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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다 물러가고 새로 잡히는 갑자년 정월 초이튿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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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같으면 비록 정월이라 할지라도 몇 사람의 종친이나 술 친구밖에 찾는 사람도 없던 흥선의 집이로되, 이제는 섭정 태공의 거궁으로서 초하룻날 이른 아침부터 이튿날 저녁인 이 때까지, 문안 오는 무리가 뒤를 따라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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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대충 치르고, 흥선은 내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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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이 내로 들어설 때에, 마침 웬 처녀가 하나 와 있다가 황급히 발치로 물러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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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은 아랫목에 자리를 잡으면서 처녀를 바라보았다. 낯 익은 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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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부인이 거기 대하여 대답하려 할 때에, 흥선은 자기의 기억 가운데서 그 처녀의 정체를 찾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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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민 생원 댁 처자로구나!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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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냐? 너의 오빠(양오라비 민 승호―부대 부인의 동생)와의 사이의 의는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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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은 잠시 말을 끊고, 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특한 소녀의 눈찌―비록 한두 점의 얽은 자리는 있으나, 얌전하고 슬기롭고 영리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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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좌씨전(左氏傳)」을 조금씩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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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것이 너무 많아서, 오빠께 꾸중을 늘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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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은 담뱃대를 끌어다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 모금 뻐근하니 빨고, 그 푸른 연기와 얼굴 앞에 어리는 가운데로 흥선의 말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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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이란 첫째도 둘째도 세째도 온순해야 하느니라. 승호를 양오빠로 여기지 말고 친동기로 섬겨라. 천애의 고아 승호―한 사람밖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지 않으냐? 어 참, 계집으로 태어난 이 아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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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을 얘기 통 혼자 도맡아 살핀답니다그려. 아직 다른 집 계집애 같으면 각시놀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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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박하고 가련한 팔자를 타고났지. 양가로는 친척도 있지만 친편으로는 제일 가깝대야 육촌 칠촌이지, 가까운 일가도 없이 불쌍한 아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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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자주 오빠와 함께 집에 놀러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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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입으로는 이런 말을 하나, 흥선은 속으로는 이 소녀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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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 비슷이 이렇게 한 번 더 중얼거리고 다시 생각난 듯이 담배를 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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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는 밤에야 양오라비 승호와 함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부대 부인은 소녀가 타고 갈 가마까지 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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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의 둘째도령―지금은 감히 그 휘(諱)조차 부를 수가 없는 지존은, 어렸을 적에 벌써 김 병문(金炳聞)의 딸과 혼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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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의 불우한 시대에 혼약을 한 것이었다. 즉, 김 병문의 딸은 장래의 흥선의 며느리요 재황의 아내가 될 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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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지위가 변하여서, 흥선은 대원군이 되고 재황은 지존이 된 오늘에 있어서는, 좀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조선의 아직껏의 큰 폐단의 하나는 왕비의 친척의 방자였다. 더구나 흥선과 사돈한 집안은 그렇지 않아도 몇 대를 내려오면서 집안의 딸을 대내로 들여보내고, 그 세력이 이미 하늘을 찌를 듯한 김족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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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으로 이 문제에 머리를 앓고 있던 흥선은 여기서 한 얌전한 처녀를 발견하였다. 집안은 부끄럽지 않는 양반의 집안이었다. 영특하고 슬기롭게 생긴 처녀였다. 학문에 있어서도 벌써 「좌씨전」을 읽는다 하니, 여인으로서는 과하면 과하지 부족함이 없었다. 그 위에 가장 두통거리되는 「가까운 일가」가 없는 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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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흥선은 그 소녀의 일신상에 대하여 부대 부인에게 끈끈히 물었다. 그 묻는 태도가 너무도 끈끈하므로, 부인이 이상히 생각하고 왜 그렇게 묻느냐고 반문을 하매, 흥선은 다만 웃어서 스러져 버리고 말았지만, 한참 뒤에 흥선은 스스로 다시 그 문제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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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규수를 중전(中殿)으로 삼도록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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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대해서 부대 부인의 의아하다는 눈치를 흥선은 위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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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는 있지만―김―김씨가―김문이―김가가―불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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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해도 할 수 없지요. 사세가 그런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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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흥선은 부인같이 간단히 단념하지를 못하는 모양으로 연하여 머리만 기웃거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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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규수를 간간 놀러 오라시오. 그리고 그 인품이며 사람됨을 좀 유심히 보아 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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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규수가 아니라도 김가는 좋지 못해. 있는 김가들도 꺾어야 할 판에, 새로 새 김가를 들여다 놓으면 마찬가지지. 김가 세상이 또 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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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후일 국태공과 민 중전의 악연은 여기서 그 실마리가 맺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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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일가가 없다고 안심하고 모셔 들였던 이 소녀는 후일 시아버님 국태공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동성 동본이면 모두 일가라 하고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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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특하고 슬기로운 성격은 단지 대궐 안의 여주인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손을 길게 펴서 여자다운 능란한 외교술을 농락하여, 그의 위대한 시아버님을 거꾸러뜨린―민 중전과 국태공과의 악연은 여기서 이렇게 맺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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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의 활달하고 밝은 눈으로도 여자의 세 치 마음 속은 능히 꿰어 보지 못하여, 천추에 원한을 남긴 서투른 짓을 하였다. 「일가가 없는 양반 집 딸」이라 하는 미끼가 흥선의 눈을 어둡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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