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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鬼(귀)의 聲(성) ◈
◇ 제 9 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20권)     이전 9권 다음
1906년
이인직
1
남대문 밖 도동 남관왕묘 동편에 강소사가라 문패 붙은 집이 있는데, 안방에는 젊은 여편네 하나뿐이요, 행랑방에는 더부살이 내외뿐이라. 아무도 오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기운만 있더라.
 
2
동짓달 초하룻날 강소사가 해산을 한 후에 한 식구가 늘더니, 어린애 우는 소리에 사람이 사는 듯싶더라.
 
3
산모가 아들을 낳고 기뻐하나, 그 기쁜 마음 날 때마다 애 아버지를 생각한다.
 
4
그 애 아버지가 죽고 없느냐 할 지경이면 죽어 영 이별을 한 것도 아니요, 천리 타향에 생이별을 하였느냐 할 지경이면 그러한 이별도 아니요, 지척에 있으면서 그리고 못 보는 터이라. 그러면 그 산모가 남편에게 소박을 맞은 사람인가…….
 
5
아니, 소박데기도 아니라, 물같이 깊은 정이 서로 깊이 들어서, 이 몸이 죽어 썩더라도 정은 천만 년이 되도록 썩지도 않고 변치도 아니할 듯한 마음이 있다. 그렇게 서로 생각하면서, 서로 보지 못하는 그 사람은 누구런가.
 
6
그 동내 사람들은 강소사 집으로 알 뿐이요 전동 김승지의 첩 춘천집인 줄은 아직 모르더라.
 
7
춘천집이 그 집 든 후에 김승지가 청천에 구름 지나듯이 이삼 차 다녀갔으나, 춘천집 마음에는 차라리 춘천 있어서 그리고 못 보던 때만 못하게 여기더라.
 
8
동지섣달 긴긴 밤에 우는 애를 가로 안고 젖이 안 나는 젖꼭지를 물리고 어르고 달래더라.
 
9
"아가 아가, 우지 말고 젖 먹어라. 세월이 어서 가고, 네가 얼른 자라 어미 손을 떠나서 네 손으로 밥 떠먹고, 네 발로 걸어다닐 만하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고 죽겠다마는 핏덩어리 너를 두고 죽으면 네게는 적악이라. 이 밤이 이렇게 기니 너 자라나는 것을 기다리자 하면, 내 근심 내 고생이 한량이 있겠느냐. 젖이나 넉넉하면 네 주럽이 덜할 터이나, 젖조차 주저로우니 이 고생을 어찌하잔 말이냐. 나는 먹기 싫은 미역국 흰 밥을 억지로 먹는 것은, 내 배를 채우고 내가 살려고 먹는 것이 아니라, 국밥이나 잘 먹으면 젖이나 흔할 줄 알았더니, 흔하라는 젖은 흔치 못하고, 흔한 것은 눈물뿐이로구나. 아가 아가, 우지 말고 잠이나 자려무나."
 
10
이리 고쳐 안고 이 젖꼭지도 물려 보고, 저리 고쳐 안고 저 젖꼭지도 물려 본다.
 
11
어린애는 달랠수록 보채고 우는데, 춘천집은 점점 몸이 고단한 생각이 나더니 어린 자식도 귀치 아니하고, 성가신 마음이 생기더라.
 
12
"에그, 이 애물의 것, 왜 생겨나서 내 고생을 이렇게 시키느냐. 안아도 울고, 뉘어도 울고, 젖을 물려도 우니 어찌하란 말이냐. 울거나 말거나 나는 모르겠다."
 
13
하면서 어린애를 아랫목 요 위에 뉘어 놓으니, 어린애는 자지러지게 우는데, 춘천집은 그 어린애를 다시 안 볼 것같이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윗목에 놓인 등잔불을 정신없이 보고 앉았더라.
 
14
창 밖에 불던 바람이 머리맡 쌍창을 후려치면서, 문풍지 떠는 소리에 귀가 소요하더니, 방 안에 찬기운이 도는데, 춘천집이 고슴도치같이 옹그리고 앉았다가 하는 말이,
 
15
"에그, 이런 방에서도 겨울에 사람이 사나. 오냐, 겁나는 것 없다, 살 년의 팔자가 이러하겠느냐. 내가 김승지의 첩 되던 날이 죽을 날 받아 놓은 것이요, 서울로 오던 날이 죽으러 오던 날이다. 하늘이 정하여 주신 팔자요, 귀신이 인도한 길이라. 하루 한시라도 갈 길을 안 가고 이 세상에 있는 고로, 하늘이 미워하고 귀신이 시기하여 죽기보다 더한 고생을 지어 주는 것이라. 고생도 진저리가 나거니와 하늘이 명하신 팔자를 어기려 하면 되겠느냐."
 
16
하면서 우는 애를 물끄러미 보다가 가슴이 칼로 에이는 듯하고 눈물이 비 오듯 하더니, 어린애를 살살 만지며,
 
17
"아가 아가, 네 어미는 죽으러 간다. 나는 적마누라 투기에 이 지경 되거니와 너의 적모가 너조차 미워할 것이야 무엇 있겠느냐. 내가 죽고 없으면, 너의 아버지가 너를 데려다가 유모 두고 기를 것이라. 젖 없고 돈 없고, 돌아보는 사람 없는 내 손에 있을 때보다 날 것이다. 오냐, 잘 있거라. 나는 간다."
 
18
춘천집이 모진 마음을 먹고 전기 철도에 가서 치여 죽을 작정으로 경성창고회사 앞에 나가서 전기 철도에 가만히 엎드려서 전차 오기만 기다리는데, 용산에서 오는 큰길로 돌돌 굴러 오는 바퀴 소리에 춘천집이 눈을 딱 감고 이를 악물고 폭 엎드렸는데, 천둥 같은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무엇인지 춘천집 몸에 부딪쳤더라.
 
19
춘천집 치마에 웬 사람이 발을 걸고 넘어지면서 별안간에 에그머니 소리가 나더니, 어떠한 젊은 여편네를 공중에서 집어던지는 듯이 길 가운데에 떨어진다.
 
20
죽으려 하던 춘천집은 과히 다치지도 아니하였는데 뜻밖에 사람이 둘이나 다쳤더라.
 
21
용산서 서울로 들어오는 인력거꾼이 길에서 초롱을 태우고 깜깜한 밤에 가장 발씨 익은 체하고 어둔 길에서 달음박질하다가, 발에 무엇인지 툭 걸리면서 인력거꾼이 넘어지는 서슬에, 인력거 탔던 여편네가 어떻게 몹시 떨어졌던지 꼼짝을 못 하고 길에 엎드렸더라.
 
22
춘천집이 죽으려 하던 마음은 어데로 가고 인력거에서 떨어진 여편네에게, 불안하고 가이없는 마음이 생겨서, 그 여편네를 일으키며 위로하나, 원래 몹시 다친 사람이라 운신을 못 하는 모양이더라.
 
23
인력거꾼이 툭툭 털고 일어나서, 절뚝절뚝하면서 중얼중얼하는 소리는 길가에 드러누웠던 춘천집을 욕하는 소리라. 춘천집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인력거꾼에게 미안하다 말을 하는데, 그 인력거꾼이 처음에는 길가에 누웠던 사람에게 싸움을 하러 대들듯 하더니, 춘천집의 모양과 목소리를 듣고 아픈 것도 잊었던지, 차차 말이 곱게 나오더라.
 
24
"여보 인력거꾼, 인력거 타고 가시던 아씨는 어데 계신 아씨요."
 
25
"……"
 
26
"내 집은 여기서 지척이니 그 아씨를 내 집으로 모시고 갑시다. 용산서 여기까지 온 삯은 내가 후히 주리다."
 
27
인력거에서 떨어지던 여편네가 그때 정신이 나서 하는 말이, 나를 일으켜서 인력거 위에 태워만 주면 내 집까지 가겠다 하니, 인력거꾼이 발을 삐어 걸음을 걸을 수가 없다 하면서 멀리는 아니 가려 하는 고로, 그 여편네가 춘천집을 따라갔더라. 춘천집이 그 여편네를 데려다가 아랫목에 누이고, 더부살이를 깨워서 불을 덥게 때라 하면서 애를 쓰는데, 그 여편네가 춘천집의 애쓰는 모양을 보고, 어찌 불안하던지 몸을 다쳐서 아프던 생각도 없는 것 같더라.
 
28
온양 온천에 옴쟁이 모이듯이, 춘천집 안방에는 두 설움이 같이 만났으나, 서로 제 설움은 감추고 말을 하지 아니하고, 서로 남의 사정을 알고자 하는 눈치더라.
 
29
그 이튿날 식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김승지가 작은돌이를 데리고 춘천집을 보러 나왔는데, 춘천집이 김승지를 못 볼 때는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더니 김승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성이 잔뜩 나서 고개를 외로 두르고 앉았더라.
 
30
"이애 춘천집아, 왜 돌아앉았느냐? 산후에 별탈이나 없었느냐, 벌써 삼칠일이 되었나. 에그, 삼칠일도 더 되었네. 오늘이 그믐날이지, 어데 어린애 좀 보자."
 
31
춘천집은 아무 소리도 없이 아랫목 벽을 향하고 앉았는데, 김승지는 어릿광대같이 혼자 엉너리만 치다가 아랫목에 사람이 드러누운 것을 보고 또 하는 말이,
 
32
"얘, 저기 드러누운 사람은 누구냐, 손님 오셨느냐? 내가 못 들어올 것을 들어왔나 보구나."
 
33
"네, 손님 오셨소. 핑계 좋은 김에 어서 돌아가시오. 그렇게 오시기 어려운 길은 차라리 오시지 말고 서로 잊고 지내는 것이 좋겠소."
 
34
김승지가 춘천집의 마음이 좋도록 말을 좀 잘 할 작정이나, 말이 얼른 안 나와서 우두커니 섰는데, 아랫목에서 이불자락으로 눈썹 밑까지 가리고 이마만 내놓고 누웠던 여편네가 얼굴을 내놓더니 김승지를 쳐다본다. 김승지가 언뜻 보더니 입을 딱 벌리면서,
 
35
"아아, 이것 누군가. 침모가 여기를 어찌 알고 왔나. 이것 참 별일일세그려."
 
36
"나는 이 집이 뉘 집인 줄도 모르고 왔더니, 지금 영감을 뵙고, 영감 댁인 줄 알았습니다."
 
37
"으응, 그럴 터이지. 내가 여기 집 장만한 줄을 누가 안다구. 집안에서도 아무도 모르네. 저 작은돌이만 알지. 자넬지라도 누구더러 내가 여기 집 장만하였단 말 말게."
 
38
"그러하시겠습니다. 이런 말이 나서 마님 귀에 들어가면 영감은 큰일나실 일이올시다. 영감께서 벼슬을 다니면서, 정부를 그렇게 두려워하시고 대황제 폐하께 그렇게 조심을 하시면……."
 
39
말끝을 맺지 아니하고 김승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데, 춘천집이 홱 돌아앉으며,
 
40
"여보 영감, 영감을 다시 못 뵈올 줄 알았더니 또 뵈옵소구려. 오늘 참 잘 나오셨소. 오신 김에 부탁할 일이 있소. 오늘 영감 들어가실 때에, 저 어린애를 데리고 가시오. 여기 두었다가는 오늘이든지 내일이든지 나만 없으면……."
 
41
하던 말끝을 마치지 못하고 머리를 돌이켜 어린애를 보면서 구슬 같은 눈물이 치마 앞에 떨어진다.
 
42
"영감…… 영감께서 어련히 생각하고 계시겠습니까만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니까? 내가 그처럼 말할 것은 아니올시다만, 남의 일 같지 않소구려. 어젯밤 일을 알고 나오셨는지요."
 
43
"왜,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나?"
 
44
"글쎄올시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젯밤에 내가 용산 갔다가 오는 길에, 인력거를 탔더니 인력거꾼이 등불 없는 인력거를 끌고 어둔 밤에 달음박질을 하다가 무엇에 걸려 넘어지는 서슬에 내가 인력거 위에서 낙상하여 이 모양이오."
 
45
"응, 낙상을 하여 과히 다치지나 아니하였나?"
 
46
"내가 낙상한 것이 끔찍한 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오. 어떠한 사람이 허리를 전기 철도에 걸치고 엎드려서 전차 오기를 기다리던 모양이니,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있는 줄을 알으시오?"
 
47
"응, 그것이 누구란 말인가?"
 
48
침모는 다시 말이 없이 있고, 춘천집은 모기 소리같이 운다. 침모가 춘천집 우는 것을 보더니 소리 없이 따라 운다.
 
49
김승지가 춘천집 울음 소리를 듣다가 가슴이 뻑적지근하여지면서 눈물이 떨어진다.
 
50
잠들었던 철없는 어린애가 어찌하여 깨었던지 애까지 운다. 강소사 집 안방에는 애 어른 없이 눈물로 서로 대하였는데, 의논은 그치지 아니하고 해는 낮이 되었더라.
【원문】제 9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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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