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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새 출발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31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31. 새 출발
 
 
3
"서방님 계신가요?"
 
4
병화는 사랑 마루 끝에 와서 소리를 치다가, 큰사랑 아랫목에 앉은 서방님이 유리로 내다보니까, 허리를 굽실한다. 그래도 덕기는 미처 못 알아 보았는지 내다보던 고개가 없어지고는 두런두런 자기네들 이야기 소리만 난다.
 
5
"식료품상이올시다. 댁에 용달을 터 주셨으면 하는뎁죠?..."
 
6
"그만 두우."
 
7
방 안에서 다른 사람 목소리가 난다.
 
8
"적으나 많으나 전화만 하시면 금시로 배달해드리고 즉전이나 다름없이 본값으로 해 드립니다."
 
9
덕기는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10
"어느 집이오?"
 
11
하고 다시 한 번 내다보다가 문을 활짝 열며,
 
12
"사-람은! 이게 무슨 장난인가? 연극하나?"
 
13
흰 두루마기를 입은 덕기는 일변 놀라며, 웃으며 뛰어나온다.
 
14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늘이 개신데, 한 자국 떼주십쇼그려."
 
15
병화는 싱글거리며 연해 허리를 굽실거린다.
 
16
"정말인가? 허허허... 사람두!"
 
17
덕기뿐 아니라 방 안 사람이 번갈아가며 내다보고 빙긋빙긋 웃으나 병화는 반죽 좋게 버티고 서서 조른다.
 
18
"그런데 이건 별안간 어디서 얻어 입었나? 지금 무슨 연습을 하는 건가? 이러고 어디를 갈 모양인가?"
 
19
덕기는 여러 가지 의혹이 창졸간에 들었다. 닷새 전의 장삿날 반우터에서 잠깐 만난 후로는 못 보았지마는 그때도 멀쩡히 양복을 입고 왔었는데, 그 동안에 또 무슨 객기를 부리고 이 꼴로 돌아다니는지 우스운 것보다도 궁금하다.
 
20
"어서 올라오게. 도무지 왜 그리 볼 수가 없나?
 
21
"가만히 계십쇼, 내 일부터 하고요."
 
22
하고 병화는 가슴에 찔렀던 광고를 쓱 빼내어서 한 장 준다.
 
23
"흥, 정말인가? 자네가 허나?"
 
24
"서방님 같은 분이 한밑천 대주시면야 모르겠습니다마는, 두 불알만 가진 놈이 웬걸 제 손으로 하겠습니까. 배달꾼입죠."
 
25
"말씀 좀 낮춰 하시지요."
 
26
"황송한 처분입니다."
 
27
"허허... 그만하면 주문도리로는 급젤세. 자, 그만하고 이젠 좀 올라오게."
 
28
"바빠서 올라갈 새는 없어와요. 그럼 통장 하나 두고 갑니다."
 
29
하고 가슴패기에서 이번에는 통장을 꺼낸다. '조' 자까지 미리 쓰고 한 장 넘겨서는 3전 수입인지까지 붙여서 도장을 딱딱 찍어놓은 것이다.
 
30
"이력 차이그려? 언제 다 이렇게 배워두었던가?"
 
31
덕기는 친구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이 멀끔히 치어다보며 웃는다. 바커스에서 잠깐 만난 뒤로는 초상 중에 조상 왔을 때 보았고, 반우터에서는 고개만 끄덕하고 헤어졌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새도 없었기는 하지마는, 어떻게 된 셈인지를 알 수가 없다. 경애와 같이 벌였나? 바커스의 한 끄트머리로 밑천을 얻었을까?
 
32
"자네 같은 위험 인물을 가외 일본 사람이 쓸 리도 없고, 누구하고 시작을 했나?"
 
33
"따금나리 보증으로 벼슬 한 자리 했습죠."
 
34
"이젠 어른께 말공대할 줄도 알고 하여간 제법 됐네."
 
35
덕기는 아까부터 병화의 깍듯한 존대가 듣기 싫었다.
 
36
"백만장자와 반찬 장수는 너무 왕청 떨어지기도 하지마는, 장사꾼의 분수를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서방님! 이 김병화는 어제까지의 김병화가 아니라, 산해진 식료품 상점 배달꾼 김병화입니다. 그쯤만 통촉해두시고 물건이나 많이 팔아 주십쇼. 소인은 물러갑니다."
 
37
병화는 빙글빙글하며 꾸벅 인사를 한다.
 
38
"응, 잘 가거라, 옛날 임성구가 살아왔구나!"
 
39
덕기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기만 하다가,
 
40
"쓸데없는 소리 말고, 좀 자세한 이야기나 듣세그려. 대관절 조선 사람에게 팔아먹자면야 일본 반찬 가게를 할 필요도 없고, 일본 사람에게 팔자면야 자네 같은 불겅이는 문전에도 얼씬을 못 하게 할 거니 장사가 될 리가 있나?"
 
41
하고 덕기는 우선 그 점을 염려하는 것이다.
 
42
"불겅이라니요? 저의 상점에는 막불겅이는 아직 안 갖다 놓았습니다마는 마른 고추, 실고추는 갖추갖추 있습니다. 그 외에 붉은 것을 찾자면 홍당무가 있삽고, 일년 감도 있삽고, 연시도 좋은 놈이 있습니다마는 일본 집에는 형사 데리고 다니며 보증을 하고 팔면 될 게 아닙니까?"
 
43
병화는 웃지도 않고 주워삼킨다.
 
44
"흥, 팔자는 좋으이! 보호 순사를 데리고 다니며 팔면 뜨일 리도 없고 십상일세그려."
 
45
"한번 놀러옵쇼. 예전 매동학교 근처올시다."
 
46
"응, 감세."
 
47
병화는 덕기의 웃음을 뒤에 남겨놓고 풍우같이 나왔다.
 
48
이 모양으로 오늘은 친구의 집, 안면 있는 집 안 한 바퀴를 돌고 상점에 돌아와 보니 경애가 와서 앉았다.
 
49
"그럴 듯하구려. 우리집에도 콩나물 일전 어치하고 두부 한 채만 배달해 주구려."
 
50
"예! 그럽죠. 댁이 어딥니까?"
 
51
"남산골 솔방울 구르는 집이오. 고명파도 잊어버리지 마우."
 
52
경애는 깔깔 웃고 말았다. 필순도 옆에 섰다가 따라 웃으며,
 
53
"선생님같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게 아니라 끌고 다니시면야 배달은 다 하셨지."
 
54
하고 필순은 두 팔을 내저으며 자전거 타는 어설픈 흉내를 낸다.
 
55
"그래두 책상물림의 서방님으로서는 제법이지. 대관절 주판질이나 할 줄 아우?"
 
56
경애는 또 옆에서 농을 건다.
 
57
"주판은 여기 졸업생이 계신데!"
 
58
하고, 병화가 필순을 가리키니까 필순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꼬고 웃는다. 필순은 사실 일주일이나 주판 놓는 것을 배워 가지고 왔다.
 
59
"그런데 벗고 나와서 일을 좀 하든지 어서 가든지 하우. 양장 미인이 떡 버티고 앉았으면 영업 방핸데."
 
60
"나 같은 사람이 앉았어야 영업이 잘되어요. 일본 사람은 담뱃가게와 목욕탕에는 간반무스메(간판으로 계집애를 두는 것)를 내앉히지 않습니까?"
 
61
"그러면 아주 지붕 위에 올라가 앉았지 않으려우?"
 
62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으려니까, 일본 하녀가 통장을 들고 와서 파 한 단과 멸치 한 근을 가지고 간다.
 
63
몇 집 걸러 일본 하숙에서 온 것이라 한다. 뒤미처서 일본 노파가 달걀 세 개에 팥 닷 곱을 사러 왔다. 싸전은 아니지마는 일본식으로 잡곡을 놓아 둔 것이다. 팥은 병화가 되어주고 달걀은 필순이 집어주었다. 이것은 맞돈이라 노파가 일원짜리를 내주니까 필순이 주판을 재꺽재꺽하더니 조그만 철궤를 쩔그렁 열고 79전을 거슬러 준다.
 
64
"얼마를 거슬러 주었어?"
 
65
"79전요. 팥이 9전, 달걀이 4전씩 12전이죠?"
 
66
"응!"
 
67
하고 병화는 웃었다.
 
68
경애는 두 사람의 일거일동을 빤히 노려보고 있다가 깔깔깔 웃는다.
 
69
"똑 갈맞는 양주 같구려. 아주 익숙한 품이 몇 해 해본 사람들 같은데!"
 
70
경애는 둘이 젊은 내외처럼 은근성스럽게 의논을 해가며 물건을 파는 양을 보고, 저러다가 아주 떨어지지 않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투기가 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서투른 솜씨로 잘못 팔까보아 애들을 쓰는 것이 가엾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술이나 먹고 게걸거리고 다니던 병화가, 이렇게 벗어부치고 나서서 서둘러대는 것을 보니 이번 일이야 영리 사업이라기보다도 까닭이 있어서 하는 일이지마는, 어쨌든 무얼 시키나 쓸모가 있고 평생 굶어죽을 사람 같지 않다고 속으로 기뻐했다. 지금 세상에 이만한 활동력이 있고 게다가 돈이나 살림에만 졸아붙을 위인이 아니요, 무어나 큰일을 해 보려는 뜻을 가진 청년도 드물겠다고 생각하면 한층 더 믿음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솟는 것이다. 뜻 맞은 손아래 오라비 같은 귀여운 생각도 든다. 그럴수록 필순에게 대한 막연한 질투심이 머리를 드는 것 같아서 겉으로는 웃음으로 그런 잡념을 쓱쓱 지워버리나 속으로는 애가 쓰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71
그러면서도 경애 자신이 이 상점을 잡아차고 들어앉고 싶은 생각은 아무래도 아니 났다. 실상은 경애가 먼저 앞장을 서서 찬성하고 서둔 일이나 벗고 나설 용기가 나지는 않는다. 발론의 시초는 조그만 화장품상이나 잡화상- 그렇지 않으면 털실이나 레이스니 하는 것을 주로 삼고 어떤 여학교 하나를 끼고서 학용품상을 벌여볼까 한 것이었다. 물론 자본금은 상훈에게 기댈 작정이었다. 상훈도 경애가 나서서 한다면 대어줄 듯이 찬성이었다.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면- 급히 돌아가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허사겠지마는, 돌아가만 놓으면 돈 몇천 원이고 못 들리랴 싶어서 아무려나 해보라고 반승낙은 한 것이었다.
 
72
그러자 마침 지금 이 상점자리가 난 것이다. 이 상점은 400원에 쌌다. 바커스의 주부가 새어 든 것이다.
 
73
방물장사니 잡화상이니 하고 의논이 분분한 판에 주부가 아는 일본 사람으로, 얌전하게 반찬 가게를 하다가 남편이 노름에 몸이 달아서 거절이 나니까, 홧김에 넘기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사서 해보겠느냐고 지나는 말로 한 것이 의외로 얼른 낙착이 난 것이다. 처음에는 집값이 2000원, 전화 300원, 현물 500원이란 금이었으나, 집은 사글세 30원, 전화도 세로 정하고 남은 물건만 400원에 넘겨 맡은 것이다.
 
74
등이 달아서 넘기는 것이니, 사는 사람으로서는 손은 안 되었다. 그러나 집은 다른 작자라도 나면 팔 작정이라는데, 일본 사람 촌이 되어가는 이 좌처를 빼앗기면 안 될 터이니 이왕이면 곧 사는 것이 유리하였다. 400원은 병화가 덜컥 치렀으나 집을 사저면 상훈이 셈이 피어야 할 것인 즉, 결국에는 조 의관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여기도 또 하나 있는 셈이었었다. 이제는 돌아갔으니 집을 사게 될 듯도 하다.
 
75
병화의 400원은 물론 피혁이 주고 간 속에서 나온 것이나, 경애의 명의로 치렀고 이 상점의 명의도 경애로 되어 있다.
 
76
피혁이 그 돈을 줄 때 반찬 장사를 하라고 한 것이 아니면야 병화도 그 돈을 헐어서 첫 번에 쓴 다는 게, 하고많은 장사 중에 하필 반찬 가게를 벌였으니 양심이 있는 놈 같으면 낯이 뜨뜻하였을 것이다. 피혁은 보도 듣도 못하던 김병화더러 애인과 같이 반찬 가게라 벌이고 생활 안정이나 하여서 살이나 피둥피둥 찌라고, 수륙 만리의 머나먼 길을 갖은 고초를 다 겪고 다녀간 것은 아니었다.
 
77
피혁이 그 돈을 줄 때 다만 홍경애의 손만을 거쳐 넘어가게 한 것이 실수라고도 할 것이다. 병화와 서로 철주할 만한 또 한 사람을 맞붙여 놓고 부탁을 하였더면, 저희끼리 헐고 뜯고 하여 지금쯤 병화는 얻어맞아도 상당히 얻어맞고서 경향간에 소문도 파다할 것이니, 병원 아니면 경찰서에 들어가 앉았을 것이요, 산해진의 간판도 비거 서남풍하였을 것이다.
 
78
사실인즉 산해진의 간판은 아직 안 붙였으니 동지간에 내용은 고사하고 병화가 일본 반찬 가게를 냈다는 소문도 아는 사람이 아직은 없다. 찾아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두 번 부터는 절대로 발그림자도 못하게 단 거절할 적정을 병화는 단단히 하고 있는 판이다.
 
79
필순은 그게 걱정이었다.
 
80
"어제까지 오던 사람을 어떻게 야멸치게 못 오게 할 수야 있겠어요. 그러면 심사가 나서라도 짓궂이 더 와서 성이 가시게 할 것이요, 입을 모으고 무슨 훼방이라든지 놀걸요."
 
81
필순은 병화가 교제도 다 끊는다는 말을 들을 제, 자기도 자기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찾아오는 사람을 냉대를 해서 보낼까가 적지않은 걱정이었다.
 
82
"아무러면 어떠리? 제까짓 놈들 뉘게 와서 흑책질을 할라구!"
 
83
병화의 팔심은 믿음직하기는 하지마는, 필순더러 모스크바로 달아나라고 한 지가 한 달도 채 못 되는 사람의 말이 이러하다. 필순은 안심이 지나쳐서 겁이 도리어 났다. 병화를 경멸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84
어쨌든 필순의 집은 이리 옮겨 왔다. 필순을 공장에서 들여앉히기 위하여 이 장사를 하는 것만도 아니요, 필순의 집에서 없는 살림에 공밥을 2,3 년 먹고 신세를 진 값으로 이 집 세 식구에게 살 도리를 차려주느라고 급히 벌인 장사도 아니다. 그러나 필순의 집 세 식구는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또 필순은 가게를 보게 하고 부모는 안에서 살림을 하며 뒷배나 보아달라 하기에 십상 알맞았다. 경애는 처음에는 필순네는 식구가 많다고 반대하였으나 남의 사람보다는 나은 점이 쓸모라고 찬성하고 말았다.
 
85
필순은 요새 같은 깊은 겨울에도, 첫차가 나오는 소리가 뚜르르 나자 일어나서 가겟방에서 자는 병화가 깰까보아 조심조심 빈지를 열고 가게를 내느라면 병화도 지지 않고 같이 일어나서 남대문 장으로 서투른 자전거를 빙판 위에 달리는 것이다. 필순 부친도 조선옷은 안 어울린다 하여 고물상에서 주워온 헌 양복바지에 재킷을 푸근히 입고, 가게 속에 놓인 화로 앞에 나와 앉는다. 모든 것이 아직 초대요 연습이었으나, 평화롭고 전도에 빛이 보이는 것
 
86
같아서 흥이 났다. 필순은 첫차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막차가 들어간 뒤라야 자리에 눕지마는, 고단은 하면서도 자릿속에서까지 물건값을 외고 파는 솜씨를 연구하기에 어느 때까지 잠이 아니 왔다. 요새는 공부하겠다는 생각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가다가다는 덕기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상점 구경을 오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볼꾸? 하는 생각을 하고 혼자 얼굴이 붉어지다가도 파르스름한 점원복을 입고 익숙한 솜씨로 물건을 파는 양을 보여주고 싶은 충동도 일어난다. 그러나 벌겋게 얼어서 터진 팔목을 걷어올린 것도 보일 것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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