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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추억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7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7. 추억
 
 
3
"아버니께는 만났단 말씀도 말우."
 
4
경애는 모친이 나간 뒤에 이런 소리를 꺼냈다. 모친을 제지할 때와는 딴판으로 암상이 난 소리다. 모친이 충동여놓은 바람에 잠자던 노염이 다시 머리를 든 것이다.
 
5
"이것 하나만 없어도 덕기씨를 이 집에 오시라고도 하기는커녕 길에서 만나도 알은 체도 아니하였을지 모르지! 교회 안의 소문이 무섭고 사회 시비가 무서워서- 말하자면 남은 몸을 버렸던지 자식이 있든지 없든지 남의 사정은 손톱만큼도 모르고 나 하나만 사회적 생명을 이어나가면 고만이라고 걷어 찰 제, 누가 비릿비릿하게 쫓아다니자던 것도 아니요, 다시는 잇새도 어우르자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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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는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하면서 뼈에 맺힌 무엇이 있는 듯한 말소리다.
 
7
"그야 내 잘못도 모르는 것은 아니야요. 그렇게 말씀하는 어머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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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는 또 한참만에 이런 소리를 하다가 뚝 끊어버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모양이더니 머리맡에 놓인 약봉지를 꺼내서 환약을 세면서 건넌방에다 대고 아이년더러 물이 더웠느냐고 소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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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가 제 잘못도 안다는 것은 자기의 허영심이 이렇게 일을 벌여놓은 것이라는 뜻이요, 모친도 지금은 큰소리를 하지만 잘하였을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태 동안이나 미국 다녀온 사람, 그리고 도도한 웅변으로 설교하는 깨끗한 신사- 그 때는 덕기의 부친도 40이 아직 차지 못한 한창때의 장년이요 호남자이었다. 게다가 뒤에는 재산이 있으니 교회 안의 인기는 이 한사람의 독차지였다. 20 전후의 젊은 여자의 추앙이 일신에 모인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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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넌방에서 그 조그만 계집애년이 어린애 놋대접에 물을 가지고 건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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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간정하고 코가 막혀서 쌔끈쌔근하던 아이는 약과 물그릇을 보더니 불이 붙은 듯이 울어젖힌다. 그래도 어쩐둥해 세 알갱이 약이 어린아이의 입에 들어갔다.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려와서 발버둥치는 것을 덕기도 거들어서 먹이고 나서는 어린애를 붙들었던 것을 생각하고 덕기는 속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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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지난날의 일이 머리에 어제 일같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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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와 경애는 남대문 x소학교에서 한해에 같이 졸업한 것이 벌써 8,9년 되나 보다. 물론 남녀부가 다르고 경애는 덕기보다 두 살이 위지마는 학년은 같았다. 경애는 3년급에 중간에 들어와서 같은 해에 졸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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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는 덕기의 부친이 돈을 조금 내는 관계로 설립자의 명의를 한몫 가지고 있는 교회 학교였다. 덕기의 부친이 원시 이 교회와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학교에도 돈을 기부한 것이요, 또 아들도 교인인 관계도 있어서 다른 공립 보통학교에 보내지 않고 화개동에서 남대문까지 먼 데를 다니게 한 것이었다.
 
15
어쨌든 이 두 아이는 같은 3학년 때의 크리스마스 축하 연극을 할 때부터 서로 알게 되었다. 열 살 먹은 덕기와 열두 살 먹은 경애는 학교의 재동이로 장을 쳤었다. 둘이 똑같이 예쁘고 둘이 똑같이 창가와 연설과 연극이 능란하고 재롱거리였던 것이다. 그때 덕기는 아직 어렸으니까 어리둥절하게 지낸 일도 많지만 계집애요 또 열두 살이나 된 경애는 덕기를 어린애다운 우정으로 퍽 귀애하였던 것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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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파해서 혹시 어린애들끼리 몰려나오게 되면 두 아이는 그 중에서도 함께 걸어 남대문 밑까지 와서는 경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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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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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소리를 치며 봉래교 편으로 떨어져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애가 수원서 올라온 아인지, 제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지, 미근동 근처의 외삼촌 집에 붙어 있는지 그런 것은 조금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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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제일 기억에 똑똑한 것은 4년급 때던가 5년급 때 크리스마스 연습으로 학교에 모였던 날 점심시간에 경애가 문밖에 끌고 나가서 모찌떡을 사서 저도 먹고 덕기에게도 한턱 내던 것이었다. 이것은 같은 동무애가 고자질해서 덕기는 상관없었으나 경애는 열 세 살이나 도는 커다란 계집애가 군것질이 무슨 군것질이냐고 여선생님에게 몹시 꾸지람을 듣고 창가도 아니 시키고 반나절이나 교실 밖에서 울고 섰던 모양, 지금도 덕기의 머리에 분명히 떠오른다.
 
20
그러던 경애가 지금 덕기 앞에 덕기의 누이동생을 안고 앉아서 자기 부친의 원망을 하고 있다. 덕기는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그때가 꿈인지 지금이 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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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없는 탓이지만 아버니께서 살아만 계셨어도 이렇게는 아니 되었을 것을... 우리 아버니 못 보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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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와 경애는 소학교를 마친 뒤에 교제가 없었고 소학교에 다닐 때에는 감옥에 들어앉았던 경애의 부친을 보았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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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니는 너무 호활하시고 살림에 등한하셔서 3,400 하던 재산을 모두 학교에 내놓으시고 소작인에게 탕감해주어 버리시고 감옥에 들어가시기 전에는 무슨 장사를 해서 다시 번다고 하시다가 3^3455,1^운동이 덜컥 나서 감옥에 들어가시게 되니까 옥바라지하고 변호사 대고 어쩌고 저쩌고 한다고 자꾸 끌려들어가기만 해서 나중에는 집까지 팔아가지고 올라왔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서울로 올라온 것이 내 신상에도 좋을 건 조금도 없건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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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는 자기가 그렇게 된 변명을 하느라고 그러는지 조금 아까 살기가 돌 대와는 딴판으로 재미있는 옛이야기나 하듯이 자기 집 내력, 자기 내력을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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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그런 변명이나 하소연을 들을 묘리도 없고 더구나 자기 부친에게 대한 푸념을 듣고 앉았는 것은 불쾌도 스러웠으나 남의 내력을 듣는 호기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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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팔고 어쩌고 해서 어머니께서 돈 1000원이나 가지고 올라오신 모양이나 당장 집을 사려야 마땅한 게 나서지도 않고 해서 외삼촌 집에 가서 붙어 있으면서 그 돈을 외삼촌에게 맡겼더니 아저씨가 몽땅 가지고 들고뺐겠지요..."
 
27
"흥! 난봉이던가요?"
 
28
덕기는 놀라는 소리로 장단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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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자기 딴은 무슨 일을 해본다고 상해로 뛴 것이지만 우리집에는 큰 못할 일을 해놓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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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는 서모 뻘이라는 격이 스러지고 옛날 친구라는 생각이 앞을 서서 서로 공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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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래서 아버니께서 옥중에서 병환으로 집행정지가 되어 나오시니까 약은 고사하고 여전히 외갓집 구석에서 세 때가 분명치 못한 형편인데 거진 일 년이나 앓아누셨으니 기막힌 사정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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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는 급작스레 말을 뚝 끊는다. 별안간 무슨 생각이 나서 말하기가 거북해진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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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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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덕기가 말 뒤를 기다리다가 가만히 쳐다보았다. 경애는 어린 아이에게로 눈을 떨어뜨리고 앉았다. 어린애는 쌔근쌔근 겉잠이 어리어리 든 모양이더니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을 뒤흔들며 찌르는 듯이 도 울어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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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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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덕기는 마침 잘되었다고 일어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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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은 떠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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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경애는 앉은 채 쳐다본다. 좀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더 붙들고 싶지 않았다.
 
39
"봄방학에 혹시 오게 되면 그때나 또 만납시다."
 
40
"그럼 난 못 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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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는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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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에, 바람을 쐬면 안 될 테니까."
 
43
덕기는 마루로 나와서 구두를 신으려니까 모친이 건넌방에서 나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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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데 살펴가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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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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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슨 수다가 나오려니 하였더니 의외로 인사가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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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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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에 조심해 가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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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경애의 목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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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밖을 나서니 선뜻한 밤바람이 시원하였다. 훗훗한 방 속에 있어서도 그렇겠지만 무엇에 갇히었다가 빠져나온 것같이 기분이 거뜬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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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 때부터이었다! 그때가 시초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말을 하다가 뚝 끊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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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꿈틀거리는 밤길을 더듬어 나오면서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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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5년이 되었는지 6년이 되었는지 그 겨울에 덕기는 화개동 집으로 경애가 부친을 찾아왔던 것을 잠깐 본 기억이 지금 새삼스러이 난다. 그 때 덕기는 아직 화개동 집에 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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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에서 헤어진 지 3,4년이 되었고 그 후 덕기는 화개동에서 가까운 안국동 예배당에 다녔기 때문에 오래 못 보았지만 그동안 경애는 놀랄 만큼 커져서 어른 꼴이 박히고 자기 따위는 어린애로 내려다보는 것 같아서 반가우면서도 말도 변변히 붙여 보지 못하고 경애보다도 자기 편이 더 열없어 하던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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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부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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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왜 왔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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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어보니까 제 어머니 심부름으로 왔단다 하면서 경애 모친이 남대문 교회에 다닌다는 것과 또 부친은 가옥에서 나와서 근 일년이나 앓아 누웠는데 이제는 죽기나 기다리는 터라는 말을 간단히 들려주었다. 그때는 다만 가엾다고만 생각하고 신지무의 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때 아마 모친의 심부름으로 돈을 취하러 왔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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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부친은 애국지사였다. 수원의 누구라면 알 만한 교역자일 뿐 아니라, 감옥 소식을 전할 때나 집행정지로 나오게 될 때에 신문에 여남은 줄이라도 기사가 날 만한 인물이었다. 경애의 모친이 그 부인이라 하니 교인들도 알아보았었다. 목사의 기도 속에 경애 부친의 이름이 나오니 교인들도 알아보았었다. 목사의 기도 속에 경애 부친의 이름이 나오니 교인들도 알아보았다. 목사의 기도 속에 경애 부친의 이름이 나오고 '이 병든 아드님을 아버지의 뜻이옵거든 좀더 이 세상에 머무르게 하사 저희 일을 더 돕게 하여주옵소서' 하고 경애의 부친의 중병이 낫게 하여지이다고 기도를 드린 뒤부터 경애의 모친의 존재는 교회 안에 뚜렷해지고 경애의 미모는 한층 더 빛났던 것이다. 예배가 끝나면 경애 모친은 보지도 못하던 뭇 형님 아우님과 이름도 모르는 오라버니의 호들갑스러운 인사- 남편의 병 위문받기에 얼굴이 취하도록 한바탕 분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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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병이 근심이요 병구완이 걱정이 되기는 일반이나 호강스럽기도 하였다. 그 오라버니 중에는 물론 조상훈이 빠질 수 없었다. 자선심 많고 돈 많은 목사보다도 신임과 경애를 받고 세력을 가진 조상훈-덕기 부친-에게 친절한 인사를 받는 것은 다른 교인의 열 몫이나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조상훈은 이 부인에게 한층 더 친절하고 은근하였다. 그렇다고 결단코 자기 학교에서 길러내고 또 교회 안에서도 재색이 겸비하다고 손꼽는 경애의 모친이라 하여서 그런 것이라 하여서는 조상훈의 명예와 인격을 위하여 큰 모욕이다. 적어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보지도 않았고, 또 조상훈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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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병환이 요새는 좀 어떠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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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훈 선생은 경애를 만나면 자상하고 온유한 말소리로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친을 만나면,
 
62
"차도가 계신가요? 한번 가뵌다 하며 바빠서 못 갑니다. 선생님은 이때껏 뵈온 일은 없지만 병환이 안 계시더라도 선배로서 찾아가 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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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가볼 시간을 묻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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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를 한 서너 번 한 뒤에 그해 겨울 어느 일요일에 예배를 마치고 경애 모녀를 앞세우고 조상훈은 목사와 함께 미근동 경애 외삼촌 집으로 선배에 대한 경의를 표할 겸 병 위문을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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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은 반가워하였다. 신장염에 기관지병이 겹쳐서 중태이었으나 강가로 버티고 누웠던 사람이 일어나서 손을 맞았다. 그는 고사하고 상훈을 첫대바기에 놀라게 한 것은 그 마님이 40쯤밖에 안 되었는데 영감은 60을 훨씬 넘은 듯한 백발이 성성한 것이었다. 사실 경애의 모친은 이 영감의 첩장가나 다름없는 삼취이었고 경애는 전무후무한 이 삼취 소생이었다. 이 몸에서 남매가 겨우 나서 경애 하나가 자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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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전 추위에 방은 미지근하고 머리맡의 양약병에는 먼지가 앉고 중문 안에 놓인 삼태기에 쏟아버린 약찌꺼기는 얼고 마르고 한 것이 상훈의 눈에 띄었다. 약이나 변변히 쓰랴 하는 생각을 하니 늙은 지사의 말로가 가엾었다. 병인과 감옥 이야기, 교육계 이야기, 사회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갈 때 상훈은 부인을 조용히 불러서 이따가 3시 후에 따님아이든지 누구든지 자기 집으로 보내 달라 하고 주소를 두 번 세 번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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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왜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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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인은 물었으나 속으로 그 뜻을 대강 짐작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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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선생님 병환에 맞을 약이 집에 있을 법한데 좀 보내드릴까 해서 그래요."
 
70
상훈은 다만 이렇게 귀띔만 하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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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경애가 화개동으로 찾아간 것이요, 그때에 덕기가 만나본 것을 지금 기억에서 찾아낸 것이다.
 
72
그 때 상훈은 집에 있는 인삼 몇 뿌리에 자기 부친이 지금도 경영하는 남대문 안 대성 정미소에서 찾을 쌀 한 가마니 표와 돈 10원을 넣은 봉투를 경애에게 주어 보냈던 것이다. 그 속에는 물론 아까 만나고 온 노선배에게 얌전한 붓끝과 맵시 있는 편지투로 보내는 것을 받는 사람이 부끄러이 여기지 않게 정중한 편지를 써 넣을 것을 상훈은 잊지 않았다.
 
73
그러나 이 모든 호의가 늙은 지사의 비참한 말로를 동정하는 데서 나온 것이요, 결코 오늘날 경애의 무릎에서 신열이 40도 내외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운데 신음하는 딸 하나를 얻고 싶어서 계획적으로--그 값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다.
 
74
며칠 후에 상훈은 병인을 또 위문갔었다. 결코 전일의 호의에 대한 인사를 받고자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 식구는 상훈을 에워싸고 엎드러질 듯이 치사하였다. 또 이 사람도 어쩐지 이 세 식구가 마음으로 가엾었다.
 
75
하여간 치사를 받을수록 호의는 더 높아갔다. 그리하여 그날은 자기집 단골 의사를 소개하여 진찰을 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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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절망 상태이기에 가출옥이 된 것이요 워낙 노인이라 병도 하도 여러 가지니까 이루 이름을 주워섬길 수 없지만 그래도 감옥에서 나와서는 좀 돌리는 눈치더니 심한 추위와 구차로 해서 또다시 기울어져갈 뿐이었다. 상훈이 댄 의사도 별 도리는 없었다.
 
77
해가 바뀌어서는 한층 더하였다. 약을 쓰는 것은 마치 죽기를 재촉하느니나 다름없이 말라가는 등잔불이 깜박거리다가 홀깍 꺼지고 말았다. 살려 하고 살리려 하여 애는 썼지마는 설사 살아났어도 얼마 안 남은 그 목숨을 또 시기하고 노리고 있는 편이 있는 바에야 남은 징역살이를 하다가 옥사를 하게 하는니보다는 처남의 집에설망정 편안히 눈을 감은 것이 차라리 다행하다고들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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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에는 목사도 있었고 상훈도 있었다. 유언이란 것은 별로 없었으나 남기고 가는 처자가 마음에 놓이지 않아서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나 조상훈을 얼마쯤은 믿었다. 사귄 지는 얼마 안 되어도 그처럼 친절히 해주는 것을 보고 아무리 보통 사람과 다른 종교 사업가라 하여도 지금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라고 가상히도 생각하고 고마운 생각이 그지없었다.
 
79
"여러분이나 가족에게 그렇게 폐를 끼치지 않고 어서 하느님의 안온한 품으로 들어가고 싶었더니 이제야 때가 온 것 같소이다. 가는 사람은 편안하고 행복되나 남은 사람은 여전히 괴로운 것이오. 우리 동포 우리 동지- 이 사회를 그대로 두고 먼저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걸리오. 여기 앉았는 이 지식을 혈혈단신으로 내던져두고 가는 것도 마음에 아니 놓이지마는 60 평생에 그래도 무슨 일이나 하나 남겨 놓고 가자 하였더니 남은 것이라곤 이 자식- 벌거벗겨 길거리에 내놓으나 다름없는 이 자식 하나와 이 세상에 오랫동안 끼친 신세뿐이오. 하여간 사회의 일은 여러분이 잘 맡아 하시려니와 저 어린것도 여러분이 잘 돌보아주시오. 조 선생께는 무어라고 치사를 다할지 결초보은 하여도 오히려 족하지 않겠지마는 나 죽은 뒤라도 이 두 모녀를 걷으뜨려 주시기를 염의 없는 말이나마 부탁하오..."
 
80
운명할 때까지 의식이 말짱한 병인은 이러한 장황한 감회와 부탁을 남겨놓고 여러 사람의 기도와 축복 속에 운명을 하였던 것이다.
 
81
상훈은 힘 자라는 데까지는 죽은 이의 뜻을 받겠다고 맹세하였다. 그 맹세를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물론 죽어간 사람의 알 바 아니나,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한 가지로 증인이 되었다. 아니, 그보다도 존엄한 하느님이 천만 인간에 못지 않은 증인이었을 것이다.
 
82
초상은 치렀다. 교회와 수원 학교측과 유지 인사의 기부와 열성으로 호상이었다. 상훈은 경성축의 장의위원장 격이었고 장비로도 50원을 내놓았다.
 
83
장례는 xx문 예배당에서 치르고 수원까지 운구를 하여 거기서 영결식을 하고 선영에 안장을 하였던 것이다.
 
84
초상을 치르고 나니 살아서는 쌀 한 되 값 나무 한 단 값에 그렇게 쩔쩔맸어도 5, 600원 돈이 남았다. 그것도 전재산을 사회와 교육계를 위하여 내던진 보람이었다.
 
85
하여간 그 500여 원 돈은 우선 생활에 큰 도움이라느니보다도 한밑천이 되었다. 상훈과 의논한 결과 그것으로 조그만 전셋집을 얻기로 하였다. 흐지부지 녹여 써 버려도 안 되겠거니와 오라범댁과 그대로 살림을 한다면 안방 식구와 여전히 한데 먹어야 할 것이니 그것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역시 아무 턱없는 오라범집 식구를 그대로 두고 나오기는 박정한 노릇이나 펀둥펀둥 노는 맏조카 자식더러 벌어먹으라 하고 나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경애가 그해 봄에 여학교만 졸업하면 어떻게든지 벌어먹을 수 있는 큰 희망도 있었다.
 
86
상훈은 이것저것 많이 애도 쓰고 앞일에 무엇에나 의논에 대거리가 되어 주었지만 집을 정하고 들어앉으면 경애가 두 달 후에 졸업하고 취직이 될 때까지 식량만은 몇 달 대어 주마고 자청하였었다. 그리하여 두 모녀의 앞길은 도리어 환하였다.
 
87
당주동에다가 조그만 전세 한 채를 얻고 떠나니, 이 역시 돌아간 영감이 남겨 놓고 간 유산이나 다름없고 영감의 덕이라 하겠지마는 일편 생각하면 상훈의 주선 아니더면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니 상훈의 덕이기도 한 것이다.
 
88
"조 선생의 신세를 무얼루 이루 다 갚는다 말이냐?"
 
89
모녀가 마주 앉으면 그 때나 이 때나 부친이 매삭 대어 주는 것으로 사는 터이라, 넉넉지는 않으나 기위 손을 댄 터에 야멸치게 물러서기도 어려워서 그랬겠지마는 쌀이야 부친의 정미소에서 떨어질 새 없이- 떨어질새 없이라느니보다도 쌀 주고 떡 사 먹게까지야 주책없지 않았을망정, 젓갈장수 기름장수의 외상값을 쌀로 에낄 수 있을 만큼은 흥청망청 대어 주었고, 경애가 졸업하고 자기 학교로 오게 될 때까지 두서너 달 동안 뒤치다꺼리도 지성껏 해주었던 것이다.
 
90
상훈이란 사람은 물론 시정의 장사치도 아니요 매사를 계획적으로 앞질러 보려는 속다짐이 있어서 소금 먹은 놈이 물켜겠지 하는 따위의 딴 생각을 먹고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도리어 나이 40을 바라보도록 세상 고초를 모르니만큼 느슨하고 호인인 편이요, 또 그러니만큼 어려운 사정을 돕는다는 데에 일종의 감격을 가지고 더욱이 저편이 엎드러질 듯이 감사하여주는 그 정리에 끌려서 이편도 엎드러졌다 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경애가 귀엽게 보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혹은 만일 경애 같은 예쁜 딸이 없었던들? 하고 반문할지 모르나 그것은 너무나 잔인한 말이다.
 
91
하여간 교회 안에서도 상훈의 애국지사의 유가족을 끝끝내 돌보아주는 그 독지에 대하여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그 칭송이 어느덧 시기와 의심으로 변하였다.
 
92
"그러기루 아침 저녁으로 문안까지야 다닐 게 무언구?"
 
93
"그만 정성이면야 효자로도 몇째 안 가겠수."
 
94
이런 소리가 마님네들 모인 자리에서 이야깃거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아닌게아니라 큰댁 문안은 일주일에 한 번, 고작해야 두 번이나, 학교에서 화개동 집에 올라가는 역로이기도 하지마는 하루가 멀다고 들렀던 것이었다.
 
95
"아니, 늙은 과부댁만 죽치고 엎댔으면야 나부터두 갈 재미 있겠나마는, 딸이 있거든..."
 
96
편이 있으면 적도 있는 것이다. 학교 안의 젊은 교원축끼리도 이런 실없는 소리가 나왔다.
 
97
그러던 경애가 여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설립자 대표인 상훈의 천으로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교원들은 이 미인 신임 선생을 배척하도록 싫은 것은 아니면서도, 돌아서서는 입을 딱 벌리며 서로 눈짓 콧짓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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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 세상에 갓 나온 경애는 그런 영문을 눈치챌 수가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99
경애로서 조상훈을 대할 때 그는 다만 존경과 흠모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은인이다. 부친의 생전 사후를 통하여 은인일 뿐 아니라 자기의 현재와 앞길이 그의 지도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살라면 살고, 죽으라면 죽어도 아까울 것 없을 만큼 마음을 턱 실리려는 믿음과 애정을 느꼈고 또 그 모친도 친오라비 이상으로 믿은 것이다. 그러나 경애의 그 믿음과 그 애정은 부친이나 오라비나 혹은 친한 동무에게 느끼는 소녀다운 그런 애정이었다.
 
100
그러던 것이 동무들의 뒷공론이 점점 노골적으로 맞대해놓고 입을 비쭉거리며 비웃게까지 되었을 데 놀랍고 분한 한편에 차차 조 선생을 슬슬 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 선생에 대한 공포심은 일어날지언정 결코 조 선생이 미운 것은 아니었다. 미워졌으면 좋겠는데 밉지가 않은 자기 마음이 도리어 밉고 안타까웠다. 사실 생각하면 조 선생을 미워할 아무 건더기가 없었다. 조 선생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는 조 선생이다.
 
101
그러나 동무들의 면대해서 쏘지도 않고 빗대놓은 조롱은 점점 더 늘어갔다. 빗대놓고 들컹거리는 말이니 탄할 수도 없고 변명할 길도 없다. 울분과 번민이 어린 가슴을 터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거죽으로는 조 선생을 슬슬 피하면서 속으로는 무서워하던 마음까지 스러지고 한층 더 경애하는 마음이 스며 솟았다. 모친에게도-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의지할 모친에게도 터놓고 하소연할 수 없는 그 분한 말을 조 선생에게는 다 쏟아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애는 3학기도 거의 가까워졌을 때 조선생과 한번 만나서 의논을 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의 눈총을 맞아가며 학교에 다니기가 싫도록 경애의 신경도 쇠약하여졌던 것이다.
 
102
그러나 조용히 만날 틈이 없었다. 이때쯤은 조 선생도 경애에게서 멀어져 가는 듯이 설면하게 굴고 경애 집에도 들러주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자기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가면 작년 겨울과 같이 덕기와 마주칠 것이 싫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학교 안에서나 예배 파한 뒤에 만나자면 남의 눈에 뜨일 것이니 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였다. 집으로 청해다가 이야기하고는 싶었지마는 그것도 모친 때문에 어려웠다.
 
103
그래도 얼마나 망설이다가 조 선생이 감기로 이틀이나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모친에게도 조 선생이 감기로 이틀이나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모친에게도 조 선생님 위문을 잠깐 갔다 오마 하고 학교에 다녀오는 길로 책보만 내놓고 큰마음 먹고 나섰다. 모친도 앓는다는 말에 놀라면서 같이 가도 좋을 듯이 말을 하다가 저녁도 지어야 하겠다고 우선 딸을 내보내어 전갈만 시켜 놓고 병이 더하다면 자기도 나중에 가리라는 생각으로 어서 가보라고 하여 내보냈다.
 
104
경애는 사실 병 위문도 겹쳤을 뿐 아니라 모친에게까지 알리고 가는 것이니까 조금도 떳떳치 못할 게 없겠으나 화개동이 차차 가까워오니까 혹시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누가 위문을 오지 않았을까 하는 애도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왕 왔다가 발길을 돌이킬 수도 없었다.
 
105
문 앞에 다 와서도 차마 들어가지를 못하고 또 망설이었다. 누구나 나왔으면- 하고 문전에서 기웃거리려니까 마침 행랑어멈이 벌써 저녁이 되었는지 밥그릇을 들고 나온다.
 
106
어멈은 안으로 들어갈 줄 알았더니 사랑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 들어오라 한다. 주인이 저녁밥을 먹는다면 안에 있을 터인데 사랑에 있다면 필시 손님이 있는 것인데 누굴까? 학교에서 누가 온 것은 아닐까?...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이런 걱정을 하며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이 주인 혼자 마루 끝에 나와서 반가이 맞아 준다. 말소리를 들어서는 그리 심한 감기도 아닌 모양이었다.
 
107
"잠깐 추운데 미안하지만 기다려주. 급히 어디를 갈 데가 있어서 만나려던 터이니..."
 
108
하고 상훈은 방으로 다시 들어가서 입고 있던 두루마기 위에 외투를 입고 모자를 손에 들고 급히 나온다.
 
109
유리알 안으로 보니 밥상을 막 내다놓은 모양이다.
 
110
"진지 잡수세요. 저는 가겠습니다. 편찮으시다니까 어머니께서 다녀오라구 하셔서 왔었에요."
 
111
경애는 이렇게 인사를 하면서도 이왕이면 같이 나가는 것이 덕기에게나 다른 손님에게 안 들키겠느니만큼 도리어 안심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상훈도 역시 그래서 앞질러 급히 나온 것이요 또 마누라의 공연한 잔소리가 듣기 싫은 것도 한 가지 이유이었다.
 
112
경애를 앞세우고 상훈이 나오려니까 어멈이 숭늉을 떠 가지고 나오다가 이쪽을 바라보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축대에 낙수가 얼어붙은 데에 미끈하면서 놋쟁반에 얹힌 숭늉 대접도 미끄러져서 하마터면 언 마당에 뗑그렁 떨어뜨릴 것을 질겁을 해서 붙들기는 하였으나 물은 반나마 출렁하고 엎질러졌다.
 
113
문 밑까지 나가던 사람들은 어멈이,
 
114
"에그머니!"
 
115
소리를 치는 통에 멈칫하고 돌려다보았다.
 
116
"조심을 하고 다녀!"
 
117
하고 주인나리는 불쾌히 소리를 쳤다. 어멈은 무색해서 진지를 잡수셨나? 상을 들여갈까 물어보지도 못하고 얼이 빠져 섰었다.
 
118
상훈은 이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덕기와 길에서 마주칠까보아 삼청동으로 빠져서 영추문 앞 넓은 길로 길을 잡아 들었다.
 
119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말이 없었다.
 
120
'엎질러진 물이다!'
 
121
상훈은 금방 집에서 나올 때 본 광경이 머리에 떠올라와서 무심코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것이 자기의 지금 심리를 설명하는 말인 것 같아서 선뜻한 생각이 들면서,
 
122
'언제 엎질러졌나?'
 
123
하고 변명을 하였다. 귓속에는,
 
124
'조심해 다녀!'
 
125
하고 나무라던 자기 말이 그저 남았다.
 
126
"집으로 바로 갈 텐가?"
 
127
영추문 앞까지 나와서 상훈은 비로소 입을 벌렸다.
 
128
"예... 한데 선생님께 조금 말씀할 게 잇는데요."
 
129
경애는 망설이다가 결단을 하고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130
"무슨 말?..."
 
131
하고 상훈은 발을 멈칫하고 계집애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길 한가운데 섰을 수가 없어서 장담 밑으로 와서 나란히 섰다. 그러면서도 상훈은 가슴속이 설렁설렁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132
그 동안 상훈도 경애만큼 혼자 번민을 하던 것이었다. 자기 귀에 여러 가지 소리가 떠들어오는 것을 처음에는 귀를 막고 지내려 하였다. 또 그 다음에는 어서 경애의 혼처만 골라서 그 부친의 초상을 치르듯이 얼른 결혼식까지 치러주면 모든 오해가 일소될 뿐 아니라 자기의 낯이 한층 더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멀리하자 하면 마음으로는 이상히도 한 걸음씩 더 다가서는 것 같았다. 혼처를 구하자면 마땅한 데가 금시로 나설 수도 있겠으나 그럴 기력까진 없었다. 자기의 마음을 채찍질해도 보았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번민은 늘어갈 뿐이었다. 감기가 들었다 하고 이틀 동안 가만히 누워 보았다. 그러나 별도리도 없고 마음은 간정이 되지를 않았다. 거기에 무엇이 지시를 하여 끌어다댄 듯이 경애가 달려든 것이다. 사실은 감기로 앓는다는 말은 듣고 경애나 경애 모친이 오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있었던지도 모를 것이다.
 
133
"왜 무슨 일이 있어?..."
 
134
경애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공연히 애가 쓰이면서 또다시 물었다.
 
135
"글쎄, 학교를 어떻게 할지요... 다른 데로 주선해주실 수 없을지요?"
 
136
삼각산에서 내리지르는 저녁 바람이 영추문 문루의 처마끝에서 꺾이어서 경애의 말을 휩쓸고 날아간다.
 
137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138
"왜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든 거람?..."
 
139
물론 그 심중을 못 살피는 것이 아니나 이런 소리를 하였다.
 
140
"......"
 
141
말은 또 끊겼다. 총독부 앞으로 나오려니, 전등불이 환한 전차가 효자동서 내려와 닿다가 떠난다. 상훈은 어찌할까 망설이었다. 이야기를 좀 하자면 어디로든지 들어가 앉아야 하겠는데, 갈 만한 데도 마땅치 않고 전차를 태워가지고 진고개 방면으로 가자 해도 우선 차 속에서부터 누구를 만난다든지 하는 것이 싫었다.
 
142
황토현 앞까지 내려오면서도 두 사람은 또 아무 말도 없었다. 말을 꺼내기에는 똑같이 가슴이 벅찼던 것이다.
 
143
경애는 따라가면서도 일종의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44
잠깐 만나서 몇 마디 이야기만 하고 헤어지면 고만이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되니 남의 눈을 기우면서 무슨 나쁜 짓이나 하는 것 같은 이상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혹의 감미라 할까 어쨌든 뿌리치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145
당주동 자기 집 들어가는 골목 앞을 지나치면서도 경애는 잠자코 말았다.
 
146
두 남녀는 황토현 네거리에 있는 파출소 옆 식당으로 들어갔다. 누구나 저녁 먹을 때다. 식당 안은 불만 환하고 난로 앞에 일본 계집애들이 옹기종기 앉았다가 우중우중 일어난다. 미인을 앞세우고 들어가는 훌륭한 신산지라 대우가 융숭하다. 난로와는 떨어졌으나 구석배기에 가서 경애는 돌아앉아서 자리를 잡았다.
 
147
"다니기가 고단해서 그러는 거야?"
 
148
상훈이 아까의 말의 계속을 꺼냈다.
 
149
"고단두 하고 성이 거셔서 수원 xx학교로나 가볼까도 하는데요?..."
 
150
xx학교란 경애 부친이 설립한 학교요 경애도 어려서 3년급까지 다니던 학교다.
 
151
"거기서 오라고 하던가?"
 
152
"아녜요, 하지만..."
 
153
하고 상훈은 웃으며 한참 기색을 바라보다가,
 
154
"설사 자리가 있다기로 서울서 살림을 벌였다가 또 내려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여기 학교에서 누가 무어라기에... 혹 젊은애들이 성이 가시게 굴어?"
 
155
"아뇨!"
 
156
하고 경애는 얼굴이 발개진다.
 
157
"그럼 알 수가 없지 않은가?..."
 
158
하고 상훈은 아무 눈치도 못 채는 듯이 시치미 뗀다. 자기의 가슴속도 입덧 난 사람처럼 근질거리는지 느글거리는지 알 수가 없지마는, 내색을 보일 형편도 아니 되고 모든 것을 모른 척하는 수밖에 없다.
 
159
"모두들 듣기 싫은 소리만 하고 놀려요."
 
160
한참 만에 경애는 속의 말을 쏟아놓아버리자고 결심한 듯이 하소연을 하고 나서는 입이 배쭉배쭉해지며,
 
161
"분해서..."
 
162
하고 고개를 푹 수그린다.
 
163
"누가 무어라고 놀린단 말이오? 놀리건 받아주기만 하면 그만 아니겠나?"
 
164
하고 상훈은 대담하게 타이르듯이 위로를 해주었다.
 
165
"나만 놀렸으면 좋겠지만 공연한 선생님까지..."
 
166
경애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을 꺼내고 나서는 눈물이 걷잡을 새 없이 쭈르르 흘러서 고개를 둘 데가 없었다. 자기도 무슨 까닭에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실상인즉 교원 자리를 다른 데로 하자는 것인데 딱 마주 대하고 보니 정작 의논보다도 억울하고 분하던 생각부터 앞을 섰다.
 
167
"울 거야 뭐 있소. 남은 무어라든지 나만 정당하면 그만이지!"
 
168
상훈은 나무라듯이 이런 큰소리를 하였으나 그 눈물이 측은도 하고 자기 마음이 자기 말과 같지 않은 것을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이 괴로워하였다. 두 남녀가 맥맥히 마주 앉았으려니까 음식을 날라온다.
 
169
상훈은 좀 멈칫하다가 맥주를 청하였다. 경애는 놀라는 기색으로 치어다보았다. 그러나,
 
170
"약주를 잡수세요?"
 
171
하고 묻기도 싫고 그건 왜 먹느냐고 말리기도 싫었다. 그보다도 감기는 들었다면서 이 추운 날에 찬 맥주를 마시면 어쩌나 하고 애가 씌었다.
 
172
"술은 먹지 않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홧홧할 때 맥주 한 잔쯤은 좋아요."
 
173
하고 상훈은 변명하였다.
 
174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 선생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의외이었고 절대로 믿느니 만큼 인격을 의심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그러면서도 과히 책잡고 싶은 미운 생각까지는 아니 났다. 맥주를 따라놓은 것을 들고 벌떡벌떡 반이나 마시는 것을 경애는 곁눈으로 슬슬 보았다.
 
175
"신열이 나셔서 홧홧하시다면서 그 찬 것을..."
 
176
하고 눈을 찌푸려 보였다.
 
177
상훈은 거기에는 들은 척 만 척하고 성난 사람처럼 잠자코 접시의 안주만 먹는다. 가슴이 홧홧하다는 말을 신열이 난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것이 다행하기도 하나 얼마쯤 섭섭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경애는 공연히 머리가 뒤숭숭하고 앉은 자리가 불편하여 먹어보지 못하던 양요리건마는 접시마다 건드려만 보고 들여보냈다.
 
178
"실상은 나 역시 학교에 그리 간섭하기도 싫고 다른 사람한테 맡겨버리고 싶지만..."
 
179
그는 한 잔만 먹는다던 맥주를 어느덧 한 병 다 마시고 두 병째도 가져오는 대로 내버려 둔다.
 
180
"그까짓 것 언제까지 붙들고 있자는 것도 아니요, 차차 무어나 큼직한 일을 해야 하겠지만 요새 같아서는 사는 것조차 짐이 되고 귀치않은 증이 나서..."
 
181
상훈은 이래저래 홧김에 술을 먹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두 병이나 먹고도 그리 취기가 없는 것을 보고 이제 알았더니 술을 퍽 먹는구나고 경애는 어이가 없었다.
 
182
신성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예수교인이라면 으레 술 담배 안 먹는 사람이요, 계집은 자기 아내밖에 모르는 사람이 어찌 한자리에 누울꼬? 하는 어렴풋한 생각을 혹시 하여도 그런 더러운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경애가 그 신성하여야 할 조 선생님이 술을 마시고 얼굴이 벌개진 것을 보고는 딴사람 같아서 마주 보기가 도리어 겸연쩍었다.
 
183
조 선생님이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신성한 사람으로 보아온 것이 잘못이었던가? 자기가 아직 철이 덜 나고 경력이 부족해서 이만쯤한 일에 놀라는 것인가? 혹시는 그들이 신성한 체 얌전한 체를 눈 가리고 아웅하는 셈으로 꾸미었던 것인가? 또는 세상이란 으레 그러한 것이요 세상 사람이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모르고 유달리 생각하던 자기가 어리석었던가? 우리 아버지도 그런 양반이었던가?...
 
184
숭배하던 조 선생이 맥주를 조금 먹었다는 일이 이 소녀의 머리를 한층 더 뒤숭숭하게 했다.
 
185
두 사람은 식당에서 나와서 오던 길로 다시 향하였다. 경애는 자기 집으로 가는 지름길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조기까지만 걸어보자고 하여서 따라나선 것이었다.
 
186
"왜 내가 술을 먹었다고 못마땅해서 입을 봉하고 있소?"
 
187
육조 앞 컴컴한 넓은 길로 들어서니까 상훈이 입을 벌렸다.
 
188
"아뇨."
 
189
하면서도 경애는 자기 마음을 속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 선생이 자기의 눈치를 짐작해준 것도 좋고 사과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히 말을 붙이는 것도 얼마쯤 마음을 눅여주는 것이었다.
 
190
"추운데 목도리를 꼭 해요."
 
191
하며 상훈은 목도리 뒤를 추켜 주었다. 경애는 전신이 오싹하면서 뱃속에서 무엇이 찌르르 스며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깨달았다. 머리 쪽지에는 어느 때까지 상훈의 손이 닿은 감촉이 남아 있었다.
 
192
"이 야기에 감기 안 들게 조심해요."
 
193
어린 사람을 가꾸는 자애스러운 목소리다. 경애는 얼굴이 홧홧이 달아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래도 상훈이 밉거나 무서운 생각은 아니 들었다. 술을 먹은 데 대한 책망도 잊어버렸다.
 
194
'그러나 내가 왜 이런가? 누라 어쩌기에?...추우니까 감기 들까보아 목도리쯤 추켜 주었기로...'
 
195
경애는 자기를 되레 꾸짖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간정시키려 하였다. 보병대 앞까지 왔을 제 경애는 헤어져 가려 하였다.
 
196
"그럼 늦기 전에 어서 가우, 그리고 공연한 생각 말고 잘 다니면 차차..."
 
197
하고 상훈은 말을 얼버무려뜨리며 헤어지려는 눈치더니 다시 발을 아래로 떼어 놓으며 어두워서 호젓할 테니 데려다 주마고 한다. 경애는 싫다고 하였으나 역시 따라온다. 싫을 것도 없다.
 
198
"성이 가시고 괴롭기는 피차 일반이오!"
 
199
상훈은 애수에 잠깐 목소리를 가라앉혀서 이런 소리를 하다가 자기의 감정을 좀더 분명히 표시하고 싶어서 다시 말을 잇는다.
 
200
"남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40이나 된 놈이 나이 아깝다고 욕을 할지 모르지만 아직 20 때의 생각- 내 자식 보기가 부끄럽고 경애양에게 눈치를 보일까 봐 부끄러운 그러한 10년 전 20년 전의 정열과 얼마나 싸웠는지 아무도 모를게요."
 
201
기어코 이런 말을 하고야 말았다. 상훈은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였는지 귀가 먹먹하였고 숨이 목 밑까지 차올라 왔다.
 
202
경애도 주기를 품은 남자의 더운 입김이 반만 내놓은 뺨 옆에 스치는 것을 깨달았으나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머릿속이 띵하였다. 한 말도 한마디도 입을 벌릴 기운이 아니 났다. 다만 가슴이 울렁거릴 뿐이었다.
 
203
당주동으로 돌아들어가는 동구에 왔을 때 경애는 상훈더러 이제는 가라고 하고 싶었으나 말이 목밑에 붙어서 아무래도 나오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또 다시 캄캄한 길로 들어섰다. 아무쪼록 한 걸음 뒤서려고 애를 쓰면서...
 
204
"그러나 그까짓 소리는 다아 그만 두고..."
 
205
상훈은 다시 말을 꺼내면서 한 걸음 멈칫하여 나란히 서며,
 
206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쨌든 곧 결혼을 하우! 결혼만 하면..."
 
207
하고 말을 딱 끊는다. 경애는 다소 안심이 되며 말 위를 기다리려니까 별안간 손에 무엇이 와서 닿는다- 상훈의 화끈하는 손이다. 경애는 감전된 듯이 전신이 찌르르하여 하마터면 발부리가 채여 엎드러질 뻔하였다.
 
208
경애는 붙잡힌 손을 뿌리칠 수도 없이 놀란 비둘기는 소리는 치련마는 숨을 죽이고 몇 걸음 따라가려니까 상훈은 별안간 손이 으스러질 듯이 꽉 쥐었다가 탁 놓으며 노한 사람처럼,
 
209
"가우!- 가."
 
210
하고 돌쳐서 가버린다.
 
211
컴컴한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어른어른 움직이는 것을 경애는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대로 한참 섰었다. 지나던 사람이 들여다보고 간다.
 
212
경애의 머리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까닭없이 울고만 싶었으나 눈은 보송보송하다.
 
213
이 두어 시간 동안 경애의 눈에 비친 세상은 금시로 변하였다. 조상훈의 세상이 아니어든 조상훈에 대한 관찰이 변하였다고 세상까지 돌변해 보이랴마는 세상이 우스꽝스럽다 할지, 무섭다 할지, 더럽다 할지, 재미있고 희망에 가득하다 할지,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인 듯하였다.
 
214
이튿날 경애는 학교에 아니 갔다. 갈 용기가 아니 났다. 온밤을 모친 몰래 꼬박 새고 나서 머리가 내둘리기도 하지만 학교에 가면 오늘쯤은 조 선생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얼굴을 맞대야 할 것이 걱정이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겁도 났다. 아니, 그보다도 무슨 중대한 일을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하나 그 중대한 일이 무엇인지는 자기도 알 수가 없었다.
 
215
모친은 간밤에 야기를 쐬어서 감기가 들었느냐고 애를 쓰며 약을 지어다 주마고 서둘렀다. 그러나 모두 싫다 하고 하루를 버둥버둥 누워서 지냈다. 아무쪼록은 모친과 떨어져서 혼자 있고 싶었다.
 
216
'조 선생이 미쳤단 말인가? 술이 취해 그랬나? 미쳤거나 술이 취하지 않았으면 어제 헤질 때 그게 무슨 짓이더람...'
 
217
그러나 암만 생각해도 실신한 사람은 아니다. 그리 취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218
자식 보기에 부끄럽고 어쩌고 하던 말을 생각하여 보았으나 머리에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뜻은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천만 의외이었다. 그러나 그러면 또 나중에 어서 결혼을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219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결혼만 하면...'
 
220
하고 조 선생이 말을 뚝 끊던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쓸데없는 소리는 누가 하였던가? 결혼만 하면... 어떻게 되리라는 말인가? 경애는 알 수가 없었다.
 
221
실상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그따위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경애를 혼인만 시키면 상훈 자신도 마음이 가라앉고 아무 일 없어지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상훈은 자기 마음이 위험해 가는 것을 피할 도리가 다만 경애를 얼른 결혼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22
하루 졸고 다음날은 학교에 가보았다. 둘째 시간 에 들어갈 때 조 선생은 사무실에 들어왔었다. 여러 사람이 병 위문을 아니하는 것을 모니 조 선생은 어저께도 왔던 모양이다. 조 선생은 그제 저녁에 보던 조 선생이 아니었다. 그 전대로의 조 선생이다. 경애에게 인사를 하고 수작을 붙이는 것도 조금도 그 전과 다를 것이 없다.
 
223
경애는 또 한 번 얼떨떨한 생각에 끌려들어갔다. 그저께 일이 꿈결 같고 사람이란 옷 한 겹만 입은 깃이 아니라 마음과 몸 위에 몇백 겹 몇천 겹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으로 싸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조 선생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조 선생 같아 보였다. 대하는 사람마다 새삼스러이 얼굴이 치어다보였다. 그 중에 오직 자기만이 아무것으로도 싸지 않고 난 대로 벌거벗고 있는 것 같고 또 그것이 자랑이라는니보다도 이상스러웠다- 허위의 갑옷을 입을 것을 배웠다.
 
224
하학 후에 누구보다도 먼저 책보를 싸들고 나가려니까 문간에서 마주 들어오는 조 선생과 마주쳤다. 조 선생은 눈으로 좌우를 경계하는 표정이더니 외투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어 약삭빠르게 준다. 경애는 얼굴이 화끈하여 급히 받았다. 결코 그 편지가 반가운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들킬까보아 아무 소리도 못하고 받아서 책보 밑에 감춘 것이다.
 
225
편지에는 아무 말 없이 어저께 왜 아니 들어왔더냐는 인사와 그저께 일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피차에 기억에서 없애자 하고 용서하여 달라고 여러 번 진심으로 뇌었을 뿐이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몰래 펴던 경애는 도리어 김이 빠졌다. 좀더 무슨 뼈진 말이 있을 것같이 생각되었고 또 그런 말이 없는 것이 이상히도 섭섭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상훈을 그립게 생각하거나 뼈 있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편지가 너무 싱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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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년 전의 이러한 갈피를 누가 알랴? 덕기는 물론이요 경애의 모친도 결과만을 알 뿐이지 자초를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어미의 무릎 위에서 잠든 이 아이인들 그 결과를 설명할지언정 그 갈피야 알 것이냐! 당자까지들도 이제는 가끔 머리에 떠오르는 추억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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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가 상훈의 첫 편지를 받은 지 다섯 달도 못 되어서 경애는 학교를 나오고야 말았다. 경애는 그때 학교를 나오면서 서울을 떠났던 것이요, 또 사실 동경에 안 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호화로운 유학이 아니라 할 수 없이 피접 나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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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들은 동경 유학이란 말을 들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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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학비는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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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서로 웃는 입들을 치어다보았다. 다른 사회에서면야 그런 것이 그다지 문제도 되지 않았겠지만 교회 속이니까 문제는 수군거리며 커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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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경애가 동경 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시외 '오모리' 한구석에 박혀 있던 석 달 동안은 징역살이였다. 몸 고된 일이 있고 돈에 군색해서가 아니라 적막하기가 귀양살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만날 사람을 못 만나는 고민이 피차가 일반이었다. 그러나 상훈은 서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단 일주일이라도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춘다면 비평이 스러져가려던 판에 또다시 동경으로 경애의 뒤를 따라갔다는 소문이 짝자그르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애는 동경 간 지 3개월 만에 다시 도망꾼처럼 서울로 기어들었다. 용산역에서 내려서 사람의 눈을 피하여 밤중에 자동차로 모친에게 끌려들어온 경애는 지금 들어 있는 북미창정 이 집에 처음 집알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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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물론 상훈이 경애를 위하여 마련해놓았던 집이다. 하필 교회와 학교에서 가까운 이 근처에 정할 묘리는 없었으나 경애의 모친이 당주동으로 떠난 뒤에는 그 근처의 종교 예배당에를 다닌 관계로 우대에서는 살기 싫고 삼청동 근처도 아니 되었고 또 집도 알맞은 것이 나서지를 아니하리까 부친이 경영하는 이 근처인 대성 정미소의 주무에게 부친이 빌려주었던 이 집을 내놓게 하고 들여앉힌 것이었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 등하불명이란 말이 예두고 맞힌 듯싶게 도리어 상관없을 성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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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예닐곱 달 된, 남의 눈에 뜨일 만한 배를 안고 새 집에 들어와 앉으니 경애는 그래도 마음이 후련하고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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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은 처음부터 아무 말 없었지만 석 달 만에 만나서도 별말 없었다. 이왕지사 떠들면 무얼 하랴는 단념으로인지? 자기 남편 때 일을 생각하고 은인이라 하여 그것을 딸의 몸으로 갚겠다는 생각인지 혹은 명예 있고 아니 그까짓 명예라는 것은 무엇 말라뒈진 것이냐-돈 있는 사람이니 이 사람의 첩 장모 노릇이라도 하여 두면 죽을 때 육방망이는 못 써도 마주잡이를 해서 나가지는 않으리라는 속다짐으로인지... 그러나저러나 이 속다짐이 무엇보다도 앞을 섰던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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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늙은 부인은 손에 성경책 넣은 헝겊 주머니를 달고 다니는 전도 부인이다. 그러나 살아나가야 할 수단을 잊어버린 어리보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첩에서 조금 면한 삼취댁이다. 만일 예수 믿고 사회일 하는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장거리에서 술구기를 들었을지 딸자식을 기생에 박았을지 누가 알랴. 이것은 이 노부인을 모욕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부인의 성격이 그만치나 걸걸하고 수단성 있다는 말이요, 또 누구나 그 놓인 처지에 따라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된다는 말이니 만일에 자기 남편이 단 4,50석의 유산만 남겨주었던들 이 부인은 조상훈의 은혜를 받을 기회는커녕 서울로 올라오지도 않았을 것이 아니냐?... 그러나저러나 이 부인은 새 집 든 지 석 달만에 손주딸을 보았다. 쉬쉬하고 세상을 숨기고 낳은 목숨이다. 그러나 이 손주새끼는 외할머니로 하여금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원문】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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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상섭(廉想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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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