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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鬼(귀)의 聲(성) ◈
◇ 제 2 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20권)     이전 2권 다음
1906년
이인직
1
길순이는 강동지의 딸이라 그 애비에게 속기도 많이 속았는데, 만일 남에게 그렇게 속았으면 다시는 참말을 들어도 거짓말로 들을 터이나, 자식이 부모를 믿는 마음에 의심도 없이 또 속는다.
 
2
그 안방에서는 강동지의 솜씨 있는 거짓말 한마디에 마누라의 포달은 제풀에 줄어져서 크던 목소리 작아지고, 작던 목소리 없어지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던지 아무 소리도 아니 들리더라.
 
3
길순의 베개가 다시 조용하여졌더라.
 
4
창 밖에 오동나무 가지에서 새벽 까치가 두세 마디 짖는데, 그 까치의 소리가 길순의 베개 위에 똑똑 떨어진다.
 
5
길순이가 잠 못 든 눈을 감고 누웠다가 눈을 번쩍 떠서 보니, 창 밖에는 다 밝은 날이라.
 
6
"까치야 까치야, 반기어라. 김승지 댁에서 날 데리러 교군 오는 소식을 전하느냐. 에그, 그 집 인품은 어떠한고. 어서 좀 가서 보았으면."
 
7
하더니 한번 뒤쳐 누우면서 발로 이불을 툭 차서 이불이 허리 아래만 걸쳤더라.
 
8
일평생에 서울을 못 가보고 죽으려니 생각하고 있을 때는 그 근심뿐이더니, 서울로 올라가려니 생각하고 있으니 남모르는 걱정이 무수히 생기더라.
 
9
기품 좋고 부지런한 강동지는 벌써 일어나서 앞뒤로 돌아다니면서 잔소리를 하더니, 동리 막걸릿집으로 나가더라.
 
10
강동지의 마누라가 무슨 경사나 난 듯이 길순의 방에로 건너오더니, 입이 헤벌어져서 길순이를 부른다.
 
11
"이애 길순아, 네가 저렇게 탐스럽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팔자가 사나울 리가 있느냐."
 
12
"무슨 팔자 좋을 일이 생겼소?"
 
13
"오냐, 걱정 마라. 우리가 그 동안에 헛근심을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이야 처음으로 너의 아버지에게서 자세한 말을 들었다. 김승지가 너의 아버지더러 너를 데리고 서울로 오라고 노자까지 보냈다는데, 너의 아버지가 돈을 썼는지, 우리더러 그 말을 안 하고 있었다가, 오늘 새벽에 처음으로 그 말을 하시더라. 어떻게 하던지 내일은 너를 데리고 서울로 간다 하니, 오늘부터라도 행장을 차려라. 네가 올라간 뒤에는 우리도 차차 네게로 올라가겠다. 우리 내외가 늙게 와서 너밖에 의지할 데 있느냐."
 
14
하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니, 길순이가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는데, 그날 그시로 모녀 상별하는 것 같은지라.
 
15
그때 강동지가 식전 술을 얼근하도록 먹고 제 집에로 들어오는데, 새벽녘에 거짓말하던 일은 언제 무엇이라 하였던지 생각도 안 나는데, 그 마누라가 모녀 마주보며 우는 것을 보더니, 서슬 있게 소리를 지르더라.
 
16
"요 방정맞은 것들, 계집년들이 식전 참에 울기는 왜 우느냐?"
 
17
길순의 모녀가 평생을 그런 일을 처음으로 당하는 것 같으면 여편네 마음에 경풍을 하였을 터이나, 강동지의 그따위 소리는 그 집안에서 예사로 듣는 터이라, 강동지가 빚만 졸려도 화풀이는 집안에 들어와서 만만한 계집 자식에게 하고, 술만 취하여도 주정은 계집 자식에게 하고, 무슨 경영하던 일이 아니 되어도 씸증은 집안에 들어와서 부리는 고로 그 마누라는 강동지의 주먹이나 무서워할까, 여간 잔소리는 으레 들을 것으로 알고 있다.
 
18
"아따 답답한 소리도 하시구려. 길순이가 내일 떠나면 언제 다시 볼는지, 우리가 추후로 올라간다 하기로 말이 그러하지 쉬운 일이오. 여보, 오늘 하루만 걱정을 좀 마시고 잠자코 계시구려. 길순이를 집에 두고 보면 며칠이나 볼라구 그리하시오."
 
19
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니,
 
20
"어머니, 울지 말으시오. 내가 아버지 걱정을 들으면 며칠이나 듣겠소. 서울로 올라가면 아버지 걱정을 듣고 싶으기로 얻어들을 수가 있겠소. 걱정을 하시든지 귀해하시든지 믿을 곳은 부모밖에 또 있소. 내가 서울로 가기는 가나, 웬일인지 마음이 고약하오. 어젯밤에 꿈자리가 하도 사나우니 꿈땜이나 아니할는지."
 
21
하면서 꿈 생각이 나더니 소름이 족족 끼치고, 눈물이 똑 그쳤다.
 
22
"글쎄 그 이야기 좀 하여라. 어젯밤에 네가 자다가 무슨 소리를 그렇게 질렀는지 좀 물어 보려 하다가 딴말 하느라고 못 물어 보았다. 꿈을 꾸고 가위를 눌렸더냐?"
 
23
길순이는 대답 없이 가만히 앉았고, 강동지는 마누라와 길순의 얼굴만 흘끔흘끔 보며 담배를 부스럭부스럭 담는다.
 
24
길순이는 꿈 생각만 하고 있고, 강동지는 거짓말할 경륜을 하고 있다.
 
25
길순이 꿈 생각은 잊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섭고 끔찍하여 앞일 조심되는 그 생각을 하고 있고, 강동지의 거짓말할 생각은 차일피일하고 딸을 아니 데리고 가자는 일이 아니라, 이번에는 무슨 귀정이 날 일을 생각한다.
 
26
못된 의사라도 의사는 방통이 같은 사람이라, 아무 소리도 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빙긋빙긋 웃는다.
 
27
무슨 경륜을 하였는지, 아비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요, 어미의 눈에는 눈물 방울이요, 딸의 가슴에는 근심덩어리라.
 
28
세 식구가 서로 보며 한참 동안을 아무 소리가 없더니, 말은 기쁜 마음 있는 사람이 먼저 냅뜬다.
 
29
"오냐, 두말 마라. 솔개 동내서 서울이 일백구십 리다. 내일 새벽 떠나면 아무리 단패 교군이라도 모래 저녁때는 일찍 들어간다. 마누라, 아침밥 좀 일찍이 하여 주게. 어디 가서 교군 잘하는 놈 둘만 얻어야 하겠네. 아니 그럴 것도 없네. 나는 아직 밥 생각도 없으니, 지금으로 어디 가서 교군 먼저 얻어 놓고."
 
30
하면서 뒤도 아니 돌아보고 문 밖으로 나가니, 길순이 모녀는 눈앞에 이별을 두고 아침밥 지어 먹기도 잊었던지 둘이 마주보고만 앉았더라.
 
31
"어머니, 내 꿈 이야기 좀 들어 보시오. 꿈에는 내가 아들을 낳아서 두 살이 되었는데, 함박꽃같이 탐스럽게 생긴 것이 나를 보고 엄마 엄마 하면서 내 앞에서 허덕허덕 노는데, 우리 큰마누라라 하는 사람이 상긋상긋 웃으며, 어린애를 보고 두 손바닥을 톡톡 치면서,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하니, 천진의 어린애가 벙긋벙긋 웃으며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내미니, 큰마누라가 와락 달려들어서 어린애의 두 어깨를 담싹 움켜쥐고 반짝 들더니, 어린애 대강이서부터 몽창몽창 깨물어 먹으니, 내가 놀랍고 깜찍하여, 어린애를 뺏으려 하였더니, 큰마누라가 반 토막쯤 남은 애를 집어던지고 피가 빨갛게 묻은 주둥이를 딱 벌리고 앙상한 이빨을 흔들며 왈칵 달려드는 서슬에 질겁을 하여 소리를 지르며 잠이 깨었으니, 무슨 꿈이 그렇게도 고약하오."
 
32
"이애, 그 꿈 이야기를 들으니 소름이 끼치는구나. 그러면 서울로 가지 말고 집에 있거라. 네가 지금 열아홉 살에 전정이 만리 같은 사람이 김승지가 아니면 서방이 없겠느냐. 우리 같은 상사람이 수절이니 기절이니, 그따위 소리는 하여 무엇 하느냐? 어데든지 고생이나 아니할 곳으로 보내 주마. 나는 사위 덕도 바라지 아니한다. 사람만 착실하면 돈 한푼 없는 걸인(乞人)이라도 계관없다."
 
33
"어머니, 그 말 마오. 좋은 일도 팔자에 타고나고 흉한 일도 팔자에 타고나는 것이니, 내 팔자가 좋을 것 같으면 김승지 집에 가서도 좋을 것이요, 흉할 것 같으면 어데를 가기로 그 팔자 면할 수 있소? 또 사람의 행실은 반상(班常)으로 의논할 것이 아니요, 사족의 부녀라도 제 마음 부정한 사람도 있을 것이요, 불상년이라도 제 마음 정렬한 사람도 많을 터이니, 나는 아무리 시골구석에 사는 상년이라도 두번 세번 시집 가기는 싫소. 시집에 가서 좋은 일이 있든지 흉한 일이 있든지 갈 길은 하루바삐 가고 싶소."
 
34
해가 낮이 되도록 모녀의 공론은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강동지는 벌써 제 집으로 돌아왔더라. 조그마한 일을 보아도 볼멘소리를 하던 강동지가 그날은 별다른 날인지, 낮이 되도록 아침밥을 아직 아니하였단 말을 들어도 야단을 아니 치고 길순이가 배고프겠다 어서 밥 지어 먹여라 하는 말뿐인데, 내일 새벽에 길 떠날 준비를 다 하고 들어온 모양이라.
 
35
길순이는 행장을 차린다 하면서 경대의 먼지 하나 털지 못하고 그날 해가 졌더라.
 
36
강동지의 마누라는 허둥거리느라고 길순의 행장 차리는 것도 거들어 주지 못하고 있다가 길 떠나는 날 새벽이 된 후에 문 밖에서 말 워낭 소리 나는 것을 듣고, 한편으로 밥 짓고 한편으로 말죽 쑤고 한편으로 행장을 차리는데, 어찌 그리 급하던지 된장을 거르다가 말죽 솥에도 들어붓고, 행장을 차리다가 옷 틈에 걸레까지 집어넣더라. 그렇게 새벽부터 법석을 하나, 필경 떠날 때는 해가 낮이 된지라, 강동지의 수선에 길순이는 밥 먹을 동안도 없이 교군을 타는데, 모녀가 다시 만나 보리 못 보리 하면서 울며불며 이별이라. 솔개 동내는 여편네 천지런지, 늙은 여편네, 젊은 여편네가 안마당 바깥마당에 그득 모여서, 언제 길순이와 정이 그렇게 들었던지 길순의 모녀 우는 대로 덩달아서 눈물을 흘린다. 이 눈에도 눈물 저 눈에도 눈물.
 
37
약한 마음 여린 눈에 남 우는 것 보고 감동되어 눈물 나기도 예사라 하련마는, 흑흑 느끼며 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 이웃집 노파는 길순이를 길러 내서 정이 그렇게 들었다 하더라도 곧이들을 만하거니와, 아랫마을 박첨지의 며느리는 길순이와 초면인데, 그 시어머니 따라서 길순이 떠나는 것 보러 온 사람이라. 처음에는 비죽비죽 울기를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목을 놓아서 엉엉 우니, 그것은 울음판에 와서 제 친정 생각하고 우는 사람이라.
 
38
"어, 이리하다가 오늘 길 못 떠나겠구나. 이애 길순아, 어서 교군 타거라. 여보게 교군, 어서 교군채 메고 일어나게. 자아, 동네 아지만네 여러분들 편안히 계시오. 서울 단겨와서 또 뵈옵겠습니다. 이애 검둥아, 말 이리 끌어 오너라."
 
39
하더니 부담말에 치켜 타니 교군 한 채 말 한 필은 신연강(新延江)으로 향하여 가고, 솔개 동내 여편네들은 하나씩 둘씩 제 집에 돌아가고, 강동지 마누라는 혼자 빈집에 들어와서 목을 놓고 운다.
【원문】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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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