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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단서 ◇
카탈로그   목차 (총 : 42권)     이전 29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29. 단서
 
 
3
덕기가 서류를 금고에 다시 집어넣고 섰으려니까 수원집이 어느 틈에 나왔었던지 축대 위에서 유리 구멍으로 들여다보며,
 
4
"병원에 가는데, 무어 가져오라시는 거 없던가?"
 
5
하고 소리를 치다가 채 고무신을 벗을 새도 없어 툇마루로 올라서며 미닫이를 와락 연다. 병원 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고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은 것이요, 아까 후다닥 뛰어나온 뒤가 애가 씌어서 눈치를 보러 나왔던 차에, 금고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눈에 쌍심지가 올라서 뛰어들려는 것이다.
 
6
덕기가 금고 문을 땅 잠그며 뒤를 돌아보니 수원집은 회색 외투에 두 손을 찌르고 매서운 눈치로 노려보는 것이 싸우려는 사람 같다.
 
7
"응, 좋구먼! 이젠 맘대루 금고를 여닫구!"
 
8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수원집은 금고 열쇠 구멍에서 제그럭하고 빼어내는 열쇠 꿰미를 독살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 덕기는,
 
9
'이 열쇠 때문에 내 명에 못 죽겠다!'
 
10
는 생각을 또 한 번 하며 저그럭하고 포켓에 넣고서,
 
11
"병원엔 잘두루마기 가져갔것다, 무어 다른 것은 없어요."
 
12
하며 비꼬듯이 코대답을 하였다.
 
13
"그래 금고 속은 어떻게 됐어?"
 
14
금시로 낯빛이 달라지며 빌붙듯이 교활한 웃음이 입가에 떠오른다.
 
15
"무에 어떻게 돼요?"
 
16
덕기가 성을 내며 후뿌리는 소리를 하니까 수원집은 자기의 말이 어색하였던 것이 분하기도 하고, 이 젊은 애의 위압적 태도에 반발적으로 다시 입이 뾰족해지며,
 
17
"대관절 내 몫은 얼마를 떼노셌는지 그걸 알잔 말야."
 
18
하고 덤벼드는 기새다.
 
19
"그래 지금 그런 말을 또 꺼낼 땐가 생각을 해보슈."
 
20
"애아범은 꺼낼 때가 돼서 꺼내보았던가... 이때고 저때고간에 나두 살려니까 그러는 거지 지금 멀거니 앉았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입이 열이 있으면 무얼 하누. 보따리까지 뺏구 내몰기루 별수 있겠던감!"
 
21
"당장 용돈을 꺼내쓰려구 열어봤지마는 그래 몫이 얼만 줄 알면 수술을 하시는 양반께 가서 덧거리질을 하시려우?"
 
22
"못할 건 뭐야?"
 
23
하고 점점 포달을 부리다가,
 
24
"난 몰라! 어쨌든 500석은 줘야 해! 나두 어린 자식하구 살아야지! 젊으나 젊은 년이 이 집 들어와서 기죽을 못 펴구 갖은 고생 다할 제야..."
 
25
하며 말을 채 맺지도 않고 축대로 내려서니까 장에 흥정 갔던 지 주사가 치룽을 멘 아범은 안으로 들여보내고 자기도 무엇인지 종이 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수원집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힐끈 치어다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마루로 올라오다가,
 
26
"참 병원에 지금 가슈?"
 
27
하고 뜰로 내러서는 수원집에게 말을 건다.
 
28
"왜요?"
 
29
하고 돌쳐서던 수원집은 포달을 부리던 끝이기는 하지마는 아무 죄 없는 지 주사에게도 쏘는 소리를 한다. 지 주사가 제 편이 아니요, 매사에 이 등신 같은 영감의 눈까지 기어이야 하는 것이 평소에 성이 가시고 못마땅도 하기는 하였던 것이다.
 
30
"지금 장에 가보니까 귤이 하두 탐스럽고 먹음직스럽더라니 영감님 좀 갖다드릴까 하구 샀는데, 난 여기 일 땜에 지금 갈 새가 없으니..."
 
31
하고 지 주사는 손에 든 봉지를 추켜들어다가 방에서 마루로 나서는 덕기를 건너다보며,
 
32
"그러나 여보게, 이것은 내 돈으루 산걸세."
 
33
하고 한마디하니까,
 
34
"온 천만에, 아무 돈으로 사셨거나 어떻습니까? 잘 사셨습니다."
 
35
하고 덕기는 말을 가로막는다.
 
36
"아냐. 셈은 셈대루 해야지. 하여튼 이것은 내가 특별히 마음먹고 산 건데,
 
37
내가 오늘 또 가게 될지 모르니."
 
38
"무얼 그러세요. 귤을 잡숫구 싶으시다면 지금 가다가 사가지구 갈 테니 그건 영감님이나 두구두구 잡수세요."
 
39
수원집은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구살머리적다는 듯이 퐁퐁 쏘고 나가려 한다.
 
40
"아냐. 그야 돈이 없나, 물건이 없겠나마는 이건 내가 사 보내는 것이라니까 그래!"
 
41
하고 그렇게 유순하고 꿈속 같던 지 주사도 '늙은이의 역정'으로 며느리나 나무라듯이 강강한 소리를 꽥 지르며,
 
42
"20년 가까이 노영감님 옆에 있다가 입원까지 하신 걸 보니... 허어. 내가 먼저 가야 할걸."
 
43
하고 금시로 눈 속이 뜨거워지는지 안경 속의 눈을 꿈뻑꿈뻑하며,
 
44
"보자기에 싸드릴 거니 가시는 기로 컬컬한데 벗겨드리시교."
 
45
하고 지 주사는 저편이 듣거나 말거나 모른 척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수원집은 눈살을 아드등 찌푸리고 섰으나 덕기는 지 주사의 그 말에 콧날이 시큰하는 것을 깨달았다. 지 주사의 그 '마음먹고...'라는 말이 고맙고도 가여웠다.
 
46
-할머니가 사셨더면?...
 
47
하는 생각도 난다.
 
48
방으로 들어간 지 주사는 귤 봉지 대신에 누르스름한 목도리를 창밖으로 내밀며,
 
49
"이게 어째 여기 떨어졌나? 창훈이 목도리 같은데 이 추운 겨울날 목도릴 왜 두고 다니누?"
 
50
하고 혼잣소리를 한다. 수원집은 그 목도리를 보고 깜짝 놀라는 기색이 더니,
 
51
"주실 테건 어서 싸주세요."
 
52
하고 방에다가 소리를 친다.
 
53
"아까 아저씨 왔습니까?"
 
54
아침에 창훈이 병원에 목도리로 얼굴을 푹 싸고 왔던 것을 보았던 바에야 물어 볼 필요도 없지마는 수원집의 망단해하는 기색이 수상쩍어서 물어 본 것이다.
 
55
"몰라."
 
56
수원집의 대답이 떨어지자 사랑문이 삐걱하고 마침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창훈이 들어선다. 아닌게아니라 시퍼렇게 언 턱 밑에는 목도리가 감겨 있지 않다.
 
57
"웬일들인가?"
 
58
우중우중 나선 것을 보고 먼저 말을 붙인다.
 
59
"어디를 가셨었나요?"
 
60
덕기는 좋은 낯으로 대꾸를 해주었다.
 
61
"응, 집을 내몰리게 되어서 좀 돌아다녔으나 어디 있어야지. 사글셋집이라곤 여간 몇백 원 보증금을 준대도 구하는 도리가 없고... 그 큰일났어."
 
62
창훈은 혀를 찬다. 별안간 집 논래는 금시초문이다.
 
63
"지금 댁도 사글셋집이던가요?"
 
64
"그럼 별수 있나, 하여간 과동이나 한 뒤에 내쫓겼으면 좋으련마는 주인이 일본놈이라 김장해 논 뒤고 섣달 대목이요 한, 그런 조선 사람의 사정이야 알아 주나."
 
65
"그러기로 음력 섣달 그믐인, 정초에 내쫓을라구."
 
66
별안간 집 논래를 꺼내는 것도 역시 까닭이 있어 그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사람도 할아버지 생전을 노리는 모양이다.
 
67
"압다. 시원한 소리두 또 한다. 일본놈이 우리 구력 설이야 생각한다던가?"
 
68
창훈은 덕기가 차차 이 집 주인이 될 테니까 그런지 별안간 '하게'를 붙이면서,
 
69
"이런 때 자네 할아버니께서 어떻게 집이나 한 채 내주셨으면... 더두 말고 조그마한 오막살이라도 한 채 주셨으면 사람을 살리시는 일체이겠건만..."
 
70
하고 혼잣소리처럼 껄껄 웃는다.
 
71
"할아버지께서 웬걸 집을 사두신 게 있을라구요."
 
72
"흥, 자네는 한층 더하이그려. 허허... 이제 자네두 살림을 맡을 테니까 그두 그렇겠지마는 지금 할아버니께서 척 맡으신 것만 해두 서울 안에 5, 6채는 될 것일세. 이 집이나 화개동 집, 북미창정, 태평통, 그런 것까지 합하면 십여 채일세. 아무러면 자네가 더 잘 알겠나."
 
73
"그건 고사하고, 그래 정말 섣달 그믐날 집을 보러 다니시니 보여드리는 데도 있던가요?"
 
74
덕기는 웃어 버렸다.
 
75
"그럼 내가 거짓말인 줄 아나? 무엇하자고 거짓말을 하고 또 병원은 내버려 두고 온 식전 이 추위에 나돌아다니겠나? 틀렸군! 다 틀렸어! 나는 자네게 청이나 해서 할아버니께 말씀을 좀 해달라렸더니..."
 
76
"섣달 그믐날 집 보러 다니다니 그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하게. 그따위 얼뜬 짓 하러 다니느라구 이 추위에 목도리까지 빠뜨리구 다니나?"
 
77
지 주사는 과일 봉지를 꽁꽁 뭉쳐가지고 나오면서 핀잔을 준다.
 
78
"어참, 목도리가 여기 떨어졌던가?"
 
79
창훈은 좀 어색한 낯빛이다.
 
80
"집을 두 번만 보러 다녔더면 목까지 빼놓고 다녔겠네그려."
 
81
지 주사는 또 비꼬며 그동안 안으로 들어간 수원집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섰다. 덕기도 픽 웃고 말았다.
 
82
말눈치가 지 주사 역시 무슨 낌새를 챈 모양인가 싶어 덕기는 통쾌도 하다.
 
83
"하여간 올라오십쇼 내일 대례를 지낼 텐데 좀 분별을 해주십쇼."
 
84
지 주사 말에 머쓱해서 어틈더듬하던 창훈은 이 말에 기운을 얻은 듯이.
 
85
"그것 보게. 할아버니께서 안 계시니까 벌서 이렇지 않은가. 집안에는 아무래도 늙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야."
 
86
하고 자기 아니면 못할 소임이나 맡은 듯이 입찬 소리를 하면서 들어오는 길에 방문 밑에 내던져둔 목소리를 얼른 집어 목에 걸고 모자는 벗어 못에 건다.
 
87
안으로 흥정해온 것을 보러 들어갔던 수원집이 나오니까, 지 주사는 과일 봉지를 내어 주고 방으로 들어와서 창훈과 마주 앉아 부시쌈지를 꺼내 놓고 곰방대에 한 대 담는다. 담뱃대를 문 지 주사는 성냥불을 그으려다가 말고 마주 붙은 커다란 유리창 밖을 멀끔히 내다보더니 물었던 담뱃대를 빼고 혀를 끌끌 찬다. 혀를 차기 위해서 일부러 담뱃대를 뺀 것이다. 덕기와 창훈도 무언가 하고 내다보니 수원집이 나가다가 문턱에서 만난 아이 보는 년도 한 개 주고 섰는 것이었다.
 
88
"영감은 그거 무얼 그렇게 역정을 내나?"
 
89
창훈은 집은 몰린다면서 그래도 피존갑을 꺼내서 한 개 붙인다. 늙은이로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90
"요새 젊은 사람은 너무 늙은이 공궤할 줄을 모르니 말야. 정성이 있어야 하는 거야."
 
91
지 주사는 자기가 침이 넘어가는 것을 한 개도 축을 내지 않고 정성껏 보내는 것인데, 그것을 자식새끼나 애보기년에게까지 봉지를 찢고, 숫으로 축을 내는 것이 분해 못 견디겠다는 기색이다.
 
92
"상관 있나. 영감 자실 것 귀한 따님이 먼저 맛보기로."
 
93
아까 목도리의 보복을 예서 하려는지 창훈이 추근추근히 대꾸를 한다. 지 주사는 못마땅한 것을 꽁꽁 참고 앉았다가 창훈의 목에 두른 목도리로 눈이 가더니,
 
94
"그래, 방 속에서까지 두르고 앉었는 목도리를 무엇에 몰려서 떨어뜨리고 다녔던가?"
 
95
하고 또 목도리 논래를 꺼내며 실소를 한다.
 
96
"글쎄 집에 몰린다지 않던가..."
 
97
창훈은 농쳐버린다.
 
98
"난 조금 전에 병원에서 본 목도리가 여기 떨어져 있기에 어느 틈에 목도리가 제 발로 걸어왔는가 했지."
 
99
"허어, 목도리 목도리 하니 그렇게 탐이 나면 후무려 넣을 일이지, 세찬으로 줄까?"
 
100
하고 창훈은 목도리를 벗으려는 듯이 손이 올라간다.
 
101
"후무려 넣다니? 그따위 말버릇은 자네끼리나 통하는 말이겠지."
 
102
지 주사는 점잖게 냉소를 한다. 걸불병행이라 하지마는 남의 집에서 신세 지고 사는 사람들이란 공연히 서로 못 먹어서 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더구나 주인 영감에게 거의 반생을 바치고 충직할 대로 충직한 이 영감으로서 보면, 창훈이나 최 참봉 따위는 사람 값에도 아니 가는 것이다. 그러나 또 창훈은 창훈대로 지 주사쯤은 이 조씨집 마루 구멍의 늙은 개새끼만도 여기지를 않는 것이다.
 
103
"허어, 오늘 욕보는군. 아까 하두 춥기에 선술 한잔 하구 잠깐 들어와 누웠다가 나갔는데, 얼한 김에 떨어뜨렸더니만..."
 
104
창훈은 조카를 돌아다보며 변명삼아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105
"참 그런데 종용하니 여쭈어봅니다마는 전보는 누구를 시켜 쳤기에 한 장도 안 들어왔에요?"
 
106
덕기는 지 주사와의 말다툼을 막으려는 듯이 말을 돌렸으나 실상은 덕기대로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이었다.
 
107
"아이들두 시키구 한 번은 바로 내가 가서 쳤는데..."
 
108
"그거 이상한 노릇이지, 지나는 길에 경성 우편국에서 노셨다기에 가서 물어 보니까 전부 뒤져봐두 없던데요."
 
109
"그럴 리가 있나. 하루 수백 장 수천 장 되는 것을 어떻게 일일이 뒤져보고 안다던가?"
 
110
"배달이 안 되어서 되돌아온 것을 조사해보면 알거든요. 경도에 가면 또 한 번 알아 보겠지마는, 하도 이상하기에 말씀예요."
 
111
"글쎄말일세."
 
112
창훈은 덤덤히 앉았다.
 
113
"전보구 전보환이구 분명한 사람한테 시켜야지! 전보지를 우편국 속편지통에다 넣구 부쳤다는 건 아닌가?"
 
114
지 주사가 이런 소리를 하니까 덕기는 실소를 하였다. 창훈은 눈을 흘기며 일어나서,
 
115
"집에 잠깐 다녀옴세."
 
116
하고 모자를 떼어 쓰고 나간다. 좌우 협격을 받자니 성이 가셔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모양이다.
 
117
"하여간 이번에 잘 왔네. 허나 조심하게. 앞뒤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118
창훈이 나간 뒤에 젊은 주인 앞에 덤덤히 앉았던 지 주사는 무슨 생각을 하였던지 이런 소리를 한다.
 
119
"왜들 그래요? 쳤다는 전보두 안 오구."
 
120
"별거 있나? 모두들 눈이 벌개서 노리는 게 저거지?"
 
121
고 지 주사는 눈으로 다락을 가리킨다.
 
122
"그래야 별수 있나! 공연한 허욕이지마는, 아까들두 필시 그자들이 여기 모여서 쑥덕거렸던 게지."
 
123
"누구 누구들예요?"
 
124
"뻔하지 않은가. 최가, 창훈이, 수원집, 게다가 바깥것 내외... 지금 내가 저이들의 눈엣가시로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쏘아 죽이고 싶으리마는, 내가 아무리 늙어두 그런 어리배긴가?"
 
125
지 주사는 한번 뽐내 본다.
 
126
"창훈 아저씨두요?"
 
127
덕기는 일부러 놀라는 기색을 보인다.
 
128
"최가나 수원집과는 또 딴 배포일 거요. 서로 이용하는 것이겠지마는, 제일 무서운 것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거북하이마는, 수원집 아닌가 보이. 주의하게."
 
129
"그래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130
"만일 자네가 오기 전에 돌아가셨다면 저 속을 뒤집어놓고, 송두리째 훔쳐낼 수야 있겠나마는, 유서든지 무슨 문서든지 뒤집어 꾸며놓고... 큰 변 날 뻔하였네. 물론 아버니께서두 눈치는 채셨나 보네마는, 누가 있나. 나 혼자 애도 좋이 썼네."
 
131
지 주사는 공치사는 아니겠지마는, 자기의 노심을 자랑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132
"애쓰셨습니다."
 
133
"애랄 거 무어 있나마는, 아까만 해두 병원에서 흥정 가는 길에 아범을 데리러 왔더니, 사랑문이 안으로 걸려는 있는데 들어가려니까 아범이 들어가실 건 무엇 있습니까, 곧 차리고 나옵니다 하고 가로막는 듯한 거동이 수상쩍기에, 아범이 나올 동안에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암만해두 방 속에 인기척이 있던 거 같애."
 
134
"설마... 그러면야 밖에 신발이라두 있었겠지요."
 
135
"그러기에 말이지. 또드락 소리도 없는데 유리 구멍으로는 다락 앞에 사람 그림자가 얼찐거리니, 간데 없이 불한당이 든 셈 아닌가. 암만 생각해두 애가 쓰이더니 들어와 본즉, 목도리가 윗간방 문턱에 떨어져 있데그려. 그래 목도리 논래를 안하려 하겠나? 하여튼 창훈이가 그 틈에 끼였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최 참봉보다도 괘씸하지 않은가?"
 
136
"그야 그렇죠마는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난봉꾼이나 있었더면 그 이상 별의별 일이 다 나지 않았겠습니까."
 
137
덕기는 태연히 웃는다.
 
138
"허어..."
 
139
하고 지 주사는 감탄하는 기색으로 덕기를 한참 치어다보다가,
 
140
"자네 생각이 그렇게 드는 것을 보니, 조씨 댁 염려 없네... 흠, 자네 그런 줄 몰랐네!"
 
141
하며 지 주사는 별안간 덕기를 극구 칭찬하였다.
 
142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나두 불시에 이런 큰 살림을 맡게 되어 어리둥절합니다마는 잘 보살펴주십쇼."
 
143
덕기는 부친에게도 말 못하던 고독하고 불안하던 심중을 이 여생이 미칠 안 남은 노인에게 피력하는 것이었다.
 
144
"그야 내가 이 댁에 신세진 것으로 생각하기로 여부가 있나마는 내야 뭘 아나! 그럴 기력두 없구."
 
145
지 주사는 이렇게 겸사하면서도 이 어린 청년과 주객이 간담상조 하게 된 것을, 그리고 틈이 벌어가고 한 모퉁이가 이지러져 가는 이 집을 바로 붙드는 데 자기가 한 몫 거들어야 하게 괸 것에 깊은 감격과 자랑을 느끼는 것이었다.
 
146
"그 외에 무어 들으신 말씀 없에요?"
 
147
덕기는 이 노인의 입에서 좀더 무슨 자세한 말을 끌어내고 싶었다.
 
148
"들은 게 있나마는, 그 뒤에는 매당집이라는 무슨 고등 밀가루라고 한다던가 하는 년이 또 있다네그려. 자네 어르신네도 거기 가서 술잔이나 자시고, 수원집과 맞장구를 친 일도 있다데!..."
 
149
이 말에 덕기는 귀가 번쩍 띄는 눈치다.
 
150
"...하여간 그년의 집이 저의 패가 모이는 웅덩인 눈친데, 여기서 쑥덕거리지 않으면 틈틈이 거기로 모여 갖는 흉계를 꾸며 가지곤 모든 일을 잡질러놓는가 보데."
 
151
"매당집이란 어디기에 아버니도 그런 축에 끼실까요? 같이 어울려 다니시지는 않나요?"
 
152
덕기는 부친을 그렇게까지 의심하는 것이 못내 죄가 되겠다고는 생각하였으나 그래도 못 미더웠다.
 
153
"아냐, 자세는 몰라도 그럴 리는 없지. 그러나 매당이란 위인이, 나는 보진 못했지만, 은군자의 주름을 잡고 앉아서 남의 등쳐먹기로 장안에 유명짜한 년이라니까, 나네 어른과 수원집을 좌우로 끼고 안팎 벽을 치는 것인가보데그려. 주 군데서 다 얻어먹든지 그렇지 못하면 어디든지 한쪽 등이라도 쳐먹자는 게지."
 
154
"응! 그래요?"
 
155
덕기는 자기의 이해 관계보다도 세상 물정을 또 하나 알게 된 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이었다.
 
156
"그건 고사하고 이런 말은 자네만 알아두게마는, 애초에 최 참봉이라는 자가 수원집과 한퉁이 되어서 한밥 먹어보자고 계획적으로 수원집을 들여앉혀나 보데. 거기에 창훈이가 툭 튀어든 것이나 그놈들이 헉하고 나가자빠질 날이 있을 것이지."
 
157
지 주사는 고지식한 마음에 절치부심이다.
 
158
"그런 사람들에게 사탕을 내맡겨 두었으니 병환이 나으시려야 나으실 수가 있겠어요."
 
159
"여부가 있나!..."
 
160
약시시를 잘못하였으리라는 말에 지 주사가 신이 나서 여부가 있느냐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니 덕기는 가슴이 다 찌르르하며 놀랐다. 그러나 지 주사는 거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예를 드는 것은 모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덕기는 어제 무심결에 들었던 아내의 말이 다시 머리에 떠오른다. 약은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고 꼭 행랑어멈만 맡아 달이라 해서 안방에 들어가는 시중만은 자기(덕기의 아내)에게 시키는데, 그나마 조부가 듣는 데서 손주며느리가 약을 안 달이느니 정성이 없느니 하고 들컹거리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마는 사람을 미치게만 만드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고 아내가 하소연할 제 수원집의 예증이거니 하고 들어만 두었으나,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의심이 난다.
 
161
어멈이란 위인이 너름새 좋게 뉘게나 굽실대고 일도 시원스럽게 하여 주는 바람에, 처음에는 모두 좋아하였으나 두고 볼수록 뚜쟁잇감이나 기생집 어멈같이 능글능글하고 수다스러운 점이 뉘게나 밉살맞게 보여왔다. 어쨌든 그 어멈에게 약을 맡겨 달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덕기에게는 실쭉하다.
 
162
-두고 보면 알리라!
 
163
이미 입원한 뒤니까 이런 청처짐한 생각이겠으나 덕기는 속으로 눈을 흡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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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42권)     이전 29권 다음 한글 
◈ 삼대(三代)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