는 것이 제일인데 이 사사로운 마음이 이렇듯 일어나니 어찌 앞날을 바라겠는가?”
 
54
하고, 즉시 염주를 굴리며 염불을 하는데 갑자기 창 밖에서 동자가 급히 말하였다.
 
55
“사형는 주무십니까? 사부께서 부르십니다.”
 
56
성진이 크게 놀라 동자를 따라 바삐 들어가니 대사가 모든 제자를 거느려 있는데 촛불이 대낮 같았다. 대사가 크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57
“성진아, 네 죄를 아느냐?"”
 
58
성진이 크게 놀라 신을 벗고 뜰에 나려 엎드려 말하였다.
 
59
“소자가 사부를 섬긴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조금도 불순불공한 일이 없었으니 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60
대사가 크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61
“네 용궁에 가 술을 먹었으니 그 죄도 있거니와 오가다 돌다리 위에서 팔선녀와 함께 언어를 희롱하고 꽃 꺾어 주었으니 그 죄 어찌하며, 돌아온 후 선녀를 그리워하여 불가의 경계는 전혀 잊고 인간 부귀를 생각하니 그러하고서 공부를 어찌 하겠느냐, 네 죄가 중하여 이곳에 있지 못할 것이니, 네 가고자 하는 데로 가거라.”
 
62
성진이 머리를 두드리고 울며 말하였다.
 
63
“소자가 죄 있어 아뢸 말씀이 없지만, 용궁에서 술을 먹은 것은 주인이 힘써 권하였기 때문이요, 돌다리에서 수작한 것은 길을 빌리기 위함이었고, 방에 들어가 망령된 생각이 있었지만 즉시 잘못인 줄을 알아 다시 마음을 정하였으니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설사 죄가 있다면 종아리나 때리셔 경계하실 것이지 박절하게 내치십니까? 소자가 십이 세에 부모를 버리고 친척을 떠나 사부님께 의탁하여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으니, 그 뜻을 말한다면 부자의 은혜가 깊고 사제의 분별이 중하니, 사부를 떠나 연화도량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 하십니까?”
 
64
대사가 말하였다.
 
65
“네 마음이 크게 변하여 산중에 있어도 공부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사양치 말고 가거라, 연화봉을 다시 생각한다면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66
하고, 이어서 크게 소리쳐 황건역사(黃巾力士)를 불러 분부하여 말하였다.
 
67
“이 죄인을 압송하여 풍도(豐都)에 가 염라대왕께 부쳐라.”
 
68
성진이 이 말씀을 듣고 간장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머리를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사죄하여 말하였다.
 
69
“사부, 사부님은 들으십시오. 옛적 아란존자(阿難尊者)는 창가(娼家)에 가 창녀와 동침하였지만 석가여래께서 오히려 죄하지 아니하였으니, 소자가 비록 근신하지 않은 죄가 있으나 아란존자에게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데, 어찌 연화봉을 버리고 풍도로 가라 하십니까?”
 
70
대사가 말하였다.
 
71
“아란존자는 비록 창녀와 동침하였으나 그 마음은 변치 아니 하였지만, 너는 한번 요색(妖色)을 보고 전혀 본심을 잃으니 어찌 아란존자와 비교하겠는가?”
 
72
성진이 눈물을 흘리고 마지 못하여 부처와 대사께 하직하고 사형(師兄)과 사제(師弟)를 이별하고, 사자(使者)를 따라 수만 리를 행하여 음혼관(陰魂關) 망향대(望鄕臺)를 지나 풍도에 들어가니 문을 지키는 군졸이 말하였다.
 
73
“이 죄인은 어떤 죄인이요?”
 
74
황건역사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75
“육관대사의 명으로 이 죄인을 잡아왔노라.”
 
76
귀졸(鬼卒)이 대문을 열자, 역사(力士)가 성진을 데리고 삼라전(森羅殿)에 들어가 염라대왕께 뵈니 대왕이 말하였다.
 
77
“화상(和尙)이 몸은 비록 연화봉에 매였으나, 화상 이름은 지장왕(地藏王) 향안(香案)에 있어 신통한 도술로 천하 중생을 건질까 하였는데, 이제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느냐?”
 
78
성진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고하여 말하였다.
 
79
“소승이 사리가 밝지 못하여 사부께 죄를 짓고 왔으니, 원컨대 대왕은 처분하십시오.”
 
80
한참 후에 또 황건역사가 여덟 죄인을 거느리고 들어오자, 성진이 잠깐 눈을 들어 보니 남악산 팔선녀였다.
 
81
염라대왕이 또 팔션녀에게 물었다.
 
82
“남악산 아름다운 경치가 어떠하기에 버리고 이런 데 왔느냐?”
 
83
선녀 등이 부끄러움을 머금고 대답해 말하였다.
 
84
“첩 등이 위부인 낭랑의 명을 받아 육관대사께 문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성진 화상을 만나 문답한 말씀이 있었는데 대사가, 첩 등이 좋은 경계를 더럽게 하였다 하여 위부인께 넘겨 첩 등을 잡아 보냈습니다. 첩 등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다 대왕의 손에 매였으니, 원컨대 좋은 땅을 점지해 주십시오”.
 
85
염라대왕이 즉시 지장왕(地藏王)께 보고하고 사자(使者) 아홉 사람을 명하여 성진과 팔선녀를 이끌고 인간 세상으로 보냈다.
 
86
각설이라.
 
87
성진이 사자를 따라 가는데 문득 큰 바람이 일어 공중에 떠 천지를 분간치 못하였다. 한 곳에 다다라 바람이 그치자 정신을 수습하여 눈을 떠보니 비로소 땅에 서있었다.
 
88
한 곳에 이르니 푸른 산이 사면으로 둘러 있고 푸른 물이 잔잔한 곳에 마을이 있었다. 사자가 성진을 기다리게 하고 마을로 들어간 후, 성진이 한 참 서서 들으니 서너 명의 여인이 서로 말하기를,
 
89
“양처사 부인이 오십이 넘은 후에 태기가 있어 임신한 지 오래인데 지금 해산치 못하니 이상하다.”
 
90
하더라.
 
91
한참 후에 사자가 성진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92
“이 땅은 곧 당나라 회남도(淮南道) 수주(秀州) 고을이요, 이 집은 양처사의 집이다. 처사는 너의 부친이요, 부인 유씨는 네 모친이다. 네 전생의 연분으로 이 집 자식이 되었으니 너는 네 때를 잃지 말고 급히 들어가라.”
 
93
성진이 들어가며 보니 처사는 갈건(葛巾)을 쓰고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화로에서 약을 다리고 있었다. 부인이 이제 막 신음하자, 사자가 성진을 재촉하여 뒤에서 밀쳤다. 성진이 땅에 업어지니 정신이 아득하여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하였다. 급히 소리쳐 말하였다.
 
94
“나 살려! 나 살려!”
 
95
그러나, 소리가 목구멍 속에 있어 능히 말을 이루지 못하고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만 나왔다. 부인이 이에 아기를 낳으니 남자였다. 성진이 다만 오히려 연화봉에서 놀던 마음이 역력하더니 점점 자라 부모를 알아 본 후로 전생 일을 아득히 생각지 못하였다.
 
96
양처사가 아들을 낳은 후에 매우 사랑하여 말하였다.
 
97
“이 아이의 골격이 맑고 빼어나니 천상의 신선이 귀양 왔다.”
 
98
하고, 이름을 소유라 하고, 자는 천리라 하였다. 양생이 십여 세에 이르러 얼굴이 옥 같고 눈이 샛별 같아 풍채가 준수하고 지혜가 무궁하니 실로 대인군자였다.
 
99
하루는 처사가 부인에게 말하였다.
 
100
“나는 세속 사람이 아니요, 봉래산 선관(仙官)으로서 부인과 전생 연분이 있어 내려왔는데, 이제 아들을 낳았으니 나는 봉래산으로 가거니와 부인은 말년에 영화를 보시고 부귀를 누리시오.”
 
101
하고, 학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갔다.
 
102
처사가 승천한 후에 양생이 이십 세를 당하여 얼굴은 백옥 같고, 글은 이적선(李謫仙)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王羲之)같고, 지혜는 손빈(孫殯) 오기(吳起)도 미치지 못하였다.
 
103
하루는 성진이 모친께 아뢰어 말하였다.
 
104
“들어보니 과거 시험이 있다 합니다. 소자 모친 슬하를 떠나 서울 황성에 유학하고자 합니다.”
 
105
유씨가 그의 뜻이 본디 평범하지 않음을 보고 만리 밖에 보내기 민망하지만, ‘공명을 얻어 가문을 보전할까 한다.’ 하고, 즉시 봉황이 새겨진 금비녀를 팔아 행장을 차려주니, 양생이 모친께 하직하고 한 필 나귀와 삼척 서동(書童)을 데리고 떠났다.
 
106
한 곳에 도달하니 수양버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작은 누각이 있어 단청은 밝게 빛나고 향기 진동하니 이 땅은 화주 화음현(華州 華陰懸)이었다. 소유가 춘흥을 이기지 못하여 버들을 비스듬히 잡고 <양류사(楊柳詞)>를 지어 읊으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107
버드나무 푸르러 베 짠 듯하니,
 
108
긴 가지 그림 같은 누각에 드러웠구나.
 
109
원컨대 부지런히 심으세요.
 
110
이 버들이 가장 멋지다오.
 
111
또 하였으되,
 
112
버드나무 어찌 이리 푸르고 푸를까?
 
113
긴 가지 비단 기둥에 드리웠구나.
 
114
원컨대 그대는 잡아 꺽지 마오.
 
115
이 나무가 가장 다정하다오.
 
116
하고 읊으니 그 소리 청아하여 옥을 깨치는 듯 하였다.
 
117
이때 그 누각 위에 옥 같은 처자가 있으니 이제 막 낮잠을 자다가 그 청아한 소리를 듣고 잠을 깨어 생각하되,
 
118
‘이 소리는 필연 인간의 소리가 아니다. 반드시 이 소리를 찾으리라.’
 
119
하고, 베개를 밀치고 주렴을 반만 걷고 옥난간에 비껴서서 사방을 두루 볼 때, 갑자기 양생과 눈이 마주치니 그 처자의 눈을 초생달 같고, 얼굴은 빙옥 같으며, 머리 구비가 헝클어져 귀밑에 드리워졌고, 옥비녀는 비스듬히 옷깃에 걸친 모양이 낮잠 자던 흔적이었다. 그 아리따운 거동을 어디 다 헤아리겠는가.
 
120
이때 서동이 객점(客店)에 가 묵을 것을 잡고 와 양생께 고하여,
 
121
“저녁밥이 다 되었으니 행차하십시오.”
 
122
라고 하자, 그 처자가 부끄러워 주렴을 걷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양생이 홀로 누각 아래에서 속절없이 바라보니, 지는 날 빈 누각에 향내뿐이었다. 지척이 천리되고 약수(弱水)가 멀어지니 양생이 할 수 없이 서동을 데리고 객점으로 돌아와 애만 태웠다.
 
123
대개 이 처자의 성은 진씨요, 이름은 채봉이니 진어사의 딸이다. 일찍이 자모를 잃고 동생이 없어, 그 부친이 서울 가 벼슬하는 까닭에 소저가 홀로 종만 데리고 머물렀는데, 뜻밖에 꿈 밖에서 양생을 만나 그 풍채와 재주를 보고 심신이 황홀하여 말하였다.
 
124
“여자가 장부를 섬기기는 인간의 대사요 백년고락이라. 옛날 탁문군(卓文君)이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찾아갔으니 처자의 몸으로 배필을 청하기는 가하지 않지만, 그 상공의 거주지와 성명을 묻지 아니 하였다가 후에 부친께 고하여 매파를 보내려 한들 어디 가서 찾겠는가?”
 
125
하고, 즉시 편지를 써 유모를 주어 말하였다.
 
126
“객점에 가 나귀를 타고 이 누각 아래에 와 <양류사>를 읊던 상공을 찾아 이 편지를 전하고 내 몸이 의지하고자 하는 뜻을 알게 하라.”
 
127
유모가 말하였다.
 
128
“이후에 어사도가 노하여 물으시면 어찌하시렵니까?”
 
129
소저가 말하였다.
 
130
“이는 내가 당할 것이니 염려치 말라.”
 
131
유모가 말하였다.
 
132
“그 상공이 이미 배필을 정하였으면 어찌하시렵니까?”
 
133
소저가 한참을 생각다가 말하였다.
 
134
“불행히도 배필을 정하였으면 이 상공의 소첩됨이 부끄럽지 아니할 것이다. 또 그 상공을 보니 소년이어서 취처(娶妻)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의심 말고 가라.”
 
135
유모가 객점으로 가니, 이때 양생이 객점 밖에서 두루 걸으며 글을 읊다가 늙은 할미가 <양류사>읊은 나그네를 찾는 것을 보고 바삐 나아가 물어 말하였다.
 
136
“<양류사>는 내가 읊었는데 무슨 일로 찾는가?”
 
137
유모가 말하였다.
 
138
“여기서 할 말씀이 아니오니 객점으로 들어가십시오.”
 
139
양생이 유모를 이끌고 객점에 들어가 급히 물으니 유모가 말하였다.
 
140
“<양류사>를 어디서 읊으셨습니까?”
 
141
양생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142
“나는 먼 지방 사람으로 지나다가 마침 한 누각을 보니 양류 춘색(楊柳春色)이 볼만하기에 흥에 겨워 시 한 수를 읊었는데 어찌 묻는가?”
 
143
유모가 말하였다.
 
144
“낭군께서 그때 상면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145
양생이 말하였다.
 
146
“마침 하늘의 신선이 누각에 있어 아리따운 거동과 기이한 향내가 이제 까지 눈에 있어 잊지 못한다.”
 
147
유모가 말하였다.
 
148
“그 집은 진어사댁이요, 처자는 우리 소저인데 소저가 마음이 총명하고 눈이 밝아 사람을 잘 알아 잠깐 상공을 보시고 몸을 의탁고자 하되, 어사께서 바야흐로 경성에 계시니 이후로 매파를 통하고자 한들 상공이 한번 떠난 후에는 종적을 찾을 길이 없어 노첩(老妾)으로 하여금 사시는 곳과 성명과 취처 여부를 알고자 하여 왔습니다.”
 
149
생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150
“내 성은 양씨요, 이름은 소유요, 집은 초나라 수주 고을이요, 나이 어려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고, 노모가 계시니 혼례를 지내기는 서로 부모께 고하여 해하겠지만 배필 정하기는 한마디로 결단하겠다.”
 
151
유모가 크게 기뻐하여 봉한 편지를 내어드리자, 떼어보니 <양류사>에 화답한 글이었다.
 
152
그 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153
누각 앞에 양류를 심기는
 
154
낭군의 말 매게 함입니다.
 
155
어찌 이 버들을 꺽어 채를 만들어
 
156
장대(章臺) 길로 가기를 향하시는지요?
 
157
양생이 이글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였다.
 
158
“옛날 왕유(王維)와 이백(李白)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159
즉시 채전(彩箋)을 빼어 한 수 글을 지어 써서 유모를 주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160
양류 천만 실이
 
161
실마다 마음을 맺었습니다.
 
162
원컨대 달 아래 만나
 
163
즐거운 봄소식을 맺을까 하오.
 
164
유모가 받아 품 안에 넣고 객점 문 밖에 나가자 양생이 다시 불러 말하였다.
 
165
“소저는 진 땅 사람이요, 나는 초 땅 사람이라서, 산천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소식을 통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오늘날 이룬 징표가 없으니, 생각건대 달빛을 타 서로 상대하여 굳게 약속하여 정함이 어떠한가?”
 
166
노모가 허락하고 가서는 즉시 돌아와 소저의 말씀을 양생에게 전하여 말하였다.
 
167
“성례(成禮)전에 서로 보기가 지극히 편치 못하지만, 내 그대에게 의탁코자 하는데 어찌 말씀을 어기겠습니까. 밤에 서로 만나보면 남의 말도 있을 것이요, 부친이 아시면 반드시 죄를 주실 것이니, 원컨대 밝은 날 길에서 만나 약속을 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168
양생이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169
“소저의 영민한 마음은 남에게 미칠 바가 아니구나.”
 
170
하고, 유모를 사례하여 보냈다.
 
171
양생이 객점에서 자는데 마음에 잊혀지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 닭 우는 소리를 기다리더니, 한참 후에 날이 장차 밝으려 하자 생이 서동을 불러 말을 먹이는데, 갑자기 큰 규모의 군대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 문득 바라보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생이 크게 놀라 옷을 떨쳐 입고 문 밖에 내달아 보니 피난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달아나거늘, 생이 황망히 연고를 묻자, ‘신책장군(神策將軍) 구사량(仇士良)이란 사람이 나라를 배반하여 자칭 황제라 하고 군병을 일으키자 천자께서 진노하시어 신책의 대병을 단번에 쳐 파하니 도적이 패군하여 온다.’ 하거늘, 생이 더욱 크게 놀라 서동을 재촉하여 피난하여 도망할 때, 갈 바를 몰라 남전산으로 들어가 피하고자 하였다. 아이를 재촉하여 들어가며 좌우를 살펴 산수를 구경하다가, 문득 보니 절벽 위에 수간 초당이 있는데 구름에 가렸고 학의 소리가 들리거늘, ‘분명 인가가 있다.’ 하고, 바위 사이 돌길로 올라 찾아가니 한 도사가 자리 위에 비스듬히 앉았다가 양생을 보고 기뻐하여 물어 말하였다.
 
172
“너는 피난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회남 양처사의 아들이 아니냐?”
 
173
양생이 나아가 재배하며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여 말하였다.
 
174
“소생은 양처사의 아들입니다. 아비를 이별하고 다만 어미를 의지하여 재주가 심히 미련하나 먕령되이 요행으로 과거를 보려 화음 땅에 이르렀는데 난리를 만나 살기를 도모하여 이곳에 와 오늘날 선생을 만나 부친의 소식을 듣기는 하늘이 명하신 일입니다. 이제 대인의 궤장(几杖)을 모셨으니, 엎드려 빌건대 부친은 어디 계시며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원컨대 한 말씀을 아끼지 마십시오.”
 
175
도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176
“네 부친이 아까 자각봉에서 나와 바둑을 두었는데 어디로 간 줄을 알겠느냐. 얼굴이 아이 같고 머리카락이 세지 아니하였으니 그대는 염려치 말라”
 
177
양생이 또 울며 청하여 말하였다.
 
178
“원컨대 선생의 도움으로 부친을 뵙게 하십시오.”
 
179
도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180
“부자간 지극한 정이 중하나 신선과 범인(凡人)이 다르니 보기 어렵다. 또 삼산(三山)이 막연하고 십주(十洲)가 아득하니 네 부친의 거취를 어디 가서 찾겠는가, 너는 부질없이 슬퍼 말고 여기서 머물며 난리가 평정된 후에 내려가거라.”
 
181
양생이 눈물을 씻고 앉았는데 도사가 갑자기 벽 위의 거문고를 가리켜 말하였다.
 
182
“너는 저것을 하느냐?”
 
183
생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184
“소자가 좋아하지만 선생을 만나지 못하여 배우지는 못하였습니다.”
 
185
도사가 동자를 시켜 거문고를 내려와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네 곡조를 가르치니, 그 소리는 청아하고 맑고 또렷하여 인간 세상에서 듣지 못하던 소리였다. 도사가 생에게 타라고 하자, 양생이 도사의 곡조를 본받아 타니 도사가 기특히 여겨 옥퉁소 한 곡조를 불며 생을 가르치니 생이 또 능히 따라하였다.
 
186
도사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187
“이제 한 거문고와 한 퉁소를 네게 주니 잃어 버리지 말아라. 이후에 쓸 때가 있을 것이다.”
 
188
생이 감사히 절을 하고 말하였다.
 
189
“소생이 선생을 만나기도 부친의 인도하심이요, 또 선생은 부친의 친구이시니 어찌 부친과 다르겠습니까? 바라건데 선생을 모셔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190
도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191
“인간의 공명이 너를 따르니 네 아무리 하여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나와 같은 노부(老夫)를 쫓아 속절없이 늙겠느냐? 말년에 네 돌아갈 곳이 있으니 우리와 상대할 사람은 아니다.”
 
192
양생이 다시 재배하고 말하였다.
 
193
“소자가 화음 땅의 진씨 여자와 혼사를 의논하였는데, 난리에 바쁘게 도망하였으니 이 혼사가 되겠습니까?”
 
194
도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195
“네 혼사는 여러 곳에 있지만 진씨와의 혼사는 어두운 밤 같으니 생각지 말아라.”
 
196
양생이 도사를 모시고 자는데 문득 동방이 밝았다.
 
197
도사가 생을 불러 말하였다.
 
198
“이제 난이 평정되었고 과거는 다음 봄으로 기한이 옮겨졌다. 대부인이 너를 보내고 주야로 염려하시니 어서 가거라.”
 
199
하고, 행장을 차려 주었다. 양생이 상하에 내려 재배하고 거문고와 퉁소를 가지고 동구 밖으로 나와 돌아보니 그 집이며 도사는 간 데 없었다.
 
200
처음에 양생이 들어갈 때는 춘삼월이어서 화초가 만발하였는데 나올 때에는 국화가 만발하였기에 이상하게 여겨 행인에게 물으니 추팔월이었다. 어찌 도사와 하룻밤 잔 것이 이토록 오래인가, 헛된 것이 세상이로다. 양생이 나귀를 재촉하여 몰아 진어사 집을 찾아오니 양류는 간 데 없고 집이 다 쑥밭이 되어 있었다. 생이 속절없이 빈 터에 서서 소저의 <양류사>를 읊으며 소식을 묻고자 하였지만, 인적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객점으로 가 물어 말하였다.
 
201
“저 진어사 가솔(家率)이 어디로 갔는가?”
 
202
주인이 탄식하여 말하였다.
 
203
“상공이 듣지 못하셨군요? 진어사는 역적에 참여하여 죽고 그 소저는 서울로 잡혀갔는데, 혹 죽었다 하고, 혹 궁중 노비가 되었다 하니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204
양생이 이 말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말하였다.
 
205
“남전산 도사가 진씨 혼사는 어두운 밤 같다 하더니, 진소저는 분명히 죽었구나.”
 
206
하고, 즉시 행장을 꾸려 출발해 수주로 향하였다.
 
207
이때 유씨가 생을 보낸 후에 경성이 어지러움을 듣고 주야로 염려하더니 문득 생을 보고 내달아 붙들고 울며 죽었던 사람을 다시 본 듯하였다.
 
208
“작년 황성에 가 난리 중에 위태로운 지경을 면하고 살아와 모자가 다시 상면하기도 천행이요, 또 네 나이가 어리니 공명은 바쁘지 아니하나 내 너를 만류치 아니함은 이 땅이 좁고 또 궁벽하기 때문이다. 네 나이 십륙 세니 배필을 구할 것이지만 가문과 재주와 얼굴이 너와 같은 사람이 없구나. 경성 춘명문 밖에 자청관(紫淸觀)의 두련사(杜鍊師)라 하는 사람은 나의 외사촌 형제다. 지혜가 넉넉하고 기개와 도량이 평범치 않아 모든 명문귀족을 다 알고 있다. 내가 편지를 부치면 바드시 너를 위하여 어진 배필을 구해 줄 것이다.”
 
209
하고, 편지를 주거늘 생이 행장을 차려 하직하고 떠났다.
 
210
낙양 땅에 이르니 낙양은 천자가 머무는 수도(首都)이다. 번화한 풍경을 구경코자 하여 천진교(天津橋)에 이르니 낙숫물은 동정호를 지나 천리 밖으로 흐르고, 다리는 황룡이 굽이를 편 듯한데 다리 가에 한 누각이 있으니 단청은 찬란하고 난간은 층층하였다. 금안장을 한 좋은 말들은 좌우에 매어 있고 누각의 비단 장막은 은은한 가운데 온갖 풍류 소리가 들리거늘 생이 누각 아래에 다달아 물어 말하였다.
 
211
“이 어떠한 잔치인가?”
 
212
다 이르되,
 
213
“모든 선비가 일대 이름난 기생을 데리고 잔치합니다.”
 
214
양생이 이 말을 듣고 취흥을 이기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 누각 위에 올라가니, 모든 선비가 미인 수십 사람을 데리고 서로 좋은 자리 위에 앉아 떠들썩하며 담소가 단란하다가 양생의 거동과 풍채가 깨끗함을 보고 다 일어나 읍하여 맞아 앉았다. 성명을 통한 후에 노생이라 하는 선비가 물어 말하였다.
 
215
“내 양형의 행색을 보니 분명 과거를 보러 가십니까?”
 
216
생이 말하였다.
 
217
“과연 재주는 없지만 굿이나 보러 가거니와 오늘 잔치는 한갓 술만 먹고 노는 일이 아니라 문장을 다투는 뜻이 있는 듯합니다. 소제(小弟)와 같은 사람은 먼 지방 미천한 사람으로 나이가 어리고 견식이 심히 천하고 비루하니 용렬한 재주로 여려 공의 잔치에 참여함이 극히 외람됩니다.”
 
218
모든 선비가 양생이 나이가 젊고 언어가 겸손함을 보고 오히려 쉽게 여겨 말하였다.
 
219
“과연 그러하지만 양형은 후에 왔으니 글을 짓거나 말거나 하고 술이나 먹고 가시오.”
 
220
하고, 이어서 잔 돌리기를 재촉하고 온갖 풍류를 일시에 울리게 하였다.
 
221
생이 눈을 들어보니 모든 창기는 각각 풍악을 가지고 즐겼지만, 한 미인이 홀로 풍류도 아니하고 말도 아니 하며 앉았는데 아름다운 얼굴과 얌전한 태도가 정말로 국색(國色)이었다. 한번 보자 정신이 황홀하여 정처가 없고, 그 미인도 자주 추파를 들어 정을 보내는 듯하였다.
 
222
생이 또 바라보니 그 미인의 앞 흰 옥으로 된 책상에 글 지은 종이가 여러 장 있거늘, 생이 여러 선비를 향하여 읍하고 말하였다.
 
223
“저 글이 다 모든 형들의 글입니까? 주옥 같은 글을 구경함이 어떠합니까?”
 
224
여러 선비가 미처 대답하지 못 할 때, 그 미인이 급히 일어나 그 글을 받들어 양생 앞에 놓거늘, 양생이 차례로 보니 그 글이 놀라운 글귀가 없고 평범하였다. 생이 속으로 말하였다.
 
225
“낙양은 인재가 많다 하더니 이것으로 보면 헛된 말이로다.”
 
226
그 글을 미인에게 주고 여러 선비께 읍(揖)하여 말하였다.
 
227
“궁벽한 벽지의 미천한 선비가 상국의 문장을 구경하니 어찌 즐겁지 아니 하겠습니까?”
 
228
이때 여러 선비가 술이 다 취하여서 웃으며 말하였다.
 
229
“양형은 다만 글만 좋은 줄 알고 더욱 좋은 일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는 구려.”
 
230
양생이 말하였다.
 
231
“소제가 모든 형의 사랑함을 입어 함께 취하였는데 더욱 좋은 일을 어찌 말하지 아니하십니까?”
 
232
왕생이라 하는 선비가 웃으며 말하였다.
 
233
“냑양은 예부터 인재의 고장이오, 이번 과거의 방목(榜目) 차례를 정하고자 하는데, 저 미인의 성은 계요, 이름은 섬월이오, 한갓 얼굴 아름답고 가무 출중한 뿐 아니라 글을 알아보는 슬기 또한 신통하여 한번 보면 과거의 합격과 낙제를 정하기에, 우리도 글을 지어 계랑과 오늘밤 연분을 정하고자 하니 어찌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소, 양형 또한 남자라 좋은 흥이 있거든 우리와 함께 글을 지어 우열을 다툼이 어떠하오?”
 
234
생이 말하였다.
 
235
“여러 형들의 글은 지은 지 오래니 누구의 글을 취하여 읊었습니까?”
 
236
왕생이 말하였다.
 
237
“아직 불만족해 하고 붉은 입술과 흰 이를 열어 양춘곡조(陽春曲調)를 아뢰지 아니하니 분명히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 그러한가 하오.”
 
238
양생이 말하였다.
 
239
“소제는 글도 잘 못하거니와 하물며 국외인(局外人)이라 여러 형과 재주를 다투는 것이 미안 합니다.”
 
240
왕생이 크게 말하였다.
 
241
“양형의 얼굴이 계집 같지만, 어찌 장부의 기품이 아니오. 다만 양형이 글 지을 재주가 없다면 할 수 없겠지만 재주가 있다면 어찌 사양하려 하시오.”
 
242
생이 처음 계랑을 본 후에 시를 지어 뜻을 시험코자 하였지만, 여러 선비가 시기할까 주저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즉시 종이와 붓을 들어 거침없는 필체로 순식간에 세 장의 시를 쓰니, 바람 돗대가 바다에서 달리는 것 같고 목마른 말이 물에 닿은 것 같았다. 여러 선비들이 시 글귀가 민첩하고 필법(筆法)이 매우 생생함을 보고 크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43
양생이 여러 선비를 향해 읖하여 말하였다.
 
244
“이 글을 먼저 여러 선비께 드려야 마땅하나, 오늘 좌중의 시관(試官)은 곧 계랑입니다. 글 바칠 시각이 미치지 못하였습니까?”
 
245
하고, 즉시 시 쓴 종이를 계랑에게 주니 계랑이 샛별 같은 눈을 뜨며 옥 같은 소리로 높이 읊자, 그 소리는 외로운 학이 구름 속에 우는 듯, 짝 잃은 봉황이 달밤에 우지지는 듯하여 진나라의 쟁과 조나라의 거문고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246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247
초객(楚客)이 서유로입진(西遊路入秦)하니
 
248
주루래취낙양춘(酒樓來醉洛陽春)을.
 
249
월중단계(月中丹桂)를 수선절(誰先折)고?
 
250
금대문장(今代文章)이 자유인(自由人)을.
 
251
뜻은 다음과 같다.
 
252
초나라 손이 서쪽에서 놀다가 길이 진나라에 드니,
 
253
술집에 와 낙양춘 술에 취하였도다.
 
254
달 가운데 붉은 계수나무를 누가 먼저 꺽을고,
 
255
오늘날 문장이 스스로 사람이 있도다.
 
256
여러 선비가 처음에 양형을 쉽게 여겨 글을 지으라 하다가 양형의 글이 섬월의 눈에 든 것을 보고 낙담하여 계랑을 돌아보며 아무 말도 못하였다. 양생이 그 기색을 보고 갑자기 일어나 여러 선비에게 하직하고 말하였다.
 
257
“소제가 여러 형의 가엾게 여겨 돌보심을 입어 술이 취하니 감사하거니와 갈 길이 멀어 종일 담화치 못하겠습니다. 훗날 곡강연(曲江宴)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258
하고 내려가니 여러 선비가 만류지 아니하였다.
 
259
생이 누각에서 내려가자 계랑이 바삐 내려와 생에게 말하였다.
 
260
“이 길로 가시다가 길 가 분칠한 담장 밖에 앵두화가 성한 곳이 바로 첩의 집입니다. 원컨대 상공께서 먼저 가시어 첩을 기다리십시오, 첩 또한 곧 따라 가겠습니다.”
 
261
생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갔다.
 
262
섬월이 누각에 놀라가 여러 선비께 고하여 말하였다.
 
263
“모든 상공이 첩을 더럽게 아니 여기시어 한 곡조 노래로 연분을 정하셨으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264
여러 선비가 말하였다.
 
265
“양생은 객이라서 우리와 약속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거리낄 것 있겠는가?”
 
266
섬월이 말하였다.
 
267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어찌 옳다 하겠습니까? 첩이 병이 있어 먼저 가오니, 원컨대 상공들은 종일토록 즐기십시오.”
 
268
하고, 하직하고 천천히 걸어 누각에서 내려가니 여러 선비가 앙심을 품었지만 처음에 이미 언약이 있었고, 또 그 냉소하는 기색을 보고 감히 한 말도 못하였다.
 
269
이 때 생이 객점에 머물다가 날이 저물어 섬월의 집을 찾아가니 섬월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중당을 쓸고 촛불을 켜고 기다리는데, 생이 앵두화 나무에 나귀를 매고 문을 두드리며 불러 말하였다.
 
270
“계랑은 있느냐?”
 
271
섬월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신을 벗고 내달아 손을 이끌어 말하였다.
 
272
“상공께서 먼저 가셨는데 어찌 이제야 오십니까?”
 
273
생이 웃으며 말하였다.
 
274
“주인이 손을 기다려야 옳으냐, 손이 주인을 기다려야 옳으냐?”
 
275
서로 이끌고 중당에 들어가 옥 술잔에 술을 부어 취토록 권한 후에 원앙금침을 한 가지로 하니 초양대(楚陽臺)에서 무산(巫山) 신녀(神女)를 만난듯, 낙포(洛蒲) 왕모(王母) 선녀(仙女)를 만난 듯 그 즐거움을 어이 다 기록 하겠는가.
 
276
이럭저럭 밤이 깊었다. 섬월이 눈물을 머금고 탄식하여 말하였다.
 
277
“첩의 몸을 이미 상공께 의탁하였으니 첩의 사정을 잠깐 생각하십시오. 첩은 조 땅 사람입니다. 첩의 부친이 이 고을 태수가 되었는데 불행하여 세상을 버리신 후에 가세가 몰락하고 고향이 멀어서 천리 밖에 반장(返葬) 할 길이 없어, 첩의 계모가 첩을 백금을 받고 창가(娼家)에 팔아 장례를 치르니 첩이 차마 거스르지 못하여 슬픔을 머금고 몸을 굽혀 이제까지 부지하였는데, 천행을 입어 낭군을 만나니 해와 달이 다시 밝은 듯합니다. 원컨대 낭군께서 첩을 비루하게 생각지 아니 하신다면 물 긷는 종이나 될까 합니다.”
 
278
양생이 말하였다.
 
279
“나는 본디 가난하여 처첩을 둠이 어려우니 자당께 말씀드려 아내를 삼겠다.”
 
280
삼월이 앉아 말하였다.
 
281
“낭군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천하의 재주를 헤아리건대 낭군께 미칠 사람이 없습니다. 이번 과거 장원은 하려니와 승상의 인끈과 장군의 절월(節鉞)이 오래지 아니하여서 낭군께 돌아올 것이니 천하 미색이 누가 아니 쫓겠습니까? 어찌 저만한 사람으로 아내 삼기를 원하십니까? 낭군은 어진 아내를 구하여 대부인을 모신 후에 첩을 버리시지나 마십시오.”
 
282
생이 말하였다.
 
283
“내 일찍이 화음 땅을 지나다가 마침 진가 여자를 보니 그 얼굴과 재주가 계랑과 비슷하였는데 불행하게 죽었으니 어디 가서 다시 어진 아내를 얻겠는가?”
 
284
섬월이 말하였다.
 
285
“그 처자는 진어사의 딸 채봉입니다. 진어사가 낙양 태수로 오셨던 때에 첩이 그 낭자와 더불어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낭자 같은 얼굴과 재주는 과연 얻기 어렵거니와 이제는 속절없으니 생각지 마시고 다른 데 구혼하십시오.”
 
286
생이 말하였다.
 
287
“옛부터 천하 절색이 없다 하니 진낭자와 계낭자가 있는데 또 어디 가서 다시 구하겠는가?”
 
288
섬월이 웃으며 말하였다.
 
289
“낭군의 말씀이 진실로 우물안 개구리 같습니다. 우리 창가(娼家)로 말하면 절색이 셋이 있으니 강남의 만옥연이요, 하북의 적경홍이요, 낙양의 계섬월입니다. 첩은 모처럼 허황된 이름을 얻었지만 만옥연과 적경홍은 진실로 절색입니다. 어찌 천하에 절색이 없다 하겠습니까?”
 
290
생이 말하였다.
 
291
“저 두 낭자는 외람되게 계낭과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구나.”
 
292
섬월이 말하였다.
 
293
“옥년은 먼 지방 사람이라 보지는 못하였지만, 경홍은 저와 아주 형제 같으니 경홍의 일생 본말을 대충 고하겠습니다. 경홍은 곧 반주 양민의 딸입니다. 일찍 부모를 잃고 그 고모께 의탁하였는데 십 세부터 아주 빼어난 미색이 하북(河北)에 이름이 자자하여 근방 사람이 천금으로 구하는 사람이 많아 매파가 구름같이 모였지만 경홍이 모두 물리치니 매파가 고모에게 물어 말하였습니다. ‘동서로 모두 물리치니 어떤 훌륭한 신랑을 구하여야 고모의 뜻에 합당하겠습니까? 대승상의 총애하는 첩이 되고자 하시는가, 아니면 절도사의 부실(副室)이 되고자 하시는가, 이름난 선비에게 허락코자 하시는가, 뛰어난 재주를 가진 선비에게 보내고자 하시는가?’ 경홍이 크게 노하여 대답하여 말하였습니다. ‘진나라 때 동산(東山)에서 기생들을 모아들이던 사안석(謝安石)이 있으면 가히 대승상의 첩이 될것이요, 삼국 때 사람들에게 곡조 가르치던 주공근(周公瑾)이 있으면 가히 절도사의 첩이 될것이요, 현종 조에 청평사(淸平詞)를 드리던 한림학사가 있으면 가히 이름난 선비를 좇을 것이요, 무제 때 봉황곡(鳳凰曲)을 아뢰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곧 있으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선비를 가히 따를 것이라.’ 하니, 모든 매파가 크게 웃고 흩어졌습니다. 경홍이 첩과 함께 상국사(上國寺)에 놀러가 첩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진실로 뜻하던 군자를 만나거든 서로 천거하여 함께 한 사람을 섬겨 백년을 해로하자.’고 하여, 첩이 또한 허락하였는데 첩이 낭군을 만남에 문득 경홍을 생각하지만 경홍이 산동 제후의 궁중에 있으니 이는 분명히 호사다마(好事多魔)입니다. 왕후(王侯)의 희첩(姬妾)이 부귀가 극진하나 이것은 경홍의 소원이 아닙니다.”
 
294
이어서 탄식하여 말하였다.
 
295
“어찌 한번 경홍을 보고 이 정회를 풀겠습니까?”
 
296
양생이 말하였다.
 
297
“창가에 비록 재색이 많으나 사대부 집의 규수는 보지 못하니 어찌 알겠는가?”
 
298
섬월이 말하였다.
 
299
“내 눈으로 보건대 진낭자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장안 사람이 다 정사도의 여자가 요조한 얼굴과 유한한 덕행이 당세에 으뜸이라 하니 첩이 비록 보지는 못하였으나, ‘이름이 높으면 실속 없는 빈 명예가 없다.’ 하니, 원컨대 낭군은 경성에 가셔서 두루 방문 하십시오.”
 
300
이때 닭이 울어 날이 샛다.
 
301
섬월이 말하였다.
 
302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니 상공은 가십시오, 이후에 모실 날이 있을 것이니 아녀자를 위하여 떠나는 것을 슬퍼 마십시오. 하물며 어제 여러 공자들의 앙심 품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303
생이 오히려 눈물을 뿌리고 떠났다.
 
304
각설이라.
 
305
양생이 장안에 들어가 숙소를 정한 후에 주인에게 물어 말하였다.
 
306
“자청관이 어디에 있는가?”
 
307
주인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308
“저 춘명문 밖에 있습니다.”
 
309
생이 즉시 예단(禮緞)을 갖추고 두련사를 찾아가니 연사는 나이 육십이 넘었다. 생이 들어가 재배하고 그 모친의 편지를 드리니 연사가 그 편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310
“네 어머니와 이별한 지 이십여 년이 되었구나. 그후에 낳은 자식이 이렇듯 컸으니 세상 일월이 헛된 것이로다. 나는 세상 번화(繁華)를 버리고 세상 밖에 와 있거니와, 네 모친 편지를 보니 네 배필을 구하라 하였지만 네 풍채를 보니 진실로 신선이다. 아무리 구하여도 너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거니와 다시 생각할 것이니 훗날 다시 오너라.”
 
311
생이 말하였다.
 
312
“소자의 어머니께서 연세가 많으십니다. 소자의 나이가 십륙 세나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효도하여 봉양치 못하고 있으니, 원컨대 숙모님은 십분 염려하십시오.”
 
313
하직하고 갔다.
 
314
이때 과거 날이 가까웠지만 혼처를 정하지 못하였기에 과거의 뜻이 없어 다시 자청관에 가니 두연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315
“한 혼처 있는데 처자의 얼굴과 재주는 양랑과 배필이다. 귀족집 붉은 문이 겹겹이 되어 있고 계극(棨戟)을 문 밖에 베푼 데가 바로 그 집이다. 문벌이 가장 높은 사람이 육대공후(六代公侯)요, 삼대상국(三代相國)이라. 양랑이 이번에 장원 급제 하면 그 혼사를 바랄 것이나 그 전에는 의논하지 못할 것이니, 양랑은 나만 보채지 말고 착실히 공부하여 장원 급제를 하라.”
 
316
“누구의 집입니까?”
 
317
연사가 말하였다.
 
318
“춘명문 밖의 정사도 집이다. 사도가 한 딸을 두었는데 신선이요, 인간 사람이 아니다.”
 
319
생이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생각하되, ‘계섬월이 그런 말을 하더니 과연 그러한가’ 하여 물어 말하였다.
 
320
“정씨 여자를 숙모님이 친히 보셨습니까?”
 
321
연사가 말하였다.
 
322
“어찌 보지 못하였겠는가? 정소저는 진실로 하늘 나라 사람이요, 범인이 아니다. 어이 다 입으로 헤아리겠는가?”
 
323
생이 말하였다.
 
324
“어리 석지만 이번 과거는 내 손 안에 있어 염려치 아니하지만, 평생에 정한 뜻이 있으니 그 처자를 보지 못하면 결단코 구혼치 않고자 하니, 원컨대 불쌍히 여겨 그 소저를 보게 해 주십시오.”
 
325
연사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326
“재상집 처녀를 어이 보겠는가? 양랑이 이 노인을 믿지 아니하는구나.”
 
327
생이 말하였다.
 
328
“소자가 어찌 사부의 말씀을 의심하겠습니까마는 사람의 소견이 각각 다르니 사부의 소견이 소자와 다를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329
연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330
“봉황과 기린은 아무리 무식한 계집이라도 상서(祥瑞)로운 줄을 알아보고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은 아무리 지극히 천한 시골 사람이라도 높고 밝은 줄을 아는데, 노인의 눈이 아무리 밝지 못한들 사람 알기를 양랑만 못하겠는가.”
 
331
생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하였다.
 
332
“아무리 해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면 의심이 풀리지 아니하오니, 원컨대 사부는 모친께서 편지한 뜻을 생각하셔서 한번 보게 해 주십시오.”
 
333
연사가 말하였다.
 
334
“죽기는 쉬워도 정소저 보기는 어렵다. 어이하면 좋은가?”
 
335
하더니 갑자기 생각하여 말하였다.
 
336
“네가 혹시 음률을 아느냐?”
 
337
생이 말하였다.
 
338
“지난 해 한 도사를 만나 한 곡조를 배워 압니다.”
 
339
연사가 말하였다.
 
340
“재상가의 뜰이 엄숙하니 날지 못하면 들어갈 길 없고, 또 소저가 경서와 예문(禮文)을 능통하여 동정출입(動靜出入)을 예(禮)대로 하기에 문 밖에 나는 일이 없으니 어찌 그림자나 얻어 보겠는가. 다만 한 일이 있지만 양랑이 듣지 아니할까 염려되는구나.”
 
341
생이 이 말을 듣고 일어나 재배하여 말하였다.
 
342
“정소저를 볼 수만 있다면 하늘이라도 오를 것이요, 깊은 못이라도 들어 가리니 무슨 일을 듣지 아니하겠습니까?”
 
343
연사가 말하였다.
 
344
“정사도가 요사이 늙고 병들어 벼슬을 사양하고 원림(園林)에 돌아와 풍류만 일삼고, 부인 최씨는 거문고를 좋아하여 거문고를 잘 타는 객을 만나면 소저와 함께 곡조를 의논하는데, 소저가 지음(知音)을 잘 해서 한번 들으면 청탁고저를 모를 것이 없으니 비록 사광(師曠)이라도 더하지 못할 것이다. 양랑이 만일 거문고를 알면 분명히 보기 쉬울 것이다. 이월 그믐날은 정사도의 생일이라 해마다 시비를 보내어 향촉을 갖추어 수복(壽福)을 비니, 그때 양랑이 여도사(女道士)의 옷을 입고 거문고를 타면 시비가 보고 돌아가서 부인께 고하면 부인이 반드시 청할 것이고, 그러면 소저를 보기 분명 쉬울 듯하니 양랑은 연분만 기다리라.“
 
345
생이 크게 기뻐하여 날을 기다리다 이럭저럭 날이 당하니 정사도의 시비가 부인의 명으로 향촉을 가지고 왔거늘, 연사가 받아 삼청전(三淸殿)에 가서 불전에 가 공양하고 시비를 보낼 때, 이때 생이 여도사의 의관을 하고 별당에 앉아 거문고를 탔다. 시비가 하직하다가 문득 거문고 소리를 듣고 물어 말하였다.
 
346
“내 일찍이 부인 앞에서 이름난 거문고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이런 소리는 과연 듣지 못하였으니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입니까?”
 
347
연사가 말하였다.
 
348
“엊그제 나이 어린 여관(女官)이 초 땅에서 와 황성을 구경하고 여기 와 머물고 있다. 때때로 거문고를 타니 그 소리가 심히 사랑스럽더구나. 나는 본디 음률에 귀먹어 곡조를 모르는데 그대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잘 하는 것 같구나.”
 
349
시비가 말하였다.
 
350
“부인의 말씀을 들으면 반드시 청하실 것이니, 바라건대 사부님이 이 사람을 잡아두십시오.”
 
351
연사가 말하였다.
 
352
“그대를 위하여 잡아두겠다.”
 
353
하고 시비를 보냈다.
 
354
생이 이 말을 듣고 부인의 부르심을 기다리더니, 시비가 돌아가 부인께 고하여 말하였다.
 
355
“자청관에 어떤 여관이 거문고를 타는데 그 소리가 진실로 들음직하였습니다.”
 
356
부인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357
“내 잠깐 듣고자 한다.”
 
358
하고, 즉시 시비를 자청관에 보내어 두련사께 청하여 말하였다.
 
359
“나이 어린 여관이 거문고를 잘 탄다 하니, 원컨대 도인(道人)은 권하여 보내십시오.”
 
360
연사가 시비를 데리고 별당에 가 양생에게 물어 말하였다.
 
361
“최부인께서 불러계시니 여관은 나를 위하여 잠깐 가봄이 어떠한가?”
 
362
생이 말하였다.
 
363
“먼 지방 천한 몸이 존귀한 댁 출입이 어려우나 대사께서 권하시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364
하고, 여도사의 옷을 입고 화관(花冠)을 바로 쓰고 거문고를 안고 나오니 선풍도골(仙風道骨)은 위부인과 사자연(謝自然)이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가마를 타고 정부(鄭府)에 가니 최부인이 중당에 앉았는데 위의가 엄숙하였다. 생이 당하에 나아가 재배하니 대부인이 시비를 명하여 자리를 주고 말하였다.
 
365
“우연히 시비로 인하여 신선의 음악 소리를 듣고자 하여 청하였는데 과연 여관을 보니 천상 선녀를 만난 듯하여 세상 마음이 다 없구나.”
 
366
생이 말하였다.
 
367
“첩은 본디 초나라 천한 사람이라 외로운 자취 구름같이 동서로 다니다가 오늘날 부인을 모시니 하늘의 뜻인가 합니다.”
 
368
부인이 생의 거문고를 취하여 무릎에 놓고 손으로 만지며 말하였다.
 
369
“이 재목이 진실로 묘하도다.”
 
370
생이 말하였다.
 
371
“이 재목(材木)은 용문산(龍門山)에서 백 년 자란, 오래 된 오동나무라 천금으로 사려고 하여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372
생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되, 이 사지(死地)에 들어오기는 소저를 보려 함인데 날이 늦어가도 소저를 보지 못하니 마음에 의심하여 부인께 고하여 말하였다.
 
373
“첩이 비록 예부터 전하여 오는 곡조를 타오나 청탁을 알지 못합니다. 자청관에 와 들으니 소저가 지음(知音)을 잘 하신다 하니 한 곡조를 아뢰어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자 하였는데 소저가 안에 계시니 마음이 섭섭합니다.”
 
374
부인이 시비를 시켜 즉시 소저를 불렀다. 한참 후에 소저가 비단 장막을 잠깐 걷고 나와 부인 앞에 앉으니 생이 일어나 절하고 앉으며 눈을 들어 바라보니 태양이 처음으로 붉은 안개 속에서 비취는 듯, 아리따운 연꽃이 물 가운데 피였는 듯 심신이 황홀하여 안정치 못하였다.
 
375
생이 생각하되, 멀리 앉아 소저의 얼굴을 자세히 못 볼까하여 일어나 다시 고하여 말하였다.
 
376
“한 곡조를 시험하여 소저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였는데, 화당(華堂)이 멀어 소리가 흩어지면 소저의 귀에 자세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377
부인이 즉시 시비를 명하여 자리를 옮겼다. 생이 고쳐 앉으며 거문고를 무릎 위에 놓고 줄을 고를 후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였다.
 
378
“아름답다, 곡조여! 이 곡조는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다. 도인의 수법은 신통하나 음난한 곡조니 들음직 하지 아니하다. 예부터 전해오는 다른 곡조를 듣고자 한다.”
 
379
생이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였다.
 
380
“이 곡조는 진후주(陳後主)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다. 망국조(亡國調)니 들음직 하지 아니하구나. 다른 곡조가 있으나?”
 
381
생이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였다.
 
382
“이는 채문희(蔡文姬)가 오랑캐에게 잡혀가 두 자식을 생각한 곡조라. 절개를 잃었으니 어찌 들음직 하겠는가?”
 
383
생이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였다.
 
384
“이는 왕소군(王昭君)의 <출새곡(出塞曲)>이다. 오랑캐 땅의 곡조니 어찌 들음직 하겠는가?”
 
385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였다.
 
386
“이 곡조를 듣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여관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옛날 혜숙야(嵇叔夜)의 <광릉산(廣陵散)>이라 하는 곡조다. 혜숙야가 도적을 쳐 파하고 천하를 맑게 하고자 하다가 뜻밖에 참소를 만남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이 곡조를 지었거니와 후세에 전할 사람이 없었는데 여관은 어디서 배웠느냐?”
 
387
생이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여 말하였다.
 
388
“소저의 총명은 세상에 없습니다. 소첩의 스승 말씀도 그러하였습니다.”
 
389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였다.
 
390
“이는 백아(佰牙)의 <수선조(水仙操)>다. 도인이 천백 년 후에 백아(佰牙)의 지음(知音)이구나.”
 
391
또 한 곡조를 타니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아 말하였다.
 
392
“이는 공부자(孔夫子)의 <의란조(倚蘭操)>다. 우뚝 높아서 어찌 이름을 붙이겠는가. 아름다움이여! 이에 지날 것이 없으니 어찌 다른 곡조를 원하겠는가?”
 
393
생이 말하였다.
 
394
“첩이 듣자오니 아홉 곡조를 이루면 천신이 내린다 하는데, 이미 여덟 곡조를 탔고 또 한 곡조가 남았으니 마저 탈까 합니다.”
 
395
줄을 고쳐 다스려 타니 그 소리가 청량하여 사람의 마음을 방탕케 하였다. 소저가 눈썹을 나직이 하고 말하지 아니하니 생이 곡조를 더욱 빠르게 몰아 쳐 소리가 호탕하였다.
 
396
“봉(鳳)이여, 봉이여.”
 
397
그 황(凰)을 구하는 곡조에 이르러 소저가 눈을 들어 생을 자주 돌아보며 옥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고 즉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자, 생이 놀라 거문고를 밀치고 소저가 가는 데만 보니, 부인이 말하였다.
 
398
“여관이 아까 탄 곡조는 무슨 곡조냐?”
 
399
생이 말하였다.
 
400
“선생께 배웠지만 곡조 이름은 알지 못하기에 소저의 가르치심을 듣고자 하였는데 소저는 아니 오십니까?”
 
401
부인이 시비를 명하여 소저를 부르시니 시녀가 돌아와 고하였다.
 
402
“소저가 반나절을 바람을 쏘여 기운이 편치 아니하다 합니다.”
 
403
생이 이 말을 듣고 소저가 아는가 하여 크게 놀라, ‘오래 머물지 못하겠구나.’하고, 즉시 일어나 재배하여 말하였다.
 
404
“듣자오니 소저가 옥체 불평하시다 하오니, 생각건대 부인이 진맥하실것 같아 소첩은 물러 가겠습니다.”
 
405
부인이 상으로 비단을 많이 주었지만 사양하며,
 
406
“첩이 천한 재주를 배웠으니 어찌 값을 받겠습니까?”
 
407
라 말하고 갔다.
 
408
부인이 즉시 들어가 물으시니, 소저의 병이 이미 나았다.
 
409
소저가 침소에 가 시녀에게 물어 말하였다.
 
410
“춘랑의 병이 어떠하냐?”
 
411
시녀가 말하였다.
 
412
“오늘은 잠깐 나아 소저가 거문고 소리를 희롱하심을 듣고 일어나 세수 하였습니다.”
 
413
춘운이 소저를 모시고 밤낮 함께 거처하니 비록 주인과 종의 분수는 있으나 정은 형제 같았다.
 
414
이날 소저의 방에 와 물어 말하였다.
 
415
“아침에 어떤 여관이 거문고를 가지고 와 좋은 소리를 탄다 하여 병을 억지로 참고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그 여관이 속히 갔습니까?”
 
416
소저가 낯빛이 붉어지며 가만히 대답하여 말하였다.
 
417
“내가 몸 가지기를 법대로 하고 말씀을 예대로 하여 나이가 십륙 세 되었지만 중문(中門) 밖에 나가 외인(外人)을 대면치 아니하였는데, 하루 아침에 간사한 사람에게 평생 씻지 못할 욕을 입으니 무슨 면목으로 너를 대면하겠는가.”
 
418
춘운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419
“무슨 일이기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420
소저가 말하였다.
 
421
“아까 왔던 여관이 얼굴이 아름답고 기상이 준수하였단다. 처음에 <예상우의곡>을 타고 나중에 <남훈곡(南薰曲)>을 타기에 내가 ‘진선진미(盡善盡味)하니 그만하라.’ 하였지만 또 한 곡조를 타니 이는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꼬이던 <봉구황곡(鳳求凰曲)>이었다. 그제서야 자세히 보니 그 여관이 얼굴은 아름다우나 기상이 호탕하여 아마도 계집이 아니었다. 분명 간사한 사람이 내 허명(虛名)을 듣고 춘색을 구경코자 하여 변복(變服)을 하고 온 것이니, 다만 춘랑이 병들어 보지 못한 것이 애닯구나. 춘랑이 곧 한번 보았으면 남녀를 구별하였을 것이다. 춘랑은 생각해 보라. 내 규중 처녀로서 평생에 보지 못하던 사내를 데리고 반나절을 서로 말을 주고 받았으니 천하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아무리 부모라도 차마 아뢰지 못하였는데 춘랑에게 말하노라.”
 
422
춘운이 웃으며 말하였다.
 
423
“소저는 여관의 <봉황곡>을 듣고 사마상여의 <봉황곡>은 아니었으니 어찌 그리 과하게 생각 하십니까. 옛날 사람이 잔 가운데 활 그림자를 보고 병들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그 여관이 얼굴이 아름답고 기상이 호방하며 음률을 능통하니 참으로 사마상여인가 합니다.”
 
424
소저가 말하였다.
 
425
“비록 사마상여라도 나는 탁문군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426
하루는 소저가 부인을 모시고 중당에 앉았는데 사도가 과거 방목(榜目)을 가지고 희색이 만연하여 들어오며 부인에게 말하였다.
 
427
“내 아기의 혼사를 정하지 못하여 밤낮으로 염려하였는데 오늘날 어진 사위를 얻었소.”
 
428
부인이 말하였다.
 
429
“어떤 사람입니까?”
 
430
사도가 말하였다.
 
431
“이번 장원한 사람은 성은 양씨요 이름은 소유요, 나이는 십륙 세요, 회남 땅 사람이오. 그 풍채는 두목지(杜牧之)요, 그 재주는 조자건(曹子健)이니 진실로 이 사람을 얻으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소.”
 
432
부인이 말하였다.
 
433
“열 번 듣는 것이 한번 보기만 못하다 하니 친히 본 후에 정하십시오.”
 
434
소저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 일어나 침소에 가 춘운에게 말하였다.
 
435
“저번에 거문고 타던 여관이 초 땅 사람이라 하더니 회남은 초 땅이다. 양장원이 분명히 부친께 뵈오려 올 것이니 춘랑은 자세히 보고 나에게 이르라.”
 
436
춘운이 웃으며 마하였다.
 
437
“나는 여관을 보지 못하였사오니 양장원을 본들 어찌 알겠습니까. 소저가 주렴 사이로 잠깐 보시면 어떠하겠습니까?”
 
438
소저가 말하였다.
 
439
“한번 욕을 먹은 후에 다시 볼 뜻이 있겠는가.”
 
440
이때 양장원이 회시(會試) 장원하고 이어서 급제 장원하여 한람학사를 하니 이름이 천하에 가득하였다. 명문 귀족의 딸 둔 집에서 매파를 보내어 구혼하는 집이 구름 모이 듯 하였다.
 
441
생이 정사도와의 혼사를 생각하여 다 물리쳤다. 하루는 한림이 정사도를 뵈오려 가 통하자 사도가 즉시 화당을 청소하고 맞는데, 한림이 머리에 계수나무 꽃을 꽂고 홍패(紅牌)와 한림 유지(諭旨)를 드리고 화동(花童)과 악공(樂工)이 각색 풍류를 울리며 사도께 뵈니, 풍채가 아름답고 예의를 지키는 태도나 행동이 거룩하여 사도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442
춘운이 시비 등을 불러 말하였다.
 
443
“이전에 거문고를 타던 여관이 아름답다 하더니 양한림과 어떠하더냐?”
 
444
다 이르되,
 
445
“그 여관의 얼굴과 아주 같습니다.”
 
446
춘운이 들어가 소저의 눈이 밝은 줄을 말하였다.
 
447
사도가 한림에게 말하였다.
 
448
“나는 팔자가 기구하여 아들이 없고 다만 딸자식이 있으되 혼처를 정하지 못하였으니 한림이 내 사위가 됨이 어떠한가?”
 
449
한림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였다.
 
450
“소자가 경성에 들어와 소저의 요조(窈窕)한 얼굴과 그윽한 재주와 덕행은 일찍이 들었지만 문벌이 하늘과 땅 사이처럼 다르고 인품이 봉황과 오작 같사오니 어찌 바라겠습니까마는 버리지 아니하시면 하늘 같은 은덕으로 여기겠습니다.”
 
451
사도가 크게 기뻐하여 술과 안주로 대접하였다.
 
452
한참 후에 부인이 소저를 불러 말하였다.
 
453
“새로 장원으로 뽑힌 양한림은 만인이 칭찬하는 바이다. 네 부친이 이미 혼인을 허락하셨으니 우리 부처는 몸을 의탁할 곳을 얻었구나. 무슨 근심이 있겠느냐.”
 
454
소저가 말하였다.
 
455
“시비의 말을 들으니 양한림이 전에 거문고를 타던 여인과 같다 하던데 그러합니까?”
 
456
부인이 말하였다.
 
457
“그래, 내가 그 여관을 사랑하여 다시 보고자 하였지만 자연 일이 많아 못하였는데, 오늘 양한림을 보니 그 여관을 다시 본 듯하여 즐거운 마음을 어찌 금하겠느냐.”
 
458
“양한림이 비록 아름다우나 소저에게 혐의가 있사오니 더불어 혼인함이 마땅치 아니합니다.”
 
459
부인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460
“너는 재상가 규중의 처녀요, 양한림은 회남 땅 사람이니 무슨 혐의가 있겠느냐?”
 
461
소저가 말하였다.
 
462
“소녀가 말씀 드리기 부끄러워 모친께 아뢰지 못하였지만 오늘 양한림은 이전에 거문고를 타던 여관입니다. 간사한 사람의 꾀에 빠져 종일 말을 주고 받았으니 어찌 혐의가 없겠습니까?”
 
463
부인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여, 사도가 한림을 보내고 바삐 들어와 소저를 불러 말하였다.
 
464
“경패야, 오늘날 용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경사를 보았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느냐.”
 
465
부인이 소저가 혐의하는 말을 아뢰자, 사도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466
“양랑은 진실로 만고의 풍류 남자로다. 옛적 왕유(王維)도 악공(樂工)이 되어 태평공주(太平公主)의 집에 들어가 비파(琵琶)를 타고 돌아와 장원급제함에 만고에 칭찬이 오래 전하였는데, 이제 한림이 또 기이한 일이로다. 또 너는 여관을 보고 한림을 보지 아니하였으니 무슨 혐의가 있겠느냐?”
 
467
소저가 말하였다.
 
468
“소저가 욕먹기는 부끄럽지 아니하오나, 제가 어질지 못하여 남에게 속은 것이 한이 됩니다.”
 
469
사도가 웃으며 말하였다.
 
470
“그것은 늙은 아비가 알 바가 아니다. 훗날 양한림에게 물어보아라.”
 
471
사도가 부인에게 말하였다.
 
472
“올 가을에 한림의 대부인을 모셔온 후 혼례는 행하겠지만 납채(納采)는 먼저 받을 것이오. 즉시 택일(擇日)하여 납채를 받고 한림을 데려와 화원 별당(別堂)에 두고 사위의 예로 대접할 것이오.”
 
473
하루는 부인이 한림의 저녁 반찬을 장만하는데 소저가 보고 말하였다.
 
474
“한림이 화원에 오신 후로 의복과 음식을 친히 염려하시니 소저가 그 괴로움을 당하고자 하나 인정(人情)이나 예법(禮法)에 맞지 않아 못하지만, 춘운이 이미 장성하여 족히 온갖 일을 당할 수 있으니 화원에 보내어 한림을 섬기게 하여 노천의 수고를 덜까 합니다.”
 
475
부인이 말하였다.
 
476
“춘운이 얼굴과 재주로 무슨 일을 못 당하겠느냐마는 춘운의 얼굴과 재주가 너와 진배없으니, 먼저 한림을 섬기면 반드시 부인의 권한을 빼앗아 갈까 염려 되는구나.”
 
477
소저가 말하였다.
 
478
“춘운의 뜻이 소저와 함께 한 사람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니 따르지 아니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또 춘운을 먼저 보내면 권한을 빼앗길까 염려하시지만, 한림이 나이 어린 서생으로 재상가 규방(閨房)에 들어와 처녀를 희롱하니 그 기상이 어찌 한 아내만 지키어 늙겠습니까. 타일에 승상부(丞相府)의 많은 녹봉을 먹을 때 춘운 같은 자색이 몇일 줄을 알겠습니까?”
 
479
부인이 사도께 고하자, 사도가 말하였다.
 
480
“어찌 나이 어린 남자로 빈 방 촛불만 벗삼게 하겠소.”
 
481
이날 소저가 춘운에게 말하였다.
 
482
“춘랑아, 내 너와 어려서부터 동기같이 지냈는데 나는 이미 한림의 납채를 받았거니와 너도 나이가 자랐으니 백 년 대사를 염려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섬기고자 하는냐?”
 
483
춘운이 말하였다.
 
484
“소저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첩은 소저를 따라 한 사람을 섬기고자 하오니, 원컨대 소저는 버리지 마십시오.”
 
485
소저가 말하였다.
 
486
“내 본디 춘랑의 뜻을 안다. 의논코자 하는 일이 있으니 어떠하냐? 한림이 거문고 한 곡조로 규중 처녀를 희롱하였으니 그 욕이 중하구나. 우리 춘랑이 아니면 누가 나를 위하여 그 치욕을 씻어 주겠는가? 종남산(終南山) 자각봉(紫閣峯)은 산이 깊고 경개가 좋다. 춘랑을 위하여 별도의 작은 방을 지어 춘랑의 화촉을 베풀고, 또 사촌형 십삼낭(十三郎)과 기특한 꾀를 내면 내 부끄럼을 씻게 될 것이다. 춘랑은 한번 수고를 아끼지 말라.”
 
487
춘운이 말하였다.
 
488
“소저의 말씀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마는 타일에 무슨 면목으로 한림을 뵙겠습니까?”
 
489
소저가 말하였다.
 
490
“군사의 무리는 장군의 명령을 듣는다 하니, 춘랑은 한림만 두려워하는구나.”
 
491
춘랑이 웃으며 말하였다.
 
492
“죽기도 피하지 못하는데 소저의 말씀을 어찌 좇지 아니하겠습니까?”
 
493
각설.
 
494
한림이 한가한 날이면 술집에 가 술도 먹으며 기생도 구경했는데, 하루는 정십삼이 와 한림에게 말하였다.
 
495
“종남산 자각봉이 산천이 아름답고 경개가 좋으니 한번 구경함이 어떠하오?”
 
496
한림이 말하였다.
 
497
“바로 내 뜻입니다.”
 
498
하고, 술과 안주를 이끌고 갔다.
 
499
한 곳에 도착하니 꽃과 풀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온갖 꽃은 아리따운데, 문득 시냇물에 꽃이 떠내려오거늘 한림이 말하였다.
 
500
“반드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을 것이다.”
 
501
정생이 말하였다.
 
502
“이 물이 자각봉에서 내려오는데, 일찍이 들으니 꽃 피고 달 밝은 때에는 신선의 풍류 소리가 있어 들은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신선(神仙 )과의 연분이 없어 한번도 구경치 못하였으니, 오늘 형과 함께 옷을 떨치고 올라가 신선의 자취를 찾고자 합니다.”
 
503
그러할 때 문득 정생의 종이 바삐 와 아뢰었다.
 
504
“낭자의 병이 중하오니 상공을 어서 오시라 합니다.”
 
505
정생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506
“과연 신선과의 연분이 없도다. 인연(因緣)이 이러하여 가지만 양형은 신선을 찾아보고 오시오.”
 
507
하고 가자, 한림이 흥을 이기지 못하여 혼자 올라 가더니 물 위에 나뭇잎이 떠내려 오거늘 건져보니 글씨가 있으되, ‘선방(仙厖)이 운외폐(雲外吠)하니, 지시(知是) 양랑래(楊郞來)로다. 신선의 개 구름 밖에서 짖으니, 알겠군, 양랑이 오는구나.’ 하였거늘, 한림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508
“이는 반드시 신선의 글이다.”
 
509
하고, 층암절벽으로 올라가니, 이때 날이 저물고 달이 밝아 길은 험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 배회하는데,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선동(仙童)이 시냇가의 길을 쓸다가 한림을 보고 들어가며,
 
510
“양랑이 오십니다.”
 
511
하거늘, 한림이 더욱 놀라 어린 선녀(仙女)를 따라 가니 층암절벽 위에 한 정자가 있으되, 온갖 화초가 만발한데 앵무 공작이며 두견새 소리가 낭자하니 진실로 선경(仙境)이었다.
 
512
한림이 마음이 황홀하여 들어가니 비단 장막에 공작 병풍을 둘렀는데 촛불을 밝게 켜고 서있다가 한림께 나와 예를 올린 후에 말하였다.
 
513
“양랑께서는 어찌 저물어 오십니까?”
 
514
한림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515
“소생은 인간 사람이라 신선과 혼약(婚約)할 연분이 없는데 어찌 더디다 하십니까?”
 
516
선녀가 말하였다.
 
517
“한림은 의심치 마십시오.”
 
518
하고, 여동을 불러 말하였다.
 
519
“낭군께서 멀리 와 계시니 급히 차를 드려라.”
 
520
하니, 여동이 즉시 백옥 쟁반에 신선의 과일을 배설하고 유리잔에 자하주(紫霞酒)를 부어 권하거늘, 그 술이 인간 술과 달랐다.
 
521
한림이 말하였다.
 
522
“선녀는 무슨 일로 요지(瑤池)의 무한한 경개를 버리고 이 산중에 와 외로이 머무십니까?”
 
523
선녀가 탄식하여 말하였다.
 
524
“옛 일이 꿈 같아 생각하면 슬픕니다. 첩은 서왕모(西王母)의 시녀로서 광한궁(廣寒宮)의 잔치 때 낭군이 첩을 보고 희롱했다 하시고 옥황상제(玉皇上帝)께서 진노하시어 낭군은 중죄하여 인간으로 귀양 보내고 첩은 경한 죄로 이 산중에 와 있는데, 낭군이 화식(火食)을 하신 까닭에 전생 일을 알지 못하시는군요. 상제께서 첩의 죄를 용서 하셔서 곧 승천하라는 분부가 계셨지만 낭군을 만나 전생의 회포를 풀고자 하는 까닭에 아직 머물렀으니 한림은 의심치 마십시오.”
 
525
한림이 이 말을 닫고 선녀의 손을 이끌어 침소로 들어가 오랬동안 바라던 회포를 다 못 풀었는데 사창(紗窓)이 밝아왔다.
 
526
선녀가 한림에게 말하였다.
 
527
“오늘은 첩이 승천할 날이어서 모든 선관(仙官)이 첩을 데리러 올 것이니, 낭군은 오래 머물지 못 하실 것입니다.”
 
528
하고, 어서 가기를 재촉하며 말하였다.
 
529
“낭군이 첩을 잊지 아니 하신다면 다시 만나뵈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530
하며, 수건에 이별시를 써 한림에게 주거늘, 한림이 옷소매를 떼어 그 글에 화답하였다.
 
531
선녀가 그 글을 보고 눈물을 지으며 말하였다.
 
532
“서산에 달이 지고 두견이 슬피 우니 한번 이별하면 구만 장천 구름 밖에 이 글귀뿐이군요.”
 
533
글은 받아 품에 품고 재삼 재촉하였다.
 
534
“때가 점점 늦어지니 낭군은 어서 가십시오.”
 
535
한림이 선녀의 손을 잡고 눈물로 이별하니 그 애련한 정은 차마 보지 못할 바였다.
 
536
한림이 집에 돌아오니 자각봉의 많은 화초가 두 눈에 삼삼하고 선녀의 말 소리는 두 귀에 쟁쟁하니 꿈을 깬 듯하여 탄식해 말하였다.
 
537
“거기 잠깐 몸을 숨겨 선녀의 가는 모습을 못 본 것이 한이다.”
 
538
이렇듯 도저히 잊을 수 없어 할 때, 정생이 돌아와서 한림에게 말하였다.
 
539
“어제 집사람의 병으로 형과 함께 선경을 구경치 못하여 한이 되었으니 다시 또 한번 형과 놀아봄이 어떠하오?”
 
540
한림이 크게 기뻐하여 선녀가 있던 곳이나 보고자 하여 술과 안주를 가지고 성 밖에 나와 보니 녹음방초(綠陰芳草)가 꽃보다 아름다운 초여름이었다.
 
541
한림과 정생이 술을 부어 마시는데 길가에 퇴락한 무덤이 있어 한림이 잔을 잡고 탄식하여 말하였다.
 
542
“슬프다. 사람이 죽으면 다 저러하구나.”
 
543
정생이 말하였다.
 
544
“형은 저 무덤을 알지 못할 것이오. 옛 장녀랑(張女娘)의 무덤이라. 장녀랑의 얼굴과 재덕이 만고에 으뜸이었는데 나이 이십 세에 죽자, 후세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그 무덤 앞에 화초를 심어 망혼을 위로하니, 우리도 마침 이곳에 왔으니 한 잔 술로써 위로함이 어떠하오?”
 
545
한림은 다정한 사람이다.
 
546
“형의 말씀이 옳소. 한 잔 술을 아끼겠는가?”
 
547
하고, 각각 제문(祭文)을 지어 한 잔 술로 위로하였다.
 
548
이때 정생이 무덤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비단 적삼 소매에 쓴 글을 얻어 가지고 읊으며 말하였다.
 
549
“어떤 사람이 이 글을 지어 무덤 구멍에다 넣었는가?”
 
550
한림이 살펴보니, 자각봉에서 선녀와 이별하던 글이었다.
 
551
크게 놀라 말하였다.
 
552
“그 미인이 선녀가 아니라 장녀화의 혼이었구나.”
 
553
하고, 땀이 나 등이 젖고 머리털이 하늘로 솟았다. 정생 없는 때를 타 다시 한 잔 술을 부어 가만히 빌어 말하였다.
 
554
“비록 유명(幽明)은 다르지만 정은 같으니 혼령은 다시 보게 하라.”
 
555
하고, 정생을 데리고 왔다.
 
556
이날 밤 한림이 화원 별당에 앉았는데 과연 창 밖에 발자취 소리가 나 한림이 문을 열어보니 자각봉 선녀였다. 한편으로 반갑고 한편으로는 놀라 내달아 옥 같은 손을 이끌자, 미인이 말하였다.
 
557
“첩의 근본을 낭군이 아셨으니 더러운 몸이 어찌 가까이하겠습니까? 처음에 낭군을 속인 것은 놀라실까 하고 선녀라 하여 하룻밤을 모셨던 것인데, 오늘 첩의 무덤을 찾아와 제사를 올리고 술을 부으셨으니 즐거웠고, 또 제문을 지어 임자 없는 그 혼을 이같이 위로하시니 어찌 감격치 않겠습니까? 은공을 잊지 못하여 은혜에 보답하러 왔지만 더러운 몸으로는 다시 상공을 모시지 못하겠습니다.”
 
558
한림이 다시 소매를 잡고 말하였다.
 
559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고 환생하면 사람이 되는 그 근본은 한 가지라. 유명은 다르나 연분(緣分)을 잊을 수 있겠는가?”
 
560
하고, 허리를 안고 들어가니 연모하는 정이 전날보다 백배나 더하였다.
 
561
한참후에 날이 새었다.
 
562
미인이 말하였다.
 
563
“첩은 날이 밝으면 출입을 못합니다.”
 
564
한림이 말하였다.
 
565
“그러하면 밤에 만나기로 하지.”
 
566
미인이 대답지 아니하고 꽃밭 속으로 들어갔다.
 
567
이후부터는 밤마다 왕래하였다.
 
568
하루는 정생이 두진인(杜眞人)이란 사람을 데리고 화원에 들어가니 한림이 일어나 예를 올린 후에 정생이 말하였다.
 
569
“진인은 한림의 관상의 보십시오.”
 
570
진인이 말하였다.
 
571
“한림의 관상이 두 눈썹이 빼어나 눈초리가 귀밑까지 갔으니 정승할 상이요, 귀밑이 분을 바른 듯하고 귓밥이 구슬을 드린 듯하니 어진 이름은 천하에 진동할 것이요, 권골(權骨)이 낯에 가득하니 병권(兵權)을 잡아 만리 밖에 봉후(封侯)할 관상이지만 한 가지 흠이 있습니다.”
 
572
한림이 말하였다.
 
573
“사람이 길흉화복은 다 정한 바이오.”
 
574
진인이 말하였다.
 
575
“상공이 숨겨둔 첩을 가까이 하십니까?”
 
576
한림이 말하였다.
 
577
“없소이다.”
 
578
진인이 말하였다.
 
579
“혹 옛 무덤을 지나다 슬픈 마음이 일어난 적이 있으십니까?”
 
580
“없소.”
 
581
진인이 말하였다.
 
582
“꿈 속에서 계집을 가까이 하십니까?”
 
583
“없소이다.”
 
584
정생이 말하였다.
 
585
“두선생의 말씀이 한번도 그른 적이 없으니 양형은 자세히 생각하시오.”
 
586
한림이 대답지 아니하자, 진인이 말하였다.
 
587
“임자 없는 여귀신이 한림의 몸에 어리었으니 여러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병이 골수에 들 것이니 구완치 못합니다.”
 
588
한림이 말하였다.
 
589
“진인의 말씀이 그러면 과연 그러하겠지만 장녀랑이 나와 정회가 심히 깊으니 어찌 나를 해하겠는가? 옛날 초(楚)나라의 양왕(襄王)도 무산(巫山) 선녀를 만나 함께 잤고, 유춘(柳春)이라 하는 사람도 귀신과 교접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어찌 의심하며, 또 사람이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다 하늘이 정한 것이니, 내 관상이 부귀공후할 상이라면 장녀랑의 혼이 어찌하겠오?”
 
590
진인이 말하였다.
 
591
“한림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592
하고 갔다.
 
593
한림이 술이 취하여 누었다가 밤에 일어나 앉아 향을 피우고 장녀랑 오기를 기다리더니, 갑자기 창 밖에서 슬프게 말하는 소리가 있어 가만히 들어보니 장녀랑의 소리였다.
 
594
장녀랑이 울며 말하였다.
 
595
“괴상한 도사의 말을 듣고 첩을 오지 못하게 하니 어찌 이리 박절하십니까?”
 
596
한림이 크게 놀라 문을 열고 말하였다.
 
597
“어찌 들어오지 못하는가?”
 
598
여랑이 말하였다.
 
599
“나를 오게 하면 왜 부적(符籍)을 머리에 부치셨습니까?”
 
600
한림이 머리를 만져보니 과연 귀신을 쫓는 부적이었다. 한림이 크게 화가 나서 부적을 찢고 내달아 여랑을 잡으려 하니, 여랑이 말하였다.
 
601
“나는 이제부터 영원히 이별하니 낭군은 옥체를 편안히 보전하십시오.”
 
602
하고, 울며 담을 넘어 가니 붙들지 못하였다.
 
603
쓸쓸한 빈 방에 혼자 누어 잠도 이루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니 자연 병이 되어 형용이 파리하고 말랐다.
 
604
하루는 사도 부처가 큰 잔치를 배설하고 한림을 청하여 놀다가 사도가 말하였다.
 
605
“양랑의 얼굴이 어찌 저토록 초췌한가?”
 
606
한림이 말하였다.
 
607
“정형과 술을 과히 먹어 술병인가 합니다.”
 
608
사도가 말하였다.
 
609
“종의 말을 들으니 어떤 계집과 함께 잔다 하니 그러한가?”
 
610
한림이 말하였다.
 
611
“화원이 깊으니 누가 들어오겠습니까?”
 
612
정생이 말하기를,
 
613
“형이 어찌 아녀자 같이 부끄러워 하는가. 형이 두진인의 말을 깨닫지 못하기에, 축귀 부적을 형의 상투 밑에 넣고 그날 밤에 꽃밭 속에 앉아 보았는데, 어떤 계집이 울며 창 밖에 와 하직하고 가니 과연 두진인의 말이 그르지 아니하였소.”
 
614
라 하자, 한림이 속이지 못하고 말하였다.
 
615
“소자에게 과연 괴이한 일이 있습니다.”
 
616
하고, 일의 전후의 일을 아뢰자, 사도가 웃으며 말하였다.
 
617
“나도 젊었을 때 부적을 배워 귀신을 낮에 불러오게 하였는데, 이제 양랑을 위하여 그 미인을 불러 생각하는 마음을 위로하겠다.”
 
618
한림이 말하였다.
 
619
“장인 어른께서 비록 도술이 용하시나 귀신을 어찌 낮에 부르시겠습니까? 소자를 희롱하시려는군요.”
 
620
사도가 파리채로 병풍을 치며 말하였다.
 
621
“장녀랑은 있느냐?”
 
622
하자, 한 미인이 웃음을 머금고 병풍 뒤에서 나오는데 한림이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장녀랑이었다. 마음이 황홀하여 사도께 아뢰어 말하였다.
 
623
“저 미인이 귀신입니까, 사람입니까? 귀신이면 어찌 대낮에 나옵니까?”
 
624
사도가 말하였다.
 
625
“저 미인의 성은 가씨요, 이름은 춘운이다. 한림이 적조한 빈 방에 외로이 있음이 민망하여 춘운을 보내어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626
한림이 말하였다.
 
627
“위로함이 아니라 희롱하심입니다.”
 
628
정생이 말하였다.
 
629
“양형은 스스로 화를 입은 것이니 이전의 허물을 생각하시오.”
 
630
한림이 말하였다.
 
631
“나는 지은 죄 없으니 무슨 어물이오.”
 
632
정생이 말하였다.
 
633
“사나이가 계집이 되어 삼 척 거문고로 규중 처녀를 희롱했으니 사람이 신선되며 귀신됨도 이상치 아니합니다.”
 
634
한림이 고향에 돌아와 대부인을 모셔 와 혼례를 지내고자 했는데, 그때 토번(吐蕃)이란 도적이 변방을 쳐들어와 하북(河北)을 나누어 연(燕)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가 되어 서로 장난하니 천자가 진노하여 조정 대신을 불러 의논하자, 양소유가 임금 앞에 나아가 아뢰어 말하였다.
 
635
“옛날 한무제(漢武帝)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남월(南越) 왕을 항복 받았으니, 원컨대 폐하는 급히 조서하여 천자의 위엄을 보이십시오.”
 
636
천자가,
 
637
“현명하다.”
 
638
하시고, 즉시 한림을 명하여 조서를 만들어 세 나라에 보내니, 조왕과 위왕은 즉시 항복하고 무명 천 필을 드렸지만, 오직 연왕은 땅이 멀고 군병이 강하기로 항복지 아니하였다.
 
639
천자가 한림을 불러 말하였다.
 
640
“선왕(先王)이 십만 군병으로도 항복 받지 못한 나라를 한림은 짧은 글로써 두 나라를 항복 받고 천자의 위엄을 만리밖에 빛나게 하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641
비단 이천 필과 말 오십 필을 상으로 내리시니, 한림이 삼가 사양하며 말하였다.
 
642
“모두 다 현명한 임금의 덕이오니 소신이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연왕이 항복지 아니함은 나라의 부끄러움이니, 청컨대 한 칼을 짚고 연국에 가 연왕을 달래어 듣지 아니하면 연왕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643
천자가 장히 여겨 허락하시고 병부(兵符)를 주시니 한림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히 여겨 경건하게 절하고 나와 정사도께 하직하고 갈 때, 사도가 말하였다.
 
644
“슬프다. 양랑이 십륙 세 서생으로 만리 밖에 가니 노부(老夫)의 불행이다. 내 늙고 병들어 조정 의논에 참여치 못하나 상소하여 다투고자 한다.”
 
645
한림이 말하였다.
 
646
“장인께서는 과히 염려치 마십시오. 연나라는 솥에 든 고기요, 구멍에 든 개미라 무슨 염려하겠습니까?”
 
647
부인이 말하였다.
 
648
“좋은 사위를 얻은 후로 늙은이 기쁨과 노여움을 위로 받았는데 이제 어찌 될 지 알 수 없는 땅에 가시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바라건대 빨리 성공하고 돌아오시오.”
 
649
한림이 화원에 들어가 행장을 차려 떠나려 할 때, 춘운이 소매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650
“상공이 한림원에 가셔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데 이제 만리 밖에 가시니 볼 지키다 울까 합니다.”
 
651
한림이 웃으며 말하였다.
 
652
“대장부는 나라 일을 당하여 사생을 돌아보지 아니하니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생각하겠는가? 춘랑은 부질없이 슬퍼하여 꽃 같은 얼굴을 상하게 말고 소저를 편히 모셔 내가 공을 이뤄 허리에 말 같은 인(印)을 차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653
하고 같다.
 
654
한림이 낙양 땅을 지날 때, 십륙 세 소년으로 옥절(玉節)을 가지고 병부(兵符)를 차고 비단옷을 입고 위의가 늠름하였다. 낙양 태수와 하남 부윤(河南府尹)이 다 앞길을 인도하여 맞으니 광채가 비할 데 없었다.
 
655
한림이 서동을 보내어 계섬월을 찾으니 섬월이 거짓으로 아프다 하고 산중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한림이 섭섭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객관(客館)에 들어가 촛불만 벗을 삼고 앉았다가, 날이 새거늘 글을 지어 벽 위에 쓰고 갔다.
 
656
연국(燕國)에 이르니 그 땅 사람이 한쪽 구석에 있어 천자의 위엄을 보지 못하였다가, 한림 행차를 보고는 두려워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군사를 먹이고 사례하였다.
 
657
한림이 연왕을 보고 천자의 위엄을 베푸니 연왕이 즉시 땅에 엎드려 항복하고 황금 일만 냥과 명마 백 필을 드리거늘 한림이 받지 아니하고 왔다. 한단(邯鄲) 땅에 이르러 한 나이 어린 서생이 혼자 한 마리 말을 타고 행차를 피하여 길가에 섰는데, 한림이 자세히 보니 얼굴은 반악(潘岳) 같고 풍채와 거동이 비범하거늘 한림이 객관에 머물러 소년을 청하여 말하였다.
 
658
“내 천하를 두루 다니며 보았지만 그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하였으니 성명을 뉘라 하는가?”
 
659
대답하여 말하였다.
 
660
“소생은 하북 사람입니다. 성은 적씨요, 이름은 생이라 합니다.”
 
661
한림이 말하였다.
 
662
“내 어진 선비를 얻지 못하여 세상 일을 의논치 못하였는데 그대를 만나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663
적생이 말하였다.
 
664
“나는 초야(草野)에 묻혀 있어 견문(見聞)이 없거니와 상공이 버리지 아니하시면 평생 소원인가 합니다.”
 
665
한림이 적생을 데리고 산수풍경을 구경하고 낙양 객관(客館)에 다다랐다. 계섬월이 높은 누각 위에 올라 한림의 행차를 기다리다가 한림에게 나아가 절하고 앉으니 한편으로는 슬프고 한편으로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666
“첩이 상공을 이별한 후에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가 상공이 급제하여 한림 벼슬하신 기별만은 들었지만, 그때 옥절(玉節)을 가지고 이리 지나실 줄을 모르고 산중에 있었는데, 연나라를 항복 받아 꽃 장식한 덮개 가마를 앞에 세우고 돌아오실 때, 천지만물과 산천초목이 다 환영하오니 첩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알지 못하겠지만 부인은 정하셨습니까?”
 
667
한림이 말하였다.
 
668
“정사도 여자와 혼사를 정하였지만 예식은 치루지 못하였다.”
 
669
말을 그친 후에 날이 저물어 서동이 고하여 말하였다.
 
670
“한림께서 적생을 어진 선비라 하셨는데 지금 섬랑의 손을 잡고 희롱하고 있습니다.”
 
671
한림이 말하였다.
 
672
“적생은 본디 어진 사람이라 반드시 그러지 아니할 것이요, 섬월도 내게 정성이 지극하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느냐? 네가 잘못 보았다.”
 
673
서동이 열적어 물러갔다가 한참 후에 다시 와 고하였다.
 
674
“상공께서 제 말을 요망타 하셔 다시 아뢰지 못하겠으니, 원컨대 상공께서 잠깐 가서 보십시오.”
 
675
한림이 난간에 숨어 거동을 보니 과연 적생이 섬월의 손을 잡고 희롱하거늘, 한림이 하는 말을 듣고자 하여 나아가니 적생이 갑자기 한림을 보고 놀라 도망하고, 섬월도 부끄러워 말을 못하자 한림이 말하였다.
 
676
“섬랑아, 네가 적생과 친한 사이였느냐?”
 
677
섬월이 말하였다.
 
678
“첩이 과연 적생의 누이와 결의형제하여 그 정이 동기 같더니 적생을 만남에 반가워 안부를 물었는데 상공께서 보시고 의심하시니 첩의 죄가 백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679
한림이 말하였다.
 
680
“내 어찌 섬랑을 의심하겠는가? 어진 사람을 잃었으니 잘못되었다.”
 
681
하고, 이어서 섬월과 함께 잤는데 닭이 울어 날이 샜다. 섬월이 먼저 일어나 촛불을 돋우고 단장하는데 한림이 눈을 들어보니 밝은 눈과 고운 태도가 섬월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또 아니었다. 한림이 놀라 물어 말하였다.
 
682
“미인은 어떤 사람인가?”
 
683
대답하여 말하였다.
 
684
“첩은 본디 하북 사람입니다. 제 성명은 적경홍으로 섬랑과 함께 결의형제한 사이였는데, 오늘 밤 섬랑이 마침 병이 있노라 하고 저에게 상공을 모시라 하거늘 첩이 마지 못하여 모셨습니다.”
 
685
말을 맺지 못하여 섬월이 문을 열고 말하였다.
 
686
“상공께서 오늘밤 새 사람을 얻었으니 축하드립니다. 첩이 일찍이 하북의 적경홍을 상공께 천거하였는데 과연 어떠십니까?”
 
687
한림이 말하였다.
 
688
“듣던 말보다 훨씬 낫군, 어제 적생의 누이가 있다 하더니 그러하냐? 얼굴이 아주 같구나.”
 
689
경홍이 말하였다.
 
690
“첩은 본디 동생이 없습니다. 첩이 과연 적생입니다.”
 
691
한림이 오히려 의심하여 말하였다.
 
692
“홍랑은 어찌 남자의 복장을 하고 나를 속이느냐?”
 
693
경홍이 말하였다.
 
694
“첩은 본디 연왕의 궁중 사람입니다. 재주와 얼굴이 남보다 못하나 평생에 대인군자를 섬기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저번에 연왕이 상공을 맞아 잔치 할 때, 첩이 벽 틈으로 상공의 기상을 잠깐 본 후에 정신이 호탕하여 호화로운 생활이 다 하찮게 보여 상공을 따라 좇고자 하였지만, 구중궁궐(九重宮闕)을 어찌 나오며 천리만리를 어찌 따르겠습니까? 죽기를 무릅써 연왕의 천리마를 도적해 타고 남자의 복장을 하여 상공을 따라 왔으니, 부디 상공을 속인 일은 아니지만 엎드려 사죄합니다.”
 
695
한림이 섬월을 시켜 위로하였다.
 
696
이날 한림이 떠나려 할 때, 섬월과 경홍이 말하였다.
 
697
“상공이 부인을 얻으신 후에 첩 등이 모실 날이 있으니 상공은 평안히 행차하십시오.”
 
698
이때 연왕의 항복 받은 문서와 조공 받은 보화를 다 경성으로 들여가자,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699
“양한림이 승전(勝戰)하여 온다.”
 
700
하고, 모든 관리들을 보내어 맞아 들여와 상을 내리고 예부상서(禮部尙書)를 내렸다. 한림이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고 물러나와 정사도 집에 가 뵈니, 사도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말하엿다.
 
701
“만리 타국에 가 성공하고 벼슬을 돋우시니 우리 집의 복이로다.”
 
702
한림이 화원에 나와 춘운에게 소저의 안부를 묻고 귀한 정을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하엿다.
 
703
하루는 한림원에서 난간에 지어 붙인 글귀를 읊으며 달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바람결에 퉁소 소리가 들리거늘 하인을 불러 말하였다.
 
704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느냐?”
 
705
하인이 말하였다.
 
706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달이 밝고 바람이 순하면 때때로 들립니다.”
 
707
한림이 손 안에 백옥 퉁소를 내어 한 곡조를 부니 맑은 소리가 청천에 사무쳐 오색 구름이 사면에 일어나며 청학과 백학이 공중에서 내려와 뜰에서 춤을 추였다. 보는 사람이 기이하게 여겨 말하였다.
 
708
“옛날 왕자 진(晉)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709
이때 황태후에게 두 아들과 한 딸이 있는데, 맏아들은 천자요, 또 하나는 월왕을 봉하고, 또 딸은 난양공주다. 공주가 날 때 한 선녀가 명주를 가져와 팔에 걷자, 한참 후에 공주를 낳으니 옥 같은 얼굴과 난초 같은 태도는 인간 사람이 아니요, 민첩한 재주와 늠름한 풍채는 천상의 신선이었다. 태후가 가장 사랑 하셨는데, 서역국(西域國)에서 백옥 퉁소를 진상하였거늘 악공을 불러 불라고 하였지만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공주가 밤에 한 꿈을 꾸니 한 선녀가 한 곡조를 가르치기에, 공주가 꿈을 깨어 그 퉁소를 불어보니 소리가 청아하여 세상에 듣지 못하던 곡조였다. 황제와 태후가 사랑하여 항상 달 밝은 밤이면 불게 하니, 그때마다 청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
 
710
태후와 황제가 매일 말하였다.
 
711
“난양이 자라면 신선 같은 사람을 얻어 부마(駙馬)를 삼을 것이다.”
 
712
하더니, 이날 밤 공주의 퉁소 소리에 춤추던 학이 한림원에 가 춤을 추었다. 그후에 궁인이 이 말을 전파하니 황제가 듣고 기특히 여겨 말하였다.
 
713
“양소유는 진실로 난양의 배필이다.”
 
714
하시고, 태후께 들어가 아뢰어 말하였다.
 
715
“예부상서 양소유의 나이가 난양과 서로 비슷하고 재주와 얼굴이 모든 신하 중에 으뜸이니 부마를 정할까 합니다.”
 
716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717
“소화(簫和)의 혼사를 정하지 못하여 밤낮으로 염려하였는데 양소유는 진실로 하늘이 정해준 소화의 배필이니, 내가 양상서를 보고 청하고자 하오.”
 
718
황제가 말하였다.
 
719
“어렵지 아니하니 양상서를 불러 별전(別殿)에 앉히고 문장을 의논할 때, 태후께서는 주렴 속에서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720
태후가 크게 기뻐하였다.
 
721
난양의 이름은 소화인데 그 퉁소에 그렇게 새겨져 있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722
임술(壬戌)년 가을 완산(完山) 개판(開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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