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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史硏究草 (조선사연구초) ◈
◇ 《三國志》東夷列傳校正 ◇
해설   목차 (총 : 6권)   서문     이전 3권 다음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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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一. 校正의 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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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史硏究의 題目을 가지고 何故로 中國 魏·晋時代 史官의 지은 《三國志》 東夷列傳 같은 것을 取하는가. 朝鮮 古文獻이 너무 滅亡하여 上古의 朝鮮을 硏究하자면, 마치 「바빌론」 古史를 硏究하는 者가 「해로도토스」의 希臘(그리스)史를 參考하지 않을 수 없음과 같이, 中國 古史에 힘입을 것이 적지 않으나, 다만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와 班固(반고)의 《漢書》에 쓰인 朝鮮列傳은 中國 亡命者로 朝鮮의 一隅를 竊據한 衛氏 一家가 漢과 對抗하던 略記니, 朝鮮列傳이라기보다 도리어 中國 流賊의 侵略史라 함이 可하며, 《南北史》·《隋書》·《唐書》 等 東夷列傳은 比較的 詳備하나 또한 각기 當時 中國과 關係된 일만 적었으니, 이는 漢族의 外竸史라 함이 可하거니와, 魏·晋時代의 史官들은 그렇지 않아서, 檀君王儉의 建國이 王沉(왕침)의 《魏書》에 보이며, 朝鮮王 否·朝鮮王 準 等의 略史가 魚豢(어환)의 《魏略》에 보이며, 古代列國의 國名·官制·風俗 등이 陳壽(진수)의 《三國志》에 보여 中國과 關係 되지 않는 故事까지도 間或 記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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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高句麗 東川王」 때 魏將 毌丘儉(관구검)이 丸都(高句麗 서울)에 入寇하여 주워간 書籍과 傳說이 있어 據錄한 者가 있는 듯하니, 當時에는 비록 國恥이나 後世의 史的 材料는 이보다 더 珍貴한 것이 없을 까닭이다. 魏·晋 史官의 記錄 가운데서 何故로 《三國志》만 取하는가. 前述한 모든 史官의 記錄에 王沈(왕침)의 《魏書》는 「往在二千載 前有檀君王儉 立國阿斯達 …」의 數十字가 麗僧 一然(일연)의 《三國遺事》에 傳하였을 뿐이며, 魚豢(어환)의 《魏略》은 裵松之(배송지)의 「《三國志》 註」에 引用한 四五條가 傳하였을 뿐이요, 그 兩書의 全部가 다 缺亡하였으므으로 할 수 없이 《三國志》만을 取하게 됨이며, 先儒는 매양 《三國志》 東夷列傳을 捨하고 《後漢書》의 것을 取하였으나, 이는 다만 後漢이 三國의 前代인 줄로만 알고 《後漢書》 著者 范瞱(범엽)이 《三國志》 著者 陳壽(진수)보다 百餘年 以後의 人임을 생각하지 아니함일 뿐더러, 兩 東夷列傳을 對照하면 《後漢書》의 것이 明白히 《三國志》의 抄錄이건만 이를 깨닫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後漢書》를 捨하고 《三國志》를 取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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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故로 이를 取하는 同時에 校正을 加하는가. 千年 以前에는 印板이 없어 一般 書籍이 모두 抄寫로 傳하므로 顚倒·訛誤·脫落·增疊된 字句가 許多하여 中國의 經史가 모두 考證家의 手를 經한 뒤에야 可讀하게 되었는데, 朝鮮列傳·東夷列傳 같은 것은 彼等이 考證에 用力하지 않았으며, 設或 用力하더라도 自家의 눈에 서투른 人名·風俗·事情 等을 잘 모르므로 그 校正한 것이 더 錯誤된 것이 있으니, 校正하지 않을 수 없음이 (一)이요. 彼等이 그 遺傳的 自尊性으로 他國을 藐視하여 東夷라 稱한 것도 可痛하나, 그러나 이는 事實에는 關係가 없거니와 다만 故意로 誣錄한 것도 있으며, 或 傳聞으로 誤錄한 것도 있어 校正하지 않을 수 없음이 (二)니, 그러므로 著者의 「《三國志》東夷列傳의 校正」이 있게 된 것이다.
 
 

2. 二. 字句의 校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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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顚倒·訛誤·脫落·增疊된 字句를 校正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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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序文의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니, 烏丸骨都는 곧 烏骨丸都의 誤요 烏骨과 丸都는 다 城名이니, 烏骨城은 今의 連山關, 一名 鴉骨關이요 丸都城은 今의 輯安縣 洞仙嶺이니, 烏骨과 丸都의 位置 沿革은 朝鮮史를 읽은 者의 明知하는 바이므로, 이제 煩錄하지 않거니와, 毌丘儉(관구검)의 丸都城 侵入은 本 列傳에 詳記한 바 烏骨은 곧 毌丘儉(관구검)이 幽州로부터 丸都城에 侵入하는 經路인즉 「踰烏丸骨都」가 곧 「踰烏骨丸都」의 誤임이 明白하지 않은가. 대개 上文의 烏丸傳이 있음으로 因하여 抄寫者가 烏骨의 「骨」과 丸都의 「丸」을 바꾸어 「烏丸骨都」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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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濊傳의 「有廉耻不請句麗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이라 하니, 右記의 文字는 文理가 닿지 않으므로 中國學者들까지도 이를 疑心하여 모두 그 誤字가 있음을 認하는 同時에, 乾隆의 「欽定 《三國志》」 魏志 卷 二十 考證에는 「有廉耻不請」의 「請」을 諳의 誤라 하고, 이를 下文에 屬讀하여 「不諳句麗言語」라 하였으나, 上文에 「濊與句麗同種」이라 하였으니, 本 列傳에 이른바 「同種」은 매양 同 言語의 人民을 指함인즉, 請을 「諳」으로 改하여 「不諳句麗言語」라 讀함이 上下의 文意를 矛盾케 함일 뿐더러 濊는 곧 東扶餘의 誤니(次節의 「記事校正」 參照), 東扶餘가 句麗의 言語를 몰랐다 하면 甲의 從兄第 乙이 甲의 言語를 모른다 함과 같으니, 「欽定 《三國志》」의 云云이 다만 臆斷이 될 뿐이다. 《後漢書》 濊傳의 「自謂與句麗同種 言語法俗大抵相同其人性愿慤少嗜欲不請匄」에 據하여 보면 「不請句麗言語」의 「請」은 誤字가 아니요 「句」가 「匄」의 誤며, 「麗」는 下文의 句麗의 「麗」로 말미암아 誤增된 字니 이를 改正하면 「有廉恥不請匄言語法俗與句麗同」이니, 「有廉恥不請匄」가 一句요 「言語法俗與句麗同」이 一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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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韓傳의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니, 三韓이나 扶餘가 다 各部 大臣을 「크치」라 稱한 바, 크치를 音으로 써서 「遣支」·「遣智」 或 「近支」가 되고, 義로 써서 「大兄」 或 「大等」이 되고 各 大臣의 首長·總理大臣을 「신크치」라 稱한 바, 「신크치」를 音으로 써서 「臣遣支」 或 「臣近智」가 되고 義로 써서 「太大兄」 或 「上大等」이 된다 함은 이미 拙著 「吏讀文名詞解釋」에 說明하였거니와, 右記한 「臣雲遣支」의 雲은 곧 下文의 「臣雲新國」의 雲으로 말미암아 誤增된 字니, 이를 改正하면 「臣智或加優呼臣遣支」라 할 것이니, 「신크치」의 略稱이 「신치」가 되어 當時의 習慣語가 되고, 「신크치」라 具稱함이 稀少하므로 「臣遣支或略呼臣智」라 쓰지 않고 도리어 「臣智或加優呼臣遣支」라 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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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弁辰傳의 「借邑」이니, 韓傳에는 邑借란 官名이 있고, 弁辰轉에는 借邑이란 官名이 있는 바, 兩者 中 一은 반드시 倒寫한 字일 것이니, 何者가 倒寫인가? 頓氏의 家譜에 據하면 頓氏는 乙支文德(을지문덕)의 子孫이니, 乙支는 官名이오 姓이 아니라 하며, 日本人 白鳥庫吉(오조고길)은 퉁구스族의 말에 使者를 「일치」라 함에 據하여 《晋書》 肅慎傳의 「乙力支」를 「일치」로 解한 바, 邑借는 그 音이 「일치」와 비슷하니, 또한 使者의 義가 될 것이며 高句麗 官名의 鬱折도 또한 「일치」인듯하니, 弁辰傳의 借邑은 곧 「邑借」의 倒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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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弁辰傳의 「彌烏邪馬」니, 邪·耶·牙 等 字가 모두 「라」의 音됨은 이미 「古史上吏讀文名詞解釋」에 說明하였거니와, 《海東繹史》 地理에 據하면 現今 高靈이 곧 弁辰의 彌摩那인즉 本傳의 「邪馬」는 곧 「馬邪」의 倒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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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 韓傳의 「駟盧」·「莫盧」와 弁辰傳의 「馬延」이니, 右의 三國은 疊寫이므로 《海東繹史》에 刪去함이 옳은 것이다.
 
 

3. 三. 記事의 校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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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節의 陳述한 바는, 本 列傳의 抄寫時代의 抄寫者들이 誤한 字句를 校正한 者이거니와, 이제 本節에는 當初 그 本文의 잘못된 記事를 校正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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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晋 史官이 毌丘儉(관구검)이 가져간 高句麗의 書籍이 있어서 參考하였다 하여도, 記事의 違誤가 많음은 마치 元·明·淸 史官들이 「元史」나 「明史」나 一統志 가운데 高麗의 史冊이나 李朝의 《輿地勝覽》의 本文은 謄錄하면서 매양 妄改와 僞證이 있는 類라 할 것이다. 이제 이를 略擧하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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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辰韓을 秦人의 子孫이라 함이니,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에 匈奴를 夏禹氏의 子孫이라 하며, 韓詩外傳에 孤竹을 湯의 封國이라 하며, 魚豢의 《魏略》에 “大秦(로마) - 羅馬人(로마인)을 中國人의 子孫이라 하여 彼國 史家들이 매양 그 自尊의 僻見으로 許多의 笑話를 끼쳤지만, 本 列傳에도 그 謬習이 있어서 辰韓의 一名은 秦韓이라 하고 秦韓의 秦에 傅會하여 辰韓은 秦人의 東走한 者라 하며, 이를 僞證하기 爲하여 辰·馬 兩韓이 同一한 盧·那·不斯 等의 地名과 同一한 臣智·邑借 等의 官名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辰韓 … 言語不與馬韓同」의 臆斷을 내리며, 模糊茫昧한 「國爲邦,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等의 讕句를 加入하고, 言語 … 有似秦人”의 不充分한 證據를 發表하여 朝鮮의 族系를 亂하려 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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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東扶餘를 濊로 誤認함이니, 中國人이 朝鮮일을 적을 때 너무 無責任하게 적어 孔子의 《春秋》에 朝鮮을 山戎과 섞으며,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에 眞番朝鮮의 對燕戰爭을 匈奴傳의 東胡·山戎 或 濊貊 等의 事實에 넣어, 만일 《管子書》나 《魏略》이 아니면 그 謬誤를 發見할 수 없이 되었거니와, 本志에도 또한 東扶餘를 濊로 誤認한 잘못이 있다. 濊貊은 곧 「려신」이니, 「려신」을 或 「려」의 一字를 譯하여 離枝·令支·濊·穢·薉 等이 되며, 或 려신 二字를 幷譯하여 女眞, 野人 等이 되며, 혹 「려신」의 「아리」 江으로 그를 이름하여 挹婁·鴨盧 等이 되며, 或 「려신」의 別部 「물가」로 全體를 總稱하여 勿吉·靺鞨 等이 된 者라 할 것이다. 歷來 學者들이 朝鮮의 三國 初인 中國의 漢末에, 挹婁란 名만 있은 줄 알지만, 《三國史記》 高句麗 太祖紀에 「王將馬韓濊貊一萬騎」註16)라 하여 挹婁를 濊貊으로 仍書하였으며, 朝鮮의 三國 末인 中國의 唐初에, 靺鞨이란 名만 있는 줄로 알지만, 「金庾信傳」에 「唐高宗高句麗與濊貊同惡」註17)이라 하여 靺鞨을 濊貊으로 仍稱하였으니, 「려신」의 名稱과 沿革이 대개 이러한 것이거늘, 本志에 挹婁가 濊의 別名임을 모르고 「挹婁傳」을 立한 以外에 따로 濊傳을 立함이 一誤요, 東·北 兩 扶餘 가운데, 北扶餘는 그저 夫餘라 稱하는 同時에 東夫餘를 濊로 認함이 再誤라. 그러나 「挹婁傳」에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 … 言語不與夫餘句麗同 … 東夷飮食皆用俎豆唯挹婁不法俗最無綱紀”라 하니, 「扶餘東北千餘里」가 松花·黑龍 等 沿岸의 「려신」 國이 아니냐. 「言語不與夫餘句麗同」이 《後漢書》 「挹婁傳」과 《北史》 「勿吉傳의 「在東夷中言語獨異」라 한 「려신」族이 아니냐. 「挹婁不法俗最無綱紀」 가 朝鮮列傳 中 가장 未開한 「려신」이 아니냐. 그 位置·言語·風俗의 說明이 곧 「려신」임이 明白하며, 濊傳에는 「濊南與辰韓接北與高句麗沃沮接 …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이라 하였으니, 南으로 辰韓을 接하고 北으로 高句麗와 沃沮를 接한 者가 東扶餘가 아니냐. 言語는 當時 朝鮮 列國이 「려신」 部落 以外에 모두 同一한 言語였지만 法俗이 扶餘·高句麗 兩國과 相同한 者가 東扶餘가 아니냐. 이는 그 位置·言語·風俗으로 말미암아 東扶餘를 濊로 誤認함이 明白하거늘, 後世 學者들이 《三國志》의 誤를 발견치 못하여, 朝鮮史上 또는 東洋史上 種族의 界限을 劃淸하지 못하여 許多한 紛紏를 釀出하였다. 唐 賈耽(가탐)의 「新羅北界溟州古濊地前史以扶餘爲濊地者蓋誤」는 다만 北扶餘가 濊 아님을 발견할 뿐이요, 東扶餘가 濊 아님은 依舊이 發見치 못함이다. 或曰 “려신이 水草를 逐하여 遷徒하는 蠻族인 故로 三國史에 羅·濟·麗(신라·백제·고구려) 三國의 中間에 雜居한 靺鞨 려신도 있으며, 《高麗史》에 豆滿·鴨綠 等地에 侵據한 女眞 려신도 있었은즉, 本志의 濊도 이와 같이 一時 東扶餘 域內에 侵入한 려신이 됨이 可하다” 하나, 設或 그렇다 할지라도 主인 東扶餘를 立傳하지 않고 客이 濊를 立傳함은 本志의 誤이다.
 
18
(三) 樂浪을 뺌이니, 樂浪은 朝鮮史上 가장 張皇紛擾한 大問題라. 그 詳論은 他日로 讓하거니와 이제 略說하건대, 樂浪은 平壤이요 平壤은 「펴라」의 譯이니, 漢 武帝가 衛滿을 滅하고 樂浪을 州郡의 一로 定하니 그 位置가 今 海城 等地요, 崔氏란 者가 大同江 沿岸에서 崛起하여 樂浪國이라 稱하다가 末王 崔理(최리)가 高句麗에게 亡하니, 이는 곧 大武神王 二十年이오. 그 뒤에 樂浪 屬國이 高句麗에게 不服하여 漢兵을 迎入하여 高句麗에 反抗하니, 이는 大武神王 末年이라. 羅·濟(신라·백제) 兩國이 처음에 樂浪의 侵寇로 말미암아 安定한 날이 없다가 大武神王 以後부터 그 侵寇가 絶跡됨은 崔氏 王國이 滅亡한 까닭이라. 漢 光武 以後에 樂浪이 비록 漢에 服하였으나 그 人民의 自治와 各 小國의 王權은 依舊하게 朝鮮人이 主하였으니, 所謂 樂浪太守는 遼東에 僑寓한 者요. 太祖王 때는 遼東의 樂浪까지 高句麗의 所有가 되었으므로 唐 賈耽(가탐)의 四夷述 自序에 「遼東樂浪陷於漢建安之際」라 함이요. 東川王 때 至하여 大同江의 樂浪은 高句麗에 仍屬하였으므로 東川王이 丸都를 毌丘儉(관구검)의 蹂躪에 棄하고 廟社와 人民을 平壤에 移함이나 遼東의 樂浪은 魏에 見失하였으므로 毌丘儉(관구검)의 還軍할 際에 樂浪을 從함이오. 美川王 때는 遼東의 樂浪이나 大同江의 樂浪이 다 高句麗에 入하였으므로 燕 慕容廆(모용외)가 永平府의 柳城에 樂浪을 移設함이며, 廣開土王·長壽王 以後에는 柳城의 樂浪이 高句麗의 侵逼을 當하다가 百濟의 兵이 海를 渡하여 侵據하며, 魏(拓跋氏)帝가 上谷(今 大同府) 內에 樂浪을 移設함이니, 以上은 史冊에 證明된 者라. 遼東 樂浪은 비록 朝鮮의 所有된 때가 있으나, 그 人民과 地理가 當時 中國史의 範圍에 入한 者이며, 大同江의 樂浪은 비록 漢族의 征服을 被한 적이 있으나 恒常 朝鮮에 屬한 것이거늘, 《三國志》가 「《漢書》 地理志」의 遺規를 襲하여 樂浪을 朝鮮列傳 중에 뺐으므로 그 地理의 缺憾은 姑舍하고, 第一은 高句麗와 樂浪의 言語·風俗 等 同異의 關係를 말하지 않으며, 第二는 樂浪과 三韓의 言語·風俗 等 同異의 關係를 말하지 않으며, 第三은 따라서 高句麗·扶餘 等 北方 諸國과 三韓 等 南方 諸國과의 聯絡이 斷絶하여 本志 東夷列傳의 非常한 缺點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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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發岐(발기), 新大王의 第二子의 次序를 誤하여 長子라 하며, 公孫康(공손강)에게 借兵한 事實에도 若干의 誤가 있으며, 高句麗 王을 高句麗 侯라 하며, 高句麗史에 보이지 않는 高句麗 侯의 「騶(추)」란 이름이 있으며, 王莽(왕망)이 高句麗 侯 騶(추)를 斬하였다 하며, … 其他 모든 錯誤가 있으나, 이는 史學上 그렇게 大問題일 것이 아니므로 贅論하지 않는다.
 
 

4. 四. 結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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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를 硏究하려면 史的 材料의 搜集도 必要하거니와 그 材料에 對한 選擇이 더욱 必要한 者라. 古物이 山같이 쌓였더라도 古物에 對한 學識이 없으면 日本의 寬永通寶가 箕子의 遺物도 되며, 十萬 冊의 藏書樓 속에서 坐臥하더라도 書籍의 眞僞와 그 內容의 價値를 判定할 眼目이 없으면 後人 僞造의 天符經 等도 檀君王儉의 聖言이 되는 것이다. 歷來의 朝鮮 史家들의 所謂 史學은 매양 博學으로써 唯一의 條件을 삼으며, 그 所謂 博學은 오직 書籍뿐이요 그 所謂 書籍은 中國 書籍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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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富軾(김부식)은 朝鮮 古史가 缺亡된 까닭에 「無虎洞 中의 狐狸」와 같이 朝鮮 史家의 鼻祖가 되었지만, 彼가 《三國史記》를 지을 때 宋人의 冊府元龜 一千券을 사다가서 自家의 參考에 供하고는, 內閣에 深藏하여 他人의 閱覽을 不許하여 自家가 唯一한 博學者의 名譽를 가지는 同時에, 《三國史記》가 自家의 名譽와 같이 國內 唯一의 歷史됨을 希望하였다. 彼의 惡劣한 手段이 참 痛惡만할 뿐더러, 그 史學的 頭腦가 非常히 缺乏하여 卽 近世의 發達된 歷史에 比하여 遜色이 있을 뿐만 아니라, 東洋 古代의 人物 中心主義의 歷史의 저울로 달아보더라도 《三國史記》는 몇 푼어치가 못 되는 歷史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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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佔畢齋集》 等에 散見한 千年 思想界의 支配者인 永郞(영랑)·述郞(술랑)·夫禮郞(부예랑) 等 偉人을 쓰지 않으며, 《文武王書》·《唐書》·《日本書記》 등에 流傳한 百濟 末日의 唯一한 英物인 扶餘 福信(부여 복신)의 列傳을 짓지 않으며, 武功이 가장 많은 東城王 時代를 微弱으로 誤證하며, 奇功을 세운 楊萬春(양만춘)을 漏落하며, 族系를 談하면서 王儉氏의 正統인 扶餘를 刪棄하며, 地理를 記하면서 高句麗의 後繼인 渤海를 排斥하였다. 그러므로 《三國史記》는 文化史로나 政治史로나 價値가 甚히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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彼가 中國 書籍에서 얻은 博學도 너무 猖皮하여 史記 朝鮮列傳의 「聚燕齊亡命者王之都王儉」을 引用할 때는 「王之」를 不文에 부쳐 「王之都王儉」이라 하여 그 句絶을 옳게 떼지 못했으며, 《宋書》 「高句麗傳」의 “璉不欲使弘南來”를 移錄할 때 「璉」을 王으로 고치면서 「來」는 그대로 두어 長壽王이 平壤에 앉지 않고 浙江에 앉아 하는 말이 되었으며, 《隋書》의 「高麗傲慢不恭帝將討之」는 「我傲慢不恭帝將討之」註18)라 改書하여 허리 부러질 「我」란 主人을 찾았으며, 冊府元龜의 「姓募名秦」을 謄寫하여 新羅 朴·昔·金 三姓 以外에 턱없는 疑問의 募氏 帝王을 인사하게 되고, 이 밖에도 이 같은 盲人夜行의 記事가 많으니, 選擇 없는 博學은 博學 아닌 選擇만도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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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近의 久庵(구암 한백겸)·順庵(순암 안정복) 等 諸 先儒는 歎服할만한 精詳謹密을 가져 金氏의 錯誤를 發見한 것이 적지 않으나, 다만 中國書籍에 對한 信賴가 너무 過하여 地理를 論하려면 眞僞가 錯雜한 水經을 그대로 引用하며 年代를 表하려면, 束晳(竹書紀年의 學者) 以後에 僞作한 竹書紀年을 그대로 尊信하고, 彼 所謂 經史는 字字金玉으로 보아 그 僞證과 誤證을 發見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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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가 時機를 얻으면 中國 書籍 中 一切 朝鮮에 關한 記錄의 是·非·誤·正을 찾아보려 하고, 近來 著史者들이 매양 各種의 眞書·僞書·訛言·正言을 모두 朝鮮史의 材料를 삼고, 洋文의 形式으로 篇章을 갈라, 新史學者가 지은 朝鮮史라 함은 좀 부끄러운 일인가 한다.
【원문】《三國志》東夷列傳校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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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申采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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