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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
◇ 제5편: 고구려 전성시대 ◇
해설   목차 (총 : 12권)     이전 5권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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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1 장 기원 1 세기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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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大朱留王 이후의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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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 세기 이후로 기원 3, 4 세기까지의 한강 이남 곧 남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초창하여 새로 일어선 때요, 압록강 이남 곧 중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다 쇠미해지고, 압록강 이북 곧 북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도 거의 기울어져서, 가라나 신라나 백제나 남낙랑이나 동 부여의 두 나라들이 다 기록할 만한 일이 별로 없고,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강대한 나라로 여러 나라 중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대 주류왕 이후 연대가 삭감됨에 따라 사실도 모두 빠져서 그 사적(史積)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제 지나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지나와 선비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련된 한두 사항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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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구려 대 支那(지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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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漢)과 다투더니, 기원 1 세기경에 한의 외족(外族)에 왕망(王莽)이라는 괴걸(怪傑)이 나와서, 1)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볍(井田法)을 실행하고, 2)한 문화(漢文化)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지나 본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까지도 얼마간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말하자면 지금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이전에 지나는 수천년 동안 왕조의 변역과 군웅의 쟁탈이 무상하였지마는, 기실 을의 세력이 갑의 세력을 대신할 때에, 민중에게는 한때, '요역(요投)을 면제하고 부세(賦稅)를 감해준다(省요役薄賦稅)'하는 6 장의 혜정(惠政)으로 고식적(始息的)인 편안을 주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옛 규 정을 회복하여 폭(暴)으로써 폭을 대신하는 극이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이를 무의식한 내란이라고는 일컬을지언정,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는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제 정전설(井田說)발생의 경과와 왕망의 약사(略史)를 말하기로 한다. 정전설은 지나의 춘추시대(春秋時代)말 전국시대(戰國時代)초(기원 전 5 세기경)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한 것인데, 당시 여러 나라들이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마다 귀족이 전권(專權)을 하여, 사치가 극에 이르고, 전쟁이 끊일 날 없어서, 부세가 날로 높아가고,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땅을 아울러 가져서 인민의 생활이 말할 수없이 곤란하였으므로, 유약(有若)· 맹가(孟軻 : 孟子)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고 토지평균설(土地平均說)--- 정전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나의 하(夏)· 상(商)· 주(周)3 대가 다 정전제(井田制)를 행하였는데, 정(井)자 모양의 9 백 묘(묘)의 땅을 여덟 집에 나누어주어 한 집이 1 백 묘씩을 경작하고, 그 나머지 l 백 묘는 공전(公田)이라 하여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용(公用)에 바치게 하고 또 각자 경작한 1 백 묘에서 소출의 10 분에 1 을 공세(公稅)로 바치게 하여 이를 십일세(什一稅)라 일컬었다." 고 하고, "선대의 성왕(聖王)은 다시 나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시대가 되매, 제후와 왕들이 그 백성에게서 세를 많이 받기 위하여 정전을 파괴하는 동시에, 정전에 관한 문적(文籍)까지 없애버렸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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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족이고 그 원시 공산제가 있었음을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다 같이 공언하는 바이니, 지나도 그 태고에 균전제도(均田制度)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有若 · 孟軻 등)이 주장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를 눈으로 보고 혹은 전해듣고서 이를 모방하려 한 것이고, 그들이 자인한 바와 같이 자기네의 옛 문적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 (八家同田)이 아니고 사가동전(四家同田)이니, 지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쳐 있는 기자형(器字形)의 고전(故田)이 이를 충분히 증명하는데, 그 세제는 10 분의 1 을 취하는 '십일세(什一脫)가 아니고, 20 분의 1 을 취하는 입일세(卄一脫)였다. 맹자가, '맥(貊 : 곧 濊 貊)은 20 에서 1 을 취한다(貊 二十取一).' 고 한 말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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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사가동전제를 파가동전제로 고치고 20 분의 1의 세제를 10 분 의 1의 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하고는, 자존적 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 함을 꺼려 숨기고 중국 선대 제왕의 유제(遺制)라고 속이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夷貊)이라 일컫고,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의 공양전(公洋傳)· 곡량전(穀梁傳)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십일(什一)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 맥(大貊)· 소맥(小貊)이다(少乎什一者 大貊小貊也)." 라고 하고, "맥(貊)은 오곡이 잘 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나는데---백관(百官)· 유사(有司)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20 에 1 만 받아도 족하다(貊 五穀不生 唯?용生之 - - -- - -無百官有司之養 故二十取一而足)." 고 하였다. 후한서 부여 · 옥저 등의 전(傳)에,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기름지고 아름다워오곡이 잘 된다(土地平?---肥美---宜五穀)." 고 하였고, 위략의 부여 · 고구려 등의 전에는, "그 벼슬에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등이 있다(其官 有相加對盧沛者)." 라고 하였으니, 맹씨(孟氏)· 공양(公洋)· 곡량(穀梁)등의 말이 근거도 없고 이론에도 맞지 않는 조선 배척론임을 볼 것이다. 조엽(趙曄)의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하우(夏禹)의 정전(井田)이 조선(본문의 州愼)의 것을 모방해서 행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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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더라도 본래 민중을 휘동하여 부귀의 계급을 타파하려 한 운동이 아니고 오직 임금이나 부귀의 계급을 설복하여 그 이미 얻은 부귀를 버리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민중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자는 것이므로 민간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임금이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진시황이 여러 나라를 토멸하여 지나를 통일하고 지나의 모든 재부(財富)를 독점하여,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2 세에 망하고, 8년의 큰 난리를 지나 한(漢)나라가 일어나매,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 있어 온 귀족과 토호(土豪)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 계급이 훨씬 줄고, 인구도 난리통에 많이 줄어들어 농토 부족이 근심이 없었으므로, 문제되어오던 사회 문제가 얼마 동안 잠잠하였으나, 2 백년의 태평세월을 지나면서 인구는 크게 번식하고 거농(巨農)과 대상(大商)이 발생하여, 부자는 여러 고을의 땅을 가진 이가 있는 반면에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사회 문제가 학자나 정치가의 사이에 다시 치열하게 논란되게 되었다. 그래서 혹은 한전의(限田議 :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의논)를 내어 인민의 땅을 얼마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고, 혹은 주례(周禮)란 글을 지어, 이것을 지나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한 주공(周公)이란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거짓 핑계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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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에 한의 제실(帝室)은 쇠약해지고, 외척(外戚)왕씨(王氏)가 대대로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의 직책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마음대로 하다가, 왕망이 대사마 · 대장군이 되어서는 한의 평제(平帝)와 유자영(孺子영)두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는데, 왕망은 설로 앞에서 말한 1)정전제의 실행 2)한문화(漢文化)의 세계 통일이라는 두 가지 큰 사상을 가진 자였다. 그래서 주례(周禮)를 모방하여 온 지나의 정전 구획(區劃)에 착수하고 또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내서 많은 재물을 임금에게 뇌물하여, 인명과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배우라고 꾀었다. 이보다 앞서 흉노가 남 · 북 둘로 나뉘어져서 북흉노는 지금의 몽고 북부에 웅거하여 한과 대항하였으나 남흉노는 몽고 남부에 웅거하여 한에 신복(臣服)하였는데, 이때에 왕망의 사신이 남흉노의 선우(單于)낭아지사(囊牙知斯)를 달래어 '두 글자 이상의 이름은 중국 문법에 어긋나니, 낭아지사란 이름을 고쳐 '지(知 '라 하고, 흉노란 '흉(匈)'자가 순하지 못하니 '항노(降奴)'라 고치고, 선우란 '선(單)'자 가 뜻이 없으니 복우중국(服于中國)이란 뜻으로 '복우(服于)'라 고치라 .' 고 하였다. 낭아지사가 처음엔듣지 않다가왕망의 재물을 탐내어 한이 준 흉노선우(匈如單于)낭아지사의 인문(印文)을 버 리고 왕망이 새로 주는 항노복우지'(降奴服于知)'란 인문을 받았다. 그러나 왕망이 다시 생각하기를 남흉노가 관할하는 부중(部衆)이 너무 많으니 혹 후일에 근심이 되지 않을까 하여, 그 부중을 12 부로 나누어 열두 복우(服于)를 세우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낭아지사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 왕망에게 대항하여 싸우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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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어 흉노를 치는데, 요동에 조서를 보내고, 고구려현(高句麗縣)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고구려현이란 무엇인가?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국을 현으로 만들려다가 패하여 소수(小水), 지금의 태자하(太子河)부근에 한 현을 두고 조선 여러 나라의 망명자 · 포로 등을 끌어모아 고구려 현이라 일컬어서, 현도군에 소속시키고, 통솔하는 장관 한 사람을 두어 고구려후(高句麗候)라 일컬은 것이었다. 그 고을[縣] 사람들이 먼 길에 출정함을 꺼리므로 강제로 정발을 행하니, 고을 사람들이 새외로 나와서 싸움터로 가지 않고 모두 도둑이 되어 약탈을 하였다. 왕망의 요서대윤(選西大尹)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패하여 죽으니, 왕망이 대장군 엄우(嚴尤)를 보내 그 고을의 후(候)추(騶)를 꾀어다가 목배어 장안(長安)으로 보내고 싸움에 크게 이겼음을 보고하니, 고구려현을 하구려현(下句麗縣)이라 고치고 조서를 내려 여려 장수들을 격려하여 이긴 기세를 타 조선의 여러 나라와 흉노의 여러 부족을 쳐서 한화적(漢 化的)시설을 재촉하였다. 이에 조선 여러 나라, 북부여 · 고구려 등의 나라가 왕망에 대항하여 공수(攻守)동맹을 맺고,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노하여 왕망이 이에 대조선 · 대 흉노의 전쟁을 위해 세금을 늘리고 사람을 징발하여 전 지나가 소란해졌다. 그래서 부유한 백성들만 왕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가난한사람들도 떼를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므로, 왕망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한나라를 중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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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儒留王)31년의 일로 기록하고, 후·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延丕)로 하였으나, 이는 삼국사기 의 작자가 1)고구려 고기(古記)에 연대가 줄어든 공안(公案)이 있음 을 보고 고기의 연대를 한서의 연대와 맞추고, 2)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인 줄을 모르고, 이를 고구려국으로 잘못 알아서 한서의 본문에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 에,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수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 나라 서울 장안 에까지 갔다고 함은, 저들 사대노(事大奴)의 눈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고구려후추(高句麗候騶)' 5 자를 '아장연비(我將延丕)'의 4 자로 고친 것이다(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잘못은 많으나 턱없는 거짓은 못하는 사람이니, 연비는 혹 고기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인 듯도 하다. 그러나 유류왕은 분명히 왕망보다 백여년 전 인물이고, 한서에 말한 고구려는 분명히 고구려국이 아니니, 설혹 참말로 연비 라는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류왕 시대 고구려 사람은 아닐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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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왕망은 지나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의식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를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 · 문자 ·종교·정치 ·풍속·생활 등 모든 역사적 배경을 묻지 않고, 한문화(漢文化)로 지배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서 얼마간의 민족적 전쟁을 일으키게 해서, 결과가 내부 개혁의 진행까지 저지하여, 그 패망의 첫째 원인을 만들었다. '신수두'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지마는, 전해내려온 연대가 오래고 유행한 지역이 넓어서, 한나라의 유교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 되고, 이두문이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만든 것이지마는, 조선의 인명 · 지명 등 명사(고대에는 모두 우리 말로 지은 명사)뿐 아니라, 노래나 시나 기록이나 무엇이거나 다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리하였으므로, 한자로 이두자를 대신 할 가망이 없으니, 왕망의 한 문화적 동방 침략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는가? 하불며 흉노의 본 이름은 '훈'인데, 구태여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漢人)이고, 고구려의 본 이름은 '가우리 '요, 고구려(高句麗)는 그 이두자인데,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句麗)혹은 고구려(高句麗)로 쓰는 이도 한인이었다. 한인의 짓도 괘씸하거늘 하물며 게다가 본명과 얼토당토않은 글자를 가져다가 '항노(降奴)'라 '하고려(下高麗)'라 함이랴? 왕망의 패망함이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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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鮮卑(선비)대 고구려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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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걷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 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內外興安領)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 2 편 제 3 장에서 말하였거니와,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하나논 '오환(烏桓)'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邑落)을 나누어 사는데,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大人)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富大人)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 의 명자(名子)로 성을 삼으며,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 사람을 존중 하고, 늙은 사람을 천대하며,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나무에다 새긴 것으로 신표(信標)를 삼아서 무리를 모으고, 모든 분쟁은 대인에게 판결을 받아서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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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扶芬奴)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다른 한부대는 부분 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선비가 그 소혈(巢穴)을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을 삼았다. 오환은 한의 무제(武帝)가 위우거(衛右秉)를 토멸한 뒤에 이를 불러 우북평(右北平)· 어양(뺑陽)· 상곡(上용)· 안문(確門)· 대군(代那)---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예성(直匠省)· 산서성(山西省)일대에 옮겨 살게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 뒤 소재(昭帝)때에 오환이 날로 불어나므로, 당시 한의 집권자 곽광(곽光)이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까 하여, 오환의 선조 가운데 모돈에게 패하여 죽은 참혹한 역사로써,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쳐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니, 흉노의 호연제선우(壺衍제單于)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 만 명으로 오환을 치매 오환은 한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한이 3 만 군사를 내어 구원한다 일컫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흉노가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오환을 습격해서 수없이 학살하여 오환이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 한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망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들을 여러 고을에 볼모로 삼고 오환을 휘몰아서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오환이 분하게 여겨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왕망이 이에 그 볼모로 한 처자를 죄다 죽이니, 그 참혹함이 또 한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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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이 망하고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지니, 고구려의 모본왕(募本王)이 이를 기회로 하여,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襄平城)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흘(烏列忽)이라 일컫고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나를 치니, 한의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遼東郡)을 지금의 난주(難州)에 옮겨 설치하고,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蔡동)으로 요동 태수를 삼았다.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 지고, 금백(金帛)으로 선비의 추장(酋長)편하(偏何)를 달래어 서 오환의 추장 흠지분(歆志분)을 살해하게 하니,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공동작전을 취하였다. 한은 계책이 궁하여 해 마다 2억 7천만 전(錢)을 고구려 · 선비 · 오환 세 나라에 바치기로 약조하여 휴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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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본왕이 한을 이기니 몹시 거만해져서, 몸이 아플 때에는 사람으로 누울 자리를 삼고, 누울 때는 사람으로 베개를 삼아서 꼼짝만 하면 그 사람을 목베어 죽여,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시신(待臣)두로(柱魯)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구에게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우리를 살게 하므로 우리가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원수는 죽이는 것이 옳소." 하였다.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죽였다. 모본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모본왕의 태자는 못났다고 하여 폐하고 종실에서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태조왕(太祖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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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 부터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가 될 것이지마는,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함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 세나 혹은 4세가 됨이 옳 고,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태조왕 3년(기원 55년)에 요서와 10 성을 쌓았으니, 요동은 그 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후한서 동이열전(東吏列傳)에,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등지 를 침략하다가 채동(蔡동)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다 다시 항복하였다." 고 하였으나, 세출전(歲出錢)2 억 7 천만 전이 채동전(蔡동傳)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세공(歲貢)이요, 은신(恩信)이 아니다.
 
 

2. 제 2 장 太祖·次大 두 대왕의 文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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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太祖 · 次大 두 대왕의 世系의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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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세계(世系)에 틀리고 안 틀린 것은 사학가가 아는 체할 것이 아니지만, 고대사는 세대의 사실이 매양 왕조의 보첩(譜牒)에 딸려 전하므로, 그 틀리고 안 틀림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먼저 태조왕 의 세계를 말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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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前史)에 태조왕을 유류왕(儒留王)의 아들, 고추가(古鄒加)재사(再思)의 아들, 대주류왕의 조카라 했으나, 유류왕은 이미 말한 바 와 같이 연대가 줄어진 동안에 든 제왕이고, 광개토경호태왕(廣開土 境好太王)의 16 대조이니, 모본왕 (募本王)에게는 3 대조가 될 것이요, 태조왕에게는 4 대조가 될 것이다. 그러니 유류왕을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의 아버지로 한것은 잘못된 기록이 아니면 속인 기록이다. 재사는 그 벼슬 이름이 고추가(古鄒加)요, 고추가는 곧 '고추가'를 이두자로 기록한 것이다. '고주'는 묵은 뿌리 [古根] 란 뜻이요(지금 속어에도 묵은 뿌리를 '고주박'이라 함)'가'는 신(神)의 씨란 뜻으로, 당시 5 부(部)대신의 칭호가 된 것이니, '고주가'는 당시 종친 대신의 벼슬 이름이다(지금의 속어에도 먼 동족을 '고죽지 먼 등그러기 '라 함). 재사가 '고주가'의 벼슬을 가졌으므로 종친 대신임이 분명하고, 후한서나 삼국지에, "처음에는 연나(涓那)는 왕 될 권리를 잃었으나 그 적통(嫡統)대인(大人)이 오히려 고추가라 일컬어 종묘(宗廟)를 세움을 얻었다." 고 하였으나 연나는 서부(西部)의 이름이고, 계나(桂那)는 중부(中部)의 이름이니, 고구려의 정치체제에 중부가 주가 되고 4 부가 이에 복속하였으므로, 어느 임금 때에도 중부를 두어두고 서부인 연나 에서 왕이 나왔을 리가 없으니, 이는 태조왕이 연나의 우두머리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서, 왕이 되고 모본왕의 태자가 계나를 차지하였던 '신한'의 아들로서 물러나 연나의 고추가가 되었음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본기에는 태조왕 이후에 다시 대주류왕의 후예로서 들어가 왕위를 이은 이가 없고, 광개토경호태왕의 비에 대주류왕이 그 직조(直祖)로 씌어 있으니,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가 대주류왕의 조카가 아니라 3 세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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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 차대왕(次大王)의 세계(世系)를 말하고자 한다. 전사(前史)에 차대왕은 재사의 아들이요, 태조왕과 한 어머니 아우라 하였으나 태조왕 당시에 차대왕은 왕자라 일컬었으니,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우라면 어찌 왕제(王弟)라 아니하였는가? 현재의 왕의 아들은 아니지마는 전왕의 아들이므로 또한 왕자라 일컬었다면 재사가 왕의 아버지요 왕이 아니니, 왕부(王父)의 아들도 왕자라 일컬은 예가 있는가? 태조왕이 즉위할 때에 나이 겨우 7살이요, 생모되는 태후가 섭정하였 으니, 이때에 재사가 생존해 있었을지라도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이 여자나 어린아이만도 못할 만큼 노쇠하여 7살된 아들에게 왕위를 내 주고, 아내가 섭정함에 이른 것인데, 그 뒤에 어찌 다시 굳세어져서 차대왕과 신대왕(新大王)과 인고(仁固)의 3 형제를 낳음에 이르렀으랴? 재사가 정치상에는 싫증이 났으나, 아들을 낳을 만한 생식력은 강하였다 하더라도 차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6살이었으니, 태조 왕이 19년이 그가 난 해요, 신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7살이었으니, 태조왕 37년이 그가 난 해다. 태조왕 원년에 많이 늙은 재사가 19년만에 또 차대왕을 낳고 그 뒤 또 20년만에 신대왕을 낳았다 함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랴? 대개 차대왕 · 신대왕과 인고 세 사람은 태조 왕의 서자이고, 차대왕에게 죽은 막근(莫勤)과 막덕(莫德)두 사람은 태조왕의 적자이므로, 신대왕과 인고가 비록 차대왕(왕자시대의)의 전천(專擅)을 미워하였으나,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 그 반역의 음모를 고발하지 않은 것이고, 차대왕도 그 즉위한 뒤에 막근 형제는 살해하였으나, 신대왕과 인고는 그대로 둔 것이니, 후한서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들로 기록한 것이 실록(實錄)이요, 본기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우라고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거나 혹은 거짓 기록이다. 본기(本紀)에 태조왕의 소자(小字)를 어수(於漱)라 하고 이름을 궁(宮)이라 하였으나, 어수는 이두문으로 '마스'라 읽을 것이고, 궁(宮)이라는 뜻이다. 전자나 후자가 둘 다 태조왕의 이름이니, 어수는 소자이고, 궁은 이름이라고 나눌 것이 아니다.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이니 수성으로 읽을 것인데, 더러운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짚몽둥이 '를 가리키는 말이요, 태조왕을 전사(前史)에는 시호라고 하였으나 고구려는 처음부터 시호법을 쓰지 아니하고 생사에 그 공적을 찬양하여, '태조(太祖)' 혹은 '국조(國祖)'라고 하는 존호(尊號)를 올렸으며, 차대왕은 그 공적이 태조왕 다음 간다는 뜻으로 올린 존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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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太祖王 · 次大王 시대의 '선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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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강성은 선배 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조의(조衣 : 다음에 자세히 설 함)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그 창설이 태조 · 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 것으로써, '선(先)'과 '선(仙)'은 '선배'의 '선'의 음 을 취한 것이고, 인(人)은 '선배'의 '배'의 뜻을 취한 것이니, '선배' 는 원래 '신수두'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해 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혹은 활도 쏘며, 혹은 깨끔질도 하고, 혹은 태껸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혹은 크게 사냥을 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도 보아서, 여러 가지 내기에 승리한 사람을 '선배 '라 일걷고, '선배 '가 된 이상에는 나라에서 봉급을 주어서 그 처자를 먹여 집안에 누가 없게 하고,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자고 먹으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강론하거나 학예를 익히고, 나아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길을 닦거나, 군중을 위해 강습을 하거나 하여, 일신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곤란과 괴로움을 사양치 아니한다. 그 가운데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조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두대형(頭大兄)' 혹은 '태대형(太大兄)'이라 일컫고, 그 다음은 '마리'---'대형(大兄)'이라 일컨고, 맨 아래는소형(小兄 : 본래의 말은상고할수없음)이라 일컬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를 모아 스스로 한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사람과 같이 영광스러운 일로 보고,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선배 '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骨品 : 명문)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지마는, 오직 '선배 '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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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함경북도의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는 것이 곧 고구려 '선배 ' 의 유종(遺種)이니,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화상(在家和尙)은 화상(和尙 : 중)이 아니 라 형(刑)을 받고 난 사람으로, 중과 같이 머리 를 깎았으므로, 화상이라 한다." 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徐兢 : 고려도경 의 저작자, 지나 宋人)이 다만 지나 한대(漢代)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노(奴)라 일컬은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벌받은 사람이라 억지의 판단을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 '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遺風)을 유지하여,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왔는데, '선배 '란 명칭은 유교도에게 빼앗기고,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하여 재가화상이란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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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松都 : 開城)의 수박(手拍)이 곧 '선배 ' 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에 들어가서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서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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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太祖王 · 次大王 때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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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추모왕 때에는 모든 작은 나라들이 늘어서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규모가 초창이라 나라의 체제를 채 갖추지 못하였는데, 태조 왕 때에 와서 차대왕이 왕자로서 집정하여 각종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제도가 대개 왕검조선(王儉朝鮮)이나 삼부여(三扶餘)의 것 을 참작하여 대동소이하게 만든 것이고, 그 뒤 대(代)마다 다소 변경 이 있었으나, 대개 차대왕이 마련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신 · 말 · 불' 삼한(三韓)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부에 재상 세 사람을 두었으니, 가로되 '신가' · '팔치' · '발치' 다. '신가'는 태대신(太大臣)이란 뜻이니, 이두자로 '상가(相加)'라 쓰고, '신가'의 별명이 '마리'로 머리[頭]란 뜻이니, 이두자로 대로(對盧)(대는 옛 뜻으로 마주)라 쓰고, '신가'나 '마리 '를 한문으로는 국상(國相)혹은 대보(大輔)라 썼다. 팔치는 '팔꿈치(肱)'란 뜻이니, 이두자로 '평자(評者)'라 쓰는데, 한문으로는 '좌보(左輔)· 우보(右輔)'라 썼다. 위의 세 가지 를 만일 한문으로 직역하자면 '두신(頭臣)' · '굉신(肱臣)' · '고신(股臣)'이라 할 것이지마는, 글자가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대보·좌보·우보'라 했다.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구려고기(高句麗古記)등의 책에 혹 앞의 것을 좋아 '대로(對盧)· 패자(沛者)· 평자(評者)'로 기록하고, 혹은 뒤의 것을 쫓아 '대보 · 좌보 · 우보'라 하였는데,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이두와 한역(漢譯)의 이동(異同)을 구별하지 못하고 철없는 붓으로 마구 빼고 마구 넣고 마구 섞고 마구 갈라놓았으므로,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國相)을 만들었다.", "패자(沛者)아무로 좌보를 삼 았다." 하는 따위의 웃음거리가 그 사기 가운데 가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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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동·서 ·남·북·중 5 부(部)로 나누어 동부는 '순라', 남부 는 '불라', 서부는 '열라', 북부는 '줄라', 중부는 '가우라'라 하니, 순나'順那' · 관나(灌那)· 연나(椽那)· 절나(絶那)· 계안나(桂安那)는 곧 '순라·불라· 열라·줄라· 가우라'의 이두자인데, 관나의 '관(灌)'은 뜻을 취하여 '불(灌은 본래 부을관)'로 읽을 것이고, 그 별명인 '비류나(沸流那)'의 비류(沸流)는 음을 취하여 '불'로 읽을 것이 니, 지나사의 '관나(灌那)'는 곧 고구려의 이두자를 직접 수입한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관(灌)을 관(貫)으로 고쳐 그 뜻을 잃었다. 그 밖의 순(順)· 연 (涓)· 절(絶)· 계(桂)의 네나(那)는 다음으로 쓴 것이니, 중부(中部)는 곧 '신가'의 관할이요, 동 · 남 · 서 · 북 네 부는 중부에 딸려 각각 '라살'이란 이름의 높은 관리를 두었는데, 이것을 이두자로 '누살'이라 쓰고, 한문으로 '도사(道使)'라 썼다. 도사는 '라살' 곧 누살(누薩)이니 도사의 도(道)는 '라'의 의역이요, 사(使)는 음역인 데, 신당서에, "큰 성에는 누살을 두니 당(唐)의 도독(都督)과 같고, 그 밖의 성에는 도사를 두니 당의 자사(刺史)와 같다." 고 하였음은 억지의 판단이다. '신가'는 정권뿐 아니라 내외 병마(兵馬)를 관장하여, 권위가 대단해서 대왕과 견줄 만하나, 대왕은 세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높은 자리에 있고, '신가'는 3년마다 대왕과 4 부의 '라살'과 그 밖의 중요한 관원들이 대회의를 열고 적당한 이를 골라 맡겼고, 공적이 있는 사람은 중임을 허락하였다. '라살'은 대개 세습이지만, 왕왕 왕과 '신가'의 명령으로 파면되었다. 5 부는 다시 각각 5 부로 나누고 부 마다 또 3 상(相)· 5 경(卿)을 내고, 벼슬 이름[官名] 위에 부의 이름을 더하여 구별하니, 이를테면 동부에 속한 '순라'는 '순라의 순라'이고, '불라'는 '순라의 불라'이며,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으며, 동부의 '신가'는 '순라의 신가'라 일컫고, 남부의 '신가'는 '불라의 신가'라 일 걷고,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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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일치 '라는 것은 도부(圖簿)와 사령(辭令)을 맡아보는데, 이두자로 '을지(乙支)' 혹은'우태(優台)'라 쓰고, 한문으로 주부(主簿)라 쓰며, '살치 '란 것은 대왕의 시종이니 이두자로 사자(使者)라 쓰고, 그 밖의 중외대부(中畏大夫)· 과절(過節)· 불과절(不過節)등 은 그 음과 뜻과 맡은 직무를 알 수 없다. 삼국지, 후위서(逅魏書), 양서(梁書), 후주서(後周書), 당서(唐書)등에 12 급(級)의 벼슬 이름을 실었으나, 조선어를 모르는 지나의 역사가들이 그 전해들은 것을 번역한 것이므로, 삼국지에 주부 이외에 또 우태를 실은 것은 주부가 곧 우태의 의역임을 모른 때문이고, 신당서에 누사(騙奢)이외에 또 누살(누薩)을 실은 것은 누사가 곧 누살의 와전임 을 모른 때문이다. 통전( 通典)에 고추가(古鄒加)를 빈객(賓客)맡은 자라고 한 것은 다시 고구려의 종친대관(宗親大官)인 고추가가 외교관 된 것을 보고 마침내 고추가를 외교관 벼슬로 잘못 안 것이요, 구당서(舊唐書)에, "조의두 대형(조衣頭大兄)이 3년만큼씩 바뀐다." 라고 하였음은 '선배'의 수석 을 대신의 수석으로 잘못 안 것이다.
 
 

3. 제 3 장 太祖 · 次大 두 대왕의 漢族 驅逐(한족 구축)과 옛 땅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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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漢의 국력과 東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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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본왕(幕本王)이 한때 요동을 회복하였음은 이미 제 1 장에서 말하였거니와, 모본왕이 살해된 뒤에 태조왕이 7살에 즉위하여 국내의 인심이 의아해 하므로 요서에 10 성을 쌓았으나, 이때에 한(漢)의 부강이 절정에 이르러 지나 유사 이래의 일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맹장 반초(班超)가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어, 지금 서아시아의 거사(車師)· 비선(鄙善)등의 나라를 토멸하고, 지중해(地中海)에 다다라 대진(大秦), 지금의 이태리(伊太利 : 이탈리아)와 소식을 통해서 피부가 희고 몸이 큰 인종과 양피지에 쓰는 해행문자(蟹行文字 : 게가 기어가 듯 옆으로 써나가는 서양글자)의 이야기가 후한서에 올랐고, 두헌(竇憲)이 5 천여 리 원정의 군사를 일으켜, 지금 외몽고 등지에 나아가 북 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북흉노가 흑해(黑海)부근으로 들어가서 동(東)고트 족(族)을 압박하여, 서양사상(西洋史上)에 민족 대이동의 시기를 이루고 이로부터 2 백여년의 흉노대왕 '아틸라'가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원인을 이루었다. 한이 이만한 국력을 가진 때였으니, 어찌 요동을 고구려의 예사 땅이라 하여 영구히 내어놓으랴? 어찌 고구려나 선비에게 영구히 2 억 7 천만의 굴욕적 세폐(歲幣)를 바치고 말랴? 이에 세폐를 정지하고 경기(耿夔)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6 현을 다시 빼앗고, 경기로 요동태수를 삼아 동쪽 침략할 기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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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王子 遂成(수성 : 차대왕)의 遼東 恢復(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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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에는 당시 한을 침략한 중심 인물을 잘못 알았으나, 실은 태조왕은 당시 고구려에 군림한 제왕일 뿐이고, 전쟁에 대하여는 거의 차대왕인 왕자 수성(途成)이 도맡았었다. 전쟁이 처음에는 한이 주동자가 되어, 요동을 침략하여 빼앗는 동시에 고구려를 침노하매, 고구려는 이에 반항하는 피동적(被動的)지위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고구려가 주동자가 되어, 요동을 회복하는 동시에 나아가 한의 변경을 잠식하매, 한이 이에 반항하는 피동적 지위에 있었는데, 요동 회복의 전쟁은 기원 lO5년에 비롯하여 121년에 마치니, 전후 17년이었다. 이 전쟁의 초년, 기원 105년은 왕자 수성의 나이가 34살이었는데, "고구려가 비록 땅의 넓이와 인구의 수는 한에 미치지 못하나, 다만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이므로 웅거하여 지키기에 편리하여 적은 군사로도 한의 많은 군사를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한은 평원광야(平原廣野)의 나라이므로 침략하기가 용이하여, 고구려가 비록 한꺼번에 한을 격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시끄럽게 하여, 피폐하게 한 뒤에 이를 격멸해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장기의 소란작전을 한에 대한 전쟁의 방략으로 정하고, 정예한 군사로 요동에 들어가 신창(新昌)· 후성(候城)등 여섯 현(縣)을 쳐서 수비병을 격파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그 뒤에 예와 선비를 꾀어서 해마다 한의 우북평 · 어양 · 상곡 등지를 잇달아 침략하여, 한은 17년 동안 인축(人畜)과 재물의 소모가 대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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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21년 정월에 한의 안제(安帝)는 고구려의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幽州 刺史)풍환 (馮煥), 현도군수(玄도郡守)요광(姚光), 요 동태수 채풍(蔡諷)에게 명하여 유주(幽州)소속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라 하였다. 이에 수성이 태조왕의 명령을 받아, '신치' 총사령이 되어, 2 천 명으로 험한 곳에 웅거하여, 풍환 등을 막게 하고 3 천 명으로 사잇길을 좇아 요동 · 현도의 각 고을을 불 질러서 풍환 등의 후방 응원을 끊게 하여 드디어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같은 해 4월에 수성이 다시 선비의 군사 8 천 명으로 요동의 요대현(遙隊縣)을 치는데, 고구려의 날랜 군사를 신창(新昌)에 잠복시켰다가 요동태수 채풍의 구원병을 습격하여, 채풍 이하 장수 1 백여 명을 베어 죽이고 수없이 많은 군사를 살상하거나 또는 사로잡아 드디어 요동군을 점령 하고, 그 해 l2월에 또 백제와 예의 기병 1 만을 내어 현도 · 낙랑 두 군을 점령하여, 이에 위우거가 한에게 잃었던 옛 땅 ---조선의 옛 오열홀(烏 列忽)의 전부를 완전히 회복하니, 한이 여러 해의 전쟁에 국력이 피폐 한데다가 또 이처럼 크게 패하니, 다시 싸울 힘이 없어서 드디어 요동 을 내어주고 다시 세폐(歲幣)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고구려에 화의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포로는 한 사람에 대해 겸(겸 : 합사로 찬 명주)40 필, 어린아이는 20 필로 속환(贖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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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 낙랑 등의 회복이 태조왕 본기나 후한서에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당(唐)의 가탐전(賈耽傳)에 가탐의, "요동과 낙랑이 한의 건안(建安)때에 함락되었다(遙東樂浪 陷於漢 建安之際)." 고 한 말을 실었는데, 가탐은 당나라 때의 유일한 사이(四夷)의 고사(故事)연구가이니, 그 말이 반드시 출처가 있을 것이나, 다만 건안은 기원 l96년 한 나라 헌제(獻帝)의 원년이니까, 고구려가 중간에 쇠미한 때이므로, 건안은 곧 건광(建光)의 잘못이요, 건광은 곧 기원 121년 한나라 안제(安帝)의 연호다. 왕자 수성이 채풍을 죽이고 한의 군사를 격파한 때이니, 이때에 고구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현도 · 낙랑 등의 군을 회복하였음이 의심없다.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자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 리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아 서방 경영의 본거지로 삼고, 국내성과 졸본성과 아울러 삼경(三京)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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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후세 사람의 논쟁이 분분하여 혹은 환인현(桓仁縣)부근---지금의 혼강(渾江)상류인 안고성(安古城)이라고도 하고, 혹은 집안현(輯安縣)홍석 정자산(紅石頂子山)위라고도하지마는, 앞의 것은 산상왕(山上王)이 옮겨가 설치한 제 2 의 환도성이요, 나중 것은 동천왕(東川王)이 옮겨가 설치한 제 3 의 환도성이다. 이것은 제 6 편에서 다시 서술하려니와, 태조왕의 환도성은 곧 첫 번째 옮겨 쌓은 제 1 의 환도성이니,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 "안시성은 혹 환도성이라고도 한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안시성은 일명 안촌흘(安寸 忽)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환(丸)은 우리말로 '알'이 라고 하니, 환도(丸都)나 안시(安市)나 안촌(安寸)은 다 '아리'로 읽 을 것이므로, 다같이 한 곳---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 리의 옛 자리 임이 분명한데, 후세 사람들이 앞 뒤 세 환도성을 옳게 구별하지 못하고 매양 환도성을 한 곳에서만 찾으므로, 아무리 환도성의 고증에 노력하여도 환도성의 위치는 여전히 애매하였던 것이다.
 
 

4. 제4장 次大王의 왕위 빼앗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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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太祖王의 가정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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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수성이 이미 요동을 회복하고 한나라의 세폐(歲幣)를 받으니 태조왕은 그 공을 상주어 '신가'에 임명하고 군국(軍國)대사를 죄다맡겼다. 이에 위엄과 권세가 한봄에 모이고 명성과 인망이 천하에 떨치니, 수성이 만일 이 명성과 인망을 이용하여 나아가 요서를 쳤으면 삼조선의 서북 옛 땅을 전부 회복하기가 쉬웠겠지마는, 수성은 가정에 대한 불평이 공명(功名)에 대한 열심을 감쇄하여, 요동을 회복한 이튿날 한의 화의 요청을 허락(앞 장에 보임)하고 귀국하였다. 수성의 가정에 대한 불화란 무엇인가? 수성은 태조왕의 서자요, 막근 · 막덕 형제가 태조왕의 적자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막문은 고구려 왕실의 가법(家法)에 의하여 왕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고, 수성은 그 빛나는 무공에 의하여 또한 태자가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성은 요동의 싸움을 마치자 급히 돌아와 원정할 생각을 끊고 밖으로는 정치에 힘쓰며, 어진 신하 목도루(穆度婁)· 고복장(高福章)을 기용하여 '팔치'와 '발치'를 삼아서 인심을 거두고, 안으로는 사사로운 무리를 길러 태자의 자리 얻기를 도모하였는데, '불라[沸流那] '의 '일치 ' 미유(彌儒)와, '환라[桓那 ] '의 '일치 ' 어지류(어支留)와 '불라'의 조의(조衣 : 당시의 선배 수령)가 수성의 뜻을 알고 이에 。 아부하여 태자의 자리 빼앗기를 몰래 모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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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태조왕은 수성으로 태자를 삼자니 가법(家法)에 걸리고, 막근으로 태자를 삼자니 수성에게 걸려서 오랫동안 태자를 세우지 못하였다. 수성이 정치를 오로지 한지 10 여년에 태자의 자리를 얻지 못하자 원망하는 기색이 이따금 얼굴에 보이고, 모의하는 흔적이 때때로 곁에 드러나니 막근은 태자의 지위를 빼앗길 뿐 아니라 수성에게 죽을까 두려웠으나, 병권도 없고 또 위염과 명망이 수성에게 미치지 못하므로 그 대항할 방책은 오직 태조왕의 마음을 돌리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이때에 고구려의 '신수두'에 신단(神檀)의 무사(巫師)는 비록 부여처럼 정권을 가지지는 못 하였으나, 복술(卜術)로써 남의 길흉 화복을 예언한다 일컬어서 일반의 신앙을 받아 귀천의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의심나고 어려운 일을 이 무사에게 결정을 청하는 때였으므로, 막근은 무사에게 뇌물을 주고 도움을 빌었다. 기원 142년에 환도성에 지진이 일어나고, 또 태조 왕은 꿈에 표범이 범의 꼬리를 물어 끊는 것을 보고, 마음이 좋지 못하여, 무사를 불러 해몽해보라고 하니, 무사는 수성을 참소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범은 온강 짐승의 어른이요, 표범은 범의 씨요, 범의 꼬리는 범의 뒤니 아마 대왕의 작은 씨가 대왕의 뒤(후예란 말)를 끊으려는 자가 있어 꿈이 그러한가 합니다·"고 하여, 넌지시 서자 수성이 적자 막근을 해치리라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태조왕이 수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갑자기 무사의 말에 기울어지랴 다시 '불치' 고복장을 불러 물으니, 고복장은 수성의 무리는 아니지마는 아직 수성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선을 행하면 복이 내리고 불선을 행하면 화가 이릅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집안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시면 비록 재난과 변괴와 악몽이 있을지라도 무슨 화가되겠습니까? " 하고 무사의 말을 반대하여 태조왕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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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遂成(수성)의 음모와 太祖王의 禪位(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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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이 40년 동안이나 정권을 잡아 위염과 복을 오로지 하여, 매양 마근을 죽여서 왕위 상속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했지마는, 다만 태조 왕이 이미 늙었으므로 그 돌아감을 기다려서 일을 행하려고 하였는 데, 태조왕은 두 사람의 감정을 조화시켜서 자기가 죽은 뒤에도 아무 런 변란이 없도록 만든 뒤에 태자를 봉하려 하여 긴 세월을 그냥 지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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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46년은 태조왕이 왕위에 있은 지 94년이요, 나이 100살 되는 경사스러운 해인데, 수성도 이때에 나이 76살이라, 백살 노인인 태조왕의 건강함을 보고 혹 자기가 태조왕보다 먼저 죽어 막근에게 왕위가 돌아가지나 않을까 하여, 그 해 7월에 왜산(倭山 : 연혁 미상)에서 사냥하다가 지는 해를 돌아보며 탄식하니, 좌우가 그 뜻을 알고 모두 힘을 다하여 왕자의 뒤를 따라 행동할 것을 맹세했는데, 그 중 한 사람 이 홀로, "대왕께서 성명(聖明)하시어 백성이 공경하여 받드는데, 왕자가 좌우의 소인들을 데리고 성명하신 대왕을 폐위하려고 하는 건 한 가닥 실로 만 근의 무게를 끌려 함과 같을 뿐입니다.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고치셔서 효도로써 대왕을 섬기시면, 대왕께서 반드시 왕자의 선함을 아시어 양위하실 마음이 였으시겠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수성이 그의 말을 못마땅해 하니, 좌우가 수성을 위해 그를 살해하고, 음모가 더욱 급히 진행되 었다. 고복장이 눈치채고서 태조왕에게 들어가 고하고 수성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태조왕은 신하로서의 부귀로는 수성의 마음을 달래지 못할 줄을 깨달았으나, 차마 죽이지 못하여 고복장의 청을 거절하고,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별궁(別宮)으로 물러가고, 수성은 자리에 올라 차대왕(次大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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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본기에, "태조왕 80년에 좌보패자(左輔沛者)목도루(穆度婁)가, 수성이 딴 뜻이 있음을 알고, 병을 일컫고 벼슬하지 않았다(左輔沛者 知遂成有異志 稱病不仕)." 고 기록되었고, 차대왕 2년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났다(左輔穆度婁稱病退老)." 고 기록되었으니, 이에 이미 15년 전에 병을 일컫고 벼슬하지 아니한 목도루가 어찌 15년 후에 차대왕 2년에 또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났다고 할 수 있으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여러 가지 고기(古記)에 대하여 아무런 선택 없이 마구 수록하였음이 이같이 심하였다. 하물며 좌보(左輔)나 패자(沛者)가 다 '팔치'의 번역인데, 좌보패자라는 겹말의 명사를 글에 올렸으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또 태조왕 본기 에, " 94년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九十四年 八月 王遺將 襲遼東西安平 殺帶方令 량得樂浪太守妻子)." 라 하였는데, 이는 후한서에, "고구려왕 백고(伯固)가---질환(質桓)의 어간에 다시 요동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 高句麗王伯固 質桓之間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량得浪太守妻子)." 고 한 글을 그대로 초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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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환의 어간이란 질제(質帝)와 환제(桓帝)의 사이를 가리킨 것이니, 그것은 태조왕 94년이므로, 김부식이 이 해에다 기록해 넣은 것이고, 백고(伯 固)는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이니, 이때는 신대왕 원년 전 20년이므 로, 김부식이 '고구려왕 백고(高句麗王伯固)'의 여섯 글자를 '견장(遺將)'의 두 글자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이때 태조왕의 가정에 차대왕 과 막근의 다툼이 있어 외부의 일을 물을 사이가 없는 때였으므로, 후한서의 질환의 어간은 환령(桓靈)의 어간---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사이, 신대왕 때로 개정함이 옳은데, 김부식이 이를 태조왕 94년의 일로 적어넣음이 이미 망령된 조작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친절하게도 달까지 박아 '8월'이라고 하였음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국내외의 기록을 뽑아 넣을 때에 모호한 것은 아무 근거 없이 연윌(年月)을 스스로 정하고 자구를 가감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5. 제 5 장 次大王의 피살과 明臨答夫(명림답부)의 專權(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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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次大王의 20년 專制(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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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이 양위를 받아 20년 동안 고구려에 군림하여 전제를 하다가 연나(緣那)의 조의(조衣)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차대왕의 본기(本紀)가 간략하고 허술하여, 그 전제(專制)의 정도와 살해당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 이에 본기의 전문을 여기에 번역해 싣고 나서 논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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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이니, 태조왕의 동모제(同母弟 : 동모 제 3 字는 서자로 고칠 것임)로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仁慈)가 적었다. 태조왕의 양위(讓位)로 왕위에 오르니, 나이 76살이었다. 2년 봄 정월에 관나(貫那 : 灌那)의 패자(沛者)미유(彌儒)로 우보(右輔)를 삼았다. 3월에는 우보 고복장(高福章)을 죽였는데, 그가 죽을 때에, "원통하고 원통하다. 내가 당시에 선조(先朝)의 근신이 되어 어찌 난을 일으킬 사람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선군께서 나의 말을 듣지 않으시어 이에 이르렀거니와, 지금 임금이 왕위에 올라 마땅히 정(政)과 교(敎)를 새로이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 이제 불의로 충신을 죽이니 내가 무도한 세상에서 사느니보다 죽는 것이 낫다." 하고 형을 받으니, 모두들 이 소식을 듣고 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을 7월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가니, 환나 (桓那 : 椽那로 고칠 것임)의 우태 어지류로 좌보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대주부(大主簿)를 삼았다. 겨울 10월에 비류나(沸流那)의 조의(조衣)양신(陽神)으로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우태를 삼았다. 이상은 다 왕의 옛날 친구였다. 11월에 지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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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여름 4월에 왕이 사람을 시켜 태조왕의 원자(元子)막근을 죽이니, 그 아우 막덕이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을 7월에 왕이 평유원(平偏原)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흰 여우가 따라오며, 울므로 왕이 이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왕이 무사(巫師)에게 물으니, "여우는 요망한 짐승이니, 길한 상서가 아닌데 게다가 흰 여우니 더욱괴이한 변입니다. 천제(天帝)께서 인간의 임금에게 맞대해서 순수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요괴를 보여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반성하게 함이니 대왕께서 만일 덕을 닦으시면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왕이, "흉한 것이면 흉할 것이고 길한 것이면 길할 것인데, 이제 이미 흉하다고 하고 또 길하다고 하니 어찌 속이는 말이 아니냐? " 하고 드디어 무사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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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여름 4월 정묘(丁卯)그믐날 일식(日食)이 있었다. 5월에 다섯 별이 동쪽에 모였는데, 일관(日官)은 왕의 노함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이는 임금의 덕이요 나라의 복입니다."고 하니, 왕이 크게 기뻐 하였다. 겨울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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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여름 6월에 서리가 내려 쌓였다. 겨울 12월에 천둥하고 지진이있었다. 그음날 객성(客星 : 彗星)이 달을 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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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봄 2월에 꼬리별[패星]이 북두(北斗)를 범하였고 5월 갑술(甲戌)그믐날에는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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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봄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 3월에 태조왕이 별궁에서 돌아가니, 나이 119살이었다. 겨울 l0월에 연나의 조의 명림답부가 왕이 백생들 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이고, 그 호(號)를 차대왕이 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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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차대왕 본기의 전부다. 맨 끝에, "명림답부가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였다."고 했으나, 그 이전의 기록을 상고해보면, 차대왕이 백성에게 차마 하지 못할 정사를 한 일이 하나 도 없다. 고복장(高福章)은 차대왕의 음모를 고발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목도루는 차대왕과 막근의 중간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한 사람이므로 내쫓은 것이고, 무사는 태조왕의 꿈을 야릇하게 풀어 차대왕을 해치려 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막곤 형제는 차대왕과 맞선 적이므로 죽인 것이니, 이것을 아무리 참혹하고 불인(不仁)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운 원한의 보복이고, 인민에게는 이해 관계가 없는 일일 뿐더러, 또 이것이 모두 차대왕 2년 내지 3년까지의 일이니, 18년 후인 차대왕 20년에 반란을 일으킨, 명림답부의 유일한 구실이 될 수 없으며, 그 이외의 기사는 일식 · 지진 · 성변(星變)등뿐이니, 이 같은 천문 지리의 변화는 차대왕의 정치의 잘잘못에 관계가 없는 일이라 이로써 인민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한 증거로 삼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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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차대왕이 패망하고 명림답부가 성공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차대왕이 패한 뒤에 좌보 어지류가 여러 중신과 더불어 차대왕의 아우 백고 신대왕에게 왕위 계승을 권진(勸進)하였는데, 어지류는 처음부터 차대왕을 도와 왕위 찬탈을 계획한 괴수요, 그 여러 중신이 란 대개 미유 · 양신 등일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차대왕의 패망은 곧 자기 당의 이반(離反)에 의한 것일 것이다. 차대왕의 즉위 이전 10여년 동안에 차대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계획한 그 무리들이 차대왕과 20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도리어 왕을 배반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은 찾기 쉬운 것이다. 고구려는 원래 일인전제(一入專制)의 나라가 아니라 벌족공치(閔族共治)의 나라이니, 국가의 기밀 대사는 왕이 전결(專決)하지 못하고, 왕과 5 부의 대관들이 대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별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의 결정으로 행하였다. 그런데 차대왕은 부왕을 가두고 당시 신앙의 중심인 무사를 죽인 사람으로서, 비록 어지류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君權)이 오직 제일임을 주장하여 모든 일을 자기 독단으로 행하므로, 연나의 '선배' 우두머리 명림답부가 그 본부(本部)의 '선배'로서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어지류 등이 내응(內應)하여, 태조왕이 돌아간 뒤를 기회하여 차대왕을 죽이고 벌족 공치의 나라를 회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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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명림답부를 조선 사상 처음으로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라고 하지마는, 혁명은 반드시 역사상 진화의 의의를 가진 변동을 일컫는 것이니, 벌족 공치를 회복한 반란이 어찌 혁명이 되랴? 명림답부는 한때 정권 쟁탈의 효웅(梟雄)이라 함은 옳지마는 혁명가라 함은 옳 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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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明臨答夫의 專權과 외교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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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차대왕 당년에 해를 피하여 산중에 숨어 있던 백고(伯固)를 세워 신대왕(新大王)이라 하고, 국내에 사면령(敬免令)을 내려,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까지도 용서하여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고, 차대왕의 준엄한 형법을 폐지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명림답부가 '신가'가 되어,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아 처리하고, '팔치'와 '발치'를 겸하고, 예량 (濊梁)여러 맥(貊)의 부장(部長)을 다 차지하니, 그 위엄과 권세가 태조 왕 때의 왕자 수성보다 더하였다. 본기에는, "명림답부가 국상(國相)으로 패자(沛者)를 겸하였다." 고 하였고, 또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으로 한 것도 이때에 비롯된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국상이 곧 '신가'인지를 모르고, 패자가 '팔치' 곧 좌보인지를 모르고서 함부로내린 주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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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 때에 한이 요동을 지금의 난주(난州)에 옮겨다 설치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기원 169년에 한이 요동을 회복하려고 경림(耿臨)으로 현도태수를 삼아서 대거하여 침입하였다. 명림답부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신대왕 앞에서 회의를 열고 싸우고 수비할 계책을 논의 하였는데 모두들 나가 싸우기 를 주장했으나, 명림답부는, "우리는 군사는 적으나 험한 땅을 가졌고 한은 군사는 많으나 군량을 대기가 힘드니, 우리가 우선 수비를 하여 한의 병력을 지치게 한 뒤에 나가 싸우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길 것입니다." 고 하여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기로 계책을 정하고 각 고을에 명하여 인민과 양식과 가축들을 거두어 성이나 산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게 하였다. 한의 군사가 침입한지 여러 달을 노략질했으나, 얻는 것이 없고 싸우려고 해도 응하지 아니하므로, 양식이 떨어져서 배고프고 피로하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명림답부가 좌원(坐原)까지 추격 하여 한의 군사는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명림답부는 한의 침입군을 격파하자 국토를 개척하려고 먼저 선비의 이름난 왕인 단석괴(檀石塊)를 꾀어서 한의 유주(幽州)· 병주 (幷州)두 주 ---지금의 직예 · 산서 두 성을 침략하게 하고, 그 뒤를 이어서 고구려의 군사로 한을 치려고 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죽으니 나이 113살이었다. 신대왕이 친히 가서 통곡을 하고 왕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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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엔 신대왕 4년(기원 l68년)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와 침범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으므로, 왕이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하였다." 고 하고, 신대왕 5년(기원 l69년)에, "왕이 대가(大加)우거와 주부(主簿)연인(然人)등을 보내서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富山)의 적을 치게 하였다." 고 하고, 8년(기원 172년)에, "한이 대병(大兵)으로 우리를 공격해왔으므로--- 명림답부가 좌원(坐原)까지 추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려 한의 군사가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고 하였는데, 앞의 두 기록은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뒤의 한 기록은 고기(古記)에서 뽑아 쓴 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략(朝鮮史略)에는, "신대왕 5년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이 대병으로 침략해오므로,명림답부가 좌원(坐原)에서 이를 크게 격파하여 ---." 라고 하여 그 연조가 후한서의, "영제(靈帝)건녕(建寧)2년(기원 169년)에 현도태수 경림---백고(伯固)가 항복하였다(靈帝 建寧二年玄도太守耿臨---伯固降)."고 한 것과 부합하므로 경림의 침략군이 명림답부에게 패하였음이 분명한데, 김부식이 이것을 그릇 두 번의 사실로 나누어, 하나는 신대왕 4년의 또 하나는 신대왕 8년의 조항에 기록한 것이고, 공손도는 삼국지에 의하면, 한의 헌제(獻帝)영평(永平)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는데, 영평 원년은 기원 l90년이요, 신대왕 5년에서 20년 후이니, 신대왕이 20년 후에 요동태수 공손도를 도울 수 없었음이 또한 분명한데,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 김부식이 그대로 신대왕 본기 가운데 잘못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패해 달아나 경림을 크게 이겼다고 하고, 연대도 닿지 않는 공손도를 신대왕의 종주국으로 기록하였으니, 이런 곳에서 지나사의 거짓이 많음을 보겠거니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해왔다가 명림답부에게 패한 것을 신대왕 8년의 일로 기록하여 또 조선사략과 다르다. 대개 이조 초기에는 삼한고기(三韓古記)해동고기(海東古記)등 몇 가지가 있어 삼국사기 이외에도 참고할 만한 책이 더러 있었는 데, 그 고기(古記)들이 각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6. 제 6 장 乙巴素(을파소)의 엽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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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王后의 정치 간여와 左可慮(좌가려)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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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79년에 신대왕(新大王)이 죽고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즉위하여서는, 왕후 우씨(于氏 : 椽那于素의 딸)의 뛰어난자색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왕후의 친척 어비류(於卑留)는 '팔치'가 되고, 좌가려(左可慮)는 '발치'가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하니 그 자제들이 교만하고 난폭하여 남의 아내와 딸을 빼앗아다가 첩 으로 삼고, 아들과 조카들을 잡아다가 종을 만들며 남의 좋은 밭과 훌륭한 집을 빼앗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왕이 이것을 알고 죄주려고 하니까, 좌가려 등이 마침내 연나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기내(畿內)의 군사와 말을 징집하여 이를 쳐 평정하고,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하고, 4 부(部)대신에게 조서를 내려, "근자에 벼슬을 총애로써 임명하고 지위가 덕으로써 승진하지 못하여, 덕이 백성에 행해져서 왕실을 움직였으니 이는 다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다. 너희 4 부는 각기 그 관하의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 고 하였는데, 4 부가 의논하고 동부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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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을파소의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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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故國川王)이 안류를 써서 국정을 맡기려고 하니 안류가 자기의 재능은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하고, 서압록곡(西鴨綠谷)의 처사(處士)을파소 (乙巴素)를 처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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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파소는 유류왕 때의 대선 을소 (乙素)의 후손인데, 고금의 치란(治亂)에 밝고,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을 잘 알고 학식이 넉넉하였으 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에서 밭갈아 살아가고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고국천왕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로 맞아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삼아 '일치 '의 작위를 더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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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파소는 자기가 받은 벼슬과 작위가 오히려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고, 다시 다른 어질고 유능한 이를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 큰 사업을 성취하기를 정하였다. 왕이 그의 뜻을 알고 을파소로 '신가'를 삼아서 모든 관리의 위에 있어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을파소가 초양의 한미(寒微)한 처사로서 하루아 침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시기하여 비난이 자자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만일 '신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할 것입니다." 하고 더욱 을파소를 신임하였다. 을파소는 자기를 알아주고 크게 대우해주는 데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을 처리하였다. 상과 벌을 신중히 하고, 정령(政令)을 밝혀 나라 안이 크게 다스려져서, 고구려 9 백년 동안 첫째가는 어진 세상으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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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국천왕(혹은 國襄이라 함)의 이름은 남무(男武 : 혹은 伊夷謨)로,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拔奇)는 불초하다고, 함께 이이모를 세워서 왕을 삼았는데, 한의 헌제 건안 초에 발기는 자기가 형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딸린 민호(民戶)3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沸流水)상류에서 살았다(故國川王(或云國襄)諱 男武(或云伊夷謨)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不得立 興消奴加各將不戶 三萬餘口 지公公孫康 還住沸流水上)." 고 하였으나, 이는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문을 그대로 떠다가 옮겨 쓴 것으로, 발기(拔奇)는 곧 산상왕(山上王)본기(本紀)가운데의 발기(發奇)요, 이이모(伊夷謨)는 곧 산상왕 연우(延優)이니,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發奇)· 연우(延優)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로 잘못 전한 것인데, 김부식이 경솔하게 믿고 고국 천왕 남무(男武)를 곧 이이모라 하였고, 남무를 곧 발기(技奇)의 아우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삼국지 공손도전(公孫度傳)에 의하면, 공손강의 아버지 공손도가 한의 헌제 초평 원년(기원 190년)에 요동태수가 되어서 건안 9년(기원204년)에 죽고, 공손강이 뒤를 이었는데, 한의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년이니,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그 아버지 공손도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한 때인데, 김부식이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일로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앞에서 말한 신대왕 5년에, "공손도를 도와 부산(副山)의 적을 쳤다(助---公孫度 討富山賊)." 고 한 것과 아울러 보면, 김부식이 곧 공손도를 어느 때의 사람인 줄을 모른 듯하니 또한 기괴한 일이다.
【원문】제5편: 고구려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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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