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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史硏究草 (조선사연구초) ◈
◇ 前後三韓考 ◇
해설   목차 (총 : 6권)   서문     이전 5권 다음
신채호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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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一. 引用書의 選擇

 

1.1. (一) 引用書의 眞僞 辨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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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地中 發掘이나 古蹟 探査나 古物 硏究 같은데 知識과 器具가 모두 不足한 우리로서는, 우리의 古史를 硏究하려면 오직 古人의 끼친 書籍으로 資料 삼을 뿐인 것은 勿論이다. 書籍이라면 우리의 것 뿐 아니라 隣國의 것도 可하며, 往代의 所謂 正史라는 것보다도 或 神話·小說·妖談·雜書에서 直接 或 間接으로 史的 價値를 더 얻는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는 選擇할 줄을 안 然後의 일이라. 어찌 아무 辨別도 없이 朝鮮에 關한 記載만 있으면 《山海經》이나 《竹書紀年》이나 《抱朴子》나 《博物志》 같은 것을 價値를 묻지 않고 引用하며, 後人의 僞造라고 擧世가 다 말하는 堯典과 禹貢 中의 嵎夷니 島夷니 하는 것을 가져다가 四五千年 前 朝鮮史의 한 페이지를 채우려함이 또한 可笑한 일이 아니냐. 《페리클레스(Pericles)》의 誣錄에 依하여 「아테네」가 매양 「스파르타」를 이긴 줄로 알며, 紀元 三九○年 「카리」 兵火 以後의 羅馬(로마)人의 追錄한 羅馬(로마) 古史에 依하여 古 羅馬(로마)의 年代 事蹟 等을 믿으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古史를 論述함에 먼저 引用書의 價値를 省察할 것이다.
 
 

1.2. (二) 朝鮮 古史의 殘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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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最古의 史籍을 神誌라 한다. 神誌를 或은 人名이라 하며 或은 書名이라 하나 拙見으로는 神誌는 本來 古代의 官名, 三韓史의 臣智 곧 「신치」니, 歷代 「신치」의 신수두 祭日의 致語를 모은 것이 있었던가 하니, 그 全書가 남아 있으면 或 朝鮮의 「호머(Homer)」 詩篇이 될는지도 모를 것이나, 不幸히 神誌의 것이라고는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를 震檀九變圖란 이름이 《大東韻海》에 보이며, 秘詞 十句가 《高麗史》에 보이며, 그 밖에는 流落된 三句가 전할 뿐이요, 高句麗의 國初의 《留記》 百卷이니, 李文眞(이문진)의 《新集》 五卷이니, 百濟 高興(고흥)의 《書記》니, 新羅 居柒夫(거칠부)의 新羅 《古事》니, 하는 것까지도 그 書名만 우리 귀에 남아 傳하고 그 一字가 人間에 流落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된 原因은 「朝鮮 歷史上 一千年來 第一 大事件」에 略論하였지만, 어디 우리 朝鮮의 史學界와 같이 白沙地된 社會가 있으랴. 그러면 우리가 무슨 書籍에 依하여 古史를 말할까?
 
 

1.3. (三) 中華(중국)史家의 朝鮮에 關한 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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隣國의 書籍에서 搜索한다 하자. 古代 우리의 隣國 가운데 남의 일까지 적어 줄 만한 文化를 가진 나라가 오직 中華(중국) 뿐이오. 中華(중국)의 信史를 찾으면 司馬遷(사마천)에게 第一指를 屈할 터이나, 그러나 司馬遷(사마천)은 忠實하게 遠方外國인 「이집트」, 「바빌론」의 歷史를 채록하던 希臘(그리스)의 《헤로도토스(Herodotos)》 같은 史家가 아니오. 卽 孔子 《春秋》의 尊華攘夷· 詳內略外·爲國諱恥 等의 主義를 堅守하던 頑儒라. 그러므로 朝鮮을 中國의 一部인 浙江 地方과 等視하여 《史記》에 朝鮮 兩越을 合傳하며, 또 그 朝鮮傳이란 것이 朝鮮史가 아니요, 다만 燕·齊 流寇의 首領 衛滿(위만)이 朝鮮을 侵略한 記錄일 뿐이며, 朝鮮의 燕과 戰爭한 大事實 같은 것도 匈奴傳에 東胡란 이름 아래에 記錄하여, 만일 《魏略》이 아니면 朝鮮의 일로 알 수도 없게 되었다. 班固(반고) 《漢書》의 朝鮮에 關한 記錄은 史記의 것을 抄襲하였을 뿐이며, 范曄(범엽) 《後漢書》의 朝鮮에 關한 記錄(《東夷傳》)은 《三國志》의 것을 抄襲한 中 거기다가 妄改한 것이라.(第三節에 詳論) 만일 朝鮮史의 材料될 價値가 있는 者를 구하면 兩書의 것은 모두 털끝만한 價値가 없고, 오직 曹魏末·西晋初의 史家의 著作인 陳壽(진수)의 《三國志》는 扶餘·高句麗 等의 官制·風俗과 三韓 七十餘國의 國名과 其他 모든 것을 略述하여 中國史 中 附見한 朝鮮 記錄의 가장 稱讚할 것이며, 陳壽(진수)와 同時代人 王沉(왕침)의 《魏書》에는 檀君의 이름 王儉(왕검)을 적었으며, 漁豢(어환)의 《魏略》에는 大夫禮(대부례), 朝鮮王 否, 朝鮮王 準의 略史를 적어서 近世의 《東國通鑑》·《朝鮮史略》 等에 보인 箕否(기부)·箕準(기준), 三韓 七十八國名 等이 모두 彼等의 끼친 이삭을 주은 것이다. 魏書와 魏略은 이제 亡失하여 겨우 一然(일연)의 三國遺事와 裵松之(배송지)의 「《三國志》 註」에 引用한 것이 餘存하였을 뿐이니, 어찌 可惜하지 않은가.
 
 

1.4. (四) 朝鮮人의 記錄으로 中華(중국) 史冊에 抄錄된 《三國志》의 朝鮮 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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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의 扶餘·高句麗·三韓傳 等에 쓰인 使者는 「사리」요, 沛者는 「부리」요, 對盧는 「마리」요, 樂浪은 「펴라」요, 㣘邪는 「가라」요, 安邪는 「아라」니, 이는 다 漢字의 音의 初聲이나 義의 初聲을 가져다 쓴 三國時代의 吏讀文이요 漢人의 自譯이 아닌즉, 이것이 모두 魏將 毌丘儉(관구검)이 丸都城에 入寇하였을 때 高句麗의 記錄 或 傳說을 가져다 傳한 것이 있어서 《三國志》·《魏書》·《魏略》 等 著者가 珍貴한 朝鮮史의 資料를 가졌던 것인가 한다. 다만 彼等이 朝鮮 本位의 朝鮮史를 짓지 않고 中國史 四夷傳 가운데 附錄하는 朝鮮史를 지었는즉, 그 採取한 바가 自然 踈略하였을 것이다.
 
 

1.5. (五) 《三國志》 朝鮮에 關한 記錄 全部를 信用할 수 없는 條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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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三國志》 等 書中에 있는 扶餘·三韓傳 等을 곧 高句麗 史官의 記錄과 같이 보아 珍貴品으로 사랑함이 可하나, 純全히 그렇게만 여길 수 없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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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彼等이 또한 中華(중국)人인 故로 歷代 中華(중국) 史家가 他國에 對한 病的 心理를 가져서 그 記錄 中에 非事實의 誣錄을 끼워 넣었으니, 例를 들면 《魏略》에 大秦[羅馬(로마)]의 秦字에 傅會하여 白色人種인 大秦人을 中國人의 子孫이라 하며, 辰韓의 「辰」字 音에 맞추어 辰韓은 秦人(秦始皇의 秦)이 秦의 長城役을 避하여 東遷한 者라 하여 이와 같은 妄說이 적지 않으니, 彼等을 偏信하다가는 그 欺弄의 붓에 속을 뿐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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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唐 太宗이 故意로 高句麗을 侵略하려 할 때, 自家 臣民의 高句麗에 對한 敵愾心을 鼓吹하기 爲하여 中國 古書에 보인 朝鮮에 關한 文字를 거의 다 塗改한 疑心이 없지 않으니, 이는 平壤浿水考에 詳論한 바이거니와, 朝鮮史上 所謂 三韓·四郡의 訟案이 紛紛한 것은 唐 太宗의 塗改한 書籍을 그대로 遵信함이 또한 한 原因이 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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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倒字·誤字·漏字·疊字 等이 많음이니, 例를 들어 보이면 《三國志》의 本 列傳 序에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였으나 高句麗에 烏骨城과 丸都城은 있지만, 烏丸城·骨都城은 없은즉, 대개 上文의 烏丸傳이 있음을 因하여 骨·丸 兩字를 倒換하여 烏骨·丸都를 烏丸·骨都라 한 것이며, 「馬韓傳」에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라 하였으나 「臣」의 音은 「신」이니, 臣蘇塗·臣濆活 等의 「臣」과 辰韓·辰王 等 「辰」과 같이 모두 「太」의 義요 遣支는 「크치」라 그 義가 大兄이니, 「신크치」는 곧 太大兄인즉 臣雲遣支의 「雲」字는 곧 下文 臣雲新國의 雲字를 疊寫하여 臣遣支를 臣雲遣支라 한 것이며, 辰韓弁辰傳 辰卞二十四國 內에 軍彌·馬延 兩國을 疊寫하여 二十六國이 되었으니, 以上의 것은 다 그 上文·下文에 依하여 發見할 수 있는 것이거니와, 이 外에 發見할 수 없이 된 訛·誤·倒·漏된 字도 적지 않을 것이라. 이것도 硏究上 一大 障礙라 할 것이다.
 
 

1.6. (六) 三韓에 關한 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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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은 歷來 史家의 論爭이 되어 오는 諸 問題 중 하나인 同時에, 또한 가장 重要한 問題 가장 困難한 問題라. 이제 (一) 書籍을 選擇하여 先儒와 近人의 「韓」 或 「朝鮮」 等字의 보인 글이면 모두 引用書로 보는 弊를 除하며, (二) 選擇한 書籍 中에서 다시 그 眞妄을 分揀하여 一般 誣錄을 辨正한 結果 《三國志》·《魏略》 等으로 主하며 《史記》의 匈奴傳·封禪書·朝鮮列傳으로 副하며, 國語·管子 等으로 輔하여 硏究의 材料를 삼아서 前後三韓考를 論述하려 한다.
 
 

2. 二. 前三韓, 三朝鮮의 顚末

 

2.1. (一) 三韓의 所自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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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久庵(구암 한백겸) 先生이 漢江의 南北을 갈라, 그 北은 朝鮮이 되며 四郡이 되며, 高句麗가 되고, 그 南은 三韓이 되며, 新羅·加羅·百濟 等 三國이 되었다 主張한 後, 後來 學者가 靡然風從하여 異議가 없었으나, 久庵(구암 한백겸)이 後三韓만 三韓으로 알고 前三韓이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失着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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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證據로 前三韓이 있다 하는가. 《三國史記》 新羅本紀 赫居世 元年에 「初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 是爲辰韓六部」라 하고, 三十八年에 「自辰遺民 … 無不畏懷」라 하고, 《魏略》 三韓傳에 「辰韓 … 爲流離之人 故爲馬韓所制」라 하고, 《三國志》 三韓傳에는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라 하니, 「避秦役」 三字는 이미 前節에 그 僞證됨을 辨正하였거니와, 旣述한 바 新羅本紀와 三韓傳의 말을 對照하여 보면, 辰韓은 元來 北方에서 遷來하여 馬韓의 割地를 받아 寓居한 者이며, 三韓傳에 弁韓은 없고 弁辰만 있으니, 이것은 弁韓·辰韓 兩國 遺民의 遷來한 者가 함께 雜居하여 得名한 明證이니, 그러면 辰·弁 兩韓의 移駐民이 있기 前에 慶尙左·右道가 모두 馬韓의 땅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러면 辰·弁 兩韓의 本土는 他地에서 求함이 可한 것이다.
 
 

2.2. (二) 三韓은 곧 三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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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三韓의 歷史를 말하려면 먼저 「朝鮮」이란 意義와 「三朝鮮」의 來歷을 밝힐 必要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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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朝鮮에 對하여 金鶴峯(학봉 김성일)의 朝日鮮明, 《輿地勝覽》의 東表日出, 安順菴(순암 안정복)의 鮮卑山東 … 等 各種의 解釋이 있으나, 이는 곧 中京의 義인 「가우리」로 立名한 高麗를 山高水麗의 義로 解釋한 것 같은 後世 文士의 傅會요 本義가 아니다. 「管子」에 「八千里之發朝鮮」, 「發朝鮮不朝」, 「發朝鮮之文皮」 … 等 語가 있고 《史記》와 大戴禮에 「發肅愼」이 있으니, 「發肅愼」이 곧 「發朝鮮」인 동시에 朝鮮과 肅愼의 同一한 名詞가 兩種의 譯됨이 明白한데, 乾隆帝의 《滿洲源流考》에 肅愼의 本音을 「珠申」이라 하고 管境이라 하였으니, 그러면 朝鮮의 音도 「珠申」이요 管境의 義됨이 明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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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三朝鮮은 高句麗史에 檀君·箕子·衛滿을 三朝鮮이라 하였으나, 이는 歷代를 區別하기 爲하여 假說한 三朝鮮이나 流寇 首領의 衛滿(위만)이 歷代의 하나 됨이 可笑한 일이거니와, 이밖에 따로 實有한 朝鮮이 있으니, 《史記》 朝鮮列傳에 「始全燕時에 嘗略屬眞番朝鮮」이라 한 바, 徐廣(서광)이 말하기를 眞番은 一作 眞莫이라 하고, 索隱에는 眞·番을 二國으로 証하였으니, 그러면 眞·莫도 二國이니, 眞과 番과 莫이 곧 三朝鮮이니 中國人이 他國의 名詞를 쓸 때 매양 文從字順을 求하여 長短을 任意로 하는 弊가 있으므로(佛經의 譯에 此類가 더욱 많음) 眞番莫朝鮮이라 쓰지 않고, 或 莫字를 去하여 眞番朝鮮이라 하고 或 番字를 去하여 眞莫朝鮮이라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眞·番·莫 三朝鮮이니, 眞·番·莫은 곧 辰·弁·馬요 三韓의 「韓」은 大의 義와 一의 義로 王의 名稱이 된 것이니, 乾隆의 이른바 韓은 官名이요 國名이 아니라 함이 近可한 解釋이다. 眞·番·莫이나 辰·弁·馬는 모두 「신」·「불」·「말」로 讀할 것이니, 眞·番·莫 三朝鮮은 箕準(기준) 南遷 以前 北方에 있던 前三韓이니, 眞·番·莫 三朝鮮은 「신」·「불」·「말」 三國의 義요, 辰·弁·馬 三韓은 「신」·「불」·「말」 三王의 義라. 다 같이 「신」·「불」·「말」의 譯일 것이면, 어찌하여 (一)은 眞·番·莫이 되고 또 (一)은 辰·弁·馬가 되었는가? 이는 吏讀文 草創時代에 免치 못 할 일이라. 다 같이 新羅本紀에 보인 「쇠뿔한」이지만 「舒弗邯」 「舒發翰」 「角干」의 딴 字를 쓰게 되었으며, 다 같이 高句麗 말 「마리」지만 「對盧」·「莫離支」의 딴 字를 쓰게 되었으니, 만일 職官志에 角干 一名 舒弗邯 又名 舒發翰註28)이란 記錄이 없으면 어찌 角干의 「角」이 羊角·鹿角·獐角 等의 角이 아니고, 오직 牛角인 쇠뿔의 義인 것을 알 수 있으며, 만일 「金庾信傳」에 淵蓋蘇文(연개소문)를 大對盧라 한 文字가 있는 同時에 高句麗 古記에 蓋蘇文(연개소문) 大莫離支라 한 文字가 있지 아니 하면, 어찌 對盧의 「對」의 「마차」의 初聲을 찾아서 對盧가 莫離支와 同一하게 「마리」로 發音되는 줄을 알 것이냐. 同一한 新羅本紀와 《三國古記》로도 이와 같은 錯雜이 있거늘, 하물며 六百年 前 秦開(진개)가 入寇하였을 때 얻어 傳한 前三韓의 이름 「신」·「불」·「말」이 燕國의 《史記》로부터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에 옮기어 眞·番·莫이 되고, 六百年 後 毌丘儉(관구검)이 入寇하였을 때 주워간 後三韓의 이름 「신」·「불」·「말」이 辰·弁·馬가 됨이야, 무슨 奇怪하게 여길 것이 있으랴. 「管子」의 發朝鮮은 三朝鮮 中의 番朝鮮일 것이며 說文의 樂浪番國도 番朝鮮일 것이며, 大祚榮(대조영)의 國號 震은 辰韓이나 辰國의 「辰」에서 弓裔(궁예)의 國號 摩震은 馬韓·辰韓에서 取義함일 것이며, 《宋書》에는 辰韓·馬韓을 秦韓·慕韓이라 하여 그 取用한 漢字가 서로 같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은 매양 沿革으로부터 名義를 찾을 것이다.
 
 

2.3. (三) 前三韓의 名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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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朝鮮의 名稱은 三京에서 비롯한 것이니, 三京은 高麗史 神誌秘詞에 보인 扶疏樑·五德地·百牙岡이니 이른바 檀君 三京이 이것이오. 三京은 朝鮮 古代 宗敎의 對象인 三神으로 말미암아 設始한 것이니, 三神은 곧 古記에 보인 바 桓因·桓雄·王儉 三神이다. 다만 그 古記가 佛敎徒의 選集한 바이므로 加瑟羅를 迦葉原으로 毗處王을 炤智王으로 其他 … 모든 名詞를 佛書의 것으로 妄改하듯이, 桓因·桓雄 兩 名詞는 「法華經」의 釋提桓因이나 釋迦의 別名인 大雄에 맞추어 改作한 이름이요 本來의 名稱은 아니다. 《史記》 封禪書에 「三一神者天一地一太一 … 三一之中太一最貴 … 五帝者太一之佐」라 하니, 天一 地一 太一은 곧 三神의 別名이며, 屈原(굴원)의 九歌에 「東皇太一」이란 歌名이 있는즉 太一 等 三神의 名이 司馬遷(사마천) 以前부터 中國에 流行되었음을 볼 것이며, 「啓棘賓商九歌是歌」의 句로 推하면 東皇太一의 歌名이 屈原(굴원) 以前의 古代로부터 中國 沿海 民間에 流行되었음을 볼 것이니, 대개 朝鮮 古代에 山東·江蘇 等地에 移殖한 人民 - 곧 彼史에 이른바, 九夷가 三神의 名을 傳하여 漢族이 漢字로 譯하여 或은 歌名에 或은 信條에 오름이니, 「신」의 譯이 太됨은 이미 前述하였거니와 太一은 「신한」의 義요 天一은 「말한」의 義요 地一은 「불한」의 義일듯하니, 「신」·「불」·「말」 三韓에 「신한」이 首位에 居함은 封禪書의 「三一之中太一最貴」의 義며 「신한」의 下에 大官 五人을 두어 五加라 稱하니, 이는 五個의 國務大臣이오. 全國을 東南西北中 五部에 나누어 五加가 軍民 兩政을 分掌하고, 時時로 각기 本道에 出駐하여 「사리」라 稱하니, 薩·使者·舍利 等이 그 譯이니 「사리」는 出駐의 義일 것이며, 亂時에는 五人이 戰事를 分擔한 五大將이 되어 「크치」라 稱하니, 遣支·遣智·儉側·大兄 等이 그 譯이니 「크치」는 大將의 義일 것이다. 五臣이 「신한」을 輔佐함은 封禪書에 「五帝者太一之佐」의 義니, 이는 上古에 迷信의 神界를 人事에 應用하여 三王·五加가 三京·五部를 管轄한 三頭·五臂의 官制라. 그 詳細는 他日 官制考에 別論하려니와, 三國時代의 辰王·太王·大王은 다 「신한」의 譯이니, 高句麗는 太王의 下에 「부리」·「마리」의 左右 輔를 두어 三一을 擬하며 國內·平壤·漢城을 三京이라 하고, 全國은 順那·消那·灌那·絶那·桂那 五部에 나누니 또한 朝鮮의 遺型이요, 新羅와 百濟는 三頭·五臂의 一臂를 加하여 三頭·六臂가 된 것이다.
 
 

2.4. (四) 前三韓創立者檀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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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近의 刊行된 《東史年表》에 「鷄林類事曰檀倍達·國那羅·君壬儉」이라 하여 檀君을 「倍達那羅壬儉」이라 解하였으나, 鷄林類事는 이미 亡失하고 오직 陶宗儀의 說郛에 揭載한 高麗의 말 몇 마디뿐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 그런 말이 없으니, 그 著者가 어디서 이를 引用하였는지 遽然히 取信하기 어렵다. 《東史綱目》 考異에는 《三國遺事》에 神壇의 樹下에 降하여 號를 檀君이라 하였으나, 《高麗史》 地理志에는 檀木 下에 降하여 號를 檀君이라 하였다 하였는데, 《東國通鑑》에서 《高麗史》를 좇아 檀君이라 하였으므로 이제 此를 從한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檀君의 「壇이 元來 木邊의 檀이 아니요 土邊의 壇」인 것은, 順菴(순암 안정복) 先生 같은 深沉한 學者가 是非를 캐지 않고 勢力을 따랐으니 恠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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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 三韓傳에 據하면, 馬韓 列國이 각기 別邑을 設하여 蘇塗를 세우고, 天神의 主祭者인 一人을 두어 天君이라 號하며 有罪者가 蘇塗의 邑에 逃入하면 索還치 못한다고 하고, 또 그 揭載한 五十四國 가운데 「臣蘇塗」란 一國이 있으니, 蘇塗는 「수두」니 「수두」는 古語에 神壇을 가리키는 말이니, 列國의 「수두」는 곧 列國의 神壇이요, 臣蘇塗는 「신수두」니 列國의 神壇을 總管하는 最大神壇이 있는 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現今까지 關北 地方에는 數村이 聯合하여 一大 樹林을 周圍하여 「금줄」을 매고 그 以內를 神壇이라 稱하여 大祭를 行하니, 비록 古今의 變遷이 없지 못할 것이나 오히려 그 儀式의 一斑을 傳한 것이니, 대개 檀君王儉이 이와 같은 樹林의 神壇 「수두」 下에서 出現하여 時代의 方便을 따라 三神五帝의 神界를 說하며, 自己가 곧 三神의 一인 「신한」의 化身이라 稱하고 朝鮮이라 云하는 雛形的 國家를 建함이니, 그 神壇이 土築이나 石築이 아니요 自然한 樹林의 神壇인즉, 土邊의 壇을 써서 檀君이라 하지 않고 木邊의 檀을 써서 檀君이라 한다 하면, 이는 紫檀·白檀의 「檀」이 아니라 새로 字義를 내어 수두나무 「檀」이라 함이 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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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傳에 보면, 匈奴는 祭壇 있는 곳을 休塗國이라 하니, 休屠는 곧 「수두」일 것이요 또한 樹林의 祭壇이므로, 漢人이 이를 蘢城(衛靑傳)이라 하고, 後來에 便宜로 草頭를 去하여 龍城이라 하였으니, 《史記》·《漢書》·《後漢書》·《晋書》 等에 보인 모든 龍城이 이것이니, 匈奴도 朝鮮의 民族과 元來 同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太古의 或 同一한 治下에 있던 時代가 있는 듯하다. 어떤 때는 「신수두」로써 三朝鮮 全土의 名稱을 삼은 故로 神誌의 震檀九變圖가 있음이니, 震壇의 「震」은 「신수두」의 「신」의 音이요, 震壇의 「壇」은 「신수두」의 「수두」의 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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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儉(왕검)은 王의 半義 「님」을 取하고 儉의 全音 「금」을 取하여 「님금」으로 讀하던 것이니, 或 「王」字가 이미 「님금」의 義인데 何故로 半義만 取하였는가 하겠지만, 《三國史記》 炤智의 註에 一作毗處라 함을 보면 「炤」字가 이미 「비치」다는 義인데, 구태여 (智)자를 加하여 「비치」로 讀함과 같은 것이니, 《三國史記》 中에 이와 같은 例를 찾으려면 甚히 많으나 煩擧치 않는다. 朝鮮 一世 建國者의 이름이 「님금」인 故로 歷代 帝王의 尊稱을 님금이라 한 것이니, 이는 奇怪한 支那(중국) 周公의 諱名法이 輸入되기 以前 일이며, 「님금」은 神壇 主祭者의 稱이요 「신한」은 政治 元首의 稱이나, 이때는 神壇 主祭者가 곧 政治의 元首가 되는 때인즉 님금이 곧 신한의 職權을 幷有하였을 것은 勿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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或은 말이 印度 梵語의 스투파(英, stupa)가 朝鮮에 들어와 「수두」가 되고, 日本에 들어가 「소도바」가 되고, 中國에서 「塔」이 되었다 하니, 이것도 一種 參考할 말은 되나, 그러나 一二 偶同으로써 그 所自出을 判定함은 너무 急遽한 議論이라 할 것이다. 希臘(그리스)史를 讀하면 中央의 大 「떨피(Delphi)」 神殿을 가진 「떨피(Delphi)」 國이 있고, 列國에 각기 小 「떨피(Delphi)」의 神殿이 있었다 하니, 이것이 朝鮮의 「신수두」와 같지 않은가. 波斯(페르시아)史를 讀하면 全國을 統御하는 大王이 있고, 大王下에 諸 小王이 있었다 하니, 이것이 三國時代 太王의 下에 各 小王이 있음과 같지 않은가. 西洋 中古에 耶蘇敎(예수교)의 武士團에서 婦人으로써 敎師를 삼았다 하니, 이것이 新羅의 源花와 같지 않은가. 埃及(이집트) 古代에 太陽日의 數인 三百六十餘를 쓰기를 좋아하여 나일江의 本名에도 三百六十餘란 意味가 있다 하니, 檀君 古記의 「主穀主命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事」와 《輿地勝覽》에 記한 妙香山 古蹟의 「三百六十餘宮」이 또한 그와 같지 않은가. 이는 모두 本論의 範圍가 아니라 姑舍하거니와, 歷史는 時代와 境遇를 따라서 成立하는 것이니, 비록 煩鎖한 迷信의 記錄이지만 「수두」와 「수두」의 敎義에서 나온 三京·五部의 建設된 原因을 알아야 三朝鮮의 古史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 右와 같이 대강 陳述하였다.
 
 

2.5. (五) 前三韓의 疆域과 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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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陳述한 것은 겨우 前三韓 곧 三朝鮮의 存在한 證實과 그 建立된 原因과 그 國制의 大略뿐이거니와, 이에서 따라오는 三個 問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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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三朝鮮의 範圍다. 範圍에 또 兩別이 있으니, 一은 三朝鮮 各自의 範圍요, 二는 三朝鮮 全體의 範圍다. 前者의 區別은 明言할 수 없으나 《滿洲源流考》에 遼東의 番汗縣을 弁韓의 故地로 指定함이 近理하니, 대개 三朝鮮 中 「불한」의 管境이 가장 中國과 密邇하기 때문에, 發朝鮮이란 名詞가 가장 먼저 中國人의 書籍에 보인 것이다. 燕王 喜가 朝鮮을 侵畧하여 永平府의 盧龍縣을 遼西라 하고, 그 以東을 遼東이라 稱하였으니, 「불한」의 서울이 當時에 內遷하였으나(下文에 詳論) 當初에는 遼河 以西와 開原 以北이 모두 番朝鮮의 舊壤이었을 것이며, 後三韓 中 辰·弁 兩韓은 遷來한 것이나 馬韓은 本土에 있던 것이니, 馬韓의 前身인 莫朝鮮은 알기가 쉽다 할 것이나, 다만 衛滿(위만)의 亂에 臨陣江 以北을 全失하였으니, 그 本土의 全體로 말하면 대개 鴨錄 以東이 모두 舊壤이었을 것이며, 「신한」의 舊壤은 가장 摸捉할 수 없으나, 신한은 임금의 兼任인즉 王儉城 卽 今 海城縣이 그 서울이라 하면 遼東半島와 吉林 等地가 곧 「신한」의 部分인 眞朝鮮의 舊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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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三朝鮮이 截然 各別한 國家가 아니요, 다만 「신한」의 統治 下에 若干의 區別을 가진 國家가 될 뿐이다.
 
37
《東國總目》의 「檀君疆域北至黑龍江南至鳥嶺」이 三朝鮮 全體의 彊域이 될 것이나, 黑龍江·鳥嶺 等은 古代 名稱이 아닌즉 古史에서 나온 記錄이 아니요 後人의 臆說이다. 그러나 後三韓의 辰·弁이 遷來하기 以前에는 鳥嶺 以南이 거의 荒落하여 人居가 없었을 것이니, 總目의 臆說이 대개 近理하며 《文獻備考》에 孤竹(永平府)이 春秋 以後에 朝鮮 所有가 되었다 하였으나, 이는 伯夷를 漢族으로 認하는 同時에 그 本國인 孤竹을 漢族의 國으로 認한 것이다. 乾隆(건륭)의 《圖書集成》에는 孤竹을 北夷라 하며, 顧炎武(고염무)의 《修文備史》에는 孤竹을 九夷의 一이라 하였으니, 「夷」가 비록 茫漠한 名詞이나 漢族이 아님은 明白하니, 秦開戰爭 以前에는 孤竹이 朝鮮의 一部이던 것도 明白하다 할 것이며, 《史記》 匈奴傳에 「直上谷以往者東接濊貊朝鮮」이라 하였으니, 朝鮮과 中國과 匈奴의 分界를 이로써 大綱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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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는 三朝鮮의 年代다. 今人이 普通 朝鮮 建國부터 前甲子까지 四千二百五十七年이라 하니, 王儉(왕검) 以後로부터 東北 扶餘 分立 以前까지 그 사이 茫漠한 長歲月의 事蹟이 全部 殘缺하였는데, 이것을 어디서 考證하였는가 하면, 《古記》에 「檀君與堯並立於戊辰」이라 한 것을 據하고, 邵康節 《經世書(황극경세서)》의 唐堯 以來 年代表에 依하여 定한 年祚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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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經世書》의 적힌 年代를 믿을 것이냐. 四柱 보는 者가 남의 未來의 行年을 내면 一歲부터 七十歲 八十歲까지 내지만 그 行年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니, 中國 年代를 司馬遷(사마천) 《史記》에 周召共和로부터 年表를 비롯함은 그 以前 歷年을 알 수 없는 까닭이거늘, 邵康節(소강절)이 自己의 자랑하는 象數學으로 아무 證據도 없이 商이 幾百 幾十歲, 周가 幾百 幾十歲, 甚至於 某帝는 在位 若干歲, 某王은 在位 若干歲 … 等 古國朝와 古帝王의 四柱를 내었으니, 이러한 것으로 證實을 삼아 中國 年代 中 唐堯의 紀元에 對照하여 檀君의 年代를 알려고 함은 愚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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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의 記錄으로부터 傳한 《魏書》의 「往在二千歲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이 本文의 全部를 잃고 오직 十數字의 斷句로 傳한즉, 遵信할만한 確實한 가치가 있고 없음을 모르나, 오히려 朝鮮의 古記라 한즉 高句麗로부터 그 以前 二千年이면 대개 距今 四千年 內外니, 이와 같은 成數나 存記함이 可하며 箕子(기자)도 《經世書》의 周 武王 年代와 對照하여 距今 幾年이라. 하지만 武王 年代도 또한 唐堯의 年代와 같으며 奇氏·鮮于氏의 族譜에 因하여 箕子(기자)를 太祖 文聖王이라 하고, 그 以下 馬韓까지의 謚號와 歷年이 詳備하나 그러나 太祖·文聖 等의 謚가 上古에 있지 않으며, 或은 後王의 追崇이라 하나 朝鮮에서 謚法을 씀이 三國 末葉에 비롯하였거늘, 이제 그 이전 馬韓 때 謚法이 있었다함도 不成의 設이니, 箕子(기자)는 距今 三千年 內外에 朝鮮에 건너온 인물로만 앎이 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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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은 朝鮮의 興亡 變遷한 事蹟이다. 이는 材料가 硏究의 餘地를 주지 않는 가장 難問題이나 이 問題를 또한 三分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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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檀君 箕子(기자)의 替代 卽 箕子(기자)가 一個 中國 亡命客으로 들어오자 어떻게 壇君을 代하여 王이 되었는가의 問題다. 壇은 「수두」요 「수두」는 古代에 朝鮮 全體를 總稱한 이름임은 이미 前述하였거니와, 그 때 帝王은 오직 第一世 王儉(왕검)과 第二世 夫婁(부루)가 《古記》에 보일 뿐이오. 箕子(기자)와 그 後裔라 云하는 朝鮮王 否, 朝鮮王 準은 朝鮮 史略에 보였으나, 其實 箕子(기자)의 일은 《史記》·《漢書》와 小說類의 三才圖會에서, 否와 準의 일은 《魏略》에서 抄出한 것뿐이다. 李朝 以前의 朝鮮人의 붓으로 쓴 箕子(기자)의 事實은 겨우 《三國遺事》에 「壇君 … 避箕子 …」의 十數字이며, 《三國史記》에 「箕子受封於周室」의 七字가 쓰였으니, 이것은 《史記》에 적힌 것을 抄錄한 것이라. 新羅 末에 唯一無二한 中國 崇拜者로 帝王 年代曆을 지은 一種 史家 崔致遠(최치원)도 일찍 한마디 말도 箕子(기자)에게 미침이 없음은 何故이며, 《魏書》에 檀君王儉을 記하였는데, 그 同時의 著作인 《三國志》와 《魏略》에는 王儉(왕검)을 빼고 箕子(기자)만 載하여 扶餘·高句麗 等의 文明을 箕子(기자)에 歸功하였음은 何故이며, 《遺事(삼국유사)》의 말과 같이 檀君이 位를 退하고 箕子(기자)에게 주웠다 하면 神壇 樹林의 權威가 이미 衰謝한 徵候이거니, 箕子(기자) 以後 千餘年에 解慕漱(해모수)·解夫婁(해부루)·高朱蒙(고주몽)이 모두 檀君 或 檀君子라 稱함은 何故이며, 또는 三國 初葉까지 朝鮮 全體를 震壇이라 稱하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何故인가. 中國史에 朝鮮에 關한 무슨 말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다 朝鮮史 어느 冊張에 집어넣고, 만일 彼我의 記錄이 서로 矛盾되면 自家의 推測으로 一·二字를 改正 或 添附하여 없는 事實을 捏造함은 歷代 史家의 慣習이니, 《遺事(삼국유사)》에 「壇君避箕子」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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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明白한 反對의 證據가 없는 以上에는 一種 疑問으로 古代의 記錄을 깨치지 못할 것이라. 아직 特別한 發見이 있기 前에는 箕氏 年代를 그대로 두고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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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三朝鮮의 結局 卽 三朝鮮이 一時에 共亡하였느냐, 前後에 各亡하였느냐의 問題다. 《史記》 朝鮮傳에 「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이라 하니, 이것이 아마 三朝鮮의 最後일 것이다. 이는 곧 秦開(진개)가 入寇하여 滿番汗 以北 二千里를 沒失하던 때의 일이다. 滿番汗은 곧 《漢書》 地理志에 보인 文番汗의 兩縣이요, 番汗은 前述한 《滿洲源流考》에 이른바 弁韓의 舊址 卽 「불한」의 서울이다. 近世의 先儒들이 二千里를 誤證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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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番汗을 大同江 以南에 와서 찾았으므로 拙著 《平壤浿水考》에 이미 明白히 辨證하여 今 大同府부터 熱河 等地를 지나 遼東까지 二千里임을 論述하였으니, 여기에 더 複載치 않지만, 이는 三朝鮮 建國 以後 未曾有한 對外 戰爭의 失敗며 三頭政治 崩潰의 動機가 됨이다. 「진조선」(眞朝鮮)이 崩潰하여 三國이 되니, 其一은 興京縣·桓仁縣 等地로 들어가 「불조선」(番朝鮮) 遺民과 聯合하여 眞番國이 되고, 又一은 慶尙右道로 들어와 弁辰國이 되니 前者는 「신조선」 遺民이 主가 되고, 「불조선」 遺民이 副가 되어 眞番이라 이름하고 後者는 「불조선」 遺民이 主가 되고, 「신조선」 遺民이 副가 되어 弁辰이라 이름함이니 이는 大槪 人口의 多寡에서 先後 次序를 定한 이름인 듯하고, 又一은 單純한 「신조선」의 遺民들이 慶尙左道로 건너가 辰韓 六部를 建設하니, 이 가운데 辰韓과 弁辰은 다 馬韓이 南遷한 뒤의 일이라, 次節 後三韓考에 詳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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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 兩朝鮮의 또 一部分 人民이 後來에 燕寇 衛滿(위만)에게 趨附하여 衛滿 朝鮮이 成立하니, 衛滿傳에 이른바 「役屬眞番朝鮮蠻夷」와 「侵降其旁小邑眞番臨屯皆來服屬」이 이를 가리킴이라. 「말조선」은 「신·불」 兩朝鮮의 大敗 滅亡한 끝에 홀로 秦開(진개)의 防禦에 成功하여 朝鮮이란 이름을 保全하고, 또 朝鮮王 否는 秦始皇의 中國 統一 後 萬里長城의 威臽炎이 四海를 戰慄케 하는 때 精兵을 選하여 要塞를 守하여 半壁의 江山이라도 保守함이니, 不肖子 準(준)이 繼位하여 衛滿(위만)을 信任하여 西鄙를 割與하여 宿衛를 許하다가, 마침내 反攻을 만나 남방으로 달아나 朝鮮이란 이름을 버리고 다만 「말한」이라 稱하니, 《三國志》와 《三國史記》의 이른바 馬韓이니, 馬韓·辰韓·弁辰은 다 前三韓 後身으로 南方에 再設된 三韓이다. 나의 創名으로 後三韓 或 南三韓이라 定하고 그 詳細는 次節 後三韓考에 보인다.
 
 

3. 三. 後三韓 ― 《三國志》에 보인 羅加濟 三國

 

3.1. (一) 後三韓 考證에 對한 先儒의 誤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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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久庵(구암 한백겸)·安順菴(순암 안정복)·丁茶山(다산 정약용)·韓大淵(한대연) 叔姪 等 諸 先生이 비록 前三韓의 存在한 것을 認定치 못하였으나, 辰·弁·馬 三韓을 곧 新羅·加羅·百濟라 하여 崔孤雲(고운 최치원)의 羅·麗·濟 三國에 分配한 三國說을 劈破하여 後三韓의 疆域을 整頓한 功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 中에도 後生 小子의 校正을 待하는 多少 誤謬가 없지 않으니, 그 諸般 誤謬가 以下에 列擧한 三者의 大誤謬에서 原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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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參考書의 誤니, 范曄(범엽)의 《後漢書》의 東夷列傳은 곧 陳壽(진수) 《三國志》의 東夷列傳을 抄錄한 者니 그 實例의 一을 들어 보인다. 《三國志》 高句麗傳에 「王頎別遣將追討宮 盡其東界 問其耆老 海東復有人否 … 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 兩袖長三尺 … 有一人項中復有面」이라 한 바, 王頎(왕기)는 曹魏의 將이요 宮은 高句麗 東川王의 이름 位宮의 略字인즉, 다 後漢 以後의 人인 故로 王頎(왕기) 以下 十三字를 刪去하고 高句麗 耆老의 自言으로 作하여 《三國志》의 것을 抄錄하였다. 이 같은 史的 價値 없는 妖怪談의 抄錄이야 우리에게 何關이겠는가마는 抄錄뿐이면 오히려 可하나 이제 重大한 記錄을 改竄하여 《三國志》에는 「準 … 將其宮人 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準後滅絶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라 하였거늘, 《後漢書》에는 「準 … 將其餘衆數千人 走入海 攻馬韓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復自立爲辰王」이라 하였다. 陳壽(진수)·魚豢(어환)·王沈(왕침) 等은 다 毌丘儉(관구검)과 同時의 人으로 儉(관구검)이 가져간 高句麗의 記錄을 得見한 者일 것이니, 曄(범엽)의 改竄이 어찌 狂擧가 아니랴? 그런데 先儒들이 다만 後漢이 三國의 前代인 것만 알고 《後漢書》 著者 范曄(범엽)이 《三國志》 著者 陳壽(진수)의 後인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던지, 매양 《後漢書》에 보인 三韓으로 主要 材料를 삼고 《三國志》는 도리어 補助로 引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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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偏信의 誤니, 唐 太宗의 中國 古史 中 朝鮮에 關한 記載를 妄刪 或 僞造하였음은 이미 前述하였거니와 그 뿐 아니라 唐 太宗의 百餘年 後 唐 德宗 때의 賈耽(가탐)은 그의 所謂 四夷 硏究의 專門家로서 더욱 朝鮮과 中國 關係를 잘 아는 者였는데, 그 著書 四夷述의 序에 「玄菟樂浪 陷於漢建安之際」라 하여 二郡이 高句麗에게 陷落됨을 歎恨하였거늘, 이제 《後漢書」에는 그와 비슷한 말도 없고, 《三國志」에는 公孫康(공손강)이 屯有縣 以南의 地를 分하여 帶方郡을 삼았다 할 뿐이며, 또 魏 明帝(曹睿)가 帶方太守 劉昕(유흔)과 樂浪太守 鮮于嗣(선우사)를 보내어 海를 越하여 二郡을 定하였다 하여, 帶方·樂浪이 일찍이 公孫淵(공손연)에 陷落되었음을 말하였으나, 그러나 帶方이 玄菟가 아니며 公孫淵(공손연)이 高句麗가 아니니, 이것을 곧 賈耽(가탐)의 말한 바로 看做함이 不可하니, 그러면 陳壽(진수)·范曄(범엽) 等이 種族的 偏見으로 玄菟·樂浪의 失陷한 大事를 闕함이 아니면 곧 後人의 妄刪이며, 또 三韓傳에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 二郡遂滅韓」이라 했으니, 下文에 據하면 辰韓의 全國 數가 十二國인데 八國을 奪하여 四國만 餘했다가 後에 그 四國까지 滅함이니, 그러면 新羅 王國이 어디에 存在했던가? 그런데 先儒들은 매양 古記의 斷爛한 文字는 다 버리고 오직 《後漢書》·《三國志》 等을 據하여 故事를 斷定하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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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解釋의 誤니, 辰韓 辰王 等의 「辰」과 臣蘇塗·臣濆活·臣智·臣遣支·臣雲新 等의 「臣」은 그 音이 「신」인데, 元의 義요 總의 義로 三國 時人이 이를 太라 譯한 者이며, 卑離는 「불」이니 平地의 義요 都會의 義로 百濟 地理志의 夫里·扶餘 等이 다 同音同義며, 狗邪·安邪·彌烏馬邪 等의 邪는 다 그 音이 「라」니, 駕洛의 「洛」과 加羅의 「羅」가 同音이거늘, 先儒들이 吏讀字의 解釋을 몰랐으며, 「準 … 入海」는 곧 朝鮮 南方을 가리킨 것이니, 中國人이 古代에 島나 半島를 모두 海 或 海中이라 한 故로 朝鮮에 應用한 것이니, 《漢書》에 「朝鮮在海之中越之象是也》와 「博物志」에 「燕伐之朝鮮亡入海」 等에서 볼 수 있거늘, 先儒들은 매양 準을 浮海南奔으로 認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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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로 因하여 誤謬가 생긴 것이 또 二니, (一) 馬韓은 前後 三韓을 通하여 箕氏 一姓-否와 準을 箕子(기자)의 後裔라 하면, -先儒들이 《後漢書》에 據하여 準의 攻破하기 以前의 馬韓을 原有의 馬韓이라 하고, 攻破한 馬韓을 箕氏의 所有한 馬韓이라 하고, 辰王이라 自稱한 馬韓을 箕氏 滅絶한 뒤의 馬韓이라 하여 三個의 馬韓으로 나누며, (二) 先儒의 말에 中國 二十一史의 朝鮮列傳이 모두 當代 幷立한 隣國을 記載한 것인즉, 《後漢書》나 《三國志》의 三韓도 곧 中國 後漢과 三國時代에 相當한 羅·加·濟 三國이요. 그 百年 或 千年 前의 三韓이 아니라 하여 歷代 史家가 《後漢書》와 《三國志》에 보인 事實을 羅·加·濟 三國 以前에 向하여 찾으려던 愚擧를 喝破함은 實로 千確萬確한 見解라 할 것이나, 다만 《後漢書》로 因하여 馬韓을 三個로 나누어 辰王의 馬韓을 最後의 馬韓으로 認하며, 이에 百濟가 措置한 곳이 없으므로, 드디어 百濟本記의 溫祚(온조)가 馬韓을 滅한 事實을 否認하고 卽 陳壽(진수)·范曄(범엽)이 著書하던 때, 百濟 建國 二百年 後까지도 馬韓이 따로 存在하였음을 主張하여 架空의 筆로 前代의 二百年 壽命을 延長하고, 그리하여 辰·弁 兩韓를 新羅와 加羅로 認定하는 同時에 百濟만 三韓 圈外에 逐出하여 年代와 事實의 大錯誤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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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로 因하여 誤謬가 생긴 것이 또 二니, (一) 辰韓을 秦人의 避役者라 한 妄證은 이미 辨論하였거니와, 先儒들은 陳壽(진수)·范曄(범엽)의 記錄을 信用하여 드디어 辰韓을 中國人의 子孫으로 認하는 同時에, 그러면 어찌하여 辰韓에 中國人의 言語·文字와는 비슷하지도 않은 「斯盧」·「己秖」·「不斯」 等 國의 國名이 있느냐의 疑問이 있으므로, 이에 《海東繹史》 地理考에는 辰韓의 名은 秦人의 避役東來者로 말미암아 나고, 六部의 名은 衛滿(위만)의 第二世인 右渠(우거)의 臣民들이 移住한 뒤 始한 줄로 말하였으니, 이같이 辰韓이 秦人의 移住한 韓國이라 解할진대 《三國史記》 赫居世(혁거세) 元年에 「辰人以瓠爲朴」 「居西干辰言長者之稱」의 「辰」도 모두 奏人이란 「辰」일 것인데, 語源學 上으로 考究하여 「朴」이나 「居西干」이 결코 古代 中國人의 言語가 아니었으며, (二) 《三國志》에는 「侯準旣僣號稱王》이라 하여 箕子(기자) 子孫이 代代 侯爵으로 오다가 準에 至하여 비로소 稱王한 줄로 말하며, 《魏略》에는 「朝鮮候見周衰燕自尊爲王 … 亦自稱王」이라 하였으니, 《三國志》나 《魏略》에 적힌 事實이 다 같이 毌丘儉(관구검)의 所傳이건만, 此 一節이 다 各各 나름대로, 각기 尊中國의 習慣으로 事實에 違反되는 事實을 쓴 것이 明白하거늘, 이런 辨駁이 없음은 枯舍하고, 先儒 中 或 辰王의 辰字를 人臣의 臣으로 作하여, 臣屬한 侯王의 義로 妄解한 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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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으로 因하여 생긴 誤謬가 더욱 許多하니, 이제 略擧하면 (一) 辰國을 辰韓 以外에서 찾아 三韓 以前에 「辰」이란 一國이 있는 줄로 認하며, (二) 辰王을 太王 以外에 찾아 辰國이란 특별한 一國의 王으로 誤認하였으며, (三) 따라서 辰王·臣蘇塗 等의 本意를 몰라 三韓의 官制·風俗 等을 거의 다 誤証하였으며, (四) 漢江 南北을 갈라 북은 朝鮮이 되고 南은 辰國 或 韓國이 되었다 하여 古來로 南北의 種族이 各別한 것으로 誤証하였으며, (五) 卑離와 夫里를 同音으로 보지 못하였으므로 百濟 以外에서 馬韓을 찾았을 뿐더러 馬韓 列國의 位置를 많이 誤證하였으며, (六) 以上과 같이 吏讀字를 辨解치 못하므로 三韓傳 中에 「言語不與馬韓同」 「不諳句麗言語」 等의 記錄을 過信하여 異字로 쓴 同名을 發見치 못하였으며, (七) 「海」字의 誤解 같은 것은 비록 그다지 重要치 않으나 陸行南走로 認하면 舊 平壤으로부터 鴨綠江을 건너 現今의 平安·黃海·京畿·忠淸 等 道를 지나 準의 新都라 하는 金馬國 - 益山까지 그 中間 千餘里가 모두 準의 臣民인 故로 左右 宮人을 거느리고 逃亡하는 敗殘한 帝王 行次가 無恙함인 줄 알 것이며, 浮海南走라 하면 이와 反對로 陸行의 危險을 聯想할 수 있는 同時에 舊都와 新都 中間 모든 地方이 準의 管境이 아니었던가 하는 疑問도 發生할 것이다.
 
 

3.2. (二) 中三韓의 略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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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文은 先儒들의 誤謬를 指摘한 것뿐이다. 이제부터 後三韓의 歷史를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眞·番·莫을 三朝鮮이라 하고 新羅·加羅·百濟를 後三韓이라 하면, 眞·番·莫 三朝鮮은 이미 滅亡하고 羅·加·濟 三國은 아직 建設되기 前에 準의 馬韓과 眞番 兩國의 遺民이 建設한 辰韓과 弁辰의 兩 自治 部落은 무엇이라 이름할까. 佛家에서 前身은 已脫하고 後身을 未得한 그 中間 暫有의 身을 中陰身이라 하니, 이것은 前後 兩 三韓의 中陰身이라 함이 可하나, 지금 다만 中三韓이라 이름하고, 後三韓의 歷史를 말하기 前에 먼저 中三韓의 歷史를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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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三韓의 歷史를 兩段에 分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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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은 馬韓의 建國이다. 準이 王儉城을 버리고 金馬郡에 遷都하여 어찌하여 朝鮮의 舊名으로 國號를 삼지 않았는가. 이는 衛滿(위만)의 朝鮮과 區別하기 爲함일 것이다. 古代에 遷都하면 매양 그 地方의 이름으로 國名을 삼았으니, 百濟가 泗沘扶餘에 遷都하여 國名을 곧 泗沘扶餘라 한 類가 그것이니, 準이 金馬郡에 遷都하여 어찌 金馬國이라 稱하지 않았는가. 金馬郡은 三韓傳 中의 金馬郡이라 함은 百濟 中葉 以後 封建制를 廢止한 뒤의 郡名이라. 新羅가 百濟를 滅하고 그 郡名을 仍用한 故로 新羅 文士들이 古記를 述할 때 準이 金馬郡에 遷都하였다 함이요, 準의 때부터 百濟 中葉까지는 乾馬國 或 金馬國이라 稱하였을 것이니, 準의 南遷 後에 金馬國의 國名을 仍稱하였는지 모르나, 後人들이 古史를 追述할 때 準의 位號인 「말한」으로 그 國名을 삼은 것이다. 先儒들이 모두 金馬郡을 三韓傳 中의 乾馬國으로 認하지 않고 月支國으로 認함은 何故인가. 이는 前述한 바 范曄(범엽)의 「攻破馬韓」·「馬韓人復自立爲辰王」 等의 僞證에 속아서 三韓傳 中의 辰·弁 兩韓은 新羅와 加羅로 認하면서도 馬韓은 百濟 以前의 馬韓으로 認한 故로, 三韓傳 中 百濟에 關한 事實을 準의 事實로 誤證하였으나, 그러나 「辰王治月支國」이라 한 辰王은 百濟의 太王이요 月支는 百濟의 慰禮城이니, 「慰禮」의 音이 「月」이 되고 城의 義가 「支」(音티)가 됨이다. 《後漢書》의 「攻破馬韓」 等 說을 范曄(범엽)의 僞証이라 하여 準의 遷都 以前에는 南方에 馬韓의 名稱이 없었다함은 그럴 듯하나, 그러나 《三國志》의 「準 … 走入海 居韓地自號韓王」은 何說인가. 이는 上文의 「韓在帶方之南」을 받아서 말한 것으로 韓地에 入居하여 此地에 王이라 號하였다 함이요, 그 以前에 韓國이 있다 함이 아니다. 萬一 嚴格하게 文句와 事實의 符合만 求할 것 같으면 上文에 이미 「辰韓者古之辰國也」라 하였으니, 辰韓의 「辰」이 辰國의 「辰」에서 나옴이거늘, 何故로 下文에 「辰韓 … 耆老 … 自言 … 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 … 今有名之爲秦韓」이라 하여, 秦始皇의 「秦」으로 辰韓의 「辰」을 만들어 上下文의 事實이 서로 矛盾되게 하였는가? 이미 「韓有三種一曰馬韓」이라 하였으면 下面에 마땅히 馬韓의 得名한 始初나 原因을 말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이 같이 前後 文勢가 貫通치 아니하였는가? 그러므로 더욱 唐 太宗 以來로 古史 안에 妄刪 或 僞證이 많이 加入하였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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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는 辰·弁 兩韓의 建設과 馬韓의 革姓이다. 辰韓은 純全히 「신한」 遺民의 移住者가 建設한 바이고, 弁·辰은 「불한」과 「신한」 兩國 遺民의 移住者가 共同 建設한 바임은 이미 前述하였거니와, 여기에 一言코자 하는 바는 箕氏 馬韓의 滅亡한 事實이다. 大槪 箕氏 末葉에는 남에게 土地를 割與하다가 滅亡하였으니, 準이 이미 西鄙 百里를 衛滿(위만)에게 割與하고는, 마침내 衛滿에게 쫓기어 南方에 와서 馬韓이 되며, 馬韓이 된 뒤에도 「신한」 移住民에게 東界를 割與하고(辰韓傳에 割其東界與지란 句節로 알 수 있음), 또 「불한」·「신한」 兩國 移住民에게 東南界를 割與하다가(이는 史에 보이지 않았으나 事理로 推知할 수 있음) 마침내 新羅 赫居世가 辰韓과 弁辰을 聯合하여 對抗하니, 드디어 東界와 東南界를 幷失하였으며, 그리고 最終으로 卒本川의 有數한 富豪의 寡婦 召史奴(소사노)가 그 二子 沸流(비류)와 溫祚(온조)를 데리고 南來하매 幾斤의 黃金을 받았던지 彌鄒忽, 漢忽 等 西北 百里地를 割與하였다.(《三國史記》 百濟本記에는 割東北百里라 하였으나 東字는 마땅히 西字로 作할 것이니 東西兩字相換考에 參照) 마침내 溫祚 太王의 假裝한 산양군에게 金馬國에 寓居한 서울까지 빼앗기고 箕氏 王朝 千餘年의 運命도 이로써 마치었다. 이와 같이 馬韓은 亡하여 扶餘氏의 百濟가 되고 辰韓은 箕氏 亡하기 전 六十五年에 赫居世가 이미 六部의 盟主가 되었고, 弁辰은 箕氏 亡한 後 三十五年에 首露大王이 六加羅의 盟主가 되니, 이곳 百濟·新羅·加羅로 後三韓이라 稱한 바요, 後三韓이 興함에 中三韓의 歷史는 이에 一段落을 告하게 되었다.
 
 

3.3. (三) 後三韓 ― 羅加濟의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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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加濟의 歷史는 首尾 六七百年의 歷史니, 그 年代의 長은 前三韓의 三分一 밖에 안 되나 史的 材料로 流傳하여 오는 것은 書籍으로만 말하여도 不精하나마, 《三國史記》·《三國遺事》 等이 있어 도저히 이 따위 短篇으로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하고자 하는 後三韓은 純全히 陳壽(진수) 《三國志》 三韓傳에 보인 羅·加·濟의 別名인 三韓에 對하여 말함에 그칠 뿐이다. 먼저 後三韓의 疆域을 議論하면 《三國志》에 記錄한 三韓 七十餘國은 곧 《三國史記》 地理志에 보인 羅·加·濟 三國의 各 州郡이니, 다만 前者는 封建時代의 地理를 記한 者이므로 國이라 하고 後者는 封建 打破 後 記한 者이므로 州 或 郡이라 한 것이다. 封國을 廢하고 州郡을 設하는 동안에 大小의 合倂도 있었을 것이며, 名號의 變更도 있었을 것이며, 또 같은 名號로도 吏讀文 用字의 變更도 있었을 것이며, 新羅 景德王 때 吏讀文으로 쓰던 地名을 漢文으로 改正한 뒤 或 古號가 傳치 못하며, 或 古號의 意義를 알 수가 없게 된 者가 많아 一一이 찾을 수 없으나, 오히려 그 大略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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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百濟의 疆域은 三韓傳에 이른바 馬韓 五十餘國인데 國名은 左와 如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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奚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活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奚國·莫盧國·卑離國·占卑離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塗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奚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奚池國·乾馬國·楚離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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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 五十餘國의 國名 中에 疊載한 莫盧國을 刪去하면 合 五十四니, 五十四의 國名을 《三國史記》 百濟 地理志의 州郡 名에 맞춘 뒤에 다시 百濟 州郡의 沿革을 《高麗史》 地理志와 李朝 八道 地名에 맞춰 본즉, 그 가운데 卑離 等 諸國들은 곧 百濟 地理志에 夫里 等 州郡인데, 監奚卑離는 古莫夫里-卽 固麻城이니 今 公州요, 辟卑離는 波夫里니 今 同福이요, 毛卑離는 毛良夫里니(牙·邪·良·壤·襄·奴·那 等 字가 다 같이 「라」의 音임은 吏讀文 解釋法 參照) 今 高敞이요, 如來卑離는 爾陵夫里니 今 綾州요, 그 중에 形容的 頭辭가 없이 다만 「卑離國」이라 한 卑離는 그 위에 卑의 一字가 脫한 듯하니, 卑卑離는 夫夫里로 臨陂와 沃溝 사이 澮尾廢郡이요, 이밖에 三韓傳에 內卑離·占卑離·楚山塗卑離 等 卑離가 있고, 百濟 地理志에 半奈夫里·未冬夫里·古沙夫里·古良夫里가 있어 數도 一이 差하며 音도 서로 맞지 않으니, 아직 後考에 미루고, 大石索은 大尸山이니 今 泰仁이요, 優休牟涿은 于召渚니 今 高山 西部의 廢郡이요, 月支는 慰禮城이니 今 漢城이요, 支侵은 百濟 地理志에 그 本 位置를 말하지 않았으나 唐 都督府의 設郡에 支潯이란 郡名이 있으니 支潯은 州治가 「貝彡」인 故로 得名한 者요, 「貝彡」은 新羅가 餘邑이라 改名한 바, 餘의 義가 「끼침」이니 今 海美요, 狗盧는 皆利伊니 그 沿革이 없고 駟盧는 沙好薩이니 好는 奴의 誤인듯 한데 今 洪州요, 感奚는 今忽이니 今 德山이요, 莫盧은 邁羅니 東城大王 때 魏兵(拓跋氏) 累十萬을 깨친 名將 沙法名(사법명)의 封國이니 《三國史記》에 그 沿革이 없으나 百濟 亡後 唐 都督府의 管轄인즉 大槪 公州 附近일 것이요, 臼斯烏旦은 仇斯珍芳(一名 貴旦)이니 今 長城 東部요 楚離는 所力只니 今 沃溝요, 乾馬가 곧 金馬郡임은 이미 前述한 바이다. 이 나머지는 아직 發見치 못 하였으니, 後日을 기다리겠지만 이만하여도 馬韓 五十四國의 地圖를 그릴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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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음으로 辰韓과 弁辰은 合하여 二十四國인데 國名은 左와 如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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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祗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勒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中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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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軍彌國과 馬延國이 疊載하였으니, 先儒들의 말을 좇아 이 兩國을 刪去하면 二十四의 數에 恰當하다. 斯盧가 新羅임은 그 沿革도 明白하고 先儒들이 「斯」는 「새」요 「盧」는 「라」(今語의 나라)니 곧 新國의 義라 함도 틀림없으며, 狗邪는 加羅니 今 金海며, 彌烏邪馬는 任那니 今 高靈이요, 古資彌凍은 今 固城이라 함도 先儒의 定說이 있거니와, 이제 拙見으로 그 音義를 解析하여 以外 諸國의 沿革을 찾을만한 者를 더 찾으려 한다. 辰·弁 兩韓 二十四國 中에 彌凍으로 名한 나라가 三이니, 비록 馬韓의 卑離처럼 많지 않으나 《三國史記》 地理志에 彌知로 名한 郡은 모두 水灣이 曲한 곳에 臨한 者이니, 百濟의 古馬彌知는 今 康津·海南 間의 海灣의 邑이요, 松彌知는 靈光 附近 海灣의 邑이요, 新羅의 武冬彌知는 庇安 北部 丹密 廢邑이니, 또한 丹江 江灣에 臨한 者이다. 彌凍은 吏讀文에 대개 彌知와 「미지」로 讀하는 것으로 同一한 水灣의 義일 것이니, 古資彌凍이 今 固城임은 이미 上述하였거니와, 古資는 「구지」 卽 半島의 義니 固城이 半島인 同時에 또한 大海灣에 臨한 故로 古資彌凍 卽 「구지미지」라 이름함이며, 弁辰彌離彌凍은 或 迎日灣이 될 것이다. 《文獻備考》에 「大伽倻今高靈·小伽倻今固城·古寧伽倻今咸昌·阿羅伽倻今咸安·星山伽倻(一云碧珍伽倻)今星州」이라 하니, 弁辰古淳是는 곧 古寧伽倻(고링가라)니 咸昌 「공갈못」의 「공갈」은 「고링가라」의 訛轉인듯하며, 弁辰安邪는 곧 阿羅伽倻(아라가야)니 「아라」는 咸安 北江의 古號인듯하며, 《三國史記》 地理志의 互用字에 據하여 珍·彌·買 三字가 다 「매」로 讀함을 알 것이니, 星山은 별메의 義요 碧珍은 별메의 音인데, 半路는 곧 「별」이니 弁辰半路는 星山伽倻며, 以上에 이미 述한 彌烏邪馬-任那 今 高靈과 狗邪-加羅 今 金海와 古資彌凍-「구지미지」를 合하여 六伽倻라 稱한 것인데, 다만 彌烏邪馬의 邪·馬 兩字의 倒載일 것이다. 瀆盧는 茶山(다산 정약용)이 巨濟 古號 裳郡의 「裳」은 俗語에 「두룽이」니 瀆盧는 두룽이의 音이니 今 巨濟라 하니 대개 비슷하며, 不斯는 「부스」니 곧 古語에 「松」의 義나 그 位置를 알 수 없으며, 勒耆는 長鬐의 古號가 耆立이니 勒耆가 耆立일 것이나 兩者 中 어느 하나가 倒字일 것이다. 그 나머지는 아직 音義와 位置와 沿革을 발견치 못하였다.
 
 

3.4. (四) 後三韓의 互相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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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傳에 辰韓과 弁韓의 政體를 記錄하여 「其十二國 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이라 하였으니 이는 實과 訛가 參半한 것이다. 《三國史記》·《三國遺事》 等 書에 쓰인 「王」·「太王」·「大王」 等은 모두 三韓傳의 辰王임과, 前三韓時代에는 「신한」이 首位이고 「말한」과 「불한」이 輔佐임은 이미 前述하였거니와, 後三韓에 이르러서는, 「말한」은 비록 衰敗한 끝이나 오히려 漢江 以南의 全部를 차지하여 古代의 一大國의 位置를 가졌으므로, 그 國號는 「말한」(馬韓)이라 하였지만 그 位號는 辰韓이라 하여 七十餘國의 共主가 되었으며, 「신한」(辰韓)과 「불한」(弁韓)은 다만 그 遺民임에 依하여 이로써 그 所居의 地名을 삼아 쓴 것이요, 그 位號인 「신한」은 도리어 馬韓에 讓한 故로 新羅本紀에 據하면 赫居世부터 智證까지 居西干·尼師今·摩立干 等으로 稱하고 王이라 稱하지 못하였는데, 摩立干은 《三國史記》 訥祗摩立干 註에 金大問(김대문)이 이르기를 「摩立橛也」라 하니 橛의 義는 「말」이라. 그러면 摩立干은 「말한」으로 讀한 것이니 「말한」도 오히려 尊稱이므로 初代에는 쓰지 못하고 訥祗에 이르러서 四代를 쓰고, 法興 때 와서 비로소 「신한」 곧 大王이라 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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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는 馬韓의 故地를 據함으로 그 國號를 馬韓이라 하나, 그 王號는 辰韓이며, 新羅는 辰韓의 遺民이므로 그 國號는 辰韓이라 하나, 그 王號는 馬韓이 되어 辰韓·馬韓의 名義가 이같이 뒤죽박죽이 되었는데, 三韓傳이 곧 毌丘儉(관구검)의 얻어간 記錄과 傳說을 쓴 것인즉 新羅 初代의 일이니, 「其十二國(辰韓弁韓兩方面의 十二國 合二十四國을 並擧한 者)屬辰王」의 一節은 實錄이며, 新羅는 그 建國 以後 恒常 朴·昔·金 三姓이 서로 遞傳하고 어느 때 百濟人이 新羅王된 적이 없으니, 「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의 一節은 訛錄이다. 그러나 新羅本紀로 보면 그 初代부터 百濟와 對峙하였던 듯하나, 이는 新羅 史官이 先代의 耻를 諱하여 刪去한 것이니, 隋書에도 「新羅 … 其先附庸於百濟」라고 적혀 있다. 高句麗가 鮮卑와 血戰하는 동안에 百濟가 强해짐과 같이, 百濟가 高句麗와 血戰하는 동안에 新羅가 强해짐은 實在의 事實인즉, 訥祗(눌지)와 奈勿(내물) 以前에는 十二國이 馬韓·辰王의 節制를 받았을 것이니, 이는 三韓傳의 것으로 新羅本紀의 缺을 補充함이 可하다.
 
 

3.5. (五) 後三韓과 幷立한 列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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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에 적힌 後三韓 當時의 王國이 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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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扶餘는 「불」의 譯이니 卑離·夫里·弗·發·火·伐 等의 譯과 같은 者나, 불은 國名이 아닌 故로 朝鮮 古史에 반드시 그 위에 頭辭를 冠하여 北扶餘·東扶餘·泗沘扶餘·卒本扶餘·爾陵夫里·古莫夫里·密弗·推火·音汁弗·沙伐·徐羅伐이라 하여 그를 區別하였다. 그러나 各 「불」 中에 北扶餘가 가장 大國이며 中國과 交通이 잦았던 故로 漢 司馬遷(사마천)부터 北扶餘를 다만 扶餘로 稱하여 慣習語가 됨이니, 《三國志》 中 扶餘도 곧 北扶餘를 가리킨 것인데, 그 首都의 位置는 哈爾賓(하얼빈)으로 《三國史記》의 黃龍國이 是며, 《三國史記》 中 扶餘는 東扶餘니 《三國志》의 扶餘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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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高句麗는 그 中京 「가우리」로 得名한 者니, 《三國志》 中 高句麗의 首都는 今 輯安縣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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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沃沮는 「와지」니 森林의 義니 《滿洲源流考》에 보인 「窩集」이며, 古代 朝鮮 北部人이나 近世까지의 滿洲人이 그 所居 地方에 大森林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와지」라 하였는즉, 《三國志》에 東北南 三沃沮는 그 中 最大한 「와지」를 가리킨 것이오. 그 밖에도 無數한 「와지」가 있었으니, 《三國史記》에 好童(호동)이 出遊한 「와지」와 《晋書》의 依慮(의려) 子弟의 走保한 「와지」는 다 三 沃沮 以外의 「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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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挹婁는 「오리」라. 「오리」 江畔(今 松花江)에 居하여 得名한 者니, 廣開疆土平安好太王의 碑文에 쓰인 鴨盧가 그것이니, 《三國志》에 이를 肅愼氏 後裔라 하였으나 이는 그 所用 武器인 楛矢와 石弩가 左氏 國語에 記한 肅愼氏矢와 같은 故로 傅會한 말이니, 肅愼·稷愼·州愼 等은 다 古代 中國人이 朝鮮을 譯傳한 것이며, 挹婁는 朝鮮 最北 未開한 一部 朝鮮族으로 《三國史記》와 《唐書》에는 挹婁를 靺鞨이라 하였으니, 靺鞨은 挹婁의 別名인데 그 音義는 아직 考證치 못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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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濊도 또한 「오리」 江으로 得名한 者인데, 다음의 「오리」 江은 永平府의 灤河니 濊가 처음 灤河 附近에 入國하였으니, 逸周書의 令枝와 管子의 離枝가 다 濊의 漢譯이며 濊가 차차 東遷하여 豆滿江 內外 沿岸에 分布하였으니, 韓人 張良(장량)이 力士를 求하던 滄海國과 漢武(한무제)와 戰하던 南閭王의 滄海國이 다 그것이요. 그 一部가 다시 南下하여 今 江原道 等地에 分布하였으니, 《三國志》에 濊가 다 그것이다. 《三國史記》에는 或 挹婁 卽 靺鞨을 濊로 記한 곳도 많으니, 高句麗 太祖本紀에 「將馬韓濊貊」과 金仁問傳에 「高句麗負固與濊貊同惡」의 等인데, 先儒들이 다만 濊란 字面만 좇아 그 系統을 求함으로 濊의 家譜가 非常히 錯亂하게 되었으니, 그 詳細는 따로 專論이 있어야 할 것이라. 여기는 아직 中止한다. 右 五國 가운데 沃沮·濊 兩國은 高句麗에 服屬한 者로 獨立한 王國이 아니니, 五國의 地理 疆域은 先儒의 考證이 大略 옳으나, 다만 北扶餘를 今 開原이라 함은 그 末葉에 遷居한 서울을 그 原駐地로 誤認한 것이다. 五國이 다 後三韓과 그리 逼切한 關係가 적었고 가장 關係가 많았던 者는 樂浪·帶方 兩國이거늘, 《三國志》에는 이를 闕하였으니 次節에 略論코자 한다.
 
 

3.6. (六) 後三韓과 樂浪 帶方의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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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樂良·平那·平壤·平穰·百牙 等을 모두 「펴라」로 讀함이 可함은 「吏讀文解釋法」·「平壤浿水考」·「東西兩樂浪考」 等 篇에 詳見하였거니와, 樂浪國이 當時 列國 中 後三韓과 가장 逼切한 關係를 가졌음은 新羅本紀의 新羅 初代와 百濟本紀의 百濟 初代에 樂浪의 侵寇가 頻煩한 事實에 據하여 明白하거늘, 先儒들이 中華(중국) 歷代 史家의 붓에 속아 平安道를 割讓하여 漢의 樂浪郡을 만드는 同時에 樂浪國을 移動하여 江原道 春川郡에 特設한 것이다. 무엇에 依하여 春川을 樂浪이라 하느냐 하면, 百濟本紀 溫祚(온조) 十三年의 「東有樂浪」이란 一句가 그 唯一한 證據라 하나, 그러나 「東西兩字相換考」에 보임과 같이 《三國史記》에는 東·西 兩字가 많이 相換되어 있다. 樂浪國 王의 姓은 崔氏이니, 그 起源을 確證할 수 없으나 大槪 箕準(기준)·衛滿(위만)의 際에 平安道를 割據하여 일시 雄强하여 그 뒤에 자주 南方의 新羅·百濟를 侵逼하더니, 그 末王 崔理(최리)가 高句麗 王子 好童(호동)을 狼林山의 森林(沃沮) 같은 곳에서 만나 그 容貌의 美秀함에 혼탁하여 맞아서 사위를 삼았다가 高句麗에게 亡하였으나, 그 所屬한 數十 小國이 그 宗國 崔氏의 滅亡을 恨하여 高句麗에게 不服하고 西方으로 漢과 通하여 이에 漢의 勢力이 樂浪에 侵入됨이다. 그러나 漢의 樂浪國에 對한 關係가 明의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松篁營(소왕령,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 等地 諸 南衛와 같이 漢 官吏의 足跡이 이곳에 오지 않으며, 漢帝의 詔令이 이곳에 미침도 아니요, 樂浪郡은 樂浪國에서도 千餘里를 더 나가 遼東에 있는 郡名이니, 漢 武帝가 衛滿을 滅하고 理想的 郡縣으로 眞番·玄菟·臨屯·樂浪 四郡을 만들려 하였으나, 朝鮮의 抵抗이 强勁하여 東北에서 卒本夫餘(後來의 高句麗)가 起함에 眞番·玄菟 二郡이 空想이 되고 말았고, 鴨綠江에서 樂浪國 崔氏가 起함에 樂浪·臨屯 二郡도 空想이 되고 말았거늘, 遼東 界內에 樂浪·玄菟 等 四郡을 虛設하여 史冊을 粧飾할 때, 崔氏 亡後(高句麗 大武神王과 漢 光武의 際) 樂浪 列國의 交通으로 因하여 그 列國의 名을 가져다가 그 虛設한 樂浪郡 가운데 虛設한 樂浪 諸縣의 名을 만들고, 高句麗와 高句麗의 屬國인 蓋馬·殷台 等의 名을 가져다가 虛說한 玄菟 三縣의 名을 만들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崔氏 亡後 數十年만에 帶方國이 長湍 等地에서 起하여 六七小國의 盟主가 되어 비록 그 主權者의 姓名과 國祚 長短은 史冊에 보이지 않았으나, 百濟本紀 責稽王 元年에 百濟 王의 妻 寶菓(보과)의 父 帶方 王이 現하였으며, 新羅本紀 基臨尼師今 三年에 樂浪·帶方 兩國의 歸服한 事實을 記하였으니, 그 一時의 小王國됨이 明白한데 漢家 帝王들은 이를 따라 또 遼東에 帶方郡을 虛說하였거늘, 歷來 우리의 朝鮮 史家들이 매양 朝鮮 古記와 中國史의 衝突되는 事實을 억지로 調和하느라고 古記를 刪改塗抹함이 적지 않은 中, 樂浪의 事實은 彼此 矛盾이 더욱 甚함으로 調和에 더욱 苦心하여, 《三國史記》에 百濟 溫祚王과 交涉한 樂浪 王을 樂浪 太守로 杜撰하였으며, 《三國遺事》에는 漢에 없는 州名의 平州와, 없는 官名·都督을 내어 四郡二府說을 捏造하여, 此等의 妄筆이 많으므로 그 一般의 訛誤를 發見키에 더 困難케 되었다. 如何間 中國史 中, 朝鮮 일을 가장 자세히 적은 《三國志》에 樂浪·帶方이 빠짐으로 前後의 月永絡이 그치어 큰 缺點이 되었다.
 
 

3.7. (七) 後三韓과 北方 諸國의 言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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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時에 가장 可驚할 事實은 現 朝鮮 各 地方과 東三省 各地의 言語 統一이다. 이제 《三國志》로 據하면 高句麗傳에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 하며, 「沃沮傳」에 「言語與句麗大同」이라 하니, 扶餘·沃沮·句麗 三國의 地方은 곧 黑龍·吉林·平安·咸鏡 等이니, 右 各地의 言語가 同一한 實證이오. 濊傳에 「自謂與句麗同種其人性原慤少嗜欲不請句麗言語法俗與句麗同」이라 한 바, 不請 二字가 文理 不屬함으로 乾隆帝 欽定 《三國志》의 考證에 請字를 諳의 誤라 하여 「不諳句麗言語」로 一句를 作하였으나, 이는 臆斷이니 《後漢書》 朝鮮列傳이 《三國志》의 것을 抄錄함은 이미 前述하였거니와, 《後漢書》 濊傳에는 「與句麗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其人性原慤少嗜慾不請匄」라 하였은즉, 《三國志》의 不請句麗의 「句」는 匄의 誤며 「麗」는 疊載衍字니, 그 本文이 「不請匄言語法俗與句麗同」일 것인데 「不請匄」가 一句요 「言語法俗與句麗同」이 一句며 또 그래야 上文의 「與句麗同種」과 意思가 接續될 것이니, 濊와 句麗의 同言語임이 明白하고 辰韓傳에 비록 「言語不與馬韓同」이라 하였으나, 이는 辰韓의 「辰」은 秦人의 「秦」으로 僞證하는 同時에 「名國爲邦弓爲弧 … 有似秦人」의 誣錄을 臆辨키 爲하여 쓴 것이오 實錄이 아니며, 辰韓이나 馬韓에 臣智·邑借 等 同一한 官名이 있고 다른 異言語의 證跡이 없으니, 또한 同一한 言語였던 것이다. 다만 樂浪·帶方 兩傳이 闕함으로 三韓과 高句麗 等의 中間 聯絡이 끊어지며 따라서 樂浪·帶方이 扶餘·高句麗와 言語 關係가 어떠했는지, 三韓이 樂浪·帶方과 言語 關係가 어떠했는지, 《三國志》에는 記載가 없으나 新羅 樂曲般涉調를 百濟人이 노래하며, 高句麗의 來遠城과 百濟의 無等山을 新羅人이 노래하며, 好童(호동)이 高句麗 宮中 未成年 童子로서 樂浪에 入하여 崔王(최리)에 女와 戀愛를 成就하며, 薯童(서동)이 百濟 宮中 十六歲의 妙齡 太子로 新羅에 逃入하여 群童을 꾀여 노래를 짓고 善花公主를 誘引한 事實 같은 것이, 모두 三韓·樂浪·高句麗 等의 言語가 서로 通曉되었음을 說明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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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慶尙道의 新羅·京畿·忠淸道 等의 百濟·江原道의 濊·平安道의 樂浪·咸鏡道의 沃沮·吉林·奉天·黑龍 等의 扶餘와 高句麗가 다 言語가 同一하던 實證이 있다. 오직 挹婁 一部가 言語가 좀 다르므로 《後漢書》에 「挹婁在東夷中言語獨異」라 함이나, 그러나 挹婁는 滿淸族의 先代니 滿淸과 朝鮮의 古語가 相通되는 것이 많은즉, 이것도 아주 懸殊한 言語는 아니었던 것이다. 設令 小部分인 挹婁를 除外할지라도 古朝鮮 全幅-今 朝鮮 十三道와 今 關東三省이 古代에 言語가 統一된 民族으로 또 史冊에 依하여 보면 그 官制와 風俗은 더욱 差異가 적었던 것이다. 英國史를 보면 十六世紀까지도 「런던」과 「웰스」의 相近한 地方으로도 言語가 不通하여 「웰스」의 어느 港口에 停泊한 商人이 鷄卵을 사서 먹으려 하나, 「에그」란 말을 알아듣는 者가 없어 손으로 卵의 貌樣을 形容한 結果에 감이 나오며 배가 나왔다는 笑話가 있으며, 그 밖에 西洋 列國이 모두 近世 敎育이 發達되기 前에는 一國 內에 各種의 言語가 있어 至今까지도 그 惰習이 遺存한 나라가 많으며, 中華(중국)는 文物과 政治가 統一된 지 數千年이나 至今에 同一한 省內에서도 言語 不通되는 곳이 많은데, 하물며 「百里不同風, 千里不同俗」이라 하던 古代이랴? 朝鮮은 古代에 적지 않은 疆土에 言語 風俗이 남보다 먼저 統一된 民族으로서, 茫茫한 古代에 「수두」 神木 下에 神權政治的 統一이 있은 以後에는, 다시 政治的 統一을 行하지 못하고 鴨綠江 以西를 割棄하며, 게다가 또 매양 北方 大國의 文化와 威力을 藉賴한 然後에야 區區한 小統一의 國家로 存在케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原因인가.
【원문】前後三韓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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