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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류(濁流) ◈
◇ 5 아씨 행장기(行狀記) ◇
해설   목차 (총 : 19권)     이전 5권 다음
1937.10
채만식
1
탁류(濁流)
 
2
5. 아씨 행장기(行狀記)
 
 
3
김씨가 이럴 제는 탑삭부리 한참봉은 첩의 집에 가고 없는 게 분명했다. 줄 맞은 병정이라 태수는 마음놓고,
 
4
“아이구 아얏!”
 
5
허겁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방구석께로 피해 들어간다.
 
6
김씨는 물었던 것을 놓치고서 새액색 기어들고, 태수는 방구석에 가 박혀 서서 두 손을 내밀어 김씨를 바워 낸다.
 
7
“다시는 안 그럴게, 다시는…….”
 
8
태수는 어리광을 떨면서 빌고, 김씨는 약올랐던 것이 사그라지기 전에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참을 겸 입을 따악 벌리고 연신 덤벼 든다.
 
9
“아, 안 돼. 아, 안 돼.”
 
10
“다시는 안 그러께요. 거저 다시는 안 그러께요!”
 
11
태수는 지친 몸을 지탱하다 못해 펄씬 주저앉아서 두 손바닥을 싹싹 비빈다.
 
12
김씨는 태수가 그러면 그럴수록 꼬옥 한 번만 더 물고 싶어 죽는다. 인제는 밉살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뻐서 물고 싶다.
 
13
김씨는 물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는 태수가 이뻐도 물고, 미워도 문다. 물어도 그냥 질근질근 무는 것이 아니라, 사정없이 아드득 물어뗀다. 이렇게 물어 떼는 맛이란, 잇념 속이 근질근질, 몸이 금시로 노그라지는 것 같아 세상에도 꼭 둘째 가게 좋지, 셋째도 가지 않는다.
 
14
그 덕에 태수는 양편 팔로 어깨로 젖가슴으로 사뭇 이빨자국투성이다.
 
15
처음 시초는, 소리를 내서 티격태격하기가 조심이 되니까, 소리 안 나는 싸움을 하느라고 물고 물리고 했던 것인데, 시방 와서는 그것이 둘 사이에 없지 못할 애무(愛撫)가 되고 말았다.
 
16
무는 김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물리는 태수도 아프기야 아프지만, 그놈 살이 떨어질 듯이 아픈 맛이란, 약간 안마(按摩) 못지않게 시원하다.
 
17
김씨는 태수가 젊고, 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좋은 데가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물어 뗄 수 있는 것이 더욱 좋았다.
 
18
그는, 언젠가 남편이 첩의 집에 가지 않고 큰집에서 같이 자던 날 밤인데, 아쉰 깐에 태수한테 하던 버릇만 여겨, 그다지 기름지지도 못한 남편의 젖가슴을 텁석 물어 떼었다.
 
19
했더니, 탑삭부리 한참봉은 경풍하게 놀라,
 
20
“아니, 이 여편네가 이건 미쳤나!”
 
21
고함을 지르면서 김씨의 볼때기를 쥐어박질렀다. 그런 뒤로부터는 김씨는 남편과 잘 때면 조심을 하느라고 애를 쓰곤 했었다.
 
22
김씨는 종시 입을 따악 벌리고,
 
23
“아…… 한 번만 더 물자. 아.”
 
24
하면서 자꾸만 태수 앞으로 고개를 파고든다.
 
25
“아퍼 죽겠구만!”
 
26
태수는 먼저 물린 자리를 만지면서 바로 응석을 부린다.
 
27
“그래두. 그새 죄진 벌루다가…… 아, 한 번만 더. 아.”
 
28
“싫여이!”
 
29
“요것아!”
 
30
물기도 이골이 나서 어느결에 들이덤볐는지, 태수의 어깨를 덥석 물고 몸을 바르르 떤다. 으응! 소리가 사뭇 징그럽다.
 
31
“아이구우! 이놈의 늙은이가 인전 날 영영 죽이네에!”
 
32
태수는 방바닥에 나동그라져 우는 시늉을 하면서 물린 어깨를 손바닥으로 비빈다.
 
33
“아프냐?”
 
34
김씨는 좋아서 태수의 얼굴을 갸웃이 들여다보다가, 머리를 안아올려 무릎을 베게 해준다.
 
35
“응, 아퍼 죽겠어!”
 
36
“아이 가엾어라! 내 새끼…… 자아 그럼 쎄쎄 해주께, 응?”
 
37
김씨는 태수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싹싹 비비면서,
 
38
“쎄쎄 쎄쎄, 까치야 까치야, 우리 애기 생일날…… 아이 술냄새야! 술을 또 퍼먹었구나?”
 
39
“응, 아주 많이…….”
 
40
“왜 그렇게 술을 몹시 먹구 다녀! 그대지 일러두?”
 
41
“속이 상해서!”
 
42
“속이 왜 상허구, 또 속상헌다구 술만 먹구 다녀선 쓰나? 몸에 해룹기나 허지. 무엇 밀수(蜜水)나 좀 타다 주까?”
 
43
태수는 고개만 살래살래 흔들고 눈을 스르르 감는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44
태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김씨도 역시, 태수만 못지않게 얼굴에 수심이 드러난다.
 
45
“아무래두! 아무래두…….”
 
46
김씨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하듯 혼자말로 뇌사린다.
 
47
“……너를 장가나 딜여서 맘을 잡게 해야 할까 부다! 아무래두.”
 
48
“장가? 흥! 장가아!”
 
49
태수는 시쁘듬하게 제 자신더러 하는 듯 이런 조소를 하다가 다시,
 
50
“……혹시 우리 초봉이라면!”
 
51
“건 안 될 말이다!”
 
52
김씨는 시방까지 추렷하고 상냥스럽던 얼굴과는 딴판으로, 더럭 표독스럽게 잡아뗀다.
 
53
“대체 어째서 초봉이라면 그렇게 치를 떨우?”
 
54
태수는 열이 나서 벌떡 일어나 앉아 눈을 찢어지게 흘긴다.
 
55
“……초봉이가 당신네 신주단지요?”
 
56
“네게는 과분해.”
 
57
김씨는 아까 낯꽃 변했던 것을, 태수한테 띄지 않고 얼핏 고쳐, 천연스럽게 갖는다.
 
58
“내, 오기루라두 기어코 초봉이허구 결혼하구래야 말걸?”
 
59
태수는 씹어 뱉듯이 두런거리면서 아무 데나 도로 쓰러진다.
 
60
“내가 방해를 놀아두?”
 
61
“그게 원 무슨 놈의 갈쿠리 같은 심청이람!…… 그래, 우리가 언제까지구 이렇게 지내다가는 못쓰겠으니 갈려야 하겠다구, 뉘 입으루 내논 말야?…… 뭐 또, 날더러 맘을 잡으라구, 다아 그렇게 하자면 역시 장가를 들어야겠다구 한 건 누구야? 내가 장가를 가겠다면 중매 이상으루 가진 뒷수발 다아 들어 주겠다구는 뉘 입으로 한 말야?”
 
62
“그래 글쎄! 내가 중매까지 서구, 말끔 대서 장간 딜여 줄 테야!”
 
63
“그런데 왜 내가 좋다는 초봉인 훼방을 놀려구 들어?”
 
64
“초봉인 안 된다! 네게루 가면 그 애가 불쌍해. 천하 건달 부랑자한테루 그 애가 시집을 가서 신세를 망친대서야 될 말이냐?”
 
65
“별 오라질 소리두 다아 허구 있네!”
 
66
태수는 골딱지가 나서 벽을 안고 누워 버린다.
 
67
태수는 그래서 골을 내는 것이지마는 김씨는 김씨대로 노여움이 없지 못하다. 노여움 끝에는 자연 일의 시초가 여자답게 뉘우쳐지기도 한다.
 
68
태수가 여관에서 묵다가 아는 사람의 반연으로 이 집으로 하숙을 잡아 들기는 작년 여름이다.
 
69
제 밥술이나 먹는 탑삭부리 한참봉네가 무슨 우난 이문을 바라서 그런 건 아니고, 기왕 뜰아랫방이 비어 있으니 비어 내던져 두느니보다 점잖은 손님이라도 치고 싶다고 김씨가 이웃에 말을 냈던 것이 계제에 염집을 구하던 태수한테까지 발이 닿았던 것이다.
 
70
본시야 서로 코가 어디 가 붙었는지도 모를 생판 남이지만, 한번 주객이 되고 보매 둘 사이는 매삭 이십오 원이라는 밥값을 주고받는다는 거래를 떠나서 서로 마음이 소통되게끔 사정이 마침 맞았다.
 
71
태수는 생김새도 흉치 않거니와 성품도 사근사근하니 정이 붙게 하는 데가 있어 탑삭부리 한참봉더러도 아저씨 아저씨 하고 정말 일가뻘이나 되는 조카처럼 따르고 더러는 맛좋은 정종병도 들고 들어와서 적적한 밥상머리에 앉아 반주도 권해 주고 하는 짓이 수월찮이 밉지 않게 굴었다.
 
72
탑삭부리 한참봉은, 그것도 자식 없는 사람의 약한 인정이라, 태수가 그래 주는 것이 적잖이 위로가 되고, 그러는 동안에 정이 들어, 지금 와서는 어느 때는 태수가 꼭 자기의 자식이나 친조카같이 생각되는 적도 있었고, 그래서 그는 늘 태수의 밥상 같은 것에도 마음을 쓰고, 아내더러 도미를 사다가 찜을 해주라고까지 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73
‘모르는 건 놈팽이뿐.’
 
74
이런 물 건너 속담도 있거니와, 물론 그는 아내와 태수 둘이서 그런 짓을 하고 지내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75
여자라는 것은 무슨 정이고 간에 정이 들기가 남자보다 연한 편이다.
 
76
김씨는 태수가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면서 상냥하게 굴고 하는 서슬에 그가 주인 정해 온 지 석 달이 채 못해서, 남편이 일 년 가까이 된 요새 겨우 태수한테 든 정 그만큼, 도타운 정이 그때에 벌써 들었었다. 김씨는 그래서 그때부터, 조카같이 오랍동생같이 나이를 상관 않고 자식같이 귀애했고, 귀애하기를 남편 한참봉만 못지않게 귀애했다.
 
77
그러하던 중…… 작년 시월 초생, 음력으로 보름께였던지, 달이 휘영청 밝고 제법 산들거리는 게 젊은 사람은 객회가 남직한 밤이었었다.
 
78
그날 밤 태수는 주인집의 저녁밥도 비워 때리고 요릿집에서 놀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돌아오는 길이었다.
 
79
술이야 얼근했지만, 밤이 그렇게 마음 촐촐하게 하는 밤이니, 다니는 기생집도 있고 한 터에 그냥 돌아오지는 않았겠지만, 어찌어찌하다가 서로 엇갈리고 헛갈리고 해서 할 수 없이 혼자 동떨어진 셈이었었다.
 
80
그는 술을 먹고 늦게 돌아왔다가 탑삭부리 한참봉한테 띄면 으레 붙잡혀 앉아서 술을 먹지 말라는 둥, 사내가 어찌 몇 잔 술이야 안 먹을꼬마는 노상 두고 과음을 하면 해로운 법이라는 둥, 이런 제법 집안 어른 노릇을 하자고 드는 잔소리를 듣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성가시어, 살며시 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었다.
 
81
태수는 그래서 사푼사푼 마당을 가로질러 뜰아랫방으로 가노라니까 공교히 안방에서,
 
82
“고서방이우?”
 
83
하고 기척을 내는 김씨의 음성에 연달아 앞 미닫이가 열렸다.
 
84
“네에, 납니다…… 여태 안 주무세요?”
 
85
태수는 할 수 없이 안방 댓돌로 올라섰다. 김씨는 흐트러진 풀머리에 엷은 자릿적삼으로 앞을 여미면서 해죽이 웃고 내다보던 것이다.
 
86
남편의 마음이 변한 것이야 아니지만, 그래도 시앗을 본 젊은 여인이라, 더위 끝에 산산히 스미는 야기(夜氣)에 잠을 설치고 마음이 싱숭거려, 이리저리 몸을 뒤치고 있던 참이다.
 
87
“늦었구려? 저녁은 어떻게 했수? 자서예지?”
 
88
“먹었어요…… 아저씬 주무세요?”
 
89
“저 집에 가셨지.”
 
90
“하하하, 나는 글쎄 술을 한잔 먹었길래, 아저씨한테 들킬까 봐서 그대루 슬쩍 들어가 버릴 양으루 그랬지요. 하하하…… 그럼 좀 놀다가 잘까?”
 
91
태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마루로 해서 안방으로 성큼 들어선다.
 
92
이거야 탑삭부리 한참봉이 있건 없건, 밤이고 낮이고 안방에 들어가서 놀고 누워 뒹굴고 하던 터라, 이날 밤이라고 그것을 허물할 바는 아니었었다.
 
93
그러나 이날 밤사 말고, 태수는 김씨의 잠자리에서 나온 그 흐트러진 자태에 전에 없던 운치스러움을 느끼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어떤 무엇을 분명하게 계획한 것은 물론 아니요, 그저 그 당장에 문득 인 흥(興), 단지 그 흥에 지나지 않던 것이다. 적어도 시초만은 그러했다.
 
94
이 흥은 김씨도 일반이다. 그는 태수가 그대로 돌아서서 제 방으로 가려고 했더라면 놀다가 가라고 자청 불러들이기라도 했을 것이다.
 
95
태수는 윗미닫이로 해서 안방으로 들어서고 김씨는 엽엽스럽게도,
 
96
“아이머니!”
 
97
질겁을 하면서, 그러나 엄살을 하는 깐으로는 서서히, 자줏빛 누비처네를 끌어다가 홑껍데기 하나만 입은 아랫도리를 가리고 앉는다.
 
98
“미안합니다! 난 또 아직 눕잖으신 줄 알았지.”
 
99
“아냐 괜찮아! 일루 앉어요. 어떤가? 머, 늙은 사람이…… 자아 앉어요.”
 
100
태수가 도로 나올 듯이 주춤주춤하는 것을 김씨는 붙잡아 앉히기라도 할 것같이 반색을 한다.
 
101
둘이는 태수가 술 먹은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고 하다가 말거리가 없어 심심했다. 전에는 이런 일은 통히 없었다.
 
102
“고서방두 인제는…….”
 
103
어색하리만치 말이 없다가 김씨가 겨우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던 것이다.
 
104
“……장갈 들어서 살림을 해예지! 늘 이렇게 지내느라구 고생허구…… 적적하긴들 오죽해여!”
 
105
“아즈머니두! 색시가 있어야지 장갈 가지요?”
 
106
“온 참! 고서방 같은 이가 색시가 없어서 장갈 못 들어? 과년찬 색시들이 사뭇 시렁 가래다가 목을 맬려구 들 텐데, 호호.”
 
107
“아녜요, 정말 하나두 걸리는 게 없어요. 이러다간 총각귀신 못 면할까 봐요!”
 
108
“숭헌 소리두 퍽두 허구 있네!…… 아 고서방이 장가만 가구 싶다면야 내 중매 안 서주리?”
 
109
“정말이요?”
 
110
“그래에!”
 
111
“거 참 한자리 마땅한 데 좀 알아봐 주시우. 내 술은 석 잔말구 삼백 잔이라두 내께.”
 
112
“그래요!…… 그렇지만 인제 고서방이 장갈 들면 따루 살림을 날 테니 우리 내왼 섭섭해서 어떡허나? 호호, 우리 욕심만 채리구서 그런 말을 다아 허구 있어요! 하하하아.”
 
113
“허허, 정 그러시다면, 그대루 저 뜰아랫방에서 살림을 하지요, 허허.”
 
114
“호호…….”
 
115
김씨는 간드러지게 웃다가 낯빛을 고치고 곰곰이,
 
116
“……아이 나두 고서방 같은 아들이나 하나 두었으면 오죽이나!”
 
117
말을 못 맺고 한숨을 내쉰다.
 
118
“인제 애기 나실 걸 머…… 저렇게 젊으신데!”
 
119
“내가 젊어?”
 
120
김씨는 짐짓 눈을 흘기다가 다시 고개를 흔든다.
 
121
“……내야 늙구 젊구간이, 안 돼!”
 
122
“왜요?”
 
123
“우리집 영감님이 아주 제바리야! 그새 첩을 네엔장 몇씩 갈아딜이두 아이를 못 낳는 걸 좀 보지?”
 
124
“허긴 그래요! 남자가, 저어 그래설랑…… 아일 못 낳기두 하니깐…….”
 
125
“그러니 우리 집안은 자손 보기는 영 글렀지!…… 젠장맞을, 여편네 혼자서 아이 낳는 재주 없나!”
 
126
김씨는 해쭉 웃고, 태수도 같이서 빙긋이 웃는다.
 
127
김씨는 아이를 낳지 못해서 슬하가 적막하기도 하거니와, 장래가 또한 걱정이었었다.
 
128
만일 김씨 자기가 영영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 대신 첩의 몸에서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하나 낳는 날이면, 남편의 정이며 또 재산은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어미한테로 달칵 기울고 말 것이었었다.
 
129
그러는 날이면, 김씨는 내 신세가 간데없을 테라 해서 연전부터 그는 남편한테 돈을 한 오백 원이나 얻어 가지고 그것을 따로 제 몫을 삼아 사사 전당도 잡고, 오푼변 돈놀이도 한 것이 시방은 돈 천 원이나 쥐고 주무르는데, 이것은 장차 그렇게 될 날을 혹시 염려하고, 즉 말하자면, 늙은 날의 지팡이를 장만하는 셈이었었다.
 
130
이러한 불안이 있으므로 김씨는 내 몸에서 아이를 낳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그가 한 말대로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날 수가 있다면, 그 수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가리지 않을 만큼 간절히 아이를 바랐었다.
 
131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남자에게 정조를 개방하리라는 결단이 동시에 서서 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그것은 옳고 그른 시비보다도 우선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를 않았었다.
 
132
태수와 사이의 사단이, 좌우간 마음 성가시게 된 요새 와서는 김씨는 ‘자식이나 하나 보쟀던 것이!’ 하는 후회를 혼자 앉아 가끔 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로서 저를 속이자는 괜한 억지이던 것이다.
 
133
미상불 태수와 그렇게 된 그 이튿날부터도 아기를 바랐고, 시방도 바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아기를 바라느라고 태수와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었다. 기왕 그리 되었으니 아기나 하나 낳았으면 좋겠다는 욕심, 이게 정말이던 것이다.
 
134
탑삭부리 한참봉은 비록 자손을 보겠다고 첩을 얻고 지내지만, 마음으로는 아내 김씨한테 노상 민망해한다. 십오 년 동안이나 쓴맛 단맛 같이 맛보아 가면서, 게다가 이만한 전장까지 장만하느라고 동고동락으로 늙어 온 아내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하나가 흠이지, 정이야 깊을 대로 깊고 해서 알뜰한 생애의 길동무인 것이다.
 
135
그렇지만 한참봉은 김씨보다 나이 열세 살이나 더해서 이미 늙발에 들어앉은 사람이다.
 
136
그러한데다 한 달이면 삼사 일만 빼놓고 육장 첩의 집에 가서 잠자리를 하곤 하니, 가령 마음은 변하지를 않았다 하더라도 옛날같이 다 구격이 맞는 남편이 될 수는 없었다.
 
137
한편 김씨도 남편이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미더워하며 소중히 여겨 주는 줄은 잘 알고 있었다. 또 김씨 자신도 의가 좋게 반생을 같이 살아온 남편이니, 그에게 정도 깊거니와 의리도 큼을 모르는 바 아니었었다.
 
138
그런지라 그는 남편이 갑자기 싫어졌다거나, 그래서 배반할 생각이 들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었다.
 
139
단지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따로 이것이라, 시장하기도 한데 냉면도 구미가 당겼던 그런 셈쯤 되었었다.
 
140
그럼직도 한 것이, 김씨는 젊었다. 나이보다도 또 더 젊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알찐거리는 태수는 늘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면서 곧잘 보비위를 해주고 싹싹히 굴어 오랍동생같이 조카같이 자식같이 따르는 귀동이요, 그런만큼 다뤄 보기에 호락호락하기도 했었다.
 
141
그 만만하게 다룰 수 있는 귀동이는, 그런데 또 보매도 씩씩한 젊은 사내이어서 셰퍼드답게 세찬 매력을 가졌었다.
 
142
진실로, 삼십을 가제 넘은, 시앗을 본 여인의 바로 무릎 앞에서, 그리하여 그놈 셰퍼드가, 초가을의 산산한 야기에 포옹이 그리운 밤과 더불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게 그 밤의 핍절한 정경이었었다.
 
143
피가 뜨겁게 머리로 치밀고 숨이 차왔다. 그러자 마침 땡땡 마루에서 두시를 쳤다.
 
144
시계 소리에 태수는 그만하고 일어설까 했으나 엉덩이가 떨어지지를 않았다. 어느결에 흠씬 무르익어 버린 이 흥을 이대로 깨뜨리기가 섭섭했던 것이다.
 
145
“고서방, 우리 화투나 칠까?”
 
146
김씨가 약간 떨리는 음성을 캐액캑 가다듬어 겨우 말을 내던 것이다.
 
147
“칩시다.”
 
148
태수는 선선히 대답을 하고 일어서더니, 잘 아는 장롱서랍을 뒤져 화투목을 꺼내다가 착착 치면서 김씨 앞으로 바투 다가앉는다.
 
149
“고서방 고단할걸?”
 
150
“뭘! 괜찮어요.”
 
151
“그러면 ‘놉빼꾸’ 한판만…… 그런데 내기야?”
 
152
“좋지요. 무슨 내기를 할까요?”
 
153
“글쎄…… 무슨 내기가 졸꼬?…… 고서방이 정허구려.”
 
154
“나는 아무래도 좋아요. 아주머니 하자는 대루 할 테니깐 맘대루 정하시우.”
 
155
“무슨 내기가 좋을지 나두 모르겠어!…… 고서방이 정해요.”
 
156
“그럼 팔 맞기?”
 
157
“승거워!”
 
158
“그럼 무얼 하나!”
 
159
“아이! 정허구서 해예지!”
 
160
김씨는 태수가 내미는 화투를 상보기로 떼어 보고, 태수도 떼어 보면서,
 
161
“내가 선이로군……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이기는 사람이 시키는 대루 내기 시행을 하기루?”
 
162
“그래그래, 그럼 그렇게 해요? 무얼 시키든지 시키는 대루 하기야?…… 고서방 또 도화 불르면 안 돼?”
 
163
“염려 마시구, 아즈머니나 떼쓰지 말구서 꼭 시행하시우!”
 
164
토닥토닥 화투를 치기 시작은 했으나, 둘이는 다 화투에는 하나도 정신이 없다. 싫증이 나서 홍싸리로 흑싸리를 먹어 오기도 하고, ‘시마’를 빼놓고 세기도 했다.
 
165
누가 이기고 누가 져도 상관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승부는 나서 태수가 졌다.
 
166
“자아, 인전 졌으니 내기 시행해요!”
 
167
“하지요. 무어든지 시키시오.”
 
168
“가만있자…… 무얼 시키나아?”
 
169
“무어든지…….”
 
170
“무엇이 조꼬?”
 
171
김씨는 까막까막 생각하는 체하다가 별안간,
 
172
“아이! 난 모르겠다!”
 
173
하면서 자리에 가 쓰러져 버린다.
 
174
“승겁네!”
 
175
“그럼 말야아, 응?”
 
176
김씨는 도로 발딱 일어나더니 얼른 태수의 귀때기를 잡아다가 입에 대고,
 
177
“……저어, 나아 응? 애기 하나만…….”
 
178
하면서 한편 팔이 태수의 어깨를 감는다.
 
179
그날 밤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된 뒤로부터 둘이는 그대로 눌러 오늘날까지 지내 왔다. 여덟 달이니 장근 일년이다.
 
180
탑삭부리 한참봉이야 육장 첩의 집에 가서 자곤 하니까, 태수가 달리 오입을 하느라고 바깥잠을 자는 날만 빼면, 그래서 한 달 두고 보름은 둘이의 세상이다.
 
181
식모나 심부름하는 아이년도 돈이며, 옷감이며, 다 후히 얻어먹는 게 있어, 밤이면 태수를 바깥주인 대접을 할 줄로 알게쯤 되었기 때문에 둘이는 아주 탁 터놓고 지낼 수가 있었다.
 
182
그것은 마치 한참봉이 첩을 얻어 두고 어엿이 다니는 것과 일반으로, 김씨도 태수를 남첩(男妾)으로 집안에다 두어 두고 재미를 보던 것이다.
 
183
태수가 작년 여름에 이 집으로 주인을 잡고 올 때에는 인조견 이부자리 한 벌과, 낡은 트렁크 한 개와, 행담 한 개와 도통 그것뿐이었었다.
 
184
그러던 것이, 김씨와 그렇게 되던 사흘 만에는 단박 푹신푹신한 진짜 비단 이부자리에 방석까지 껴서 들여놓고, 연달아 양복장이야, 책상이야, 요강, 재떨이, 체경 이런 것으로 그의 방은 혼란스럽게 차려졌다.
 
185
그 밖에 철철이 갈아 입을 조선옷이며, 보약이며, 심지어 담배까지도 해태표로만 통으로 두고 피웠다.
 
186
이러한 비발은 김씨가 말끔 제 돈을 들여서 해주되, 남편한테는 눈치로든지 말로든지 태수가 돈을 내놓아 그 부탁으로 심부름을 해주는 체하기를 잊지 않았다.
 
187
밥값은, 처음에 이십오 원에 정한 것을 오 원씩 더 내서 삼십 원씩이라는 핑계로 언제나 밥상은 떡벌어졌다. 그러나 태수는 처음 석 달 동안만 이십오 원씩 밥값을 치렀지, 그 뒤로는 피차에 낼 생각도, 받을 생각도 하지를 않았다.
 
188
그 동안 김씨는 남편이 어느 첩한테서 긴치 않게 전염을 받은 ××을 나누어 가졌다가, 그놈을 다시 태수한테 모종을 해주었다.
 
189
그 덕에 태수는 단단히 고생을 했고, 치료는 했어도 뿌리는 빠지지 않고 만성이 되어, 요새도 술을 과히 먹거나 실섭을 하면 도로 도져서 병원 출입을 해야 했었다.
 
190
태수는 화투의 승부로 그날 밤에 짊어진 내기 시행 가운데 여벌치 한 대목은 아직도 시행을 하지 못했다. 웬일인지, 김씨는 포태(胞胎)하는 기색이 보이지를 않았다.
 
191
“나는 아마 팔자가 그런가 봐!”
 
192
김씨는 생각이 나면 태수를 붙잡고 불평삼아, 탄식삼아 가끔 이렇게 뇌살거린다.
 
193
그러나 일변 둘이 사이에 정은 수월찮이 물크러졌다.
 
194
태수는 한편으로, 호화스러운 맛에 전과 다름없이 기생 오입도 하고 지내고, 또 요새 와서는 초봉이한테 정신이 쏠려 그와 결혼을 하려고 애를 쓰고 하기는 해도, 그런 것과는 달리 김씨와 사이에는 소위 색정이라는 것이 자못 깊었다. 김씨는 더했다.
 
195
그러나 아무리 정이 들고 서로 좋고 해도, 애초부터 아무 때고 떨어져야 한다는 말없는 조건이 붙은 둘 사이의 관계이었었다.
 
196
김씨는 수월찮이 영리하기도 한 여자이었었다. 그는 한때의 손짭손으로 일생을 그르칠 생각은 없었다.
 
197
만일 태수와 이렇게 오래오래 두고 지내다가는 필경 파탈이 나서, 큰 풍파가 일고라야 말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198
그래서 그는 지나간 삼월부터는, 인제는 웬만큼 해두고 일을 수습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199
하기야 태수와 떨어질 일을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섭섭하기란 다시 없었다. 또 기왕 내친걸음이니, 바라던 자식이나 하나 뺄 때까지 그렁저렁 밀어 가고도 싶었다.
 
200
그러나 올 삼월, 그때만 해도 벌써 배가 맞아 지낸 지가 반년인데, 반년이나 두고 그렇게 지냈어도 가져지지 않던 아이가 앞으로 더 지낸다고 별안간 생겨질 것 같지도 않고, 그뿐 아니라, 남편을 더 오래 속일수록 위험은 더 많이, 그리고 더 가까이 닥뜨려 오게 하는 것이어서 차차로 겁이 더 나기도 했었다.
 
201
한번 이렇게 위험을 느끼고 나매, 그는 그새까지는 어쩌면 그렇듯 마음을 턱 놓고 지냈던가 싶을 만큼 자꾸만 초조와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다. 뿐 아니라 앞으로 가령 위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태수를 한평생 옆에 두고 지내진 못할 바이면, 역시 차라리 선뜻 떨어지는 게 수거니 싶었다.
 
202
그러나 생각만 그렇지, 생각 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고, 해서 그러면 생으로 잡아떼느니보다 태수를 장가를 들여서 할 수 없이 떨어지도록 하는 도리가 옳겠다고, 드디어 태수를 장가를 들일 결심을 했던 것이다. 하고서, 태수더러 그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하자고 하니까, 태수는 갈리는 거야 형편대로 할 것이지만 장가는 갈 생각이 없다고 내내 코방귀만 뀌었다.
 
203
그래서 하루 이틀, 그 짓을 그대로 미룩미룩 밀어 내려오던 참인데, 그러자 이러한 일이 있었다.
 
204
사월 바로 초생이니까 달포 전이다.
 
205
태수가 오후에 은행에서 돌아와 바깥 싸전가게에 나가서 탑삭부리 한참봉과 한담을 하고 있노라니까 웬 여학생인지, 차림새는 초라해도 얼굴이며 몸맵시가 단박 눈에 차악 안기는, 그런 여학생 하나가 가게 앞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태수는 그 여학생의 차림새가 너무 조촐하고 더욱 트레머리에 통치마는 입었어도 고무신에 버선을 신은 것이, 혹시 공장이나 정미소에 다니는 여직공이 아닌가 했다.
 
206
그렇다면 더욱 인물이 아깝다고, 그래서 태수는 황홀하게 그를 바라보는 참인데 마침 탑삭부리 한참봉을 보더니 사풋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것이었었다.
 
207
초봉이었었다.
 
208
“어이, 아버지 안녕하시구?”
 
209
탑삭부리 한참봉은 이렇게 아주 친숙히 인사 대답을 했다.
 
210
“네에.”
 
211
초봉이의 대답은 들리는 둥 마는 둥했지만, 방긋이 웃는 입을 보고서 태수는 그만 엎으러지게 흠탄을 했다.
 
212
초봉이가 지나가기가 무섭게 태수는 탑삭부리 한참봉더러,
 
213
“거 누구예요?”
 
214
하면서 사뭇 숨이 차게 다급히 묻던 것이다.
 
215
“왜?”
 
216
한참봉은 히쭉이 웃다가,
 
217
“……저 너머 둔뱀이 사는 우리 아는 사람의 딸인데…… 학교 졸업하구서 시방 저기 제중당이라는 양약국에 다닌다지…… 그래 맘에 들어?”
 
218
그는 연신 수염 속에서 내숭스럽게 웃는다.
 
219
“아녜요, 거저…….”
 
220
태수는 너무 덤빈 것이 점직해서 뒤통수를 긁는다.
 
221
“흐응! 맘에 드는 모양이군그래?…… 워너니 똑똑하겐 생겼지. 저엉 맘에 들거들랑 집엣사람더러 중맬 서달라지? 저 너머 둔뱀이 정주사네 맏딸 초봉이라면 나보다 더 잘 알 테니.”
 
222
“아녜요, 아저씬 괜히.”
 
223
그날 밤부터 태수는 그새까지 시뻐하던 장가를 급작스레 들겠노라고, 그러니 초봉이한테 중매를 서달라고 김씨를 졸랐다.
 
224
초봉이란 말에 김씨는 도무지 전에 없던 일로 별안간 강짜가 나고, 나되 사뭇 앞이 캄캄하고 몸이 떨려 어쩔 줄을 몰랐다.
 
225
김씨는 자청해서 태수더러 결혼을 하라고 했고, 종차 나서서 규수를 골라 내 손으로다가 뒤받이를 들어 혼사를 치러 줄 염량까지 했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질투 같은 것은 몰랐고 한 것은 무릇 그 여자 즉 태수의 배필인 동시에 질투의 대상 인물이 실지의 인물로서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었다.
 
226
그러다가 마침내 초봉이라고 하는 잘 아는 계집애, 그때의 최근으로는 작년에 본 것이 마지막이지만 썩 아담스럽게 생긴 그 계집애 초봉이가, 이건 시방 당장 내 애물인 태수를 차지를 해가다니! 아 그 계집애가! 이러해서 계제와 대상을 만나 질투는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러한 딴 속을 두어 두고, 그는 태수더러는 초봉이가 너한테는 과분하다는 핑계를 해가면서, 그의 소청을 들어주지 않으려고 드는 것이었었다.
 
227
그러나 그는 마침내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문】5 아씨 행장기(行狀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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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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