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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전보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25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25. 전보
 
 
3
영감의 병은 차차 눈에 안 띄게 침중하여 들어갔다. 따라서 지 주사, 창훈, 최 참봉 들 사랑 사람은 밤중까지 안방에 들어와 살다시피 되었다. 그러나 영감은 병이 더하여 갈수록 아들과는 점점 더 대면도 하기를 싫어하였다. 상훈은 인사를 차려서라도 아침부터 와서 밤에나 자러 가지마는, 사랑에서 빙빙 돌 뿐이다. 영감이 요새로 부쩍 더 그러는 데는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4
돌아갈 때가 가까워서 그런지 덕기를 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편지를 띄우고 전보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회답이 없어서 영감은 가뜩이나 손자놈을 못마땅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날마다 아침저녁 차 시간만 되면 기다리는 터인데, 상훈은 그런 줄도 모르고 시키지 않게 한다는 소리가,
 
5
"아버지 병환은 그렇게 침중하신 터도 아니요, 그애는 졸업시험이 며칠 안 남았으니 아직 그대로 내버려두시지요."
 
6
하고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었다. 물론 그것은 앓는 부친이 자기 병에 겁을 내는 듯하여 안심을 시키느라고 한 말이요, 또 사실 덕기를 그렇게 시급히 불러낼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한 말이나 부친의 불호령이 당장 떨어졌다. 전보를 치고 편지를 해도 답장조차 없는 것은 아비놈이 중간에서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야단을 하는 것이다.
 
7
영감이 덕기를 어서 불러다 보려는 것은 귀여운 생각에 애정으로도 그렇지마는, 한 가지 중대한 것은 재산 처리를 손자를 앞에 앉히고 하려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들을 쏙 빼놓고 하려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손자까지 앞에 앉히고서 유언을 하자는 생각이다. 그것도 자기가 이번에 죽으리라는 생각은 아니나, 사람의 일을 모르겠고 어차어피에 언제든지 할 일이니까 나중 자기가 일어나서 또 하더라도 어쨌든간에 이 기회에 대강만이라도 처리를 하여놓으려는 생각이 있느니만큼, 손자를 성화같이 기다리는 것이요, 따라서 상훈이 덕기를 못 오게 방망이를 드는 것이라고 넘겨짚고 아들에게 준금치산 선고까지라도 시키겠다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상훈으로서는 부친의 그런 속셈이야 알 리가 없다. 하여간에 부친이 그렇게 까지 하니까 자기라도 편지를 하든 전보를 놓겠으나, 창훈이 전보를 연거푸 세 번씩이나 놓았으니 다시 놀 필요는 없다고 한사코 말리기도 하고, 또 그만하면 저기서 벌써 떠났을 듯하여 오늘 내일 새로는 들어오려니 하고 기다리는 터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다. 창훈도 참다못해 또 한 번 전보를 영감 앞에서 써서 제 손으로 부치러 나갔다. 그러나 그 이튿날도 역시 답장은 없다.
 
8
"어머니, 그 웬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그려. 병이 났는지? 떠나서 오는 중인지? 그러기루 온다 못 온다 무슨 말이 있을 게 아닙니까? 제가 한 번 다시 놓아 볼까요?"
 
9
손주며느리는 하도 답답하여 시어머니에게 이런 의논을 하였다. 시어머니도 요새는 날마다 오는 것이다. 자는 날도 있다. 그러나 안방에는 하루 한 번씩밖에는 못 들어간다. 시아버님의 노염이 풀리지 않은데다가 덕기가 안 오는 탓이 건넌방 고식에게까지 간 것이었다.
 
10
"글쎄 말이다. 설마 전보를 중간에서 챌 놈이야 있겠니마는."
 
11
시어머니도 의아해하였다.
 
12
"누가 압니까. 무슨 요변들을 부리는지. 겁이 더럭 납니다그려."
 
13
고식은 이런 의논을 하다가 시누이가 학교에서 오기를 기다려 직접 나가서 전보를 놓고 들어오게 하였다.
 
14
경도에서 떠난다는 전보가 밤 11시에 배달되었다. 덕희의 이름으로 띄웠으니까 답전도 덕희에게 왔다. 노영감은 일본말은 몰라도 가나 글자를 볼 줄은 알았다. 손주며느리가 가지고 온 전보를 받아들고,
 
15
"온 자식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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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안심한 듯이 반가운 기색이 돌다가 주소씨명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17
"이게 뉘게로 온 것이냐?"
 
18
하고 묻는다.
 
19
"아가씨한테로 왔에요."
 
20
"응? 아가씨? 덕희에게로?"
 
21
영감은 좀 의외이었다. 이 집으로 오는 편지는 조덕기 본제라 하고, 전보 같으면 어린 자식놈의 이름으로 하는 버릇이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창훈이 전보를 여러 번 띄운 터이니, 창훈에게로 보내지 않으면 역시 자식놈의 이름으로 놓았을 터인데 어째 누이에게로 쳤을까? 영감은 또 의아하였다.
 
22
"아가씨가 아까 전보를 띄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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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며느리의 말에 영감은,
 
24
"그 웬일일꼬?"
 
25
하고 뒤로 가라앉은 눈이 더 커진다.
 
26
손주며느리는 조부의 말을 알 수가 없었다. 웬일이라니 웬일 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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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 아무 소리를 해야 그건 곧이들을 수 없어도 제 누이의 전보니까 그 무겁던 엉덩이가 이제야 떨어진 것인 게지요."
 
28
수원집이 옆에서 이렇게 씹는다.
 
29
"덕희더러는 누가 전보를 노라고 하던?"
 
30
조부가 못마땅한 듯이 묻는다.
 
31
"하두 답답하기에 제가 또 놓아보라고 했어요."
 
32
"하여간 온댔으니 좋다마는 어째 너희들의 전보를 보고서야 떠날 생각이 났단 말이냐?"
 
33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 간단한 일이 영감에게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34
"그 동안 놓은 전보는 주소가 틀렸는가? 하속을 옮겼다던?"
 
35
영감은 하숙을 옮긴 것을 자기에게는 알리지 않았던가 하는 의혹도 들었다.
 
36
"아녜요. 그대로 있나 봐요."
 
37
"그럼 웬일이냐? 시험으로 바쁘다는 아이가 그동안 어디를 갔었을 리도 없고...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전보나 편지가 아무리 가더라도 떠나지 말고 너희가 기별하거든 오라고 일러둔 게 아니냐?"
 
38
영감은 자기 추측이 조금도 틀림없다는 듯이 역정을 낸다.
 
39
"그럴 리가 어디 있겠에요. 번지수가 틀렸던지 해서 안 들어갔던지 한 게지요."
 
40
손주며느리의 말도 그럴듯하기는 하였으나 영감은 그대로는 그렇게 믿어서 집어치우려고는 아니하였다.
 
41
"그럼 전보가 아니 들어갔으면 돌아오기라도 하지 않겠니? 그만 두어라. 그 애가 오면 알겠지."
 
42
당자가 돌아오면 알리라고 벼르기로 말하면 영감보다도 건넌방 속에서 더 벼르고 기다리는 터이다.
 
43
이튿날 저녁에는 덕기가 부산에 내려서 전보를 쳤다. 이때까지 시치미 떼고 있던 것과는 딴판으로 부산에 와서까지 병환이 어떠냐고 전보를 친 것을 보면 퍽 조바심을 하는 모양이다. 영감은 내심으로 기뻐하였다.
 
44
하룻밤을 새워서는 겨울날이 막 밝아서 덕기가 들어왔다.
 
45
정거장에는 창훈과 지 주사가 마중을 나가 데리고 들어왔다.
 
46
창훈은 덕기가 그저께 덕희의 전보밖에는 받아본 일이 없다고 하는 데에 펄쩍 뛰며, 그게 웬일이냐고 덕기가 속이기나 하는 듯싶게 서둘러 댄다.
 
47
"낸들 알 수 있에요. 하지만 이상하군요. 아저씨의 그 서투를 일본말로 번지수를 썼으니까 그렇지 않을라구."
 
48
덕기는 신지무의하고 이렇게 웃어만 버렸다.
 
49
어쨌든 조부가 그만하다는 데에 마음이 놓였다.
 
50
"이것 봐. 할아버니께서 무어라고 하시거든 전보 봤다고 얼쯤얼쯤해 두어라. 전보 하나 똑똑히 못 놓는다고 또 꾸중이 내릴 테니, 학교에서 여행을 갔다가 와서 비로소 전보를 보고 마침 떠나려는데 덕희의 전보가 또 왔더라고 하든지, 무어라든지 잘 여쭈어주어야 한다. 그동안 전보 사단으로 얼마나 야단이 났었던지..."
 
51
창훈은 타고 오는 택시 속에서 연해 이런 당부를 하였다.
 
52
"그게 다 무슨 걱정이에요. 어쨌든 애들 쓰셨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만하시다니 이 고비를 놓치지 말고 약을 바짝바짝 잘 쓸 도리를 해야지요."
 
53
덕기는 창훈이 병환의 경과 이야기는 안하고 어느 때까지 전보 논래만 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치사는 하면서도 핀잔을 주었다.
 
54
병실에 들어서니 조부는 일어나 앉자고 하여 앞뒤에서 부축을 하고 손자의 절을 받았다. 허리만은 조금 거동할 수 있게 되었지마는 죽은 사람이나 누워서 절을 받는다는 미신이 기어코 일어앉히게 한 것이다. 병인은 죽을 사자만 눈에 띄어도 '사자'가 앞에 와서 막아선 것같이 질색을 하는 것이었다.
 
55
영감의 입에는 웃음이 어리었으나 보기에도 무서운 깔딱 젖혀진 두 눈은 노염과 의혹의 빛에 잠겼다.
 
56
"사람의 자식이 어디 그런... 그런 법이 있니?"
 
57
영감은 말 한마디에 세 번 네 번씩 숨을 돌려야 한다. 일어앉혔다가 뉘니까 담이 더 끓어오르고 기운이 폭 빠진 것 같다.
 
58
덕기는 조부가 허리를 쓰고 일어앉는 것을 보고 속으로 반기었으나 다시 누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비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혈색 좋던 조부의 얼굴이 불과 한 달지내에 저렇게도 변하였을까 싶다. 누렇게 뜨고 꺼먼 진이 더께로 앉은 것은 고사하고 그 멀겋게 누런 빛이 살 속으로 점점 처져 들어가는 것 같은 것이 심상하지 않아 보였다. 여러 해 속병에 녹은 사람 같다.
 
59
"전보를 그렇게 치고 법석을 해야 편지 한 장은 고사하고 죽었다가 살아왔단 말이냐. 돈 30전이 없더란 말이냐?"
 
60
담이 글겅거리면서도 급한 성미에 말을 빨리 죄어치려니 숨이 턱에 받쳐서 듣는 사람이 더 답답하다.
 
61
"전보를 못 봤에요."
 
62
"전보를 못 보다니? 그럼 노자는 어떻게 해가지고 왔단 말이냐?"
 
63
영감은 펄쩍 뛴다.
 
64
"주인에게 취해가지고 왔어요..."
 
65
덕기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창훈이 옆에서 눈짓을 하는 바람에 말을 얼른 돌려서,
 
66
"그 동안 스키를 하러 갔다가 와서 한꺼번에 전보를 받고 곧 떠났지요."
 
67
하고 꾸며대었다. 덕기 역시 창훈을 좋게 생각하는 터도 아니요, 또 조부를 속여 가면서 구차스럽게 변명을 하기가 귀찮아 이실직고를 하려다가 흥분된 조부가 그 위에 큰 소리를 내게 되면 모두다가 재미없을 것 같아서 창훈이 눈짓을 하는 대로 말을 돌려대어 버린 것이다.
 
68
"스키란 무어냐?"
 
69
"산에 올라가서 얼음지치는 거예요."
 
70
"산에 가 얼음을 지치다니 강에 가서 지친다면 몰라도!"
 
71
"일본에는 그런 게 있에요."
 
72
"일본이고 조선이고 얼음지치는 것은 매한가지겠지. 그만두어라. 그런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을 듣자는 게 아니다."
 
73
조부는 역정을 내었다.
 
74
"허, 일본에 그런 게 새로 났니? 여기로 말하면 한강에서 얼음을 지치더라마는 시험 안 보고 얼음을 지치러 다녀?"
 
75
창훈이 옆에서 이런 밉살맞은 소리를 하니까 수원집도 생글하고 비웃어 보인다.
 
76
조부가 거짓말로만 밀어붙이는 것이 다행하여 옆에서 부채질을 하는 것이지마는, 덕기는 일이야 어찌 된 것이든지간에 일껏 자기 사폐를 보아 주느라고 꾸며대는 것인데 이 편을 거들지는 못할망정 그런 공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는, 심사 나는 대로 하면 확 쏟아놔버리고 싶었지마는, 이 자리에서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되겠다고 잠자코 말았다.
 
77
"그래 전보환으로 보낸 돈은 어떻게 했단 말이냐?"
 
78
"못 받았에요."
 
79
학비인 줄 알고 받아서 주인을 주었다가 다시 취해 가지고 왔다든지 무어라고 꾸며 대고 싶었으나 심사가 틀려서 그대로 내뻗어버렸다.
 
80
"아니, 그게 웬일일까? 자네 부치긴 분명히 부쳤나?"
 
81
"부치다뿐입니까. 영수증이 여기 있는데요. 참 드릴 것을 잊었습니다."
 
82
하며 창훈은 지갑을 꺼내서 한참 뒤적뒤적하더니,
 
83
"아마 집에 두고 왔나봅니다. 제 손으로 부치지는 못하고 큰놈을 시켰습니다마는 영수증이 있으니까 갈 데 있겠습니까?"
 
84
"그럼 이따가 가져오게."
 
85
영감은 어쩐 영문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갑갑하였다.
 
86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또박또박히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안 놓이는 이 노인의 성미로, 이렇게 오래 누웠는 것도 화가 나는데, 일마다 모두 외착이 나는 것을 보고는 한층 더 화에 뜨는 것이다.
 
87
"영수증만 있으면 나중에 찾기라도 하지요. 잘 알아보지요."
 
88
덕기는 조부를 안정시키려고 더 길게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기가 시원스럽게 말을 안하는 것이 조부가 보기에는 모두 속임수로 얼쯤얼쯤 묵주머니를 만들려는 것 같아 또 화가 나나 멀리 온 귀여운 손주라 참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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