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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새 번민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13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13. 새 번민
 
 
3
부친은 간밤부터 감기가 더쳤다. 큰집에서 하인이 다녀간 뒤에 상훈이 갔을 때에는 의사도 와서 앉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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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해도 폐렴이 되기가 쉽겠으나 요새 며칠 특별히 주의하라 하고 가버렸다.
 
5
상훈은 그래도 한약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자기가 발론을 하면 부친이 안 들을 것 같아서 지 주사를 시켜서 말씀을 해보았더니 영감은 싫다고 한다. 별안간 개화를 해서 그런지 감기는 내치라도 양약이 한약만 하고 더구나 폐에 관한 것은 양약이 좋다고 고집을 부렸다.
 
6
그러나 상훈의 생각에는 그날에 부친이 안에서 취침하고 나오던 판에 넘어졌었고 감기 기운도 그때부터 있었던 터이고 하니 한약 몇 첨으로 다스려버렸으면 그만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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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하는 수 없이 지 주사는 종일 영감 옆에 앉아서 허리와 가슴에 찜질을 갈아대고 있었다. 가슴에는 폐렴이 될 염려가 있다고 하여 오늘부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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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사지와 머리만 빼놓고는 오줌 싼 자리에 누운 듯이 뜨뜻하고 촉촉한 솜 속에 파묻혀 있는 셈이었다. 그것이 영감에게는 처음 보는 일 이요, 뼈만 남은 몸뚱어리에 퍽 좋았다. 조금 몸을 추스를 수만 있으면 안방으로 옮겨 들어가서 수원집의 간병을 받고 편안히 누워 있겠으나 허리 때문에 절대로 움직이지 말랄 뿐만 아니라 또 사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영감은 안방에만 들어가 누우면 한약을 써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약에 반대를 하는 것은 정말 양약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양약은 병마개를 종이로 풀칠까지 해서 꼭 봉해오는 것을 머리맡에 두고 자기 손으로나 혹은 자기가 보는 앞에서 따라먹는 것이요, 또 만일에 약에 무슨 변통이 생기더라도 즉시 의사도 그만큼 책임을 지고 약을 쓰겠지만 한약이면 달여서 사랑에 내올 때까지 일일이 감독도 할 수 없거니와 그 중간에 몇 사람의 손을 거치느니만큼 안심이 아니 되는 것이다. 사랑에서 자기 눈앞에서 달이게 한다면 누구나 변괴로 여길 것이요, 자기가 심중을 들추어 내보이는 셈쯤 될 뿐 아니라 도대체 양약처럼 몇 번에 잘라 먹는 것이 아니다. 한약이란 한 번에 쭉 마셔버리는 것이니까 오장에 들어가만 놓고 나면 그만이다. 다시 무를 수가 없다. 또 약그릇을 씻어버리고 약찌끼를 없애버리면 무슨 일이 있은 뒤라도 감쪽같이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영감의 신경과민은 이러한 공상과 강박관념을 나날이 심하게 한 것이었다. 더구나 수원집이 며느리를 헐어서 속삭인 뒤로 더하여진 것이다. 죽을까 보아 생겁을 벌벌 내는 사람에게 자식들이 어서 죽기를 조인다고 하여 놓았으니 겁도 내는 것이 무리하지 않다면 무리하지도 않을 것이나 게다가 몸을 꼼짝 못하는 생병이다. 워낙 잠이 없는 늙은이가 긴긴 밤을 새느라니 느는 것은 그런 까닭 없고 주책없는 공상뿐이다. 더구나 자식부터 노리고 있는 재산이 있다. 생각하면 믿을 사람이라고는 그래도 한자리에서 자는 귀여운 수원집뿐이요, 그 외 놈년들은 남이요, 한푼이라도 뜯어먹지 못해서 눈이 벌개 돌아다니는 놈들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9
상훈은 저녁밥 후에 교회에 가는 길에 큰집에 또 한 번 들렀다. 환자는 저녁때가 되면 오한이 심하다가 이맘때쯤에는 번열이 다시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훈으로서는 여전히 약 쓰는 데 개구를 못하고 병인은 안방으로 옮겨만 달라고 어린애 보채듯 보챌 뿐이다. 야기를 쐬어서는 아니 될 테니 내일 들어가시라고 하여 간신히 간정이 되는 것을 보고 상훈은 예배당에 가서는 부친의 병 위문을 받기에 상훈은 분주하였고 기도를 할 때에도 상훈의 부친 병이 어서 쾌차하게 해달라는 한마디를 끼울 것을 잊지들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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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토요 예배는 9시 전에 끝이 났다. 예배가 끝난 후 마장축들이 슬슬 상훈의 기색만 보면서 따르는 수작이 어디로 놀러 가자고 발론이 났으면 좋을 듯한 눈치였으나 상훈은 모른 척하고 혼자 전차를 타버렸다. 진고개로 올라가는 길이니 전차를 탈 필요도 없지만 그 사람들을 피하려니까 길을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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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바커스 앞을 지나면서 들어갈 생각은 아니 났다. 속에는 손님이 없는지 조용한 모양이나 그대로 지나쳤다. 어제 봉욕하던 교번소 앞을 지날 때 저절로 외면이 되면서 경애가 빠져나가다가 순사에게 고작을 들려서 끌려들어가던 꼴을 생각해보고는 그래도 경애가 가엾었다. 그러나 병화와 미친 사람처럼 키스를 하고 자기에게 빗대놓고 창가를 하곤 하던 양이 눈앞에 떠오르니까 또 얄미운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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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이태! 그동안에 변하니 변하니 해도 그렇게 변하였을까...?'
 
13
상훈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일전에 아들이 '책임'이란 말을 꺼냈던 것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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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가 내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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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저 혼자라도 변명할 거리를 생각해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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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그 책임에 대하여 나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면 좋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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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스스로 물었다. 그러나 아무 방침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하여간에 어제고 오늘이고 경애를 만나러 가는 것이 그 '책임'을 어떻게 조처하려는 것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어제는 다만 묵은 추억이 유혹한 것이요, 오늘은 어제의 꼬리가 달려서다. 그보다도 병화에 대한 질투와 자식의 친구 앞에서 보여준 모욕을 참을 수가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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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호텔에 들어간 상훈은 사무소로 바로 들어가서 급히 인력거를 불러 달래다가 경애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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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호텔을 한 3년이나 발을 끊었었건마는 하녀들만은 갈렸으나 그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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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왜 그렇게 한 번도 안 들러주세요 옥상(아씨)께서도 다 안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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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 사무원은 이런 인사를 하고 세월 없는 타령을 꺼내놓았다. 상훈은 하회를 기다리는 동안에 이야기 대거리를 하다가 뒤에 단 하나 있는 온돌방을 치운 데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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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은 언제 보나 산뜻하고도 아늑하고 반가웠다. 방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이 방이 주는 인상이나 과거의 추억과 연상이 얼마나 반갑고 유쾌한지 모르는 것이다. 5년 전- 그 때도 이런 겨울날이었지만 그때와 변한 것은 순 조선식으로 꾸며놓았던 보료며 장침 안석들이 더러워진 것과 방에 이제 불을 때느라고 그런지 알콜 불을 켠 스토브를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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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석유 냄새가 훅 끼치는 데에 눈을 찌푸리면서 화로만 놓아두고 알콜 스토브는 내가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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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기운이 훌쩍 기친 보료 위에 앉았으니 금시로 쓸쓸한 증이 나면서도 마음속은 봄을 만남 듯이 서성거리었다. 방 안을 휘 돌아다보니 처음 경애와 이 방에 들어앉을 때의 생각이 아름다운 꿈처럼 머리에 떠올라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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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에 아니 오고 보면 어쩌나 하는 애가 씌기 시작하였다. 지금과 같이 이 방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혼자 기다리고 앉았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어제도 그랬었고 그제도 그랬던 것처럼 먼 날의 일이 이상히도 가깝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경애가 아니 올까보아 애가 타고 몸이 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앉았다가 결국에 오지도 앉고 혼자 뒤통수를 치고 나가게 되면 주인이나 하인들 보기에 창피할 것이 먼저 걱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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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가 차를 날라왔다. 그래도 그때까지 보낸 인력거꾼은 이직 아니 왔다. 상훈은 그대로 입고 앉았는 외투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찾다가 담뱃갑은 아니 나오고 조그만 책이 만져지는 걸 무심코 꺼내보았다. 성경책이다. 혼자 픽 웃고서 누가 볼까봐 무서운 듯이 다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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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고 보니 오늘 교당에 가는 날이라 담뱃갑을 아니 넣고 나왔다. 담배를 가져오라 하려고 초인종을 누르려니까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 온다. 상훈은 새삼스러이 가슴이 설렁하며 외투를 급히 벗어 걸고 얌전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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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방문 밑에서 나는 발걸음 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다. 하녀가 문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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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다가 오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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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전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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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왔느냐니까 그런 게 아니라 인력거는 도로 보내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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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나 되었는데 좀 잇다가 온다면 오늘은 여기서 자게 될 거니 잘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보료 밑은 차차 더워오나 그래도 춥기도 하고 심심하여 술이나 한 잔 먹고 싶으나 주가가 있어 만나면 위신이 깎이고 또 어제 모양으로 흐지부지 실없는 농담이나 하고 헤어질 것 같아서 참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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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입에도 아니 대는 차를 두 번째 갈아 온 것이 또 식어버릴 때까지 소식이 감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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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웅숭그리고 드러누웠다가 제일 신선해 견딜 수가 없어서 기에 술을 명하고 말았다. 11시나 되어 술을 시작하고 앉았으니 이런 외딴 방에 하녀부터도 붙어앉았으려고 아니한다. 그러나 혼자 술을 먹는 수도 없다. 호텔 사무원을 불러들이니 이자도 추운 판에 암칫국하고 들어와 앉아서 대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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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이 오시는 것은 아니겠지요만 매우 늦습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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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또(사무원)는 술 한 잔에 고개를 세 번씩 꼬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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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이라는 것은 경애 말이다. 이 사람은 그 후에 경애와 북미창정에서 살림하는 것을 상훈 자신의 입으로 들어서 아는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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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누구를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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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상훈은 웃었다. 경애가 조금 있으면 오겠지만 잔소리가 나올 게 귀찮으니까 이렇게 대꾸를 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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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 너무 외도가 심하시면 옥상이 가만 계시겠습니까? 그런 좋은 옥상을 가지시고도 온 영감도 너무 과하십니다. 욕심이 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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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또는 이런 소리를 하고 또 껄껄 웃는다.
 
42
으레 어떤 종류의 계집이 올 것을 알아차리는지라 내일 아침이면 이 세월없는 판에 행하가 상당하리라고 반또부터 속으로 이런 손님을 반기는 것이다. 더구나 상훈에게는 씀씀이가 호활한데 맛을 들여서 대접부터 융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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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외도를 한다고 별명이나 짓나. 허허... 난 원체 계집복이 없어서...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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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서 더 있으면 어쩝니까? 그때 그 색시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 후에 또 좀 들르실 줄 알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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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또는 벌써 이태 3년이나 지난 옛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경애와 그렇게 된 후 재작년 봄에 한참 달떠 돌아다니는 판에 숨어 다니는 술집 주모가 대준 모던 걸 하나를 데리고 주체를 할 수가 없어서 이 집에 데려다가 한 사날 묵혀 보낸 일이 있었다. 그 후에도 두어 번 더 와서 하루씩 묵혀 보낸 일이 있으나 상훈은 벌써 잊어버린 생게망게한 묵은 치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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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후에는 벌써 이태나 되어갑니다만 아주 발을 뚝 끊으셨으니 그 동안은 퍽 얌전해지셨습니까? 혹시는 단골을 다른 데로 정해놓고 다니십니까? 저희가 거행 잘못한 것은 업을 듯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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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웃고만 앉았으니까 반또는 또 이런 소리를 하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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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없이 날 난봉꾼으로 만드네그려. 허허... 그건 하여간에 사람을 또 좀 보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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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럽지요. 어딥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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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바로 요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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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상훈은 그런 조그만 술집에 이 집 사람을 보내서 경애를 데려오는 것은 반또 보기에도 창피하여 망설이다가 경애가 그 술집을 경영한다는 이야기를 간단히 체면 좋게 꾸며대고서 사람을 보내라고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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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그러면야 저라도 가서 모셔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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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반또는 굽실거리며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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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간 지 10분도 못 되더니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이리로 향하여 온다. 벌써 데려왔을 리는 없고 마침 제풀에 왔나 하고 가만히 앉았으려니 문이 활짝 열리며 경애가 딱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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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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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코웃음을 치는 표정이나 선뜻 들어오려고도 아니한다. 술이 취했나 하고 쳐다보니 그렇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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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도 이 방을 들여다볼 제 반갑기도 하면서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을 만큼 정이 떨어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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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휙 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났다. 만나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으나 어제 의외로 찾아와서 그렇게 하고 갔으니까 으레 한 번쯤은 또 오려니 하는 짐작도 없지 않았던 차에 기별이 왔기에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나 보고 실컷 듣기 싫은 소리도 하여준 뒤에 어린애 문제를 귀정지어보려고 오기는 왔으나 지지벌개 앉았는 이 중늙은이를 더구나 이 방 속에서 바라보니 속이 볶여서 치받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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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탓을 하랴. 내가 어려서 그 수에 넘어간 것이 어림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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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불뚝 심지가 나고, 나도 남과 같이 시집을 가서 재미있게 살아 보았더면 하는 생각이 날 제마다 이렇게 생각하여 왔지만 오래간만에 딱 만나니 그래도 심사가 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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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는 들어와서 멀찌감치 모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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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데 이리 가까이 앉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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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감개무량한 낯빛과, 어제 바커스에서 뒹굴고 교번소서 아들 같은 순사에게 굽실거리던 상훈이 아니라 옛날 숭배하던 시절의 상훈이 죽었다 살아온 듯이 점잔하고 엄숙한 작태를 꾸며 보인다. 경애는 속으로 흐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남자를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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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라고 하셨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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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시비조로 묻는다. 상훈은 대답이 탁 막혔다.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오라기는 한 것이지만 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자기도 분명히 알 수 없다.
 
66
"시비하려는 사람처럼 그럴 것 무엇 있소. 지난 일은 도파니 내가 잘못이니까..."
 
67
하고 말을 이으려는데 경애를 데려다두고 물러갔던 하녀가 되짚어와서,
 
68
"오늘은 묵으시는지요? 묵으시면 묵으실 차비를 차리구요..."
 
69
하고 묻는다. 상훈은 으레 묵을 작정이면서도 시계를 공연히 들여다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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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으니 묵기로 하지."
 
71
하고 경애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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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곧 갈 테니 문은 걸지 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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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가 옆에서 주의시켰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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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렇게 준비를 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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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상훈은 눈짓을 했다.
 
76
하녀는 다 알아차렸다는 듯이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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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데가 없을까봐 부르셨군요? 오늘도 파출소에 가서 잘까봐 애가 씌어 오셨군!"
 
78
하고 경애는 냉소를 한다.
 
79
"아무려나! 누가 붙들자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간만에 이야기나 좀 하자고 청한 것이니 바쁘건 지금이라도 가고 또 다른 기회를 만듭시다그려."
 
80
상훈은 그리 탐탁치 않은 눈치로 탁 내맡기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경애는 남자가 냉연한 태도를 보이니까 도리어 김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81
상훈은 언제나 이러한 수단으로 여자의 마음을 낚아왔고 또 경애는 이 사람의 그 수단에 넘어간 것이었다. 처음에 밤거리를 거닐다가 손목을 잡혔을 때 상훈은 실성한 사람처럼, 혹은 자기의 불의의 실수를 금시로 뉘우치는 것처럼 홱 뿌리치고 달아났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한 자리에 제대로 섰던 경애의 마음은 상훈을 향하여 한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두 걸음 다가서게 되었었고, 그 다음다음 날 학교에서 간단히 사과 편지를 주어서 호기심과 막연한 기대를 들쑤셔 놓고는 모른 척하니까 경애는 도리어 서운한 생각이 들어서 이편에서 답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 시초가 되어서 오늘날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5년 전 그 때는 심지가 미정하고 이성을 꿈결같이 찾던 때이니까 한층 더 그랬지만 지금도 누구나 짓궂이 덤벼드는 그런 성질이었다. 누구나 다소 그렇지만 이 여자는 한층 더하였다.
 
82
"어제 오늘 별안간 웬일이에요. 이제는 하느님이 나 같은 년도 만나도 좋다고 하시던가요? 매당집의 계집년들이 떼도망을 갔나?"
 
83
매당집이라는 것은 상훈의 축이 수년래로 비밀히 술을 먹으러 다니는 고등 내외 술집이요 동시에 뚜쟁이들과 소위 은근짜의 소굴이다. 그러나 경애가 매당집을 안다는 것은 천만 의외다.
 
84
"매당집이 어디란 말인가?"
 
85
하고, 상훈은 웃다가 이 계집도 그런 데 연줄이 닿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까지 타락한 것에 새삼스러이 놀랐다. 무엇에 속았던 것처럼 엷은 실망까지 느껴졌다.
 
86
"그래 아이는 잘 자라지?"
 
87
한참만에 다시 말을 꺼냈다.
 
88
"아닌적엔 그건 왜 물으시나요?"
 
89
경애는 아이 말을 꺼내니까 지금과는 딴사람처럼 얼굴이 발끈해지며 싸우려는 사람처럼 무섭게 쳐다보다가,
 
90
"조상훈 씨의 명예를 위하여 이 세상을 이따라도 하직할 테니 안심하세요!"
 
91
하고 아랫입술을 악문다. 눈물까지 핑 돌았다.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인가? 이 남자에 대한 애정인가? 이 남자에게 못 들을 소리를 듣고도 참아 내려온 원한으로인가? 어쨌든 뼈에서 우러나오고 치가 떨리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었다.
 
92
"왜 그년이 앓나?"
 
93
상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남의 말 하듯이 묻는다.
 
94
"앓든 숨을 몰든 당신이 아랑곳이 무어예요? 조가의 씨가 아니라는 다음에야 더 말할 게 무어 있기에!"
 
95
하고 경애는 더 앉았을 수가 없는 듯이 발딱 일어섰다.
 
96
"왜 이래?...앉어요."
 
97
"앉긴 왜 앉어요? 당신 앞에 무엇하자고 앉었에요? 뉘놈의 자식이든 제 뱃속으로 난 자식이니까 내 무릎에 뉘고 죽일 거니까 곧 가봐야 해요."
 
98
입으로는 이런 소리를 하면서도 이 남자가 정말 끝끝내 냉담히 할까 보아 염려가 아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또 이대로 헤어진 뒤에 남자가 영영 시치미 떼어버리면 걱정 아닌 것도 아니다. 이태 3년을 모른 척 하다가 별안간 찾게 된 것은 덕기가 무어라고 하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렇게 전황한 판에 도저히 살아가는 수가 없고 바커스에서 밤낮 뒹군댔자 어엿하게 돈 한 푼 생기는 형편도 아니다. 어쨌든 이 사람을 다시 붙들고 집 귀정도 내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99
"나도 생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요, 어떡하든지 의논해서 잘 조처할 게니 염려 말아요."
 
100
하고 상훈은 옷자락을 붙들어 앉히려 한다.
 
101
경애는 상훈이 너무나 선선한 데에 도리어 의심이 들었다. 이 느물느물한 사나이가 무슨 생각으로 별안간 이러는 것인가? 심심파적으로 또 얼마 동안 농락이나 하다가 툭 차버리려는 계교속인가? 툭 차버리거나 말거나 그까짓 것은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지만 이번에야말로 어설피 떨어지지는 않겠다- 골탕을 먹여도 단단히 먹이고 말리라- 고 혼자서 생각하였다.
 
102
"그럼 어떡하시겠단 말예요?"
 
103
경애는 다시 앉으며 물었다. 그러나 상훈은 또 말이 막혔다. 경애를 다시 찾은 것도 일시적 충동으로이었지만 더구나 아이에 대한 구체적 방침을 생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104
"글쎄 어떡했으면 좋을까? 소원대로 말을 해 보지?"
 
105
"난 그애를 내놓고는 살 수 없에요. 지금 독감에 걸려서 내일 어떨지 이따 죽을지는 모르지만..."
 
106
상훈은 이왕이면 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애가 죽으면 경애와의 인연이 아주 끊기고 말 것이니 그것도 아니 되었다.
 
107
"글쎄 누가 그애를 떼놓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자면 모든 오해고 불평이고 다 잊어버리고 다시 살아볼 도리를 차려야 그애 신상에도 좋을 것이 아닌가? 나는 아무래도 놓으나 경애만 마음을 돌리면 당장이라도 원만히 해결될 것이지...?"
 
108
"별안간 그건 무슨 소리세요. 그따위 입에 붙은 말에 넘어갈 이전 홍경애도 아니지만 내 사정이 그렇게는 못 되어요."
 
109
경애는 지금 와서는 어름어름해두고 실사고만 하였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퉁겨 보았다.
 
110
"왜...?"
 
111
하고 상훈은 의외라는 듯이 묻는다. 다른 남자가 있어서 그러느냐는 뜻이다.
 
112
2,3 년을 젊은 것이 그대로 지냈을 리가 없고, 그 동안 먹고사는 것은 어디서 났을까? 그런 것을 지금 캐어보는 사람이 어림없다. 그러나 그 남자가 누굴까? 설마 병화는 아니겠지. 하지만 어제 눈치로 보아서는 병화일지도 모른다. 병화는 돈은 없으나 새파랗게 젊고 인물이 깨끗하다. 돈 10원을 내주어야 눈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자니 목통이 커서 그럴지 모르지만 예전에 지내보아도 그 모녀가 돈에는 그리 더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 병화에게 돈 없다고 뜻이 안 맞을 리도 없다.
 
113
이렇게 생각하면 경애가 매당집 같은 데 드나드는 축과 어울리나보다 하는 추측은 가당치도 않은 생각이요, 주의자들 속에서 '여왕' 노릇을 하는 '마르크스 걸'이 되었는지도 모를 것 같다. 그렇다면 더욱이 가만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114
"김병화는 언제부터 알았어?"
 
115
상훈이 불쑥 이렇게 물으니까 경애는 벌써 그 배짱을 알아차리고,
 
116
"왜요?"
 
117
하며 배쭉 웃는다. 경애는 주책없는 소리 말라는 경멸하는 마음으로 웃었으나 상훈에게는 그 웃음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118
"어제 아무리 주기가 있다기로 그애가 내 자식 친구인 줄을 번연히 알 터인데 내 앞에서 그게 무슨 짓이야?"
 
119
이렇게 나무라 보았다.
 
120
"누가 누구의 친군지 어떻게 일일이 안답니까? 아들의 친구를 데리고 다니며 술을 자시는 이가 잘못이지요."
 
121
"그야 길가에서 취한 아이에게 붙들려서 하는 수 없이 끌려들어갔지만..."
 
122
어제 부득이 또 우연히 끌려갔던 변명을 하고 나서,
 
123
"하여간 아무리 취했기로 그런 추대가 있을 리가 있나! 파출소에 끌려다닌 것도 키스 때문 아닌가."
 
124
하고 또 나무란다.
 
125
"추태는 무슨 추태! 그런 추태를 부리게 한 사람은 누구기에?"
 
126
경애의 이 말은 남자를 콕 찔렀다. 아들이 말하던 '책임'을 묻는 것이다. 파출소에 끌려간 것도 당신 때문이란 말이다.
 
127
"그러지 말고 분명히 말을 해요. 공연히 남 창피한 꼴 당하지 않게!"
 
128
상훈은 몸이 달아간다.
 
129
"무얼 분명히 말하는 것이구 무에 창피하단 말예요? 밤낮 창피창피 하지만 창피한 노릇을 왜 벌어 하시랍디까?"
 
130
경애는 또 코웃음을 친다. 상훈은 점점 더 의혹이 들어간다. 의혹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131
"노골적으로 말하면 말이야..."
 
132
"어째요?"
 
133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배쪽 코웃음을 치는 양이 이거 왜 겉몸이 달아서 이래! 하는 표정이다.
 
134
"탁 터놓고 말하면 누구하고 살림을 할 텐데 그 아이가 성이 가셔서 조처를 해 달라는 말이란 말이야?"
 
135
"왜 그렇게 '말이야'가 많으슈?"
 
136
하고 경애는 여전히 남자를 놀리며 우박을 주다가,
 
137
"그렇단 말예요!"
 
138
하고 한 마디 내던지고서는 담배를 붙인다.
 
139
두 사람의 이야기는 벗으러져 버렸다.
 
140
"이태 3년씩 모른 척할 때는 어제요, 별안간 몸이 달아서 내 생활의 비밀을 알려고 애를 쓰실 제는 언제요? 내야 어떻게 살든지 누구하고 결혼을 하든지 그거야 아랑곳하실 게 뭐예요. 하여간 그 아이 민적부터 넣어주시고 그 아이 평생 기르고 살아갈 몫을 떼어 내놓으세요. 데려가다가 기르라는 것은 아니니."
 
141
"민적이 그렇게 급한가?"
 
142
"급하지 않으면, 이따 죽어도 당장 파묻은 수가 없고 요행히 살아나서 유치원에라도 보내고 남과 같이 학교에를 보내자면 어떡하란 말예요."
 
143
경애는 남자 편에서 허덕허덕 덤벼드는 눈치니까 막 버티어보는 것이다.
 
144
"글쎄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정말 결혼을 할 테란 말이야?"
 
145
"결혼할 테예요. 할 테니 어쩌란 말예요?"
 
146
"누구하고?"
 
147
"그건 알아 무얼 하세요?"
 
148
"아니, 글쎄 작히나 좋으랴 싶어서..."
 
149
하고 상훈은 머쓱해 웃어버린다.
 
150
아무리 이야기를 하여야 속 각각 말 각각임을 피차에 깨닫자 오늘은 이대로 헤어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훈으로서는 경애가 확실히 결혼하는지 또는 누구와 당장 사는지 그것만은 알아두고 싶었다. 다시는 마음을 돌리게 할 여지가 없다면야 애를 써 쫓아다니며 만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 만날 때는 그렇지도 않더니 이렇게 만나니 욕심이 다시 머리를 드는 것이다. 이때껏 계집을 많이는 못 보았으나 이것저것 보는 중에 경애만한 계집도 사실 얻기 어려운 것을 깨달았다. 마누라와는 이제는 다시는 제대로 들어설 수 없고 그렇다고 마누라가 죽을 때만 바라고 언제까지 홀아비 생활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무어나 하나 얻고야 말 테니 동가홍상이면 이 계집을 다시 붙드는 것이 상책이요, 그렇게 되면 아이 문제도 원만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뒤에 정말 누가 있다면 섣불리 건드려만 놓아서 자기 마음만 뒤숭숭하게 되고 또는 혹을 떼려다가 붙이는 셈으로 어린애만 안고 자빠지게 될 것이다.
 
151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런 술집에서 일을 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는 딸린 남자가 없으나 요즈음에 작자가 나섰거나 나설 형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혹시 병화일까? 그렇다면 일이 우습게 되고 창피하여 갈 것이나 아무리 돈에 담박하다 하여도 설마 아주 빈털터리인 병화를 어릴 리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152
"그러면 아이는 내가 데려가기로 하지."
 
153
상훈은 아이만 안고 자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슨 굳은 결심이나 있듯이 힘있게 한마디하였다.
 
154
"데려다 어떻게 하시게요?"
 
155
"어떻게 하든지 내 자식이니까 내가 데려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게 되고 보면 그애 신상에도 좋지 못할 것이요, 신혼부부에게도 성이 가실 게 아닌가?"
 
156
"남의 사정 몹시 보시는군요."
 
157
경애는 비꼬아보았다. 별안간 자식 귀한 생각이 났다는 것도 말이 아니요, 도대체 믿을 말 같지도 앉으나 짓궂이 권리를 주장하고 뻗대면 성이 나는 일이다.
 
158
"하여간 그렇게만 하면 일이 순편히 낙찰될 게 아닌가?"
 
159
말을 시키느라고 짓궂게 들쑤신다.
 
160
"안 되어요. 자식을 아비에게 딸린 것이요, 에미게는 권리가 없으란 법이 어데 있어요?"
 
161
"암, 자식은 아비에게 딸린 것이지! 법률이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고 도덕 관습이 그런 것을 어쩌나?"
 
162
상훈은 분명히 주장한다.
 
163
법률이고 도덕이고 난 몰라요. 나는 그 자식은 못 내놓아요. 데려다가 말려 죽이려구?"
 
164
"결국에 그 지식을 내세우며--자식 떠세를 하면 돈이 나올 줄 알지만 안 될 말이지."
 
165
상훈은 물론 미운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나 분을 돋워주려고 밉둥을 부리는 것이다.
 
166
"이것두 말이라고 해! 내가 당신의 돈을 얼마나 썼다고 그런 소리가 뻔뻔스럽게 어느 입에서 나오는 거요? 난 자식 팔아 당신 밥 얻어 먹어 본 일이 없소. 아니꼬운 돈! 이때까지 내 자식 아니랄 때는 언제요, 자식 찾을 생각은 무엇 때문에 들었다는 거요?"
 
167
"이 때까지 먹지를 못했으니까 좀 먹어보려고 자식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야 결혼한다면서- 서방 얻어 가는 사람이 남의 자식을 붙들고 늘어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
 
168
"그만 둬요! 이것도 사람의 탈을 쓴 사람의 말이람! 내가 돈을 먹자면 아무렇게 하면 못 먹어서? 정조 유린죄로도 몰 수가 있고, 위자료를 청구하려도 어엿이 청구할 테요. 부양료도 받겠고... 자식 내놓고 맡으라면 누가 성이 치받겠기에! 해 봐요! 마음대로 해 보슈. 나도 이제는 참을 대로 참았으니까. 수단껏 할 테니!"
 
169
실없이 말다툼이 되니까 경애는 바르르 떨면서 모자를 만적거리고 일어서려 한다.
 
170
"그러면 누가 눈 하나나 깜짝할 줄 아는 게로군. 어떤 놈이 뒤에서 쑤석거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연히 주책없는 소리 말고 좋도록 의논을 하잔 말야."
 
171
상훈은 다시 휘갑을 치려 한다. 그러나 저편이 수그러지는 것을 보자 경애는 한층 더 뾰롱뾰롱하며 일어서 버렸다.
 
172
"난 몰라요. 그래도 조금은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본정신이 든 줄 알았더니... 개꼬리 3년 묻어야 황모 못 된다더니..."
 
173
마지막 한 마디를 내던지고 경애는 휙 나가버렸다. 상훈은 좀 지나쳤다고 후회를 하면서도 붙들려고 아니하였다. 붙들면 점점 덕 약점을 잡히는 것 같고, 더구나 개꼬리 3년 묻어도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체면을 차려서라도 노하여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원문】새 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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