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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편지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17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17. 편지
 
 
3
"필순아, 군불도 그만두고 방이나 좀 치워라. 오늘도 또 어디서 한잔 걸린 게다 보다."
 
4
저녁 밥상을 내다놓고 필순이 설거지를 하려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것을 모친이 한사코 올라가서 쉬라고 쫓아내다가 이번에는 동나무 단을 들고 나서는 것을 보고 그것도 말리는 것이었다.
 
5
모친은 추운데 온종일 뻗치고 온 딸을 위하여 애쓰고 딸은 찬물에 하는 설거지를 모친에게 쓸어 맡기기가 딱한 것이다.
 
6
"오늘은 전차 타고 와서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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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건넌방 군불을 때기 시작한다.
 
8
불을 한 거듬 넣다가 아궁이 앞에 종이 부스러기를 모아서 들이밀려던 필순은 손을 멈칫하고 그 대신 나무를 또 꺾어넣어서 불을 살라놓고 눈에 뛴 반 토막 양봉투를 집어 불에 비쳐본다. 상경구 무슨 정이라고 번지 쓴 것이 덕기의 편지 겉봉 같아서 별뜻이 있는 것은 아니나, 집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세 토막, 네 토막 난 것이나 속에 편지가 접은 채로 찢어진 알맹이를 꺼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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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구경이나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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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던 것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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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만나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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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보람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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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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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운데 토막인지 위아래 없는 이런 말을 읽다가 양을 만나고 가...라는 구절을 두 번 세 번 노려보고는 얼굴이 저절로 취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양이란 글자 위에는 암만해도 필순이란 두 글자가 씌었을 것 같다. 아궁이의 불은 넣기가 무섭게 호르르 타고는 껌벅거린다. 필순은 수지를 뒤지는 손 밑이 컴컴하여지는 것을 보고야 깜짝 놀라 나무를 꺾어 넣는다.
 
15
이 편지도 여러 장을 찢어버리는 길에 함께 찢어버린 것인지 좀처럼 다른 토막이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급한 대로 뒤져서 지금 것과 맞대어 보니 의미가 잘 닿지 않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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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없는 말로만 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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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할 의향...
18
...도리는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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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구절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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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그렇게 뒤지고 있니? 바람은 부는데 어서 때고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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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이 부엌문을 찌이걱 닫으며 소리를 치는 바라에 필순은 정신이 홱 돌며 북더기를 손으로 긁어 들이뜨리고 몽당비를 들어 아궁이 앞을 쓱쓱 쓸어 놓은 후 기왓장으로 막고는 마루로 올라왔다.
 
22
"방은 내가 치울게 안방에 들어가 앉어라."
 
23
그래도 딸을 어서 뜨뜻한 데 쉬게 하고도 싶지만 그보다도 홀아비 방을 커단 딸에게 치우라고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집안 식구 같다 해도 나이 찬 딸을 가진 어머니의 생각은 늘 조심스러웠다.
 
24
"괜찮아요. 내가 칠 테야요."
 
25
필순은 얼른 비를 들고 앞장서서 들어갔다. 퀴퀴한 사내 냄샌지 기름때 냄샌지가 혹 끼쳐서 필순은 눈살을 찌붓한다.
 
26
"에이 방 속두..."
 
27
코를 찌르는 냄새가 좋을 것도 없으나 싫을 것도 없어 필순은 이런 소리만 하고 비질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친이 어서 가주었으면 좋았다. 방을 치울 정성이 난 것보다도 서랍을 좀 뒤져보고 싶은 것이었다.
 
28
모친이 건너간 뒤에 비를 놓고 책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지금 본 덕기의 편지가 경도 가서 처음 온 것인 모양인데 혹시 그 후에 또 온 것이 없을까, 저번에 써 부치던 그 편지의 답장이라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찢어버렸을 것도 같다.
 
29
도둑질이나 한 듯이 임자가 들어올까 보아 밖으로 귀를 기울이며 서랍을 열어 보던 필순의 눈은 번쩍 띄는 듯하였다. 편지 봉투라고는 별로 없고 종이 북더기 위에 넣어놓은, 허기가 두 동강 난 편지 봉투가 역시 아까 아궁이 앞에서 보던 그런 양봉투다.
 
30
'이것은 왜 안 찢어버렸을까?'
 
31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무어나 훔쳐내듯이 가만히 놓인 모양을 눈여겨본 뒤에 꺼냈다.
 
32
이렇게 훔쳐보는 것이 옳고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다만 '양을 만나고'란 말과'공부를 할 의향'이란 말이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 그게 알고 싶어서 조바심을 하는 것이었다.
 
33
자네는 왜 그렇게 밤낮 으르렁대나? 비꼬지 않으면 노기 품지 않고는 말이 아니 나오나? 필순양에 대한 이야기로만 하여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것은 없지 않겠나?"
 
34
여기에서 필순은 눈이 화끈하며 목덜미까지 발갛게 피어올라오고 목이 메는 것 같아서 마른침을 삼키었다.
 
35
자네 투쟁 의욕--이라는니보다도 습관적으로 굳어버린 조그만 감정 속에 자네의 그 큰 몸집을 가두어 버리고 쇠를 채운 것이, 나 보기에는 가엾으이. 의붓자식이나 계모 시하에서 자라난 사람처럼 빙퉁그러진 것도 이유 없는 것이 아니요, 동정은 하네마는 그런 융통성 없는 조그만 투쟁 감정을 가지고 큰 그릇이 되고 큰일을 경륜한다는 것은 나는 믿을 수 없네. 그건 고사하고, 내게까지 그 소위 계급투쟁적 감정으로 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자네는 평범한 사교적 우의보다는 동지로의 우의--동지애를 구한다고 하데마는 그것이 그릇된 생각이라는 게 아니라 너무 곧이곧솔로만 나가기 때문에 공과 사를 구별치 못하는 것이 아닌가? 자네가 가정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부자간 의절까지 한 것도 그런 편협한 감정 때문이지만, 만일 자네가 기혼한 사람으로서 그 부인이 자네 일에 이해하는 정도로 내조만 하는 현부인이었을지라도 동지가 아니라 반감으로 이혼하였을 것이 아닌가? 동지애를 얻으면 거기에서 더한 행복은 없을지 모를 것이지마는 그렇다고 사생애와 실제 생활도 돌아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투쟁은 극복의 전수단은 아닐세. 포용과 감화도 극복의 유산탄만한 효과는 있는 것일세. 투쟁은 전선적, 부대적 행동이라 하면, 포용과 감화는 징병과 포로를 위한 수단일세. 포용과 감화도 투쟁만큼 적극적일세. 지금 자네는 자네 춘부께 대하여 당당한 포진을 하고 지구전을 하는 듯싶지만 나 보기에는 그 조그만 감정과 결벽과 장상에 대하여 어찌하는 수 없다는 단념으로 퇴각한 셈이 아닌가? 훌륭한 패전일세. 이렇게 말하면 춘부께는 실경일지 모르지만 포용과 감화라는 적극 수단으로 종교의 성루에 돌진할 용기는 없나? 그와 마찬가지로 내게 대하여도 만일 동지애를 구한다면 자네로서는 당연히 조그만 투쟁 감정을 떠나서 제2의 수단을 취할 것이 아닌가? 결코 쫓아가면서 비릿비릿하게 애걸하는 것은 아닐세마는 자네 태도로서는 그러해야 할 거라는 말일세. 나 같은 사람도 자네 옆에 있어서 해될 것은 없네. 자네의 반녀가 되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간청하는 것은 아닐세마는 나도 내 길을 걷노라면 자네들에게도 유조한 때도 있고 유조한 일도 없지 않으리라는 말일세. 이왕이면 한 걸음 더 나서서 자네와 한길을 밟지 못하느냐고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 견해가 따로 있고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는 피하지 못할 딴 길이 있으니까 결코 비겁하다고 웃지는 못할 것일세. 공연한 잔소리같이 되었네마는 대 딴은 잔소리만은 아닐세. 자네 의견이 듣고 싶으니...
 
36
필순은 자기의 지식욕으로 아무쪼록 뜯어보려 하였으나 애를 써 찾는 말이 아니니만큼 흥미도 없고 터득도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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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여보게, 요새도 거기에 매일 발전인 모양일세그려? 크림 값을 보내라고? 지금은 자네가 바를 크림 값만 들지 모르겠지만 조금 있으면 홍경애의 크림 갓까지 대라고 않겠나? 그러나 크림 값보다도 당장 술값이 급할 걸세. 대단히 동정은 하네마는 동정뿐일세. 날도 차차 뜨뜻해갈 테니 그 외투나 처분하게그려. 연애에는 원래 밥도 안 먹어야 철저한 것이데- 누가 아나마는 세상에서 그렇다고들 하던데 외투쯤은 고사하고 아주 벌거벗고 다닌들 누가 뭐라겠나. 홍경애의 눈에만 들면! 그러나 깊이 생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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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은 아랫입술을 물고 숨을 죽이며 웃었다. 편지가 이제 차차 재미있어간다고 생각하였으나 홍경애란 어떤 여자고 김 선생님(병화)이 간다는 데는 어딘가 궁금하다. 김 선생님이 연애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암만해도 정말 같지 않다.
 
39
...내가 그 여자를 아느냐고? 내가 알고 모르고간에 자네가 사랑하면야 했지 무슨 관계가 있나. 그러나 그 소위 동지애를 얻을 수 있을까? 허영심과 그 발자한 성질로 끌릴지도 모를 것일세. 돈 없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어떤 경우에는 자랑이 되고 자살이라도 해서 신문에 이름이 한번 나보았으면 좋겠다는 여자도 없지 않은 세상이니까 말일세. 그러나 무척 이지적이면서도 타산적인 여자니까 문지방에 발을 걸쳤다가도 싹 돌아설 여자일세. 깊은 고비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일세. 그것은 연애에도 그렇고 일에도 그럴 걸세 그러나 자네로서도 깊은 데까지 끌고 들어갈 거야 무어 있나? 자진하여 앞을 서지 않은 한에는 남자로서도 힘에 겨운 짐을 지워서 되겠나? 더구나 비합법적인 경우에 말일세. 여자는 밥만 짓고 아이만 기르는 거냐고 흔히 말하데마는 세상에는 밥짓고 아이 기를 손이 필요한 것을 어떻게 하나? 남자에게 유방이 생기기 전에는 가정으로부터 여자의 해방이란 관념상 문제가 아닌가? 여자로 하여금 가정을 지키게 할 원칙을 버릴 이유가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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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에는 남자만 동원하여도 될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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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 말을 하였는가? 홍경애에게 어린 아이가 매달렸다고- 자네는 아는지 모르겠으나 그 아이가 내 동생이라고 그 아이를 못 기를까보아서 이런 말을 한 것인가? 또 그에게는 노모가 있다고 그 노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보아 이런 말을 하였는가? ...홍경애가 자네들과 휩쓸려서 무슨 일을 할지 안 할지 그 역시 추측조차 못할 일이 아닌가. 그러나 바커스의 주부가 평범한 여자가 아닌 것을 생각할 제 홍경애도 다만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자네게까지 키스를 팔기만 하는 여자가 아닐 것 같으이. 자네 역시 그 주부의 이름조차 누군지는 모를 걸세마는 내가 떠나오던 날 홍경애를 잠깐 만났을 제(떠나올 제 만났다니까 자네는 떼버리고 혼자 바커스에 갔던 줄 알지 모르지만 정거장에 나가는 길에 어린애 병 위문으로 잠깐 들렸던 걸세) 하여간 그때 홍의 말이 그 주부의 부탁이라 하면서 경도에 가거든 동지사의 여자부 영문과에 있는 오정자라는 여학생의 소식을 알아서 기별해달라고 하데그려. 오정자라는 이름만 들으면 조선 여자로 알 것일세마는 조선 가 있던 판산가 검사의 딸이라는데 어쨌든 그대로 듣고 와서 그동안 분주한 통에 잊었다가 그저께 유학생 회가 모였을 때 동지사에 있는 동포 여학생을 만나서 생각이 나기에 물어보니까 여보게, 자네는 놀라지도 않겠지만 지금 미결감에 있다지 않나! 사건은 아직 신문에 해금도 아니 되었다네마는 어쨌든 판검사의 딸로서는 의외 아닌가? 그건 고사하고 그 말을 듣고 홍이 자네에게 우박 같은 키슨지 진눈깨비 같은 키슨지를 하였다는 말을 생각해보니 거기에 무슨 맥락이 있는 것 같기도 하이. 그야 그 주부라는 사람과 오정자는 오래 연신이 끓었던 것으로만 보아도 일가간이라든가 보통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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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은 홍경애라는 여자를 좀 보았으면 하는 생각과 함께 머릿속이 뒤숭숭하여졌다. 세상이란 퍽도 복잡하구나! 하는 생각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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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히 이런 소리를 해서 숙호충비가 되지 않을지 호기심과 정열에 부채질을 하는 셈일세마는 나는 무엇보다 홍을 거기서 나오게 하고 싶으이. 무슨 의미로든지 거기 두어서는 좋은 일이 없지 않은가. 자네가 사랑하면 할수록 그렇게 권하게. 또 필순양의 일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자네는 자네의 동지로서 지도하고 싶어할 것일세마는 만일에 자네 친누이나 자네 딸이었더면 어떻게 하였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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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은 가슴이 덜렁하며 한 자 한 자를 눈으로 짚어가며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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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누이동생같이 생각한다지 않았나? 그러나 '누이동생같이'와 누이동생은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다만 그의 부모가 원하는 대로 맡겨 둘 것이요, 그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을 열어주도록 하는 이외에 남의 생활에 간섭할 것이 아닐세. 인생에 대한 경험이 없는 어린애를 자기의 뒤틀린 환경에서 얻은 경험이나 사상이나 습관 속에 몰아넣으려는 것은 죄악이요, 모든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청춘의 꿈은 그것이 꿈이라 해서 경멸하여서는 아니 될 걸세. 꿈은 조만간 깰 것이요, 꿈에서 깨면 환멸의 비애를 느낄 것이니까 애초에 꿈을 꾸지 말게 하거나 혹은 얼른 꿈에서 깨게 하겠다는 것도 몹쓸 생각일세. 피어나는 청춘의 꿈을 왜 미리 깨우려나! 조금이라도 더 꾸게 내버려두는 것이 먼저 살아온 사람의 의무는 아닐까! 인생에 있어서 청춘의 꿈을 빼놓고 또다시 행복이 있을 것인가? 청춘의 꿈을 애초에 빼앗아버린다는 것은 긴 일평생에서 그 짧은 행복의 시간까지를 빼앗는 것일세. 인생에 있어서 꿈 이외에 행복을 찾을 데가 다시 없기 때문일세. 현실에서 만족을 얻을 아무것도 없고 아무 수단도 사람에게는 없거니와 설사 현실에서 만족을 얻는다 하여도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다시 더 높은 행복을 바라는 마음--그것은 무엇인가? 꿈이 아닌가? 공상, 환상, 몽상일세. 그러므로 행복은 언제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불만과 갈망과 노력에서 맛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고서는 이 괴로운 세상을 어떻게 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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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잔소리가 길어졌네마는 20도 못 된 젊은 처녀에게서 꿈 중에도 제일 행복스런 청춘의 꿈을 빼앗거나 깨뜨리지는 말게. 그의 운명에 대하여 간섭하지를 말게. 만일에 친절하거든 그 꿈에서 저절로 깨어날제 그 몹쓸 절망에 빠지지 않을 만큼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지도해둘 필요가 있을 걸세. 이것도 여담일세마는 오늘 온 신문을 보니 서울서 양가의 부녀자가 정사를 하였다고 뒤떠들지 않나? 그것이 소위 연애의 극치를 찾는 이성간의 순정적 정사로 볼 것도 못됨은 물론일세. 또 여러 가지 원인을 주워섬기는 속에는 어찌할 수 없는 성격적 결함이라는 것도 한 가지 칠 것이요, 생리적 조건이라든지 기후 관계 같은 것, 여성의 특수성- 이러한 것들을 헤일지도 모르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앞서 산 사람이 자기의 뒤틀린 경험과 사상과 습관 속에 뒤에 오는 사람을 가두어넣으려 하는 데서 그 비극의 씨를 뿌려 가지고 청춘의 꿈이 깰 때 어떻게 집심하고 조신하겠는가 하는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지 못하고 방임하였던 실책에서 그 열매를 거둔 것이나 아닐까? 이것이 너무나 실제와 먼 관념론이라 할까?... 만일 나의 이 의견과 이 관찰이 옳다면, 그리고 자네가 정말 필순양을 누이동생같이 사랑한다면 자네의 인생관이나 자네의 사회관 속에 들어와서 자네 생활을 생활하라고 강제하여서는 아니 될 것일세. 그것은 너무나 극단이요, 자기만을 살리는 이기적 충동이요, 남의 생명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일세. 그가 그대로 자란 뒤에 자주적, 자발적으로 자네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상관없지만, 지금부터 서둘러서 피어날 꽃에 찬서리를 맞혀 떨어뜨려버린다면 그것은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꿈을 꾸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일세. 청춘을 행복한 꿈 속에 안온히 평화롭게 즐기게 하라는 말일세. 자네는 내가 왜 이처럼 필순양에게 열심이냐고 의심하는 모양이데마는 길 가는 손이 바위틈에 돋아난 가련한 꽃 한 송이를 꺾는 것은 욕심이요 죄일지 몰라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지 말라는 것도 안 될 일이요, 흙 한줌 북돋워주고 가기로 그것을 뒷날에 크거든 화초분을 가지고 와서 모종 내갈 더러운 이해타산으로만 보는 것은 사람의 자유라 하여도 너무나 몰풍취, 몰인정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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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이 여기까지 읽는 동안에 모친은 안방에서 어서 치우고 건너오라고 두 번이나 소리쳤다. 필순은 마지막을 급급히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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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이 허리가 두 동강 난 것을 몰려가며 이어보기에 필순은 애를 썼으나 그래도 자기에게 관한 말은 어렴풋이나마도 짐작이 들었다.
 
49
결국 말하면 공부를 시켜주마는 말이나 반갑다느니보다도 부끄러운 생각이 앞을 섰다. 고마운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과분한 생각이 앞을 섰다. 내까짓 것을 무얼 보고- 더구나 얼마 사귄 것도 아닌데 고렇게까지 고맙게 굴까? 지나는 나그네가 바위틈에 돋아난 꽃 한 송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못할 게 무어 있으며, 흙 한줌 복돋기로 그것을 욕심이 시키는 일이라고만 하느냐고 책망한 말을 필순은 보고 또 보고 하다가는 자기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내가 꽃일까? 거울을 보지 않아도 핏기 하나 없는 팔초한 이 얼굴이다. 필순의 머리에는 추석 뒤에 배틀어진 산국화 한 송이가 쓸쓸한 산허리에서 부연 햇발을 받으며 간들거리는 양이 떠올라왔다. 혼자 어이없는 웃음을 해죽 웃다가 자기 손이 눈에 띄자 얼굴이 혼자 붉어졌다. 몇천만의 낯모를 사람이 이 손으로 만든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지, 피가 마르니 뼈가 굵어졌는지 뼈마디가 불퉁겨지니 피가 속으로 스미는지 전차 속에서도 손잡이에 매달리면 손이 창피하여 한구석에 기대어 섰는 요새의 필순이다. 어쨌든 이 손이 유공하다. 네 다섯 식구가 이 손으로 일년 동안이나 입에 풀칠을 하여왔다.
 
50
'그러나 내가 공부를 한다면 누가 벌어먹을꾸?'
 
51
필순은 손 부끄러운 생각을 하다가 이런 실제 문제가 머리에 떠올라오자 가슴이 답답하였다.
 
52
"무얼 그렇게 하는 거냐? 냉돌에 앉어서."
 
53
모친이 안방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난다.
 
54
필순은 마침 접어넣은 두 쪽 봉투를 서랍에 들여뜨리고 얼른 쓰레기를 쓰레받기에 그러모았다.
 
55
"무얼 하고 있니?"
 
56
모친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57
"신문 좀 보았에요."
 
58
필순은 쓰레받기와 비를 좌우 손에 들고 나오면서도 병화가 들어와서 그 편지를 꺼내본 줄 알지나 않을까 좀 애도 씌었다.
 
59
'그러나 어째서 그건 찢다가 말고 넣어두었누? 나를 보이려고 두었나?'
 
60
하는 생각도 들었다.
 
61
"아버지께선 왜 이렇게 늦으시누?"
 
62
필순은 모친과 마주 반짇고리를 끌어다놓고 앉으며 혼잣말을 하였다.
 
63
"또 김 선생님과 술 타적이나 하고 다니시는 게지."
 
64
모친은 못마땅한 듯이 이런 소리를 한다. 모친으로 생각하면 시집갈 대가리 큰딸년을 내놓아서 벌어먹는다는 것이 그나마 죽술도 제때에 흘려넣지 못하는 터에 남편이라고 한다는 일이 객쩍게 형사들이나 뒤밟는 짓이요, 죽치고 들어엎딘 때는 열 손길을 늘어뜨리고 앉았지 않으면 술이나 얻어걸려서 늦게 들어와 주정을 해대니 50줄에 든 사람이 이판에 벌이 구멍이 입에 맞는 떡으로 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무슨 변통성이 좀 있어야 365일 하루라도 사는 듯한 날이 있겠건만 앞일을 생각하면 캄캄하다.
 
65
"아버진들 화가 나시니까 그렇지요."
 
66
필순은 어머니도 동정하지만 아버지 사정도 동정 아니할 수 없다.
 
67
"화난다고 계집 자식은 입에 물 한 모금이 안 들어가도 술만 잡숫고 다니면 되겠니?"
 
68
"그야 돈 가지고 잡숫나요. 생기니까 잡숫지."
 
69
"그러니 말이다. 술을 사준다거든 처자식 굶겨놓고 먹겠느냐고 대전을 달라지."
 
70
"에그 어머니두... 남부끄럽게 그런 말이 나와요?"
 
71
하고 필순은 웃어 버린다.
 
72
"그는 그렇지. 술은 사주어도 밥 한 끼 먹이라면 눈을 찌푸리는 법이지만..."
 
73
하고 모친도 웃고 말았다.
 
74
필순은 내일 신고 갈 버선을 감치면서 잠자코 앉았다. 머리에는 어리둥절하게 편지 사연이 구절구절이 떠올라왔다. 그러나 어떻게 할까 하는 분명한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나지를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쨌든 이때까지 비었던 마음의 한구석이 듬뿍 차진 것같이 든든하였다. 실상은 지금까지 자기 마음의 한 구석이 비었던지 찼던지도 몰랐다가 그 무엇인지 자리를 잡고 들어앉으니까 비로소 한구석이 비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쨌든 이 세상에 자기의 행복을 축수하는 사람이 의외의 곳에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희한하기도 하고 부끄러우면서도 기쁘다.
 
75
'행복스러운 청춘의 꿈을 꾸게 하게...'
 
76
필순의 머리에는 또 이런 편지 구절이 떠올라왔다. 그러나 어떤 게 행복스런 청춘의 꿈일까?- 필순은 무엇이 그 꿈인지 알 수 없다. 지금 당장 자기가 청춘의 꿈을 생복스러이 꾸는 줄을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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