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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검거 선풍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38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38. 검거 선풍
 
 
3
덕기는 안방이 싫증이 나서 자리를 걷어치우고 사랑으로 나왔다. 지 주사와 노인 축은 젊은 주인을 경원하여 건넌방으로 몰리고 넓은 방에 혼자 앉았으니 공부라도 될 것 같으나, 책장이 놓인 자기 방- 아랫방만 못하다. 할아버니 자리에 앉았기가 죄송스럽고 어색한 점도 있거니와, 문갑, 연상, 탁자... 고색이 창연한 할아버니 쓰시던 보든 제구가 골동품으로 값이 나갈지 모르고 가보로 대나 물릴지 몰라도, 자기에게는 어울리지도 않고, 눈에 뜨이는 것마다 할아버니 생각이 나서 기분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잘못하다가는 추후 시험도 못 보게 될까 보아 애가 쓰이거니와, 하여간 하루 바삐 경도로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아무래도 공부를 하자면 큰사랑 차지를 하고 앉아서는 될 성싶지 않고 경성대학으로 오려는 계획도 집어치워야 하겠다고 다시 생각하였다. 바깥일은 지 주사와 정미소의 지배인에게 맡겨놓고, 안살림이나 금전 출납의 전책임을 모친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그 편이 도리어 모친을 위하여도 좋을 것이다. 돈을 만지고 살림에 재미를 붙여서 몸이 바쁘면 히스테리도 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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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필순이다. 나는 나대로라고 하겠지마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저는 저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다. 생각을 말자면서도 문득문득 머리에 떠오르면 그저 가엾고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반드시 자기 사람을 만들자는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나 다만 제2 홍경애가 될지 모른다는 기우로 피차의 본심을 속이거나 있는 호의도 감추어버릴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도 다시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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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앙불락한 2, 3일이 지났다. 어제부터는 약도 끊어버리고 이제는 차차 떠나 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오늘은 낮에 행기삼아 좀 나가 볼까 하는 판에 전화가 온다. 병화다. 일전에 돈 1000원을 조르고 간 뒤로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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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원삼이가 불려갔는데... 거기는 아무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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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이가? 어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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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일전의 그 소문이란 것이 직각적으로 머리에 떠올라 왔다. 기어이 어느 놈이 꽂은 모양이다. 별일이야 없겠지마는 성이 가시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경도행을 또 연기하게 될 것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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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종로서에서 데려간 것이 아니요, 경찰부가 착수한 모양이라는 것이 이상도 하거니와, 산해진이 포위중에 든 모양 같으니 정보만 전화로 연락하여 줄 터인즉 올 것도 없이 가만히 들어앉았으라는 것이다. 원삼의 처가 헐레벌떡 와서 걱정을 하다가 가더니, 어슬할 머리에 병화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원삼의 처를 끌고 와서 필순도 함께 데려갔다는 것이다. 경애도 오늘은 오지 않는 것이 필시 또 불려간 모양이라 한다. 필순도 들어갔다는 데는 덕기도 놀랐다. 단순한 자기 집안의 중독 혐의 사건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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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이라든가 사법이라든가? 고등이면 내가 좀 알아볼 만한 데두 있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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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게 분명치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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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혼자 있어서 나올 수도 없다기에, 덕기가 저녁 후에 가마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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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통에서 떨어진 덕기는 경찰부면은 '기무라' 고등과장을 찾아가 보나? 하는 생각을 혼자 하고 앉았다. '기무라' 고등과장은 종로서 시대부터 덕기가 잘 아는 처지다. 조부가 정총대니 방면위원이니 하여 공직자인 관계도 있었고, 재산 있는 유력자라 하여 교제가 잦았을 때 덕기는 조부의 통역으로 가끔 만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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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자기 집 소문으로 일이 벌어졌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마는. 필순까지 이 추위에 고생을 시키는 것이 애처로워서 우선 병화와 만나 의논을 하여 보고 당장에라도 기무라를 찾아가보고 싶으나, 퇴사한 뒷일 것이요, 사택으로 찾아갈 만큼 자별치는 못한 터라, 이리저리 궁리를 하며 저녁 후에 병화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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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건은 대강 짐작들 한 바와 같이 사법과 고등 두 가래에 걸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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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때 일이었다. 경찰부 기무라 고등과장이 이제는 퇴사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난로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앉았자니까, 금천 주임이 들어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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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쪼오도노(과장 영감)! 오늘 저녁에라도 일제히 착수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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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최후의 결재를 재촉하듯이 품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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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글쎄... 무어라고들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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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그리 탐탁치않은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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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놈들이야 무어 압니까. 어쨌든 확신은 있는 일이요, 일부를 건드려 논 다음에야 이제는 철저하게 나가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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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주임은 이번 일에 고등과장이 우유부단인 것이 불평이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과장이 종로서장 시대에 조덕기의 조부와 비교적 가까이 지낸 관계가 있다. 돈 있는 사람을 괄시 못할 점도 있다. 그러나 금천으로서는 타오르는 공명심을 걷잡을 수도 없고 과장이 그럴수록 고집을 세워보고도 싶은 것이요, 또 그만한 확신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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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덕기 자신의 문제나 그 가정내의 문제는 발전됨을 따라 분리를 시켜서 사법계로 넘길 성질의 것이나 고등계 소속의 금천 형사로서 노리는 점은 따로 있는 것이다. 즉 덕기 조부의 독살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 주범이 조덕기라면 분명히 그 교사자는 김병화라는 단안이다. 첫째 부호 자제와 공산주의자가 그렇게 친할 제야 아무 의미 없는, 동문 수학하였다는 관계뿐만이 아닐 것, 둘째 경도부 경찰부에 의뢰하여 조사해본 결과 특별히 불온한 점은 인정치 않으나, 덕기의 하숙에 두고 나온 책장에 마르크스와 레닌에 관한 서적이 유난히 많다는 점, 셋째 덕기가 돈 1000원을 주어서 장사를 시키는 점, 넷째 작년 겨울에 한참 동안 두 청년이 짝을 지어 바커스에 드나들었는데, 그 여주인도 다소간 분홍빛이 끼었다는 점... 등등으로 보아서 조덕기는 그 소위 심퍼사이저(동정자)일 것이다. 그런데 재산이 아무 이유 없이 당연한 가독 상속자인 조상훈을 젖혀놓고 손자에게로 갔다. 여기에는 무슨 음모든지 있을 것이요, 그 배후에는 김병화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의문이 상식적으로만도 넉넉히 드는 터에 항간에는 중독설과 의사 매수설이 자자하다. 마침내 금천은 단독적으로 단연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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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과장은 좀더 확증을 붙들 때까지 참으라고 며칠을 눌러 나오다가, 하도 성화같이 조르는 바람에 어제 오후에 겨우 승낙을 하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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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부하가 공명심에 날뛰는 것을 경계하여 누르려는 생각도 있지마는 좀더 다른 계통으로 노려보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의 검거가 끝난 후 벌써 2, 3개월이나 되니, 그 잔당 사이에 아무 책동이 없을 리가 없을 것이데, 표면상으로는 매우 잠잠하고 김병화란 자는 천만 의외에 식료품 장사 중에도 일본식 반찬 가게를 시작한 것이 결코 홑벌로 볼일이 아닌 일편에, 외지의 정보는 구구하나마 여러 계통의 인물이 책동 잠입하는 형적이 있다. 물론 그런 종류의 정보란 열이면 열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열의 한둘은 사실일 것인데, 여기에는 아무리 부하를 동독해도 감감 무소식이다. 지금 서울의 거두는 거의 일망타진하였으나, 그 중 온건한 자로서 김병화와 장훈이 그 또래 중에서는 중심 인물이다. 그러나 그 온건이라는 것이 폭발탄의 껍데기같이 두루뭉수리의 온건인지 모를 일이다. 과장은 이런 방면에 더 착목을 하고 있기는 하나, 금천의 관찰도 무리치 않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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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과장이 고개를 전후로 흔드는 것을 보고, 금천 주임도 오늘 아침에 부하를 풀어 놓아서 우선 아랫도리에서부터 착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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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가 산해진에를 와보니 문이 첩첩이 닫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염려가 없지 않았지마는, 병화마저 잡혀간 것 같아서 슬며시 낙심이 되었다. 이 밤 안으로 자기에게도 형사가 달려들지 모르겠다는 겁도 난다. 하는 수 없이 돌쳐서려니까, 마침 필순의 모친이 컴컴한 데서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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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밤에 어떻게 나오셨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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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반색을 하며 소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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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따님이 들어갔대죠? 얼마나 애가 씌시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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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에요. 지금 김 선생두 데려갔는데, 집이 비니까 하는 수 없이 날더러 경기 도청 앞에서 만나자고 병원으로 전화가 왔기에 가보니 열쇠와 돈을 맡기구 그만 끌려들어가시겠죠. 이거 어떻게 되려는 셈인지 사는 것 같지가 않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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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에 찌들어 퍽 암팡지게 생긴 이 부인도 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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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들어가시죠. 그래 병환은 요새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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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문을 여는 뒤에 서서 인사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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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해두 사실 것 같지 않아요. 폐렴이 어서 걷혀야 할 텐데 점점 더해만 가시구... 그 놈들 동티에 남 못할 노릇 하구 저희 못 살구... 아, 이렇게 막막할 수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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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들어가서 전등불을 더듬어 켜니, 난롯불도 꺼지고 찬바람이 휙 도나, 그래도 물건들은 질번질번히 놓여 있고 사람들을 휩쓸어내간 집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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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의 모친이 이것저것 부산히 치우는 동안에 바커스에 전화를 걸어본즉, 경애 모친도 경찰부에 불려간 모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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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비로 쓸 듯이 모조리 데려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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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의 모친은 자기마저 붙들려가면 병인을 뉘게 맡길까 겁이 난다고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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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히 염려 마세요. 어떻게 주선을 하면 곧들 나오게 될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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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안심을 시키느라고 고등과장을 내일 찾아가겠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혼자 떼쳐두고 나설 수도 없어서, 치울 것은 치우고 얼 것은 들여놓고 하기를 기다려서, 같이 나와 병원까지 바래다주고 덕기는 화개동으로 올라갔다. 병 후에 문안 겸 경찰의 손이 여기까지 뻗치지는 않았나 궁금해서다.
 
42
사랑에서는 과연 이야기에 듣던 바와 같이 문을 닫아걸고 마장이 한창이다.
 
43
"마침 잘 왔다. 지금 너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만, 경찰부에서 원삼이를 붙들어 갔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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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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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웬일이냐? 아까 최 참봉이 여기 놀러 온 것을 불러갔는데 대관절 무슨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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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참봉두요? 모르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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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 새문 밖 영기 집 주소도 물어 가더라는데, 온 그거 수상하지 않으냐."
 
48
마장의 큰 노름판을 차리고 앉았느니만큼, 부친은 불안해 못 견디는 기색이다. 영기 집이란 창훈의 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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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올시다. 내일 좀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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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어름어름하고 나와버렸다. 안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마는, 돈 아니 걸고 하는 노름이 있을 리 없고 덕기는 입맛이 썼다.
 
51
집에 돌아와 보니 지 주사가 불려갔다 한다. 이제는 자기 신변에까지 닥쳐온 것을 생각하니, 별일이야 없을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가슴이 선뜻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추위에 늙은이가 유치장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니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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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둥 마는 둥 하룻밤을 간신히 새고 이튿날 아침결에 경찰부로 들어갔다. 어차피 불려갈 바에야 자수라느니보다도 고등과장을 한시바삐 만나자는 것이다. 그러나 과장은 아니 만나고 금천이 직접 불러들였다. 어차피 불러야 할 판인데 제풀에 온 것이 다행하다고 과장은 만나지 않게 하고 우그려 넣으려는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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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건은 두 군데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병화와 장훈을 중심으로 필순, 경애 모녀들은 고등계에 불린 것이요, 지 주사, 한방의, 최 참봉들은 사법계다. 덕기와 원삼 내외는 두 군데 다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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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초점은, 재산의 대부분이 어째 덕기에게 상속되었는가? 조부의 유해를 해부하자는 데에 어째 반대하였으며, 의사에게는 무엇 때문에 과분한 사례를 하였던가? 병화를 원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좌익 서적은 얼마나 읽었는가 네 가지다. 여기에 대한 덕기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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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는 부친을 미워하고 못 믿었었다. 부친의 대에 가서는 가산을 탕진하리라는 것을 거의 미신적으로 단정하였었다. 부친보다 4, 5배를 몫으로 준 것은 준 것이 아니라 조가의 집을 위하여, 자손을 위하여 맡았을 따름이다. 중독설은 믿을 수 없다. 돈은 한약재 중에 중독소가 있는가를 연구하여 달라는 부탁 겸 손수세로 보냈으나 지위와 명예로 보아서 과분한 액수는 아니었다. 해부를 반대한 것은 자식으로서 부모와 화장을 싫어하는 것과 같은 심리도 있지마는 노환일 뿐 아니라 불미한 전이 있을 리가 없는데, 누워서 침뱉는 일을 하여 가문을 손상치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력한 실증은 조부가 생전에 금고 열쇠를 내맡겼다는 사실과 유서이었다. 이튿날 불려온 수원집은 열쇠 꾸러미를 경도에서 오는 길로 받는 것을 목도하였다고 증언 아니하는 수 없었다.
 
56
병화와의 관계는 저번 판에 핵변한 것을 되풀이하였다. 함께 자란 죽마고우가 집을 뛰어나와 굶고 다니는 것을 구제할 겸 전향시키려는 우정으로이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였다. 그러나 경도 하숙의 책상에 좌익 서적이 많다는 점으로 보아 이 말은 용이히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경제학을 연구하느라면 참고로 보아야 한다는 말도 귓가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57
이 날 덕기는 과장의 낯을 보아서인지 앓고 난 뒤라 해서 동정을 하였던지, 숙직실에 누웠다가 거기서 쓰러져 자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58
금천 주임은 중독 사건은 수원집 일파를 사법계에 맡겨서 취조하는 것이 첩경이라 하여 그리로 넘기고, 병화와 경애 문제는 경애 모를 닦달하면 무엇이든지 나오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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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서 만난 놈이겠지마는 그놈 바람이 잔뜩 키인 헐렁이지요. 그 놈 때문에 나까지 욕을 보는 것도 분한데, 내 딸이 그렇게 어림없이 그 놈하고 무슨 일을 할 듯싶은가요. 어서 내 딸이나 내놔주시구 그놈은 한 십년 징역을 시켜 주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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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모친은 이런 딴청을 하며 게두덜대었으나 차차 취조해가는 중에 이 늙은이의 남편이 그 유명한 독립운동가 홍xx이라는 말에 금천 형사는 눈이 커대졌다. 어구나 이 여자도 야소교인이다. 결코 이렇게 말귀도 못 알아듣고 이면 경계 없이 덤빌 구식 여자가 아닌데, 이러는 것은 공연히 미친 체하고 떡 목판에 엎드러지는 수작이 아닌가 하고 금천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61
더구나 본가편의 이야기가 나왔을 제 오라비가 상해로 달아나 뒤에는 부지거처란 말에 더욱 의심이 버쩍 났다. 이 집안 내력들이 이렇구나 하고 벼르는 것이다.
 
62
"그래 그 오라비 이름은 무어야?"
 
63
"xxx라고 하지요. 그놈도 죽일 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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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xxx!"
 
65
금천 형사는 눈이 등잔만해졌다. 경애 자신은 아직 변변히 취조를 못 했으나 대강 병화와의 관계만 물어보기에 급하여 저의 집 내력을 이때껏 몰랐더니 알고 본즉 맹랑하다.
 
66
"참 그런데 저번에 왔던 그 사람 요새는 어디 있소? 그저 댁에서 묵지?"
 
67
금천은 자기 친구의 소식이나 묻듯이 별안간 좋은 낯으로 묻는다.
 
68
"누구요? 우리 시뉘님요? 아직 집에 계셔요."
 
69
수원서 사촌 시뉘가 와서 요새 묵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70
"아니, 오라버니한테서 온 사람요."
 
71
"십여 년을 처자가 굶어죽게 되어도 저만 벌어서 쓰고 돈 한푼 안 보내는 그런 도적 같은 놈이 무슨 정성이 뻗쳐서 사람까지 보내요. 그놈 우리집 판 돈까지 알겨 가지고 달아난 그런 몹쓸 놈예요."
 
72
맨 딴청만 한다. 물론 넘겨짚고 물은 말이지마는 이 늙은이의 대답이 그럴 듯은 하면서도 너무 능청스러운 점이 도리어 의심이 난다.
 
73
"그런데 오라버니 집이 지금 어디란 말요?"
 
74
"현저동 어디서 산다는데 가본 일도 없에요."
 
75
"돈을 얼마나 떼었는지 동기간에 절연을 하여서야 그거 되었소."
 
76
금천은 능청맞게도 잘하는 조선말로 이렇게 한가로운 수작을 하고 웃다가,
 
77
"그래 조카 자식들도 있겠구려?"
 
78
하고 말을 돌린다.
 
79
"둘이나 있어요."
 
80
"벌어들 먹을 만하게 자랐나요?"
 
81
마치 여러 해 격조한 친구의 집안을 걱정해주는 것 같다.
 
82
"예에, 큰놈은 열 아홉 살이나 먹고 작은놈은 열 여섯인지 열 일곱인지..."
 
83
금천 형사는 요놈들을 데려다가 물어보리라 생각하였다.
 
84
"바쁘신가요? 좀 급한데."
 
85
방한모에 조선옷을 입은 자가 취조실로 창황히 들어오며 말을 붙인다.
 
86
"음, 가져왔나?"
 
87
"갖다가 세 군데나 감정을 해봐야 판에 박은 듯이 똑같습니다."
 
88
"그래 무어라구?"
 
89
"본새가 외국 건 외국 건데 상해제도 아니요, 미국제도 아니라구요."
 
90
"그럼 어디 거란 말인가?"
 
91
"묻지 않아도 로서아제지요!"
 
92
"그래 얻다 두었나?"
 
93
"여기 가졌에요."
 
94
하고 그자는 금천 형사 앞에 앉았는 경애 모친에게로 눈을 보낸다. 두루마기 귀에 손을 찔러서 그 속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경애 모친도 눈치채었으나, 일본말로 수작을 하기 때문에 무슨 소린지 알 수는 없었다.
 
95
금천 주임은 이 여자 때문에 가진 것을 내놓지 않는 줄 알았으나, 감출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96
"어디 좀 보세."
 
97
하고 손을 내밀며 경애 모친의 얼굴을 치어다본다.
 
98
두루마기 속에서 흙투성이의 너털뱅이 노랑 구두 두 짝이 나오는 것을 보자, 경애 모친의 눈은 번쩍하며 고개가 뒤로 끄덕하여졌다. 두 형사의 눈은 노파의 얼굴에서 차차 떠나면서 저희들끼리 마주쳤다. 경애 모친은 무거운 침묵이 등덜미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머리가 아찔하면서도 정신은 반짝 났다. 형사들은 뜻밖에 단서를 잡은 듯이 속으로 춤을 추었다.
 
99
"이 구두 뉘 것인지 알겠지?"
 
100
금천 형사의 눈은 금시로 험하여졌다.
 
101
"뉘 건데요?"
 
102
"뉘 건데라니?"
 
103
옆에 섰던 부하가 마루청을 탕 구르며 덤벼들어서 경애 모친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하고 후려잡고 흔들어 놓으니, 애고고 소리를 치며 바닥에 뒹구는 것을 발길로 두어 번 걷어찼다. 우선 얼을 빼놓는 것이다.
 
104
이 구두는 장훈의 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장훈은 두목이니만큼 감시만 하고 병화보다도 하루 늦게 잡아들이는 동시에 그 구두를 가져다가 몇몇 구둣방에서 감정을 하여오라 하였던 것이다.
 
105
금천은 저번 테러 사건이 있은 뒤부터 보지 못하던 구두를 장훈의 집 사랑방(사랑방이래야 행랑방이나 다름없지마는) 툇마루 앞에서 발견하고 눈여겨보아 오던 것이다. 사흘들이로 장훈의 집에를 순행하듯이 들여다 보았지마는, 다녀간 사람이나 묵고 간 사람은 없다는데 주인이 집 속에서 끄는 헌 구두가 새로 생긴 것이 이상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 구두는 장훈에게는 넉가래 같아서 출입에는 못 신는 모양인 것이다.
 
106
물론 가택 수색은 하였으나 다른 소득은 없었다. 어쨌든 무슨 언턱거리든지 잡아 가지고 이 판에 장개석 일파와 김병화 일파를 뿌리 빼자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일자 이후로 반목 중에 있을 듯한데, 매 끝에 정이 들었는지 싸운 뒤에 도리어 친해진 듯한 눈치가 보이는 것이 수상하던 터이라 구두 조건을 얽어 가지고 한 번 건드려 보자는 것이다.
 
107
"너의 집에서 장훈이와 김병화를 불러다가 로서아에서 들어온 놈과 만나게 해 주었지?"
 
108
이제는 금천도 경애 모친을 '너'라고 마구 다룬다.
 
109
"그런 일 없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 같은 늙은이를 왜들 이러세요?"
 
110
경애 모친은 우는 소리로 애걸을 하였다.
 
111
"네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네 딸이 그랬다는 말이야!"
 
112
또 소리를 벼락같이 지른다. 형사들도 물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넘겨 짚는 소리다.
 
113
"우리 딸년은 분이나 바르고 향수나 뿌리고 밤을 낮으로 알고 돌아다닐 줄이나 알지, 구 외에 무슨 일을 하였겠에요?"
 
114
이 노부인도 남편의 덕에 이런 곤경도 좋이 치어 나서 엄살로 목소리는 떨어도 여간해서 속까지 떨리지 않지마는 저놈의 구두 하나만은 보고 볼수록 뜨끔하다.
 
115
- 그 빌어먹을 놈이 신기 싫으면 쓰레기통에라도 넣고 달아를 나거나! 누구 못한 노릇 하려고 어디다 벗어놓고 달아나서 이 불티를 낸단 말이람!...
 
116
어떻게 되는 조카인가 하는 피혁을 속으로 원망하고 앉았으나 원망한들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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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딸이 어째 김병화 같은 놈하고 사느냔 말야? 김가가 분장수야? 향수장수야?"
 
118
"낸들 알겠습니까마는 인물이 끼끗하고 허우대가 좋은 놈이 슬슬 꾀는 바람에 그 미친년이 멋모르고 따라다녔겠죠. 그 놈팡이가 말 뼈다귀로 된 놈인지 쇠 뼈다귀로 된 놈인지 전들 알겠습니까?"
 
119
"흥, 아주 말 잘하는데! 남편- 홍 선생님한테 배운 게로군?"
 
120
하고 금천은 까짜를 올리면서,
 
121
"그래 이 구두를 정말 모르겠소?"
 
122
하고 다시 순탄한 목소리로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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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안다지, 무엇 하자고 속이겠어요?"
 
124
"응, 그럴 테지!"
 
125
금천 주임은 비꼬듯이 대꾸를 하고 부하에게 슬쩍 눈짓을 하니까, 옆에 섰던 형사가 별안간 '일어나'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경애 모친은 하도 무서운 큰 소리에 용수철이 튀듯이 일어나며 벌벌 떤다.
 
126
"대접이 받고 싶거든 바른대로 자백을 하는 게 아니라!"
 
127
부하는 혼자 중얼거린다.
 
128
십 년 전 남편 때문에 붙들려갔을 때도 두 차례 세 차례씩 그 몹쓸 고생을 당하였다. 또 그러려고 끌고 가는 거나 아닌가? 하는 겁이 펄쩍 나서 두 다리가 허청 놓이며 부르르 떨린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입 한 번만 벙긋하면 내 딸이 생지옥으로 떨어지는 판이다. 차라리 내가 예서 숨이 끊어질지언정 우리 경애는 3, 4년 콩밥을 먹일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129
거진 한 시간 뒤에 경애 모친은 어두컴컴한 속에서 만들어 붙인 고무손 같은 손으로 흑흑 느끼면서 옷을 주워 입고 형사를 따라 환한 방으로 다시 왔다. 아래위 어금니가 딱딱 마주쳐서 입을 어우를 술도 없고 어디가 앉을 기력도 없다. 손발은 여전히 내 살 같지가 않고 빠질 것만 같다.
 
130
"말 한마디에 달렸는 것을 그걸 발악을 하면 무얼 하우? 내 몸 괴로운 것은 고사하고 귀한 내 딸도 당장 그 지경을 당할 것을 생각하면 자식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얼른 시원스럽게 불어버릴 게 아니오. 우리야 범연히 알고 그럴 리가 있나! 손살같이 알기에 그러는 것을 속이려면 되나! 나 같으면 내 자식이 그런 곤경을 치를까 보아서라도 선뜻 한마디할 테야..."
 
131
이렇게 달래는 것이었다. 그러나 딸이나 병화가 이보다 몇 곱절 고초를 겪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이만쯤한 것을 못 견디랴 싶었다.
【원문】검거 선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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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상섭(廉想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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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