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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너만 괴로우냐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5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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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만 괴로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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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가 자기 모친까지를 비웃는 듯한 빙퉁그러진 소리를 하는 것이 덕기에게는 못마땅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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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 같으면 그도 모르겠지마는 병화의 모친이 계보가 아닌 것은 번연히 아는 터이다. 중학교 시대에는 병화의 부친이 황해도 지방에 목사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부모를 별로 만나본 적이 없었으나 그래도 졸업 임시에는 한두 번 하교로 찾아온 것을 보았었다. 3년 전 일이니 기억에서 몽롱하나 그래도 얌전한 기솔 아낙네이었던 인상이 남아 있다. 지금이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후 덕기는 3년이나 경도에 가 있었고 병화는 일년 뒤떨어져서 동경에 건너갔다가 올 가을에- 해가 바뀌었으니 작년 가을이다- 서울로 돌아왔었기 때문에 두 청년은 그리 자주 만남 기회가 없었더니만큼 피차에 더욱이 덕기는 병화의 부모를 만나 볼 새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인품은 짐작할 수 없으나 아무러면 같은 서울 안에서 자식이 이렇게 곤궁한 것을 모친까지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랴 싶었다. 그건 하여간에 이 두 청년이 졸업 후에 만남 것은 병화가 도경에 갈 적 올 적에 경도로 들른 것과 이번에 와서 만남 것 얼러 세 번째요 그럭저럭 상종이 드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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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있을 때도 그리 자별한 친구는 아니었다. 그란 피차의 부모가 교회의 교역자라는 것과 또 자기 자신들이 교회에 다니는 점으로써 얼마쯤 서로 친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xx고등보통학교 3학년부터는 병화가 덕기를 따라서 x교 예배당으로 올라온 뒤부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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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천진스러워야 할 두 아이들이 교제도 어른들의 버릇으로 친하긴 하면서도 제각기 제 생활을 들추어 보일까보아 경이원지하는 그러한 친절로써 사귀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중학교를 떠난 뒤에 피차 교회와 멀어지게 되니까 또 다시 새로운 친분이 서로 생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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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의 법문과에 지원을 하였다가 실패한 병화가 일년을 부모가 있는 해주로 내려가서 다음해의 입학 준비를 하여 가지고 일년을 뒤떨어져서 동경 가는 길에 경도에 들었을 때 병화는 덕기더러 이런 소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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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니께서 동지사(경도에 있는 대학) 신학부에 들어가거나 거기서도 안 되거든 동경으로 가서라도 신학을 공부하라고 하시기에 네에 네에 하고 떠나오긴 했지만, 난 죽어도 목사 노릇은 아니할 텔세. 목사는커녕 실상 내 짐 속에는 바이블(성경책)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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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을 때 덕기는 친구의 말에 놀라기보다도 내심으로 반색을 하였었다. 종교 생활에 대하여 병화처럼 노골적으로 대담히 반기를 들 수 없이 머뭇머뭇하고 있던 차에 옛 동무- 더구나 같은 처지에 놓인 교회 동무가 이러한 말을 할 제 동감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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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면 당장 학비가 오지 않을 게 아닌가? 더구나 자네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해서 입학만 되면 교회 속에서 학비라도 끌어내실 작정이실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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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의 집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것을 아는 덕기는 그때부터 이러한 염려까지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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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내가 자네보다 더 생각했지! 허지만 몇 해 동안 학비 얻어쓰자고 자기를 팔 수 있나?- 자기의 신념을 팔 수야 있나? 만일 신앙을 잃고서 그 잃은 신앙의 내용을 공부한다면 그건 대관절 무엇인가? 예수를 팔아먹는 것이 아닌가? 송장을 빼놓고 장사 지내는걸세그려! 죽은 자식의 수의는 지을지언정 파묻은 자식의 설빔을 짓는 사람은 없겠네그려? 여보게, 사리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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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병화는 이렇게 떠벌려놓으면서 기고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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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세상은 움직이네. 가령 종로 바닥에 자선 냄비를 걸어놓고 기도를 올리는데 사대문 바람에 이리 휩쓸리는 거지 깍쟁이가 돈 지키는 사람이 조는 줄 알고 그 자선 냄비에서 동전 한푼을 훔치다가 들킬 때 자네는 그 거지를 붙들어 때리고 절도범으로 옭아 넣겠나? 혹은 회개하고 부활하라고 기도를 또 한 번 하겠나? 우선 그것만 말하게!... 여보게, 세상은 움직이고 앞에서는 거지가 훔치네! 그리고 자네나 내나- 아니 자네 부친이나 우리 아버지나 그 자선 냄비를 털외투를 입고 나서서 지키고 섰어야 옳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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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병화는 입에서 거품을 품고 팔짓을 해가며 이러한 열변도 토하였던 것이다. 그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중학교를 졸업하자 사상이 돌변하였고 첫 서슬이니만큼 유치는 하였어도 순진하고 열렬하였었다. 그 병화를 지금 앞에 세우고 석다리(서대문 밖)를 지나 내려오며 덕기는 그 뒤의 병화의 생활과 지금 생활을 곰곰 생각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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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고 동경으로 간 병화는 와세다 전문부의 정경과에 이름을 걸어 놓고 한 학기쯤 다녔으나 부친이 학비를 보낼 리가 없었다. 애초에 경성제대의 법문과에 입학하려는 것을 허락하였던 부친이니 제대로 내버려두고 아무리 어려운 중에라도 뒤를 대어 주었더라면 모든 일이 순편하였을지 몰랐으나 두 고집이 맞장구를 쳐서 학비는 끊어지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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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물론 병화가 노골적으로 반항하는 편지를 한 탓도 있었다. 제 사상이 변했더라도 어름어름 부친의 비위를 맞춰나갔더라면 좋겠지마는 변통성 없는 어린 마음에 곧이곧대로 나갔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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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굶으며 동경 바닥에서 일년간 뒹구는 동안에는 생활이 그러니 만큼 사상이나 기분이 더욱 과격하여졌다. 부친과의 거리가 천리 만리 떨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할 수 없이 경도까지 노자를 만들어 가지고 덕기에게 귀국을 시켜 달라고 왔을 때 덕기도 자기와도 사상으로 거리가 여간 멀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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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서는 두 달도 못 되어서 부친과 충돌이 생겼다. 밥상 받고 기도 아니하는 데서부터 충돌이 생겼던 것이다. 아비 말 안 듣고 신앙도 빠뜨리고 다니는 자식은 어서 뒈져버리든지 나가버리든지 하라고 야단을 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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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는 싫으니까 나는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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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덮어놓고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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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그러지 말고 그때 얌전히 신학교에나 들어갔었더면 좋지 않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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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혼자 생각에 팔려서 걷다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불쑥 내놓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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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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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마주치는 찬바람에 눈물이 글썽하여진 눈을 안경 속에서 번득거리며 불쾌한 듯이 묻는다. 자기의 처지가 이 사람에게 가엾이 보여서 이런 소리를 듣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조금 아까 5원 받던 것까지 손에 쥐었으면 내던지고 싶을 만큼 불쾌한 것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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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자네 뒷머리를 늘인 것을 보니 경도에서 만났을 제 생각이 별안간 나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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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쨌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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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점점 시비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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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골을 낼게 아니라 그랬더라면 지금쯤은 편안히 자선 냄비를 지키고 섰을 것이란 말일세.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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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덕기는 또 웃었다. 덕기는 물론 그때에 병화의 말을 되풀이하여 목사가 되었더면 좋지 않았느냐는 말이었으나 병화 귀에는 몹시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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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그 5원은 자선 냄비에서 훔친 것은 아닐세. 언제든지 갚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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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이런 소리를 내던지고 휙 돌아서서 인사도 없이 가버린다. 덕기는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잠자코 따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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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처럼 왜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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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파서 난 들어가 누워야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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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여전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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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연한 소리를 해서 잘못 되었네. 하지만 그까짓 돈 말은 꺼내지 말게. 내가 아무려면 그따위 소견으로 그랬겠나. 다만 자네가 좀 돌려 생각을 하고 머리를 숙이고 집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런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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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가 손을 붙들고 달래니까, 병화도 하는 수 없이 멈칫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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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자네와 언제까지 이대로 교제해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으이. 자네가 내게로 한 걸음 다가오거나 내가 자네에게로 한 걸음 양보를 하지 않으면... 그러나 피차에 어려운 일이요 이대로 나간다면 무의미할 뿐 아니라 공연히 자네게 신세나 지는 셈쯤 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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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종래의 교분으로 현상 유지를 해오기는 하나, 돈 있는 친구와 사귀기가 어려운 것을 행각하고 친구의 교의도 아주 청산을 해버리겠다는 불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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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닐세마는 하여간 가세. 어디든지 들어 가서 천천히 이야기하고 헤어지세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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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덕기는 붙들고 발길을 돌렸다. 병화도 잠자코 돌아섰다. 다시 감영 앞까지 와서 저녁 먹을 데를 찾다가 남대문 편으로 그대로 내려서서 일본 국숫집 앞까지 왔다. 쌀쌀한 저녁 바람이 어두워가는 길거리를 휩쓸었다. 전등불이 환한 문 안으로 덕기가 앞장을 서 들어가려니까, 두어 걸음 뒤떨어졌던 병화가 들어오려다 말고 또 돌아나간다. 덕기는 이 사람이 또 그래도 객기를 부리나 하고 따라나가보니 병화는 문 밖에서 남대문 편을 바라보고 섰다. 한간통 앞에서는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색시 하나가 목도리를 오그려 두 볼을 가리고 총총걸음을 걸어온다. 병화는 이 여자를 기다리고 섰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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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틀어 올렸으나 열 예닐곱쯤 되어 뵈는 어린 아가씨다. 덕기는 병화의 하숙집 딸이군 하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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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여기 웬일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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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덕기를 바라보는 필순도 그 학생이 누구인 것을 대번에 짐작하자 부끄러운 듯이 외면을 하고 잠깐 멈칫하다가 그대로 지나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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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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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인사로 한마디하고 무슨 말을 걸려니까 덕기가 다가서며 귀에 다 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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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데 잠깐 녹여 가랬으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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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수군거린다. 실상은 병화도 그러고 싶은 생각은 있으나 모르는 남자와 음식집에 끌고 들어가기가 안 되었을 뿐 아니라, 당자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지금 막 말다툼을 한 끝이라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덕기의 말이 퍽 간절하고 또 아침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갔을 텐데 이 쌀쌀한 날 용산서 걸어들어오는 것을 생각하면 무어나 먹여 보냈으면 하는 생각이 역시 간절하였다. 그뿐 아니라 자기 친구의 사진들을 구경시키다가 덕기 사진을 보고 칭찬을 할 때 언제든지 놀러 오면 인사시켜 주마고 실없는 소리도 한 일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당자도 좋아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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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그래도 주저주저하며 뒤만 바라보다가 몇 걸음 쫓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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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아 이리 좀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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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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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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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싹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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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리 좀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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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은 느럭느럭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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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지? 그 먼 데를 걸어오느라 다리도 아플 테니 나하고 잠깐만 쉬어서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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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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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간통이나 떨어져 섰는 덕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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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어. 그때 내가 말하던 친군데 잠깐 이야기하고 갈 게니 같이 들어가서 불이나 쬐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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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병화는 덮어놓고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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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은 좀 망단하였다. 병화의 친구들이 오면 같이 앉아 놀기도 하고 또 병화의 친구는 대개 자기 부친의 친구이어서 모두 통내외하고 무관히 지내니까 다른 때 같으면 조금도 꺼릴 것 없으나 저 사람이 부잣집 아들 조덕기거니 하는 생각이 앞을 서서 어쩐지 제 꼴 사나운 게 부끄럽고 더구나 음식집에 끌려가는 것이 구칙칙한 듯하여 창피스러웠다. 뱃속이 비었을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용기가 아니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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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어! 요릿집도 아니요, 일본 소바(국수)집인데 불만 쬐고라도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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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병화는 잡담 제하고 앞장을 세우고 들어갔다. 필순도 하는 수 없이 끌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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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와서 난로 앞에 섰던 덕기는 반색을 하면서 자리를 비켜선다. 세 사람은 난로를 옹위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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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이 친구는 조덕기라는 모던 보이, 이 아가씨는 고무 공장에 다니시는 이필순양- 조군이 불량 소년 같으면 이렇게 소개를 할 리가 없지만 그래도 불량은 아니니까 이런 영광을 베푸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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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아까 불뚝 심사를 부리던 것은 잊어버린 듯이 너털웃음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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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보였으나 필순은 얼굴이 발개지며 난로 연통 뒤로 얼굴을 감추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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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의 눈에는 필순이 미인으로 보였다. 아직 자세히 뜯어볼 수 없으나 밝은 데서 보니 나이는 들어 보이면서도 상글상글한 앳된 티가 귀여운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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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입은 것도 얄팍한 옥양목 저고리 하나만 입은 것이 추워 보이기는 하나 깨끗하고 깜장 세루치마 밑에 내다보이는 버선 등도 더럽지는 않다 공장에 다니는 계집애들이 구두 모양을 내고 인조견으로 울긋불긋하게 차린 것에 비하면 얼마나 조용하고도 수수한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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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로 와서들 앉으니까 필순은 손에 들었던 조그만 보따리를 무릎 위에 가만히 숨기듯이 내려놓았다. 도시락갑이 땡그렁 소리를 낼까보아서 조심하는 것이다. 병화는 또 그 도시락 그릇을 보고 아침을 못 먹었는데 어제 저녁밥을 싸두었다가 가지고 갔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가엾은 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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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가 음식을 시키려니까 병화가 필순의 몫은 닭고기 얹은 밥을 시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필순은 자기만 밥을 먹이려는 것은 굶은 줄 알고 그러는 것 같아서 얼굴이 빨개지며 싫다고 굳이 사양하였다.
 
72
우선 국수가 나오고 술이 벌어졌다. 구수한 국수 냄새에 비위가 당기기도 하나 지금쯤 집에서는 밥이나 지었나? 그대로들 앉으셨나? 하는 조바심에 필순은 젓가락 들기가 어려웠다. 그뿐 아니라 걸신 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을 해 먹는 것같아 보일까 보아서 머뭇거리기만 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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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엔 걱정 없어 내가 어떻게 해놓았으니까 염려 말고 어서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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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가 툭 터놓고 이런 소리를 한다. 필순은 이 말에 안심은 되었으나 병화가 떠드는 게 또 창피스럽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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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과 병화들의 감화를 받아서 구차라는 것을 창피한 것, 부끄러운 일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나 집안 이야길랑은 여기 들어오기 전에라도 하여주든지 스스러운 사람 앞이니 잠자코 있어주었으면 좋을 것을 기탄없이 탕탕 말하는 것이 듣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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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집에 데리고 다녔으면 쪽 좋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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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점점 더 자리가 불편하여 그대로 가버리는 것을 공연히 들어왔다고 후회를 하였다.
 
78
그러나 그건 고사하고 돈이 변통되었으면 쌀 나무를 사들여오고 할 사람이 없는데 어쩌나? 아버지는 단 벌 두루마기를 빨아 입느라고 어제부터 갇혀 들어앉았는 터이요... 어머니가 두루마기를 오늘 다아 지셨을까?... 이러한 자질구레한 걱정을 하느라니 날은 추운데 모친이 혼자 쩔쩔매는 양이 눈에 선히 보이는 것 같아서 좀이 쑤시고 곧 일어나고만 싶었다.
 
79
그러다가 문득 그 돈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돌 제 눈이 번쩍 띄는 것 같고 얼굴이 확확 달아올라왔다. 사실 찬바람을 쐬다가 더운데 들어오기는 하였지마는.
 
80
"어서 자시지요. 우리집에 한번 놀러 오세요. 내 누이하고 사귀어노세요. 올에 열 일곱, 아니 양력설을 쇠었으니까 열 여덟이 되었습니다."
 
81
덕기가 비로소 이런 말을 붙였다.
 
82
필순은 덕기의 말이 귀에 들어오는 둥 마든 둥하였으나 고개만 꼬박해 보였다. 속으로는 여전히 딴 생각- 필시 돈이 덕기에게서 나온 것이리라, 덕기가 오늘 찾아왔다가 밥 못 진 것을 보고 돈을 내놓고 종일 굶어 누운 김 선생을 끌고 나온 것이리라 하는 생각에 팔려서 앉았었다.
 
83
"참 어서 식기 전에 먹어요."
 
84
병화도 뜨거운 국수를 걸신스럽게 쭈룩쭈룩 먹다가 이렇게 권하고 나서,
 
85
"참 자네 누이가 벌써 그렇게 컸나? 꼭 동갑세로군! R학교 고등과에 다니지?"
 
86
"응, 이제 4년급 되는군."
 
87
"허지만 자네 누이와 교제는 안 될걸! 나는 자네를 감화를 시킬 자신이 있어도 여자란 암만해두 마음이 약해서 그런 부르주아의 온실 속에서 자란 귀한 따님하고 놀면 허영심만 늘어가고 못쓰지!"
 
88
필순이 부잣집 딸과 사귀면 마음이 변해갈 것을 염려해하는 말이나 덕기는 듣기 싫었다.
 
89
"부르주아란 우리가 무슨 부르란 말인가? 일본 정도로만 본대도 중산계급도 못 되는 셈일세. 그는 하여간 내 누이가 그런 요새 계집애는 아닐세."
 
90
덕기는 심사 틀리는 것을 참고 조용히 이런 변명을 하였다. 필순은 병화가 너무 사리는 것 없이 남 듣기 싫은 소리를 텅텅 하는 것이라든지 자기가 아무러면 그런 허영심 많은 사람이랴 하는 마음이 들어서 못마땅하였다.
 
91
"자, 어서 좀 같이 드십시다요. 시간이 늦으면 댁에서 궁금해하실 텐데 외려 미안합니다."
 
92
덕기가 또 이렇게 권하는 바람에 필순은 겨우 저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늦어져서 애가 씌는데 그런 사정까지 보아주는 남자의 다심한 인사가 필순에게는 고마웠다.
 
93
병화는 필순의 몹시 수줍어하는 것이 못마땅하였다. 다른 남자에게는 아무리 초대면이라도 할말은 또랑또랑하게 하고 과똑똑이란 별명을 들은 만큼 매섭게 굴던 사람이 오늘에 한하여 덕기의 앞이라고 별안간 꼭 들어앉았던 구식 처녀처럼 몸둘 곳을 몰라하는 양이 보기 싫었다.
 
94
'돈 있는 남자라니까? 조촐한 미남자니까?...'
 
95
병화는 공연히 소개를 하지나 않았나? 하는 엷은 후회도 났다. 결코 질투심은 아니다. 어린애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어놓거나 모처럼 공들여서 길러 가는 사사의 토대가 흔들려서는 안 되니까 걱정이 된다고 병화는 자기의 심중을 홀로 살펴보며 스스로 변명을 하였다.
 
96
필순은 그래도 '덴뿌라 우동' 한 그릇을 그럭저럭 다 먹었다. 저를 짓고 가만히 입가를 씻은 뒤에 병화를 보고 먼저 가겠다고 소곤소곤한다.
 
97
덕기는 무엇을 더 먹여 보내려 하였으나 병화가 늦기 전에 보내야 한다 하여 두 청년은 문간까지 필순을 배웅하여 내보냈다.
 
98
"공부라도 좀 시켰더면 좋을 것을, 똑똑하데!"
 
99
하며 덕기는 진심으로 가엾은 생각하고 진심으로 칭찬하였다.
 
100
"정 그렇거든 자네가 공부나 시켜주게그려."
 
101
"당자가 그럴 생각만 있으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 화개동 집에 가서 있으면 누이도 혼자 적적해하는데 마침 좋고 아무러면 학교 뒷배야 하나 못 보아 주겠나."
 
102
병화는 실없이 한 말인데 덕기는 진담이다.
 
103
"날 좀 그렇게 시켜주게그려. 나는 사내니까 안 되겠나?"
 
104
하고 병화는 비꼬아보다가,
 
105
"돈 있는 놈이 여학교 공부시키는 것은 알조 아닌가? 자네두 자네 부인 하나에만은 만족을 모 하겠나보이마는 그애가 첫눈에 그렇게 드나? 허허허..."
 
106
하고 또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
 
107
"어디까지든지 나를 그렇게 모욕을 주어야 시원하겠나?"
 
108
덕기는 불쾌히 대거리를 하다가,
 
109
"허지만 자네두 우리 아버지와 타협을 하겠거든 방 하나 치우라 하고 가서 있게그려."
 
110
하며 웃어버린다.
 
111
"고만두게. 자네 부친하고 타협하려면야 우리 부친하고 벌써 타협했게!"
 
112
하고 병화는 머리가 그저 내둘린다고 고뿌를 가져다가 또 고뿌찜을 한다.
 
113
"이렇게 먹고 내일 또 머리가 내둘린다고 또 먹어야 할 테니 언제 맑은 정신이 들어보나?"
 
114
덕기는 딱한 듯이 친구의 술잔을 바라보다가,
 
115
"그러지 말고 그야말로 타협을 하고 댁으로 들어가게. 언제까지 이런 방랑 생활을 하고서 무슨 일이 되겠나?"
 
116
하며 진담으로 권고를 하여보았다.
 
117
"타협? 요컨대 아버지와 타협이 아니라 밥하고 타협하고 밥을 옹오하는- 부르주아의 파수 병정하고 타협을 하라는 말이지?"
 
118
"부자간에 그런 이론을 세워서 담을 쌓는다는 게 말이 되는 수작인가? 타협이 아니라 인륜으로 생각하면 어떤가?"
 
119
"하여간에 자기의 직업적 신앙에 따라오지 않고 입내를 내지 않는다고 내쫓는 부모면야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이나 노예가 아닌 이상, 자식도 제 생활이 있는 이상 어찌하는 수 없지 않은가?"
 
120
병화는 취기와 함께 점점 열변이 되어간다.
 
121
"그는 하여간에 부자간 윤리라는 것이야 어찌하는 수 없지 않은가? 거기에는 타협이니 자기 생활이니 하는 문제가 애초에 붙을 리가 있나!"
 
122
적기는 자기가 꺼내놓은 타협이란 말을 병화가 부자간의 관계를 두고 한 말인 줄 오해할까보아 또 한 번 따졌다.
 
123
"그따위 소리 이젠 집어치우세. 자네는 자네 길로 가고 난 내 길로 가면 그만 아닌가."
 
124
병화는 내던지는 소리를 한다.
 
125
"자네는 아까도 곧 절교라도 할 듯이 날뛰대마는 나 같은 놈은 실상은 있어 필요할 걸세."
 
126
덕기도 냉연한 어조다.
 
127
"무엇에? 응! 가끔 돈푼 구걸해 쓰니까?"
 
128
"흥, 그것두 말이라고 하나?"
 
129
하고 덕기는 쏘아본다.
 
130
"하여간 정말 우정이란 것은 없네. 더구나 동지애면야!"
 
131
병화는 무슨 생각에 팔려 앉았다가 한마디 내놓는다.
 
132
"소위 동지애- 동지의 우정이란 점으로는 자네게 불만일지 모르네마는 어쨌든 자네만이 괴로운 것은 아닐세..."
 
133
덕기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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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부르주아의 호사스러운 고통- 호강스러운 센티멘틀이겠지."
 
135
병화는 또 비꼰다.
 
136
"자네 같은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선 우리 집안- 삼대가 사는
 
137
우리 집안 속을 모르니까 타협할 수 있듯이 안더러도 타협 하네그려? 그야 상속받을 것도 있으니까!"
 
138
하고 병화는 또 시달려준다.
 
139
덕기는 잠자코 일어나서 셈을 한다.
【원문】너만 괴로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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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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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사실주의(寫實主義) [분류]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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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