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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류(濁流) ◈
◇ 16 탄력 있는 ‘아침’ ◇
해설   목차 (총 : 19권)     이전 16권 다음
1937.10
채만식
1
탁류(濁流)
 
2
16. 탄력 있는 ‘아침’
 
 
3
계봉이는 제가 거처하는 건넌방에서 아침 출근 채비가 한창이다.
 
4
옷은 마악 갈아입었고, 그 다음에는 언제고 하는 버릇으로 마지막, 거울에다가 바투 얼굴을 대고서 이이, 이빨을 들여다본다. 그리 잘지도 않고 고른 위아랫니가 박속같이 새하얗게 드러난다. 아무것도 없다. 잇념 밑에 빨간 고춧가루 딱지도 박히지 않고, 잇살에 밥찌꺼기도 끼지 않았다.
 
5
소매 끝에서 꺼내 쥐었던 손수건을 도로 집어넣고, 이번에는 방 안을 한 바퀴 휘휘 둘러본다. 방금 벗어 내던진 양말짜박이야 치마야 속옷 들이 여기저기 제멋대로 널려 있다.
 
6
셈든 계집아이가 몸 담그고 있는 방 뒤꼬락서니 하고는 조행에 갑(甲)은 아깝다. 그러나 계봉이 저는 둘러보다가 만족하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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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예츠 나하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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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 베 체 데도 모르는 주제에 독일말 토막을 쌔와린다.
 
9
미상불 뒤가 어수선한 품이 종시 그 대중이지 서부전선처럼 아무 이상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계봉이 저는 나갈 채비에 미진한 게 없다는 뜻이요 하니 오케이라고 했을 것이지만, 요새 그 오케이란 말이 자못 속되대서 이놈이 그럴싸한 대로 응용을 하던 것이다.
 
10
팔걸이시계를 들여다본다. 여덟시에서 십 분이 지났다. 지금 나서서 ××백화점까지 가자면 십 분이 걸리니, 여덟시 반의 출근 정각보다 십 분은 이르다. 그놈 십 분은 동무들과 잡담으로 재미를 본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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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예츠 나하츠!”
 
12
한마디 부르는 흥으로 또 한번 외우면서, 샛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려다 말고 문득 이끌리듯 환히 열어 젖힌 앞문 문지방을 활개 벌려 짚고 서서 하늘을 내다본다.
 
13
꽃이 피느라, 핀 꽃이 지느라 사월 내내 터분하던 하늘이 인제는 말갛게 씻기고 한창 제철이다.
 
14
추녀끝과 앞집 지붕 너머로 조금만 내다보이는 하늘이지만 언제 저랬던가 싶게 코발트 한 빛으로 맑아 있다. 빛이 한 빛으로 푸르기만 하니 단조하여 싫증이 날 것 같아도 볼수록 정신이 들게 신선하여 끝없이 마음이 끌린다. 바람결이 또한 알맞다. 부는지 마는지 자리는 없어도 어디서 새로 싹튼 떡잎의 냄새 없는 향기를 함빡 머금어다가 풍기는 것 같다.
 
15
계봉이는 문지방을 짚고 선 채 정신이 팔린다. 하도 일기가 좋아서 아침에 일어나던 길로 이내 몇 번째 이렇게 내다보곤 하던 참이다.
 
16
옷도 오늘 일기처럼 명랑하게 갈아입었다. 어젯저녁에 형 초봉이가 바늘을 뽑기가 무섭게 부랴부랴 식모한테 한끝을 잡히고 싸악 다려 놓은 새옷이다. 옅은 미색 생수 물겹저고리에 방금 내다뵈는 하늘을 한폭 가위로 오려다가 허리 잡아 두른 듯이 시원한 무색〔水色〕 부사견 치마다.
 
17
옷도 이렇게 곱게 입었으니 침침한 매장(賣場)보다도 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저 햇볕을 쪼이면서, 저 바람을 쏘이면서 어디고 아무 데라도 새싹이 피어오른 숲이 있고, 풀이 자라고 한 야외로 훠얼훨 돌아다니고 싶다. 곧 그러고 싶어서 오금이 우줄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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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생각하니 오늘이 게다가 일요일이다. 그리고 공굘시 내일이 셋째 번 월요일, 쉬는 날이다.
 
19
그게 더 안 되었다. 훨씬 넌지시 한 주일이고 두 주일 후라면 차라리 마음이나 가라앉겠는데, 오늘이 일기가 이리 좋아도 못 놀면서 남 감질만 나게시리 바투 내일이 쉬는 날이라니 약을 올려 주는 것 같아 밉광스럽다.
 
20
승재나 있었으면, 예라 모르겠다고 오늘 하루 비어 때리고서 잡아 앞참을 세우고 하다못해 창경원이라도 갔을 것을 하고 생각하니, 하마 올라왔기 쉬운데 어찌 소식이 없는가 해서 궁금하다.
 
21
“다라라 다라라.”
 
22
‘그루미 선데이’를, 그러나 침울한 게 아니고 명랑하게 부르면서 샛문을 열고 마루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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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이, 나 다녀와요오.”
 
24
“오냐, 늦잖었니?”
 
25
대답을 하면서 초봉이가 안방 앞미닫이를 열다가 황홀하여 눈을 흡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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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저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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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애?…… 하하하하, 좋잖우?”
 
28
계봉이는 한 손으로 치마폭을 가볍게 치켜 잡고 리듬을 두어 빙그르르 돌아서 형이 문턱을 짚고 앉아 올려다보고 웃는 앞에 가 나풋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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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하두 좋길래 호살 좀 하구 싶어서…… 하하하, 좋지?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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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다아 잘 맞구 잘 쌘다.”
 
31
초봉이도 흔연히 같이서 좋아한다. 그러나 그 좋아 보이는 동생의 옷치장이며 무성한 몸매를 곰곰이 바라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이윽고 한 가닥 수심이 피어오른다.
 
32
계봉이는 본시 숙성하기도 하지만, 인제는 나이 벌써 열아홉이라 몸이 빈틈없이 골고루 다 발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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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세워 놓고 보면 팡파짐하니 동근 골반 아래로 쪼옥쪽 곧은 두 다리가 비단양말이 터질 듯 통통하다. 그 두 다리가 어떻게도 실하게 땅을 디디고 섰는지 등뒤에서 느닷없이 칵 떠밀어야 꿈쩍도 않을 것 같다. 어깨도 무슨 유도꾼처럼 네모가 진 것은 아니나 묵지근한 게 퍽 실팍해 보인다. 안으로 옥지 않은 가슴은 유방이 차차 보풀어오르느라고 알아보게 불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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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초봉이와 마주서면 이마 위로 한 치는 솟는다. 그 키가 탐스런 제 체격에 잘 어울린다. 얼굴은 어렸을 때 양편 볼때기로 추욱 처졌던 군살이 다 가시고 전체로 균형이 잡혀서 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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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얼굴이 분이나 연지 기운이 없이 제 혈색 그대로요, 요새 봄볕에 약간 그을러 가무룻한 게 오히려 더 건강해 보인다. 눈은 타기가 없고 총명하나, 자라도 심술은 가시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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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마음 턱 놓고 웃는 입과 잇속은 어렸을 적보다도 더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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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활달하니 개방적인 웃음과, 입이 아무고 무엇이고 다 용납을 하여 사람이 헤플 것 같으면서도 고집 센 콧대와 심술 든 눈이 좀처럼 몸을 붙이기 어렵게시리 옹글지고 맺힌 데가 있어, 결국 그 두 가지의 상극된 품격을 조화를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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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전체로 이렇게 건강하고 균형이 잡혀 훠언한 몸매라 그는 어느 구석 오밀조밀하니 이쁘장스럽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 그저 좋고 탐지어 개중에도 여럿이 있는 데서 떼어 놓고 보면은 선뜻 눈에 들곤 한다.
 
39
초봉이는 이렇게 탐스럽고 좋게 생긴 동생을 둔 것이, 보고 있노라면 볼수록 좋았다. 좋은 데 겨워 혼자만 보기가 아깝고 남한테 두루 자랑을 하고 싶다. 그래서 언제든지 계봉이와 같이서 거리를 나가기를 좋아한다.
 
40
형보가 못 나가게 고시랑거리니까 자주 출입은 못 하지만, 간혹 계봉이도 놀고 하는 날 둘이서 나란히 거리를 걷노라면 젊은 사내들은 물론이요, 늙수그름한 여인네들도 곧잘 계봉이를 눈여겨보곤 한다. 그러다가는 둘을 지나쳐 놓고 나서,
 
41
“아이! 그 색시 좋게두 생겼다!”
 
42
이런 칭찬을 개개들 한다.
 
43
그럴라치면, 초봉이는 동생을 마구 들쳐 업고 우줄거리고 싶게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동생이 그처럼 자랑스럽고 좋기 때문에 일변 걱정도 조만치가 않다.
 
44
초봉이가 보기에는 계봉이의 말하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이며가 도무지 계집애다운 구석이 없고 방자스럽기만 했다.
 
45
언젠가도 아우형제가 앉아서 여자의 정조라는 것을 놓고 서로 우기는데, 초봉이는 요컨대 여자란 것은 정조가 생명과 같이 소중하고 그러니까 한번 정조를 더럽히기 시작하면은 그 여자는 버려진 인생이라고 쓰디쓴 제 체험으로부터 우러난 소리를 하던 것이나, 계봉이는 그와 정반대의 의견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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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정조는 생리의 한 수단이지 결단코 생명의 주재자(主宰者)가 아니요, 그러니까 정조의 순결성이란 건 상대적인 것이어서, 한 여자가 가령 열 번을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그 열 번이 번번이 다 정조적일 수가 있는 것이요, 그리고 설사 어떠한 여자가 생활의 과정상 불가항력이나 또는 본의가 아닌 기회에 정조를 온전히 하지 못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생의 실권(失權)’을 선고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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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제 형을 연구재료삼아서 얻은 계봉이의 주장이었고, 그런데 초봉이는 동생의 그렇듯 외람한 소견을 그것이 바로 행동의 기준인가 하고는, 저 애가 저러다가 분명코 무슨 일을 저지르지 싶어 가슴이 더럭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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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학교나 다녔으면 그래도 더얼 마음이 조이겠는데, 그다지 하고 싶어하던 공부면서 무슨 변덕으로 남자들이 덕실덕실한 백화점을 굳이 다니고 있으니 마치 어린아이가 우물가에서 놀고 있는 것처럼 위태위태해서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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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다가 올 봄으로 접어들어 완구히 성숙한 계봉이의 몸뚱이를 버엉떼엥하면서 힐끗힐끗하는 형보의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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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치를 알아챈 초봉이는 계봉이가 아무 철 없이 어린애처럼 형보와 함부로 장난을 하고 농지거리를 하고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사뭇 감수를 하게시리 가슴이 떨리곤 해서, 그래 근심이요 걱정이던 것이다.
 
51
계봉이가 마악 대뜰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얼굴에다가 밥알을 대래대래 쥐어 바른 송희가 엄마를 밀어 젖히고,
 
52
“암마이!”
 
53
부르면서 께꾸― 하듯이 내다보고 좋아한다. 송희는 계봉이를 무척 따른다.
 
54
“어이구, 우리 송흰가!”
 
55
계봉이는 수선을 피우면서 우르르 달려들어 두 팔을 쩌억 벌린다.
 
56
“……아, 이건 무어야! 점잖은 사람이! 밥알을 사뭇…….”
 
57
“암마이.”
 
58
송희는 위로 두 개와 아래로 세 개가 뾰족하게 솟은 젖니를 하얗게 드러내면서 벙싯 웃고 계봉이한테 덤쑥 안긴다.
 
59
“얘야, 저 새옷 모두 드렌다!”
 
60
형이 방색을 해도 계봉이는 상관 않고,
 
61
“괜찮어요, 괜찮어요!”
 
62
하면서 겅중겅중 우줄거린다.
 
63
“그치? 송희야?”
 
64
“응.”
 
65
송희는 좋아라고 같이서 우줄우줄 뛰고, 계봉이는 쪽쪽 입을 맞춰준다.
 
66
“그까짓 옷이 젤인가? 우리 송희가 젤이지. 그치?”
 
67
“응.”
 
68
“그런데 엄만 괘앤히 시방 그러지?”
 
69
“응.”
 
70
“하하하하, 이건 막둥인가? 대답만 응 응 그러게…….”
 
71
“응.”
 
72
송희가 계봉이를 잘 따르고 계봉이도 송희를 귀애할 뿐더러 끔찍 소중히 하는 줄을 초봉이는 진작부터 몰랐던 것은 아니나, 시방 저희 둘이서 재미나게 노는 양을 곰곰이 보고 있노라니까 어디선지 모르게 문득,
 
73
‘내가 없더래도 너희끼리…….’
 
74
이런 생각이 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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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계봉아?”
 
76
“으응?”
 
77
계봉이는 해뜩 돌아서서 형 앞으로 오고, 송희는 ‘암마이’가 시방 밖으로 나갈 참인 줄 알기 때문에 안고 나가 주지 않고 엄마한테 떼어 놀까 봐서 고개를 파묻고 달라붙는다.
 
78
“나 없어두 괜찮겠구나?”
 
79
초봉이는 속은 어떠한 감회로 용솟음이 쳐도 웃는 낯으로 지나는 말같이 묻는다.
 
80
“언니 없어두? 우리 송희 말이지?”
 
81
“응.”
 
82
“그으럼!”
 
83
계봉이는 미처 형의 눈치를 못 알아채고서 연신 수선을 피우느라고,
 
84
“……그치? 송희야?”
 
85
“응.”
 
86
“엄마 없어두 아마이허구 맘마 먹구, 코 하구, 잉?”
 
87
“응.”
 
88
“하하하아, 이거 봐요, 글쎄…….”
 
89
계봉이는 좋아라고 웃고 돌아서다가, 아뿔싸! 속으로 혀를 찬다. 초봉이가 만족해 웃어도 형용할 수 없이 암담한 빛이 얼굴에 가득 가렸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나는 인제 고만하고 죽어도 뒷근심은 없겠지, 이런 단념의 슬픈 안심이었었다.
 
90
“어이구 언니두!…… 누가 정말루 그랬나 머…… 우리 송희가 엄마가 없으믄 어떡허라구 그래!”
 
91
계봉이는 얼른 이렇게 둘러대면서 철이 없는 체 짐짓 송희와 장난을 친다.
 
92
“……그치? 송희야?”
 
93
“응.”
 
94
“저어, 어디 놀러 가려믄 송희 데리구 같이 가예지?”
 
95
“응.”
 
96
“이거 봐요!…… 그런데 괜히 엄마가 송흴 띠어 놓구 혼자만 창경원 갈 양으로 그러지? 응? 송희야?”
 
97
“응.”
 
98
계봉이는 수선을 피우면서도, 일변 형의 기색을 살피느라고 애를 쓴다.
 
99
초봉이는 눈치 빠른 계봉이가 벌써 속을 알아차리고 황망하여 짐짓 저러거니 생각하면 동기간의 살뜰한 정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배어들어 눈가가 아리다.
 
100
쿠욱 캐액 가래를 들이켜고 내뱉고 하면서, 변소에 갔던 형보가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101
이 형보가 막상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음을 생각할 때 초봉이의 그 슬픈 안심은 그나마 여지없이 바스러지고 만다.
 
102
형보가 저렇게 살아 있는 이상, 가령 내가 죽고 없어진대야 죽은 나는 편할지 몰라도, 뒤에 남은 계봉이와 송희가 형보에게 환을 보게 될 테니 그건 내 고생을 애먼 그 애들한테다 전장시키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계봉이는 아이가 똑똑하기도 하고, 또 경우가 좀 다르기는 하니까 나같이 문문하게 형보의 손아귀에 옭혀들지 않는다고는 할지 모르지만, 형보란 위인이 엉뚱하게 음험하고 악독한 인간인 걸, 장차 어떻게 무슨 짓을 저지르라고 그 애들을 두어 두고서 죽음의 길로 피해 가다니 그건 무가내하로 안 될 말이다.
 
103
‘그러니 나는 잘살기는 고사하고 죽자 해도 죽지도 못하는 인생인가!’
 
104
이렇게 생각하면 막막하여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105
“허어, 오늘은 어째 여왕님께서 이대지 넉장을…….”
 
106
형보는 고의춤을 훑으려 잡고 마룻전에 댈롱 걸터앉으면서 계봉이한테 농을 건넨다.
 
107
“시종무관은 무얼 하구 있는 거야? 여왕님 거동에 신발두 참겨 놀 줄 모르구서…….”
 
108
계봉이가 형보의 툭 불거진 곱사등에다 대고 의젓이 나무라는 것을 형보는 굽신 받아,
 
109
“네에, 거저 죽을 때라 그랬습니다, 끙…….”
 
110
하면서 저편께로 있는 계봉이의 굽 낮은 구두를 집어다가 디딤돌 위에 나란히 놓아 준다.
 
111
“……자아 인전 어서 신읍시구 어서 거동합시지요?”
 
112
“거동이나마나 시종무관이거들랑 구둘 좀 닦아 놓는 게 아니라 저건 무어람!”
 
113
“허어! 그건 죽여두 못 해!”
 
114
“그럼 담박 면직이다!”
 
115
“얘야! 쓰잘디없이 지껄이지 말구 갈 디나 가거라! 괜히 씩둑꺽둑…….”
 
116
초봉이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음성을 모질게 동생더러 지천을 한다.
 
117
“내애 아, 온, 내. 여왕님을 이렇게 몰아셀 디가 있더람! 그치? 송희야.”
 
118
“응.”
 
119
“하하하하, 우리 송희가 젤이다!…… 아 글쎄 요것이…….”
 
120
계봉이는 송희를 입을 쪼옥 맞춰 주고는 형한테다 내려놓는다. 송희는 안 떨어지려고 납작 달라붙다가 그래도 어거지로 떼어 놓으니까는 발버둥을 치면서 떼를 쓴다. 계봉이는 못 잊어서 돌려다보고 얼러 주고 달래 주고 하면서 겨우 대뜰로 내려선다.
 
121
“여왕님이 호사가 혼란하긴 한데 안 된 게 하나 있군?”
 
122
형보가 구두를 신는 계봉이를 토옹통한 다리와 퍼진 허리 밑을 눈으로 더듬고 있다가 한마디 뚱기는 소리다.
 
123
“구두가 낡었단 말이지요?”
 
124
“알어맞히니 그건 용해!”
 
125
“그렇지만 걱정 말아요. 그렇게 안타깝게 구두가 신구 싶으믄 아무 때구 양화부에 가서 한 켤레 집어 신으믄 고만이니…….”
 
126
“그러느니 내가 저기 일류 양화점에 가서 아주 썩 ‘모당’으루 한 켤레 마춰 주까?”
 
127
“흥! 시에미가 오래 살믄 머? 자수물통에 빠져 죽는다구?…… 우리 아저씨 씨두 그런 소리가 나올 입이 있었나?”
 
128
계봉이는 형보더러 별로 아저씨라고 하는 법이 없고, 어쩌다가 비꼬아 줄 때나 씨자 하나를 더 붙여서 ‘아저씨 씨’라고 한다.
 
129
계봉이가 아무리 그렇게 업신여기고 놀려 주고 해도 형보는, 그러나 그저 속없는 놈처럼 허허 웃고 그대로 받아 준다.
 
130
계봉이는 아무 때고 그저 어린 듯이, 철이 없는 듯이, 형보와 함부로 덤비고 시시덕거리고 장난을 하고 하기를 예사로 한다. 이것은 그를 형부(兄夫)로 대접한다거나 나이 어린 처제답게 허물없어하고 따르고 하는 정이거나 그런 것은 물론 아니고, 계봉이는 단지 동물원에 가서 곰이나 원숭이를 집적거려 주고 놀려 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형용부터 괴물로 생긴 형보를 재미삼아 놀려먹고 장난을 하고 하던 것이다. 그를 지극히 경멸하며 속으로 반감을 품은 것은 물론이지만.
 
131
가령, 그새까지는 그다지 다니고 싶어 자발을 하던 기술 방면의 전문학교를 의학전문이고 약학전문이고 맘대로 다닐 기회를 만났으면서도, 또 그 목적으로다가 서울로 올라왔으면서도 그것을 아낌없이 밀어 내던지고서 백화점의 월급 삼십 원짜리 숍걸로 나선 것만 하더라도, 그 지경이 된 형을 뜯어먹고, 그따위 인간 형보에게 빌붙어서 공부를 하는 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132
“여보시우, 우리 여왕나리님…….”
 
133
형보가 다시 지분덕거리는 것을, 계봉이는 구두를 신으면서,
 
134
“여왕두 나린가? 무식한 백성 같으니라구!…… 할 말 있거든 빨리 해요.”
 
135
“그러지 말구, 내가 처제 구두 한 켤레 못 해줄 사람인가?…… 이따가 글러루 갈 테니 같이 가서 썩 멋지게 한 켤레 마쳐 신어요.”
 
136
“걱정 말래두! 내 일 내가 어련히 알어서 하까 뵈?”
 
137
“하아따! 괜헌 고집 쓰지 말구…… 내 이따가 아홉시 파할 때쯤 해서 가께, 잉?”
 
138
“어딜 와?…… 괜히 왔다만 봐라, 미친놈이라구 순살 안 불러 대나.”
 
139
“흐흐, 거 재미있지! 구두 사준다구 순사 불러 대구…… 그래 어디 모처럼 유치장이나 하룻밤 구경할까?”
 
140
“괜히 빈말루 알구서?…… 와서 얼찐거리구 말이나 붙이구 해봐? 담박…….”
 
141
계봉이는 쏘아 주면서 대문간으로 나가 버린다. 초봉이는 울고 떼쓰는 송희도 달랠 생각을 잊고서, 둘이서 수작하는 양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고 돌아앉는다.
 
142
형보는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배포 있이 쭌둑쭌둑하는데, 계봉이는 그 떡심을 받아 내다 못해 꼬장꼬장한 딴 성미를 부리고 마는 것이 그게 장차에 환을 볼 장본인 것만 같았다.
 
143
강강한 놈과 눅진거리는 두 놈이 마주 자꾸 부딪치면, 우선 보매는 강강한 놈이 이겨 내는 것 같지만, 그러는 동안에 속으로 곯아 필경 끝장에 가서는 작신 부지러지고, 그래서 눅진거리는 놈한테 잡치고 말 것이었었다.
 
144
초봉이는 그게 걱정이다. 그러니 이왕 그럴 테거든 계봉이도 그 발딱하는 성미를 부리지 말고서 차라리 마주 끝까지 떡심 있이 바워 내기나 했으면 한다.
 
145
구두를 사주마 하거든, 오냐 사다오, 말로라도 이렇게 받아넘기고, 백화점으로 찾아간다거든, 오냐 오너라, 우리 동무들한테 구경거리 한턱 쓰는 셈이니 기다릴게 제발 좀 오너라, 이렇게 받아넘기고 했으면, 그 당장 겉으로 보기에는 위태로워 조심스럽기는 하겠지만 그게 오히려 뒤가 든든할 것 같았다.
 
146
계봉이가 나가는 뒤태를, 입을 헤벌리고 앉아 멀거니 바라보던 형보는 이윽고 끙 하면서 고의춤을 움켜쥐고 안방으로 들어온다.
 
147
“히히, 히히, 참 좋게 생겼어, 히히.”
 
148
초봉이는 그게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는 했어도 짐짓 모르는 체 더 지껄이지 못하게 하느라고 식모를 불러 들인다. 형보는 식모가 들어와서 밥자리를 훔치고 밥상을 들어내 가기가 바쁘게 털썩 초봉이 앞에 주저앉아,
 
149
“히히히…….”
 
150
하고 그 웃음을 그대로 웃는다. 초봉이는 잔뜩 눈을 흘기다가,
 
151
“미쳤나! 이건 왜 이 모양새야? 꼴 보아 줄 수 없네!”
 
152
“히히, 조오탄 말야! 응? 아주 아주…….”
 
153
“무엇이 좋다구 시방 이 지랄이야?”
 
154
“꼬옥 잘 익은 수밀도야! 그렇지?”
 
155
“비껴나! 보기 싫은 게…….”
 
156
“비어 물면 물이 주울줄 쏟아질 것 같구…….”
 
157
형보는 싯 들여마시다가 침을 한 덤벙이 지르르 흘린다. 그놈을 손등으로 쓱 씻는 게 더 그럴듯하다.
 
158
“……흐벅진 게! 아이구 흐흐, 열아홉 살! 마침 조올 때지!”
 
159
“아, 네가 저엉 이러기냐?”
 
160
“헤에따! 무얼 다아…… 옛날에 요임금 같은 성현두 아황 여영 두 아우 형젤 데리구 살았다는데, 히히.”
 
161
사납게 쏘아보고 있던 초봉이는 이를 악물면서 발끈 주먹을 쥐어 형보의 앙가슴을 미어지라고 내지른다.
 
162
“아이쿠!”
 
163
형보는 뒤로 나가동그라져 가슴을 우리다가 초봉이가 다시 달려들려고 벼르는 몸짓을 보고 대굴대굴 윗목으로 굴러 달아나서 오꼼 일어나 앉는다.
 
164
“헤헤헤헤.”
 
165
형보는 그만 것에는 골을 내지 않는다.
 
166
초봉이는 무엇 집어던질 것을 찾느라고 휘휘 둘러본다.
 
167
“헤헤헤헤, 안 그래 안 그래.”
 
168
“다시두 그따위 소릴 할 테야?”
 
169
“아니 안 그러께…… 히히.”
 
170
“다시두 그따위 소릴 했다만 봐라! 죽여 버릴 테니…….”
 
171
무심코 초봉이는 이 말을 씹어 뱉다가 제 말에 제가 혹해서 눈을 번쩍 뜬다.
 
172
죽일 생각이 나서 죽인다고 한 게 아닌데, 흔히 욕 끝에 나오는 소린데 막상 죽인다고 해놓고 들으니, 아닌게아니라 귀에 솔깃이 당기면서, 정말 죽여 버렸으면 싶은 생각이 솟아나던 것이다. 이것은 초봉이에게 대하여 일변 무서운, 그러나 퍽도 신기한 발견이었었다.
 
173
초봉이가 소피를 보러 가느라고 송희를 내려놓고 나가니까 아직도 떼가 덜 가라앉은 참이라 도로 와 하고 울음을 내놓는다.
 
174
“조 배라먹을 게, 또 빼액 운다!”
 
175
형보는 눈을 흘기면서 혀를 찬다. 초봉이가 없는 새라 제 맘대로 아이를 미워해도 좋았던 것이다.
 
176
“……에이 듣기 싫여! 조 배라먹을 것 잡아가는 귀신은 없나?”
 
177
형보는 아이한테다 주먹질을 하면서 눈을 부릅뜬다. 무서워서 울음을 그치라는 것인데, 아이는 겁을 내어 더 자지러지게 운다.
 
178
“……조게 꼭 에미년을 닮아서 소갈찌두 조 모양이야…….”
 
179
형보는 휘휘 둘러보다가 마침 앞문 앞으로 내려다놓은 경대 위에 있는 빗솔을 집어서 아이한테 쥐어 준다.
 
180
“……옜다, 요거나 처먹구 재랄이나 해라, 배라먹을 것아!”
 
181
송희는 미식미식 울음을 그치고 형보를 말긋말긋 올려다보다가 손에 쥔 빗솔을 슬며시 입으로 가지고 간다.
 
182
칫솔 쓰던 것을, 빗을 치고 살쩍을 쓸고 해서 터럭 틈새기에 비듬이야 기름때야 머리터럭이야가 꼬작꼬작 들이 끼었는데, 그놈을 입에다가 넣고 빨았으니 맛이 고약할밖에.
 
183
송희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그대로 입에 물고 야긋야긋 씹는다. 꼬장물이 시꺼멓게 넘쳐서 턱 아래로 질질 흘러내린다.
 
184
“……쌍통 묘오하다! 어이구 쌔원해라! 거저 빼액빽 울기나 좋아하구, 무엇이구 주동아리에다가 틀어 넣기나 좋아하구, 그러면 다아 그런 맛두 보는 법이니라!”
 
185
형보는 제 말대로 속이 시원해서 연신 욕을 씹어 뱉는다.
 
186
“……맛이 고수하냐? 천하 배라먹을 것! 허천백이 삼신이더냐?…… 대체 조게 어느 놈의 종잘꾸? 응?…… 뉘 놈의 종잘 생판 멕여 길르느라구 내가 요렇게 활활 화풀이두 못 하구 성활 먹는고? 기가 맥혀서, 내 원…….”
 
187
욕을 먹을 줄 모르는 송희는 아무 상관 없이 저만 재미가 나서 그 찝질한 빗솔을 연신 씹고 논다.
 
188
“……조게 뒤어만 졌으면 내가 춤을 한바탕 덩실덩실 추겠구만서두…… 무어 소리 없이 흔적 없이 감짝같이 멕여서 죽여 버릴 약은 없나?”
 
189
초봉이가 마루로 올라서는 기척을 듣고 형보는 시침을 뚜욱 떼고 외면을 한다.
 
190
“아―니, 이 애가!”
 
191
초봉이는 방으로 들어서다가 질겁해서 빗솔을 와락 뺏어 들더니 형보를 잔뜩 노려본다. 송희는 싫다고 떼를 쓰고 방바닥에 가 나가동그라진다.
 
192
“……아이가 이런 걸 쥐어다가 빨아먹어두 못 본 체하구 있어?”
 
193
“뺏으면 또 울라구?”
 
194
“인정머리없는 녀석!”
 
195
“아냐, 아이들이라껀 그렇게 아무것이구 잘 먹어야 몸이 실한 법이야.”
 
196
“듣기 싫여! 수언 도척이 같은 녀석아!”
 
197
“제기! 인전 자식이 성가신 게로군!…… 그렇거들랑 남이나 내줄 것이지, 저럴 일이 아닌데…….”
 
198
“이 녀석아, 그게 내가 널더러 할 소리지 네가 할 소리더냐? 그 녀석이 술척스럽게 사람 여럿 굳히겠네!”
 
199
“괜히, 자식이 구찮을 양이면 아따, 염려 말게…… 내가 동냥하러 온 중놈의 바랑 속에다가라두 집어넣어 주께시니.”
 
200
“이 녀석아, 내가 네 속 모르는 줄 아느냐?…… 네 맘보짱이 어떤지 다아 알구 있단다…… 공중 나 안 놓칠려구 네 자식인 체하지? 흥! 소리 없이 죽여 버리구 싶어두 날 놓칠까 봐서 못 하지? 네 뱃속을 내가 모르는 줄 알구?”
 
201
“알긴 개 ×× 알아? 아마 자네두 아직두 뉘 자식인지 똑똑히 모르니까는 자식이 원수 같은가 버이! 그렇지만 난 소중한 내 자식일세.”
 
202
“얌체는 좋아!”
 
203
“세상에 모듬쇠 자식의 에미라껀 저래 못쓴다는 거야!”
 
204
“무엇이 어째?”
 
205
모듬쇠 자식의 어미란 소리에, 초봉이는 분이 있는 대로 복받쳐올라, 몸부림을 치면서 목청껏 외친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은 가슴에서 칵 막히고 숨길만 가쁘다. 어느결에 눈물이 촬촬 쏟아진다.
 
206
“이놈! 두구 보자!”
 
207
이것은 단순히 입에 붙은 엄포나 분한 끝에 발악만인 것이 아니라, 마침내 형보를 죽이겠다는 결심이 뚜렷이 가슴속에 들어차기 시작한 표적이요, 그 선고라고 할 수가 있던 것이다.
 
208
사실 초봉이는 송희나 계봉이는 말고서 저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자살이 아니면 저절로 밭아 죽었지 형보한테 끝끝내 배겨 낼 수가 없이 되고 만 형편이었었다.
 
209
초봉이는 작년 가을 형보와 같이 살기 시작한 그날부터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잃어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칠 줄을 모르는 형보의 정력에 잡쳐 몸이 또한 말이 아니게 시들었다. 여느때 예삿일로 다투게 되면은, 형보는 기껏해야 빈정거리기나 하고 미운 소리나 하고 하지 웬만해서는 그저 바보처럼 지고 만다. 발길로 걷어채고 등감을 질리고 하는 것쯤 아주 심상히 여기고 달게 받는다. 낮의 형보는 그리하여 늙은 수캐처럼 만만하고 순하다.
 
210
그러나 만일 초봉이가, 드리없는 그의 ‘밤의 요구’에 단 한 번이라도 불응을 하고 보면, 단박 두 눈을 벌컥 뒤집어쓰고 성난 야수와 같이 날뛴다. 꼬집어 뜯고 물어 떼고 하는 건 예사요, 걸핏하면 옆에서 고이 자는 송희를 쥐어박지르고 잡아 내동댕이를 치곤 한다. 그래도 안 들으면 칼을 뽑아 들고 송희게로 초봉이게로 겨누면서 헤번덕거린다.
 
211
필경 초봉이는 지고 말아, 이를 갈면서도 항복을 한다.
 
212
이것은, 그런데 형보의 본디 성질만으로 그러던 것이 아니고, 따라서 처음부터 그러던 것도 아니고, 차라리 초봉이 제가 부지중 그런 버릇을 길러 준 것이라 할 수가 있었다.
 
213
초봉이는 맨 처음 형보와 더불어 밤을 같이 할 때부터 승강을 하고 표독스럽게 굴고 했었고, 한데 그놈을 억지로 굴복시키자니 형보는 자연 ‘사나운 수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14
초봉이는 물론 징그럽고 싫기도 했지만, 일변 그것을 형보한테 대한 앙갚음이거니 하고 우정 그러기도 했던 것인데,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느냐 하면 필경 초봉이 제 자신만 더 큰 해를 보고 만 것이다.
 
215
흉포스런 완력다짐 끝에 따르는 계집의 굴복, 그것에서 형보는 차차로 한 개의 독립한 흥분을 즐겼고, 그것이 쌓여서 미구에는 일종의 사디즘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216
아무튼 그래서, 초봉이는 절망이 마음을 잡쳐 놓듯이 건강도 또한 말할 수 없이 쇠해졌다.
 
217
병 주고 약 주더란 푼수로, 형보는 간유 등속에 강장제하며 한약으로도 좋다는 보제는 골고루 지어다가 제 손수 달여서 먹이고 하기는 해도 종시 초봉이의 피로와 쇠약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218
불과 반년 남짓한 동안이나 초봉이는 아주 볼썽이 없이 바스러졌다. 볼은 깎아 낸 듯 홀쭉하니 그늘이 지고, 눈가로는 푸른 테가 드러났다. 살결은 기름기가 밭고 탄력이 빠져서 낡은 양피(羊皮)같이 시들부들 버슬버슬해졌다. 사지에 맥이 없이 노곤한 게 밤이고 낮이고 눌 자리만 뵌다.
 
219
이렇게 생명이 생리적으로도 좀먹어 들어가는 줄을 초봉이는 저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몰랐다.
 
220
하다가 못 할 값에 형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도록 부스대 볼 생각은 아예 먹지도 않는다. 근거도 없는 단념을, 돌이켜 캐보려고는 않고 운명이거니 하고서 내던져 두던 것이다.
 
221
작년 겨울 그날 밤에 형보더러 두고 보자고 무슨 큰 앙갚음이나 할 듯이 옹글진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그 소리를 하던 그 당장에 벌써 별수없거니 하고 단념부터 했었은즉 말할 것도 없다.
 
222
결국은 두루 절망뿐이다. 절망 가운데서 빤히 내다보이는 얼마 안 남은 목숨을 지탱하고 있기는 괴롭고 지리했다. 그러니 차라리 일찌감치 죽어 버리고나 싶었다. 죽어만 버리면 만사가 다 편할 것이었었다.
 
223
그러나 그러면서도 와락 죽지 못한 것은 송희 때문이다. 소중한 송희를 혼자 두고 나만 편하자고 죽어 버리다니 안 될 말인 것이다.
 
224
그래 막막하여 어쩔 바를 몰랐는데, 계제에 문득 동생 계봉이에게다 송희를 맡기면 내나 다름없이 잘 가축하여 기르겠거니, 따라서 나는 마음을 놓고 죽을 수가 있겠거니 하는 ‘슬픈 안심’을 해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요, 형보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이상 역시 못 할 노릇이라고 그 ‘슬픈 안심’조차 단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225
그러자 거기서 또 마침 한 줄기의 희망은 뻗치어, 형보를 죽이고서, (죽여 버리고서) 내가 죽으면 후환도 없으려니와 나도 편안하리라는 ‘만족한 계획’이 얻어졌던 것이다. 물론 형보를 죽인다면야 제가 죽자던 이유가 절로 소멸되는 것이니까, 가령 형벌을 받는다든지 도망을 간다든지 이러기로 생각을 돌리는 게 당연한 조리겠지만, 그러나 초봉이는 그처럼 둘러 생각을 할 줄은 모른다. 그저 기왕 죽는 길이니 후환마저 없으라고, 형보를 죽이고서 죽는다는 것뿐이다.
 
226
형보는 그리하여, 잠자코 있어도 초봉이의 손에 죽을 신순데, 게다가 입을 모질게 놀려 분까지 돋우어 주었으니, 만약 오늘이라도 어떠한 거조가 난다면 그건 제가 지레 명을 재촉한 노릇이라 하겠다.
 
 
227
××백화점 맨 아래층의 화장품 매장이다.
 
228
위와 안팎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진열장을 뒤쪽 한편만 벽을 의지삼고 좌우와 앞으로 빙 둘러 쌓아 놓은 게 우선 시원하고 정갈스러워 눈에 선뜻 뜨인다.
 
229
진열장 속과 위로는, 형상이 모두 각각이요 색채가 아룽이다룽이기는 하지만 제각기 용기(容器)의 본새랄지 곽의 의장(意匠)이랄지가, 어느것 할 것 없이 섬세하고 아담한 게 여자의 감각을 곧잘 모방한 화장품들이 좀 칙칙하다 하리만큼 그득 들이 쌓였다.
 
230
두 평은 됨직한 진열장 둘레 안에는 그들이 팔고 있는 화장품 못지않게 맵시 말숙말숙한 숍걸이 넷, 모두 그 또래 그 또래들이다.
 
231
계봉이가 있고, 얼굴 둥그스름하니 예쁘장스럽게 생긴 싱글로 깎아올린 단발쟁이가 있고, 코가 오뚝하니 눈도 오꼼 입도 오꼼한 오꼼이가 있고, 얇디얇은 얼굴에다가 주근깨를 과히 발라 놓은 레지가 찰그랑거리고 앉았고…….
 
232
이 가운데 양복 끼끗하게 입고 얼굴 거무테테 함부로 우툴두툴한 사내꼭지가 한 놈, 감히 들어앉아 있음은 매우 참월하다 하겠다. 그러나 남은 화초밭의 괴석이라고 시새움에 밉게 볼는지는 몰라도, 당자는 검인(檢印)의 스탬프를 손에 쥐고, 물건 싸개지의 봉인딱지에다가 주임이라는 제 권위를 꾸욱꾹 찍느라 버티고 있는 맥이다.
 
233
아침 아홉시가 조금 지났고, 문을 방금 연 참이라 손님이라고는 뒷짐지고 이리 끼웃 저리 어릿, 구경 온 시골 사람 몇이지 헤성헤성하다.
 
234
약속한 건 아니지만 손님이 없으니까 모두 레지 앞으로 모여 선다.
 
235
“계봉이 이따가 키네마 안 갈늬?”
 
236
영화를 아직까지는 연애보다도 더 좋다고 주장하는 오꼼이가 계봉이를 꾀던 것이다.
 
237
“글쎄…… 썩 좋은 거라믄…….”
 
238
계봉이는 싫지도 않지만 내키지도 않아서 그쯤 대답을 하는데 오꼼이가 무어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을 레지의 주근깨가 냉큼 내달아,
 
239
“저 계집앤 영화라믄 왜 저렇게 죽구 못살까?”
 
240
하고 미운 소리를 한다.
 
241
“남 참견은! 이년아, 누가 너처럼 밤낮 괴타분하게 소설만 읽구 있더냐?”
 
242
“흥! 소설 읽는 취미를 갖는 건 버젓한 교양이란다!”
 
243
“헌데 좀 저급해!”
 
244
계봉이가 도로 나서서 주근깨를 찝쩍이던 것이다.
 
245
“어째서 이년아, 소설 읽는 게 저급하더냐?”
 
246
“소설 읽는 게 저급하다나? 이 사람 오핼세!”
 
247
“그럼 무엇이 저급하니?”
 
248
“읽는 소설이…….”
 
249
“어쩌니 내가 읽는 소설이 저급하니?”
 
250
“국지관이 소설이 저급하잖구?『×××』이 저급하잖구?…… 그런 것두 예술 축에 끼나?”
 
251
“예술은 다아 무엇 말라비틀어진 게야? 소설이믄 거저 소설이지…….”
 
252
“하하하하, 옳아, 네 말이 옳다. 그래도『추월색』이나『유충렬전』을 안 읽으니 그건 신통하다!”
 
253
“저년이 버르쟁이 없이, 사람 막 놀려!”
 
254
“그게 신통해서, 네 교양 점수 육십 점은 주마, 낙제나 면하라구, 응?…… 그리구 너는…….”
 
255
계봉이는 오꼼이를 손으로 찔벅거리면서 남자 어른들 음성을 흉내내어,
 
256
“……거 아무리 근대적 감각을 향락하기 위해서 그런다구 하더래두 계집아이가 영활 너무 보러 다니며는 뒤통수에 불자(不字)가 붙는 법이다, 응? 알았어? 불량소녀…….”
 
257
“걱정을 말아, 이 계집애야!”
 
258
“요놈!”
 
259
깩 지르는 소리가 무심결에 너무 커서 주임이 주의하라는 뜻으로 빙긋 웃으니까 계봉이는 돌아서서 입을 막는다. 오꼼이와 주근깨가 쌔원한 김에 재그르르 웃는다.
 
260
“무얼들 그래?”
 
261
물건을 파느라고 이야기 참례를 못 했던 단발쟁이가 이리로 오면서, 혹시 제가 웃음거리가 된 것인가 하고, 뚜렛뚜렛한다.
 
262
“그리구 참, 넌 무어냐?”
 
263
계봉이가 또 나서서 단발쟁이의 팔을 잡아 끈다.
 
264
“무어라니?”
 
265
“저 애들 둘은, 하난 문학소녀구, 또 하난 영화광이구, 그런데 넌 무어냔 말이다?…… 연애? 그렇지?”
 
266
“내 온!…… 넌 무어냐?…… 너버틈 말해 봐라!”
 
267
“그래 그래.”
 
268
“옳아, 제가 먼점 말해예지.”
 
269
오꼼이와 주근깨가 한꺼번에 들고 나서고, 단발쟁이가 계봉이를 붙잡으면서 따진다.
 
270
“네가 옳게 연애하지?…… 연애편지가 마구 쏟아지구…….”
 
271
“여드름바가지가 있구…….”
 
272
“소장변호사 영감 계시구…….”
 
273
“하쿠라이 귀공자가 있구…….”
 
274
“대답해라!”
 
275
“그 중 누구냐?”
 
276
“아무튼 연애파는 연애파 갈데없지?”
 
277
오꼼이와 주근깨와 단발쟁이가 서로가람 계봉이를 말대답도 못 하게 몰아 대는 것이다.
 
278
“여드름바가지가 오늘두 하마 올 시간인데…….”
 
279
“소장변호사 영감께선 그새 또 몇 장이나 왔듸?”
 
280
“하하, 편지 첫끝에다가 연애법 제 몇 조라군 안 썼던?”
 
281
“가만있어, 내 말을 들어…….”
 
282
계봉이는 겨우 손을 저어 제지를 시켜 놓고는,
 
283
“……난 피해자야, 피해자…….”
 
284
모두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고 뚜렛뚜렛한다. 계봉이는 다시 남자 어른 목소리로,
 
285
“땅 진 날 밖엘 나오지 않느냐? 자동차가 옆으루 지나가질 않았느냐? 흙탕물을 끼얹질 않았느냐? 옷에 흙탕물이 묻었겠다?…… 그와 마찬가지루 헴 헴, 여드름바가지나 변호사나리나 하쿠라이 귀공자나 그 축들이 어쩌구어쩌구 해서 내가 제군들한테 연애파라구 중상을 받는 것두 즉 말하면 그런 피해란 말야, 응?…… 나는 아무 상관두 없는데 자동차가 흙탕물을 끼얹어 옷을 버려 준 것처럼, 그게 모두 여드름바가지니 변호사니 하쿠라이 귀공자니 하는 것들이 무어냐 하면은, 땅 진 날 남의 새옷에다가 흙탕물을 끼얹고 달아나는 ‘처벌할 수 없는’ 깽들이란 말이야. 그러니깐 제군들두 조심을 해! 잘못하면 약간 흙탕물이 아니라, 바루 바퀴에 치여서 죽거나 병신이 되거나 하기 쉬우니깐…… 알아들어? 아는 사람 손들엇!”
 
286
계봉이 저까지 해서 모두 재그르르 웃는다. 주임도 무어라고 간섭을 못 하고서 히죽히죽 웃는다.
 
287
“그럼 대체 넌 무엇이냐?…… 말을 그렇게 능청맞게 잘하니, 약장수냐?”
 
288
“구세군 전도빤?”
 
289
“무성영화 변사?”
 
290
“나? 난 본시 행동파시다, 행동파…….”
 
291
“행동파라니?”
 
292
계봉이의 말에 주근깨가 먼저 따들고 나선다.
 
293
“행동파 몰라? 사람이 행동하는 거 몰라? 소설은 많이 읽어서 현대적인 체하믄서두 깜깜하구나!”
 
294
“아, 이년아, 그럼 누군 행동하잖구서 밤낮 우두커니 앉었기만 한다더냐?”
 
295
“이 사람, 행동이라니깐 머, 밥 먹구 더블유시 다니구 하품하구 그런 행동인 줄 아나?”
 
296
“그럼 그건 행동 아니구 지랄이더냐?”
 
297
“그런 건 개나 도야지나 그런 짐승들두 할 줄 안다네.”
 
298
마침 주임이 계봉이의 전화를 받아서 넘겨 준다. 계봉이는 전화통에 입을 대면서 바로,
 
299
“언니우?”
 
300
한다. 어쩌다가 형 초봉이가 전화를 거는 외에는 통히 전화라고는 오는 데가 없기 때문에 계봉이는 언제고 그러던 것이다.
 
301
그런데 오늘은 뜻밖에,
 
302
“나야, 나…….”
 
303
하면서 우렁우렁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304
승재가 전화를 걸던 것인데, 계봉이는 승재와는 전화가 처음이라 목소리를 언뜻 분간하지 못했었다.
 
305
“나라니, 내가 누구예요?”
 
306
“남서방이야!”
 
307
“아이머니!…… 난 누구란다구!”
 
308
계봉이는 깜짝 반가워서 주위를 꺼리지 않고 반색을 한다. 등뒤에서는 오꼼이 주근깨 단발쟁이가 서로 치어다보고 웃으면서 눈짓을 한다.
 
309
“……언제 왔수?”
 
310
“오긴 그저께 아침에 당도했는데…….”
 
311
“그러구서 여태 시침을 뚜욱 따구 있었어? 내, 온!”
 
312
“미안허우. 좀 어수선해서…… 그런데 내가 글러루 찾아가두 좋겠지만…….”
 
313
“아냐, 내가 가께. 어디? 아현?”
 
314
“응 저어…….”
 
315
승재는 마포로 가는 전차를 타고 오다가 아현고개 정류장에서 내려서 신촌 나가는 길로 한참 오노라면 바른편 길 옆으로 낡은 이층집이 있고 ‘아현실비의원’이라는 간판이 붙었다고 노순을 자세하게 가르쳐 준다.
 
316
여섯시 반이나 일곱시까지 대가마고 하고서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마침 대기하고 섰던 세 동무가 일제히 공격을 한다.
 
317
“또 하나 생겼구나?”
 
318
“누구냐?”
 
319
“그건 자동차 아니냐? 흙탕물 끼얹는…….”
 
320
마지막의 단발쟁이의 말에 모두 자지러져 웃고, 계봉이도 같이서 웃는다.
 
321
스무 살 안팎의 한참 피어나는 계집아이들이 넷이나 한데 모여 재깔거리고, 그러다가는 탄력 있는 웃음이 대그르르 맑게 구르고, 침침해도 명랑하기란 바깥에 가득 내리는 오월의 햇빛과도 바꾸지 않겠다.
 
322
이윽고 웃음이 그치자 여럿은 계봉이를 다시 몰아 댄다.
 
323
“얘 이년아, 그러구서두 입때 시침을 따구 있어?”
 
324
“누구냐? 대라!”
 
325
“저년이 뚱딴지 같은 년이 의뭉해서…….”
 
326
“그게 행동파가 하는 짓이냐?”
 
327
“개나 도야지두 연애를 하기는 한다더라?”
 
328
“웃구 섰지만 말구서 바른 대루 대라!”
 
329
“인전 제가 할 말이 있어야지!”
 
330
“아니 여보게들…….”
 
331
공격이 너끔한 틈에 계봉이는 비로소 말대꾸를 하고 나선다.
 
332
“……대체 그 사람이 누군 줄 알구서 그러나?”
 
333
“누군 무얼 누구야? 네년의 리베지.”
 
334
주근깨가 윽박질러 주는 말이다.
 
335
“리베?”
 
336
“그럼!”
 
337
“우리 산지기다, 헴…….”
 
338
또 모두들 허리를 잡고 웃는다.
 
339
“대체 어떻게 생긴 동물이냐? 구경이나 한번 시키렴?”
 
340
단발쟁이가 웃음엣말같이 하기는 해도 퍽 궁금한 눈치다.
 
341
“구경했다간 느이들 뒤로 벌떡 나가동그라진다!”
 
342
“그렇게 잘났니?”
 
343
“아―니, 안팎이 모두 고색이 창연해서.”
 
344
“망할 계집애! 누가 그게 그리 대단해서 태클할까 봐?”
 
345
“너 가질늬?”
 
346
“일없어!”
 
347
“행동파 연앤 다르구나? 리베를 키네마 입장권 한 장 선사하듯 동무한테 내주구…… 그게 행동파 특색이냐?”
 
348
오꼼이가 그것도 영화에 껴른 버릇이라 비유를 한다는 게 역시 거기 근리한 말을 쓴다.
 
349
“지당한 말일세! 궐씨(厥氏)가 너무 행동이 낡구두 분명치가 못해서…….”
 
350
“그럼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니구서 네 말대루 하믄 그치가 도야진가 보구나?”
 
351
“가깝지!”
 
352
“저년 보게!…… 내 인제 일를걸?”
 
353
“파쇼라두 좋구 또 하다못해 너처럼 영광이래두, 아무튼 현대적 호흡이 통한 행동이 있어야 말이지! 거저 법이나 먹구, 매달려서 로보트처럼 일이나 허구, 생식(生殖)이나 허구, 그리군 혹시 한다는 게 고색이 창연한 짓이나 하구 있구…….”
 
354
“어느 회사 사무원인 게루구나?”
 
355
“명색이 의사라네!”
 
356
“하주! 여드름바가지나 변호사나 하쿠라이 귀공잘 눈두 안 떠볼 만하구나!”
 
357
“얘들아! 호랭이두 제 말 하믄 온다더니, 왔다 왔다, 저기…….”
 
358
주근깨가 뜅기는 소리에 모두 문간을 돌려다본다. 아닌게아니라 여드름바가지가 어릿어릿 이편으로 걸어오고 있다.
 
359
얼굴에 여드름이 다닥다닥 솟았대서 생긴 별명이다. 모표를 보면 ××고보 학생인데 학교 갈 시간에 백화점으로 연애(?)를 하러 오는 걸 보면 온전치 못한 것은 분명하다.
 
360
나이는 다직해야 열아홉 아니면 그 아래다. 어린애 푼수다.
 
361
그는 지나간 삼월에 ‘아몬 파파야’를 한번 사가더니 그날부터 아침 아홉시 반을 정각삼아 이내 일참을 해 내려왔다. 그것도 처음에는 그런 줄 저런 줄 몰랐다가 얼마 후에야 단발쟁이가 비로소 발견을 했었고, 다시 며칠이 지나서는 계봉이가 과녁인 것까지 드러났다.
 
362
그는 화장품 매장 앞에 서서 얼찐거리다가 계봉이가 대응을 해주면 무엇이고 한 가지 사가지고 가되, 혹시 다른 여자가 나서면 이것저것 뒤지다가는 그냥 돌아서 버리곤 하던 것이다. 그래 그 눈치를 안 뒤로부터는 다른 여자들은 우정 피하고서 계봉이한테다가 민다.
 
363
계봉이는 역시 마다고 않고 처억척 대응을 하면서 (대응이라야 물론 지극히 간단한 것이지만) 슬금슬금 구슬려 주곤 하기도 한다. 그 덕에 여드름바가지는 화장품 매장에다가 적지 않은 심심파적과 이야깃거리를 매일같이 끼쳐 주던 것이다.
 
364
“어서 오십시오!”
 
365
계봉이는 웃던 끝이라 얌전을 내느라고 한참 만에 진열장 앞으로 다가가면서 여점원답게 상냥하게 마중을 한다.
 
366
여드름바가지는 아까 들어올 때 벌써 반은 붉었던 얼굴을 드디어 완전히 빨갛게 달궈 가지고 힐끔 계봉이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도로 숙인다. 여기까지는 그새와 같고 아무 이상이 없다. 그 다음 그는 양복 포켓 속에다가 한 손을 넣고서 이상스럽게 전보다 더 어물어물한다.
 
367
이윽고 포켓에 손을 꿴 채 어릿어릿하면서, 진열장 속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계봉이는 그가 돌아가는 대로 안에서 따라 돌고 있고, 나머지 세 여자는 대체 오늘은 무엇을 사는가 재미삼아 기다린다.
 
368
여드름바가지는 이 귀퉁이에서 저 귀퉁이까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더니 되짚어 가운데께로 올 듯하다가 말고서 손가락으로 진열장 유리 위를 짚어 보인다. 으레 입 대신 손가락질을 하는 게 맨 첨 오던 날부터 하던 버릇이다.
 
369
계봉이가, 그가 짚는 대로 들여다보니, 이십오 원이나 받는 ‘코티’의 향수다.
 
370
계봉이는 이 도련님 아무거나 되는 대로 짚은 것이 멋몰랐습니다고 우스워 죽겠는 것을 참아 가면서 향수를 꺼내 준다.
 
371
여드름바가지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물건을 받아 들고 한참 서서 레테르를 읽는 체하다가 계봉이를 치어다본다. 이건 값이 얼마냔 뜻이다.
 
372
“이십오 원입니다.”
 
373
여드름바가지는 움칫하더니 그래도 부스럭부스럭 십 원짜리 석 장을 꺼내어 향수병에다가 얹어 내민다. 언제든지 십 전짜리 비누 한 개를 사도 빳빳한 십 원짜리만 내놓는 터라 그놈이 석 장이 나왔다고 의아할 것은 없다.
 
374
“고맙습니다!”
 
375
계봉이는 향수와 돈을 받아 들고 레지로 오면서 눈을 찌긋째긋한다. 동무들 모두 웃고 싶어서 입이 옴츠러진다.
 
376
계봉이는 향수를 제 곽에 담고 싸고 해서 검인을 맡아 주근깨가 주는 거스름돈과 표를 얹어다가 내주면서,
 
377
“고맙습니다!”
 
378
하고 한번 더 고개를 까딱한다.
 
379
여드름바가지는 먼저보다 더 떨리는 손을 내밀어 덥석 받아 들고 이내 돌아선다.
 
380
“안녕히 가십시오!”
 
381
계봉이는 등뒤에다가 인사를 하면서 동무들한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얼굴을 돌린다.
 
382
그러자 마침 단발쟁이가 기다렸던 듯이 오르르 달려오더니 여드름바가지가 서서 있던 진열장 위로 또 한층 올려논 진열대 밑에서 조그마해도 볼록한 꽃봉투 하나를 쑥 뽑아 들고 돌아선다. 나머지 두 여자는 손뼉이라도 칠 체세다.
 
383
계봉이는 그것이 여드름바가지가 저한테 주는 양으로 거기다가 놓고 간 편진 줄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번 알아챘다.
 
384
와락, 단발쟁이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 쥔 계봉이는 이어 몸을 돌이키면서 여드름바가지를 찾는다.
 
385
“여보세요? 여보세요, 학생?”
 
386
부르는 소리에 방금 댓 걸음밖에 안 간 여드름바가지는 흠칠 하고 그대로 멈춰 선다.
 
387
“학생, 날 좀 보세요!”
 
388
보란다고 정말 보기만 하라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드름바가지는 겨우 몸을 돌리고 서서 어릿어릿한다.
 
389
“일러루 좀 오세요?”
 
390
계봉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천연덕스런 얼굴로 손을 까분다. 여드름바가지는 비실비실 진열장 앞으로 가까이 와서 고개를 숙이고 선다.
 
391
“이 편지 우체통에다가 넣어 디리까요?”
 
392
계봉이는 뒤로 감추어 가지고 있던 편지를 내밀어 보인다. 앞뒤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것을 계봉이도 비로소 보았다.
 
393
여드름바가지는 학교에서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을 때처럼 두 발을 모으고 고개를 깊이 떨어뜨리고 서서 꼼짝도 않는다. 두 귀밑때기가 유난히 더 새빨갛다.
 
394
“우표딱지야 한 장 빌려 디려두 좋지만, 주소두 안 쓰구 성명두 없구 그래서요…….”
 
395
계봉이는 한 팔을 진열장 위에다 짚어 오도카니 턱을 괴고 편지를 앞뒤로 되작되작 이상하담 하듯 한다. 등뒤에서는 동무들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느라고 킥킥거린다. 마침 딴 손님이 없고 조용한 때기에망정이지 큰 구경거리가 생길 뻔했다.
 
396
“자아, 이거 갖다가 주소 성명 잘 쓰구, 우표딱진 사서 요기다가 똑바루 붙이구, 그래 가지구서 우체통에다가 자알 집어넣으세요, 네?”
 
397
여드름바가지는 편지를 주는 줄 알고 손을 쳐들다가 오믈뜨린다.
 
398
“아, 이런 데다가 내버리구 가시믄 편지가 마요이코가 돼서 저 혼자 울잖어요?”
 
399
이번에는 편지를 내밀어 주어도 모르고 섰다.
 
400
“자요, 이거 가지구 가세요.”
 
401
코앞에다가 바싹 들여대 주니까 채듯 받아 움크려 쥐고 씽하니 달아나 버린다.
 
402
맘껏 소리를 내어 대굴대굴 굴러 가면서라도 웃을 것을 차마 조심들을 하느라 모두 애를 쓴다.
【원문】16 탄력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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