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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류(濁流) ◈
◇ 13 흘렸던 씨앗 ◇
해설   목차 (총 : 19권)     이전 13권 다음
1937.10
채만식
1
탁류(濁流)
 
2
13. 흘렸던 씨앗
 
 
3
칠월과 팔월은 그럭저럭 지나갔고 더위도 훨씬 물러가, 마음부터 우선 가을이거니 여겨지는 구월이다.
 
4
장마가 스쳐간 처마끝의 하늘이, 좁다란 대로 올려다보면 정신이 들게 푸르다.
 
5
뜰 앞 화분에는 국화가 망울이 앉고, 억척으로 마당 한 귀퉁이를 파 일궈 심은 다알리아가 한 길이나 탐지게 자랐다.
 
6
제호는 인제 며칠 아니면 당하는 추석에, 단풍철의 금강산이나 모처럼 둘이서 휘익 한번 다녀오자고 벼르고 있다. 해서, 즐겁자면 맘껏 즐길 수는 있는 가을이다. 그러나 초봉이는 저놈 다알리아에서 빨갱이가 피려느냐, 노랭이나 하얀 놈이 피려느냐 하고 속으로 점치면서 기쁘게 기다릴 경황조차 없이 마음은 어두워 가기 시작했다.
 
7
초봉이는 지나간 오월, 군산에서 고태수와 결혼하던 바로 전날 여자의 타고난 매달 행사 ××을 마쳤었다.
 
8
그랬으니 날짜야 쳐보나마나 늦어도 유월 그믐정께까지는 그게 있었어야 할 텐데 그냥 걸러 버렸다. 처녀 적에는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9
그러나 유월 그믐, 그때가 마침 제호와 새살림을 시작해서 수수하기도 했거니와, 일변 결혼을 하면 그런 변조도 생긴다더니, 그래서 그러나 보다고 심상히 여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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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달인 칠월 그믐께도 역시 감감, 소식이 없고 그냥 넘겨 버렸다.
 
11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으나, 설마 그랬으랴 하는 생각으로 하루 이틀, 매일같이 기다리는 동안에 팔월이 다 가도록 종시 소식이 없고 말았다.
 
12
구월로 접어들더니 그제는 분명한 임신의 징조가 보였다. 그것은 여자의 직감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모친이 막내동이 병주를 포태했을 때 여러 가지로 변화가 생기던 것을 본 기억도 도움이 되었다.
 
13
맨 처음, 신 것이 많이 먹혔다. 신 것 중에도 살구가 그놈이 약간 설 익는다 해서 시큼한 놈을 실컷 좀 먹고 싶은데, 철이 아니라 할 수 없이 나스미캉(여름 밀감)을 사다가는 이빨이 뻐득뻐득하도록 흠씬 먹었다.
 
14
한번은, 여느때는 즐겨하지도 않는 두부가 금시로 먹고 싶어서 식모를 시켜 한목 열 모를 사다가는, 일변 철에다가 기름으로 부치면서 집어 먹으면서 한 것이 두부 열 모를 다 먹어 냈다. 식모가 그걸 보더니 빈들빈들,
 
15
“아씨, 애기 서시나 베유?”
 
16
하는 것을, 새수빠진 소리 작작 하라고 지천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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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허천 들린 것같이 음식 먹고 싶은 증세가 지나고 나더니, 이번에는 입덧이 나서 욕질이 자꾸만 넘어오고, 가슴이 체한 것처럼 거북하기 시작했다.
 
18
밥맛은 뚝 떨어지고, 그렇지 않아도 여름의 더위에 시달려 쇠약해진 몸이 더욱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휘이 휘둘렸다. 그러나 이런 몸의 고통쯤은 약과였었다.
 
19
고태수와 결혼을 하고, 장형보한테 열흘 만에 겁탈을 당하고, 다시 보름 만에 박제호를 만났으니 대체 이게 누구의 자식이냔 말이다.
 
20
요행 제호의 씨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태수의 씨라면 딱한 노릇이다.
 
21
그렇지만 제호는 속이 틘 사람이라, 그런 이해야 해줄 테니 그런 대로 괜찮다 치더라도 만약 불행해서 형보의 씨이고 보면……?
 
22
생각하면 기가 딱 질렸다. 방금 제 뱃속에 형보와 꼭 같이 생긴 것 하나가 들어 있거니 싶고 오싹 몸서리가 치이곤 했다.
 
23
‘대체 뉘 자식이냐?’
 
24
아무리 답답해도 미리서 알아낼 재주는 없었다. 고가의 자식일 수도 있으면서 아닐 수도 있고, 박가의 자식일 수도 있으면서 아닐 수도 있고, 장가의 자식일 수도 있으면서 요행 아닐 수도 있기는 하고.
 
25
그러니 그 분간은 결국 낳아 놓은 담에라야 나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낳아 놓고 보아서 제호면 제호를, 태수면 태수를 닮았다면이거니와 형보를 닮았다면 그것은 해산이 아니라 벼락을 맞는 것이요, 자식을 낳아 놓는 게 아니라, 구렁이같이 징그러운 고깃덩이를 낳아 놓는 것일 것이다.
 
26
제호한테도 낯이 없을 뿐 아니라 천하에 그것을 젖꼭지를 물려 가면서 기르다니, 죽으면 죽었지 그 짓은 못 한다.
 
27
혹시 아무도 닮지 않고 저만 탁해 주었으면 해롭지 않을 듯하기는 하나, 그러고 보면 이게 뉘 자식이냐는 것을 분간 못 할 테니 안 될 말이다. 애비 모를 자식을 낳아 놓았다께, 가령 제호가 그런 속 저런 눈치를 모르고 제 자식인 양 좋이 기른다 하더라도 남의 계집으로 앉아서는 차마 민망해 못 할 노릇이다.
 
28
그뿐더러 애비 모르는 자식이 애비 아닌 애비를 애비로 부르게 하는 것도 본심 있이야 더욱 못 할 짓이다.
 
29
‘그러면 일을 장차 어떡하나?’
 
30
미장이의 비비송곳같이 천착을 한 끝에는 애가 밭아 이렇게 자문을 하는 것이나 역시 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고, 되레 더 무서운 골로 궁리는 빠져들어가던 것이다.
 
31
비록 석 달밖에 안 된 생명이지만, 그렇더라도 그걸 밟아 죽이는 것이 죄로 갈 짓은 죄로 갈 짓이나, 뒷일을 두루 각다분찮게 하자면 역시 낳지 마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다.
 
32
생각이 이에 미쳤을 때 그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두려워도 차라리 그 두려움을 취하고 싶었다.
 
33
더욱이 제호가 임신을 한 눈치를 챌까 봐서 애가 쓰였다. 그래 더구나 ××면 ××를 진작 시켜 버리든지 해야겠다고 초초히 결심을 하고 말았다. 하나 그렇게 결심은 했어도 그놈을 시행하자니 또한 어려운 고패여서, 섬뻑 손이 대지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몸은 담뿍 지쳤는데 마음 또한 암담하고 일변 초초하여 살림이고 좋은 가을이고 통히 경황이 없던 것이다.
 
34
제중당에 석 달 있었던 빈약한 경험과 막연한 상식의 힘으로 ‘×× ×××’ 즉 ‘×××’이라는 약을 알아내기에 초봉이는 보름 장간이나 애를 썼다.
 
35
약을 알아내고 이어 사다 놓기까지 하고서도, 그러나 매일같이 벼르기만 하고 벌써 십여 일이나 미룸미룸 미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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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열흘께다. 인제는 배가 제법 도독이 불러 올라 손으로 옷 위를 만져도 그럴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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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인데 제호가 조반상을 받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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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어찌 신색이 많이 못됐어! 어데 아픈가?”
 
39
하면서 딴속 있어 흐물흐물 웃는다.
 
40
초봉이는 가슴이 뜨끔했으나, 아마 그새 여러 날 횟배가 아프더니 그래서 그런가 보다고 천연덕스럽게 둘러댔다.
 
41
“횟배? 그럴 리가 있나!…… 아무려나 오늘 나하구 병원엘 가던지, S군을 청해 오던지 해설랑 진찰을 좀 해볼까?”
 
42
“싫여요!”
 
43
초봉이는 잘겁해서 절로 소리가 보풀스럽다.
 
44
“허어! 저런 변괴가 있나! 몸 아픈 사람이 그래, 진찰을 해보자는데 그렇게 쏠 건 무어람? 응? 허허허허. 그리지 말구, 자아 어서 밥 먹구 이쁘게 단장두 허구 그래요. 그럼 병원에 다녀오다가 내 조선호텔 한탁 쓰잖으리?”
 
45
“싫대두 그래요!”
 
46
“저런 고집이 있을라구! 허허허허…… 그럼 병원이 그렇게 싫거던 일러루 오라구. 내라두 맥을 좀 짚어 보게…….”
 
47
제호는 밥 먹던 손을 슬그머니 내민다. 초봉이는 물신물신 물러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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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여! 몰라! 마구 할퀼 테야, 마구…….”
 
49
하고 암상떨이를 한다.
 
50
“허허허허, 우리 괭이가 어째서 저럴꼬? 허허허허. 그래 그럼 고만두지 인전 다아 알았으니깐…… 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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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긴 무얼 안다구 저래! 밉상이네!”
 
52
“흐응, 그렇게 숨기려 들 거야 무엇 있누? 응?…… 제기할 것. 우리 괭이가 인전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단 말이었다! 허허허허.”
 
53
“저이가 미쳤나!…… 어이구 참, 볼 수 없네!”
 
54
“제기할 것, 나두 우리 초봉이 덕분에 막내둥일 본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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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끄러워요. 괜히 심심허니깐 사람 놀릴 양으루…….”
 
56
“놀리긴! 남은 시방 좋아서 그리는데.”
 
57
제호가 좋아서 그런단 말은 그러나 공연한 말이고, 유쾌해하는 것은 역시 농이던 것이다. 그는 진작부터 거니는 챘었지만, 간밤에야 그게 적실한 줄 알았는데, 그러자 초봉이가 이렇게 폴폴 뛰는 걸 보고 여간만 시방 속이 뜨악한 게 아니다. 분명코 초봉이가 고태수의 혈육을 잉태했기 때문에 한사코 임신을 숨기려 들거니, 미상불 전남편이 죽은 지 겨우 보름 만에 내게로 왔었고, 그러니까 이번 임신이 노상 전엣사람의 씨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려니 싶었던 것이다.
 
58
제호는 그렇다면 생판 제 계집이 낳아 놓는 남의 자식을 떠맡아 가지고 길러야 할 판이라 억울한 ‘아비의 부담’이요, 불쾌한 기억의 기념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일변,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계집을 데리고 사는 이상 그것을 부담을 했지 별수가 없는 것이고, 또 그처럼 비명횡사를 한 인간 하나의 혈육이 생명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한 일인즉 활협삼아서라도 끝을 두고 보기는 할 만한 것이라고 그는 울며 겨자 먹는 푼수로 단념을 하고 말았다.
 
59
제호가 이렇게 속 다르고 겉 다른 말을 하는 줄은 아나 모르나 간에 초봉이는 저대로 마음이 급하여, 그새 여러 날 두고 미뤄만 오던 계획을 오늘은 기어코 해치우려니 단단한 결심을 가졌다.
 
60
제호가 나가기가 바쁘게 장롱 옷 사품에다가 잘 건사해 두었던 ×××를 찾아냈다. 조반도 먹을 생각이 없고, 식모더러 냉수만 가져오게 했다.
 
61
일호 교갑 열두 개, 이것은 보통때 약으로 먹자면 사흘 치 분량이니 극량에 가깝다. 그래 좀 과한 줄을 알고서 두 개는 덜어 놓고 열 개만 해서 왼편손 손바닥에 쥐었다.
 
62
바싹 도사리고 앉으면서 바른손으로 냉수 그릇을 집어 들었다. 손이 바르르 떨리고, 무심결에 아랫배가 내려다보인다.
 
63
그새 십여 일 두고 번번이 여기까지 해보다가는 금시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뱃속엣것이 꼼틀하는 성만 싶어서 도로 걷어치우곤 했던 것이다.
 
64
유난스럽게 속엣약이 반짝거리는 교갑 열 개를 손바닥에다가 받쳐 든 왼편 손이 입으로 올라오려다가는 마치 천근 무게로 잡아 끌듯이 바르르 떨면서 도로 내려가고, 몇 번이고 이 승강이를 하다가 마침내 후유 한숨이 터져 나온다.
 
65
할 수 없이 바른손에 든 물그릇을 내려놓고, 왼편손 손바닥의 교갑만 말끄러미 내려다본다.
 
66
‘요것만 입에다가 탁 털어 넣고 물만 두어 모금 마시면…….’
 
67
초봉이는 손바닥에 쥔 ××× 교갑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에 차차로 이 약에 대해서 일종 야릇한 매력을 느꼈다.
 
68
쉬울 성싶어도 졸연찮고 어려운 일이니 더 어렵기는 한데, 그러나 그놈 한 고패만 눈을 지그려 감고, 이를 악물고, 그저 죽는 셈만 대고서 꿀꺽 넘겨만 버리면, 그때는 무서워도 소용이 없고, 시뻘건 ×덩이를 쏟트릴 때에 하늘이 올려다보여도 역시 소용이 없고,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덕에 이 뱃속에 들어 있는 이것을 십 삭을 채워 낳아 놓고 기르고 하느라고 겪는 갖추갖추의 고통과 불쾌함을 면하게 될 것이니 그게 어디냐.
 
69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고서 다시 교갑을 촐싹거려 볼 때에는 시방까지의 무거운 압박과는 달리 무슨 긴장한 게임이나 하려는 순간인 것같이 이상스럽게 고소한 흥분을 느낄 수가 있던 것이다.
 
70
한 시간을 넘겨 별렀던 모양이다. 마루에서 괘종이 땡 하고 치기 시작하더니 이어 땡땡땡 여러 번을 친다.
 
71
세어 보나마나 열한신 줄 알면서도 귀를 기울여 세고 있다가,
 
72
‘오래잖아 점심을 먹으러 올 텐데, 그전에 어서 바삐…….’
 
73
이렇게 급하게 저를 추겨 댄다.
 
74
그래도 조금만 더 충그리고 싶어 그럴 핑계를 찾아내려고 휘휘 둘러본다. 마침 이불장이 눈에 뜨인다. 일어서서 요와 누비이불과 베개를 내려다가 아랫목으로 펴놓는다.
 
75
옷도, 뒷일이 수나롭게 입고 있어야지 하고 속옷을 단출하게 갈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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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또 미진한 게 없나 하고 둘러본다. 그러나 정말 미진한 것을 염량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자꾸 더 충그리고 싶어서 그러는 제 마음을 제가 알았을 때에는,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고 저를 나무라면서 물그릇을 얼른 집어 든다.
 
77
집어 들면서 다시는 망설이지 못하게 하느라고 이어 눈을 지그려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벌린다. 이를 악물자고 했으나 먹는 놀음이 되어서 그건 할 수가 없었다.
 
78
열 개가 한꺼번에 넘어갈 것 같지 않아 우선 반 어림해서 목구멍에 쏟아 넣고는 물을 마신다.
 
79
뿌듯했으나 그런대로 넘어간다.
 
80
‘인제도!’
 
81
시원하다고 저를 조지면서 그 다음의 나머지를 다시 털어 넣고 물을 마신다.
 
82
‘인제도!’
 
83
아까처럼 목구멍으로 뿌듯이 넘어갈 때 연거푸 또 이렇게 조진다.
 
84
그게 글쎄 어디라고 요만큼 수월한 노릇을 안 하려고 벼르고, 망설이고, 핑계대고 한 제 자신이 괘씸했던 것이다.
 
85
자, 인제는 뱃속에서 야단법석이 일어나고, 마침내는 그 지긋지긋한 그놈의 ×덩이가 시원하게 빠져나오기는 나올 테라서, 그 일에만 정신이 팔려 방바닥에다 남겨 둔 교갑 두 개는 미처 치우지도 않고, 그냥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86
한 삼십 분 동안,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노란즉 비로소 속이 메스껍기 시작한다.
 
87
다 이래야 약이 되겠거니 하고 진득이 참는다. 그러나 차차로 차차로 참기 어려울 만큼 속은 더 뉘웃거리고 아파 오기까지 한다. ××이 수축이 되는 것도 약간 알 수가 있었다.
 
88
왱하니 귀가 울고, 머릿속이 휘휘 휘둘려 어지러워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노래지고 한다.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속 메스꺼운 것, 뒤틀리고 아프고 한 것이 점점 더 급해 간다.
 
89
그래도 게우지 않으려고 정신 몽롱한 중에도 이빨을 악물어 가면서 참아 내는 것이나, 그 노력이 길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다.
 
 
90
식모가 허겁지겁 회사로 달려와서 제호를 불러내어,
 
91
“아씨가, 저어 아씨가 돌아가세유! 헷소리를 허세유! 정신을 못 채리세유!”
 
92
하면서 대중없이 주워섬기기는 바로 오정이 조금 지나서다.
 
93
‘××를 시키려고 약을 먹었구나!’
 
94
제호는 단박 속을 알아채었다.
 
95
허둥지둥하면서도 친구요 개업의인 S한테 전화를 걸어 위 세척을 할 준비까지 해가지고 오라는 부탁을 한다. S는 실상 산부인과의 전문의사지만, 제호와 절친한 관계로 제호네 집안에서 누가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그리로 쫓아가고, 골치만 좀 띠잉해도 불러오고 하는, 말하자면 촉탁의산 맥이었었다.
 
96
제 할 말만 다 하고 난 제호는 수화기를 내동댕이치고 한걸음에 두발씩 뛰어 집으로 달려간다.
 
97
제호는 가령 무엇이 되었거나, 이미 한번 ‘어미’라는 인간의 배를 빌려 생명의 싹이 트인 그것을 모체까지 위험한 독약을 먹여 가면서 악착스럽게 ××를 시키는 데는 동의를 않는 사람이다.
 
98
하기야 그도 초봉이가 아비 모르는 ‘모듬쇠’ 자식을 낳지 말아 주었으면야 해롭잖아하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고 ××라는 수단으로 그런 만족을 사고 싶지는 않았었다. 더구나 시방은 ××가 되고 안 되고는 차치하고, 첫째 초봉이의 생명의 위험이 염려스러워서라도 그다지 다급히 서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99
제호는 선뜻 부엌에 있는 개숫물통을 통째 집어 들고 방으로 달려 들어간다.
 
100
초봉이는 보니, 정신을 놓고 펼쳐 누워 숨도 쉬는 둥 마는 둥 확실히 위태해 보였다.
 
101
대체 무얼 먹었는가 하고 둘러보다가 방바닥에 두 개 남아 있는 교갑을 집어 뽑아 보고는 ×××인 줄 알고서, 그래도 조금은 안심을 했다. 혹시 ‘맥(麥)×’이나 먹지 않았나 해서 은근히 더 걱정을 하고 왔던 참이다.
 
102
많이 토했는지, 식모가 걸레로 훔쳐 낸 방바닥에 아직도 그래도 흥건히 괴어 있는 걸 보고 개숫물도 퍼먹이지 않고 맥만 짚고 앉아서 의사가 오기를 기다린다.
 
103
매우 초조하게 기다린 지 이십 분쯤 해서 S가 간호부까지 데리고 달려들었다.
 
104
우선 막상 몰라 위 세척을 하기는 했으나, 역시 토할 것은 토하고 흡수될 놈은 흡수되고 했기 때문에 그건 별반 효험을 내지 못했다.
 
105
위 세척을 한 뒤에 이어 강심제와 해독제로 주사를 한 대씩 놓았다. 이렇게 하면서 자연회복이 되기를 바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106
“어때……? 뒤어지지나 않겠나? 그놈의 제기할 것!”
 
107
얼굴에 아직도 긴장이 덜 가신 채, 제호는 S가 청진기를 떼어 들기를 기다려 물어 보는 것이다.
 
108
“제길 하다니……?”
 
109
S는 제호를 따라 마루로 나오면서 시치미를 떼고 농담부터 내놓는다. 이 둘은 언제고 농을 않고는 하는 말이 심심해서 못 배기는 사이다.
 
110
“……응? 죽으면 죽구, 살아나면 살아나는 게지, 어째 그 제길 하나?”
 
111
“배라먹을 게 어쩌자구 ×××을 그렇게 다뿍 집어 삼키더람!”
 
112
제호는 S가 농담을 하는 데 그래도 적잖이 마음을 놓고서, 그와 마주 담배를 붙여 물고 앉는다. 무척 애를 쓴 표적은, 금시 입술이 바싹 말라붙은 걸로도 알 수가 있다.
 
113
“대장쟁이 집에 식칼이 없어 걱정이라더니, 이건 제호 자네는 약장수 집에 약이 너무 많아 성활세그려?”
 
114
“여편네 무지한 것두 딱해.”
 
115
제호는 시방 속으로는 S가 초봉이의 임신한 걸 알까 봐서 은근히 애를 태우고 있다. 아무리 친한 S한텔망정, 초봉이가 ××을 시키려고 이 거조를 했다는 눈치는 보이고 싶지 않던 것이다.
 
116
“그게 다아 죄다짐이라는 걸세…….”
 
117
S는 제호가 꼼짝 못 하는 게 재미가 나서 자꾸만 더 놀려 주면서, 환자는 잊어버린 것같이 태평이다.
 
118
“……죄다짐이라는 거야…… 오십 전짜리 인찌기약 만들어서 광고만 크게 내굴랑은 오 원 십 원 받아먹는 죄다짐이야.”
 
119
“그래, 자네네 의사놈들은 위너니 이 원짜리 주사를 이십 전씩 받구 놔주지?”
 
120
“그리구 죄가 또 있지. 아인두 족한데 츠바이, 드라이씩 독점을 하구 지내구…… 응? 하나찌두 일이 오분눈데 쓰나찌나 세나찌나 무슨 일이 있나?”
 
121
“옛놈은 팔선녀두 데리구 놀았으리? 제기할 것.”
 
122
“그런데 자네, 요샌 그 ‘제기’ 하루에 몇 번씩이나 하나?”
 
123
안방에서 간호부가 까알깔 웃고, 식모는 킥킥 웃음을 삼킨다.
 
124
조금 만에 S는 청진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125
“××이나 안 돼야 할 텐데……!”
 
126
하면서 의미 있이 빙긋 웃고는 제호를 내려다본다.
 
127
제호는 할 수 없이,
 
128
“허! 제기할 것.”
 
129
하고 뒤통수를 긁적긁적한다.
 
130
초봉이가 머리칼 한 오라기만한 정신에 매달려 두웅둥 뜨다가 땅속으로 가라앉다가 배암같이 생긴 형보한테 쫓겨다니다가, 그게 갑자기 태수이기도 하고, 염라대왕 앞에 붙들려가서 문초도 받아 보고, 문초를 하던 염라대왕이 제호가 되어 기다란 얼굴로 히죽이 웃으면서 옆으로 오기도 하고, 형보가 칼로 옆구리를 찢고 뱃속에서 기어 나오기도 하고, 이런 혼몽중에서 온껏 하룻낮 하룻밤을 지나 제정신이 들기는 그 이튿날 저녁 나절이다.
 
131
정신이 들자 이어 생신 줄을 아는 순간, 맨 먼저 손이 아랫배로 가졌다. 돈독하게 배가 만져질 때 그는 안심과 실망을 한꺼번에 느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132
사흘이 지나서 초봉이는 ××를 시키자던 것은 저까지 잡을 뻔하고 실패했으나 기운은 웬만큼 소성이 되었고, 제호가 저녁상을 받을 때에는 자리를 밀어 놓고 일어나 앉을 수도 있을 만했다.
 
133
“그대루 누었잖구!…… 누었으라구, 그냥.”
 
134
제호는 성화하듯 만류를 하면서, 비바람 함빡 맞고 휘달린 꽃같이 초췌한 초봉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건너다본다.
 
135
초봉이는 점직해, 웃으려다 말고 외면을 한다. 제호가 이내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떼지 않았고, 그래서 둘의 사이에는 무엇이 께름하니 걸려 있는 것 같아 마주 얼굴을 치어다보고 앉았기가 거북했던 것이다.
 
136
제호는, 그러나 그 일을 제 속 치부나 해두고 탓을 말쟀던 게 아니고, 초봉이가 몸이 완구해지거든 차차 타이르려니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137
“사람두 원!”
 
138
제호는 이윽고 빙깃 웃으면서 숟갈을 집어 든다.
 
139
“……건 무슨 짓이람?…… 그리다가 죽으면 어쩔려구 그래? 겁두 나지 않어?”
 
140
초봉이는 외면을 하고 앉아 치마 고름만 만지작거린다.
 
141
“응? 초봉이.”
 
142
“……”
 
143
“초봉이?”
 
144
“……”
 
145
“그러면 못쓰는 법야. 어찌 됐던지 간에 초봉인 그 생명의 어머니가 아닌가? 어머니…… 그런데 글쎄 그 거조를 하다니, 송구스럽지도 않던가?”
 
146
초봉이는 ‘어머니’라는 이름 밑에서 책망을 듣고 보니 미상불 송구한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저 그럴싸했지, 진정으로 마음이 저리게 죄스러운 줄은 모르겠었다.
 
147
만일 이번이 두세 번째의 임신이라면 어머니답게 참으로 송구한 마음이 마음에서 우러나기도 했을 것이다. 보다도 오히려 남의 책을 듣기 전에 그랬을 것이요, 혹은 이러고저러고 없이 애당초부터 ××이란 염도 내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초봉이로 말하면 아직까지도 완전하게는 ‘어머니 이전〔母性以前〕’이다. 따라서 가령 이렇게 말썽 붙은 임신이 아니고 순리의 결혼으로 순리의 임신을 했다 하더라도 겨우 넉 달밖에 안 된 뱃속의 생명에 대해서 제법 어머니다운 애정과 양심은 우러날 시기가 아니었었다.
 
148
그러한 때문에 ××을 시키려고 약을 들고 앉아서 차마 먹지 못하고 두려워한 것도, 단지 막연하게 액색한 짓, 죄를 짓는 일에 대해 인간으로서, 마음 약한 여자로서 그리했던 것이지, 옳게 어머니다운 양심이나 애정이나는 극히 무력해서 당자 자신도 의식지 못할 만큼 모호했던 것이다.
 
149
그처럼 초봉이한테 있어서 어머니다운 애정이나 양심이 희박한 것은, 그것이 초봉이의 살〔內體〕로써 느낀 것이 아니고 남의 말이나 남의 일을 다만 듣고 보아서 알아낸 습관으로서 ‘생리 이전(生理以前)’인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방도,
 
150
‘너는 어쨌든 그 생명의 어머니가 아니냐.’
 
151
고 뼈 아플 소리를 들어도 단지 남이 부끄러웠지, 제 마음에 결리진 않던 것이다.
 
152
“그리구 말야, 초봉이…… 글쎄…….”
 
153
제호는 실상 오금 두어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종시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는 말이다.
 
154
“……세상 일을 그렇게 억지루 해대려 들면 못쓰는 법야…… 역리(逆理)라껀 실패하는 장본이니깐…… 알겠나?…… 아 글쎄, 것두 운명이요, 운명이면 다아 하늘의 뜻인데 그걸 이 우리 약비한 인간의 힘으루다가 거역할래서야 될 말인가?…… 거저 순리(順理), 순리 그놈이 우리한테는 제일 좋은 보배어든. 응? 알어들어? 알겠지?”
 
155
“네에.”
 
156
막연해서 알 수도 없고 귓속으로 잘 들어오지는 않아도, 재우쳐 조지니까 초봉이는 마지못해 대답은 하는 것이다.
 
157
“나는 말이지, 이 박제호는 말야…… 괜찮어, 아무렇지두 않어. 어때서?…… 우리 초봉이가 낳아 주는 거니, 남의 자식 그거 하나 기르지? 남은 개구멍받이두 좋다구 길르더라!…… 아무렇지두 않어, 일없어…….”
 
158
제호는 지금 초봉이의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이 고태수의 혈육이라고 영영 그렇게 치고서 하는 말이요, 또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159
“……그러니깐 초봉이두…… 이거 봐요, 초봉이?”
 
160
“말씀하세요.”
 
161
“초봉이두 말야…… 싫은 사람의 자식을 나서 기르느니라 생각을 하지 말구, 응? 그저 사람, 인간을 하나 나서 기르느니라, 이렇게 생각을 하란 말이야…… 그냥 사람, 그냥 인간 말이지, 응? 알겠어?…… 그리구 이 담엔 다시 그런 긴찮은 짓은 않기야? 응……?”
 
162
제호는 초봉이한테로 얼굴을 들이대면서 대답을 조르듯,
 
163
“……알겠나?”
 
164
“네에.”
 
165
제호는 다지고, 초봉이는 다짐을 두고 하는 맥인데, 다짐이야 두나마나, 다시는 그럴 생심이 날 것 같지도 않았다.
 
166
“그래 그래…… 그래야 하구말구…….”
 
167
제호는 밥을 씹다가 말고 기다란 얼굴을 연신 대고 끄떽끄떽…….
 
168
“……그래야만 우리 착한 초봉이지! 그렇지? 허허허허.”
 
169
“저, 입에서 밥 쏟아져요!”
 
170
초봉이는, 일껏 점잖다가 도로 껄껄대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게 밉살머리스러워서 핀잔을 준다.
 
171
“어? 괜찮어, 일없어…… 거 어때? 아무개 자식이면 어때? 사람의 새끼 한 마리 나서 길르는 건데…… 그런 걸 글쎄…… 거 모두 그래서 치마 둘른 인종은 속이 옹색하다는 거야! 허허허허, 제기할 거.”
 
172
그 뒤로 초봉이는 뱃속엣것이 걱정이 될 때마다, 제호가 가르쳐 준 주문(呪文)을 외었다.
 
173
‘아무개 자식이면 어때? 사람의 새끼를 하나 나서 길르는 건데……일없어, 괜찮아.’
 
174
이것은 ‘아멘’이나 ‘나무아미타불’과 같이 그 순간 그 순간만은 단념과 안심을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오래 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 같은 효과밖에 없기는 했지만…….
 
175
가을이 여물 듯이 애 밴 초봉이의 배도 여물어 갔고, 그 해가 갈려 한겨울의 정월과 이월이자 사뭇 북통같이 불러 올랐다. 삼월 보름께 가서는 산파가 앞으로 닷새면 해복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 예정대로 S의 산실에 입원을 했다.
 
176
삼월 스무날 밤이 깊어서…… 마침 봄이 올 테라 생일만은 좋을지 몰라도 속절없이 따라지 목숨이건만, 그래도 어린것은 부득부득 머리를 들이밀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177
‘네가 만일 너를 안다면, 그리고 네가 나오는 예가 어딘 줄을 안다면, 너는 탯줄을 훑으려 잡고 매달리면서, 나는 싫다고 울며 발버둥을 치리라마는.’
 
178
초봉이는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거꾸로 있던 놈이 한 바퀴 휘익 돌고, 돌아서는 뿌듯하게 나오려 하자, 모체의 고통은 점점 더하다가 필경 절대(絶大)의 고패에까지 이르렀다.
 
179
초봉이는 이렇게도 들이 조지는 무서운 고통이라고는 일찍이 상상도 못 했었다.
 
180
배를 눌러 터뜨린다든지, 몽둥이로 팬다든지, 어디를 잡아 찢는다든지 하더라도, 가령 배가 터지면 터졌지, 한번 터진 다음에는 오히려 아픔이 덜리고 후련할 텐데, 이건 쭌득이 누르는 채 조금도 늦추지 않고 끝없이 계속이 되니 견디는 수가 없었다.
 
181
눈이 뒤집히고 정신이 아찔아찔하여, 옆에서 의사와 간호부와 제호가 무어라고 떠들기는 하나 알아들을 경황이 없었다.
 
182
옹골진 속은 있어,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으나 그래도 으응 소리가 이빨 새로 새어 나온다.
 
183
위로 제왕을 비롯하여 아래로 행려병 사망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소치는, 적어도 그 절반은, 그가 모체로부터 세상을 나올 때에 모체가 받은 절대의 고통과 결사의 모험의 값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84
초산이라 그러기도 했겠지만 분명한 난산이었었다. 두 시간을 삐대고 나서 다시는 더 참을 수 없는 고비까지 이르자, 초봉이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입만 딱딱 벌어졌다.
 
185
S는 할 수 없이 스코폴라민 주사를 산모에게 놓아 주었다. 효과만은 신속하여, 초봉이는 바로 마취가 되고 수월하게 해산이 되었다.
 
186
초봉이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아래가 한 토막 무너져 나간 것같이 허전하고 얼얼했다.
 
187
‘낳기는 낳았지?’
 
188
대체 어디서 솟아났는지, 마치 대령이나 했던 것처럼 맨 먼저 이렇게 차악 안심부터 되던 것이다.
 
189
‘어떻게 생겼을꼬?’
 
190
이어서 이런 호기심이, 그것 역시 어느 구석이라 없이 절로 우러나던 것이다.
 
191
바로, 낳기 바로 전까지도 내내,
 
192
‘형보를 닮았으면!’
 
193
하던 공포와 불안은 웬일인지 차례가 더디어, 훨씬 만에,
 
194
‘어떻게 생겼을꼬?’
 
195
하는 호기심에 연달아서야 비로소 가벼운 (공포라고 할 정도도 못 되고) 아주 가벼운 불안으로서 떠오르는 것은 초봉이 제가 생각해도 되레 이상했다.
 
196
“정신이 좀 드나? 헤헤.”
 
197
제호가 기다란 얼굴을 바싹 들이대면서 히죽히죽 웃는다.
 
198
‘속없는 위인! 무엇이 저리 좋은고?’
 
199
초봉이는 기운도 없으려니와 제호가 보기 싫어서 눈을 도로 감는다.
 
200
그러자 마침 저편에서,
 
201
“응애―”
 
202
하고 우는 아기의 울음 소리…….
 
203
어떻게나 응애 우는 그 소리가 간드러지고 이쁘던지, 초봉이는 놀란 것처럼 눈을 번쩍 뜬다. 확실히 그는 한 개 경이를 즐기려는 무렵의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4
“응애―”
 
205
이쁘면서도 느끼는 듯 누구를 부르는 듯 못 견디게 가엾은 아기의 울음 소리가 첫귀로 들렸을 때 과연 초봉이는 아무것도 다 그만두고, 어쩌면 저렇게도 이쁜 것이던가 하는 경이를 띤 반가움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꺼번에 더럭 솟아오르던 것이다.
 
206
어서 아기를 좀 보고 싶었다. 설사 형보를 닮았어도 좋으니 제발 어서 보고 싶었다.
 
207
“헤헤, 계집애야, 계집애!”
 
208
제호가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서 고개로 저편께를 가리키는 시늉을 한다.
 
209
‘계집애?’
 
210
계집애라는 것이, 계집애라면 분명 초봉이 저와 같은 것이겠거니 싶으면서 더욱 반가운 것 같았다.
 
211
간호부가 산모의 눈에서 아기를 찾는 눈치를 알고는 저편으로 쪼르르 가더니 융 기저귀에 싼 아기를 안고 온다. 초봉이는 쏟히듯 그편 짝으로 고개를 돌리고 기다린다.
 
212
“어쩌믄 애기를 요렇게도 이쁘게…….”
 
213
간호부가 칭찬인지 건사를 무는지, 연신 흠선을 떨면서,
 
214
“……아주 여승 어머니랍니다! 어머니 화상을 그냥 그대루 그려 논 걸요!”
 
215
들여대 주는 대로 초봉이는 아기를 올려다보다가 무심코 미소를 드러낸다.
 
216
핏발이 보이게 하늘하늘하고, 그래서 숭업다 할 만큼 시뻘겋고, 그런 상이 콧등을 쨉흐을 눈을 감고, 머리털만 언제 그렇게 자랐는지 새까맣고, 이런 형용이라 아까 울음 소리만 들을 때처럼 가엾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습이 정말 저와 꼭 같이 생긴 게, 무슨 기적을 만난 것처럼 기특해서 반가움은 한결 더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아기가 형보를 닮지 않은 것이 가슴 후련하게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그 끝에 으레,
 
217
‘뉘 자식인지 모를 자식!’
 
218
하는 탄식이 대단했을 것이로되 그것 역시 임신 때 생각하더니보다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219
‘나를 닮은, 나와 꼭 같은.’
 
220
그런 것을 제가 하나 낳아 놓았대서 오히려 그것이 재미가 났다.
 
221
“그래 원, 요렇게두 원…….”
 
222
제호가 아기와 초봉이를 번갈아 굽어다보면서 시시덕거리는 것이다.
 
223
“……저허구 거저 꼭 같은 걸 또 하나 나놓는담?…… 것두 심술이야 심술, 제기할 것.”
 
224
“그럼 어머니를 닮잖구 자넬 닮았더라면 졸 뻔했나?”
 
225
의사 S가 제호를 구슬려 주는 소리다. 그 말에 제호는 속으로,
 
226
‘원 천만에, 이게 뉘 자식인데!’
 
227
야고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그런 내색은 물론 드러내지 않고,
 
228
“아무렴, 아범을 탁해야지!”
 
229
“저 기다란 얼굴 처치가 곤란할걸?…… 한 토막 잘라 놓구서 시집을 가야 않나?”
 
230
“허허, 그건 그런 불편이 있나? 허허허허, 제기할 것.”
 
231
제호는 그래도 얼마큼은 마음이 흡족해서 연신 지껄이고 수선을 피우고 하던 것이다.
 
232
그는 초봉이더러야 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로는 그랬었지만, 막상 어린것이 제 아비 고태수라는 그 사람을 닮아 가지고나 나오게 되면 그런 불쾌한 노릇이 있으랴 싶었었는데, 공평하게 마련이 되느라고 어미 초봉이만을 닮았으니 안심이라고 하자면 아닐 것도 아니었었다.
 
233
이튿날 저녁 늦어서…….
 
234
초봉이는 처음으로 아기를 안고 젖꼭지를 물릴 때 비로소 어머니가 된 성싶었다.
 
235
요게 어디 좀 예쁜 데가 없나 하고 혼자 웃으면서 자꾸만 들여다본다.
 
236
생긴 게 아직 그 꼴이어서 이쁘다고 할 데는 없어도, 이쁜 것 같기는 했다.
 
237
아기는 무엇이 뵈는지 안 뵈는지 몰라도 눈을 뜨기는 뜨고 아릿아릿하다가 젖꼭지를 입에다 대주니까는 입술을 오물오물하더니, 언제 배웠다고 답신 물고서 쪽쪽 젖을 빨아들인다.
 
238
그게 어떻게나 재미가 있는지 깨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239
스코폴라민의 여독을 말고는, 초봉이는 산후에 다른 탈은 없이 몸이 소성되어 이 주일 후에는 퇴원을 했다.
 
240
제호는 초봉이도 위할 겸, 저도 아기한테 초봉이를 뺏기지 않으려고 유모를 정하라고 권을 했다. 그러나 그새 벌써 아기한테 정이 들기 시작한 초봉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241
아기 이름은 초봉이가 옥편까지 한 권 사다 달래서 열흘이나 뒤적거리고 궁리하고 하다가 송희(松姬)라고 겨우 지었다.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니라도, 달리는 아무리 지어 볼래야 신통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242
이름은 그렇게 해서 지었어도 성은 정할 수가 없었었다.
 
243
고가 장가 박가 그놈 셋 중에 어느 놈인 것은 분명하나, 그러나 단 셋 중에 하나 그걸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러니 필경 어린것은 성도 없거니와, 따라서 아비도 없는 자식이던 것이다. 초봉이는 임신 때에 막연하던 것과는 달라 ‘모듬쇠’ 자식의 어미가 된 슬픔이 비로소 뼈에 사무쳤다.
 
244
초봉이는 딸 송희한테 정이 드느라고 봄이 아무리 번화해도 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다 상관없이 지냈다. 그리고 다시 가을철로 접어들어, 시방은 시월도 반이나 지나간 보름께다.
 
245
그 동안 송희는 초봉이의 알뜰살뜰한 정성과 솜씨로 물컷없이 잘 자랐다. 처음 한두 달이 지나서 사람 꼴이 박혀 제 모습이 드러나자, 인제는 이목구비 하나도 빼지 않고 초봉이를 그대로 벗겨 논 시늉이었었다.
 
246
일곱 달인데 아이가 일되느라고 벌써 이칸방을 제 맘대로 서얼설 기어다니고 일어나 앉고 했다. 손에 닿는 것이면 바느질꾸리고 밥상이고 마구 잡아 엎지르고, 움켜쥐는 것이면 이내 입에다 틀어 넣는다.
 
247
살이 토실토실한 놈이 엄마를 제법 부르면서 기어오른다. 따로따로를 하라고 일으켜 세워 주면, 엉거주춤하고 다리를 버팅기다가 털썩 주저앉는다. 그걸 보고 초봉이와 식모가 재그르르 웃으면 저도 벙싯하고 웃는다.
 
248
『학발가(鶴髮歌)』의 조조 군사 신세타령이 아니라도, 왜목불알에 고추자지가 대롱대롱하지만 않았을 따름이지, 온갖 이쁜 짓은 다 하려고 들던 것이다.
 
249
초봉이는 송희가 생김새나 하는 짓이나 속속들이 이쁘지 않은 데가 없고, 정 붙지 않는 짓이 없었다.
 
250
하기야 ‘동물’이나 진배없는 유아를 기르는 ‘인간’인지라, 아이로 해서 심정이 상하는 때도 있고 성가신 때도 있어, 간혹 볼기짝을 찰카닥 붙여 주기도 하고 할 소리 못 할 소리 해가면서 욕을 해 퍼붓기도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요 곧 뉘우쳐서는 가엾어한다.
 
251
송희가 귀여움에 지쳐 간혹, 임신했을 때에 ××를 시키려고 약을 먹던 일이 문득 생각이 나고, 그런 때면 어린것일망정 자식을 보기조차 부끄러웠다.
 
252
그때에 만일 불행해서 ××가 되었더라면 어쨌으랴 싶어 지금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했다.
 
253
그럴 때면,
 
254
“원 요렇게두 예쁘구 소중한 내 새끼를 이 몹쓸 에미년이, 이 몹쓸 에미년이…… 아이구 지장의 내 새끼 내 강아지를…….”
 
255
해싸면서 혼자 중얼중얼, 송희의 볼기짝을 아파할 만큼 착차악 두드리고, 수없이 입을 맞추곤 한다.
 
256
성을 정하지 못하고 민적도 하지 못하는 것이 가끔 생각이 나서 마음이 괴로운 때가 있지만, 그러나 이게 태수의 자식이냐 형보의 자식이냐 제호의 자식이냐 하는 꺼림칙한 생각도 없고, 뉘 자식이면 어떠냐 사람의 새끼 하나를 낳아서 기르는데, 이렇게 억지로 단념하는 주문도 외울 필요도 없고 그저,
 
257
‘내 자식, 내가 난 내 자식.’
 
258
이라고만 여길 따름이다.
 
259
초봉이는 송희한테다가 온갖 정을 다 들이고는 아무것도 더 바라지를 않았다. 자나깨나 송희가 있을 뿐이다. 그는 지금 이대로 그럭저럭 제호한테 몸을 의탁해서 송희나 바람 치이지 않게 잘 길러 내는 것으로 나머지 반생의 낙을 삼으려니 했다.
 
260
아이한테만 함빡 빠져 가지고는, 그래서 살림이고 세간 치다꺼리고, 화분이고, 재봉틀이고 다 잊어버렸다. 그다지도 못 잊어 애가 쓰이던 친정도 가끔가끔 마음이 등한해지는 때가 있었다. 다달이 보름이면 잊지 않고, 한 이십 원씩 돈을 부쳐 주던 것도 송희의 겨울에 신길 타래버선 만들기에 잠착하여 이틀 사흘 미루기도 했다.
 
261
송희한테 정을 붙인 뒤로, 승재를 인하여 마음 적막하던 것도 인제는 모르게 되었다. 하기야 승재를 아주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더러 생각은 난다. 생각은 나지만, 지금 이 아이가 승재와 사이에 생긴 아이로, 그래서 송희가 승재더러 아빠 아빠 부르고 이쁜 짓을 하고 하는 재롱을 승재와 마주앉아 보았으면 재미가 있으리라는 공상으로 생각은 둘러앉혀지고 말았다.
 
262
그것은 승재를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요, 초봉이 제 마음의 회포도 아니요, 차라리 송희의 아비 없는 허전함을 여겨서 우러나는 아쉬운 생각이었었다.
 
263
초봉이의 그러한 변화는 자연 제호한테 대해서도 드러났다. 그는 제호한테 여간만 범연히 굴지를 않았다.
 
264
제호가 남편이라는 것이나, 제호라는 남편이 있다는 것을 여느때는 어엿이 잊어버리고 지낸다. 제호와 밤에 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될 수 있는 대로 기회를 피하려 들고, 조석의 시중 같은 것도 식모한테만 내맡겨 버리고는 돌아보지를 않는다.
 
265
하기야 마음과 몸이 지나치게 송희한테만 쓰이는 중에 모르고 절로 그렇게 된 것이요 일부러 한 짓은 아니지마는, 그건 어째서 그랬든지 간에 제호는 제호대로 밟히고서 꿈지럭 안 할 리는 없던 것이다.
 
266
초봉이가 그러기는 여름철부터 와락 더 심했었는데…….
 
267
제호는 사람이 의뭉하고, 일일이 내색을 하거나 구느름을 하거나, 하지를 않아서 망정이지, 그렇다고 우렁잇속 같은 속조차 없는 바는 아니었었다.
 
268
찌는 여름에 온종일 회사에서 일에 시달리다가, 명색 집구석이라고 들어와야 도무지 붙일성이 없다.
 
269
계집이라는 건 빼액빽 우는 자식이나 차고 누워서 남편 쳇것이 들어와도 원두장이 쓴 오이 보듯 하기 아니면 제 할 일만 하고 있다. 그 일이 그리 소중하냐 하면 어린것 기저귀쯤 갈아 채우는 것이다. 시원한 물수건 하나 적시어다 주는 법 없고, 기껏해야 식모가 나서서 세숫물 한 대야 떠다가 든질르기가 고작이다. 그다지도 즐기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맥주 한 병 얼음에 채웠다가 내놓는 눈치도 없다. 저녁 밥상이라야 옷에서 쉰내가 푸욱 지르는 식모가 들어다 놓는 게, 있던 구미도 다 떨어지고 어설프기란 그만이다. 마루고 방구석이고 걸리는 게 기저귀요, 어디로 코를 두르나 젖비린내다.
 
270
밤이면 십자군의 계집인 듯이 정조 무장을 하기가 일쑤요, 그렇지 않으면 마지못해서 계집 노릇을 한다는 것이 청루의 계집보다 더 싱겁다.
 
271
밤이 적이 서늘해서 겨우 잠자기 좋을 만하면, 어린것 감기 든다고 앞뒷문을 처닫는다. 한밤중이고 새벽녘이고, 옆에서 어린것이 빼액빽 울어 단잠을 깨놓는다.
 
272
그럴지라도 그게 내 자식이라면 귀엽고 소중한 맛에 그래저래 견딘다지만, 이건 생판 남의 자식을 가지고 그 성화를 받는단 말이다. 그런데다가 한술 더 떠서 아침에 조반상을 받고 앉으면,
 
273
“우리 송희 민적을 어서 어떻게 해야지!”
 
274
이런 소리를 내놓는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그래도 좋게 무어라고 어물어물하면, 실상 또 윤희와 이혼이 되지 않았으니 별수가 없기도 하지만, 되레 암상을 내가지고 들볶곤 한다. 그런 날이면 회사에 나가서도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고 일에 마가 붙는다.
 
275
이러고 보니 제호는 결국 남의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남의 계집을 먹여 살리느라고 눈 번히 뜨고 병신 구실을 하는 맥이다.
 
276
초봉이는 사실 또, 송희로 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워너니 길이 제호의 정을 붙잡아 두지 못할 잡이는 못할 잡이다. 그저 인사삼아 껍데기로만 치렛본으로만 남의 첩이지, 속정을 주지 못하니 그럴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저래 제호로 앉아 보면 벌써 일년 반, 그 동안 웬만큼 사랑 땜은 했고, 했은즉 계집이 이쁘고 묘하게 생겼다는 것에 대한 감각이나 흥은 인제는 더엄덤해진 판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애첩은 애첩인걸…….
 
277
이러한 때에 제호의 마음을 가라앉혀 그를 붙잡아 둘 건 초봉이의 애정뿐이겠는데 애당초부터 그게 없었으니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초봉이란 간색만 좋았지, 애무의 취미에 있어서 사십 된 중년 남자의 무르익은 흥취를 만족시켜 주기에 쓸모가 없는 계집이고 말았다.
 
278
둘의 사이에는 그리하여 조만간 파탈이 나고라야 말 형편이었는데, 계제에 초봉이가 달밤에 삿갓 쓰고 나오더란 푼수로, 사사이 이쁘잖은 짓만 해싸니 그거야말로 붙는 불에 제라서 부채질을 하는 것이라고나 할는지.
 
279
제호는 그래서 여름이 식어 가는 구월달부터는 가정에 등한한 기색이 차차 드러나더니, 시월로 접어들자 그것이 알아보게 유표했다.
 
280
이틀에 한 번쯤은 저녁을 비워 때린 채 바깥잠을 자고, 그 다음날 저녁에야 들어와서는 행여 초봉이가 바가지라도 긁어 줄까 봐 손님이 왔느니 회사 볼일로 인천을 다녀왔느니 버엉뗑하고 하다가 아무 반응도 없으면 그만 헤먹어서 심심하게 앉았다가는 도로 힝하니 나가고…….
 
281
그러나 초봉이는 그걸 조금도 괘념 않고, 차라리 성가시지 않은 것만 다행히 여겼다. 그는 제호의 등한해진 태도를 제 말대로 회사일이 바빠서 그러나 보다고 심상히 여길 뿐이지, 유성온천에서 약속해 주던 ‘생활의 설계’를 든든히 믿고 의심은 해보려고도 않던 것이다.
 
282
그러던 끝에, 오늘도 초봉이는 제호가 더욱 전에 없이 사흘째나 싹도 안 보인 것은 통히 잊어버리고서 태평세월로 마루에 나앉아 송희한테 젖을 물리고 재롱 보기에 방금 여념이 없는 참이다.
 
283
다섯시나 되었을까, 가을해라 거진 기울게 되어 여윈 햇살이 지붕 너머로 옆집 뒷벽에 가물거리고, 그와 음영진 대문안 수통에서는 식모가 시시 무얼 씻고 있고.
 
284
송희는 한 손으로 남은 젖꼭지를 움켜쥐고 한편 젖을 빨면서 잠이 들려고 눈이 갠소름하다가 대문간에서 터덕거리는 발소리에 놀라 눈을 뜬다.
 
285
제호는 마치 손님으로 남의 집이라도 찾아오기나 하는 것처럼 기다란 얼굴을 끼웃거리면서 어릿어릿 안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286
“모르는 집엘 오시나? 무얼 그렇게 끼웃거리시우?”
 
287
초봉이는 그대로 앉아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는 초봉이 저도 실상 수수로운 손님이 찾아온 걸 맞는 것같이 어느 구석엔가 서먹서먹한 기운이 있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288
“으응, 아니, 거 머…….”
 
289
제호는 우물우물하다가 히죽이 웃으면서 마룻전에 아무렇게나 털씬 걸터앉는다.
 
290
좀 푸짐하라고 우정 그렇게 털털하게 굴어 보는 것이나, 그래도 안길성이 없고, 더 싱겁기만 했다.
 
291
한참이나 밍밍하니 앉아 있다가는 심심삼아 고개를 이리저리 두르더니 초봉이가 안고 있는 송희를 들여다보면서,
 
292
“어디? 어디 보자?”
 
293
하고 육중한 손바닥을 까분다.
 
294
오죽 멋쩍었으면 그랬으련만, 송희는 졸리는 눈을 뜨고 제호를 올려다보다가 엄마의 젖가슴을 파고들고, 초봉이는 마땅찮아서 이마를 찌푸린다.
 
295
“야아! 이놈의 딸년, 낯을 가리는구나…… 허허 제기할 것, 아범이 아주 쫄딱 망했지, 허허허허, 제기할 것.”
 
296
제호는 여느때와는 좀 다르게 짐짓 나와지는 너털웃음을 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봉이는 칭얼거리는 송희만 다독다독한다.
 
297
“그것, 성미두 얼굴 생김새처럼 어멈을 닮아서 그렇지?”
 
298
“걱정두 말아요!…… 아무려믄 당신 같은 털털이허구 바꾼답디까?”
 
299
“허허허허, 제기…….”
 
300
“드끄러워요! 아이가 잠들려구 하는데 자꾸만 앉아서…….”
 
301
“하아, 이런 놈의!”
 
302
제호는 지천을 먹고 끄먹끄먹 앉았다가 담배를 피워 문다. 그 동안 초봉이는 잠이 든 송희를 안고 살그머니 안방으로 들어가서 조심조심 뉘어 놓고는 다독거리고 덮어 주고 돌려다보고 하다가 겨우 마루로 나온다.
 
303
“양식이 어떤고?”
 
304
제호는 옆에서 서성거리고 섰는 초봉이를 올려다보면서 묻는다. 양식은 달로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한 가마니를 들여보내면, 어느 때 동이 나는지 모르니까 집에서 말을 해야 다시 들여보내곤 했는데, 오늘은 자청해서 말을 내던 것이다.
 
305
“아직 괜찮아요.”
 
306
초봉이는 쌀 한 가마니 들여온 지가 보름도 못 되는 것을 생각하고 심상한 대답이다.
 
307
“그래두 하마 오래잖어 떨어질걸?…… 아무튼 쌀 두주가 큼직하겠다, 내일 새루 한 가마니 들여보내지.”
 
308
“싫여요! 그럭저럭하다가 햅쌀 나믄 햅쌀을 들여다 먹어야지, 냄새나는 묵은 쌀을 무슨 천주학이라구.”
 
309
“하하, 햅쌀밥이라! 것두 그렇기는 하군. 벌써 햅쌀밥 소리가 나구, 제기할 것…… 돈은 몇 푼 잡지두 못했는데, 금년 일년두 거진 다아 가더람!…… 그럼 쌀은 그런다구, 장작은 어떻다구?”
 
310
“그거나 한 마차 내일이구 모레구…….”
 
311
“내일 들여보내지, 그럼…….”
 
312
제호는 돈지갑을 꺼내더니 십 원짜리 다섯 장을 내놓는다.
 
313
“……인제 생각하니 이달은 월급이 이틀이나 밀렸었군? 허허허허, 대장대신이 요새 건망증이 생겨서.”
 
314
“한 삼십 원만 더 주어요.”
 
315
“삼십 원? 그래…… 무어 살 것 있나?”
 
316
제호는 돈을 다시 꺼내면서 혼자 속으로,
 
317
‘오냐,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달랄 테거든 맘껏 달래 가거라.’하고 활협을 부린다. 그럴 뿐 아니라, 초봉이의 눈치를 보아서 인제 아주 금을 긋고 갈라서는 마당에는 돈이라도 몇백 원, 혹은 돈 천 원 집어 주어서 뒤를 후히 해둘 요량까지 하고 있는 참이다.
 
318
삼십 원 더 얹어 주는 십 원짜리 여덟 장을 받아 괴춤에 넣으면서 초봉이는 저 혼자,
 
319
‘역시 착한 아저씨는 아저씨지!’
 
320
야고 생각을 한다.
 
321
사실 제호가 살림이고 돈이고 언제든지 이렇게 끙짜 한마디 없이 아끼잖고 사다 주고, 내놓고 하는 것을 받을 때만은, 그가 고마웠고, 고마운 만큼 더 미덥기도 했었다.
 
322
“참 어제 아침인가? 그저께 아침인가…….”
 
323
제호는 돈지갑을 도로 건사하면서 문득 남의 말이나 하듯이,
 
324
“……윤희가 올라왔더군?”
 
325
“유운희? 왜애?”
 
326
초봉이는 제 바람에 놀랄 만큼 깡총 뛴다.
 
327
비록 평소에는 의표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초봉이 역시 소위 남의 사내를 뺏어 산다는 ‘작은집’다운 신경의 불안이 없을 수가 없었고, 그것이 이런 고패를 당하여 두드러져 나오던 것이다.
 
328
“허! 왜라니?…… 낸들 알 택이 있나!”
 
329
제호는 종시 아무렇지도 않게 코대답을 한다.
 
330
이것은 분명 무엇을 시뻐하는 냉랭한 태도이겠는데, 그러면 그것이 윤희가 서울로 올라온 그 사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인지, 혹은 초봉이 네가 즉 작은여편네가, 시앗이 시앗 꼴을 못 본다더라고, 왜 그리 펄쩍 뛰느냐고 어줍잖대서 하는 소린지,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인지를 초봉이는 선뜻 분간을 못 했다. 그러나 그는 제호를 저 혼자만 꽁꽁 믿는 만큼 설마 내게야 그러진 않겠지 하고 안심을 하고 싶었다.
 
331
“……아마 여편네니깐, 제 서방한테루 살라 온 게지.”
 
332
이윽고 제호가 한마디 되풀이를 하는 걸 듣고서야 초봉이는 옳게 정신이 들었다.
 
333
제호의 말이 그쯤 간다면, 그러면 앞으로 윤희를 어떻게 할 테냐 하는 제호의 태도가 자못 문제다.
 
334
‘제까짓 게 오면 무슨 소용 있나? 괜찮아 일없어.’
 
335
어떻게 보면 이런 눈치 같기도 하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코방귀를 뀌면서,
 
336
‘그야 오는 게 당연하고, 왔으니깐 살고 할 텐데, 왜니 어쩌니 하는 네가 딱하지 않으냐.’
 
337
하는 눈치 같기도 하다. 같은 게 아니라 훨씬 더 근리할 성부르다. 그렇다면 일은 커두었다.
 
338
절대로 이럴 일이 아니라고 (국제조약과 한가지로 계집 사내 사이의 언약은, 저 싫으면 차 내던지는 놈이 장사요, 앉아 당하는 놈이 호소무처라는 걸 모르는 초봉이는) 우선 유성온천서 받은 좀먹은 수형(手形)을 오랜 기억의 밑바닥에서 꺼내 놓고 뒤적거린다.
 
339
자, 여기 쓰이되, 한 일년 두고 서둘러 이혼을 한 뒤에 나를 민적에 올려 주마고 한 대문이 있지 않으냐?
 
340
그런 것을 미룸미룸 이내 미뤄 오다가, 인제는 윤희가 저렇게 쫓아올라 왔으니 어떻게 할 요량이냐? 이혼을 하느냐? 못 하느냐? 만약 이혼을 못 하면 나는 어찌하라며, 나도 나려니와 우리 송희의 민적은 어떡하라느냐?
 
341
이렇게 수형의 액면대로 죄다 캐고 따지고 하자면 아무래도 단단히 악다구니는 해야 할 테고, 급기야는 윤희와도 맞다디려 제호를 뺏으랴, 차지하랴 해서 요란스런 싸움이 한바탕 벌어지고야 말 것 같았다. 그리고 물론 싸움을 사양치 않을 각오다. 정작 싸우게 되면 울고 돌아섰지, 싸우지도 못할 성미이면서 우선 혼자서 방안장담은 해두는 것이다.
 
342
하기야 제호라는 사내는 그대도록 뺏기고 싶지 않은 하 그리 탐탁한 사내더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차라리 아이를 기르는 데 걸리적거리는 물건짝이니, 이 기회에 윤희에게로 도로 내주고 선뜻 갈리는 것도 무방은 하다. 그리고서 이를 악물고 나서면야 무슨 짓을 해서든지 송희 하나 못 길러 가진 않을 자신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건 헐수할수없는 경우고, 그런 위태스런 바람 앞에 송희를 안고 나서느니보다는 그새처럼 평화롭고 안전한 온실 안에서 소중한 꽃 송희를 길러 내야 하고, 그것이 송희를 위한 안전한 방책인 것이다. 그러니까 제호는 우선 뺏기지 말고 보아야 한다.
 
343
초봉이는 이러한데, 그러나 제호의 배짱을 떠들고 들여다보면 대단히 그와는 상거가 멀다.
 
344
제호는 이마적 와서는 윤희와 이혼할 생각은 없기도 하려니와, 하고 싶어도 그게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다. 그건 고사하고, 초봉이와 이렇게 딴살림을 차린 줄을 윤희가 아는 날이면 큰 풍파가 일어나서 모두 뒤죽박죽이 될 판이다. 황차 회사에 증자(增資)를 하느라고 윤희를 추겨서 그의 친정 돈으로 주(株)를 얼마를 사게 했기에! 그러니 더구나 초봉이와는 하루바삐 손을 끊는 게 그저 상책인 것이다.
 
345
인제는 그러므로 켯속이 갈리느냐 안 갈리느냐가 아니라 갈리기는 꼭 갈리고야 말게만 되었은즉, 그럴 바이면 오늘 저녁 이 자리에서라도 자, 사실이 약시 이만저만하고 이만저만한데, 또 너와는 더 지내기도 싫어졌고 겸하여 너도 나와 살 맛이 덜한 눈치고 하니, 그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갈라서자꾸나, 이렇게 이르고 일어서면 그만인 것이다.
 
346
사실 당장 그랬으면 싶고, 또 그리하자면 노상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영 다급하면 몰라도 애초에 나이 어린 계집애를, 더구나 의리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동향 친구의 자식을 살자고 살자고 꾀어서 오늘날까지 데리고 살다가, 속이야 어떻게 생겼든 겉으로는 그다지 탈잡을 무엇이 없는 걸 그처럼 헌신짝 벗어 내던지듯 괄시를 하기는 두 뼘이나 되는 낯을 들고 좀체로 못 할 노릇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차마 이 성가신 석고상(石膏像)을 박절하게시리 내 손으로 내다버릴 수는 없고 한즉, 그저 비벼 댈 언덕을 하나 만나 그걸 핑계삼아서 갈라서든지 그도저도 못 하면 아편쟁이 아편 끊듯이 서서히 두고라도 떼어 팽개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이 시방 제호의 요량장이다.
 
347
“그럼 어떡허실려우?”
 
348
둘이는 제각기 제 생각에 잠겼느라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윽고만에 초봉이가 입을 연다.
 
349
“응?”
 
350
제호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 끝이라 무슨 소린지 몰라 초봉이를 마주보다가 겨우 알아듣고 씨익 웃으면서,
 
351
“……어떡허긴 무얼? 거저 그렇구 그렇지…… 모두 성화야 성화! 제기할 것.”
 
352
제호는 어물어물 씻어 넘기자는 것인데, 초봉이는 종시 딴전만 보느라고 그 말을 어떻게 하기는 무얼 어떻게 하느냐? 그저 그러고 있으면 윤희 문제는 종차 다 요정이 날 텐데, 에이 성가시어! 이렇게 하는 말로 갖다가 알아듣는다. 그러고 보니 방금 혼자서 결이 나서 따지고 캐고 하던 것이 우스웠고, 따라서 인제는 윤희가 서울로 올라온 것도 위협이 되지 않고 앞일도 종시 이런 착한 아저씨가 있대서 안심이 되고 했다.
 
353
“벌써 다섯시 반이라? 어허 또 좀 나가 봐야 하나! 제기할 것.”
 
354
제호는 꺼내 보던 시계를 도로 집어넣으면서 기지개를 쓰고 일어선다.
 
355
제호가 일어서는 걸 보니 초봉이는 그가 시방 윤희한테로 가거니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이 언짢고 그대로 놓아 보내기가 싫었다. 그건 단순한 물욕만도 아닐 것이고, 나그네 먹던 김칫국이나마 먹자니 더러워도 남 주자니 아까운 인심이라면, 초봉이도 일년 넘겨 이태 가까이 살아온 이 사내가 명색 큰여편네라는 것한테로 가고 있는 걸 보고 있기가 역시 그늘에서 사는 남의 작은집답게 오기가 나지 않을 수도 없던 것이다.
 
356
“왜? 저녁 안 잡숫구?”
 
357
초봉이는 그새 여러 달 않던 짓이라, 갑자기 속을 뽑히는 것 같아 귀밑이 붉어 올랐다. 제호는 속으로 고소해,
 
358
‘흥! 너두 겁은 나기는 나는 모양이로구나?…… 얌사스런 것!’
 
359
하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그저 흔연히,
 
360
“…… 여섯시에 잠깐 누굴 만나기루 했는데…….”
 
361
“그래두 얼른 잡숫구 나가시우?…… 그리구우, 저어…….”
 
362
초봉이는 오래간만에 해죽해죽 이쁜 웃음을 웃어 보이면서,
 
363
“……오늘 월급 탄 턱으루 육회두 치구 갈비두 굽구 해디리께, 당신 좋아허시는…….”
 
364
“육회? 갈비?”
 
365
제호는 그 웃음에 그전처럼 얼굴과 몸치장까지도 했더라면 얼마나 운치가 있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데, 또 육회니 갈비니 하는 게 모처럼 초봉이의 얌전한 솜씨로 만든 안주가 입맛이 당기어 한잔 또한 해롭지 않다 싶어,
 
366
“……거 구미는 당기는데…… 그리나저리나 오늘은 웬 서비스가 이리 대단한구?”
 
367
“월급 탄 턱으루…….”
 
368
“허허허허, 시에미가 오래 살면 자수물통에 빠져 죽는다더니…… 그러나저러나 시간이…….”
 
369
“진지는 다 했어요…… 지금 곧 고기허구 약주만 사오믄 고만일걸.”
 
370
초봉이가 어멈을 불러 대면서 부산나게 서두는 것을 제호는 다시금 시계를 꺼내 보다가,
 
371
“아니, 가만 있으라구…….”
 
372
하면서 그대로 마당으로 내려선다.
 
373
“……그럴 게 아니라, 내 다녀오지. 지끔 가서 만나 볼 사람 만나 보구, 여섯시 반이나 일곱시 그 안으로는 올 테니깐, 그새 무어구 천천히 만들어 뒀다가 줄려거던 주구…… 그럼 내 오는 길에 술은 한 병 사들구 오께시니, 잉? 그러면 좋잖어?”
 
374
“그럼 그렇게 허시우. 여섯시 반이나 일곱시까지?…… 꼭 오시우? 또 어디 가서 약주 잡숫느라구 남 눈이 빠지게 기대리겔랑 마시구…….”
 
375
“아무렴, 글랑 염려 말아요.”
 
376
제호는 거들거리면서 대문간으로 나간다.
 
377
초봉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방금 제호가 주고 간 돈을 양복장 속서랍에다가 잘 건사를 한다. 그러면서, 내일은 송희를 업혀 가지고 백화점으로 침대며 유모차를 사러 가려니 하다가 돌려다보니 송희는 젖을 빠는 꿈을 꾸는지 입술을 오물오물하고 있다.
 
378
그놈에 정신이 팔려, 식모를 고깃간에 보내자던 것도 잊어버리고서 들여다보고 좋아하는데 마침 누군지,
 
379
“이리 오너라.”
 
380
하고 점잖게 찾는 소리가 대문간에서 들려 왔다. 한번 듣기에도, 귀에 여운이 처지는 쨍쨍하고도 따악 바라진 목소리다.
 
381
초봉이는 그것이 뉘 목소리인지 알아내기 전에 가슴이 먼저 알아듣고는 두근, 울렁거리면서 손이 절로 올라가서 꽉 눌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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