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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두 친구 ◇
카탈로그   목차 (총 : 42권)     처음◀ 1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1. 두 친구
 
 
3
덕기는 안마루에서 내일 가지고 갈 새 금침을 아범을 시켜서 꾸리게 하고 축대 위에 섰으려니까 사랑에서 조부가 뒷짐을 지고 들어오며 덕기를 보고,
 
4
"얘, 누가 찾아왔나 보다. 그 누구냐? 대가리 꼴하고...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거야. 친구라고 찾아온다는 것이 왜 모두 그 따위뿐이냐?"
 
5
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하다는 잔소리를 하다가 아범이 꾸리는 이불로 시선을 돌리며 놀란 듯이,
 
6
"얘, 얘, 그게 뭐냐? 그게 무슨 이불이냐?"
 
7
하며 만져보다가,
 
8
"당치 않은! 삼동주 이불이 다 뭐냐? 주속이란 내 나쎄나 되어야 몸에 걸치는 거야. 가외 저런 것을 공부하는 애가 외국으로 끌고 나가서 더럽혀버릴 테란 말이냐? 사람이 지각머리가..."
 
9
하며 부엌 속에 족치고 섰는 손주며느리를 쏘아본다.
 
10
덕기는 조부의 꾸지람이 다른 데로 옮아간 틈을 타서 사랑으로 빠져나왔다.
 
11
머리가 텁수룩하고 꼴이 말이 아니라는 조부의 말눈치로 보아서 김병화가 온 것이 짐작되었다.
 
12
"야아, 그러지 않아도 저녁 먹고 내가 가려 하였었네."
 
13
덕기는 이틀 만에 만나는 이 친구를 더욱이 내일이면 작별하고 말 터이니만큼 반갑게 맞았다.
 
14
"자네 같은 부르주아가 내게까지! 자네가 작별하러 다닐 데는 적어도 조선은행 총재나..."
 
15
병화는 부옇게 먼지가 않은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딱 버티고 서서 이렇게 비꼬는 수작을 하고서는 껄걸 웃어버린다.
 
16
"만나는 족족 그렇게도 짓궂이 한마디씩 비꼬아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겠나? 그 성미를 좀 버리게."
 
17
덕기는 병화가 '부르주아, 부르주아'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먹을게 있는 것은 다행하다고 속으로 생각지 않은 게 아니나 시대가 시대니만큼 그런 소리가- 더구나 비꼬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18
"들어가세."
 
19
"들어가선 무얼 하나. 출출한데 나가세그려. 수 좋아야 하루에 한 끼 걸리는 눈칫밥 먹으러 하숙에 기어들어가고도 싶지 않은데... 군자금만 대게. 내 좋은 데 안내를 해 줄게!"
 
20
"시원한 소리 한다. 내 안내할게 자네 좀 내보게."
 
21
"여보게, 담배부터 하나 내게. 내 턱은 그저 무어나 들어오라는 턱일세."
 
22
하며 병화는 방 안을 들여다보고 손을 내밀었다.
 
23
"나 없을 땐 도통 담배를 굶데그려."
 
24
덕기는 책상 위에 놓인 피존 갑을 들어 내던지며 웃다가,
 
25
"그저 담배 한 개라도 착취를 해야 시원하겠나? 자네와 나는 착취와 피착취의 계급적 의식을 전도시키세."
 
26
하며 조선옷을 훌훌 벗는다.
 
27
"담배 하나에 치를 떠는- 천생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다!"
 
28
병화는 담배를 천천히 피워서 맛이 나는 듯이 흠뻑 빨아 후우 뿜어내면서,
 
29
"여보게, 난 먼저 나가서 기다림세. 영감님이 나와서 흰동자로 위아랠 훑어보면 될 일도 안 될 테니까!"
 
30
하고 뚜벅뚜벅 사랑문 밖으로 나간다.
 
31
아닌게아니라 덕기도 조부가 나오기 전에 얼른 빠져나가려던 참이다. 덕기는 병화의 말에 혼자 픽 웃으며 벽에 걸린 학생복을 부리나케 떼어 입고 외투를 들쓰며 나왔다. 조부는 병화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다만 양복 꼴이나 머리를 텁수룩하게 하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무어나 뜯으러 다니는 위인일 것이요, 그런 축과 얼려서 술을 배우고 돈을 쓰러 다닐까 보아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32
"내일 몇 시에 떠나나?"
 
33
"글쎄, 대개 저녁이 되겠지."
 
34
덕기도 유한 계급인의 가정에서 자라니만큼 몇 시 차에 갈지 분명히 작정도 안 하였거니와 내일 못 가면 모레 가고 모레 못 가면 글피 가지 하는 흐리멍덩한 예정이었다.
 
35
"언제 떠나든 상관 있나마는 상당히 탔겠네그려?"
 
36
"영감님 솜씨에 주판질 안하시고 내노시겠나?"
 
37
"기대면 줄 것은 있구..."
 
38
"앗! 그래두 한 달치는 해주어야 떠나보낼 텔세. 있는 놈 집 같으면 그대로 먹어 주겠지만, 주인 딸이 공장에를 다녀서 요새 그 흔한 쌀값에 되되이 팔아먹네그려. 차마 볼 수가 있어야지..."
 
39
"흥..." 하고 덕기는 동정하는 눈치더니,
 
40
"자네 따위를 두기가 불찰이지"
 
41
하고 웃어버린다.
 
42
"그러기에 세상은 살라는 마련 아닌가?"
 
43
"딴은 그래!"
 
44
"하지만, 자네 따위는 사귀기가 불찰'이란 말은 차마 아니 나오나보이 그려?"
 
45
병화는 여전히 비꼬아본다.
 
46
"그런 줄은 자네가 먼저 아네그려."
 
47
덕기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한다.
 
48
"내니까 자네 따위를 줄줄 쫓아다니며 토주라도 해서 먹어주는 줄은 모르구..."
 
49
"왜 안 그렇겠나. 일세의 혁명가가 이제 중학교나 면한 어린애를 친구라기는
 
50
창피도 할걸세. 대단 광영일세."
 
51
일 년에 한두 번 방학 때만 오래간만에 만나는 터이나 이 두 청년은 입심 자랑이나 하듯이 주고받는 말끝마다 서로 비꼬는 수작밖에 없건마는 그래도 한 번도 정말 노해 본 일은 없는 사이다.
 
52
중학에서 졸업할 때까지 첫째 둘째를 겯고틀던 수재고 비슷비슷한 가정 사정에서 자랐기에 어린 우정일망정 어느덧 깊은 이해와 동정은 버릴래야 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53
이지적이요 이론적이기는 둘이 더하고 덜할 것이 없지마는, 다만 덕기는 있는 집 자식이요, 해사하게 생긴 그 얼굴 모습과 같이 명쾌한 가운데도 안존하고 순편한 편이요, 병화는 거무튀튀하고 유들유들한 맛이 있느니만큼 남에게 좀처럼 머리를 숙이지 않는 고집이 있어 보인다.
 
54
그 수작 붙이는 것을 보아도 덕기는 역시 넉넉한 집안에 파묻혀서 곱게 자란 분수 보아서는 명랑하지 못한 성미이나 병화는 이 2, 3년 동안에 더욱이 성격이 뒤틀어진 것을 덕기도 냉연히 바라보고 지내는 터이다.
 
55
"헌데, 좋은 데 있다더니 어딘가? 자네 말눈치 같아서는 기껏해야 청요릿집에나 오뎅집에나 가는 것이 불평인 모양이니 오늘은 어디 xx관에 가서 기생이라두 불러 볼까?"
 
56
덕기는 사실 이때껏 가보지 못한 요릿집에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57
"흥, 이건 누구를 병정으루 아는 게로군. 있는 놈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며 등쳐먹는 병정두 아니지만, 그런데는 내 주제에는 어울리지두 않으니까."
 
58
"흥, 토주를 하는 것만 고마운 줄 알라고 생색을 내더니 기껏 선술집인가?"
 
59
"응. 선술집 밑천이라두 내놓고 자넬랑은 기생집으로 가게그려."
 
60
또 비꼬기 시작이다.
 
61
두 청년은 아무래도 발길이 진고개로 향하였다.
 
62
"그러지 말구 여기 들어가서 저녁이나 먹세. 하루에 한 끼니라는 곯은 배를 채워야지."
 
63
술을 좋아 아니하는 덕기는 몇 번 가본 양요릿집 문 앞에 멈칫하며 끌었다.
 
64
"아냐. 저기 좀더 가면 놓은 데 있어. 정체는 모르겠지마는 놀라 자빠질 미인이,
 
65
조촐한 미인이 둘이나 있구..."
 
66
병화는 먹는 것보다는 술 생각이 더 간절하였다.
 
67
"이제 알았더니 숨은 난봉꾼일세그려. 어디, 자네 가는 데가 오죽할라구. 허허허."
 
68
덕기는 비로소 웃으며 따라섰다.
 
69
"어제 끌려가보았지만 바커스라구--그 이름이 좋지 않은가--조촐한 데가 있어. 웬일인지 이런 룸펜을 대환영이거든. 원체 잘생겨 그런지, 서울 장안에서 내가 그만큼 대접받기는 처음이야."
 
70
병화는 아까와는 딴판으로 신기가 좋아서 기고만장이다.
 
71
"흠..."
 
72
하고 덕기는 버커스로 따라선다.
 
73
있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얻어먹기도 싫다, 화려한 좌석에서 어울리지 않게 놀기도 싫다는 병화의 말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요, 그 기분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덕기는 자기를 빗대놓고서나 하는 말 같아서 듣기 싫었다. 그뿐 아니라 언제든지 뺏아 먹고 쓰고 할 것은 다 하면서 게걸대고 입바른 소리를 툭툭하는 것이 밉살맞기도 하였다. 있는 사람의 퉁성으로 자기에게 좀 고분고분하게 굴어주었으면 좋았다.
 
74
그러나 없는 사람이 있는 친구와 어울리면 병정 노릇이나 하는 것 같은 일종의 굴욕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겠고 또 그렇게 구칙칙하거나 더럽게 굴지 않고 자기의 자존심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 취할 모라고 아직 경력 없는 덕기건만 돌려 생각도 하는 것이다.
 
75
주부가 술상을 차려 왔다. 술상이래야 고뿌에 담은 노란 술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오뎅 접시뿐이다.
 
76
술을 좋아하지 않는 덕기는 더구나 그 유착한 고뿌찜을 보고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모든 것이 그 소위 고상한 취미에 맞지 않았다.
 
77
마담은 꼭 째인 얼굴판이 좀 검은 편이었으나 어딘지 교육 있는 여자 같고 맑은 눈 속이라든지 인사성 있는 미소를 띄운 입술을 빼뚜름히 꼭다문 표정이 몹시 이지적인 걸 알 수 있다.
 
78
"놀라 자빠질 지경이라던 여자가 지금 그 여잔가?"
 
79
덕기는 병화가 주부가 들어가기도 전에 그 큰 고뿌를 들고 벌떡벌떡 다 켜기를 기다려 물어보았다.
 
80
병화는 오뎅을 반이나 덤뻑 떼물어서 우물우물 씹느라고 미처 대답을 못하다가 반씩반씩 씹는 말로,
 
81
"아니--참 물어볼걸."
 
82
하고 입으로는 여전히 씹으면서 손뼉을 친다. 병화는 먹기에 정신이 팔린 것은 아니나, 덕기에게 말은 그렇게 하였어도 실상 이 집에 미인이 있고 없는 데에 그리 마음이 쓰이는 것이 아닌지라 이때껏 무심하였던 것이다.
 
83
주부가 오니까 병화는 씹던 것을 이제야 삼키고,
 
84
"그 사람 어디 갔소?"
 
85
하고 묻는다.
 
86
"예, 지금 막 목욕 갔어요. 곧 오겠지요"
 
87
하며 중턱에 서서 상긋 웃고는 시선을 덕기에게 준다.
 
88
주부의 눈에 비친 덕기는 해끄무레하고 예쁘장스러운 똑똑한 청년이었다. 이 여자에게는 조선이라는 경멸하는 마음은 그리 없으나 그 해끄무레하고 예쁘장스러운데다가 학생복이나마 값진 것을 조촐하게 입은 양으로 보아서 어느 부잣집 아기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얕잡아보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손님(병화)이 그동안 두어번 보았어도 허술한 위인은 아니 모양인데 그런 사람하고 추축이 되면 저 청년(덕기)도 그런 부잣집 귀동아기로만 자란 모던 보이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여자는 올 가을에 처음으로 이 장사를 벌인 터이라, 드나드는 손님이 하도 많지만, 이런 장사에 찌들어서 여간 것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신경이 굳어지지 못한 탓이라 할까, 여하간 여염집 여편네의 호기심으로 처음 보는 남자마다 유난히 호기심을 가지고 인금 나름을 하는 것이다.
 
89
그러면서도 어쩐 일인지 별안간 머릿속에 정자 생각이 떠올랐다. 정자란 조선에 와 있는 xx지방 재판소 오 판사의 맏딸이다. 성은 오가라도 일본말로 '구레'라고 하는 일본 사람이다. 이 주인 여편네가 xx시에서 도 자혜병원에서 간호부장 노릇을 할 때에 오정자가 무슨 병으로든가 입원한 후로 자연히 가까워졌던 것이다.
 
90
그러나 왜 지금 그 정자의 생각이 났는가? 어쩐지 덕기에게서 받은 인상이 그 정자와 남매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매--가당치도 않은 생각이다. 민족이 다른 사람이다.
 
91
그러나 그보다도 정자가 퍽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사회 비평이나 정치 비평을 도도히 할 때마다 이 집 주인은 늘 웃으면서 다만 귀엽게 들어주기도 하고 장단을 맞추어주기도 한 일이 있었더니만큼 자기 역시 비교적 신지식에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터이라, 머리 텁수룩한 청년(병화)이 친구들과 와서 일본말로 저희끼리 떠드는 소리를 귓결에 들을 때도 소위 '마르크스 보이'로구나 하고 반은 비웃음 섞인 친근한 감정을 느꼈었기 때문에 지금 보는 덕기도 한 종류려니 하는 생각도 부지중에 나서 '마르크스 걸'인 정자가 불시에 연상된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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