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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鬼(귀)의 聲(성) ◈
◇ 제 17 장 ◇
해설   목차 (총 : 20권)     이전 17권 다음
1906년
이인직
1
"어머니."
 
2
부르면서 머리에 썼던 치마를 벗어 들고 마루 위로 선뜻 올라서서 방문을 펄쩍 여는 것은 침모이라.
 
3
"네 목소리 반갑구나. 까치가 영물이라 오늘 아침에 반기더니……."
 
4
하면서 먼눈을 멀뚱멀뚱하며 턱을 번쩍 들어 문 소리 나는 곳으로 귀를 두르는데, 얼굴은 사람 없는 윗목 벽을 향하는 것은 앞 못 보는 노파이라. 침모가 그 어머니 모양을 물끄러미 보다가,
 
5
"어머니, 내가 그 동안에 벙어리가 되었던들 어머니가 나를 만나더라도 딸이 왔는지 누가 왔는지 모르실 일이오구려."
 
6
하면서 어미 모르는 눈물을 씻더라.
 
7
"얘, 그 말 말아. 판수 된 어미는 살았으니 만나 본다마는 눈 밝던 너의 아버지는 눈을 아주 감고 북망산에 누웠으니, 네가 벙어리도 되지 말고 앵무새가 되어서 너의 아버지 묘에 가서 지저귀더라도, 빈 산 쇠한 풀에 적막한 혼이 들을는지 못 들을는지…… 그를 생각하여 보아라. 그러나 낸들 늙고 병든 사람이 네 목소리를 며칠이나 듣겠느냐."
 
8
침모가 그 어머니 말을 듣고 가슴이 저리는 듯하여 아무 소리 없이 가만히 앉았다가, 옥 같은 침모의 손으로 솜채같이 엉성한 뼈만 남은 노파의 손을 만져 보더니,
 
9
"에그, 방에 앉으신 어머니 손이 한데 있던 내 손보다 더 차구려."
 
10
하면서 방바닥을 만져 보다가 깜짝 놀라며,
 
11
"에그, 이 방 보게. 아랫목 불목이라고 냉김도 아니 가시었소구려."
 
12
"네가 바늘 끝으로 벌어서 나무를 사 보낸 것을 나 혼자 어찌 방을 덥게 하고 있겠느냐."
 
13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생각을 하면 내가 사람을 쳐죽이고 도적질이라도 하여다가 어머니 고생을 면하게 할 도리가 있으면 하고 싶소."
 
14
"얘, 그러한 생각 말아라. 제가 잘되려고 사람을 어찌 죽인단 말이냐. 그런 생각만 하여도 벽력을 입을 것이다."
 
15
"낙동장신 이경하는 어진 도 닦으려는 예수 교인을 십이만 명이나 죽였는데, 어찌하여 그런 악독한 사람에게 벽력이 없었으니 웬일이오."
 
16
"이애, 네 말이 이상한 말이로구나. 제가 잘될 경륜으로 사람 죽이고 당장에 벽력을 입어서 만리타국 감옥에서 열두 해 징역하고 있는 고영근의 말은 못 듣고, 사십 년 전에 지나간 일을 말하는 것이 이상하구나. 이경하는 제가 사람을 죽였다더냐? 나라 법이 사람을 죽였지. 나라에서 무죄하고 착한 사람을 많이 죽이면 그 나라가 망하는 법이요, 사람이 간악한 꾀로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이 벽력을 입나니라. 왜 무슨 일 있느냐? 누가 너를 꾀더냐?"
 
17
하며 고개를 번쩍 들어 딸의 앞으로 두르고 눈을 멀뚱멀뚱하며 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나 많고 지각 있는 노파이라. 침모가 한참 동안을 대답 없이 가만히 앉았으니,
 
18
"이애 참 벙어리 되었나 보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앉았느냐? 오냐, 내가 너를 믿는다. 너같이 곱고 약한 마음에 무슨 큰일 내지 아니할 줄은 짐작한다마는, 부처님 말씀에 백 세가 된 어미가 팔십이나 된 자식을 항상 염려한다 하였으니, 부모 된 마음이 본래 그러한 것이니라. 네가 앞 못 보는 늙은 어미의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서 사람이라도 쳐죽이고 도적질이라도 하고 싶다 하니, 그런 효성은 없느니만 못하니라. 옛이야기도 못 들었느냐. 정인홍이라 하는 사람이 팔십이 되도록 명망이 대단하더니, 그 부인이 굶어 까무러친 것을 보고 가난에 마음 상하여 그날로 이이첨에게 붙었다가, 필경에는 국모를 폐하던 모주가 되어 흉악한 죄명을 쓰고 죽을 때에 탄식하는 말이, 배고픈 것을 좀 참았더면(鄭仁弘將士曰小忍餓)…… 하던 그런 일도 있었으니, 가난에 적상하면 사람의 마음이 변하기 쉬우니라."
 
19
노파가 하던 말을 그치고 눈을 멀뚱멀뚱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 모양 같더니 다시 침모 앞으로 고개를 두르며,
 
20
"얘, 그것 참 웬일이냐. 네가 도동 가서 있은 후로 내게 무엇을 더럭더럭 보내니, 네가 그 집 것을 몰래 훔쳐 내나 보구나."
 
21
"에그, 망측하여라. 나는 죽으면 죽었지 남의 집에 있어서 쌀 퍼내고 장 퍼내고 반찬거리 도적질하여 내지는 못하겠소. 팔자가 사나워서 남의 집에 가서 바느질품은 팔지언정, 티검불 하나일지라도 남의 눈은 못 속여 보았소. 에그, 나는 언제나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있어서 조석 걱정이나 아니하여 볼까."
 
22
하면서 고개를 수그리더니 노파의 무릎 위에 폭 엎드려서 울며,
 
23
"어머니, 내가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 뻔하였소."
 
24
"응, 큰일이라니. 들어앉은 여편네가 큰일이 무슨 일이란 말이냐?"
 
25
침모가 다시 머리를 들더니 점순이가 꼬이던 말을 낱낱이 한다.
 
26
노파는 본래 진중한 사람이라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가만히 앉았다가 천연히 하는 말이,
 
27
"이애, 그것 참 이상한 일 아니냐. 점순이가 돈은 어데서 나서 그리 잘 쓴단 말이냐. 춘천집을 죽이면 제게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죽이려고 한단 말이냐. 춘천집을 죽이고 제가 김승지의 첩이 될 것 같으면 죽일 마음이 생기기도 괴이치 않은 일이나, 춘천집을 죽인 후에 어떻게 김승지의 첩이 되라고 그 흉악한 꾀를 내는 것은 대단히 의심나는 말이다. 네 생각하여 보아라, 그렇지 아니하냐?"
 
28
"에그, 나는 무심히 지냈더니 어머니 말을 듣고 생각하니 이상한 일이오."
 
29
"네가 고년에게 속았다. 전년 겨울에 춘천집이 처음 서울 왔을 때에 김승지의 부인이 야단치고 애매한 너까지 걸어서 못 할 소리 없이 하며 기를 버럭버럭 쓰던 사람이 홀지에 변하여 투기 없이 잠자코 있다 하는 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냐. 점순이가 우리집에 와서 춘천집을 누가 감춘 듯이 우리 속을 뽑으려 하던 일도 제 마음으로 온 것은 아닐 듯하다. 그 후에 춘천집이 도동에 집을 장만하여 있는 것을 보고 점순이가 도동 가서 있는 것도 이상치 아니하냐. 남의 애매한 말을 하면 죄가 된다더라마는 네가 당한 일이야 말 아니할 수 있느냐. 네가 김승지와 아무 까닭 없을 때도 김승지의 부인이 너를 잡아 삼키려고 날뛰던 여편네가, 지금은 네가 김승지와 상관까지 있는 줄 절실히 안 후에야 오죽 미워하겠느냐. 춘천집을 미워하는 마음이나 너를 미워하는 마음이나 다를 것 무엇 있겠느냐. 네 생각에는 네가 김승지와 상관 있는 것을 부인이 모를 듯하나, 점순이가 아는 일을 부인이 모를 리가 없나니라. 점순이가 돈을 물쓰듯 한다 하니, 그 돈이 사람 죽일 돈이라. 만일 오늘 밤에 네가 점순이 꾀에 빠져서 춘천집 모자를 죽였던들 고 요악한 점순이가 그 죄를 네게 밀고 저만 살짝 빠졌을 것이다. 누가 듣든지 김승지와 상관 있는 네가 강샘으로 춘천집을 죽였다 할 것 아니냐. 점순이가 돈을 물쓰듯 하는 년이 저는 배포가 다 있을 것이다."
 
30
"나는 입 없다구 나 혼자만 몹쓸 년 되고 말아. 살인한 죄로 내가 죽으면 점순이도 죽지."
 
31
"얘, 그 말 마라. 사람의 꾀는 한량이 없는 것이니라. 네가 만일 춘천집 죽인 죄로 법사에 잡혀 가서 앞뒤로 땅땅 맞고 공초할 지경이면, 너는 점순의 꼬임에 빠졌다고 점순이를 업고 들어가는 말뿐일 것이요, 점순이는 백판 모르는 것같이 잡아뗄 터이니, 점순이는 꾀 많고 말 잘하는 중에 또 돈 많고 세력 있는 김승지 부인이 뒤로 주선하여 주면 점순이는 벗어나고, 너같이 말도 잘 못 하고 꾀도 없고 아무도 도와 줄 사람 없는 너만 죽을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하고, 김승지의 부인과 점순이와 너와 세 손뼉이 맞아서 못생긴 김승지를 휘둘러서 집안에서 쉬쉬하고 춘천집 죽은 것을 감쪽같이 수쇄하고 아무 탈 없게 되더라도, 춘천집 죽은 후에는 네 한 몸이야 또 어느 때 무슨 죽음을 할지 알 것이냐. 별소리 말고 가만히 있거라. 그런 것이 다 부인과 점순이가 정녕 손 맞은 일인가 보다. 얘, 네 말을 좀 자세 들어 보자. 점순이가 그렇게 너를 꼬일 때에, 네 마음에 솔깃하게 들어가더냐. 그래 날더러 묻지 아니하고 점순이 하라는 대로 하려 들었더냐. 네 마음이 그렇게 들었을 것 같으면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 죽어도 싸니라. 오냐, 이 길로 돌아가서 오늘 밤 내로 춘천집 모자를 죽이고 김승지의 첩 노릇을 하여 보아라. 네가 얼마나 잘되나 보자."
 
32
침모가 그 소리를 듣고 다시 머리를 그 어머니 무릎 위에 폭 엎드리며,
 
33
"에그머니, 이를 어찌하나. 내가 어머니 뵈올 낯이 없소.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 죽어 싼 일이오. 어머니 말을 못 들었더면 점순의 꼬임에 빠졌을 것이오. 어젯밤에 단단 상약을 하고 꿈자리가 하도 사납기로 겁이 나서 어머니께 물어 보러 왔소. 그러나 서산에 떨어지는 해와 같은 늙은 어머니가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을 보니 생각이 졸시에 변하는구려. 흉한 꿈도 잊어버리고 겁나던 마음도 없어지고 불 같은 욕심이 새로 생겨서, 어머니더러 그런 이야기도 하지 말고 이 길로 돌아가서 점순이 하라는 대로 하려 들었소. 에그, 내가 죄를 받겠네. 어머니, 나는 이 길로 삼청동 가서 김승지 영감더러 그런 말을 하겠소."
 
34
"아서라, 그리도 마라. 김승지가 그런 말을 듣고 일 조처를 잘할 사람 같으면 말을 하다뿐이겠느냐마는, 정녕 그렇지 못할 것 같다. 그 말을 내고 보면, 흉악한 부인과 고 악독한 점순의 솜씨에 네게만 밀고 별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세상에 허다한 사람에 남의 잘잘못이야 다 말할 것 없이 네 말이나 하자. 네가 시집을 가고 싶으면 막벌이꾼이라도 사람만 착실한 홀아비를 구하여 시집을 가는 것이 편하다 하던 사람이, 어떻게 마음이 변하여 계집이 둘씩이나 되는 김승지와 상관이 있는 것은 네 행실이 그르니라. 만일 네 입으로 무슨 말이 나고 보면 네 취졸만 드러나고 그런 몹쓸 일은 네가 뒤집어쓸 만도 하니라."
 
35
"그러면 내가 다시는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있겠소."
 
36
"그러하더라도 탈은 났다. 춘천집에는 아무도 없고 너와 점순이만 있던 집인데, 오늘 밤에 점순이가 혼자 춘천집을 죽이고 네게로 밀면, 남이 듣더라도 네가 춘천집을 죽이고 도망한 것 같지 아니하냐."
 
37
침모가 기가 막혀서 울며 하는 말이,
 
38
"그러면 나는 이리 하여도 탈이요, 저리 하여도 탈이구려. 나는 불측한 마음을 먹었던 사람이니 죽어도 한가할 것이 없소마는, 나 죽은 후에 어머니 신세가 어찌 되나."
 
39
"오냐, 내 걱정은 마라. 내가 호강을 한들 며칠 하며 고생을 한들 며칠 하겠느냐마는, 너는 전정이 아직 먼 사람이 그렇게 지각 없는 것을 보니 내가 죽더라도 마음을 못 놓겠다. 네가 마음을 고쳐서 다시는 그러한 불량한 마음을 먹지 아니할 것 같으면 이번 일을 잘 조처할 도리를 일러줄 터이니 울지 말고 일어나서 자세히 들어라."
 
40
침모가 모기 소리 같은 울음을 뚝 그치고 머리를 들더니 응석하는 어린애같이 눈물에 젖은 뺨으로 그 어머니 어깨에 기대면서,
 
41
"이후에는 내가 말 한 번을 떼어 놓더라도 어머니더러 물어 보고 떼어 놓을 터이니 염려 말으시오."
 
42
"물어 본다는 말은 좋은 일이다마는 어미 죽은 후에는 누구더러 물어 볼 터이냐. 평생에 마음만 옳게 가지면 죽어도 옳은 죽음을 하느니라. 오냐, 애쓰지 말고 네 이 길로 김승지 집에 가서 김승지 내외더러 내가 가르치는 대로 말하고, 그 길로 도동 가서 내가 이르는 대로 하고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오너라."
 
43
"그러하면 춘천집도 살겠소?"
 
44
"춘천집을 살리려 하면 네가 음해를 받을 터이니 어찌할 수 없다."
 
45
침모가 일시에 점순의 꼬임에 빠져서 춘천집을 죽이자 하는 말에 솔깃한 마음이 들었으나, 본래 악심이 없는 계집이라 춘천집까지 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가만히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 모양이라.
 
46
"얘, 해 다 간다. 네가 삼청동 갔다가 도동까지 가자면 저물겠다. 인력거꾼 둘만 얻어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서 빨리만 가면 값을 많이 주마 하고 속히 다녀오너라."
 
47
침모가 당황한 마음이 나서 선뜻 일어나서 그 길로 삼청동 김승지 집에로 향하여 가는데, 인력거를 타고 앉아서 서으로 기운 해를 치어다보며 인력거꾼의 다리를 바지랑대같이 길게 이어서 속히 가고 싶은 마음뿐이라.
 
48
돈을 많이 준다 하면 사람이 없던 기운이 절로 나는 법이라. 인력거꾼이 두세 시간 동안이나 앞선 사람을 보더라도 어어 소리를 지르면서 얼굴을 에는 듯한 찬바람에 등골에 땀이 나도록 달음박질을 하더니 삽시간에 김승지 집 대문 앞에 가서 내려놓더라. 침모가 안마당으로 들어가며 혼자말로,
 
49
"이 댁에서 이사하셨다는 말만 들었더니 이렇게 구석진 데 와서 살으시나."
 
50
하면서 마루 위로 올라서니, 그때 마침 김승지의 내외가 안방에 있다가 침모의 목소리를 듣더니, 김승지는 눈이 휘둥그래지고 부인은 얼굴빛이 변하도록 놀란다.
 
51
놀라기는 같이 놀랐으나 놀라는 기색을 서로 감추더라.
 
52
처시하 되는 김승지는 상관 있는 침모 오는 목소리를 듣고 눈이 휘둥그래지기도 고이치 않지마는 전반 볼기를 때려 보지는 아니하였으나, 전반 볼기를 능히 때릴 만한 기를 가지고 있는 부인은 무엇이 겁이 나서 얼굴빛이 변하도록 놀랐던가.
 
53
낮 전에 점순이가 와서 하는 말이, 오늘은 침모를 꾀어서 춘천집을 죽이겠다 하는 소리를 듣고 흥에 띄어서, 각골 수령이 이방을 부르듯이 반비아치 계월이더러 사랑에 가서 영감 여쭈어라 하여 김승지를 불러들여서 투기 않던 자랑을 하고 있던 차에, 침모의 목소리를 듣고 부인의 생각에 침모가 정녕 김승지에게 고자질을 하러 온 줄로 알았더라.
 
54
그렇지 아니하였더면 개꼬리 황모 되려고 암만 투기를 참았던 터이라도 침모를 면대하여 보면 열이 나서 어떻게 날뛰었을지 모를 일이라.
 
55
침모가 문을 버썩 열다가 김승지를 보고 숫기 좋게 하는 말이,
 
56
"에그, 영감하고 나하고는 연분도 좋습니다. 나 올 줄을 어찌 알고 안방에서 기다리고 앉으셨습니까."
 
57
겁이 펄쩍 나던 김승지의 마음에는 침모의 하는 말이 민망하기가 측량 없으나, 못생긴 사람도 떡국이 농간을 하면 남의 말대답을 넙죽넙죽 하는 법이라.
 
58
"글쎄 말일세. 자네가 나를 저렇게 탐을 냈을 줄 알았더면 벌써 집어썼을걸…… 절통할 일일세."
 
59
하면서 지향없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마누라의 얼굴을 한번 치어다보고 다시 침모의 얼굴을 치어다보더라.
 
60
부인이 다른 때 같으면 그 남편이 침모와 그런 농담을 하는 것을 눈꽁댕이로도 보고 싶지 아니하였을 터이나, 도적이 발이 저리다고, 그때 발이 저린 일이 있어서 도리어 침모의 마음을 좋게 할 작정으로 웃으며,
 
61
"자네 참 오래간만에 만나 보겠네그려. 사람이 어찌하면 그렇게 무정하단 말인가. 내가 좀 잘못하였기로 그렇게 끊는단 말인가. 어서 이리 들어오게."
 
62
하면서 뜻밖에 엉너리성이 어찌 대단하던지, 겁에 띠어서 둥그래졌던 김승지의 눈이 실눈이 되며 간경에 바람 든 놈같이 겉으로 싱긋싱긋 웃는다.
 
63
"여보게, 자네가 참 무정한 사람일세. 영감께서는 자네를 보고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자네는 영감을 뵈오러 한 번도 아니 온단 말인가."
 
64
"내가 영감을 뵈오러 아니 오더라도 영감께서는 나 보러 도동으로 장 오신답니다."
 
65
"어어, 여편네들이란 것은 큰일날 것이로군. 어떻게들 말을 하던지 생사람을 병신을 만드네. 누가 들으면 내가 똑 침모와 참 상관이나 있는 줄로 알겠네. 허허허."
 
66
"그렇게 감추실 것도 없습니다. 나도 오늘까지 감추고 지냈습니다마는, 연분도 한정이 있는지 나는 영감과 연분이 오늘뿐이올시다."
 
67
그 말 한마디에 김승지의 눈이 다시 둥그래지고 부인의 얼굴빛이 다시 변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하여 지향을 못 하는 모양이라.
 
68
부인이 그날 밤에는 춘천집이 정녕 죽을 줄만 알고 대망을 잔뜩 하고 있던 차에 침모가 오는 것을 보고 의심을 잔뜩 하고 있는 중인데, 침모의 말에 영감과 연분이 오늘뿐이라 하는 소리를 듣고 이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서 침모의 얼굴 한 번 치어다보고 김승지의 얼굴 한 번 치어다보는 부인의 눈이 갔다왔다한다.
 
69
침모는 그 눈치를 알고 부인을 미워하던 마음에 부인이 애를 쓰는 모양이 재미가 있어서 의심이 더욱 나도록 말을 할 듯하면서 말을 아니하고 김승지의 앞으로 살짝 다가앉는다.
 
70
부인의 가슴은 더욱 두방망이질을 한다.
 
71
김승지는 침모가 자기 턱밑으로 얌체없이 다가앉는 것을 보니 침모 간 뒤에는 그 부인에게 무슨 곤경을 당할는지 민망한 마음에 배기지를 못하여 왼편으로 기대고 있던 안석을 바른편으로 옮겨 놓고 기대니, 탕건이 부인의 어깨에 닿을락말락하더라.
 
72
"얘 계월아, 침모가 오죽 춥겠느냐. 네 국수 좀 사다가 장국 한 그릇만 따뜻하게 말아 오너라."
 
73
"오늘은 댁에서 국수를 아니 먹더라도 국수 먹을 복이 터졌습니다."
 
74
"다른 데서 먹는 것이 쓸데 있나. 내게서 먹어야지."
 
75
"잠깐 말씀하고 가려 하였더니 너무 오래 앉았습니다. 오늘은 내가 시집을 가는 날이올시다."
 
76
하더니 김승지를 돌아다보며,
 
77
"영감, 그렇게 감추실 것 무엇 있습니까. 나는 지금 보면 다시는 못 볼 사람이올시다. 내가 오늘 우리집에 갔더니 웬 손님이 와 앉았는데, 언제부터 말이 되었던지 우리 어머니가 사윗감으로 정하였다고 나를 권하는데, 낸들 영감을 잊을 길이 있겠습니까마는 영감께서는 마님도 계시고 춘천마마도 있는데, 내가 또 있고 보면 영감께서 걱정이 아니 됩니까? 나도 새파랗게 젊은 년이 혼자 살 수도 없는 터이요, 우리 어머니는 앞 못 보는 육십 노인이 나 하나만을 믿고 있는 터에, 내가 하루바삐 서방이나 얻어서 우리 어머니를 데려다가 삼순구식을 하더라도 한집에서 지내는 것이 내 도리가 아니오니까. 오늘이 혼인인지라 집에서들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오래 앉았을 수가 없습니다. 마님, 안녕히 계시오. 영감……."
 
78
하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은 인정 있는 계집의 마음이라. 선뜻 일어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더라.
 
79
대문 밖에 나서면서,
 
80
"인력거꾼, 어데 갔나?"
 
81
하는 소리에 건너편 막걸릿집에서 툭 튀어나오는 인력거꾼이 총전요를 펴들고 침모의 무릎 위에 턱 둘러 휩싸면서,
 
82
"댁에로 모시오리까?"
 
83
"남대문 밖에 좀 다녀가겠네."
 
84
인력거꾼이 어느 동네냐 묻지도 아니하고 서산에 떨어지는 해를 쫓아가서 붙들듯이 살같이 달아나더라.
【원문】제 1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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