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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류(濁流) ◈
◇ 15 식욕의 방법론 ◇
해설   목차 (총 : 19권)     이전 15권 다음
1937.10
채만식
1
탁류(濁流)
 
2
15. 식욕의 방법론
 
 
3
또 한번 해가 바뀌어, 이듬해 오월이다.
 
4
태수와 김씨가 그의 남편 탑삭부리 한참봉의 한 방망이에 맞아 죽고, 초봉이는 호젓이 군산을 떠나고, 이런 조그마한 사단이 있은 채로 그러니 벌써 두 번째 제 돌이 돌아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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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곳 항구 군산은 그러한 이야기는 잊은 지 오래다. 물화(物貨)와 돈과 사람과, 이 세 가지가 한데 뭉쳐 생명 있이 움직이는 조그마한 거인(巨人)은 그만한 피비린내나, 뉘 집 처녀가 생애를 잡친 것쯤 그리 대사라고 두고두고 잊지 않고서 애달파할 내력이 없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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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여전히 아침이면 동쪽에서 떴다가 저녁이면 서쪽으로 지고, 철이 바뀌는 대로 풍경도 전과 다름없이 새롭고, 조수 밀렸다 쓸렸다 하는 하구(河口)로는 한모양으로 흐린 금강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러는 동안 거인은 묵묵히 걸음을 걷느라, 물화는 돈을 따라서, 돈은 물화를 따라서, 사람은 그 뒤를 따라서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고, 그리하여 그의 심장은 늙을 줄 모르고 뛰어, 미두장의 ×××도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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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주사도 무량하다. 자가사리 수염은 여전히 노란데 끝도 그대로 아래로 처졌고, 눈도 잊지 않고 깜작거린다. 소일도 모습과 함께 변함없다. 남은 몇천 금을 걸고 손바닥을 엎었다 젖혔다 하는 순간마다 인생의 하고많은 부침을 되풀이하는 그 틈에 끼여 대판시세가 들어올 적마다 하바꾼 우리 정주사도 오십 전 어치 투기에 몸이 자지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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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발육(發育)은 단 몇십 전이라도 밑천이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어디서 생기는 밑천이든 간에 같이서 하바를 하는 같은 하바꾼들한테 ‘총을 놓지 않아서’ 실인심을 않고 지내니 발육이라면 그런 발육이 있을 데가 없다. 단연코 작년 가을 이래 정주사는 여재수재가 분명했지 도화를 부르고 멱살잡이를 당하거나 욕을 먹거니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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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맏딸 초봉이가 작년 가을 서울서 돈 오백 원을 내려 보낸 것으로 부인 유씨가 구멍가게 하나를 벌여 놓은 그 덕이요, 그 끈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거니와, 애초에 죽은 고태수가 소절수 농간을 부리던 돈으로 미두를 하다가, 아시가 나게 된 끄터리를 형보가 얻어 가졌고, 형보는 그놈을 언덕삼아 오륙천의 큰 수를 잡았고, 그 돈에서 도로 오백 원이 초봉이의 손을 거쳐 정주사네게로 왔으니, 기특하다면 기특한 인연이 아니랄 수 없다. 따라서 어느 사위가 되었든지 사위 덕은 사위 덕이요, 결국은 초봉이라는 딸을 둔 보람이 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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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는 삯바느질도 있고 해서 유씨가 지키고 앉았고, 정주사는 밖에서 물건 사들이는 소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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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면 정거장 앞으로 나가서 길목을 지키다가 촌사람들이 지고 들어오는 채소도 사고, 공설시장에서 과실이며 과자 부스러기도 사고, 더러는 ‘안스레’에 있는 생선장에 가서 흥정도 해다 준다. 그러고 나면, 정주사는 온종일 팔자 편한 영감님이다. 하기야 유씨가 바느질을 하랴, 가게를 보랴 하느라고 손이 몰리곤 하니 가게나 지켜 주었으면 하겠지만, 한 마리에 일 전이나 오 리가 남는 자반고등어며 아이들의 코 묻은 일 전 한 푼을 바라고 오도카니 지켜 앉았기가 갑갑하기도 하려니와, 일변 미두장에 가서 잘만 납뛰면 한목에 오십 전이고 일 원이고를 따니, 그게 사람이 활발하기도 할 뿐더러 이문도 크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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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마는 북풍에 울고, 월조라는 새는 남쪽 가지에다만 둥우리를 얽는다든지, 정주사도 시방은 다 비루 먹은 태마(馱馬)라도 증왕에는 천리 준총이었거니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오십 전짜리 하바라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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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천까지 털리는 손은 어떻게 하느냐고 부인 유씨가 고시랑거릴라치면 잃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만날 희떠운 소리다. 이 말은 돈을 잃어도 관계치 않다는 뱃심과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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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정주사는 듬뿍 삼 원 돈을 지니고서 한바탕 거들거리고 하바를 하던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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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 원의 대금(大金)은 마침 가게에 북어가 떨어져서 아침결에 어물전으로 흥정을 하러 가던 심부름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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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호랑이가 원님을 알아볼 리 없고, 무슨 돈이 되었든지 간에, 마침 또 간밤에는 용꿈을 꾸었겠다 하니, 북어값 삼 원을 밑천으로 든든히 믿고서 아침부터 붙박이로 하바를 하느라 깨가 쏟아졌다. 그러나 따먹기도 하고 게우기도 했지만, 필경 끝장에 와서 보니 옴팡장사다. 밑천이 절반이나 달아나고 일 원 오십 전밖에 남지를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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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두장의 장이 파하자 뿔뿔이 헤어져 가는 미두꾼 하바꾼 틈에 끼여 나오면서 정주사는 비로소 잃어버린 북어값을 생각하고 입맛이 찝찝해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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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눈부신 햇볕이 환히 내리는 행길바닥으로 패패 흩어져 나오는 미두꾼이나 하바꾼들은 응달에서 자란 식물을 갑자기 일광에 내쬐는 것 같아, 어디라 없이 푸죽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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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많고 적고 간에 돈을 먹은 패들은 턱을 쑥 내밀고 흐물흐물 웃으면서 내딛는 걸음이 명랑한 성싶기는 하나, 그것은 이 햇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래서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활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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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대신 코가 쑤욱 빠지고 죽지 부러진 장닭처럼 어깨가 처지고 고개를 수그리고, 이런 패들은 사오십 전짜리 하바를 비롯하여 몇백 원 혹은 몇천 원의 손을 본 축들이다. 이런 축들 가운데 더러는 저 혼자 점직하다 못해 누구한테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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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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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뒤통수로 손이 올라가다가 만다. 분명 울고 싶다는 게라, 웃는다는 게 우는 상이다. 이 축들은 더욱이나 이 명랑한 오월의 태양 아래서는 이방인(異邦人)같이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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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어값 삼 원에서 일 원 오십 전을 날려 버린 정주사는 코 빠진 축으로 편입될 것은 물론이다. 그는 여럿의 틈에 끼여 행길바닥으로 나섰다가 멈춰 서서 입맛을 다신다. 인제는 하바판도 다 깨졌은즉 잃어버린 북어값을 추는 도리는 없고 하니 아무나 붙잡고, 한 오십 전 내기 짱껜뽕이라도 몇 번 했으면 싶은 마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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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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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을 놓고 행길 가운데 우두커니 섰는데 누가 마수 없이 어깨를 짚으면서 공중에서 부른다. 고개를 한참 쳐들어야 얼굴이 보이는 ‘전봇대’다. 키가 대중없이 길대서 ‘전봇대’라는 별명이 생긴 같은 하바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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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그렇게 보구 계시우?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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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에 총만 놓지 않으면 아무라도 그네는 사이가 다정한 법이다. 단 한 모퉁이를 동행할망정 뒤에 처지면 같이 가자고 하는 게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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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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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사는 내키잖게 옆을 붙어 선다. 키가 허리께밖에는 안 닿는다. 뒤에서 따라오던 한패가 재미있다고 웃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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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사 오늘 괜찮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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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두 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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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우는 소릴…… 아까 내해두 오십 전 먹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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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한 장하구 반이나 펐네! 거 원 재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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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찮은 소리!…… 그런 소린 작작 하구, 오늘 딴 놈으루 저기 가다가 우동이나 한 그릇 사시우. 난 시장해 죽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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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하기야 피차 일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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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사는 미상불 퍽 시장했다. 작년 가을 이후로는 팔자가 늘어져서 조석은 물론 굶지 않거니와, 오때가 되면 휭하니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오곤 했는데, 오늘은 마침 북어값 삼 원을 밑천삼아 땄다 잃었다 하기에 재미가 옥실옥실해서 점심 먹을 것도 깜박 잊었었다. 그래서 비어 때린 점심이라 시장기가 들고, 그 끝에 돈 잃은 것이 이번에는 부아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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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빌어먹을 거, 그럴 줄 알았더면 그놈으루 무엇 즘심이라두 사먹었으면 배나 불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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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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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사가 혼자 두런거리는 것을 전봇대가 냉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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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사람 가끔 우동 그릇이나 사주구 하면, 다아 하누님이 알아보십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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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누님이 알어보신다? 허허, 제엔장맞일. 아따 그러세, 우동 한 그릇씩 먹세그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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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정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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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누가 거짓말 한다던가?…… 그렇지만 꼭 우동 한 그릇씩이네? 술은 진정이지 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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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피차 형편 아는 터에, 술이야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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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꾼도 옛날 큰돈을 지니고 미두를 하던 당절, 이문을 보면 한판 진탕치듯이 친구와 얼려 먹고 놀던 호기는 가시잖아, 이날에 비록 하바는 할 값에 단돈 이삼 원이라도 먹으면 가까운 친구 하나쯤 따내어 우동 한 그릇에 배갈 반 근쯤 불러 놓고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감회와 울분을 게다가 풀 멋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시방 정주사가 전봇대한테 우동 한턱을 쓰기로 하는 것은 그런 호협이나 멋이 아니라 외람한 화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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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잃은 미련이 시장한 얼까지 입어 화증은 더 나는데 전봇대가 연신 보비위는 하겠다, 미상불 그놈 우동 한 그릇을 후루룩 쭉쭉 국물째 건더기째 들이 먹었으면 아닌게아니라 단박 살로 갈 것 같고, 그래 예라 모르겠다고 나가자빠지는 맥이다. 물론 전 같으면야 우동이 두 그릇이면 싸라기가 두 되도 넘는데 언감히 그런 생심을 했을까마는, 지금이야 다 미더운 구석도 없지 않아, 말하자면 그만큼 담보가 커진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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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는 같은 둔뱀이는 둔뱀이라도 전에 살던 집처럼 상상꼭대기가 아니고 비탈을 다 내려와서 아주 밑바닥 평지다. 오막살이들이나마 살림집들이 앞뒤로 늘비한 길목이라 구멍가게치고는 마침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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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머리로 부엌 달린 이칸방이 살림 겸 바느질방이다.
 
49
지난해 가을 초봉이가 내력 없는 돈 오백 원을 보내 주어서 삼백 원을 들여 이 가게를 꾸미고 벌여 놓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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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백이십 원은 재봉틀을 한 채 사놓았다. 나머지는 이사를 하느니 오래 못 벗긴 목구멍의 때를 벗기느니 하느라고 한 사십이나 녹아 버렸고, 그 나머지는 장사를 해나갈 예비돈으로 유씨가 고의끈에다가 챙챙 옹쳐 매두었었다. 정주사는 그놈을 올가미 씌워다가 사십 원 증금(證金)으로 쌀이나 한 백 석 붙여 놓고 미두를 하려고 갖은 공력을 다 들였어도 유씨는 막무가내하로 내놓지를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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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장사를 벌여 놓으니, 가게에서 매삭 삼십 원 넘겨 이문이 나고, 재봉틀 바느질로 십여 원 들어오고 해서 네 식구가 먹고 살아가기에는 그리 군색지 않았다. 정주사가 가끔 미두장의 하바판에서 돈 원씩 날리기도 하고, 오늘처럼 우동 한턱을 쓸 담보가 생긴 것도 알고 보면 다 그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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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솔이 더구나 단출해서 좋다. 초봉이는 재작년 이맘 때에 벌써 식구 중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작년 가을에는 계봉이를 제 형이 데려 올려 갔다. 실상 형주도 그때 같이 올라갔을 것이지만, 그 애는 작년 사월에 이리(裡里) 농림학교에 입학을 해서 통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학을 하느니 자리를 옮기느니 하면 번폐스럽기만 하겠은즉 그럭저럭 졸업이나 한 뒤에 상급학교를 보내더라도 우선 다니던 데를 그대로 눌러 다니도록 두어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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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식구가 단출하게 넷으로 줄고 그 대신 다달이 사오십 원씩 수입이 있으니, 유씨의 억척에 다만 몇 원씩이라도 밀려 차차로 가게를 늘려 가기도 하고 했을 것이지만, 부원군 팔자랍시고 정주사가 속속들이 잔돈푼을 ‘크게’ ‘낭비’를 해서 병통이요, 그래서 전에 굶기를 먹듯 하고 지낼 때보다 집안의 풍파는 오히려 잦다. 더구나 유씨는 시방 마침 단산기(斷産期)라, 히스테리가 가히 볼 만한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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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훈훈하거니와, 오월 초생의 오후는 늘어지게 해가 길어 깜박깜박 졸음이 온다. 유씨는 이태 전이나 다름없이 다리 부러진 돋보기를 코허리에다 걸치고 졸린 것을 참아 가면서, 보물 재봉틀을 차고 앉아 바느질에 고부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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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르, 연하게 구르는 재봉틀 소리가 달콤하니 졸음을 꼬인다. 졸리는 대로 한잠 자고는 싶으나, 바느질도 바느질이려니와 가게가 비어서 못 한다. 남편 정주사는 인제는 기다리지도 않는다. 아무 때고 들어왔지 별수가 없을 테고, 거저 들어오기만 오면, 어쨌든지 마구 냅다…… 이렇게 꽁꽁 벼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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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에 입학을 해서 일학년이라, 항용 두시면 돌아오는 병주도 오늘은 더디어 낮잠 한잠도 못 자게 하니 그것도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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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안노인이 아이를 업고 행똥행똥 가게 앞으로 오더니 한다는 소리가 남 속상하게,
 
58
“북엔 없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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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끼웃이 들여다본다. 유씨는 일어서서 나오려고 하다가 고개만 쳐든다. 오늘 벌써 세 번째 못 파는 북어다. 부아가 나는 깐으로는 물이라도 쩌얼쩔 끓여 놓았다가 남편한테 들어서는 낯짝에다가 좌악 한 바가지 끼얹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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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엔 없어. 저 너머까지 가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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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노인은 혼자말같이 쑹얼거리면서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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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좀 있으문 이 애 아버지가 사가지구 올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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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는 다섯 마리만 잡더라도 오 전은 벌이를 놓치는구나 생각하면서 다시금 남편 잡도리할 거리로 단단히 치부를 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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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언제 기대려? 손님들이 술잔을 놓구 앉아서 안주 재축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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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건대구를 들여가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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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대구는 집에두 있는데 북에루다가 마른안주만 해딜이라니 성화지!”
 
67
동네 노인이 가게 모퉁이로 돌아가자 마침 병주가 씨근벌떡하면서 달려든다. 콧물이 육장 코에 가 잠겨서 질질 흐르기 때문에 입으로 숨을 쉬느라고 입술은 다물 겨를이 없고 밤낮 씨근거린다.
 
68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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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불러 놓고는 책보를 쾅 하니 방에다가 들이뜨리고 모자를 벗어 휙 내동댕이치면서, 우선 사탕목판을 들여다본다. 아무 때고 하는 짓이라 저는 무심코 그러는 것인데, 돋보기 너머로 눈을 찢어지게 흘기고 있던 유씨는,
 
70
“네 이놈!”
 
71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72
생각잖은 고함 소리에 병주는 움칫 놀라 모친한테로 얼굴을 돌린다.
 
73
“……어디 가서 무슨 못된 장난을 하다가 인제야 오구 있어?”
 
74
유씨는 금시로 자쪽을 집어 들고 쫓아나올 듯이 벼른다. 그는 시방, 자식의 버릇을 가르치자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남편한테 할 화풀이야 낮잠 못 잔 화풀이야를, 애먼 어린 아이한테 하느니라고는 생각도 않는다.
 
75
병주는 첫마디에 벌써 볼때기가 추욱 처지고 식식한다.
 
76
막내동이라서 재미삼아 온갖 응석과 어리광은 있는 대로 받아 주던 아이다. 그놈이 인제는 품안에 안고 재롱을 보던 때와는 딴판이요, 전처럼 응석받이를 안 해주고 나무라면 이퉁을 쓰고, 아무가 무어라고 해도 듣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성가시니까 버릇을 가르친다고 회초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유씨뿐이요, 정주사는 이따금 나무라기나 할 뿐이지, 나무라고서도 아이가 노염을 타서 울면 되레 빌기가 일쑤다.
 
77
병주로 당해서 보면 모든 것이 제 배짱과는 안 맞고, 저 하고 싶은 대로 못 하게 하니까 심술이 난다. 대체 그렇게도 저 하자는 대로 다 해주고 이뻐만 하더니 어째 시방은 지천을 하고 때리고 하는 게며, 또 학교에서 오는 것만 하더라도 여느때는 아무 소리도 없으면서 오늘 같은 날은 불시로 늦게 왔다고 생야단을 치니 어째 그러는 게냔 말이다.
 
78
병주로서는 당연한 불평인 것이다.
 
79
“아, 저놈이 그래두!…… 네 요놈, 그래두 이짐만 쓰구 섰을 테냐?”
 
80
유씨는 속이 지레 터지게 화가 나서 자쪽을 집어 들고 쫓아나온다. 병주는 꿈쩍도 않고 곁눈질만 한다.
 
81
“이놈!”
 
82
따악 소리가 나게 자쪽으로 갈기니까 기다렸노라고 아앙― 울음을 내놓는다. 필요 이상으로 울음 소리가 큰 것은 부친의 역성을 청함이다.
 
83
“이 소리! 이 소리가 어디서 나와? 응? 이놈, 이 소릿!”
 
84
말 한마디에 매가 한 대씩이다. 병주는 악을 악을 쓰면서 가게 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을 친다.
 
85
“이놈, 이 이퉁머리! 이마빡에 피두 안 마른 것이…… 이놈, 이놈, 어린 놈이 소갈머리 치레만 해가지구는…… 이놈…….”
 
86
사정없이 아무 데고 내리 조진다. 병주는 영 아프니까는 그제야 아이구 안 할게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그것도 비는 게 아니고,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일종의 반항이다.
 
87
병주는 매를 맞기 시작하면서 다급하면 안 할게라는 소리를 치는 것도 같이 배웠다. 그러나 때리면서 그렇게 빌라고 시켰으니까 하는 소리지 그 뜻은 알지를 못한다.
 
88
“다시두?”
 
89
“안 하께!”
 
90
“다시두?”
 
91
“아야, 아아, 안 허께, 이잉.”
 
92
유씨는 겨우 매질을 멈추고 서서 가쁜 숨을 허얼헐 한다.
 
93
병주는 콧물이 배꼽이나 닿게 주욱 빠져 내린 채 히잉히잉 하고 섰다. 매는 맞았어도 이짐은 도리어 더 났다.
 
94
“이 소리가 어디서!”
 
95
유씨는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돌아서면서 엄포를 한다. 병주는 히잉 소리를 조금만 작게 낸다.
 
96
“저 코, 풀지 못할 테냐?”
 
97
“히잉.”
 
98
“아, 저놈이!”
 
99
“히잉.”
 
100
“네에라 이!”
 
101
유씨가 도로 쫓아오려고 하니까 병주는 손가락으로 코를 풀어서 한 가닥은 가게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손은 옷에다가 쓰윽 씻는다.
 
102
“학교를 갔다 오믄, 공부는 한 자두 않는 놈의 자식이 소갈머리만 생겨서, 이짐이나 쓰구…….”
 
103
“히잉.”
 
104
“군것질이나 육장 하러 들구…….”
 
105
“히잉.”
 
106
“공부를 잘해야 인제 자라서 벌어먹구 살지!”
 
107
“히잉.”
 
108
“그따위루 공분 않구서, 못된 버릇만 느는 놈이 무엇이 될 것이야!”
 
109
“히잉.”
 
110
병주는 차차로 더 크게 히잉 소리를 낸다. 모친의 나무라는 말이 하나도 제 배짱에는 맞지도 않는 소리라서 심술로 도전을 하는 속이다.
 
111
“에미 애비가 백년 사나? 아무리 어린것이라두 고만 철은 나야지! 공부 못하믄 노가다패나 되는 줄 몰라?”
 
112
“히잉.”
 
113
“늙은 에미가 이렇게 애탄가탄 벌어멕이믄서 공부를 시키거들랑 그런 근경을 알아서, 어른 말두 잘 듣구 공부두 잘 해야지. 그래야 인제 자란 뒤에 잘 되구 돈두 많이 벌구 하지.”
 
114
“히잉, 그래두 아버진 돈두 못 버는 거…… 히잉.”
 
115
어린애가 하는 소리라도 곰곰이 새겨 보면 가슴이 서늘할 것이지만, 유씨는 눈만 거듭뜨고 사납게 흘긴다.
 
116
유씨는 걸핏하면 남편 정주사더러 공부는 많이 하고도 내 앞 하나를 가려 나가지 못한단 말이냐고 정가를 하곤 한다.
 
117
독서당(獨書堂)을 앉히고 십오 년이나 공부를 했다는 것이, 또 신학문(보통학교 졸업)까지 도저하게 하고도 오죽하면 한푼 생화 없이 눈 멀뚱멀뚱 뜨고 앉아서 처자식을 굶길까 보냐고, 의관을 했다면서 치마 두른 여편네만도 못하다고, 늘 이렇게 오금을 박던 소리다. 그것이 단순한 어린애의 머리에 그대로 소견이 되어 우리 아버지는 공부를 했어도 ‘좋은 사람이 안 되었다고’, 그래서 돈도 못 벌고, 그러니까 공부를 잘한다거나 좋은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것과 돈을 번다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라고 병주는 알고 있고, 그것밖에는 모르니까 그게 옳던 것이다.
 
118
제 소견은 이러한데, 공부를 않는다고 육장 야단이니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분지 그것도 알 수 없거니와, 암만 공부를 해도 우리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도 못 되고’ 돈도 못 벌고 할 것을, 또 그러나마 좋은 말로 해도 모를 소린데 욕을 하고 때리고 하면서 그러니 그건 분명 제가 미우니까 괜스레 구박을 주느라고 그러는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고, 따라서 심술이 나고 제 뱃속에 든 대로 앙알거리고 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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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 못 하고 되잡힌 속이지만, 그러니 가히 두려운 소리겠지만, 유씨는 그러한 반성을 할 길이 없으니까 어린것이 벌써부터 깜찍스럽기나 해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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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요 못된 자식……!”
 
121
유씨는 눈을 흘기면서 윽박질러 잡도리를 시작한다.
 
122
“……넌 그래, 세상에두 못난 느이 아버지 본만 볼 테냐?…… 사람 같잖은 것 같으니라구!…… 사람 되라구 경 읽듯 하믄 지지리두 못나구 으젓잖은 본이나 뜨을려 들구…… 요 못된 씨알머리!”
 
123
필경은 남편더러 귀먹은 푸념을 뇌사리면서 혀를 끌끌 차고 재봉틀 앞으로 다가앉는다. 그러자 마침맞게 정주사가 가게 안으로 처억 들어선다.
 
124
“웬일이야? 넌 또 왜 울구?…… 응? 어째서 큰소리가 나구 이러느냐?”
 
125
정주사는 막내동이의 아버지다운 상냥함과 한 집안의 가장다운 위엄을 반씩반씩 갖추어 가면서 장히 서슬 있이 서둔다.
 
126
정주사한테는 바라지도 못한 좋은 트집거리다. 병주도 속으로는 옳다, 인제는 어디 보자고 기광이 나서 히잉히잉 소리를 더 크게 더 잦게 낸다.
 
127
유씨는 돋보기 너머로 힐끔 한번 거듭떠보다가 아니꼽다고 낯놀림을 하면서 바느질을 붙잡는다.
 
128
“이 소리, 썩 근치지 못하느냐!”
 
129
정주사는 목 가다듬기로 짐짓 병주를 머쓰려 놓고는 유씨게로 대고 준절히 책을 잡는 것이다.
 
130
“……어째 그 조용조용 타이르지는 못하구서 노상 큰소리가 나게 한단 말이오?”
 
131
눈을 깜작깜작 노랑수염을 거스르면서 졸연찮게 서두는 것이나, 유씨는 심정이 상한 중에도 속으로,
 
132
‘아이구 요런, 어디서 낯바닥하고는!’
 
133
하면서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는 듯이 눈만 흘깃흘깃 연신 고갯짓을 한다.
 
134
“……거 전과두 달라서 이렇게 길가트루 나앉었으니 좀 조심을 해야지…… 게 무슨 모양이란 말이지요? 무지막지한 상한(常漢)의 집구석같이…….”
 
135
“아따! 끔직이두!…… 옜소, 체면…… 흥! 체―면!”
 
136
마침내 맞서고 대드는 유씨의 음성은 버럭 높다. 정주사도 지지 않고 어성을 거칠게,
 
137
“게 어째서 체면을 안 볼 것은 또 무어란 말이오?”
 
138
“큰소린 혼자 하려 들어!…… 모두 떼거지가 될 꼬락서니에 칙살스럽게 이거라두 채려 놓구 앉어서 목구멍에 풀칠을 하니깐 조〔驕〕가 나서 그래요?…… 당신두 인전 나이 오십이니 정신을 채릴 때두 됐으면서 대체 어쩌자구 요 모양이우? 동녘이 버언하니깐 다아 내 세상으루 알구 그러슈? 복장이 뜨듯하니깐 생시가 꿈인 줄 알구 그러슈, 그리길…….”
 
139
“아니, 건 또 무엇이 어쨌다구 당치두 않은 푸념을…….”
 
140
“내가 푸념이오? 내가 푸념이야?…… 대체 그년의 북에는 대국으루 사러 갔더란 말이오? 서천 서역국으루 사러 갔더란 말이오?…… 그러구두 온종일 흥떵거리구 돌아다니다가, 다아 저녁때야 맨손 내젓구 들어와선, 그래 무슨 얌체에 큰소리요? 큰소리가…… 이게 나 혼자 먹구 살자는 노릇이란 말이오?”
 
141
“아―니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지, 그래 내가 북에 흥정을 안 해다 주어서 그래 여편네가 삼남 대로 바닥에 앉어서 이 해게란 말이오? 어디서 생긴 행실머리람! 에잉, 고현지고!”
 
142
싸움은 바야흐로 익어 간다. 조금 아까 당도한 승재는 가게로 섬뻑 들어오지를 못하고 모퉁이에 비켜 서서 주춤주춤한다.
 
143
승재는 이 집에서 가게를 내고 이만큼이라도 살아가게 된 그 돈 오백 원의 내력을 잘 알고 있다. 작년 가을 계봉이가 서울로 올라가더니, 제 형 초봉이의 지나간 이태 동안의 소경사와 생활을 대강 편지 내왕으로 알려 주었던 것이다.
 
144
그것을 미루어 승재는, 초봉이가 박제호라는 사람의 첩 노릇을 한 것이나, 그자한테 버림을 받고 장형보라는 극히 불쾌한 인간과 살고 있는 것이나 죄다 친정을 돕기 위하여 그랬느니라고만 해석을 외곬으로 갖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끝끝내 딸자식 하나를 희생시켜 가면서 생활을 도모하고 있는 정주사네한테 반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145
승재는 이 정주사네가 명님이네와도 또 달라, 낡았으나마 명색 교양이 있다는 사람으로 그따위 짓을 하는 것은 침을 배앝을 더러운 짓이라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교양이라는 것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기까지 했다. 가난한 사람은 교양이 있어도 그것이 그네들을 선량하게 해주는 것이 못 되고, 도리어 교양의 지혜를 이용하여 무지한 사람들보다도 더하게 간악한 짓을 하는 것이라 했다.
 
146
작년 가을 계봉이가 집에 없는 뒤로는 실상 만나 볼 사람도 없거니와, 겸하여 정주사네한테 그러한 반감도 생기고 해서 승재는 그 동안 발을 끊다시피 하고 다니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아주 군산을 떠나게 되기도 했거니와, 마침 또 계봉이한테서 형 초봉이가 자나깨나 마음을 못 놓고 불안히 지내니 부디 저의 집에 들러서 장사하는 형편이 어떠한지 직접 자상하게 좀 보아다 달라는 편지가 왔기 때문에 그래 마지못해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한 것이다.
 
147
와서 보니 우환중에 또 이런 싸움이라 오쟁이를 뜯는 것 같아 더욱 불쾌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대로 돌아설 수도 없지만 부부싸움을 하는데 불쑥 들어가기도 무엇하고, 해서 잠깐 기다리고 있노라니까 문득 옛 거지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148
―---산신당(山神堂)에서 거지 둘이 의좋게 살고 있었다. 그 둘이는 저희끼리도 의가 좋았거니와, 밥을 빌어 오면 먼저 산신님께 공궤하기를 잊지 않았다.
 
149
그 덕에 산신님은 여러 해 동안 푸달진 바가지 밥이나마 달게 얻어 자시고 지냈는데, 하루는 산신님의 아낙이 산신님을 보고 거지들한테 무엇 보물 같은 것이라도 주어서 은공을 갚자고 권면을 했다. 산신님은 보물을 주어서는 도리어 그네들을 불행하게 한다고 아낙의 권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졸라싸니까, 자 그럼 이걸 두고 보라면서 좋은 구슬〔寶石〕한 개를 위패 앞에다가 내놓아 주었다.
 
150
두 거지는 그것을 얻어 가지고 좋아서 날뛰었다. 그리고 인제는 우리가 팔자를 고쳤다고, 그러니 우선 술을 사다가 산신님께 치하도 하려니와, 우리도 먹자고 그 중 하나가 술을 사러 마을로 내려갔다.
 
151
남아 있던 한 거지는 그 구슬을 제가 혼자 독차지할 욕심이 났다. 그래서 그는 몽둥이를 마침 들고 섰다가 술을 사가지고 신당으로 들어서는 동무를 때려 죽였다. 그리고는 좋다고 우선 술을 따라 먹었다. 그러나 술을 사러 갔던 자도 그 구슬을 저 혼자서 독차지할 욕심이었던지라 술에다가 사약(死藥)을 탔었다. 그래서 그 술을 마신 다른 한 자도 마저 죽었다.
 
152
이 꼴을 보고 산신님은 아낙더러, 저걸 보라고, 그러니까 아예 내가 무어라더냐고 하여 그제야 산신님의 아낙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153
승재는 정주사네 양주가 싸우는 것을 산신당의 두 거지한테 빗대 놓고 생각을 하노라니까, 이네도 정말 서로 죽이지나 않는가 하는 망상이 들면서 어쩐지 무시무시했다.
 
154
싸움은 차차 더 커간다.
 
155
“그래, 내 행실머린 다아 그렇게 상스럽다구…… 그래…….”
 
156
유씨는 와락 재봉틀을 밀어 젖히면서 일어선다. 서슬에 와그르르 하고 받쳐 놓았던 궤짝 얼러 재봉틀이 방바닥으로 나가동그라진다.
 
157
유씨는 홧김에 밀치기는 했어도 설마 넘어지랴 했던 것인데, 이렇게 되고 보니 만약 부서지기나 했으면 어쩌나 싶어 화보다도 가슴이 뜨끔했다.
 
158
재봉틀이래야 인장표도 아니요, 일백이십 원짜리 국산품 손틀기이기는 하지만, 천하에도 없이 끔찍이 여기는 보배다. 유씨는 늘 밉게 굴던 계봉이 같은 딸 하나쯤보다는 차라리 이 재봉틀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159
그러잖고 웬만큼 대단해하던 터라면, 남편이 얄밉고 부아가 나는 깐으로야 번쩍 들어 내동댕이를 쳐서 바숴뜨리기라도 했지, 좀 밀쳤다고 넘어지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아했을 것이다.
 
160
재봉틀이 넘어지느라고 갑자기 와그르르 떼그럭 요란한 소리가 나는 바람에 승재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가게로 뛰어들었다.
 
161
정주사는 승재가 반갑다기보다, 몰리는 싸움을 중판을 메게 된 것이 다행해서 얼른 낯빛을 풀어 가지고 흔감스럽게 인사를 먼저 한다. 유씨는 싸움이야 실컷 더 했어야 할 판이지만 재봉틀이 넘어지는 데 가슴이 더럭해서 잠깐 얼떨떨하고 섰는 참인데, 일변 반갑기도 하려니와 어려움도 있어야 할 승재가 오고 보니 차마 더 기승은 떨 수가 없었다.
 
162
두 양주는 다 같이 어색한 대로 반색을 하면서 승재를 맞는다. 그래 싸움하던 것은 어느덧 싹 씻은 듯이 어디로 가고 이렇게 천연을 부리니 싱거운 건 승재다.
 
163
그냥 말로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틀거리가 아니고, 철그덕 따악 살림까지 쳐부수는 게, 이 싸움 졸연찮은가 보다고 그만 엉겁결에 툭 튀어들었던 것인데, 이건 요술을 부렸는지 싹 씻은 듯이 하나도 그런 내색은 없고 둘이 다 흔연하게 인사를 하니 다뿍 긴장해서 납뛴 이편이 점직할 지경이다.
 
164
“거 어째 그리 볼 수가 없나? 이리 좀 앉게그려…… 거 원…….”
 
165
정주사는 연방 흠선을 피운다는 양이나 끙끙거리고 쩔맨다.
 
166
“좋습니다. 곧 가야 하겠어서…… 형주랑 병주랑 그새 학교엔 잘 다니나요?”
 
167
승재는 이런 인사엣말을 하면서 정주사네 양주와 가게 안을 둘러본다. 병주는 어느새 눈깔사탕이나 두어 개 쥐어 넣었는지 가게에 없고 보이지 않는다.
 
168
“거 머 벌제위명이지, 공부라구 한다는 게…… 그래, 그런데 참, 자넨 작년 가을에 무엇이냐 거, 의사에 합격이 됐다구? 참 경사로운 일일세!”
 
169
정주사는 여전히 남의 사무실 고쓰카이같이 의표(衣表)가 구지레한 승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그런데 왜 이렇게 궁기가 흐르느냐고는 차마 박절히 묻지 못하고서 혼자 고개만 끄덕거리다가 좋게 둘러대느라고…….
 
170
“……그러면 자네두 거 인전 병원을 설시하구서 다아 그래야 할 게 아닌가?”
 
171
“네에, 그리잖어두 이번에 어쩌면…….”
 
172
“응! 이번에? 병원을 설시하게 되나? 허! 참 장헌 노릇이네!”
 
173
“머어, 된다구 해두 그리 변변찮습니다마는…….”
 
174
“원 그럴 리가 있나! 다아 도저하겠지…… 그래 설시를 하게 된다면 이 군산이렷다? 그렇지?”
 
175
“군산이 아니구, 저어 서울서 어느 친구 하나가…….”
 
176
“서울다가?”
 
177
“네에, 아현(阿峴)다가 어느 친구가 실비병원을 하나 내겠는데, 절더러 와서…….”
 
178
“실비병원?”
 
179
정주사는 실비병원이란 소리를 다뿍 시쁘게 되뇐다. 그저 그렇지, 저 몰골에 제법 옹근 병원이라도 처억 차려 놓을 잡이가 워너니 못 되더니라고 시들해하는 속이다.
 
180
“……실비병원이든 무엇이든 아무려나 잘됐네그려!”
 
181
“아이 참, 잘됐구려!”
 
182
유씨가 남편한테 승재를 뺏기고서 말을 가로챌 기회를 여새기다가 얼핏 대꾸를 하고 나선다.
 
183
“……그럼 다아 그렇게 허기루 작정이 됐수?”
 
184
“아직 작정이구 무엇이구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는 시방 의사 면허가 없으니깐, 같이 해나가는 양으로 와서 있어 달라구 그런 기별만 왔어요. 그래서 내일이나 모레쯤 올라가서 잘 상읠 한 뒤에 원 어떻게 하던지…… 그래서 이번 올라가면 어쩌면 다시 내려오지 못할 것 같기두 하구, 그래서 인사두 이쭐 겸…….”
 
185
“오온! 그래서 모초로옴 모초롬 이렇게 찾어왔구려! 잊지 않구서 찾어와 주니 고맙수마는 떠난다니 섭섭해 어떡허우!…… 우리가 참, 남서방 신세두 적잖이 지구, 참…… 그러나저러나 이러구 섰을 게 아니라 일러루 좀 올라오우. 원 섭섭해서 어디…… 방을 치우께시니 우선 거기라두…….”
 
186
유씨는 너스레를 떨면서 일변 방으로 들어가서 나가동그라진 재봉틀을 바로잡아 한편 구석에 치워 놓느라 한참 분주하다. 승재는 거기 눈에 뜨이는 대로 석유상자 걸상에 가서 걸터앉고 정주사는 승재 앞으로 빈지 문턱에 가서 바짝 쪼글트리고 앉아 팔로 볼을 괸다. 그는 시방 승재가 오늘 해가 지고 밤이 깊도록 있어서, 아까 중판멘 싸움이 그대로 흐지부지했으면 한다. 이유는 달라도 승재를 잡아 두고 싶기는 유씨도 일반이다.
 
187
유씨는 승재를 생각하면 초봉이를 또한 생각하고 자못 회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승재가 인제는 버젓한 의사가 되어 병원을 내려고 서울로 떠난다는 작별인사를 하러 온 오늘 같은 날은, 일변 가슴을 부둥켜안고 싶게 지나간 일이 여러 가지로 안타깝다.
 
188
일찍이 초봉이가 승재한테로 뜻이 기우는 눈치였었고, 승재 또한 그렇게 부랴부랴 이사를 해가던 것을 보면 초봉이한테 마음이 깊었던 모양이고 했으니, 만약 저희 둘을 서로 배필을 정해 주었더라면 초봉이의 팔자도 그렇게 그르치지 않을 뿐더러 오늘날 이러한 승재를 제 남편으로 받들어 호강을 늘어지게 하고, 집안도 또한 이 사위의 덕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그 천하의 몹쓸 놈 고가한테 깜빡 속아 가지고는 그런 끔찍스런 변을 다 당하고, 필경은 자식의 신세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열 번 발등을 찍어도 시원하지가 않다.
 
189
하기야 어찌 되었으나 그 덕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혼인 전후에 돈을 적지 않게 얻어 쓴 것도 쓴 것이려니와, 초봉이가 서울로 올라가서 다달이 이십 원씩 보내 주어 그걸로 큰 힘을 보았고, 작년 가을에는 한목 오백 원이나 내려 보낸 것으로 이만큼이라도 가게를 차려 놓고서 그 끈에 연명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딸의 일생을 버려 준 것에 대면 말도 안 되게 이쪽이 크다.
 
190
그때에 그저 눈을 질끈 감고서 조금만 염량을 다르게 먹었다든지, 또 그 당장에서는 미워서 욕을 했어도, 계봉이가 말하던 대로 염탐이라도 좀 해보았든지 해설랑 고가의 청혼을 물리쳤더라면, 그새 한 이 년 집안의 고생은 더 했을망정 오늘날 와서 제 팔자 남에게 부럽지 않았을 것이고, 집안도 떳떳이 사위의 덕을 볼 것이고 그랬을 것이 아니더냔 말이다.
 
191
유씨는 이렇게 후회를 하기는 하면서도 그러나 일변 재미스러운 궁리도 없진 않다.
 
192
유씨가 승재를 애초에 초봉이의 배필로 유념을 했다가 태수가 뛰어드는 판에 퇴짜를 놓고는, 다시 계봉이를 두고 마음에 염량을 해두었던 것은 벌써 이태 전이다. 그러나 딴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계봉이가, 유씨의 말대로 하면 말만한 계집애년이 홀아비로 지내는 총각놈 승재한테를 자주 놀러도 다니고 하면서 가까이 지내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 짐짓 눈치만 보아 왔던 것이요, 그러잖았으면야 단단히 잡도리를 해서 그걸 금했을 것은 여부도 없는 말이다.
 
193
그러다가 작년 가을 승재가 마지막 시험을 치른 결과 합격이 다 되어서 아주 옹근 의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싹 더 마음이 당겨 마침내 혼인을 서둘러 볼 요량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년 계봉이가 못 가게 막는 것도 듣지 않고서 서울로 올라가 버리고, 또 승재도 발길을 뚝 끊다시피 다니지를 않고 해서 유씨는 적잖이 실망을 하고 있던 참이다.
 
194
그렇게 실망을 하고 있던 참인데 승재가 모처럼 찾아왔고, 찾아와서는 병원을 내기 위하여 서울로 간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일대의 서광이 아닐 수가 없던 것이다.
 
195
유씨는 그리하여 시방 승재를 좀 붙잡아 앉히고 슬금슬금 제 눈치도 떠보려니와 이편의 눈치도 보여 주고 해서, 이번에 서울로 올라가거든 계봉이와 저희끼리 그 소위 연애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것을 분명히 어울리도록 어쨌든 자주 상종도 하고 하게시리 마련을 해놀 요량인 것이다. 그래만 놓으면 뒷일은 다 절로 술술 들어 달 판이라서…….
 
196
승재는 정주사와 마주앉아서 지날 말같이 인사엣말같이 가게의 세월은 어떠하며, 매삭 수입은 어떠하며, 집안 지내는 형편은 어떠하냐고 물어 보고, 정주사는 그저 큰 것을 더 바랄 수는 없어도 가게의 수입이 쑬해서 암만은 되고, 또 재봉틀에서 들어오는 것이 있고 하니까 아무러나 지내는 간다고 별반 기일 것도 없이 대답을 해준다. 승재는 그럭저럭하면 계봉이한테라도 들은 대로 본 대로 전할 거리는 되겠거니 했다.
 
197
이야기가 일단 끝나고 난 뒤에 정주사는 혼자 하는 걱정같이, 그러나저러나 간에 내가 나대로 무엇이고 소일거리라도 마련을 해야지 원 갑갑해서…… 이런 소리를 덧들인다. 이 말은 오늘 북어를 못 사오고, 미두장에 가서 있던 것도 다 할 일이 없고 해서 심심한 탓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유씨더러 알아듣고 양해를 하라는 발명이다. 그러나 승재는 이 위에 좀더 딸의 덕을 볼 욕심으로 이번 서울로 올라가거든 초봉이한테 그런 전갈과 권념을 해달라는 속이거니 싶어, 못생긴 얼굴이 다시금 물끄러미 건너다보였다.
 
198
유씨는 승재를 방으로 모셔 들일 요량으로 바느질 벌여 놓았던 것을 죄다 걷어치우고 말끔하게 쓸어 낸 뒤에 앞치마를 두르면서 가게로 내려선다. 아직 좀 이르기는 하지만 저녁밥을 지어 대접을 하자는 것이다.
 
199
“아 글쎄, 우리 작은년은 말이우!”
 
200
유씨는 부엌으로 나가려면서 우선 한 사설 늘어놓느라고,
 
201
“……그년이 공불 한답시구 쫓아 올라가더니, 웬걸 학굔 들잖구서 아따 무어라더냐, 나는 밤낮 듣구두 잊으니, 오 참 백화점…… 백화점엘 다닌다는구려! 그년이 무슨 재랄이야, 글쎄…….”
 
202
승재는 다 알고 있는 소리지만 짐짓 몰랐던 체하는 표정을 한다.
 
203
“…… 아 글쎄, 더 높은 학굘 못 가서 육장 노래 부르듯 하던 년이, 그게 무슨 변덕이우? 머, 제 형이 뒤를 거둬 주구 하니 공불 하자믄야 조옴 좋수?”
 
204
“……”
 
205
승재는 무어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 그냥 덤덤하고 있다.
 
206
“……그년이 까부느라구 그랬을 거야, 그년이…… 그렇지만 그년이 까불긴 해두 재준 있다우. 또 제가 하려구두 들구…… 그러니깐 싹수가 없던 않은데…… 그리구 허기야 까부는 것두 다아 철들면 괜찮을 테구 하지만…….”
 
207
승재는 유씨가 그 입으로 이렇게까지 계봉이를 추는 소리를 듣느니 처음이다.
 
208
“사람 못된 것 공분 더 시켜서 무얼 해! 제 형년 허패만 빠지지!”
 
209
정주사가 옆에서 속도 모르고 중뿔난 소리를 한마디 거든다.
 
210
유씨는 쓰다고 고갯짓을 하면서 입을 삐죽삐죽,
 
211
“그년이 왜 사람이 못돼? 그년이 속이 어떻게 찼다구!…… 다아들 그년만치만 속이 찼어 보라지!”
 
212
하고 전접스럽게 꼬집어 뜯는다. 정주사는 승재 보기가 열적기는 하나 아까 싸움이 되벌어질까 봐서 더 대거리는 못 하고 노랑수염만 꼬아 붙인다.
 
213
“이건 참 긴한 부탁인데, 남서방…….”
 
214
유씨는 낯꽃을 도로 푸느라고 이윽고 만에야 다시 근사속 있이…….
 
215
“……이번에 올라가거들라컨 말이우, 그년더러 애여 그 짓 작파허구서 공부나 더 하라구 남서방이 단단히 좀 나무래기라두 허구 타일르기두 허구 다아 그래 주우. 남서방 하는 말이믄 곧잘 들을 테니깐…… 난 아주 남서방만 믿수?”
 
216
“글쎄올시다, 제가 머…….”
 
217
“아니라우! 그년이 남서방을 어떻게 따르구 했다구! 그러니 잘 좀 유념해서 등한하게 여기지 말구…… 그리구 그년뿐 아니라 제 형두 서울루 떠난 지가 꼬박 이태나 됐어두 인해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 수가 없구려! 그러니 남서방 같은 이라두 서울 가서 있으믄서 오면 가면 뒤두 보살펴 주구 하믄, 즈이두 맘이 든든할 것이구, 에미 애비두 다아 맘이 뇌구 않겠수?…… 그러니 이번에 올라가거들랑 부디 좀…… 아니 머 그럴 게 아니라 이렇게 허구려? 즈이 집 방을 하나 치이래서 같이 있어두 좋지? 그랬으믄야 머 참…… 내 그럼 오늘이래두 미리서 편질 해두까?”
 
218
“아, 아니올시다. 머, 다아 번폐스럽게…….”
 
219
승재는 황망히 가로막는다.
 
220
승재가 짐작하기에는 이 수다스럽고 의뭉스런 마나님이 그렇게 어쩌고저쩌고 해서 초봉이와 가까이하게 해가지고는 다 이러쿵저러쿵 둘이를 도로 비끄러매 놓자는 수작이거니 싶었다. 그러나 승재로는 천만 당치도 않은 소리다.
 
221
미상불 승재는 그것이 젊은 첫사랑이었던만큼 시방도 초봉이한테 아련한 회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초봉이의 말 아닌 운명을 매우 슬퍼했고, 그를 불쌍히 여겨 깊은 동정도 하기는 한다. 그러나 꿈에라도 그를 다시 찾아내어 옛정을 도로 누린다든가, 더욱이 그를 제 아내로 맞이한다든가 할 생각은 없었다.
 
222
그러하지, 지금 승재가 절박하게, 그리고 리얼하게 마음이 쏠리기는 차라리 계봉이한테다.
 
223
계봉이는 드디어 승재를 사로잡고 말았었다. 승재도 제 자신이 그렇게 된 줄을 몰랐다가, 작년 가을 계봉이가 서울로 뚝 떠난 뒤에야 제 몸뚱이가 통째로 없어진 것같이 허전한 것을 느끼고서 비로소 그것이 계봉이로 인한 탓인 줄을 알았었다. 그리하여 시방 승재를 끌어올려가는 것도 사실은 실비병원의 경영보다 계봉이의 ‘머리터럭 한 오라기’의 인력이 크던 것이다.
 
224
유씨와 정주사가 사뭇 부여잡다시피 저녁을 먹고 가라고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승재는 ‘콩나물고개’를 넘어 부랴부랴 S여학교의 야학으로 올라갔다. 벌써 다섯시 반이니 오늘새라 좀더 일잡아 갔어야 할 야학시간도 촉하거니와, 일찌거니 명님이를 찾아봤어야 할 것을 쓸데없이 정주사네게서 충그린 것이 찝찝해 못 했다.
 
225
야학이라는 건 작년 늦은봄부터 개복동과 둔뱀이의 몇몇 사람이 발론을 해가지고 S여학교의 교실을 오후와 밤에만 빌려서, 낮으로 일을 다닌다거나 놀면서도 보통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 모아 놓고 ‘기역 니은’이며 ‘일이삼사’며 ‘아이우에오’ 같은 것이라도 가르치자고 시작을 한 것인데, 마침 발기한 사람 축에 승재와 안면 있는 사람이 있어서, 승재더러도 매일 산술 한 시간씩만 맡아 보아 달라고 청을 했었다.
 
226
승재는 그때만 해도 계몽이라면 덮어놓고 큰 수가 나는 줄만 여길 적이라 첫마디에 승낙을 했고, 이내 일년 넘겨 매일 꾸준히 시간을 보아 주어는 왔었다.
 
227
승재가 학교 밑 언덕까지 당도하자 종 치는 소리가 들렸고 다 올라갔을 때에는 아이들은 벌써 교실에 모여 왁자하니 떠들고 있었다. 승재는 직원실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교실로 들어갔다.
 
228
아이들은 선생님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참새 모인 대숲에 새매가 지나간 것처럼 재재거리던 소리를 뚝 그치고 제각기 천연스럽게 고개를 바로 갖는다. 아이들이라야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그것도 팔십 명이나 넘더니, 스실사실 다 떨어져 나가고 시방은 열댓밖에 안 남아서 단출하다면 무척 단출하다.
 
229
승재는 급장아이를 직원실로 보내어 출석부만 가져오게 하고는 모두 오도카니 고개를 쳐들고서 기다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휘익 한번 둘러본다.
 
230
학과를 시작하기 바로 전이면 언제고 별뜻 없이 한번 둘러보는 게 무심한 습관이었지만, 오늘은 이것이 너희들과도 마지막이니라 생각하면 그새같이 무심치가 않고,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씩하나씩 똑똑하게 눈에 띄는 것 같았다.
 
231
새삼스럽게 모두 한심했다. 하기야 승재가 처음에 그다지 와락 당겨하던 것은 어디로 가고 명색이나마 이 야학에 흥미를 잃은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작년 겨울부터서 그는 계몽이니 혹은 교육이니 한다지만 어느 경우에는 절름발이를 만드는 짓이고, 보아야 사실상 이익보다 독을 끼쳐 주는 게 아니냐고, 지극히 좁은 현실에서 얻은 협착스런 결론으로다가 막연한 회의를 하기 시작했었고, 그러기 때문에 야학 맡아 보아 주는 것도 신명이 떨어져서 도로 작파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었다.
 
232
그렇지만 속은 어찌 되었든, 같은 교원이며 아이들한테고 떳떳하게 내세울 이유도 없이 그만두겠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를 않아서 오늘날까지 미룸미룸 해왔던 것인데, 그러자 계제에 이번 서울로 멀리 떠나게 되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만두게 되는 참이라 마음이야 어디로 갔든 겉으로는 그리 민망할 건 없었다.
 
233
그러나 소위 학문을 시킨다는 것은 흥미가 없었어도 아이들 그들 한테 정은 적잖이 들었던만큼, 더구나 저렇게 한심스런 것들을 떼어 놓고 떠나가자면은 자못 섭섭한 회포가 없지 못했다.
 
234
아이들의 모양새라는 것은 제각기 모두 밥을 한 사발씩 드북드북 배불리 먹고 났어도 도로 시장해 보일 얼굴들이다. 햘끔한 놈, 샛노란 놈, 그 중에 그래도 새까만 놈은 영양이 좋은 편이다. 모가지와 손등과 귀밑에는 지나간 겨울에 트고 눌어붙고 한 때꼽재기가 아직도 가시잖은 놈이 거지반이다. 옷도 저희들 생김새와 잘 얼린다. 아직 솜바지저고리를 입은 놈이 있는가 하면, 어느 놈은 홑고의적삼을 서늑서늑 갈아입었고, 다 떨어진 고쿠라 양복은 제법 치렛감이다.
 
235
승재는 아이들의 가정을 한두 번씩, 혹은 병인이 있는 집은 치료를 해주느라고 드리없이 찾아 다니곤 했기 때문에 그 형편들을 낱낱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어느 아이고 얼굴을 바라다보노라면 그 애의 집안의 꼴새까지 환히 머리에 떠오른다.
 
236
개개 지붕이 새고 토담벽이 무너진 오막살이요, 그나마 옹근 한 채가 아니고 방이 둘이면 두 가구, 셋이면 세 가구로 갈라 산다. 방문을 열면 악취가 코를 찌르는 어두컴컴한 속에서 얼굴이 오이꽃같이 노오란 여인네의 북통 같은 배가 누워 있기 아니면, 뜨는 누룩처럼 꺼멓게 부황이 난 사내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고 앉았다.
 
237
또 어느 집은 하릴없는 도야지새끼처럼, 허리를 헌 띠 같은 것으로 동여매어 궤짝 자물쇠에다가 매달아 놓은 아기가 눈물 콧물 뒤범벅이 되어 울고 있다. 이건 양주가 다 벌이를 나간 집이다. 그 반대로, 남녀가 어린아이들과 방구석에 웅숭크리고 있는 집은 벌이가 없어 대개 하루나 이틀은 굶은 집이다.
 
238
승재는 모두 신산했지만, 더욱이 당장 굶고 앉았는 집을 찾아간 때면 차마 그대로 돌아서지를 못해, 지갑에 있는 대로 털어 놓곤 했다. 마침 지닌 것이 없으면 뒤로 돈 원이라도 변통해 보내 준다. 그뿐 아니라 온종일 굶고 있다가 추욱 처져 가지고 명색 공부랍시고 하러 온 아이들한테 호떡이나 떡이나 사서 먹이는 게 학과보다도 훨씬 더 요긴한 일과였었다.
 
239
그러느라 작년 가을 의사면허를 땄을 때 병원 주인이 사십 원을 한목 올려 주어 팔십 원이나 받는 월급이 약품값으로 이십 원 가량, 생활비로 십 원 가량 들고는 그 나머지는 고스란히 그 구멍으로 빠져 나가곤 했다. 그러나 전과 달라, 시방 와서는 그것을 기쁨과 만족으로 하지를 못하고, 하루하루 막막한 생각과 불만한 우울만 더해 갔다.
 
240
승재가 가난한 사람의 병든 것을 쫓아 다니면서, 돈도 받지 않고 치료를 해준다는 소문이 요새 와서는 좁다고 해도 인구가 육만 명이 넘는 이 군산바닥에 구석구석 모르는 데 없이 고루 퍼졌고, 그래서 위급한데도 어찌하지 못하는 병자만 돌아보아 주재도 항용 열씩은 더 된다.
 
241
그 밖에 종기야 가슴아피야 하고 모여드는 사람은 이루 헬 수가 없다. 큼직한 종합병원 하나를 차리고 앉았어도 그 사람들을 골고루 만족히 치료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것을 낮에는 병원일을 보아 주고 나서 오후와 밤으로만 그 수응을 하자 하니 도저히 승재의 힘으로는 감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
 
242
그건 그렇다고 다시, 돈 그까짓 삼사십 원을 가지고 그 숱한 배고픈 사람들을 갈라 먹이자니 마치 시장한 판에 밥알이나 한 알갱이 입에다 넣고 씹는 것 같아 간에도 차지 않았다.
 
243
대체 이 조그마한 군산바닥이 이러할 바이면 조선 전체는 어떠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승재는 기가 딱 질렸다.
 
244
단지 눈에 띄는 남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해 제 힘있는 껏 그를 도와 주고 도와 주고 하는 데서 만족하지를 않고, 그 불행한 사람들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승재로서 일단의 발육이라 할 것이었었다.
 
245
그러나 그는 겨우 그 양(量)으로 눈이 갔을 뿐이지, 질(質)을 알아낼 시각(視角)엔 이르질 못했다. 따라서, 가난과 병과 무지로 해서 불행한 사람이 많은 줄까지는 알았어도, 사람이 어째서 가난하고 무지하고 병에 지고 하느냐는 것은 아직도 알지를 못한다.
 
246
그렇기 때문에 소박한 (타고난) 휴머니즘밖에 없는 시방의 승재의 지금의 결론은 절망적이다.
 
247
그 숱해 많은 불행한 사람을 약삭빨리 한두 사람이 구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248
그리고, 그래도 눈으로 보고서 차마 못해 돈푼이나 들여서 구제니 또는 치료니 해주는 것은 결국 남을 위한다느니보다도, 우선 나 자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제 노릇에 지나지 못하는 일이다.
 
249
이러한 해석 끝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옳으냐고 자연 반문을 하는데, 거기서는 아무렇게도 할 수 없다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250
승재는 갑갑했다. 그러자 마침 계봉이로 해서 서울로만 가고 싶었다. 그런데 계제에 서울로 올라갈 기회가 생겼다.
 
251
그러니 결국 계봉이한테 끌려서, 또 한편으로는 예가 막막하니까 새로운 공기 속으로 도망을 가는 것이지만, 승재 제 요량에는 서울로 가기만 하면 좀더 널리 그리고 좀더 효과 있게 일을 할 수가 있겠지 하는 희망도 없진 않았었다.
 
 
252
“자아 오늘은…….”
 
253
승재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얼굴을, 역시 별 의미 없이 두어 번 끄덕거리고 나서,
 
254
“……공분 고만두구, 느이허구 나허구 이야기를 한다구우.”
 
255
“네에.”
 
256
모두 좋아서 한꺼번에 대답을 한다. 내놓았던 공책이며 책을 걷어치우느라고 잠시 분주하다.
 
257
“내가 내일이면 저어 서울루 떠나는데…… 그래서 느이허구두 인전 다시 못 만나게 됐는데 말이지…….”
 
258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잠시 덤덤하더니, 이어 와 하고 제각기 한마디씩 지껄인다.
 
259
어째 서울로 가느냐고 짐짓 섭섭한 체하는 놈, 서울로 떠나지 말라는 놈, 언제 몇 시차로 떠나느냐고 정거장까지 배웅을 나가겠다는 놈, 저희끼리 쑥덕거리는 놈 해서 한참 요란하다.
 
260
승재는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섰다가 교편으로 교탁을 따악 친다.
 
261
“고마안 하구 조용해!”
 
262
아이들은 지껄이던 것을 한꺼번에 뚝 그치고 고개를 똑바로 쳐든다.
 
263
“……자아, 느이들 내가 부르는 대루 하나씩 하나씩 일어서서 내가 묻는 대루 다아 대답해 보아? 응?”
 
264
“네에.”
 
265
승재는 아이들더러 이야기를 하자고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작별하는 마당인데, 여느때처럼 토끼나 호랑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해서 어쩔까 망설이다가 문득 심심찮은 거리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266
“저어 너, 창윤이…….”
 
267
승재가 교편을 들어 가리키면서 이름을 부르는 대로 한가운데 줄에서 열댓 살이나 먹어 보이는 야물치게 생긴 놈이 대답을 하고 발딱 일어선다.
 
268
성한 데보다는 뚫어진 데가 더 많은 검정 고쿠라 양복바지에 얼쑹덜쑹 무늬가 박힌 융샤쓰를 입고 이마에 보기 흉한 흉이 있는 아이다. 눈이 뚜렷뚜렷한 게 무척 약게 생겼다.
 
269
“……음, 창윤이 넌 이렇게 공불 해가지구서 인제 자라면 무얼 할 텐가?”
 
270
승재가 천천히 묻는 말을 받아 아이는 서슴지 않고 냉큼,
 
271
“전 선생처럼 돼요.”
 
272
한다.
 
273
“나처럼? 건 왜?”
 
274
“전 선생님이 좋아요.”
 
275
승재는 속으로 예라끼 쥐 같은 놈이라고 웃었다.
 
276
“그 다음, 넌?”
 
277
맨 뒷줄에서 제일 대가리 큰 놈이 우뚝 일어선다. 눈만 두리두리 퀭하지 얼굴이 맺힌 데가 없고 둔해 보인다.
 
278
“……넌? 넌 공부해서 무얼 할 테야?”
 
279
“네, 전 전, 조선총독부 될래요.”
 
280
아이들이 해끗해끗 돌려다보고 그 중 몇 놈은 빈들빈들 웃는다. 승재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서,
 
281
“그래 조선 총독이 돼선 무얼 할려구?”
 
282
“월급 많이 받게요.”
 
283
“월급은 얼마나?”
 
284
“백 원…… 아니 그보담 더 많이요.”
 
285
“월급은 그리 많이 받아선 무얼 할 텐고?”
 
286
“마구 쓰구, 그리구…….”
 
287
그 다음은 종쇠라고 하는 열두어 살이나 먹은 놈이 불려 일어섰다. 콧물이 흐르고 옷이라는 건 때가 누더기 앉고 솜뭉치가 비어 나오는 핫옷이다.
 
288
“넌 공부해 가지구 인제 자라면 무얼 할 텐가?”
 
289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곁눈질만 한다. 이 애는 늘 이렇게 침울한 아인데, 오늘은 유난히 더해 보인다.
 
290
“자아, 종쇠두 대답해 봐?”
 
291
“저어…….”
 
292
“응.”
 
293
“저어…….”
 
294
“응.”
 
295
“순사요.”
 
296
“순? 사?”
 
297
뒷줄에서 두어 놈이 킥킥거리고 웃는다. 웃는 소리에 종쇠는 가뜩이나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깊이 떨어뜨린다.
 
298
“그래, 순사가 되구 싶다?”
 
299
“네에.”
 
300
“응, 순사가 되구 싶어…… 그런데, 어째서……?”
 
301
“저어…….”
 
302
“응.”
 
303
“저어 우리 아버지가…….”
 
304
종쇠는 그 뒷말을 다 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문다.
 
305
“그래 느이 아버지가 널더러 순사 되라구 그러시던?”
 
306
“아뇨.”
 
307
“그럼?”
 
308
“우리 아버지, 잡아가지 말게요.”
 
309
승재는 황망하여, 아까보다 더 여러 놈이 웃는 것을 일변 나무라면서 일변 종쇠더러,
 
310
“종쇠, 너, 순사가 느이 아버지 붙잡어가던? 응?”
 
311
“네에.”
 
312
“온, 저걸!”
 
313
전서방이라고 살기는 ‘사젱이’에서 살고, 선창에서 지겟벌이로 겨우 먹고 사는데, 며칠 전에 다리를 삐었다고 승재한테 옥도정기까지 얻어 간 사람이다. 그리고 집에는 아내와 종쇠를 맨 우두머리로 젖먹이까지 아이들이 넷이나 되는 것도 승재는 횅하니 알고 있다.
 
314
“……그래, 언제 그랬니?”
 
315
승재는 종쇠 옆으로 내려와서 수그리고 섰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316
“어저께 저녁에요.”
 
317
“으응!…… 그런데 왜? 어쩌다가?”
 
318
“저어…….”
 
319
“응, 누구하구 싸웠나?”
 
320
“쌀 훔쳐다 먹었다구…….”
 
321
승재는 아뿔싸! 여러 아이들이 듣는 데서 물을 말이 아닌 걸 그랬다고 뉘우쳤으나 이미 늦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사나운 얼굴로 다른 아이들을 휘익 둘러본다. 선생님의 무서운 얼굴에 겁들이 나서, 죄다 천연스럽게 앉아 있고 한 놈도 웃거나 저희끼리 소곤거리는 놈이 없다.
 
322
승재는 이윽고 안색을 눅이고 한숨을 내쉬면서 풀기 없이 교단으로 도로 올라선다.
 
323
“그래, 종쇠야?”
 
324
“네에?”
 
325
“넌 그래서 순사가 되겠단 말이지?…… 느이 아버지가 남의 쌀을 몰래 갖다 먹어두 넌 잡어가지 않겠단 말이지?”
 
326
“네에.”
 
327
“응…… 그래, 느이 아버지를 잡아가지 말려구, 그럴려구 순사가 될 터란 말이었다?”
 
328
“네에.”
 
329
“그럼 남의 쌀을 몰래 갖다가 먹은 아버진 그랬어두 아버진 착한 아버지란 말이지?”
 
330
“아뇨.”
 
331
“아냐?”
 
332
“네에.”
 
333
“그럼 나쁜 아버진가? 종쇠랑 동생들이랑 배고파하니깐 밥해 먹으라구, 그래서 그랬는데.”
 
334
“그러니깐 난 아버지 붙잡어 안 가요.”
 
335
승재는 슬픈 동화를 듣는 것 같아 눈가가 매워 오고 목이 메어 더 말을 하지 못했다.
 
 
336
술이 얼큰해 가는 동행 제약사는 저 혼자 흥이 나서 승재의 몫으로 들어온 여자까지 둘 다 차지를 하고 앉아 재미를 본다. 색주가집이라고는 생전 처음으로 와보는 승재는, 술은커녕 다른 안주 짜박도 매독이 무서워서 손도 대지 않았다.
 
337
여자들의 행동은 상상 이상으로 추악한 게 완연히 동물 이하여서 승재로는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다.
 
338
제약사는 두 여자를 양편에다 끼고 앉아서, 한 손으로는 유방을 떡 주무르듯 하고 한 손으로는…… 그래도 두 여자는 어디 볼때기나 만지는 것처럼 심상, 심상이라니 도리어 시시덕거리면서 좋아한다. 승재는 차마 해괴해서 못 본 체 외면을 하고 앉았다.
 
339
“여보, 난상? 난상?”
 
340
제약사는 지쳤는지, 이번에는 여자 하나를 끼고 뒹굴다가 소리소리 승재를 부르면서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연신 눈짓을 한다. 그래도 승재가 못 들은 체하고 있으니까,
 
341
“……아, 난상두 총각 아니우? 자구 갑시다, 자구…… 아인(一圓)이믄 돼. 내 다아 당허께…….”
 
342
하고 까놓고 떠들어 대면서, 일변 짝 못 찾은 다른 한 여자더러 눈을 끔적끔적한다.
 
343
그 여자는 알아듣고서 얼른 승재게로 달려들더니 여부없이 목을 얼싸안고 나가뒹군다. 승재는 질겁을 해서 버둥거려도 빠져나지를 못한다.
 
344
“이 양반이 분명 내신가 봐?”
 
345
여자는 조롱을 하다가, 어디 좀 보자고 손을 들이민다. 승재는 사정없이 여자를 떠다밀치고 벌떡 일어서서 의관을 찾는다.
 
346
“가 가만, 잠깐만, 난상 난상…… 정말 재미나는 구경이…….”
 
347
제약사는 비틀거리고 일어서더니 지갑 속에서 오십 전짜리를 한 푼을 꺼내 들고는 승재의 몫이던 여자더러,
 
348
“너 이거 알지?”
 
349
“피이! 오십 전!”
 
350
“얘, 서양선 금전을 쓴다더라만, 조선서야 어디 금전이 있니? 그러니깐 아쉰 대루 이놈 은전으루, 응?”
 
351
“오십 전 바라군 못 하네!”
 
352
“그럼 이놈만 ………면 일 원 한 장 더 준다!”
 
353
“정말?”
 
354
“네한테 거짓말하겠니? 염려 말구서 ………기나 해라. 얘, 얘, 그렇지만 아랫두린 다아 ………야 한다? 응?”
 
355
“그야 여부가 있수!”
 
356
“자아, 난상 구경하시우. 이건 서양이나 가예지 보는 거라우. 그리구 더 놀다가 ………허구 가요, 네?”
 
357
제약사는 성냥갑 위에다가 오십 전짜리 은전을 올려놓고 물러앉고, 재주를 한다던 여자는 별안간 입었던 치마부터 ……기 시작한다. 승재는 누가 잡을 사이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와서 신발도 신는 둥 마는 둥 거리로 뛰어 나섰다. 그는 은전을 ……다니까 혹시 입으로 무슨 재주를 부리는 줄만 알고서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모자도 못 쓰고, 외투도 못 입고, 혼자 떨면서 돌아오는 승재는 속에 메스꺼워 몇 번이고 욕질이 나는 것을 겨우 참았다.
 
358
이것이 작년 겨울 어느 날 밤에 약제사가 승재의 사처로 놀러 와서는 색시들 있는 데를 구경시켜 주마고 꾀는 바람에, 승재는 대체 어떻게 생긴 곳이며 생활과 풍토는 어떠한가 하는 호기심으로 슬며시 따라왔다가 혼띔이 나보던 경험이다.
 
359
승재는 전연 상상도 못 한 것이어서, 어쩌면 사람이 (더욱이 여자가) 그대도록 타락이 될까 보냐고 여간만 분개한 게 아니다. 그는 작년 겨울의 이 기억을 되씹으면서 온통 색주가집 모를 부은 개복동 아랫비탈 그 중의 개명옥(開明屋)이라는 집으로 시방 명님이를 찾아온 길이다.
 
360
오늘 야학에서 일찍 여섯시까지 시간을 끝내고, 교원 두 사람더러 내일 밤차로 떠날 듯하다는 작별을 한 뒤에 이리로 이내 오는 참이다.
 
361
아직 해도 지기 전이라 손님은 들지 않았고, 이방 저방 색시들이 둘씩 셋씩 늘비하니 드러누워 콧노래도 부르고, 누구는 단속곳바람으로 웃통을 벗어 젖히고서 세수를 하느라 시이시 한다. 끼웃끼웃 내다보는 색시들이 죄다 얼굴이 삐뚤어져 보이기도 하고, 볼때기나 이마빼기나 코허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분으로 개칠을 했거니 싶기도 했다.
 
362
승재는 그의 말대로 하면, 이런 곳은 인류가 환장을 해서 동물로 역행하는 구렁창이었었다. 환장을 않고서야 결단코 그렇게 파렴치가 될 이치는 없다는 것이다.
 
363
결국 그러므로, 승재는 제 소위 ‘환장을 해서 동물로 역행을 하는’ 여자들을 그 허물이 전혀 그네들 자신에게 있는 줄만 알고 있는 게 되어서 그들을 동정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더럽다고 침을 뱉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364
명님이는 승재가 찾아온 음성을 알아듣고 반가워서 건넌방에 있다가 우루루 달려나온다. 그러나 승재와 얼굴이 쭈뻑 마주치자 해죽 웃으려다 말고 금시로 눈물이 글성글성하더니 몸을 홱 돌이켜 쫓아 나오던 건넌방으로 도로 들어가서는 울고 주저앉는다.
 
365
명님이는 실상 어째서 우는지 저도 모르고 울던 것이다. 이런 집에 와서 있게 된 것이 언짢거나 슬프거나 한 줄을 아직 모르겠고 그저 덤덤했다. 다만 안 된 것이 있다면,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있는 ‘우리집’이 아니어서 호젓한 것 그것 한 가지뿐이다. 그러니까 승재를 보고 운 것도, 차라리 반가운 한편, 역시 어린애다운 농암으로 눈물이 나온 것일 것이다.
 
366
명님이가 눈물 글썽거리는 것을 보고서 승재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옳게 처량했다.
 
367
저렇게 애련하고 저렇게 순진하고 해보이는 소녀를 이 구렁창에다 두어 ‘환장한 인간들로 더불어 동물로 역행’을 하게 하다니, 도저히 못할 노릇이라 생각하면 슬픈 것도 슬픈 것이려니와 그는 다시금 마음이 초조했다.
 
368
승재는 암만 동정이나 자선이란 제 자신의 감정을 위안시키기 위한 제 노릇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가지고 있어도, 시방 명님이를 구해 주겠다는 이 형편에서는 그런 생각은 몽땅 어디로 가고 없다. 또 생각이 났다고 하더라도 그 힘이 이 행동을 막진 못할 것이었었다.
 
369
그새 사흘 동안 승재는 제 힘껏은 눈을 뒤집어쓰고 납뛰다시피 했었다. 물론 승재의 주변이니 별수가 없기는 했었지만, 아무려나 애는 무척 썼다.
 
370
사흘 전, 밤에 명님이가 찾아와서 몸값 이백 원에 팔렸다는 것이며, 내일 밝는 날이면 아주 이 집 개명옥으로 가게 되었다고, 그래서 작별을 온 줄로 이야기하는 말을 듣고는 펄쩍 뛰었었다. 그는 그 동안 명님이네 부모 양서방 내외더러 자식을 몹쓸 데다가 팔아먹어서야 쓰겠냐고, 그런 생각은 부디 먹지 말라고 만나는 족족 일러 왔고, 양서방네도 들을 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이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깜박 모르고 있었다.
 
371
그날 밤 승재는 당장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양서방네한테로 쫓아가려고 뛰쳐 일어섰으나 양서방은 그 돈을 몸에 지니고 아침에 벌써 장사할 어물(乾魚物)을 사러 섬으로 들어갔다는 명님이의 말을 듣고 그만 떡심이 풀려 방바닥에 펄씬 주저앉았다.
 
372
밤새껏 승재는 두루두루 궁리를 한 후에 이튿날 새벽같이 병원 주인 오달식이더러 서울로 가는 걸 서너 달 미루고 더 있어 줄 테니 돈 이백 원만 취해 달라고 말을 해보았다. 그러나 병원 주인은 며칠 전에 승재가 서울로 가겠다고 말을 해놓고서 이태 동안만 더 있어 달라고 졸라도 듣지 않았을 때에 속으로 꽁하니 노염이 났었고, 또 석 달이나 넉 달 더 있어 주는 건 고마울 것도 없대서, 그래저래 심술을 피우느라고 한마디에 거절을 해버렸다.
 
373
승재는 십상 되겠거니 믿었던 것이 낭패가 되고 보니, 달리는 아무 변통수도 없고 해서 코가 석자나 빠졌다.
 
374
할 수 없이 책을 죄다 팔아 버리려고 헌책사 사람을 데려다가 값을 놓게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이런 군산바닥에서는 의학서류며 자연과학에 관한 서적은 사놓는대도 팔리지를 않으니까 소용이 닿지 않는다고 다뿍 비쌘 뒤에, 그래도 정 팔겠다면 한 팔십 원에나 사겠다고 배를 튕겼다.
 
375
도통 사백 권에 정가대로 치자면 근 천 원 어치도 넘는 책이다. 그래도 승재는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대로 팔십 원에 내놓았다. 그러고도 심지어 헌 책상 나부랑이며 자취하던 부둥가리까지 헌 옷벌까지 모조리 쓸어다가 팔 것 팔고 잡힐 것 잡히고 한 것이 겨우 십오원 남짓해서, 서울 올라갈 찻삯 오 원 각수를 내놓으면 도통 구십 원밖에는 변통이 못 되었다.
 
376
그 다음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더 마련할 재주가 없었다. 그것도 사람이 좀더 주변성이 있었다면, 가령 되다가 못 될 값에 이번에 병원을 같이 해나가자고 한다는 그 사람한테 전보라도 쳐서 구처를 해보려고 했을 것이지만, 도무지 남과 여수라는 것을 해보지 못한 샌님이라 놔서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거니와, 또 생각이 났다 하더라도 병원 주인한테 한번 무렴을 본 다음이고 하여 역시 안 되려니 단념을 하고 말았기가 십상일 것이었었다.
 
377
그러고서는 하도 속이 답답하니까, 그 동안 다달이 몇 원씩이라도 저금이나 해두었더라면 하고, 아닌 후회나 했다.
 
378
할 수 없이 마음은 초조해 오고 달리는 종시 가망이 없고 하여, 그놈 구십 원이나마 손에 쥐고 허허실수로, 또 오늘 일이 여의치 못하면 뒷일 당부도 할 겸, 명님이와 작별이라도 할 겸 이렇게 찾아는 온 것이다.
 
379
승재는 가뜩이나 낯이 선 터에 명님이를 따라 눈물이 비어지는 것을 억지로 참느라고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주인양반을 좀 만나 보겠다고 떼어 놓고 통기를 했다.
 
380
주인은 내가 주인인데 하면서 웬 뚱뚱한 여자 하나가 아직 이른 태극선을 손에 들고 나서는 것도 승재한테는 의외거니와, 그의 뚱뚱한 것이며 차림새 혼란스런 데는 어쩌면 기가 탁 접질리는 것 같았다.
 
381
나이는 한 오십이나 됨직할까, 볼이 추욱 처지고 두 턱진 얼굴에 불콰하니 화색이 도는 것이며, 윤이 치르르 흐르는 모시 진솔치마를 질질 끌면서 삼칸 마루가 사뭇 그들먹하게 나서는 양은 어느 팔자 좋은 부잣집 여인네가 나들이를 나온 길인 성싶게 후덕하고 점잖아 보였다. 다만 손가락마다 싯누런 금반지가 아니면, 백금반지야 돌 박힌 반지를 그득 낀 것은 몹시 조색스럽기도 하지만, 의젓한 그 몸집이나 옷 입음새에 얼리지 않고 쌍스러워 보였다.
 
382
주인이라는 여자는 위아래로 승재를 마슬러보면서,
 
383
“누구시우? 왜 그러시우?”
 
384
하고 거푸 묻는다. 도금비녀나 상호(商號) 없는 화장품 장수 대응하듯 하는 태도가 분명했다.
 
385
미상불 승재는 털면 먼지가 풀신풀신 날 듯, 구중중한 그 행색에 낡은 왕진가방까지 안고 섰는 꼴이 성가시게 떠맡기려고 졸라 댈 도금비녀 장수 같기도 십상이었었다.
 
386
“저어, 쥔…… 양반이십니까?”
 
387
승재는 안 물어도 좋을 말을 다시 물어 놓는다.
 
388
“글쎄 내가 이 집 주인이란밖에요…… 사내주인은 없단 말이오. 그러니 할 말 있거던 날더러 허시우…… 어디서 오셨수?”
 
389
“네, 그러면…… 저어 명님이라는 아이가 여기 와서 있는데요…….”
 
390
“명님이? 명님이?”
 
391
“저어, 그저께 새루…… 저 요 우에 사는 양서방네…….”
 
392
승재는 방금 들어오면서 제 눈으로 본 아이를 생판 모르는 체하거니 하고 참으로 무섭구나 했다. 그러나 이어 주인여자의 대답을 듣고는 그런 게 아닌 줄은 알았고,
 
393
“네에, 양서방네요!…… 있지요. 홍도 말씀이시군…… 그래, 그 앨 만나러 오셨수? 일가 되시우?”
 
394
“일간 아니구요…… 그 애 일루 해서 쥔…… 양반허구 무어 좀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395
“나허구 상읠 하신다? 네에…… 그럼 당신은 누구시우?”
 
396
“나는 저어 남승재라구 저기 금호병원…….”
 
397
“네에! 아아 그러시우!”
 
398
주인여자는 승재의 말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알아듣고는 반색을 하여 갑자기 흠선을 떨면서,
 
399
“……온, 그러신 줄은 몰랐지요! 좀 올라오십시오, 어여 절러루 좀 올라가십시다…… 나두 뵙긴 첨이지만 소문은 들어서 다아 참 장허신 수고를 허신다는 양반인 줄은 알구 있답니다…… 어서 일러루…….”
 
400
승재는 주인여자의 흔감떨이에 낯이 점직해 어쩔 줄 몰라하면서 청하는 대로 안방으로 들어가서 권하는 대로 모본단 방석을 깔고 앉았다.
 
401
주인여자는, 손은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내놓는다, 재떨이를 비어 오게 한다, 부산나케 서둘다가야 겨우 자리를 잡고 앉더니, 이번에는 입에서 침이 마르게 승재를 추앙을 해젖힌다. 필시 별뜻은 없고, 구변 좋고 말 좋아하는 여자의 지날 인사가 그렇던 것이다.
 
402
아무려나 승재는 처음 생판 몰라주고서 쌩동쌩동할 때와는 달라, 이렇게 흔연 대접을 해주니, 우선 제 소간사를 말 내놓기부터 수나로울 것 같았다.
 
403
“게, 그 앤 어찌……?”
 
404
주인여자는 이윽고 그 수다스런 사설을 그만 해두고 말머리를 돌려 승재더러 묻던 것이다.
 
405
“……전버텀 알음이 있던가요? 혹시 같은 한고향이라던지…….”
 
406
승재는 비로소 제 이야기를 내놓을 기회를 얻었다.
 
407
처음 병을 낫우어 주느라고 명님이를 알게 된 내력부터 시작하여, 이내 삼 년 동안이나 친누이동생같이 귀애하던 것이며, 그런데 뜻밖에 이런 데로 팔려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았다는 것이며, 그래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백방으로 주선을 해보았으나, 돈이 구십 원밖에는 안 되었다는 것이며, 그러니 물론 경우가 아닌 줄 알기는 알지만, 그놈 구십 원만 우선 받아 두고 그 애를 도로 물러 줄 양이면 일간 서울로 올라가서 석 달 안에 실수 없이 나머지 처진 것을 보내 주겠노라고, 이렇게 조곤조곤 정성을 들여 사정 설파를 늘어 놓았다.
 
408
주인여자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문대문 그러냐고, 아 그러냐고 맞장구만 연신 치고 있더니, 승재의 말이 다 끝나자 한참 만에,
 
409
“허허!”
 
410
하고 탄식인지 탄복인지 모르게 우선 한마디 해놓고는 새로 담배를 붙여 문다.
 
411
“참, 대단 장허신 노릇입니다!…… 해두…….”
 
412
주인여자는 붙인 담배를 두어 모금 빨고 나서, 또 잠시 생각하는 체하다가,
 
413
“……건 좀…… 다아 섭섭하시겠지만…… 그래 디리기가 난처합니다, 네…….”
 
414
어느 편이냐 하면, 허탕을 치기가 십상이려니 미리서 각오를 안 한 것은 아니나, 막상 이렇게 되고 보매, 승재는 신명이 떨어져 고개를 푹 수그리고 묵묵히 말이 없다.
 
415
“……다아 그래 디렸으면야 대접두 되구 하겠지만, 아 글쎄 좀 보시우? 나두 이게 좋으나 궂으나 영업이 아닌가요? 영업을 하자구 옹색한 돈을 딜여서 영업자를 구해 온 게 아녜요?”
 
416
“……”
 
417
“그런 걸 영업두 미처 않구서 도루 물러 주기가 억울한데 우환중에 디린 돈두 다아 찾질 못하구서 내놓는대서야, 건 좀…… 네? 그렇잖다구요?”
 
418
“네에.”
 
419
승재는 마지못해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420
“그러니 여보시우, 기왕 점잖으신 터에 말씀을 하신 그 대접으루다가 내가 딜인 밑천만 한목에 치러 주시믄 두말없이 그때는 물러 디리지요.”
 
421
승재는 하도 막막해서 뒷일 상의와 부탁을 하자던 것도 잊고 덤덤히 앉아만 있다.
 
422
“그런데 여보시우?”
 
423
주인여자는 뒤풀이가 미흡했던지, 또는 이야기가 더 하고 싶었던지 음성을 훨씬 풀어 가지고 근경속 있게 다시 초를 잡는다. 승재는 무엇인가 해서 고개를 쳐들고 말을 기다린다.
 
424
“……이런 건 나버텀두 다아 객적은 소리지만, 게 다아 쓸데없는 짓입넨다. 다아 괜히 그러시지…….”
 
425
“네에!…… 건 어째서?”
 
426
“허어 여보시우, 시방 당신님은 그 애가 불쌍하다구, 그래서 도루 빼주시잔 요량이지요?”
 
427
“불쌍?…… 으음, 그렇지요!”
 
428
“그렇지요? 그런데에…… 알구 보믄 이런 데라두 와서 있는 게 차라아리, 차라리 제겐 낫습넨다! 나어요!”
 
429
“낫다구요?…… 오온!”
 
430
“낫지요, 낫구말구요!”
 
431
“낫다니 그게 어디…….”
 
432
“허어! 모르시는 말씀…….”
 
433
주인여자는 볼때깃살이 털레털레하도록 고개를 흔들면서,
 
434
“……자아, 당신님두 저 애네 형편을 잘 아시겠구료? 아시지요? 별수없이 퍼언펀 굶지요? 아마 하루 한 끼 어려우리다?…… 그러나, 아 세상에 글쎄 배고픈 설움 위에 더한 설움이 어딨겠수? 꼬루룩 소리가 나다 못해 쓰라린 창자를 틀켜 쥐구 앉아서 눈 멀뚱멀뚱 뜨구 생배를 곯는 설움보다 더한 설움이 있답니까?…… 고생하구는 제일가는 고생이구 그런 게 불쌍한 사람이지 누가 불쌍허우……? 남의 무엇은 크다구 부주깽이루다가 찔르더란 푼수루다 아 남이야 남의 시장한 창잣속 딜여다보는 게 아니니깐 배가 고픈지 어쩐지 모르지요. 그렇지만 당하는 사람은 육장으루 생배 곯기라께 진정 못 할 노릇입닌다…… 못 할 노릇일 뿐 아니라…….”
 
435
주인여자의 언변은 차차 더 열이 올라 팔을 부르걷고 승재에게로 버썩 다가앉는다.
 
436
“……게, 제엔장맞일, 사람 쳇것이, 그래 날아다니는 까막까치두 제 밥은 있는 법인데 그래 사람 명색이 생으루 굶어야 옳아요? 그버담 더한 천하에 몹쓸 죄인두 가막소에서 밥은 얻어먹는데, 죽일 놈두 멕여 죽이는 법인데, 그래 생사람이 굶어 죽어야 옳단 말씀이오? 네? 육신이 멀쩡한 사람이 눈 멀거니 뜨구 앉어서 굶어 죽어야만 옳아요? 네?”
 
437
“그거야 누가 굶어 죽으라나요? 제가끔 다아, 저 거시키…….”
 
438
승재가 잠깐 더듬는 것을 주인여자는 바싹 다잡고 대들면서,
 
439
“그럼? 어떡허란 말이오? 두더지라구 흙이나 파먹구 살아요?”
 
440
“두더지처럼 땅 파구, 개미처럼 짐지구 그렇게 일하면 먹을 거야 절루 생기지요.”
 
441
승재는 대답은 해도 자신이 있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442
그 동안 야학 아이들의 가정들을 보기 싫도록 다니면서 보아야 그들이 누구 없이 일을 하기 싫어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개개 벌이가 없어서 놀고 있기가 아니면 병든 사람인 줄을 그는 역력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443
그러니 그렇다면 시방 이 여자의 말이 옳다 해야 하겠는데, 승재는 결단코 항복을 않는다. 제 자신이 지닌 바 ‘인간의 기준’과 ‘사실’이 어그러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인즉 그 ‘인간의 기준’이란 건 제가 몸소 현실을 손으로 파헤치고서 캐낸 수확이 아니라, 남이 마련한 결론만 눈으로 모방해 가지고는 그것이 바로 제 것인 양, 만능인 양, 든든히 믿고서 되돌려다 볼 생각도 않는 ‘우상’일 따름인 것이다.
 
444
결국 승재는 그래서 시초 모를 결론만 떠받고 둔전거리는 셈이요, 그러니 저는 암만 큰소리를 해도 그게 무지(無智)지 별수없는 것이었었다.
 
445
“말두 마시우!”
 
446
주인여자는 결을 내어 떠든 것이 점직했던지 헤벌씸 웃으면서 뒤로 물러앉는다.
 
447
“……다아 몹쓸 것들두 없잖어 있어 호강하자구 딸자식을 논다니루 내놓는 년놈두 있구, 애편을 하느라고 청루나 술집에나 팔아먹는 수두 있긴 합디다마는, 그래도 열에 아홉은 같이 앉어 굶다 못해 그 짓입넨다. 나는 이런 장사를 여러 해 한 덕에 그 속으루는 뚫어지게 알구 있다우. 배고픈 호랭이가 원님을 알어보나요? 굶어 죽기 아니면 도둑질인데…… 아 참 여보시우, 그래 당신님 생각에는 이런 데 와 있느니 도둑질이 낫다구 생각하시우?”
 
448
“그야!”
 
449
승재는 실상 도적질과 그것과를 비교해서 어느 것이 좀더 낫다는 판단을 선뜻 내리기가 어려웠다.
 
450
“거 보시우! 도둑질할 수 없지요? 그러니 그대루 앉어서 꼿꼿이 굶어 죽어요?…… 오온 인간탈을 쓰구서 인간세상에 참례를 했다가 생으루 굶어 죽다니? 그런 천하에 억울한 노릇이 있어요? 잘나나 못나나 한세상 보자구 생겨난 인생인걸, 그러니 살구 볼 말이지, 그래 사는 게 나뿌?”
 
451
승재는 뾰족하게 몰린 꼴새여서 대답을 못 하고 끄먹끄먹 앉아 있다.
 
452
“그리구, 여보시우…….”
 
453
주인여자는 한참이나 승재를 두어 두고 혼자 담배만 풀썩풀썩 피우다가 문득 긴한 목소리로 그러나 조용조용 건넌방을 주의하면서,
 
454
“……장차 어떻게 하실는지야 모르겠소마는, 저 앨 몸을 빼줘두 별수없으리다!”
 
455
“네?…… 어째서?”
 
456
“또 팔아먹습니다요!”
 
457
“또오?”
 
458
“네, 인제 두구 보시우.”
 
459
“그럴 리가!”
 
460
“아―니오!…… 나는 다아 한두 번이 아니구 여러 차례 겪음이 있어서 하는 소리랍니다!…… 아, 글쎄 그 사람네가 그까짓 것 돈 이백 원을 가지구 한평생 살 줄 아시우?…… 장사? 흥! 단 일년 지탕하믄 오래 가는 셈이지요. 그리구 나믄 그땐 첨두 아니었다, 한번 깨묵맛을 딜였는 걸 오죽 잘 팔어먹어요? 시방이나 그때나 배고프기는 일반인데 무엇이 대껴서 안 팔아먹겠수?…… 두번짼 굶어 죽더래두 안 팔아먹을 에미 애비라믄, 애여 처음 번에 벌써 팔아먹들 않는다우…… 생각해 보시우? 이치가 그럴 게 아니우?”
 
461
“네에!”
 
462
승재는 미상불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연신 끄덕거린다. 그러고 보니 인제 서울로 올라가서 돈을 보내서 몸만 빼놓아 준다는 것도 생각할 문제일 것 같았다.
 
463
“보아서 촌 농가집으루 민며느리라두 주게 하던지…….”
 
464
승재는 꼭이 그러겠다는 작정이라느니보다 어떻게 할까 두루두루 생각하면서 혼자말같이 중얼거리는 것을 주인여자가 얼핏 내달아,
 
465
“것두 괜헌 소리지요!”
 
466
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467
“건 왜요?”
 
468
“여보시우. 당신님 저어기 촌 여편네들 거 팔자가 어떤지 아시우? 아마 잘 모르시나 보니 좀 들어 보시우…… 그 사람네라께 여름 한철이나 겨우 시꺼먼 꽁보리밥이나 배불리 얻어먹지, 여니땐 펀펀 굶구 지내우. 옷이 어디 변변허우? 삼복에 무명것 친친 감구 살기, 동지섣달에 맨발 벗구 홑고쟁이 입구 더얼덜 떨기…… 일은 그러구서두 육나오게 하지요! 머 말이나 소 같지요! 도무지 사람 꼴루 뵈들 않는걸!…… 그런데다가 열이면 열 다아 시에미가 구박허구, 걸핏하면 능장질을 하지요! 서방놈이 때리지요! 어디 개팔자가 그렇게 기구허우? 차라리 개만두 못하지…… 그리니 자아 생각을 해보시우. 그렇게두 못 얻어먹구 헐벗구 뼈가 휘게 일을 하구 그러구두 밤낮 방망이찜이나 받구, 응?…… 그러믄서 그 숭악한 농투산이한테, 계집으로 한 사내 셈긴다는 것, 꼭 고것 한 가지, 그까짓 게 무슨 그리 큰 자랑이라구?…… 그까짓 게 무슨 그리 대단한 영화라구 그 노릇을 한단 말씀이오? 대체 춘향이는 이도령이 다아 잘나구, 또 제 정두 있구 해서 절개를 지켰다지만, 시방 여니 계집들이야 그까짓 일부종사가 하상 그리 대단하다구 촌 농투산이한테 매달려서 그 고생을 할 게 무어란 말씀이오? 네?…… 당신님이 다아 귀여허구 그러신다니 저 애만 하더라두 내가 시방 이얘기한 대루 촌에 가서 그 팔자가 된다믄 당신님 생각에 좋겠수? 네?…… 나 같으믄 그러느니 차라리 예다 두지요!”
 
469
만일 농촌의 여자의 생활이 사실로 그렇다면, 미상불 명님이더러 이 길에서 그 길로 옮아 가라고 한다는 것도 결국 새빨간 남으로 앉아서 나만 옳은 줄 여겨 그걸 주장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싶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정으로 생각하더라도, 이 여자의 말마따나 승재로서는 명님이를 그런 데로 보내기가 가엾어 차마 못 할 것이었었다.
 
470
“그러면 저어, 이렇게 좀 해주시까요?”
 
471
오래오래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두루 궁리를 하던 승재가 겨우 얼굴을 쳐든다.
 
472
“어떻게?…… 무슨 좋은 도리가 있으시우?”
 
473
“내가 내일 밤차루 서울루 떠나는데요. 가서 속히 그 돈을 마련해서 보내 디릴 테니깐…….”
 
474
“글쎄, 그러신다믄 물러는 디리지만, 시방 말씀한 대루 즈이 부모가 다시 또…….”
 
475
“아니, 그러니깐, 차비두 부쳐 디릴 테니 즈이 집으로 보내지 말구서 바루 서울루 보내 주시면…….”
 
476
“아아, 네에 네!…… 그야 어렵잖지요. 그렇지만 즈이 부모네가 말이 없을까요?”
 
477
“그건 내가 잘 말을 일러두지요. 머 못 한다군 못 할 테니까요.”
 
478
“즈이 부모만 말이 없다믄야 졸 대루 해디리지요, 머…… 그러면 그렇게 허시우. 아직두 어린애구 허니깐, 내가 촉량해서 야숙한 짓은 안 시키구 잘 맡아 뒀다가 도루 내디릴 테니 다아 안심허시구 수히 조처나 허시두룩…….”
 
479
승재는 주인여자가 말이라도 그만큼 해주는 게 여간 마음 든든하지를 않았다. 그는 방금 앉아서 명님이를 서울로 데려다가 제 밑에 두어 두고 간호부 견습을 시키든지, 또 형편이 웬만하면 공부라도 시킬 생각을 해냈던 것이다.
 
480
섬뻑 생각한 것이라도 더할 것 없이 무던했고, 진작 그런 마음을 먹었더라면 양서방한테라도 미리서 말을 했었을 테니, 그네도 참고 기다렸지 이렇게 갖다가 팔아먹진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각다분한 일도 없었으려니 싶어 느긋이 후회도 들었다.
 
481
승재는 주인여자더러 넉넉잡고 두 달 안으로는 돈을 보내 줄 테니 그리 알고 부디 잘 좀 맡아 두었다가 달라는 부탁을 한 뒤에 자리를 일어섰다.
 
482
주인여자는 마루로 따라나오면서 되도록 일을 쉬이 끝내 달라고, 실상 다른 사람이라면 그 동안의 돈 이자 하며 밥값까지도 쳐서 받겠지만, 젊은이가 마음이 하도 어질어서 그게 고마워서 본금 이백 원만 받겠노라고, 하니 그런 근경도 알아서 하루라도 빨리 조처를 해달라고 도리어 신신당부를 한다. 승재는 이 구혈의 이 여자가 그만큼 속이 트이고 인정까지 있는 것이 의외이어서 더욱 고마웠다.
 
483
명님이는 얼굴을 해죽 웃으면서 눈만 통통 부어 가지고 승재를 따라나온다.
 
484
대문간으로 나와서 명님이는 고개를 숙이고 섰고, 승재는 잠시 말없이 명님이를 바라다본다. 인제는 나이 그만해도 열다섯이라고 곱살한 게 제법 처녀 꼴이 드러난다. 이렇게 처녀 꼴이 박힌 명님이를 이곳에다가 두고 가는 일을 생각하면 두 달 동안이라 하더라도, 또 주인여자가 다짐하듯 한 말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결코 마음이 놓이는 건 아니었었다.
 
485
“명님아?”
 
486
승재의 음성은 한량없이 보드랍다. 명님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쳐든다.
 
487
“너, 늘잡구 이 집에서 두 달만 참아라, 응?…… 그럼 그 안에 서울로 데려가 주께.”
 
488
“서울요?”
 
489
무척 반가운지 명님이의 음성은 명랑하다. 그러면서 눈에는 구슬이 어린다.
 
490
명님이는 눈물이 나게 반갑고 고마웠는데, 승재는 이 애가 슬퍼서 울거니 하고 저도 눈물이 글성글성하고 목이 잠긴다.
 
491
“응, 서울…… 그러니깐 참구서 죄꼼만 기대리는 게야? 응?”
 
492
“네에.”
 
493
“어머니 아버지한텐 내 말해 두께시니, 이 집 쥔이 차표 사주믄서 서울루 가라구 하거던 바루 오는 거야?”
 
494
“네에, 그렇지만 어떻게?”
 
495
“혼자 못 온단 말이지?…… 괜찮아…… 이 집에 부탁해서 전보 쳐달라구 할 테니깐, 전보 받구 내가 중간꺼정 마주 오지? 혹시 형편 보아서 내가 내려와두 좋구…… 그러니깐 맘놓구 그리구 울지 않구 잘 있는 거야?”
 
496
“네에.”
 
497
“아버지 오늘 오신댔지? 밤에 오신댔나?”
 
498
“밤인지 몰라두 오늘 꼭…….”
 
499
“응…… 그럼 내, 내일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들르마…… 무엇 가지구 싶은 것 없나? 내일 올 때 사다 주께…….”
 
500
“없어요, 아무것두…….”
 
501
“그럴 리가 있나?…… 가만있자, 내가 생각해 봐서 내일 올 때 아무거구 하나 사다 주께…… 그럼 인젠 들어가.”
 
502
“네에.”
 
503
명님이는 대답은 하고도 그냥 서서 치마 고름만 문다. 승재는 울지 말고 있으란 말을 다시 이르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겨우 돌린다.
 
504
근경이 어쩌면 두 정든 사람끼리 떠나기를 아끼는 것과 흡사하다.
 
505
어느 사이 옅은 황혼이 자욱이 내려, 두 그림자를 도리어 더 뚜렷이 드러내 준다.
【원문】15 식욕의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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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근/현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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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탁류(濁流)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7년 [발표]
 
  사실주의(寫實主義) [분류]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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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