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星巖[성암]의 길 ◈
◇ 3 ◇
해설   목차 (총 : 7권)     이전 4권 다음
1944
김동인
목   차
[숨기기]
 

1. 3

 

1.1. 3.1

 
3
동산도(東山道)를 지나서 동해도(東海道)로.
 
4
돋아나는 솔잎 머리에 갓을 튀겨쓰고, 붓 한 자루 벗하여 성암은 유월 염천에 그의 방랑의 길을 거듭하고 있었다.
 
5
무슨 목적이 없는 길이었다. 시인으로서의 표박성과 방랑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그가 단지 그 방랑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길이었다.
 
6
혹은 배움의 도를 닦고자, 혹은 글벗들을 찾으려, 또는 단순히 방랑을 즐기기 위하여, 동해도의 길을 오르내리기 이미 칠팔 차, 눈에 익은 바다요 눈에 익은 산이건만, 다시 보아도 겸증 안 나고 다시 밟아도 싫증 안 나는 표박이요 방랑이었지만, 이번의 길은 왜 그런지 마음 산란하였다.
 
7
“주막집 밥 따르는 계집애가 그리우셔요?”
 
8
성암이 이번 또 방랑의 길을 떠나고자 할 때, 그의 어린 안해 홍란이 이렇게 그를 웃어 주었지만 ― 그리고 과거의 방랑의 길에서는 피곤한 몸을 주막에 내어던지고 주막집 밥 따르는 계집에게 부질없는 농담을 던지는 것도 아닌게아니라 적지 않은 취미였더니, 이번 길에서는 그것이 그다지 신통치 못하였다.
 
9
집에 버려 둔 어린 안해가 그리웠다.
 
10
“은하수 가운데 두고, 견우직녀 사모하는 정경두 더 아름다우느니.”
 
11
이번 길 떠나기에 임하여, 성암이 안해에게 남긴 핑계가 이것이었고, 또한 시인으로서의 감상(感傷) 욕구성을 유달리 많이 가지고 있는 성암이라, 어린 안해 집에 남기고, 객창의 쓸쓸한 자리에서 안해 사모하는 기분에 도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급기 길을 떠나서 객창의 외로운 홑베개에 머리를 눕히고 보니, 안해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12
더우기 일전,
 
 
13
階前栽芍藥[계전재작약] 堂後蒔當歸[당후시당귀]
14
一花且一草[일화차일초] 情緖兩依依[정서량의의]
 
15
라는 안해의 오언절구를 받고, 안해의 정경을 생각하니 측은한 생각과 동시에, 한층 더 안해가 그리웠다.
 
16
벌써 서른두 살이었다. 게다가 열아홉 살부터 화류계에 놀아난 성암이었다. 여인 경험이란 것도 충분히 하였고, 게다가 서른두 살의 중년 사나이였다.
 
17
이십 소년의 풋사랑 같은 정열과 긴장은 느끼지 못할 나이요, 느끼지 못할 처지였다.
 
18
이치로 따지자면 그러하였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렇기는 하지만, 이 이치를 무시하고, 성암의 마음은 이십 소년 ― 이 아니라, 마치 이팔 처녀와 같이 헤적이었다.
 
19
이런 애상적 기분에 도취해 보려던 생각도 없어졌다. 그저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거기는 무슨 곡절이며 이유가 없이, 무조건하고 그리운 것이었다.
 
20
무슨 이야기를 하느라고 나부럭이 뛰놀던 홍란의 입술, 꿈꾸는 듯한 황홀한 눈으로 무한한 원망을 바라보고 하던, 홍란의 눈매, 반짝이는 이빨이며 경쾌하던 몸매 ― 모든 것이 그리웠다.
 
21
나이로 따지자면 어버이와 딸이라 해도 좋을 만하였다. 육촌 누이동생이며 겸하여 또한 계수의 언니라, 어렸을 때부터 그 성장을 보아 왔고, 코흘리던 어린시절부터 늘 붙안아 주고, 응석받아 주던, 홍란 ― 냉정한 이성으로 따지자면, 역시 누이동생으로 귀여워해야 할 홍란, 그러나 그 홍란에게 대하여 이성으로 안해로 애인으로의 감정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22
독신 시절에는 느껴 보지 못한 고적 ― 또한 독신자의 공상이나 상상으로는 명확히 본체를 붙들 수 없는 고적감이었다.
 
 

1.2. 3.2

 
24
성암은 종내, 일정(日程)을 다그어, 예정보다 일찌기 귀향하기로 작정하였다.
 
25
깎았던 머리가 자라기까지 ― 그러니까, 명년 봄쯤이나 귀향하려던 것이 본시의 예정이요, 안해며 친지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고 떠난 길이었으니, 차마 오늘내일로는 체면으로든 염치로든 돌아가기가 쑥스럽다 하지만, 이 머리가 조금 자라서, 이렁저렁 상투를 짤 수가 있게만 되면, 금년 가을로라도 다시 고향으로 ― 안해의 품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26
혼자의 길이 진실로 겨웠다. 논밭에서, 내외 의좋게 김이라도 매는 꼴을 보든가 할 때는,
 
27
“내게도 마누라가 있다. 네 계집 같은 것보다, 천 곱 만 곱 나은 이쁘고 젊은 마누라가 있다.”
 
28
역정 비슷한 감정으로 외면해 버리고 하였다.
 
29
이리하여 간신히 그 가을 ― 깎았던 머리가(비상한 고심을 하면) 어떻게 상투 비슷이 짤 수 있게쯤 자라기가 바쁘게 고향을 향하여 발을 돌이켰다.
 
30
가는 동안이 오륙 일이 더 걸릴 것이요. 오륙 일 더 지나노라면, 머리는 좀 더 자라리라는 에누리까지 가산하여, 황황히 회정을 한 것이었다.
 
 

1.3. 3.3

 
32
성암이 고향 자기 집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썩 지난 밤중이었다.
 
33
고향서 오십 리 되는 곳에서 날이 저물었다. 오십 리나 되는 곳에서 날이 저물었으니 거기서 그 밤은 묵는 것이 당연하였다.
 
34
그러나 성암의 마음이 그렇지 못하였다. 오십 리는 지척이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즉 안해를 지척에 두고, 안해 만나기를 내일로 미루기가 싫었다.
 
35
밤을 도와서 가면, 한밤중에는 안해를 만날 수가 있을 것을 공연히 이곳서 묵어서, 오늘 밤으로 만날 수 있는 안해를 내일 저녁에야 만난다는 것은, 되지 않은 일이었다. 며칠을 계속하여, 바삐 온 몸이라, 꽤 피곤도 하였지만, 오늘밤으로 만날 수 있는 안해를 내일로 밀기가 싫어서, 그냥 밤길을 계속한 것이었다.
 
36
갑자기 뛰쳐들어서 안해를 광희케 하랴, 혹은 문을 두드려 부르랴, 이런 생각을 하며 문득 보니, 이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집에는 불빛이 비치인다. 그리고 돌아가 보았다.
 
37
덧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그의 젊은 안해는 앞에 종이를 펴놓고 일심불란히 글씨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38
성암은 잠시 그 연습하는 자세를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다가 눈물겨웠다.
 
39
일찍이 성암이 제 안해에게 당시(唐詩)의 초보를 가르칠 때에, 하도 안해의 글씨가 흉하므로,
 
40
“이게 무슨 개발 글씬가. 글씨부터 이 꼴이니 시가 될 게 있나.”
 
41
하여 그 글씨를 핀잔준 일이 있었다.
 
42
그 이래, 안해는 은근히 글씨에 마음썼고, 지난 봄 성안이 ‘머리 자라기까지’라고 방랑의 길을 떠날 때, 안해는,
 
43
“당신 머리 기르시는 동안, 저는 집에서 글씨를 기르지요.”
 
44
한 일이 있었다.
 
45
그때 무심히 들어 두었더니, 안해는 그것이 무심히 한 말이 아니었고 그동안 골독히 글씨 공부에 마음을 썼던가. 글씨의 체, 글씨의 자취까지는 이곳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연습하는 그 자체로 보아, 아주 격에 맞았다.
 
46
반 년 전까지만 할지라도, 붓을 잡는 격식조차 맞지 않아 자류(自流)로 되는 대로 휘갈기던 그가, 얼마나 독을 들여 연습하고 연구했으면, 단 반 년 새에, 이만치 턱 격에 맞게가 되었는가.
 
47
혹은 이것이 남편에게 웃기운 데 대한 자존심의 발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원인에서든 간에, 결국은 학자 남편에게 대한 안해로서의 호의요, 또 성암 자기에게도 반가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48
그 정성과 호의가 고맙고 눈물겨웠다. 다소곳이 앉아서 일심불란히 획마다 정성을 넣어 쓰는 그 운필을 문틈으로 잠시 들여다보다가, 성암은 할 수 있는껏 안해를 놀라지 않게 하려고, 가만가만 문을 두드리며 나지막히 불렀다.
 
49
“여보, 홍란, 홍란, 내가 왔소 내가.”
 
50
홍란은 몸을 소스라쳐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로 향하여 성암은 다시 나지막이 불렀다 ―
 
51
“내야 나.”
 
52
홍란은 황황히 일어섰다.
 
53
“아이나.”
 
54
달려와 문을 열었다.
 
55
“아이, 웬 일이서요?”
 
56
“머리가 돋았길래.”
 
57
싱겁게 웃으며 감발을 벗어던지고 올라섰다.
 
 

1.4. 3.4

 
59
단 반 년 새에 놀라운 진보였다. 얼마나 열심으로 얼마나 성의껏 공부했으면 단 반 년 새에 이만한 결과를 얻었을까.
 
60
글씨뿐 아니라, 시에 있어서도 다만 경탄할 밖에는 도리가 없을 만한 놀라운 진보였다. 칭찬의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61
남편의 칭찬에 홍란은 마치 어린애같이 자기의 반 년간의 수확을 차례로 내어 뵈어 자랑하였다.
 
62
차례를 따져 가며, 자랑하는 안해의 반 년간의 진보의 자취를 보니, 과연 어제가 그제보다 나았고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 일취월장의 뛰엄뛰기의 자취가 역연하였다.
 
63
“어쩌면 이렇게 껑충껑충 뛰어 진보한담.”
 
64
“어서 바삐 양성암의 안해로 부끄럼이 없도록 되기 위해서 악에 받쳐 연습했지요.”
 
65
무론 그렇게 연습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 노래든가, 글씨든가 하는 것은 결코 연습만으로 ,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천분, 소질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66
안해의 반 년간의 진보의 자취를 보면서, 성암은 안해에게 구비되어 있는 천품을 넉넉히 알아보았다. 이 천품은 잘 지도만 하면, 장차 넉넉히 대성할 수 있으리라는 점도 알았다. 그리고 내심 흡족히 생각하였다.
 
67
“오실 줄은 뜻도 안했어요. 오시기까지, 좀 착실히 공부해 두려 했는데, 뜻밖에 벌써….”
 
68
“머리가 다 자랐거든.”
 
69
“아직 덜 자랐어요.”
 
70
“게다가 마누라 보구 싶어서.”
 
71
“저도….”
 
72
서로 바라보았다. 명랑한 미소가 둘의 얼굴의 흘렀다.
 
73
안해는 돌아앉아 ‘단스’서랍에서 무슨 종이 뭉치를 하나 꺼내었다.
 
74
“웃으시면 안 뵈어 드려요.”
 
75
“안 웃을께. 대체 뭐야.”
 
76
“미리 칭찬해 주세요.”
 
77
“칭찬? 하지. 뭐라구. 좋다 좋다, 이만했으면 칭찬 됐나? 대체 뭐야.”
 
78
안해는 종이 뭉치를 남편에게 주었다. 그리고 옷소매를 입에 물며 얼굴을 돌렸다.
 
79
성암은 종이 뭉치를 펴보았다.
 
80
노래 ― 한시였다.
 
81
자초지종, 몇 십 수, 모두가 공규원(空閨怨)이요. 상부곡(想夫曲)이었다.
 
82
아직 수법(手法)에는 서투른 점이 많고 표현에는 유치한 점이 많지만, 청신하고 절실한 그 상(想)은 성암으로 하여금 재독 삼독, 권을 놓지 못하게 하였다.
 
83
“웃지 말라는 부탁이었지만 웃어 주겠네. 하하하하, 하하하하. 조롱의 웃음이 아니고, 기쁨의 웃음일세. 아아 내 마누랄세. 우리 마누랄세. 이런 마누라 집에 남겨 두었으니 머리 채 자라기 전에 돌아올 밖에.”
 
84
“좀더 뒤에면 좀더 닦달된 걸 뵈어 드렸을걸.”
 
85
“그럼 내 좀더 가 있다가 올까?”
 
86
“그러세요. 오십 년만 더 가르쳐 주시구 그리구는 몇 해이구 더 나가 계시다가 오세요.”
 
87
“이런 마누라 두고 혼자 길 떠나는 놈도 밸빠진 놈이지.”
 
88
홍란은 눈을 들어 남편을 쳐다보았다 ―.
 
89
그래두 집에 “ , 한두 달만 계시면 또 길 떠나실 생각이 드실걸요.”
 
90
“아니지. 그런 법 없지.”
 
91
“정말?”
 
92
성암은 문득 동남조를 벗어 버리고 안해를 보았다 ―.
 
93
“홍란, 내 이번 길에 생각했는데, 내 성질이 본시 돌아다니길 좋아해서 이 버릇은 버릴 수 없어. 그러나 또 마누라 떠나서도 살 수 없어. 그러니까, 이 뒤 만약 또 길 떠나는 일이 있다면 마누라 함께 가세. 혼자서는 외롭고 심란해서 길 다니지 못하겠어.”
 
94
안해의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나타났다. 함께 다니기가 기쁘다기보다, 함께 다니자는 그 말이 기쁜 것이었다.
 
95
“그래두 어떻게 그렇게 하세요? 남 보기에도 ―.”
 
96
“남 때문에 나 할 일 못하겠네.”
 
97
“또 ― 비용은 ― 돈은.”
 
98
무슨 재산이 있어서 호화롭게 길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다니면서 그곳 그곳서 동호자들의 부조를 받으며 혹은 시회(詩會)를 열며 하여, 거기서 방랑 비용을 짜 내는 것이었다. 이것을 소위 행상(行商)이라 한다. ‘행상’의 근소한 수입으로 어떻게 두 사람의 비용을 짜 내겠느냐 하는 안해의 말이었다.
 
99
“뼈를 갈고 피를 짜서라도 그 비용이야 어떻게든 만들지. 한 보름 쉬어서 이번은 둘이서 다시 길 떠나세.”
 
100
“글쎄요.”
 
 

1.5. 3.5

 
102
이번은 안해를 데리고 애처 동반의 ‘행상’의 길을 떠나려고 한 성암의 뜻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 저런 일에 밀리어 좀체 곧 길 떠날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103
이 틈을 이용하여, 안해는 화도(畵道)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에, 성암은 이번 방랑의 길에서 구해 온 사서(史書)를 보기 시작하였다.
 
104
처음에 중국사기를 보았다.
 
105
하, 은, 주(夏殷周)의 세 왕조를 지나서 전국(戰國)시대의 어지러운 기복, 그 어지러운 시대를 겪은 뒤에는, 일대의 위인 진시황(秦始皇)이 생겨 나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 집권의 ‘황제’시대를 지나서 한(漢)이 나타나고 ‘한’의 뒤에는 삼한, 삼한이 부스러져서는 오호십육국, 그 뒤에는 어지러운 정국을 지나서 다시 수(隨)의 통일.
 
106
‘수’가 넘어지고 당(唐). 당의 뒤에는 ‘오대’의 난장판. 오대를 지나서는 송(宋).
 
107
‘송’에서 ‘금(金)’으로 , ‘금’에서 ‘원(元)’으로, ‘원’이 넘어지고는 다시 한족의 ‘명(名)’으로 ‘명’이 넘어지고는 ‘청(淸)’으로.
 
108
순서를 기억하기도 힘든 이 지나 오천 년간의 기복을 마치 「수호전」이나 읽는 것 같은 흥미로 읽었다.
 
109
이 지나 역사를 읽는 동안 저절로 역사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110
이 역사에 대한 흥미는 성암으로 하여금 다시 이번은 ‘일본 역사’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게 하였다.
 
111
연전 성암이 경도 방면으로 방랑의 길을 더듬을 때에 꽤 가까이 사괸 뇌산양(賴山陽)이 (산양은 성암보다 아홉 해 맏이었다) 성암에게 들려준 ‘일본 역사’의 자랑이 생각났다.
 
112
저 한토에서는 소위 ‘성즉 천자요 패측 역적이라(成則天子, 敗則逆賊)’이라 하여, 누구든 힘만 있으면 천자 될 수가 있고, 그러기 때문에 어중이떠중이가 모두 천자 되어 보려고 꿈틀거리며, 또한 힘만 있으면 능히 천자도 될 수 있지만 ―.
 
113
이리하여 산양은, 지나의 어지러운 역사를 통탄한 뒤에 말을 이어 ―. 우리 일본의 자랑을 말하였다.
 
114
우리 일본은 저 한토와 달라, 어중이 떠중이가 황위(皇位)에 오르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인황 제일대이신 신무 천황의 후윤이시고서야 비로소 황 위에 오를 수 있지, 제 실력 아무리 하늘을 찌를 듯한 사람일지라도, 황윤이 아니고는 황위를 염내지 못한다.
 
115
중간, 무사(武士) 계급의 대두가 있어서, 무사 정치의 막부(幕府)라는 것이 생겨 나서, 통치의 임을 대행한 시절이 있었지만 비록 정치는 막부에서 대행한다 할지라도, 역시 ‘대행’하는 뿐이지, 황권은 엄연히 황윤만이 계승하시는 것이다.
 
116
막부의 세도가 좀 과하여, 일견 막부의 주재자가 즉 통치자인 듯한 느낌이 없은 바는 아니나, 그러나 역시 그것은 성천자께 위임받은 대행뿐이지, 막부 자기의 권한은 아니다.
 
117
“그러나 성천자는 구중 깊은 곳에 계서 우리 서민들은 우러릅기조차 못하고, 우리가 조석으로 상대하는 자는 대행기관인 막부이니까, 어리석은 서민 가운데는, 막부가 우리의 맨 꼭두머린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잘못 생각이고, 덕천 대장군이나 양 형이나 내나 모두, 성천자의 한 보잘것없는 적자이기는 일반이외다.”
 
118
일찌기 성암의 스승 북산도 그런 뜻의 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철없는 어린시절이라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119
그 뒤 산양(山陽)에게 같은 말을 들을 때도, 그 뜻은 알아듣겠으나, 그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120
지금 지나의 오천 년 역사를 상고하고서 다시 일본의 역사를 생각해보니, 과연 그 양자의 새에는 대상부동의 차이가 있고, 일본 국체에 대한 긍지를 비로소 느낄 수가 있었다.
 
121
“덕천 장군가도 대대손손이 이백여 년이나 누려 내려왔으며 사람이란 환경에 젖는 법이라. 지금쯤은 제법 외람된 생각도 품는 듯하지만, 만일 우리 국체에 맞지 않는 생각을 품게 되면 오천만 황민이 도저히 묵과하시 않아요. 용인하지 않아요. 제 그은 금에서 한 발이라고 넘겨짚으려 하면 오천만 황민의 철퇴가 그 머리에 내리게 되겠지요. 지금 현황이, 막부 좀 과히 자세하는 듯한 태도가 보이기 시작하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근황운동 , 왕정 복고 운동이 싹트기 시작하는 모양이 아니오? 제 분에서 넘어서려 하면 용인할 수가 없거든.”
 
122
“이제라도 덕천 장군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의 침람된 행위를 고치면 여니와 그냥 그 태도를 계속했다가는 막부의 생명은 길지 못하리다. 이런 때에 있어서 우리 같은 선각자들이 앞장서서, 더욱 근황사상을 고취하고, 국체사상을 뿌리깊이 서민들에게 넣어주어서, 우리 국체에 추호의 오점이라도 찍히지 않도록 잘 지도해야 할 게외다. 그래서 내 ―.
 
123
「일본외사(日本外史)」를 찬술하는 뜻이 여기 있지요. 「고사기」, 「일본서기」의 뒤를 물려받아 만세일계의 우리 자랑스런 국체를 글자로 적어 우리 황민에게 널리 전하자는 뜻이외다. 저‘미도고몽(水戶黃門)’공이 덕천씨의 일족이면서도 「대일본사」를 찬술케 하신 뜻도 여기 있지요.”
 
124
산양이 이렇게 말하던 그 말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뜻의 의의는 역시 이해할 수 없던 것이 오늘은 확연히 밝아졌다.
 
125
그 의의가 이해되자, 성암의 마음에도 불연히 자긍심과 자부심이 일어났다.
 
126
“나는 천자의 백성이로다.”
 
127
“거룩하신 황위 우리 위해 임하신다.”
 
128
“덕천씨나 내나 같은 황민이기는 일반이로다.”
 
 

1.6. 3.6

 
130
이로부터 성암은 오직 국체선명에 전심하였다.
 
131
안해의 지도도 게을렸다. 시작(詩作)도 한동안 내어던졌다.
 
132
전심일의 고전을 뒤적이었다. 뒤적이면, 뒤적이느니만치 이 나라 백성이 된 자기의 긍지와 기쁨을 느꼈다.
 
133
아직껏 존경하고 숭배하던 저 한토는 문화의 나라, 문물문명의 나라로는 역시 존경하고 존숭할 것이나, 국체로는 내 나라에 비기자면 진실로 창피하고 너절한 나라라는 생각도 생겨 났다.
 
134
저 나라는 한때 천여 후국(侯國)으로 나뉘어서도 아무 불만이 없이 살았고 오호십육국으로 나뉘어서도 그냥 좋다고 살았지만, 이 나라는 남목 정성(楠木正成) 같은 충신이 나지 않았던가.
 
135
지금 세상 형편 조금 이상한 데가 있어, 덕천 대장군이 세도를 누리고 있지만, 이 나라 백성의 마음에 선조 대대로 이천 년간 흘려내려온 만세 일계의 사상과 황실존중의 사상은 아무런 힘으로 밀살하려야 밀살할 수가 없는 귀하고 거룩한 관념이다.
 
136
경도의 뇌산양이 그리웠다. 연전 서로 만났을 때는 단지 한 개 학자로 서로 즐겁게 놀았더니, 지금 그의 사상을 자세히 음미하고 보니, 놀라운 선각자요, 위대한 지도자였다.
 
137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 그때 만났을 때에 산양은 성암에게 구주(九州) 방면을 한 번 순유해 보기를 권했다.
 
138
구주 방면은, 덕천 막부와 거리가 꽤 머니만치 막부에 대한 위포의 염은 박약하고 그 대신 존황심이 발달된 곳이니 한 번 순유해 볼 필요가 있다 하였다.
 
139
그 말을 따라 구주도 한 번 돌아보고 싶었다.
 
140
시작(詩作)에 대한 자기의 과거의 실수도 깨달았다. 과거에는 단지 당·송(唐·宋)의 본때에만 도취하여, 당시를 본받고자 송시를 본받고자 노력하고 애썼지만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라는 점을 알았다.
 
141
작시의 방법이며 기술은 무론 거기 배울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이며 방법의 아래는 ‘일본인의 노래’라 하는 사상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었다. 일에서 십까지 당시와 송시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거기 본받을 것은 다만 방법과 기술뿐이다. 그 방법 그 기술로써, 일본인의 노래를 창작을 해야 할 것이다.
 
142
― 겨울이나 지나서 봄에는 다시 안해까지 동반하여 길 떠나려던 성암은, 그로부터 삼 년간을 고향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143
삼 년간을 골독히 공부하였다 . 국가의 유서와 국가의 사상과 국체의 본의를. 안해 홍란은 수련을 쌓고 있었다.
 
144
수련을 쌓다가 좀 미심한 데가 있어서 거기를 밝히고자 남편에게 의견을 물으면 남편은 거기 대해서조차 그다지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답을 하기가 귀찮았다. 자기의 공부에 방해되기 때문이었다.
 
145
한 번 마음이 쏠리면 그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암이었다. 안해를 그렇게 애타히 사랑하던 성암이 안해의 존재까지 잊고 방랑을 그렇게 좋아하던 성암이 방랑까지 잊고, 삼 년간을 오직 국사에 관한 서적 탐독으로 보냈다.
 
146
삼 년간 탐독한 결과, 그렁저렁 국체에 대한 관념을 짐작하였다.
 
147
짐작이 간 뒤에야 책을 집어치웠다.
 
 

1.7. 3.7

 
149
삼 년 뒤, 비로소 책을 걷어치운 성암.
 
150
“자, 또 어디 길을 떠나 볼까?”
 
151
이 말에 안해는 그의 맑은 눈을 치뜨고 미소하였다.
 
152
“인젠 책 다 보셨어요?”
 
153
“암. 다 인젠 내 뱃속에 들어갔지. 이 배 ―.”
 
154
자기의 배를 어루만졌다.
 
155
“인젠 머리도 넉넉히 자랐어요. 이번엔 저도 데리고 가시지요?”
 
156
“같이 안 가려도 목 매서 끌고라도 가겠네.”
 
157
“아이 좋아. 역시 구주로 가셔요?”
 
158
“구주….”
 
159
안해를 굽어보았다.
 
160
“이봐 홍란. 가는 길에 나라(奈良)와 경도에 들려, 우리 임금님 계시던 곳과 지금 계신 곳을 참배하고 그리고는 세도내해 해변 길 더듬어 장기(長崎)로 ―. 다산(茶山)선생 이하의 선배며 친구들도 두루두루 찾으며, 마누라 뒤에 달고 ― 이번 길은 사실 즐거울 것일세. 다만 연약한 홍란 여사 이 먼 길 능히 감당할지가 문제야. 가다가 업어 달라면 이를 어쩌나?”
 
161
“업어 달라면 업어 안 주시겠어요?”
 
162
“싫으이.”
【원문】3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미분류〕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37
- 전체 순위 : 1351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172 위 / 882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주막
• (1) 정희
• (1)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성암의 길 [제목]
 
  김동인(金東仁) [저자]
 
  1944년 [발표]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김동인의 소설.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인용 디렉터리
☞ [인물] 김동인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해설   목차 (총 : 7권)     이전 4권 다음 한글 
◈ 星巖[성암]의 길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16년 05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