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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류(濁流) ◈
◇ 17 노동(老童) ‘훈련일기(訓戀日記)’ ◇
카탈로그   목차 (총 : 19권)     이전 17권 다음
1937.10
채만식
1
탁류(濁流)
 
2
17. 노동(老童) ‘훈련일기(訓戀日記)’
 
 
3
종일 마음이 들떴던 계봉이는 여섯시가 되자 주임을 엎어 삶아서 쉽사리 수유를 타가지고 이내 백화점을 나섰다. 시방 가면 아무래도 제 시간까지 돌아오게 되지는 못할 테라고 지레 시간이 새로워서, 그러자니 형 초봉이가 걱정하고 기다릴 것이 민망은 했으나 집에 잠깐 들렀다가 도로 나오기보다 승재게를 갈 마음이 더 급했다.
 
4
승재가 일러준 대로 짐작대고 간 것이 미상불 수월하게 찾아낼 수가 있었다.
 
5
계봉이는 급한 마음을 누르는 재미에 집을 둘러보고 하면서 우정 천천히 서둔다.
 
6
명색 병원이라면서 생철지붕에다가 낡은 목제 이층인 것이 계봉이가 생각하던 병원의 위풍과 아주 딴판이고, 우선 집 생김새부터 궁상이 질질 흘렀다. 그러나 막상 당하여 보고서 예상 어그러진 것이 섭섭하기보다도, 여느 혼란스런 병원집이 아니요, 역시 승재 그 사람인 듯이 이런 낡고 빈약한 집이던 것이 그의 체취가 스미는 것 같아 오히려 정답고 구수했다.
 
7
‘십오일부터 병을 보아 드립니다.’
 
8
대단 장황스런 설명을, 분명 승재의 필적으로 굵다랗게 양지에다가 써서 붙인 것을 계봉이는 곰곰이 바라보면서 승재다운 곰상이라고 혼자 미소를 했다.
 
9
사개 틀린 유리 밀창을 드르릉 열기가 바쁘게 클로로 냄새가 함뿍 풍기는 게, 겨우 그래도 병원인가 싶었다. 현관 안에 들어서니 바로 왼쪽으로 변죽 달린 반창이 있고 그 앞에다가 ‘진찰 무료’라고 쓴 목패를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거기가 수부(受付)다.
 
10
복도 하나가 짤막하게 뻗어 들어가다가 그 끝은 좁다란 층계를 타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중간께로 바른편에 가서 간유리창이 닫혔고 그 위에는 ‘진찰실’이라고 거기 역시 아직 먹자국이 싱싱한 팻조각이 가로로 붙었다.
 
11
겉은 하잘것없어도 내부는 둘러볼수록 페인트며 벽의 양회며 바닥의 양탄자며 모두 새것이고 깨끔했다.
 
12
아무 인기척이 없고 괴괴했다. 수부의 창구멍을 똑똑 쳐보아도 대응이 없다.
 
13
무어라고 찾아야 할까 싶어서 망설이고 섰는데 진찰실의 문이 야단스럽게 열리더니 고개 하나가 나온다. 승재다.
 
14
계봉이가 온 것을 본 승재는 히죽 얼굴을 흐트리고,
 
15
“으응! 왔구먼!”
 
16
하면서 이 사람으로서는 격에 맞지 않게 급히 달려나온다. 마음이 다뿍 죄었던 판이라 반가움에 겨워, 저도 모르게 그래졌던 것이겠다.
 
17
승재는 맞닥뜨리 싶게 계봉이게로 바로 달려들더니 쭈적 멈춰 서서는 그 다음에는 어쩔 바를 몰라하다가 요행 계봉이가 내밀어 주는 손을 덤쑥 잡는다.
 
18
둘이는 다 같이 정열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쳐 두근거리는 채 눈과 눈이 서로 맞는다. 말은 없고, 또 필요치도 않다. 숨소리만 높다.
 
19
이윽고 더 참지 못한 계봉이가 상큼 마룻전으로 올라서면서 승재의 가슴을 안고 안겨 든다. 그것이 봄의 암사슴같이 발랄한 몸짓이라면 마주 덤쑥 어깨를 그러안고 지그시 죄는 승재는 우직한 곰이라 하겠다.
 
20
드디어, 그러나 곧 두 입술과 입술은 빈틈도 없이 맞닿는다.
 
21
심장과 심장으로부터 야생의 말과 같이 거칠게 뛰고 솟치던 정열은, 그리하여 흐를 바를 찾음으로써 순간에 포근히 순화(醇化)가 된다.
 
22
병아리는 알에서 까놓으면 바로 모이를 쫄 줄 안다. 미리서 배운 것은 아니다.
 
23
승재 같은 숫보기 무대가 다들리면 포옹을 할 줄 알고 키스를 할 줄 아는 것도 언제 구경인들 했을까마는, 그러니 알에서 갓 나온 병아리가 이내 모이를 쪼아 먹는 재주와 다름이 없는 그런 재줄 게다.
 
24
안에는 물론 저희 둘 외에 아무도 없으니까 단출해서 좋다 하겠지만, 혹시 밖에서 누가 문이나 드르릉 열고 들어서든지 했으면 피차 무색할 노릇이다. 하기야 계봉이의 모친 유씨가 이것을 목도했다면 대단히 만족을 했을 것이다. 병원이라는 게 어찌 꼬락서니가 이러냐고 장히 못마땅해서 이맛살을 찌푸리기는 했겠지만…….
 
25
그리고 또 초봉이가 보았더라도 기뻐했을 것이다. 가령 그 둘이 모르게 돌아서서 저 혼자 눈물을 흘릴 값에, 동생 계봉이가 승재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을, 또 승재 그 사람이 동생 계봉이를 사랑하게 된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질 못했을 것이고, 부랴부랴 서둘러서 결혼 예식을 치르도록 두루 마련도 했을 것이다.
 
26
암만해도 계집아이란 다른 겐지, 계봉이는 모로 비스듬히 외면을 하고 서서 저고리 고름을 야긋야긋 씹는다. 귀밑때기가 아직도 알아보게 붉다. 오히려 사내꼭지라서 승재가 부끄럼을 타지 않는다.
 
27
“절러루 들어가지? 응?”
 
28
“몰랏!”
 
29
“저거.”
 
30
승재는 신발장 안에 새로 그득히 사둔 끌신을 한 켤레 꺼내다가 계봉이 앞에 놓아 주고서 어깨를 가만히 짚는다.
 
31
“자아, 구두 벗구 이거 신구서…….”
 
32
“몰라 몰라! 난 갈래.”
 
33
“저거! 누가 메랬나?”
 
34
“해해해.”
 
35
계봉이는 구두를 마룻바닥에다가 훌렁훌렁 벗어 내던지고 끌신을 꿰는 둥 마는 둥, 쪼루루 복도를 달려 진찰실 앞에 가 서더니 해뜩 돌려다보면서,
 
36
“여기?”
 
37
한다.
 
38
“응.”
 
39
궁상맞게 눈을 끔쩍 고개를 꾸뻑,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 승재는 계봉이가 야단스럽게 벗어 내던진 구두를 집어 한편으로 가지런히 놓는다.
 
40
계봉이는 진찰실로 들어서다가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 승재를 또 해뜩 돌려다보더니 문을 타악 닫아 버린다. 승재가 문을 열래도 안에서 계봉이가 꼭 잡고 안 놓는다.
 
41
“문 열어요, 잉? 나두 들어가게…….”
 
42
“안 돼, 못 들온다누!”
 
43
“거 야단났게? 그럼 어떡허나?”
 
44
“잘못했다구 그래예지.”
 
45
“잘못?”
 
46
“응.”
 
47
“무얼 잘못했나?”
 
48
“저어…….”
 
49
“응.”
 
50
“저어, 몰라 몰라!”
 
51
“저거! 그럼 자, 잘못했―습―니―다―”
 
52
“하하하하아!”
 
53
승재는 문이 열리는 대로 진찰실 안으로 들어선다.
 
54
너댓 평이나 됨직한 방인데, 차리기는 다 제대로 차려 놓았다.
 
55
검정 양탄자를 덮은 진찰 침대, 책장, 기구장, 치료탁, 문서탁, 세면대, 가스 다 제자리에 놓이고,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새것들이다.
 
56
계봉이는 문서탁 앞에 의사 몫으로 놓인 회전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대롱대롱한다. 승재는 멀찍이 있는 걸상을 끌고 와서 탁자 모서리로 계봉이 옆에 다가앉는다.
 
57
둘이는 서로 말끄러미 들여다본다. 무엇이 우스운지는 제 자신들도 모르면서 자꾸 싱긋벙긋 웃는다.
 
58
“그래…….”
 
59
“응!”
 
60
둘이는 아무 뜻도 없는 말을 이윽고 한마디씩 하고 나서는 또 마주보고 웃는다.
 
61
“보지 말아요! 자꾸만…….”
 
62
저도 보면서 계봉이는 이쁜 지천을 한다.
 
63
“보믄 못쓰나?”
 
64
“응.”
 
65
“거 야단났게?…… 헤.”
 
66
“하하아!”
 
67
“좀 점잖어진 줄 알았더니 입때두 장난꾸레기루구면?”
 
68
“몰랏!”
 
69
“인전 죄꼼 점잖어야지?”
 
70
“왜?”
 
71
“어룬이 될 테니깐…….”
 
72
“어룬이?”
 
73
“응, 오늘 절반은 됐구…….”
 
74
“하하하…… 그리구?”
 
75
“그리구 인제, 응?”
 
76
“응.”
 
77
“그리구 인제, 우리 저어…….”
 
78
더듬으면서 승재는 탁자 위에서 철필대를 가지고 노는 계봉이의 손을 꼬옥 덮어 쥔다.
 
79
“……인제 결혼하믄, 헤에…….”
 
80
“겨얼혼?”
 
81
말을 그대로 받아 되뇌면서 잡힌 손을 슬며시 잡아당기는 계봉이의 얼굴은 더 장난꾸러기같이 빈들빈들하기는 해도 결코 장난이 아닌 만만찮은 기색이 완연히 드러난다.
 
82
“……누가 결혼한댔수?”
 
83
승재의 눈 끄먹거리는 얼굴을 빠아꼼 들여다보고 있다가 지성으로 묻는 것이다.
 
84
승재는 그만 뒤통수를 긁고 싶은 상호다.
 
85
“그럼 이게, 오늘 아까…… 장난으로 그랬나?”
 
86
승재가 비슬비슬 떠듬떠듬하는 것을, 계봉이는 냉큼 받아,
 
87
“장난? 누가 또 장난이랬수?”
 
88
그러나 그럴수록 어쩐 영문인지를 몰라 얼떨떨한 건 승재다.
 
89
결혼이라니까 펄쩍 뛰더니, 그럼 시방 이게 연애가 장난이냐니까 더 야단이다. 그런 법도 있나? 결혼 안 할 연애가 장난이 아니라? 장난 아니라 연애를 하면서 결혼은 안 한다?
 
90
승재는 암만 눈을 끔적거리고 머리를 흔들고 해도 모를 소리요,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아 종작을 할 수가 없다.
 
91
“나 좀 봐요, 응?”
 
92
이번에는 계봉이가 저라서 승재의 손을 끌어다가 두 손으로 꽈악 쥐고 조물조물한다. 말소리도 은근하다.
 
93
“……남서방두, 아이 참, 남서방이라구 해선 못쓰지! 뭐라구 하나?…… 남선생?”
 
94
“선생은 무슨 선생! 그냥 그대루 남서방 좋지.”
 
95
“그래두우…… 오 참, 못써 안 돼, 하하하하…… 정말 산지기 같아서 안 돼!”
 
96
“산지기?”
 
97
“하하하!…… 아따, 아까 아침에 절러루 전화 걸잖었수?”
 
98
“응.”
 
99
“동무들한테 들켰다우. 그래 누구냐길래 우리 산지기라구 그랬더니, 하하하하…….”
 
100
“거 좋군, 산지기…… 허허허.”
 
101
“가만있자…… 아이이, 무어라구 불루? 응?”
 
102
“승재…….”
 
103
“승? 재?…… 승재 씨, 그래?…… 건 더 어색한걸?”
 
104
“아따, 부르는 거야 좀 아무려믄 어떻나? 되는 대로 할 거지, 그렇잖어?”
 
105
“그럼 인제 좋은 말 알아낼 때까지만 그대루 남서방이라구 부르께? 응?”
 
106
“응, 그거 좋아.”
 
107
“그거 그러구. 자아, 내 이야기 자세 들우? 응?”
 
108
“응.”
 
109
“저어 남서방이 말이지, 날 좋아하지요?”
 
110
“좋아―하느냐구?”
 
111
“응, 아따 저어 사―랑―하는 거.”
 
112
“으응, 그래서……?”
 
113
“글쎄, 남서방 날 사랑하지요?”
 
114
“건 물어 뭘 하나! 새삼스럽게…….”
 
115
“그렇지?…… 응, 그리구 나두 남서방 사랑허구…… 나, 남서방 사랑하는 줄 알지요?”
 
116
“응.”
 
117
“그렇지?…… 그럼 고만 아니우? 남서방이 날 사랑하구, 내가 남서방 사랑하구, 그게 연애 아니우?”
 
118
“응.”
 
119
“그러니깐 그러믄 충분하구, 충분하니깐 만족해야 않어우?…… 결혼은 달라요!”
 
120
“어떻게?”
 
121
“연앤 정열허구 정열허구가 만나서 하는 게임이구, 그러니깐 연앤 아마추어 셈이구…… 그런데 결혼은 프로페셔널, 직업인 셈이구…….”
 
122
“그럴까! 온…….”
 
123
“그러니깐 이를테면 학문허구 직업허구처럼 다르지…… 누가 꼭 취직하자구만 공불 허우?”
 
124
승재는 모를 소리요, 결혼이 약속 안 되는 정열은 암만해도 불안코 미흡한 것이었었다.
 
125
앞으로 승재의 소견이 어느만큼 트일는지 그것은 미지수이나, 또 계봉이가 장차 어떻게 해서 둘 사이의 이 ‘세기(世紀)의 차이’를 조화라도 시켜 낼는지야 또한 기약하기 어려운 일이나, 시방 당장 보기에는 승재의 주제에 계봉이 같은 계집아이란 게 도시 과분한가 싶다.
 
126
흥이 떨어져 가지고 앉아 있는 승재를 방긋방긋 들여다보고 있던 계봉이는 의자에서 발딱 일어서더니 뒤로 돌아가서 두 팔을 승재의 어깨 너머로 얹고 등에다 몸을 싣는다.
 
127
승재는 양편으로 계봉이의 손을 끌어다가 제 가슴에 포개 잡고 다독다독 다독거린다.
 
128
“남서바앙?”
 
129
바로 귓바퀴에서 정다운 억양이 소곤거린다.
 
130
“응?”
 
131
“노였수?”
 
132
“아―니.”
 
133
“왜 지레 낙심을 해가지군 이럴까? 응? 남서방…… 대답 좀 해봐요!”
 
134
“응.”
 
135
“내가 언제 결혼을 않는다구 그랬나?…… 결혼한단 말을 안 했다구만 그랬지.”
 
136
“……”
 
137
“그러니깐 시방은 이렇게…….”
 
138
보드라운 볼이 수염 끝 비죽비죽 솟은 승재의 볼을 비비면서 음성은 한결 콧소리다.
 
139
“……이렇게 꼬옥 좋아허구, 좋아하니깐 좋잖우? 그리구 결혼은 인제 두구 봐서 응? 이 말 잘 들어요. 연애란 건 원칙적으룬 결혼이란 목적지루 발전해 나가는 본능을 가졌으니깐…… 그러니깐 우리두 무사하게 목적지까지 당도하믄 결혼이 되는 거구, 또 중간에 고장이 생기던지 하는 날이믄 결혼을 못 하는 거구…… 그렇잖우?”
 
140
“그거야 물론…….”
 
141
“거 봐요, 글쎄, 아 내가 낼이라두 갑재기 죽어 버리던지 하믄 그것두 결혼 못 하게 되는 거 아니우?”
 
142
“숭헌 소릴!”
 
143
“하하하…… 그리구 또, 이 담에라두 내가 남서방이 싫여나믄?…… 꼭 싫여나지 말란 법은 없잖우? 응?”
 
144
“글쎄…….”
 
145
“글쎄가 아냐! 글쎄가 아니구, 그러니깐 싫여나믄 결혼 못 하는 거 아니우? 둘 중에 하나가 싫여두 결혼을 하나?”
 
146
“그야 안 되겠지…….”
 
147
“거 봐요!…… 그렇지? 그리구 또…….”
 
148
“또오?”
 
149
승재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이 맑게 웃는다. 시무룩했던 것이 적이 가셨다. 실상 알고 보니 그리 대단스런 조건도 아니던 것이다.
 
150
서편 유리창 위께로 다 넘은 저녁 햇살이 가물가물 들이비친다. 변화라고 하자면 오직 그것뿐, 방 안은 두 사람을 위해 종시 단출하고 조용하다.
 
151
계봉이는 승재가 무엇이 또 있느냐고 고개를 돌려 재우쳐 묻는 눈만 탐탁하여 들여다보다가 웃고 대답을 않는다.
 
152
노상 오늘 처음은 아니라도 사심 없고 산중의 깊은 호수 같아 만년 파문이 일지 않으리 싶게 고요한 눈이다.
 
153
이 눈이 소중하여, 계봉이는 장차 남서방도 마음이 변해서 나를 마다고 하지 말랄 법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하기가, 실상 또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지만, 한갓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계집아이 티를 하느라 로맨스런 본능이랄까, 차마 그 말을 하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그러했지, 눈이 좋대서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믿는 것도 아니요, 그뿐더러 아직은 영원한 사랑을 투정할 마음도 준비되어 있질 않다.
 
154
“아이 참, 그런데 말이우…….”
 
155
계봉이는 도로 제자리로 와서 앉으면서 다른 말로 이야기를 돌린다.
 
156
“……그새 좀 발육이 된 줄 알았더니 이내 그 대중이우?”
 
157
“무엇이?”
 
158
승재는 언뜻 알아듣지 못하고 끄덕끄덕한다.
 
159
“이 짓 말이우, 이 병원…… 글쎄 아무 소용 없대두 무슨 고집일꾸?”
 
160
“소용이 없는 줄은 나두 알긴 아는데…….”
 
161
“알아요? 어이꾸 마구 제법이구려! 하하하……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걸 다아 알았수? 나한테 강을 좀 해봐요.”
 
162
“별것 있나? 가난한 사람두 하두 많구, 병든 사람두 많구 해서, 머…….”
 
163
“안 되겠단 말이지요?”
 
164
“응…… 세상의 인간이 통째루 가난병이 든 것 같아! 그놈 가난병 때문에 모두 환장들을 해서 사방에서 더러운 농이 질질 흐르구…… 에이! 모두 추악하구…….”
 
165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게 어디 그 사람네 죈가, 머…….”
 
166
“죄?”
 
167
“누가 글쎄 가난허구 싶어서 가난하냔 말이우!”
 
168
“가난한 거야 제가 가난한 건데 어떡허나?”
 
169
“글쎄 제가 가난허구 싶어서 가난한 사람이 어딨수?”
 
170
“그거야 사람마다 제가끔 부자루 살구 싶긴 하겠지…….”
 
171
“부자루 사는 건 몰라두 시방 가난한 사람네가 그닥지 가난하던 않을 텐데 분배가 공평털 않어서 그렇다우.”
 
172
“분배? 분배가 공평털 않다구?”
 
173
승재는 그 말의 촉감이 선뜻 그럴싸하니 감칠맛이 있어서 연신 고개를 꺄웃꺄웃 입으로 거푸 뇐다. 그러나 지금의 승재로는 책을 표제만 보는 것 같아 그놈이 가진 매력에 구미는 잔뜩 당겨도 읽지 않은 책인지라 그 표제에 알맞은 내용을 오붓이 한입에 삼키기 좋도록 알아내는 수는 없었다.
 
174
사전에서 떨어져 나온 몇 장의 책장처럼 두서도 없고 빈약한 계봉이의 ‘분배론’은 승재를 입맛이나 나게 했지 머리로 들어간 것은 없고 혼란만 했다.
 
175
“선생님이 있어야겠수, 하하하.”
 
176
계봉이는 그 이상 깊이 들어가서 완전히 설명을 할 자신이 없어 이내 동곳을 빼고 만다.
 
177
“선생님? 글쎄…… 난 이런 생각을 하구 있는데…….”
 
178
“무얼? 어떻게?”
 
179
“큰 화학실험실을 하나 가지구서…….”
 
180
“그건 무얼 하게?”
 
181
“연구…….”
 
182
“연구?”
 
183
“공기 속에 무진장으루 들어 있는 원소를 잡아 가지구…….”
 
184
“응.”
 
185
“아주 값이 헐한 영양물이라던지 옷감이라던지 무엇이구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건 다아 맨들어 내는 그런…….”
 
186
“내, 온!…… 아, 인조견이 암만 헐해두 헐벗는 사람이 수두룩한 건 못 보우?”
 
187
“시방보다 더 헐하게…… 옷 한 벌에 일 전이나 이 전씩 받을 걸루 맨들어 내지?”
 
188
“그건 공상 이상이니깐 고만둬요! 고만두구 자아, 이 짓이 소용 없는 줄 알았으믄서 왜 또 시작은 해요?”
 
189
“그래두 눈으루 보군 차마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별반 소용이 없구 기껏해야 내 맘 하나 질겁자는 노릇인 줄 알긴 알면서두…….”
 
190
“난 몰라요! 결혼하자믄서 날 무얼루 멕여 살릴 텐구?…… 쫄쫄 가난하게 사는 거 나 싫여! 나두 몰라! 머…….”
 
191
계봉이는 응석하듯 쌀쌀 어깨를 내두른다. 승재는 그게 굴져서 히죽이 웃으면서,
 
192
“괜찮어. 이 병원만 가지구두 그리구 인심 써가면서라두 돈은 벌자면 벌 수 있으니깐 머, 넉넉해.”
 
193
“난 몰라! 저 거시키, 우리집 못 봐요? 가난 핑계 대구서 얌체없이 자식이나 팔아먹구, 파렴치!”
 
194
계봉이는 입에 소태를 문 듯이 쓰게 내뱉는다.
 
195
승재는 마침 생각이 나서 올라오던 그 전날 계봉이네 집 가게에 잠깐 들렀었다고 (정주사 내외가 싸움질하던 것은 빼놓고) 본 대로 들은 대로 대강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럭저럭하면 먹고 살아는 가겠더라고 제 의견도 붙여 말했다.
 
196
그러나 계봉이는 형의 소청으로 제가 부탁 편지를 하기는 했지만, 실상 제 소위 ‘파렴치’한 저의 집과는 이미 마음으로 절연을 했던 터라, 그네가 잘산다건 못산다건 아무 주의도 흥미도 끌리지를 않았고, 제 형 초봉이한테 전갈이나 해줄 거리로 귓결에 대강 들어 두기나 한다.
 
197
계봉이한테는 차라리, 명님이를 몸값 갚아 주고서 데려다가 간호부 견습을 시키겠다고 하는 그 간호부란 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나두 좀 하는 샘이 가만히 났다. 이것은 그러나, 승재 옆에 명님이라는 계집아이가 있게 되는 것을 노상 텃세하고 시새워하고 해서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담담한 것은 아니지만…….
 
198
집안과 이미 그러해서 마음으로 절연을 한 계봉이는, 그네가 못 살아가고 있으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혹 잘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장차에 그네와 생활의 교섭을 갖는다거나 더욱이 결혼 전에 장성한 계집아이로서의 몸 의탁을 한다거나 할 의사는 조금도 갖고 있지를 않았다.
 
199
그러고 보니 비록 총명도 하고 다부져 독립자행할 자신과 자긍을 가진 계집아이기는 해도, 때로는 고아답게 몸의 허전함과 그 몸의 허전한 데서 우러나는 명일(明日)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것을 가지고 비관을 하거나 하지를 않고 늘 무엇이 어때서 그럴까 보냐고 싹싹 몽시려 버리고 무시를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제 자신 주의를 하고 않는 여부 없이, 이십 안팎의 계집아이로 결혼과 생활에 대한 명일에의 불안이 노상 없다는 것은 오히려 빈말일 것이다.
 
200
하기야 형 초봉이가 동기간의 살뜰한 우애로 끔찍이 위해 주기는 하나, 초봉이 제 자신부터 앞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니 거기다가 어떠한 기대를 두어 둘 형편도 못 되거니와 되고 안 되고 간에 아예 그리할 생각조차 먹질 않는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그대로 몸을 의탁해서 있는 것도 결백지 않다 하여 제 먹을 벌이를 제가 하느라 직업을 가지기까지 한 터이니…….
 
201
그런데 지금 가진 직업이라는 게 그다지 투철해서 다 자란 계집아이 하나의 앞뒷일을 안심코 보장할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를 못하고 기껏해야 소일거리 푼수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202
그러니 남과도 달라, 일반으로 남들이 그러하듯이 결혼이라는 가장 안전해 보이는 ‘직업’을 방궈 일찌감치 몸 감장을 할 유념이나 할 것이지만, 승재가 결혼 소리를 내놓는다고 오히려 지천을 하던 것이 아니냐.
 
203
계봉이는 결단코, 지레 결혼에로 도피도 하지 않고, 가정이나 남한테 구구히 의탁도 하지 않고 다만 혼자서 젊은 기쁨을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고, 그것을 변하려고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의 한 방편으로서 직업을 실하게 갖자니까 기술이 그립던 것이다.
 
204
“나두 간호부, 응?”
 
205
계봉이는 숫제 손바닥을 내밀고 사탕이라도 조르듯 한다.
 
206
“간호부?”
 
207
승재는 계봉이가 바륵바륵 웃으면서 그러는 것이 장난엣말인 줄 알고 저도 웃기만 한다.
 
208
“왜? 난 못쓰우?”
 
209
“못쓸 건 없지만…….”
 
210
“그런데 왜?”
 
211
“하필 간호부꼬?”
 
212
“해해…… 그럼 약제사? 또오, 의사? 더 좋지 머…… 낼바틈이라두 오께시니 배워 줘요, 응?”
 
213
“안 돼, 소용 없어.”
 
214
“왜?”
 
215
“인제 얼마 안 있어서 시험이 없어지는데, 머…… 그래두…….”
 
216
“어쩌나!”
 
217
“그래두 우리 계봉인 걱정 없어.”
 
218
“정말?”
 
219
“그으럼!”
 
220
“어떻게?”
 
221
“어느 의학전문이나 또오, 약학전문이나 들어갈 시험준빌 하라구.”
 
222
계봉이는 좋아서 금세 입이 벌어지다가 말고 한참 승재를 바라보더니,
 
223
“싫다누!”
 
224
해버린다.
 
225
“싫다니?”
 
226
“싫여!”
 
227
“내가 공부시켜 줘두 챙피한가? 액색한가?”
 
228
“그건 아니지만…….”
 
229
“그런데 왜?…… 응?”
 
230
“싫여!”
 
231
“대체 왜 싫대누?”
 
232
“공부시켜 주는 의리가 연애나 결혼을 간섭할 테니깐…….”
 
233
계봉이는 여전히 웃으면서 승재의 낯꽃을 본다. 승재는 어처구니가 없다고 실소를 하려다가 도리어 입이 뚜우 나온다.
 
234
“쓰잘디없는 소리 말아요. 아무련들 내가 머 그만 공부 못 시켜 줄 사람인가? 내가 공부 좀 시켜 준 값으루 결혼 억지루 하잴까?…… 오온!”
 
235
“남서방은 다아 그렇다지만, 내가 그렇덜 못하믄 어떡허나? 결혼은 할 수가 없는데 결혼으루라두 갚어야 할 의리라믄?”
 
236
“혼동할 필욘 없어.”
 
237
“필요야 없는 줄 알지만 이론보다두 실지가 더 명령적인 걸 어떡허나?”
 
238
마침 전등이 힘없이 들어와서 켜진다. 아직 긴치 않은 광선이다. 그래도 승재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선다.
 
239
“자, 그건 숙제루 둬두구서…… 나허구 여기서 우선 저녁이나 먹더라구?”
 
240
“글쎄…….”
 
241
“무얼 대접하나? 이런 아가씰 상밥집으루 모시구 갈 순 없구, 헤.”
 
242
“상밥? 여관두 안 정했수?”
 
243
“여관은 별것 있나! 더 지저분하지…… 병원 뒤루 조선집이 한 채 따른 게 있어서 자취를 할까 허구 아직 상밥을 먹구 있지.”
 
244
“그 궁상 좀 인전 고만둬요! 자췬 무어구 상밥은 무어야!”
 
245
“그렇거들랑 계봉이가 좀 와서 있어 주지?”
 
246
“그럴까 보다? 재밌을걸!”
 
247
“식모나 하나 두구서…… 오래잖어 명님이두 올라오구 할 테니깐, 동무삼아서…….”
 
248
“하하하! 누가 보믄 결혼했다구 그러게?”
 
249
“헤, 괜찮어. 누이라구 그러지?”
 
250
“누이라구 했다가 결혼은 어떡허나?”
 
251
“어떻나?…… 그런데 웃음엣말이 아니라, 언니 집에 있기가 마땅찮다면서 낼이라두 오게 하지?”
 
252
“언니 띠어 놓구서 나 혼자 나오던 못 해요. 그러기루 들었으믄야 벌써 하숙이라두 잡구 있었게?”
 
253
계봉이는 형 초봉이를 곰곰 생각하고 얼굴을 흐린다.
 
254
승재 역시 초봉이라면 한가닥 감회가 없지 못한 터라, 묵묵히 뒷짐을 지고서 계봉이가 앉았는 등뒤로 뚜벅뚜벅 거닌다.
 
255
계봉이는 이윽고 있다가 몸을 돌리면서 승재의 가운 자락을 잡고 끈다.
 
256
“저어어, 언니두 데리구 같이 오라구 하믄 오지만…….”
 
257
“언니두? 데리구?”
 
258
“왜? 못써?”
 
259
“아아니 못쓴다는 게 아니라…….”
 
260
“그런데 왜?”
 
261
“아냐, 난 아무래두 괜찮지만…….”
 
262
“날 공부시켜 주느니 차라리 그렇게 해줬으믄 착한 남서방이지?”
 
263
“그런 교환조건이야 머…….”
 
264
건성으로 중얼거리면서, 승재는 딴생각을 하느라고 도로 마루청을 오락가락한다.
 
265
승재는 초봉이가 그새 경난해 내려온 사정의 자세한 곡절이랄지, 더구나 시방 생사조차 임의로 할 수 없게끔 절박한 사세인 줄까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266
계봉이가 한번 서신으로 대강 경과를 적어 보내 주기는 했었으나 지극히 간단한 졸가리뿐이어서 그걸로 깊은 정상을 짐작할 재료는 되지 못했었다. 그래 그저 막연하게 불행하거니 해서, 안되었다고, 종차 기회를 보아 달리 새로운 생애를 개척하도록 권면도 하고 두루 주선도 해주고 하려니, 역시 막연은 하나마 준비된 성의가 없던 것은 아니다.
 
267
그런데 막상 이날에 계봉이와 드디어 마음을 허하여 서로 맞터놓고 지내게 된 계제이자, 공교롭다 할는지, 동시에 가서 초봉이를 저희들의 사랑의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인다는 문제가 생기고 본즉 승재로서는 더럭 불길스런 생각이 들지 않질 못했다.
 
268
만약 셋이서 그렇듯 그룹을 이루었다가 서로서로 새에 어떤 새로운 감정의 파문이 일어나 가지고, 그로 하여 필경 착잡한 알력이 생기든지 하고 보면 어떻게 할 것이냐.
 
269
그럴 날이면, 결국은 가서 일껏 구해 주었다는 초봉이한테 도리어 새로운 슬픔과 불행을 갖다가 전장시키게 될 것이 아니냐.
 
270
미상불 그러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캐고 보면, 그것도 그것이지만, 그와 같은 감정의 알력으로 해서 승재 저와 계봉이와의 사랑에 파탈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게 보다 더 절박한 불안이었던 것이다.
 
271
그러나 거기서 한번 더 그 밑을 헤치고 본다면, 또다시 미묘한 심경의 약한 이기심의 갈등이 얽히어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272
승재는 초봉이에게 대한 첫사랑의 기억을 완전히 씻어 버리지는 못한 자다. 물론 그것은 욕망도 없고 미련도 아닌 한낱 가슴에 찍혀져 있는 영상(映像)일 따름이기는 하다. 하지만 소위 첫사랑의 자취라면 마치 어려서 치른 마마자국 같아 좀처럼 가시질 않는 흠집이다.
 
273
흠집일 뿐만 아니라, 가령 몸과 마음은 당장 이글이글 달구어진 새 정열의 도가니 속에서 다 같이 녹고 있으면서도 일변 첫사랑의 자취에서는 연연한 옛 회포가 제 홀로 한가로운 소요를 하는 수가 없지 않다.
 
274
결국 촌 가장자리에 유령이 나와서 배회하듯 ‘사랑의 유령’이지 별수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승재는 아직도 망부(亡父) 아닌 그 사랑의 유령을 가끔 만나 햄릿의 제자 노릇을 일쑤 하곤 했었다. 그럴뿐더러 그는 제 마음을 미루어, 초봉이도 응당 그러하려니 짐작하고 있다.
 
275
이렇듯 제 자신이 저편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고, 저편에서도 그리한 줄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만약 초봉이와 한 울 안에서 조석 상대의 밀접한 생활을 하고 보면, 정이 서로 다시 얽혀 마침내 가장 불쾌한 결과를 보고라야 말게 되지나 않을까 이것이다. 즉 제 자신의 약점을 위험 앞에 드러내 놓기가 조심이 되어 뒤를 내던 것이다.
 
276
승재는 전에도 시방도 그리고 앞으로도 초봉이에게 대한 동정은 잃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이미 뭇 남자의 손에 치어, 정조적으로 순결성을 잃어버린 여자, 초봉이를 갖다가 결혼의 상대로 삼을 의사는 꿈에도 없을 소리다. 하물며 계봉이를 두어 두고서야…… 사내 쳐놓고 고만한 결벽이야 누구는 없을까마는 승재는 가뜩이나 그게 더한데다가 일변 소심하기 또한 다시 없어, 이를테면 시방 해변가의 놀란 조개처럼 다뿍 조가비를 오므리는 양이다.
 
277
계봉이는 종시 오락가락 서성거리는 승재를 잡아다가 제자리에 앉혀 놓고 안존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278
“그때 언니가 서울로 올라오다가 중로에서 박제호를 만나 가지구…….”
 
279
이렇게 거기서부터 시초를 내어…….
 
280
초봉이는 제가 치르던 전후 풍파를 그 동안 여러 차례 두고 동생한테 설파를 했었고, 그래서 계봉이는 그것을 다 그대로 승재에게다 되옮겨 들려주었다. 그리고 작년 가을부터는 직접 제 눈으로 보아 온 터라 장형보의 인물이며, 그와 초봉이와의 부자연한 관계며, 송희에게 대한 초봉이의 지나친 애정이며, 또 요즈음 들어서는 바싹 더 절망이 되어 사선에서 헤매는 정상이며, 그의 심경, 그의 건강, 그리고 송희를 두고 느끼는 형보의 위협과 해독, 이런 것은 차라리 초봉이 자신이 이야기할 수 있는 이상으로 세밀하게 그러나 요령 있게, 잘 설명을 할 수가 있었다.
 
281
한 시간이나 거진 이야기는 길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
 
282
“그러니깐 암만 보아두 눈치가, 송흴 갖다가 장가 녀석의 위협이며 해독에서 구해 낼 겸, 그 앤 내게다 맽기구서 자긴 죽어 버릴 생각인가 봐!”
 
283
하고 목맺힌 소리로 끝을 맽는다.
 
284
승재는 마침내 크게 격동이 되지 않질 못했다. 견우코 미견양(見牛未見羊)의 그 양을 본 심경이라 할는지, 좌우간 해변가의 소심한 조개는 바스티유 함락같이 형세 일변했다.
 
285
이야기를 듣는 동안 승재의 거동은 요란스러웠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가 절절히 감동을 했다가 주먹을 부르쥐고 코를 벌심벌심했다가 마루가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286
그리하다가 마침내 초봉이가 헐수할수없이 자결이라도 하지 않지 못하게 되었다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그만 참지 못해,
 
287
“빌어먹을 놈의!”
 
288
볼먹은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금시로 굵다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놈을 커다란 주먹으로 꾹꾹 씻으면서 두런두런,
 
289
“그런 놈을 갖다가 그냥 두구 본담! 마구 죽여 놓던지…….”
 
290
계봉이는 같이서 흥분하기보다도, 승재의 흥분하는 양이 우스워서, 미소를 드러내고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가로 흔든다.
 
291
“그래두 육법전서가 다아 보호를 해주잖우? 생명을 보호해 주구, 또 재산두 보호해 주구…… 수형법(手形法)이라더냐 그런 게 있어서, 고리대금을 해먹두룩 마련이시구…… 머, 당당한 시민인걸! 천하 악당이라두…….”
 
292
승재는 두 팔을 탁자 위에 세워 턱을 괴고 앉아서 앞을 끄윽 바라다본다. 얼굴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양미간으로 주름살이 세 개 굵다랗게 팬다.
 
293
육법전서가 보호를 해준다고 한 계봉이의 그 말이 방금 승재한테 신선한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비록 ‘라 마르세유’처럼 분명하진 못해도 마치 박하(薄荷)를 들이켠 것 같아 아프리만큼 시원했다.
 
294
승재는 머릿속이 그놈 박하 기운으로 온통 어얼얼, 화아해서 시원하기는 하나, 어디가 어떻다고 꼭 집어낼 수가 없었다. 시방 이맛살을 찌푸려 가면서 생각하기는 그의 중심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295
계봉이는 무얼 저리 생각하는가 싶어 그대로 두어 두고서 저 혼자 손끝으로 탁자 복판을 똑똑, 박자 맞추어 몸을 앞뒤로 가볍게 흔든다.
 
296
이윽고 침묵이 계속된 뒤다. 갑갑했던지 계봉이가 승재의 팔을 잡아당긴다.
 
297
“응?”
 
298
승재는 움칫 놀라다가 비로소 정신이 들어 거기 계봉이가 있음을 웃고 반긴다.
 
299
“……무얼 그렇게 생각해요?”
 
300
“머어, 별것 아냐…… 헌데에…… 자아 언닐 위선 일러루라두 데려 내오는 게 좋겠군?”
 
301
누가 만만히 놓아 준대서까마는 그런 건 상관없고 승재의 말소리며 얼굴은 자못 강경하다. 가슴에 묻은 불이, 아직 그를 바르게 어거해 나갈 ‘의사’가 트이지 않아, 종잇조각 투구에 동강난 나무칼을 휘두르면서 비루먹은 당나귀를 몰아 풍차(風車)로 돌격하는 체세이기는 하나, 초봉이를 뺏어 내어 괴물 장형보를 퇴치시킴으로써 (단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육법전서에게 분풀이를 할 요량인 것만은, 승재로서는 제접한 발육이 아닐 수 없었다.
 
302
“정말? 아이 고마워라!”
 
303
계봉이는 좋아라고 냉큼 일어서더니 아까처럼 승재의 등뒤로 가서 목을 싸안는다.
 
304
“……우리 착한 되련님, 하하하.”
 
305
“저어 이렇게 하더라구?”
 
306
“응, 어떻게?”
 
307
“위선 언니더러 그렇게 하자구 상읠 하구서…….”
 
308
“좋아서 얼른 대답할걸, 머…… 다른 사람두 아니구, 남서방이 들어서 다아 그래 준다는 데야…… 아이 참! 이거 봐요…… 언니가아 시방두우, 응? 남서방을 못 잊겠나 봐?”
 
309
“괜헌 소릴!”
 
310
“아냐, 더러 말말끝에 남서방 이야기가 나오구, 그런 때믄 낯꽃이 여간만 다르질 않아요, 정말…….”
 
311
“그럴 리가 있나!”
 
312
승재는 그렇다면 필경 야단이 아니냐고 잊었던 제 걱정이 도로 도져서 혼자 땅이 꺼진다.
 
313
그러자 계봉이가 별안간,
 
314
“오오, 참…….”
 
315
하면서 승재의 어깨를 쌀쌀 잡아 흔든다.
 
316
“……그렇다구 괘애니, 언니허구 둘이서 도루 어쩌구저쩌구 해가지굴랑, 날 골탕멕였다만 봐?…… 머, 난 몰라 몰라! 머…….”
 
317
“뭘! 계봉인 나허구 결혼두 할는지 말는지, 그렇다면서?”
 
318
“뭐어라구?”
 
319
보풀스럴 것까지는 없어도 방금 응석하던 음성은 아니다.
 
320
계봉이는 승재의 가슴에 드리웠던 팔을 거두고 제자리로 와서 앉는다. 승재는 이건 잘못 건드렸나 보다고, 무색해서 히죽히죽 웃는다. 그러나 승재를 빠끔히 들여다보고 있는 계봉이의 얼굴은 하나도 성난 자리는 없다. 장난꾸러기 같은, 또 어떻게 보면 시뻐하는 것 같은 미소가 입가로 드러날 뿐 아주 천연스럽다.
 
321
“정말이우?”
 
322
“아냐, 아냐. 오해하지 말라구, 해해.”
 
323
“내, 시방이라두 집에 가서 언니 보내 주리까?”
 
324
“아냐! 난 계봉이가 무어래나 보느라구 그랬어.”
 
325
“이거 봐요, 남서방!…… 머 이건 내가 괜히 지덕을 쓰는 것두 아니구 아주 진정으루 하는 말인데…… 난 죄꼼두 거리낄라 말구서 그렇게 해요!…… 언닌 아직까지 남서방을 못 잊는 게 분명하니깐 남서방두 언니한테 옛 맘이 남았거들랑 다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머 아무 걱정두 할라 말구서…….”
 
326
“아니래두 자꾸만!”
 
327
“글쎄, 아니구 무어구는 두구 봐야 하지만, 아무튼지 내 이야긴 참고삼아서라두 들어 봐요, 응?…… 난 왜 그런고 허니 ‘오올 오어 낫싱’, 전부가 아니믄 전무(全無), 응? 사랑을 전부 차지하지 못하느니 조각은 그것마저두 일없다는 거, 알지요?…… 그렇다구 내가 언닐 두구 질투를 하느냐믄 털끝만치두 그런 맘은 없어요. 사실 이건 질투 이전이니깐. 난, 난 말이지, 여러 군디루 분열된 사랑에서 한몫만 얻느니 치사스러 차라리 하나두 안 받구 말아요…… 사랑일 테거들랑 올 하나두 빗나가지 않은 채루 옹근 사랑, 이거래야만 만족할 수 있는 거지, 그러잖군 아무것두 다아 의의(意義)가 없어요. 전체의 주장, 이건 자랑스런 타산이라우, 애정의 타산…….”
 
328
붙일성 없이 쌀쌀한 것도 아니요, 또 격해서 쏟쳐 오르는 폭백도 아니요, 열정은 혀밑에 넌지시 가누고 고삐를 늦추지 않아 차분하니 마침 듣기 좋은, 그래서 오히려 어떤 재미있는 담화 같다.
 
329
승재는 인제는 마음이 흐뭇해서 넓죽한 코를 연신 벌심벌심 입이 절로 자꾸만 히죽히죽 헤벌어진다. 건드려는 놓고도 이 얼뚱아기의 엉뚱스런 정열이 되레 흡족했던 것이다.
 
330
계봉이는 이내 꿈을 꾸는 듯 그 포즈대로 곰곰이 앉아 말을 잇는다.
 
331
“……삼 년! 아니 그 안 해 겨울부터니깐 그리구 내 나이 열여섯 살이었으니깐 햇수루는 사 년이겠지…… 허긴 그때야 철두 안 든 어린앤 걸 무엇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나! 거저 따르기나 했지. 그것이 나두 몰래, 남서방두 모르구, 우린 씨앗 하나를 뿌렸던 게 아니우?…… 그런 뒤루 사 년, 내 키가 자라나구 지각이 들어 가구 그러듯이 그 씨앗두 차차루 자라서 싹이 트구 떡잎이 벌어지구 속잎이 솟아오르구 그래서 뿌리가 백히구 가지가 벋구 한 것이 시방은 한 그루 뚜렷한 남구가 됐구…… 그걸 가만히 생각하믄 퍽 희한스럽기두 허구!…… 신통하잖아요?”
 
332
실상 동의를 구하는 말끝도 아닌 걸, 승재는 제 신에 겨워 흥흥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333
“……그런데 말이지요. 애정이라껀 ‘에네르기 불멸’두 아니구, 또 ‘불가입성’두 아니니깐…… 그샛동안 내가 남서방을 잊어버린다던지, 혹 잊어버리던 않었더래두 달리 한 자리 애정을 길른다던지 그럴 기회가 없으랄 법이 없는 것이지만…… 머 그랬다구 하더래두 그게 배덕의 짓두 아니구…… 그래 아무튼지, 내가 시방 남서방을 온전히 사랑을 하긴 하나 본데, 또 그렇다 해서 그걸 갖다가 무슨 자랑거리루 유세를 하는 건 절대루 아니구, 더구나 빚을 준 것이 아닌 걸 숫제 갚아 달라구 부둥부둥 조를 며리가 있어요? 졸라서 받는 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니깐…….”
 
334
“자알 알았습니다…….”
 
335
승재는 슬며시 쥐고 주무르던 계봉이의 손을 다독다독 다독거려 주면서,
 
336
“……그리구 나두 시방은 계봉이처럼, 응? 저어 거시키…….”
 
337
헤벌씸 웃는 승재의 얼굴을 짯짯이 보고 있던 계봉이는 딴생각이 나서 입술을 빙긋한다.
 
338
역시 기교가 무대요 사람이 진국인 데는 틀림이 없으나, 그 안면근육의 움직이는 양이 어떻게도 둔한지 바보스럽기 다시 없어 보였다.
 
339
그러니 그저 사범과 출신으로 시골 보통학교에서 십 년만 속을 썩힌 메주같이 생긴 올드 미스가 이 사람한테는 꼬옥 마침감이요, 그런 자리에다가 중매나 세워 눈 딱 감고 장가나 들 잡이지 도시의 연애란 과한 부담이겠다고,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혼자 웃던 것이다.
 
340
계봉이는 신경도 제 건강과 한가지로 건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현대적인 지혜를 실한 신경으로 휘고 삭이고 해서 총명을 길러 간다.
 
341
만약 그렇지 않고서 지혜에 좀먹힌 말초신경적인 폐결핵 타입의 영양(令孃)이었다면 (하기야 그렇게 생긴 계집애는 아직은 없고 이 고장의 지드나 발레리의 종자(從者)들이 쓰는 소설 가운데서 더러 구경을 할 따름이지만, 그러므로 가사 말이다) 그렇듯 우둔하고 바보스런 승재의 안면 근육은 아예 그만한 풍자나 비판으로는 결말이 나질 않았을 것이다.
 
342
분명코 그 아가씨는 템씨나, 또 동물원의 하마(河馬) 같은 걸 구경할 때처럼 승재에게서도 병든 신경의 괴상한 흥분을 맛보았기 아니면, 야만이라고 싫증을 내어 대문 밖으로 몰아 냈기가 십상이었을 것이다.
 
343
그러나 그렇다고 또, 계봉이는 그러면 마치 엊그제 갓 시집온 촌색시가 중학교에 다니는 까까중이 새서방의 다 떨어진 고쿠라 양복을 비단치마와 한가지로 양복장 속에다가 소중히 걸어 놓듯 그렇게 촌스럽게 승재를 위하고 그가 하는 짓은 방귀도 단내가 나고 이럴 지경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344
그런 둔한 떠받이도 아니요, 또 말초신경적인 병적 감상도 아니요, 계봉이는 극히 노멀하게 비판해서 승재의 부족한 곳을 다 알고 있다.
 
345
안팎이 모두 고색이 창연하고, 우물우물하고 굼뜨고, 무르고, 주변성 없고, 궁상스럽고, 유치하고 그리고 또 연애라니까 단박 결혼 청첩이라도 박으러 나설 쑥이고…… 등속이다. 이러해서 저와는 세기(世紀)가 다른 줄까지도 계봉이는 모르는 게 아니다. 그렇건만 계집아이의 첫사랑이라는 게 (첫사랑이 풋사랑이라면서) 그게 수월찮이 맹랑하여, 길목버선에 비단 스타킹 격의 무서운 아베크를 창조해 놓았던 것이요, 그놈이 그래도 아직은 (남들이야 흉을 보거나 말거나) 저희는 좋아서 희희낙락 대단히 유쾌하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346
초봉이의 일 상의를 하느라 이야기는 다시 길어서, 여덟시가 지난 뒤에야 둘이는 같이서 종로까지 나가기로 자리를 일어섰다. 근처에서 매식이 변변칠 못하니 종로로 나가서 저녁도 먹을 겸, 저녁을 먹고 나서는 그 길로 초봉이를 만나러 가기로…….
 
347
초봉이와는 셋이 앉아 미리 당자의 의견도 듣고 상의도 하고 그런 뒤에 형편을 보아, 그 당장이고 혹은 내일이고 승재가 형보를 대면하여 우선 온건하게 담판을 할 것, 그래서 요행 순리로 들으면 좋고, 만약 안 들으면 그때는 달리 무슨 방도로 구처할 것, 이렇게 얼추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다.
 
348
무름하기란 다시 없는 소리요, 그뿐 아니라 온건히 담판을 하겠다고 승재가 형보한테 선을 뵈다니 긴치 않은 짓이다. 형보가 누구라고 온건한 담판은 말고 백날 제 앞에 꿇어앉아 비선을 해도 들어줄 리 없는 걸, 그러고 완력다짐을 한댔자 별반 잇속이 없을 것인즉, 그 다음에는 몰래 빼다가 숨겨 두는 것뿐인데, 그렇다면 승재까지 낯알음을 주어서 장차에 눈 뒤집어쓰고 찾아다닐 형보에게 들킬 위험만 덧들이다니…….
 
349
이 계책은 대체로 계봉이의 의견을 승재가 멋모르고 동의한 것이다. 계봉이는 물론 승재보다야 실물적으로 형보라는 인물을 잘 알기 때문에 좀더 진중하고도 다부진 첫 잡도리를 하고 싶기는 했으나, 섬뻑 좋은 꾀가 생각이 나지를 않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선 그렇게 해보되 약차하면 기운 센 승재가 주먹으로라도 해대려니 하는 아기 같은 안심이었던 것이다.
 
350
어깨가 자꾸만 우줄거려지는 것을 진득이 누르고, 승재는 가운을 벗고서 양복 저고리를 바꿔 입는다. 갈데없는 검정 서지의 쓰메에리 양복 그놈이다.
 
351
계봉이는 바라보고 섰다가 빙긋 웃는다. 승재도 그 속을 알고 히죽 웃는다.
 
352
“저 주젤 언제나 좀 면허우?”
 
353
“응, 가만있어. 다아 수가 있으니…….”
 
354
승재는 모자를 떼어다 얹고 나서고 계봉이는 그의 어깨에 가 매달리면서,
 
355
“수는 무슨 수가 있다구!…… 그러지 말구, 응? 이거 봐요.”
 
356
“응.”
 
357
“선생님 됐으니깐 나한테 턱을 한탁 해요!”
 
358
“턱을 하라구?…… 하지, 머.”
 
359
“꼬옥?”
 
360
“아무렴!”
 
361
“내가 시키는 대루?”
 
362
“응.”
 
363
“옳지 됐어…… 인제 시방 나간 길에 양복점에 들러서 갈라 붙인 새 양복 한 벌 맞춰요, 응?”
 
364
“아, 그거?…… 건 글쎄 한 벌 생겼어.”
 
365
“생겼어? 저어거!…… 그런데 왜 안 입우?”
 
366
“아직 더얼 돼서…… 여기 강씨가, 이거 병원 같이 하는 강씨가, 고쓰가이 같다구 못쓰겠다구, 헤에…… 그래 축하 겸 자기가 한벌 선사한다나? 헤.”
 
367
“오옳아…… 난두 그럼 무어 선살 해예지? 무얼 허나? 넥타이? 와이샤쓰?”
 
368
“괜찮아. 계봉인 아무것두 선사 안 해두 좋아.”
 
369
“어이구 왜 그래!”
 
370
“그럼 꼭 해야 하나? 그렇거들랑 아무거구 값 헐한 걸루다가 한 가지…….”
 
371
“넥타일 할 테야, 아주 훠언한 놈으로…… 하하하하, 넥타이 매구 갈라 붙인 양복 입구, 아이 그렇게 채리구 나선 거 어서 좀 봤으믄! 응? 언제 돼요? 양복.”
 
372
“내일 아침 일찍 가져온다구 했는데…….”
 
373
“낼 아침? 아이 좋아!”
 
374
계봉이는 아기처럼 우줄거린다. 승재는 나갈 채비로 유리창을 이놈저놈 단속하고 다닌다.
 
375
“그럼 이거 봐요, 낼, 낼이 마침 나두 쉬는 날이구 허니깐, 응?”
 
376
“놀러 가자구?”
 
377
“응…… 새 양복 싸악 갈아입구, 저어기…….”
 
378
“저어기가 어딘가?”
 
379
“저어기 아무 디나 시외루…….”
 
380
“거, 좋지!”
 
381
“하하, 새 양복 입구 ‘아미’ 데리구, 오월달 날 좋은 날 시외루 놀러가구, 하하 남서방 큰일났네!”
 
382
“큰일? 거 참 큰일은 큰일이군…… 그러구저러구 내일 그렇게 놀러 나가게 될는지 모르겠군.”
 
383
“왜?”
 
384
“오늘 낼이라두 언니 일을 서둘게 되면…….”
 
385
“그거야 일이 생기믄 못 가는 거지만…… 그러니깐 봐서 낼 아무 일두 없겠으믄 말이지…… 옳아 참, 언니두 데리구 송희두, 송흰 남서방이 업구 가구, 하하하하.”
 
386
계봉이는 허리를 잡고 웃고, 승재도 소처럼 웃는다. 조금만 우스워도 많이 웃을 때들이기야 하다.
 
387
승재는 진찰실 문을 밖으로 잠그느라고 한참 꾸물거리다가 겨우 돌아선다.
 
388
“내가 애길 업구 간다?…… 건 정말루 고쓰가이 같으라구? 헤헤.”
 
389
사실은 그렇게 하고 나서면 고쓰가이가 아니라 짜장 초봉이와 짝이 된 애아비의 시늉이려니 해서 불길스런 압박감이 드는 것을, 제 딴에는 농담으로 눙치던 것이다.
 
390
이렇게 소심하고 인색스런 데다 대면 계봉이는 오히려 대범하여, 그런 좀스런 걱정은 않고 노염도 인제는 타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승재의 그 말을 받아 얼핏,
 
391
“고쓰가이 같은가? 머, 애기 아버지 같을 테지, 하하하.”
 
392
하면서 이상이다. 계봉이가 이렇게 털어놓는 바람에 승재도 할 수 없이 파탈이 되어,
 
393
“애기 아버지면 더 야단나게? 누구 울라구?”
 
394
하고 짐짓 한술 더 뜬다. 그러나 되레 되잡혀,
 
395
“날 울리믄 요옹태지!…… 난 차라리 우리 송희가 남서방같이 착한 파파라두 생겼으믄 좋겠어!”
 
396
“연앨 갖다가 게임이라더니 암만해두 장난을 하나 봐!”
 
397
승재는 구두를 꺼내면서 혼자 두런거리고, 계봉이는 지성으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398
“왜? 소내기 맞었수? 무얼 자꾸만 쑹얼쑹얼허우?”
 
399
“장난하긴 아냐!”
 
400
“네에, 단연코 장난이 아닙니다아요! 되렌님.”
 
401
“그럼 무어구?”
 
402
“칼모틴형이나 수도원형이 아닐 뿐이지요. 칼모틴형 알아요? 실연허구서 칼모틴 신세지는 거…… 또, 수도원형은 수녀살이 가는 거.”
 
403
“대체 알기두 잘은 알구, 말두 묘하겐 만들어 댄다! 원 어디서 모두 그렇게 배웠누?”
 
404
승재는 어이가 없다고 뻐언히 서서 웃는다.
 
405
“하하하…… 그런데 그건 그거구, 따루 말이우, 따루 말인데, 우리 송희가 남서방 같은 좋은 파파가 있다믄 정말 졸 거야! 인제 이따가라두 보우마는 고놈이 어떻게 이쁘다구!”
 
406
“그런가!”
 
407
“인제 가서 봐요! 남서방두 담박 이뻐서 마구…….”
 
408
“계봉이두 그 앨 그렇게 이뻐하나?”
 
409
“이뻐하기만!…… 아 고놈이 글쎄 생기기두 이쁘디이쁘게 생긴 놈이 게다가 이쁜 짓만 골고루 하는 걸, 안 이뻐허구 어떡허우!”
 
410
“그럼 이쁘게두 생기덜 않구 이쁜 짓두 하덜 않구 그랬으면 미워하겠네?”
 
411
“그거야 묻잖어두 이쁘게 생기구 이쁜 짓을 허구 하니깐 이뻐하는 거지, 머…… 우리 병주 총각 못 보우? 생긴 게 찌락소 같은 되련님이 그 값 하느라구 세상 미운 짓은 다아 허구 다니구…… 그러니깐 내가 그 앤 어디 이뻐해요?”
 
412
“그건 좀 박절하잖나! 동기간에…….”
 
413
“딴청을 하네! 동기간의 정은 또 다른 거 아니우? 미워해두 동기간의 정은 있는 거구, 남의 집 아이면은 정은 없어두 이뻐할 순 있는 것이구…….”
 
414
“그럼 그 앤?…… 머, 이름이 송희?”
 
415
“응, 송희…… 송흰 내가 이뻐두 허구, 정두 들었구, 두 가지루 다아…… 그러니깐 글쎄 그걸 알구서, 언니가 그 앨 날만 믿구, 자기는 죽는다는 거 아니우?”
 
416
“허어!”
 
417
승재는 새삼스럽게 감동을 하면서, 우두커니 섰다가 혼자 말하듯,
 
418
“쯧쯧!…… 그래, 필경은 그 애를, 자식을 위해선 내 생명까지두 아깝덜 않다! 목숨을 버려 가면서라두 자식을! 응, 응…… 거 원, 모성애라께 그렇게두 철두철미하구 골똘하단 말인가!”
 
419
“우리 언닌 사정이 특수하기두 하지만, 그런데 참…….”
 
420
계봉이는 문득 다른 생각이 나서,
 
421
“세상에 부모가, 그 중에서두 어머니가, 어머니라두 우리 어머닌 예외지만…… 항용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거란 퍽두 끔찍한 건데, 그런데 말이지, 그런 소중한 모성애가 이 세상의 일반 인간들한텐 과분한 것 같어! 도야지한테 진주라까?”
 
422
“건 또 웬 소리?”
 
423
승재는 문을 열다가 돌아서서 계봉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대체 너는 어쩌면 그렇게 당돌한 소리만 골라 가면서 하고 있느냔 얼굴이다.
 
424
“어서 나가요! 가믄서 이얘긴 못 하나?”
 
425
계봉이는 제가 문을 드르릉 열고 승재를 밀어 낸다.
 
426
집 안보다도 훨씬 훈훈하여 안김새 그럴싸한 밤이 바로 문 밖에서 잡답한 거리로 더불어 두 사람을 맞는다.
 
427
이 거리는, 이 거리를 끼고서 좌우로 오막살이집이 총총 박힌 애오개 땅 백성들의 바쁘기만 하지 지지리 가난한 생활을 고대로 드러내느라고, 박절스럽게도 좁은 길목이 메워질 듯 들이 붐빈다.
 
428
승재와 계봉이는 단둘이만 조용한 방 안에서 흥분해 있다가 갑자기 분잡한 거리로 나와서 그런지 기분이 헤식어 한동안 말이 없이 걷기만 한다.
 
429
“그런데 저어 거시키…….”
 
430
이윽고 승재가 말을 내더니 그나마 떠듬, 떠듬,
 
431
“……저어 우리 이얘길, 걸, 어떡헐꼬?”
 
432
“무얼.”
 
433
“이따가 집에 가서 말야…….”
 
434
“언니더러 말이지요? 우리 이얘기 말 아니우!”
 
435
“응.”
 
436
“너무 부전스럽잖어? 더 큰 일이 앞챘는데…….”
 
437
“글쎄…….”
 
438
승재도 그걸 생각하던 터라 우기지는 못하고 속만 걸려 한다.
 
439
초봉이가 요행 이런 눈치 저런 눈치 몰랐다 하더라도, 승재를 마음에 두거나 그럼이 없이 오로지 장형보의 손아귀를 벗어져 나올 그 일념만 가지고서 계봉이와 승재 저희들의 권면과 계획을 좇아 거사를 한다면은 물론 아무것도 뒤돌아볼 일은 없을 것이다.
 
440
그러나 만약 초봉이가 저희들 승재와 계봉이와의 오늘의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일변 승재의 단순한 호의를 잘못 해석을 하고서 그에게 어떤 분명한 마음의 포즈를 덧들여 갖든지 하고 볼 양이면, 사실 또 그러하기도 십상일 것이고 하니, 그건 부질없이 희망을 주어 놓고서 이내 다시 낙망을 시키는 잔인스런 노릇이 아닐 수 없대서, 그래 승재는 아까와 달라 제 걱정 제 사폐는 초탈하고 순전히 초봉이만 여겨서의 원념을 놓지 못하던 것이다.
 
441
덩치 큰 나그네, 자동차 한 대가 염치도 없이 이 좁은 길목으로 비비 뚫고 부둥부둥 들어오는 바람에 승재와 계봉이는 다른 행인들과 같이 가게의 처마 밑으로 길을 비껴서서 아닌 경의를 표한다. 문명한 자동차도 분명코 이 거리에서만은 야만스런 폭한이 아닐 수가 없었다.
 
442
자동차를 비껴 보내고 마악 도로 나서려니까, 이번에는 상점의 꼬마동인지 조그마한 아이놈이 사람 붐빈 틈을 서커스하듯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다가 휘파람을 쟁그랍게 휘익,
 
443
“좋구나!”
 
444
소리를 치면서 해뜩해뜩 달아나고 있다.
 
445
승재는 히죽 웃고, 계봉이는 고놈이 괘씸하다고 눈을 흘기면서,
 
446
“저런 것두 ‘독초’감이야!”
 
447
하다가 그 결에 아까 중판멘 이야기끝이 생각이 나서,
 
448
“……아까 참, 모성애 그 이야기하다가 말았겠다?…… 이거 월사금 단단히 받아야지 안 되겠수! 하하.”
 
449
“그래 학설을 들어 봐서…….”
 
450
“하하, 학설은 좀 황송합니다마는…… 아무튼 그런데, 그 모성애라께 퍽 참 거룩허구, 그래서 애정 가운데선 으뜸가는 거 아니우?”
 
451
“그렇지…….”
 
452
“그렇지요?…… 그런데, 가령 아무나 이 세상 인간을 하나 잡아다가 놓구 보거던요? 손쉽게 장형보가 좋겠지…… 그래, 이 장형보를 놓구 보는데, 그 사람두 어려서는 저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구 자랐을 게 아니우?…… 자식이 암만 병신천치라두 남의 어머닌 대개 제 자식은 사랑하구 소중해하구 하잖어요? 되려 병신일수룩 애차랍다구서 더 사랑을 하는 법이 아니우?”
 
453
“그건 사실이야…….”
 
454
“그러니깐 장형보두 저이 어머니의 살뜰한 사랑을 받었을 건 분명허잖우? 그런데 그 장형보라는 인간이 시방 무어냐 하믄 천하 악인이요, 아무짝에두 쓸데가 없구 그러니 독초, 독초라구 할 것밖에 더 있수? 독초…… 큰 공력에 좋은 비료를 빨아먹구 자란 독초…… 그런데 글쎄 이 세상에 장형보말구두 그런 독초가 얼마나 많수? 그러니 가만히 생각하믄 소중한 모성애가 아깝잖어요?…… 이건 참 죄루 갈 소리지만 우리 언니가 그렇게두 사랑하는 송희, 생명까지 바치자구 드는 송희, 그 애가 아녈 말루 인제 자라서 어떤 독초가 안 된다구는 누가 장담을 허우?”
 
455
“계봉인 단명하겠어!”
 
456
승재는 말을 더 못 하게 것지르면서 어느새 당도한 전차 안전지대로 올라선다. 그건 그러나 아기더러 끔찍스런 입을 놀린대서 지천이지, 그의 ‘육법전서’ 연구에 돌연 광명을 던져 주는 새 어휘(형보 같은 인물을 ‘독초’라고 지적한), 그 어휘를 나무란 것은 아니다.
 
457
승재와 계봉이는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내려, 바로 빌딩의 식당으로 올라갔다.
 
458
계봉이도 시장은 했지만 배가 고프다 못해 허리가 꼬부라졌다.
 
459
모처럼 둘이 마주앉아서 먹는 저녁이다. 둘이 다 같이 군산 있을 적에 계봉이가 승재를 찾아와서 밥을 지어 준다는 게 생쌀밥을 해놓고, 그래도 그 밥이 맛이 있다고 다꾸앙쪽을 반찬삼아 달게 먹곤 하던 그 뒤로는 반년 넘겨 오늘 밤 처음이다.
 
460
그런 이야기를 해가면서 둘이는 저녁밥을, 한 끼의 저녁밥이기보다 생활의 즐거운 한 토막을 누리었다.
 
461
둘이 다 건강한 몸에 시장한 끝이요, 또 아무 근심 없이 유쾌한 시간이라 많이 먹었다. 승재는 분명 두 사람 몫은 실히 되게 먹었다.
 
462
그리 급히 서둘 것도 없고 천천히 저녁을 마친 뒤에, 또 천천히 거리로 나섰다.
 
463
배도 불렀다. 연애도 바깥의 트인 대기에 인제는 낯가림을 않는다. 거리도 야속하게만 마음을 바쁘게 하는 애오개는 아니다.
 
464
훈훈하되 시원할 필요가 없고 마악 좋은 오월의 밤이라 밤이 또한 좋다. 아홉시가 좀 지났다고는 하나 해가 긴 절기라 아직 초저녁이어서 더욱 좋다. 승재와 계봉이는 저편의 빡빡한 야시를 피해 이쪽 화신 앞으로 건너서서 동관을 바라보고 한가히 걷는다.
 
465
제법 박력 있이 창공으로 검게 솟은 빌딩의 압기를 즐기면서, 레일을 으깨는 철(鐵)의 포효와 도시다운 온갖 소음으로 정신 아득한 거리를 유유히 걷고 있는 ‘연애’는 외계가 그처럼 무겁고 요란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마음 아늑했다. 더구나 불빛 드리운 포도 위로 앞에도 뒤에도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으로 늘비하여 번거롭다면 더할 수 없이 번거롭지만, 마음이 취한 두 사람에게는 어느 전설의 땅을 온 것처럼 꿈속 같았다.
 
466
그랬기 때문에 승재나 계봉이나 다 같이 남은 남녀가 쌍지어 나섰으면 둘이의 차림새에 그다지 층이 지지 않아 보이는 걸, 저희 둘이는 승재의 그 어설픈 그 몰골로 해서 장히 얼리지 않는 콤비라는 것도 모르고 시방 큰길을 어엿이 걷고 있는 것이다. 항차 남의 눈에 선뜻 뜨이는 계봉이를 데리고 말이다.
 
467
동관 파주개에서 북으로 꺾여 올라가다가 집 문 앞 골목까지 다 와서 계봉이가 팔걸이시계를 들여다보았을 때에는 아홉시하고 마침 반이었었다.
 
468
계봉이가 앞을 서서 골목 안으로 쑥 들어서는데 외등 환한 대문 앞에 식모와 옆집 행랑사람 내외와 맞은편 집 마누라와 이렇게 넷이 고개를 모으고 심상찮이 수군거리고 있는 양이 얼른 눈에 띄었다.
 
469
남의 집 드난살이나 행랑사람들이란 개개 저희끼리 모여 서서 잡담과 주인네 흉아작을 하는 걸로 낙을 삼고 지내고, 그래서 이 집 식모도 그 유에 빠지질 않으니까 그리 고이타 할 게 없다면 없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집 식모는 낮으로는 몰라도, 밤에는 영 어쩔 수 없는 주인네 심부름이나 아니고는 이렇게 한가한 법이 없다.
 
470
저녁밥을 치르고 뒷설거지를 하고 나서, 그러니까 여덟시 그 무렵이면 벌써 제 방인 행랑방에서 코를 골고 떨어져 세상 모른다. 역시 심부름을 시키느라고 뚜드려 깨우기 전에는 제 신명으로 밖에 나와서 이대도록 늦게(?)까지 이야기를 하고 논다는 게 전고에 없는 일이다.
 
471
계봉이는 그래 선뜻 의아해서 주춤 멈춰 서는데, 인기척을 듣고 모여 섰던 네 사람이 죄다 고개를 돌린다.
 
472
과연 기색들이 다르고, 식모는 당황한 얼굴로 일변 반겨하면서 일변 달려오면서 목소리를 짓죽여,
 
473
“아이! 작은아씨!”
 
474
하는 게 마구 울상이다.
 
475
“응! 왜 그래?”
 
476
계봉이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그대로 뛰어들어가려다가 말고 한번 더 눈으로 식모를 재촉한다. 사뭇 몸을 이리 둘렀다 저리 둘렀다 어쩔 줄을 몰라한다. 원체 다급하면 뛰지를 못하고 펄씬 주저앉아서 엉덩이만 들썩거린다는 것도 근리한 말이다.
 
477
계봉이는 정녕코 형 초봉이가 죽었거니, 이 짐작이다.
 
478
“아이! 어서 좀 들어가 보세유! 안에서 야단이 났나 베유!”
 
479
계봉이는 식모가 하는 소리는 집어내던지듯 우당퉁탕 어느새 대문간을 한걸음에 안마당으로 뛰어든다. 뛰어드는데 그런데 또 의외다.
 
480
“언니!”
 
481
어떻게도 반갑던지, 고만 눈물이 쏟아지면서 엎드러지듯 건넌방으로 쫓아 들어간다.
 
482
꼭 죽어 누웠으려니 했던 형이, 저렇게 머리 곱게 빗고 새옷 깨끗이 입고, 열어 논 건넌방 앞문 문지방을 짚고 나서지를 않느냔 말이다. 또 송희도 아랫목 한편으로 뉜 채, 고이 자고 있고…….
 
483
“왜? 누가 어쨌나요?”
 
484
승재는 계봉이의 뒤를 따라 들어가다가 말고, 잠깐 거기 모여 섰는 사람들더러 뉘게라 없이 떼어 놓고 묻던 것이다.
 
485
계봉이와 마찬가지로 승재도 초봉이에게 대한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했으나 그러고도 현장으로 덮어놓고 달려들어가지 않고서 우선 밖에서 정황을 물어 보고 하는 것이 제법 계봉이보다 침착하게 군 소치더냐 하면 노상 그런 것도 아니요, 오히려 더 당황하여 두서를 차리지 못한 때문이었었다.
 
486
식모가 나서서 말대답을 했어야 할 것이지만, 이 낯선 사내사람을 경계하느라 비실비실 몸을 사린다.
 
487
승재는 그만두고 이내 그대로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그들 중의 단 하나인 사내로 옆집 행랑사람이 그래도 사내라서 텃세하듯,
 
488
“당신은 누구슈?”
 
489
하고 나선다. 그들은 시방 이 변이 생긴 집에 다시 전에 못 보던 인물이 나타난 것이 새로운 흥미이기도 하던 것이다.
 
490
승재는 실상 여기서 물어 보고 무엇 하고 할 게 없는 걸 그랬느니라고 생각이 든 참이라 인제는 대거리하기도 오히려 긴찮아 겨우 고개만 돌린다.
 
491
“혹시 관청에서 오시나요?”
 
492
그 사내는 가까이 오면서 먼저 같은 시비조가 아니고 말과 음성이 공순해서 묻는다.
 
493
관청에서 왔느냔 말은 순사냐는 그네들의 일종 존대엣말이다. 검정 양복에 아무튼 민 거나마 누렁 단추를 달았고, 하니 칼만 풀어 놓고 정모 대신 여느 사포를 쓴 순사거니, 혹시 별순검인지도 몰라, 이렇게 여긴대도 그들은 저희들이 방금 길 복판에다가 구루마를 놓았다거나, 술취해 야료를 부렸다거나 하지 않은 이상 순사 아닌 사람을 순사로 에누리해 보았은들, 하나도 본전 밑질 흥정은 아닌 것이다.
 
494
승재는 관청 운운의 그 어휘는 몰랐어도, 아무려나 면서기도 채 아닌 것은 사실인지라, 아니라면서 고개를 흔든다.
 
495
“네에! 그럼 이 집허구 알음이 있으슈?”
 
496
그 사내는 뒷짐을 지고 서면서 제법 점잖이 이야기를 하잔다.
 
497
“네, 한고향이구…….”
 
498
“네에, 그렇거들랑 어서 들어가 보슈…… 아마 이 집에서 사람이 상했다 봅디다!”
 
499
“예? 사람이? 사람이 상했어요?”
 
500
승재는 맨처음 제가 짐작했던 것은 어디다 두고, 뒤삐어지게 후닥닥 놀라서 들이 허둥지둥 야단이 난다.
 
501
단걸음에 안으로 뛰어들어가야 하겠는데 뛰어들어갈 생각은 생각대로 급한데, 그러자 비로소 제가 의사라는 걸, 의사이기는 하되 청진기 한 개 갖지 못한 걸 깨닫고 놀라, 자 이걸 어떡할까, 병원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서 채비를 차려 가지고 와야지, 아아니 상한 사람은 그새 동안 어떡하라구, 그러면 그대로 들어가 보아야겠군, 아아니 이 사람더러 아무 병원이라도 달려가서 아무 의사든지 청해 오게 할까, 아아니 그럴 게 아니라 가만있자 어떡하나 어떡할꼬…….
 
502
이렇게 당황해서 얼른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고 둘레둘레 허겁지겁 사뭇 액체라도 지릴 듯이 쩔쩔매기만 하고 있다. 그리고, 시방 사람이 상했다고 한 그 상했단 소리는 말뜻대로만 해석해 부상(負傷)인 줄만 알고 있던 것이다.
 
503
그 사내는 남의 속도 몰라주고 늘어지게,
 
504
“네에, 분명 상했어요, 분명…….”
 
505
하다가 식모를 힐끔 돌아보면서,
 
506
“…… 이 집 바깥양반이 아마 분명…….”
 
507
“네, 바깥양반이, 그이 부인을, 말이지요?”
 
508
승재가 숨가쁘게 묻는 말을 그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면서,
 
509
“아아니죠!…… 이 집 아낙네가, 이 집 바깥양반을…….”
 
510
“네에!”
 
511
“바깥양반을 굳혔어요!”
 
512
“어!”
 
513
짧게 지르는 소리도 다 못 맺고 긴장이 타악 풀어지면서, 승재는 마치 선잠 깬 사람처럼 입안엣말로 중얼거리듯,
 
514
“……다친 게 아니구? 응…… 이 집 부인이 다친 게 아니구…… 바깥양반이…… 죽 죽었……?”
 
515
“네에! 아마 그랬나 봐요! 자센 몰라두 분명 그런가 봅니다…….”
 
516
승재는 멀거니 눈만 끄먹거리고 섰다.
 
517
가령 초봉이가 자살을 했다든지, 또 처음 알아들은 대로 장형보한테 초봉이가 다쳤다든지 그랬다면 놀라운 중에도 일변 있음직한 일이라서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거려질 수도 있을 노릇이다. 그러나 천만 뜻밖이지, 초봉이가 장형보를 죽이다니, 도무지 영문을 모를 소리던 것이다.
 
518
잠깐 만에 승재가 정신을 차려 안으로 달려들어가자 바깥에 모인 세 남녀는 하품을 씹으면서 다시금 귀를 긴장시킨다.
【원문】17 노동(老童) ‘훈련일기(訓戀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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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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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류(濁流)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7년 [발표]
 
  사실주의(寫實主義) [분류]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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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