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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현궁의 봄 ◈

◇ 운현궁의 봄 (18)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1933
김동인
1 흥선의 이런 난행을 당시의 명문 거족들은 모두 흥미있게 보고 비웃고 있을 동안 흥선의 난행의 위에 경계의 눈을 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훈련대장 영어 김병국이었다.
 
2 영어는 일찍 소년 시대부터 흥선을 알았다.
 
3 열 다섯 살에 흥선부정(興宣副正), 스물 두 살에 흥선정(興宣正), 스물 네 살에 흥선군―이렇게 봉군(封君)이 되어 스물 일곱 살에는 정일품 현록대부로 되고,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이며,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등을 역임할 동안의 흥선은, 결코 오늘과 같은 술주정군의 흥선이 아니었다. 작다란 몸집의 어디서 그런 큰 소리가 나는지, 흥선이 한 번 호령을 할 때는 부하 관리들은 모두 몸서리치고 하였다. 일 처리에 밝고 염치에 밝고 사리에 밝던 흥선이었다. 종친부며 도총부가 설치된 이래, 흥선이 재임했을 때만큼 일이 민첩히 신속히 명쾌히 처리된 적이 없었다. 위(威)와 은(恩)을 갖추어 상관으로서 부하 관리들에게 위포와 애경을 받고 있던 것이었다.
 
4 부산 장죽 길게 물고 호활한 음성으로 담소를 하던 당년의 흥선을 회상하건대, 그 사람이 후년 거리의 부랑자로 영락되리라고는 짐작도 못 할 일이었다.
 
5 당시의 많은 명문 공자들이 모두 그 몸차림이며 언어, 행동, 동작을 흥선을 본뜨려고 얼마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애썼던가? 초헌에 높이 올라서 구종 별배를 전후 좌우로 거느리고 커다란 상투를 춤을 추이면서 길을 지나갈 때에는, 행객들도 모두 발을 멈추고 이 고귀한 공자에게 멀리서 경의를 표하지 않았던가?
 
6 그 흥선이 관직을 내버리고 은퇴할 때에, 세상은 처음은 다만 기이하게 여기었다. 그리고 은퇴한 이상에는 구름이나 희롱하고 학이나 벗하는 한 한가로운 귀인이 되려니 이렇게 알았다. 속세의 관직을 달갑게 생각각지 않아서 은퇴하는 것이어니 이렇게 알았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믿을 수밖에는 없을이만큼 당년의 흥선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7 그렇거늘 그 흥선이 관직을 물러나서 은퇴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다. 한 번 떨어지면서 속세에 나왔다. 두 번 떨어지면서 속인과 사귀었다. 세 번 떨어지면서는 무뢰한이 되었다. 일찍이 종실 공자의 여기(餘技)로서 배운 난초는, 후년의 타락된 흥선이 기생집 바람벽에 휘호하는 그림이 되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는 동안, 이 관계에서 은퇴한 공자는 차차 속세에 발전하였다.
 
8 왕가의 친척이기 때문에 정계(政界)에 진출할 수 없는 흥선의 집안은 재산이 없었다. 재산이 없는 흥선이 직업도 없이 속세에 나다니노라니, 집안은 차차 꼴이 될 리가 없었다. 조상 전래의 보물도 하나 둘 차차 없어졌다. 마지막에는 이전에 타던 수레며 몸을 장식하던 관자며 갓끈이며, 집안에 남아 돌아가는 상이며, 항아리 나부랑이까지도 차차 팔아 없이하게 되었다.
 
9 일찍이 종실의 공자로서 행세하던 시대에 한성의 많은 명문 공자들과 사귀어 두었던지라, 어느덧 흥선은 당년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구걸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친구들도 그 구걸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도가 넘치게 되매 차차 눈살을 찌푸렸다. 구걸을 완곡히 거절하던 한때가 있었다. 그때가 지나서는 구걸을 노골적으로 물리치는 시대까지 이르렀다. 구걸을 거절을 받으면 누구나 창피한 일이다. 그러나 흥선은 그 창피도 몰랐다. 창피를 모르는 것을 세상은 다만 이것이 흥선의 인격이거니 하였다. 왕년의 흥선과 대조하여 보려 하지 않았다. 왕년의 흥선은 벌써 잊은 것이었다.
 
10 처음에 차차 흥선이 타락되어 들어가는 것을 볼 때에,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왕족으로서 너무 잘난 체하다가는 그 화가 몸에 및는고로, 그것을 미연중에 피하고자, 혹은 흥선이 부러 타락하는 것이 아닌가―고. 그러나 차차 타락의 돗수가 넘어서 과하게 된 때에는, 모두 흥선을 내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흥선과 가까이 사귀던 영어 김 병국도, 다른 사람의 예에 빠지지 않고, 흥선의 은퇴를 단지 벼슬에 마음이 없어서하는 일이거니 하였다.
 
11 은퇴한 흥선이 차차 타락할 때에는 처음에는 경이의 눈으로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흥선과 가까이 사귀고 흥선의 사람됨을 아는 영어는, 흥선이 유혹에 이기지 못하여 타락될 인물은 결코 아님을 넉넉히 알았다. 그러는 동안에 김씨 일문에서는 늘 서로 수군수군 의논해 가면서 왕족 중의 좀 똑똑한 인물을 점고하여 처치하고 하였다. 역시 김씨의 한 사람으로 그 수군거림에 참가하고 한 영어는, 비로소 흥선의 타락의 원인을 알았다. 똑똑히 굴다가 화를 보느니, 못나게 굴어서 목숨을 보전하려는 심경을 알았다.
 
12 이전에 흥선의 인물을 잘 알던 영어니만큼 흥선의 타락이 눈물겨웠다. 그만큼 잘나고 의지가 굳고 억세던 흥선으로 하여금, 타락을 가식하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치 못할 지금의 세태를 밉게 보았다. 흥선이 일부러 타락을 가식하는지라, 구태여 그것을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자기의 모든 친척들이 흥선을 웃고 경멸하고 놀릴 동안도, 영어는 결코 그런 야비한 희롱에 참가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낸 친구로 끝끝내 대접하였다. 가난하고 타락된 흥선에게 대하여, 그래도 호의를 보여주는 사람은 영어 형제뿐이었다. 이제는 거리의 무뢰한 밖에는 찾는 사람이 없는 흥선 댁을, 영어는 일부러 간간 찾았다. 흥선이 영어의 집에 찾아오면, 지나간 시절에 같이 놀던 친구로 여전히 대접하였다.
 
13 이제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흥선―가난하나 또한 구걸할 곳도 없는 흥선의 곤경을 짐작하고, 때때로 적지 않은 금전을 보내기도 하였다. 흥선 댁 도령을 위하여서도 「연줄 값」이라는 명목으로 백 냥 이백 냥씩 보내고 하였다. 흥선 댁 작은도령이 이 「사동 아저씨」를 찾아 오기라도 하면, 친조카나 다름 없이 귀애하고 하였다. 당당한 왕손으로서 단지 그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마음에 없는 타락된 행동을 하며, 뜻에 없는 비루한 언사를 하며, 가는 곳마다 수모를 받으며 다니는 흥선이 영어에게는 눈물겨웠다.
 
14 『상갓집 개!』
 
15 『흥설군!』
 
16 『먹걸리 대감!』
 
17 자기네의 일족이 흥선에게 대하여 이런 이름을 지어 주고 기뻐할 때에, 역시 그런 이름으로 부르며 웃기는 하지만, 내심으로는 흥선에게 대한 동정을 그냥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지라, 흥선도 그것을 짐작하고, 갑자기 어디 갈 일이라도 있으면, 영어에게 행차 하인을 빌어 가기도 하고, 가난한 흥선의 초라한 생일놀이나마, 놀이가 있을 때에는 영어를 반드시 청하고 하였다. 흥선의 작은아들 재황 소년도 영어에게만은 격의가 없이 놀러 다니고 아저씨 아저씨 하며 따랐다.
 
18 이 명철하던 공자가 오늘날같이 타락되지 않으면 안될―그 심경에 영어는 끝 없는 동정을 한 것이다. 그 뿐―그 이상 한 걸음 더 들어가서 흥선이 어떤 원대한 음모 아래 표면 타락을 가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까지는 생각이 및지 못하였다. 소위 이 하전 역모 사건으로 김씨 일문이 모여서 의논을 하다가, 지금 남은 종친 중에 똑똑한 인물이 이제는 없는가고 일일이 점고할 적에 흥선의 이름도 그 때 올랐다.
 
19 흥선의 이름이 나오매 그 때 모두들 무릎을 두드리며 웃었다. 흥선 따위는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 때 영어는 속으로 커다랗게 수긍하였다. 만약 흥선으로서 내로라고 그냥 접접거리며 다녔으면, 이 날 반드시 흥선의 이름 위에 흑표가 찍혔을 것이다. 눈물겨운 타락 생활을 계속하였기에 그 점고에서 패스한 것이다.
 
20 그런 일이 있은 며칠 뒤에 영어는 기괴한 일을 당하였다.
 
21 흥선에게서 예에 의지하여 행차를 좀 빌어 달라는 편지가 왔다. 여러 번째 보는 일이라 영어도 행차를 갖추어 흥선에게 보냈다. 행차를 보낸 것은 오정이 좀 지날까 말까 하여서였는데, 그 행차는 저녁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의 말을 듣건대, 그 날 흥선은 대궐에 들어갔었다 한다. 배행으로는, 조 성하가 있었다 한다. 정일품 현록대부의 정장을 하였다 한다.
 
22 영어는 먼저 머리를 기울였다.
 
23 기괴한 일이었다. 흥선이 대궐에 들어갈 일이 없다. 어명으로 부르셨다 하면 영어 자기가 모를 까닭이 없다. 어명이 아닐진대 정장으로 대궐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흥선이었다.
 
24 이튿날 영어도 입궐한 기회에 내관에게 물어서, 흥선이 조 대비께 뵈옵고 장시간 무슨 밀의를 하였다는 것을 알고, 영어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이 놀랐다. 대궐 안의 규율로서 흥선이 제 아무리 종친이기로, 흥선의 뜻으로 대비께까지 가까이 가지 못했을 것은 정한 이치다. 대비의 권병으로서 대비가 흥선을 부르기 전에는, 흥선이 백주 공공연히 대비께 가까이 가지 못할 것이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영어는 가슴이 송구하였다.
 
25 「조 대비와 흥선의 접근」
 
26 때가 때였다. 조 대비를 꺼리기 때문에 이 하전이를 없이한 꼭 이 때, 흥선이 조 대비의 부름으로 입궐한 것이었다.
 
27 단지 한 개의 우합(偶合)적 사실로 볼까?
 
28 그렇게 볼 수는 도저히 없었다. 조 대비는 혹은 종친의 한 사람으로서의 흥선의 이름은 기억할지 모르나, 대궐로까지 부를 만큼 친히 알 까닭이 없었다. 만약 친히 안다하면 이전에는 부른 일이 있었을 것이다.
 
29 이것은 우합적 사실이 아니다. 더구나 그 날(가난에 쪼들리어 변변한 도포 한 벌도 없는 흥선이) 새로 지은 관복을 차리고 위의 당당히 입궐하였다 하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30 흥선의 인물됨을 잘 알고, 겸하여 흥선의 지금의 가식적 인격을 간파하는 영어에게 있어서는, 이번의 조 대비와 흥선과의 회견이라 하는 것을 결코 무의미하게 볼 수가 없었다.
 
31 여기서 영어는 몸을 떨었다. 아직껏은 흥선이 단지 목숨을 도모하기 위하여, 마음에 없는 난행을 하거나 하고 그것을 동정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층 더 깊이 세상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어 나아가면서, 그 이면으로는 궁중의 어른 조 대비와 결탁하고 놀라운 음모를 꾀하던 것을 명료히 직각하였다.
 
32 대궐에 조 대비를 뵙고 나온 뒤로부터는 흥선의 난행이 예전보다 십 곱 이십 곱 더 하여 가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릴 때에, 영어는 그 의의를 알고 더욱 두렵게 생각하였다.
 
33 여기서 영어의 취할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34 하나는 자기네의 일족에게 흥선의 가면을 폭로시켜서, 흥선을 또한 이 하전과 같이 처치하여 버릴까 하는 길이었다. 또 하나는 모든 것을 눈감아 버리고, 끊임없이 그냥 흥선과의 교제를 계속하여서, 이 후 세상이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흥선에게 신임을 받을 준비를 해 둘까 하는 길이었다.
 
35 몸집이 큰 사람은 어리석다 하나, 영어는 몸집이 큰 비례로 비교적 영리한 사람이었다. 영어는 첫째 길의 위태로움을 알았다.
 
36 며칠 전에도 그 이야기가 났었지만, 이제 영어가 자기네의 일족에게 대하여,
 
37 『흥선은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사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외다. 흥선은 무서운 배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외다.』
 
38 하고 말한댔자, 일족은 용이히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백 걸음을 물러서서 일족이 그 말을 믿게 된다 할지라도, 흥선은 이 하전과 같이 손쉽게 처치하기가 매우 곤란한 사람이었다.
 
39 이 하전을 처치한 데 대해서는 지금 민간에서 말이 꽤 많다. 공공연히 이 하의 원죄를 역설하는 사람도 차차 생겨났다.
 
40 그런 위에 이제 또한 흥선을 「역모」라 하여 처치하여 버리면, 세상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흥선은 세상이 다 아는 판박이 무뢰한, 이 무뢰한을 역모라 하여도 세상이 믿지 않을 것이다.
 
41 『이것은 김가들이 왕족을 모조리 차례로 없이하려는 행동이다.』
 
42 당연히 이렇게 볼 것이지, 흥선 같은 인물이 역모를 하리라고는 삼척 동자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43 그러매 흥선의 정체를 들어서 일족에게 호소를 한다는 일의 십중 팔구는 남의 웃음이나 사는 행동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44 영어는 둘째 길을 밟기로 하였다.
 
45 아직껏 자기네의 일족 전부가 흥선을 웃고 수모하고 멸시하고 할 동안도, 영어 형제뿐은 흥선을 그렇게 대접치 않았다.
 
46 그런 허튼방이의 생활이 단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고육책인 줄 알고 그 심정에 동정하여, 모든 거만무쌍한 일족과 달리 그냥 우의를 계속한 것은 흥선도 알아 줄 것이다.
 
47 그 때는 단지 동정의 염으로서 교제를 계속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장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더욱 친밀히 흥선과 지내야겠다.
 
48 비록 일이 흥선의 마음대로 되지 못하여, 흥선이 끝끝내 일개의 무뢰한이라는 가면 아래 그의 일생을 마친다 할지라도 특별히 손해는 없는 일이요, 만약 장래에 마음대로 되어서 이 잠자는 호랑이가 포함성을 지르며 일어나는 일이 있다 하면, 지금의 크지 않은 동정은 그 날 놀라운 열매를 맺어, 영어 자기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49 이리하여 영어는 모든 일을 알고도 모른 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난행을 하는 흥선과 그냥 따뜻한 우의를 계속하기로 작정하였다.
 
50 흥선의 둘째아들 재황 소년에게 대하여 아직껏 무심히(단지 순전한 동정으로) 써 오던 호의가, 장래 어떤 결과로서 자기에게로 돌아올는지, 영어는 그것을 고요히 기다리기로 하였다.
 
51 이 놀라운 사건(장래 이 일족의 운명을 좌우할)을 일족에게 피력하지 않고 혼자 알아 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권세의 대립」이라는 것이었다.
 
52 김 좌근, 김 병기 부자의 권세와 김 병학, 김 병국 형제의 권세가 차차 대립되어 첨예화하고, 그 때문에 일족의 사이가 좀 벌어진 것도 이 사건을 병국이 혼자서 알아 두고 다른 데 말하지 않은 커다란 이유의 하나였다.
 
53 『단언은 할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점으로 보아서 혹은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54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영어였다.
 
55 그의 형 영초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56 영어가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57 『형님도 짐작하시겠지요? 젊었을 때의 흥선군이 얼마나 사람이 분명하고 강직했었는지―그런데 아무런들 사람이 그렇게까지야 갑자기 변하겠습니까?』
 
58 이 때야 영초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59 『혹은 자네 말이 옳을지도 몰라. 잘못 생각했는지도 몰라. 옳고 글코를 막론하고, 군가(君家)에 대해서 상당한 대접은 해야느니. 우리 문내에서 모두 흥선군을 수모하고 멸시해도, 나는 아직껏 그래 본 적이 없네. 우리의 이해 관계를 둘째로 두고, 우리가 이 나라에 태어난 이상, 이 나라 임금의 친척되는 이를 어떻게 멸시하겠나? 흥선군이 잘났건 못났건, 나는 상당히 늘 대접하네. 한 때 철없는 때는 내 세도를 자세삼아 수모도 했고 멸시도 했지만, 내가 철든 이래로는 푸대접을 해 본 일이 없네.』
 
60 『네, 저도 무론 전에 흥선군에게 푸대접을 하거나 한 일은 없었읍니다. 오죽하면 그 이가 그런 난행을 할까 하고 기회 있을 적마다 생활상의 조력도 하고, 나 보다 앞에서 다른 사람이 흥선군을 욕을 뵈려면 감싸 주기도 했읍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단지 동정심으로만 아니라, 자위책으로라도 소홀히는 대접지 못할까 합니다.』
 
61 동생의 말을 듣고 있던 영초는 머리를 들어 동생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62 『흥선군의 작은도령이 무슨 생인가?』
 
63 『금년 열 살인 줄 생각합니다.』
 
64 『재……?』
 
65 『재황이.』
 
66 영초는 또 말을 끊었다. 잠시 있다가야 말하였다.
 
67 『여보게, 무서운 세상이 나타나리.』
 
68 『네……』
 
69 『만약―만약 말일세, 자네 추측대로 흥선군의 그 사이의 난행이 오로지 자기의 인물을 감추려는 가면이요, 그 가면 아래서 무서운 꿈을 도모하고 있었다면 장래에는 무서운 세상이 나타나리. 너 나 할 것 없이, 큰코 다칠 무서운 세상이 나타나리. 만약 흥선군이 이전 오위도총관 시대의 그 지력이 그냥 있고, 흥선군이 권력을 잡는 날이면, 필연코 무서운 세상이 나타날 것일세. 나도 짐작이 가는 바이지만, 이전 도총관 시대에, 뜰의 먼지 하나, 추녀의 거미줄 하나, 그 양반의 눈에 벗어난 것이 없었네. 만약 그 양반이 나라의 권리라는 것을 잡기만 하면, 남으로는 제주로부터 북으로는 백두산까지, 어느 소나무 한 그루, 어느 우물 하나, 그 양반의 손이 가 닿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일세. 가로 뻗은 쓸데없는 가지는 잘라 버릴게고, 맑지 못한 우물은 메워 버릴 게고……찬찬하고 끈끈하고도 왈왈한 성미―자네 말과 같은 세상이 온다면 무서운 세상이 될 걸세.』
 
70 『그러면?』
 
71 『그러면 무얼, 별다른 일이야 있겠나?』
 
72 『그러면 우리 일문은?』
 
73 『김가 이가 할 것 있겠나? 전에 제조(提調) 시대에도 본 바여니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무서울 겔세. 그 사람이 인재일 것 같으면 상놈 양반 구별하지 않고 쓰고, 무능할 것 같으면 아무런 좋은 배경을 가졌을지라도 내던지고말고……그 때문에 그 때도 말썽이 많았던 것은 자네도 기억하겠네 그려.』
 
74 영어도 몸을 떨었다. 인재 무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씨 일문은 당연히 흥선의 눈으로 보자면 원수일 것이다. 그 원수 일문에 대한 처치를, 만약 그런 날이 온다하면 흥선은 어떻게 하려는가?
 
75 『병기는 멋 없어 교만하게만 굴어서 흥선군을 망신 준 일이 여러 번 있지 않습니까?』
 
76 『있지.』
 
77 『형님!』
 
78 『?』
 
79 『언제 흥선군을 한 번 아니 찾아보시렵니까?』
 
80 『?』
 
81 『그 마음을 한 번 떠보면 좋을 듯해서……』
 
82 『그 사이 이십 년 간을 그런 수모 멸시를 받으면서도 한 번도 안색을 변한 일이 없는 흥선군이 그렇게 쉽게 넘어갈 듯싶은가? 이러고 저러고 할 게 없이, 우리는 우리 일만 충실히 보세나. 만약 자네 눈이 글러서 흥선군은 사실 한 개의 치인이라면 말할 것이 없거니와, 그렇지 않고 마음에 무서운 패력을 감춘 사람이라면, 소위 지금의 당파 문제 같은 걸로 유혈의 참극까지는 내지 않을 것일세. 그러니깐 두고 보세. 자네도 흥선군에게 개인적으로 미움을 사지 않았을 것이고, 나 역시 개인적으로는 원수가 없어. 장래의 일이 어떻게 되리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흥선군이 권세를 잡는 일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 형제게까지야 및겠나?』
 
83 형의 말을 들으면서 영어도 생각하여 보았다.
 
84 만약 자기와 자기의 형의 추측이 옳다 할진대, 장래 과연 무서운 세상은 현출이 될 것이다. 어떤 세상이냐고 누가 묻는다 하면 거기는 대답하기가 매우 힘들겠지만, 지금의 상식으로 추측하기 힘든 별다른 세상이 현출될 듯하였다.
 
85 『대궐에 원자(元子)만 탄생되면 문제가 없겠구만―』
 
86 『그러면야 문제가 없지. 그렇지만 나는 도리어 흥선군이 권세를 잡는 날이, 사실 한 번 와 봤으면 좋을 듯이 생각하네.』
 
87 『왜요?』
 
88 『지금 세상은 너무 타락됐어. 우선 나부터 그런 짓을 하지만, 나라 회계에 문서가 없고, 모든 사무가 혼돈 천지고―그 위에 같은 김문이라 해도 근(根)자 세도가 있고 병(炳)자 세도가 있어서 서로 경쟁하고, 병자 가운데도 교동(김 병기) 세도가 있고 사동(병학 형제) 세도가 있어서 서로 경쟁하면서, 벼슬을 팔고 학정을 하니 이런 놈의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든지 힘 있는 이가 하나 생겨나서 위에서 꾹 눌러 놓아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망하네, 망해. 남이 하는 노릇이니 우리도 따라하기는 하지만 속으로 부끄럽기가 짝이 없어. 우리가 망할지도 한 번 세상이 뒤집혀지면 속이 시원하겠네.』
 
89 『그렇지만 우리 나라에는 종친이 정치에 간섭지 못하고 또 산 대원군이 없지 않습니까?』
 
90 『그게야 꾸미면 될 것이지. 법령이란 내기 탓이 아닌가? 종친이 정사에 간섭지 못한다 해도 세조 대왕께서 잠저시에 영의정을 지내신 일도 있고, 선례(先例)가 없는 바도 아니니깐……좌우간 흥선군이 지금 치인의 행동을 하는 것이 가면이라 하면, 장래에 그맛 고생도 예상하지 않겠나? 무슨 수단을 죄 꾸미고 있을 것일세.』
 
91 『대왕대비마마를 인연해서 흥선군이 일어선다 하면 조 성하, 조 영하 등 조씨의 세도할 날이 오겠지요?』
 
92 『글쎄, 흥선군이 조씨를 중용(重用)할지? 인물이 잘났으면여니와, 그렇지 못하면 경이원지해 버릴걸. 이전부터 벌족(閥族)의 세력을 몹시 미워했으니까―』
 
93 『어명으로 하는 일에 대비인들 어떻게 할 수 없지.』
 
94 그 날이 분명히 올지 안 올지는 확언을 할 수가 없으나, 지금의 타락된 환경에 앉아 있는 이 형제(그다지 마음이 꾀어 박히지 않은)는 일종의 공포와 호기심이 섞인 마음으로 그 날을 기다렸다. 혹은 자기네 일족이 잔멸할지도 모르는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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