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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史硏究草 (조선사연구초) ◈
◇ 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
해설   목차 (총 : 6권)   서문     이전 6권 ▶마지막
신채호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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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一. 緖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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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의 盛衰는 매양 그 思想의 趨向 如何에 달린 것이며, 思想의 趨向 或左或右는 매양 某種 事件의 影響을 입는 것이다. 그러면 朝鮮 近世에 宗敎나 學術이나 政治나 風俗이 事大主義의 奴隸가 됨이 무슨 事件에 原因함인가? 어찌하여 孝하며 어찌하여 忠하라 하는가? 어찌하여 孔子(공자)를 높이며 어찌하여 異端을 排斥하라 하는가? 어찌하여 太極이 兩儀를 낳고 兩儀가 八卦를 낳는다 하는가? 어찌하여 身修 然後에 家齊요 家齊 然後에 國治인가? 어찌하여 비록 頭痛이 날지라도 冠網을 풀지 않으며 티눈이 있을지라도 버선을 신는 것이 禮이었던가? 先聖의 말이면 그대로 좇고 先代의 일이면 그대로 行하여 一世를 몰아 殘弱 衰退, 不自由의 길로 들어감이 무엇에 原因함인가? 王建(왕건)의 創業인가? 威化島의 迴軍인가? 壬辰의 倭亂인가? 丙子의 胡亂인가? 四色의 黨派인가? 班常의 階級인가? 文貴 武賤의 弊인가? 程·朱學說의 遺毒인가? 무슨 事件이 前述한 宗敎·學術·政治·風俗 各 方面에 奴隸性을 産出하였는가? 나는 一言으로 回答하여 가로되 高麗 仁宗 十三年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 - 卽 妙淸(묘청)이 金富軾(김부식)에게 敗함이 그 原因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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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의 兩便 兵力이 各 數萬에 不過하며 戰役의 首尾가 兩個年에 不滿하였지만, 그 戰役의 結果가 朝鮮 社會에 影響을 끼침은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 以前에 高句麗의 後裔요 北方의 大國인 渤海 滅亡의 戰役보다도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 以後 高麗 對 蒙古의 六十年 戰役보다도 몇 갑절이나 突過하였으니, 大槪 高麗至李朝 一千年間에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에 비할 大事件이 없을 것이다.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은 歷代 史家들이 다만 王師가 反賊을 친 戰役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近視眼의 觀察이다. 그 實狀은 戰役이 卽, 郞·佛 兩家 對 儒家의 戰이며, 國風派 對 漢學派의 戰이며, 獨立黨 對 事大黨의 戰이며, 進取思想 對 保守思想의 戰이니, 妙淸(묘청)은 곧 前者의 代表요 金富軾(김부식)은 곧 後者의 代表였던 것이다. 이 戰役에 妙淸(묘청) 等이 敗하고 金富軾(김부식)이 勝하였으므로, 朝鮮史가 事大 保守的 束縛的 思想-儒敎思想에 征服되고 말았으나, 萬一 이와 反對로 金富軾(김부식)이 敗하고 妙淸(묘청) 等이 勝하였다면 朝鮮史가 獨立的 進取的 方面으로 進展하였을 것이니, 이 戰役(서경천도운동)을 어찌 一千年來 第一 大事件이라 하지 않으리오? 左에 戰役 發生의 原因과 動機를 먼저 敍述하고 다음 戰役으로 하여 생긴 影響을 論하려 한다.
 
 

二. 郞儒佛 三家의 源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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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의 原因을 말하려면 當時 郞·儒·佛 三家의 鼎峙한 大勢부터 論述할 必要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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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郞은 곧 新羅의 花郞이니, 花郞은 本來 上古 蘇塗 祭壇의 武士 곧 그때 「선비」라 稱하던 者인데, 高句麗에서는 皁衣를 입어 皁衣仙人이라 하고, 新羅에서는 美貌를 取하여 花郞이라 하였다. 花郞을 國仙·仙郞·風流徒·風月徒 等으로도 稱하였다. 《三國史記》는 그 著者 金富軾(김부식)이, 花郞을 仇視排斥하는 儒敎徒 中에도 가장 狹隘嚴酷한 人物이므로 本國 傳來의 仙史·花郞記 같은 것은 모두 抹殺하고, 다만 外國에까지 傳播된 花郞의 一二 事實과 《花郞世記》의 一二句 곧 唐人의 지은 《新羅國記》·《大中遺事》 等에 쓰인 花郞에 關한 文句를 抄錄하여 그 源流를 混亂하며 年代를 顚倒하고 許多한 花郞의 美事를 埋沒하였으니, 이 얼마나 可惜한 일인가? 이에 關한 曲折은 他日에 專書로 詳論하려 하니 여기에는 略하지만, 花郞은 곧 新羅 以來 國風派의 重鎭이 되어 社會思想界의 一位를 占領하던 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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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儒는 孔子(공자)를 尊奉하는 者니, 往昔에 史家들이 매양 尊華主義에 醉하여 歷史的 事實까지 僞造하여 가며 太古부터 儒敎的 敎義가 朝鮮에 橫被한 것으로 말하였으나, 「비치」나 「불ㅜ레」로 王을 號하며, 「말치」나 「쇠뿔한」으로 官을 名하던 時代에는 孔子(공자)·孟子(맹자)의 이름을 들은 이도 全國에 幾人이 못 되었을 것이다. 大槪 儒敎는 三國 中末葉부터 그 經傳이 얼마만큼 輸入되어 禮를 講하며 春秋를 讀하는 이가 있어 뿌리를 박아 高麗 光宗 以後에 점차 盛하여 社會思想에 影響을 끼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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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佛은 印度로부터 中國을 지나 朝鮮에 輸入된 釋迦(석가모니)의 敎니, 三國 末葉부터 盛行하여 朝廷이나 民間에서 一切로 崇奉하고 佛敎가 비록 世事에 關係 없는 出世的 宗敎이나 그 敎徒가 문득 政治上 地位를 가지게 된 것이다. 當初에 新羅 眞興大王이 社會와 國家를 爲하여 萬世의 策을 定할 때, 各敎의 傾軋을 慮하여 儒·佛 兩敎는 平等으로 待遇하며, 花郞은 三敎 敎旨를 包含한 者라 하여 各敎의 上에 位케 하며 各 敎徒의 互相 出入을 許하였다. 그래서 新羅史를 보면 轉密(전밀)은(《金歆運傳》에 보임) 佛敎의 僧으로 花郞 文努(문노)의 弟子가 되고, 安詳(안상)은(《三國遺事》에 보임) 花郞인 永郞(영랑)의 高弟로 僧統의 國師가 되고, 崔致遠(최치원)은 儒·佛 兩敎에 出入하는 同時에 또한 花郞道의 大要를 涉獵함이 있었다. 그러나 世上事가 매양 時勢를 따라 變遷하고 사람의 期望대로 되지 않는 데야 어찌하리오. 眞興大王의 各敎 調和策도 不過 數百年에 無効에 歸하고, 高麗 仁宗 十三年에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三. 郞儒佛 三敎의 政治上 鬪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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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太祖 王建(왕건)이 佛敎로 國敎를 삼고 儒敎와 花郞도 또한 參用하더니, 그 後嗣에 至하여는 往往 中華(중국)를 尊慕하여 光宗은 中國 南方人 雙冀(쌍기)를 써서 科擧를 設하고 더욱 儒學를 獎勵할 때, 萬一 儒敎의 經傳를 通하는 中國人이 이르면 大官을 시키며 厚祿을 주며, 또 臣下의 美麗한 第宅을 빼앗아 준 일까지 자주 있었고, 成宗 때 至하여는 崔承老(최승로) 等 儒者를 登用하여 宰相을 삼아 郞敎徒나 佛敎徒는 모두 壓迫하고 오직 儒敎만을 尊尙하기에 이르렀다. 佛敎는 元來 出世의 敎일뿐더러 어느 國土에 輸入되던지, 매양 그 나라 風俗·習慣과 妥協하기를 잘하고 他敎를 甚히 排斥하지 않지만, 儒敎는 그 衣冠·禮樂·倫理·名分 等으로 그 敎의 中心을 삼아 傳道되는 곳에는 반드시 表面까지의 同化를 要求하며 他敎를 排斥함이 非常히 激烈하므로, 이때의 儒學 獎勵는 郞派와 佛派의 不平히 여길 뿐 아니라 곧 全國 人民의 不樂하는 바이었다. 이런 關係는 大槪 孔子(공자) 《春秋》의 「筆則筆削則削」 主義를 尊奉하는 史家들의 削除를 當하여 詳細한 顚末은 記述할 수 없으나, 不明不備한 史冊 속에 끼친 一二 事實을 미루어 그 全體를 大約 想像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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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와 《東國通鑑》을 據함에, 成宗 十二年에 契丹 大將 蕭遜寧(소손녕)이 入寇하여 北界를 攻하며, 또 檄文을 移하여 八十萬兵이 장차 繼續하여 이르리라 恫喝하니, 擧朝가 惶怯하여 西京 以北을 割讓하여 乞和하자는 議論이 일어났는데, 그 때 홀로 徐熙(서희)·李知白(이지백) 兩人이 있어 그 非計임을 駮論하여, 李知白(이지백)은 奏하기를, 先生의 燃燈·八關·仙郞 等會를 恢復하고 他方의 異法을 排斥하여 國家 太平의 基를 保하며 神明에 告한 然後에, 戰하다가 不勝하면 和함이 늦지 않다 하였다. 이는 李知白(이지백)이 成宗의 中華(중국) 文物만 樂慕하여 國民 感情에 違함을 譏한 것이라고 云하였다. 李知白(이지백)이 가리킨 先王은 高麗의 先代요 仙郞會는 花郞會니, 太祖 以來로 大槪 新羅의 花郞會를 中興하여 燃燈·八關 等 會와 並行하다가 成宗이 儒敎를 篤信하고 華風을 崇尙하여 郞·佛 兩家의 會를 革罷하였던 것이 明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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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外國의 入寇를 當하여 그 같이 崇重의 禮待를 받던 儒敎의 諸臣들이 外寇를 물리칠 計策은 秋毫만치도 案出치 못하고, 도리어 割地賣國의 擧로 國王을 勸하는 까닭에, 李知白(이지백)의 此奏는 第一로 儒臣의 懦弱을 熱罵코, 第二로 郞·佛 兩家를 爲하여 寃를 鳴하고, 第三으로 國風派를 代表하여 中華(중국) 崇拜者를 叱咜함이니, 여기에서 郞·佛 兩家의 國風派들이 儒敎徒에 對한 不平의 醞釀이 已久함을 볼 수 있다. 이 뒤로부터 朝臣의 廷論者가 드디어 兩派로 分하였으니, 郞家는 매양 國軆上에는 獨立·自主·稱帝·建元을 主張하며, 政策上에는 興兵北伐하여 鴨綠 以北의 舊疆을 恢復함을 力唱하고 儒家는 반드시 尊華主義의 見地에서 國軆는 中華(중국)의 屬國됨을 主張하고, 따라서 그 政策은 卑辭厚幣로 大國을 事하여 平和로 一國을 保함을 力唱하여 彼此 反對의 地位에 서서 抗爭하였다. 例를 들면 顯宗 末年에 渤海의 中興을 補助하여 契丹을 쳐서 舊疆을 恢復하자는 郭元(곽원)이 있는 反面에, 本土를 謹守하여 生民을 保하자는 崔士威(최사위) 等이 있으며, 德宗 初年에 鴨綠江橋의 毁撤과 拘留된 我邦 使臣의 回還을 契丹(거란)에게 要求하다가 不聽하거든 絶交하자는 王可道(왕가도) 等이 있는 反面에, 外交를 謹愼히 하여 兵禍가 없도록 하자는 皇甫兪義(황보유의) 等이 있으며, 其他 麗朝 歷代 外交에 매양 自尊의 硬論을 發한 者는 거의 郞派나 或 間接으로 郞派의 思想을 받은 者요, 卑辭와 厚幣의 事大論을 執한 者는 大槪 儒敎徒들이었고, 佛敎는 自軆의 性質上 政治 問題에 關하여 郎家와 같이 激烈히 系統的 主張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大槪는 郎家와 接近하였다. 八關會를 《三國史記》에는 佛氏의 法會라 하고, 《海東繹史》에는 漢時의 大酺와 같은 嘉禮의 慶會라고 하고, 近者 李能和(이능화)가 著한 佛敎通史에는 《高麗史》 太祖 天授 元年에 「設八關會 … 其四仙樂部」와 太祖 遺訓에 「八關所以事天及山川龍神」과 毅宗 三十二年에 「自今八關會 豫擇兩班家産饒足者定爲仙家」 等의 語를 引하여, 八關會를 事仙의 會로 佛事를 兼攝한 者라 하였다. 그러나 四仙은 《三國遺事》에 據하며 花郞의 四聖 永郞(영랑)·夫禮郞(부예랑) 等의 兼稱이요, 仙家는 그 上下文을 參照하여 또한 花郞을 가리킨 者인데, 大槪 郞·佛 兩家의 關係가 接近한 以來로 郞家의 蘇塗大會에 佛家의 八關戒를 쓴 것이니, 八關을 大酺의 類라 함도 妄斷이거니와 八關의 仙家를 支那(중국) 仙敎의 仙으로 認함도 大誤다. 高麗 初中葉에는 花郞이 그 思想으로만 社會에 傳할 뿐 아니라, 實際 그 會가 存續하여 왔으므로 花郞을 反對하는 儒家에서도 그 名稱과 儀式을 많이 盜取하였으니, 그 一二의 例를 들면 崔公徒·盧公徒 等은 花郞의 原郞徒·永郞徒 等을 倣한 것이며, 學校의 靑衿錄은 花郞의 風流黃卷을 倣한 것이다. 그러나 史家의 削除를 當하여 花郞의 事蹟이 茫昧하니 어찌 嗟歎할 바가 아니랴?
 
 

四. 睿宗과 尹瓘(윤관)의 對女眞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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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一代에 花郞의 思想을 實行하려던 君·臣 兩人이 있으니, 睿宗과 尹瓘(윤관)이다. 睿宗本紀에 據하면 그 十一年 四月에 「四仙之跡所宜加榮 … 國仙之事比來仕路多門宜令大官子孫行之」의 詔를 下하였다. 睿宗이 萬一 花郞의 中興에 憧憬하는 人君이라면 何故로 그 卽位한 지 十餘年만에야 비로소 永郞(영랑), 夫禮郞(부예랑) 等 四聖의 遺跡을 加榮하고 國仙의 仕路를 開하였을까? 本詔는 西京 新闕에서 下한 者인데 西京 新闕을 創作한 事實이 睿宗本紀에는 不見하였으나 「吳延寵傳」에 據하면 睿宗이 讖에 依하여 西京 新闕을 建하므로 延寵(오연총)이 諫하나 不聽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곧 女眞征伐 以前의 事이니, 그런즉 西京 新闕의 創作은 女眞征伐 以前의 事인 同時에 花郞 中興策과 密切한 關係가 있는 者이며, 또한 女眞征伐과 關聯된 者이니, 當時 史冊에 반드시 詳細한 記錄이 있었을 것이나 後來 金富軾(김부식)派 史家가 西京 新闕의 創作이 妙淸(묘청) 遷都計劃의 先驅임으로 이를 削除하는 同時에, 그의 仇視하는 花郞에 關한 記錄도 勿論 存留치 않았을 것이다. 十一年 詔勅의 國仙 云云은 彼等의 花郞 典故의 無識한 史家들이 國仙이 곧 花郞임을 알지 못하고 無意 中에 削除치 않은 것이니, 이는 마치 《輿地勝覽》에 「仙」을 道敎의 「仙」으로 誤認하여 多數한 花郞의 遺跡을 存留함과 一般이다. 如何間 睿宗은 花郞思想을 가진 人君으로 女眞征伐도 이 思想을 實行함인 것은 明白하며, 尹瓘(윤관)은 新羅 花郞 金庾信(김유신)을 崇拜하여 爲國祈禱의 忠誠과 六月冰河의 熱信을 가진 人物로 睿宗과 同意하여 女眞을 伐征하여 北邊을 開拓하고 九城을 建設하였다. 九城은 《高麗史》에 據하면 舊史에는 英·雄·福·吉·咸·宜 六州와 公嶮·通泰·平戎·三鎭이다가 撤還할 때 宜州와 公嶮·平戎 二鎭이 없어지고 崇寧·眞化·宣化 三鎭이 突現함이 可疑며, 또 宜州城은 定州(今 定平) 以南에 있은즉 女眞을 擊逐하기 以前에도 築한 者라 하여 九城의 數目을 疑하였으며, 咸州는 今 咸興이요 英州·雄州는 吉州에 合倂한 者요 福州는 今 端川이요 宜州는 今 德源이라 하고, 公嶮鎭·通泰鎭·平戎鎭 等의 地界를 明記치 못하여 九城 距離의 遠近을 模糊히 하여 지금껏 史家의 爭訟하는 바가 되었으나, 이러한 區區한 問題는 아직 且置하고 九城의 建設과 撤還한 事實의 顚末이나 略論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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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眞은 三韓時代의 濊貊이요 三國時代의 靺鞨이니, 高句麗가 亡함에 渤海에 屬하고 渤海가 亡함에 高麗에 屬하였으나, 또 一邊으로는 契丹을 事하는 까닭으로 《文獻通考》에 「女眞臣事契丹奴事高麗」라 하고, 睿宗 四年 女眞 使者의 語에도 「女眞以大邦(高麗)爲父母之邦朝貢不絶」이라 함이다. 睿宗의 父 肅宗이 女眞이 漸漸 强大함을 惡하여 이를 征服하려 하였으나, 다만 獻宗의 遺黨이 內亂을 作할까 恐하여 興兵에 躊躇하였다가 밋(이윽고) 그 죽을 때 女眞 征服할 密旨를 睿宗과 尹瓘(윤관)에게 내렸다. 睿宗과 尹瓘(윤관)이 大兵 十七萬으로 女眞을 征伐하여 累千餘級을 斬하고 不過 數朔의 內에 九城의 地를 得하였다. 高麗 地理志에 豆滿江 外 七百里 先春嶺 下에 「至此爲高麗之境」 七字를 새긴 尹瓘(윤관)의 碑가 있다 하니, 尹瓘(윤관)의 開拓이 李朝 金宗瑞(김종서)보다 遠過함을 보겠다. 尹瓘(윤관)의 成功은 郞徒의 欣躍하는 바이나 儒徒의 不樂하는 바이라. 出兵의 初에도 벌써 儒臣 金緣(김연) 等이 上疏하여 出兵을 反對하더니, 밋(이윽고) 九城을 設한 뒤에 女眞이 그 失地를 恢復하고자 번갈아 侵入하니, 我軍이 비록 連勝하나 數年 동안에 人夫의 徵發과 財物의 損害가 적지 않은 것은 免치 못할 일이라. 儒徒들이 더욱 이를 機會삼아 攻駁하니, 睿宗이 마침내 初志를 堅守하지 못하고 九城을 撤하여 女眞에게 還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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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史」에 考하면, 이 때 女眞軍의 參謀長된 者는 金 太祖라. 契丹은 漸漸 衰弱하고 女眞이 勃興하는 때니, 萬一 睿宗이 初志를 堅守하여 一時의 困難을 잊고, 尹瓘(윤관)을 專任하였다면 高麗의 國勢가 興盛하여 後世에 外國의 彼征服者될 恥辱을 免할 뿐 아니라, 곧 契丹을 代하여 興한 者가 金이 아니요 高麗일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女眞은 九城 返還의 恩을 感하여 自今으로 世世子孫이 世貢을 修하고 瓦礫으로라도 高麗 境上에 投치 않겠다고 盟誓하였다. 이 뒤에 女眞이 强大하여 大金國이 됨에 비록 高麗에 바치던 朝貢은 廢하였으나 金一代에 한 번도 高麗를 侵入한 일이 없었으니, 이는 尹瓘(윤관) 一戰의 功이다. 尹瓘(윤관)의 때 史筆을 執한 者가 尹瓘(윤관)을 仇視하던 金富軾(김부식)의 徒黨이었으니 尹瓘(윤관)의 戰功을 그대로 적지 않았으리라. 이것도 讀史者의 알아 둘 바이다.
 
 

五. 妙淸(묘청)과 尹彦頤(윤언이)의 稱帝北伐論의 發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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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述과 같이 尹瓘(윤관)이 비록 金 太祖를 戰勝하였으나 高麗의 儒臣들이 이를 反對하여 더 進取함을 막을 뿐 아니라 旣得한 九城까지 還歸하더니, 金 太祖가 이에 高麗와 講和하고 西北에 專力하여 帝位에 卽한 지 十年 안에 契丹을 滿洲로부터 中華(중국)의 楊子江 以北을 倂呑하여 大金帝國을 建設하였다. 生面不知의 遠處 사람은 猝地에 興하거나 亡하거나 이를 尋常히 볼 뿐이지만 自家行廊의 下人輩가 突然히 天上人이 된다 하면 이를 볼 때 神經의 昻奮을 免치 못할 것이니, 이는 거의 普通의 人情이다. 數千年來 中華(중국) 大陸을 차지하는 者가 惡魔 같은 秦始皇이거나, 匪賊 魁首의 漢 高祖이거나, 野蠻 種族의 契丹 太祖이거나, 모두 그다지 朝鮮人의 頭腦를 刺戟할 것이 없었으나, 오직 金 太祖가 中國 皇帝됨에 이르러서는 거의 睨視의 態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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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太祖가 元來 高麗에 朝貢하던 女眞種으로 더구나 尹瓘(윤관)에게 敗하여 九城 等 千餘里地를 빼앗겼던 蠻酋로서 一朝에 中國 皇帝가 되어, 昨日의 征服者인 高麗 君臣을 도리어 壓迫하기에 이르니, 高麗의 君臣이 어찌 憤慨치 않을 것인가? 睿宗이 九城의 撤還을 後悔하는 同時에 國仙의 中興을 獎勵하며 西京의 移都를 計劃하며, 또 成宗 以來의 卑辭厚幣的 外交政策을 改하고 往往 金 太祖에게 보내는 國書 中에 汝國의 源이 吾土에서 發하였느니, 汝가 元來 吾國의 屬國이니 하는 文句로 金國 君臣의 怒를 觸하여 하마터면 國交上 大缺裂이 發生케 된 때가 許多하였건마는, 金 太祖는 前日의 盟約에 拘束되어 遽然히 高麗를 侵犯치 않고, 睿宗은 九城의 役에 諸臣의 反對를 懲하여 輕忽히 金과 對抗치 못하므로 彼此 平和를 維持함이러니, 밋(이윽고) 睿宗이 昇遐코 仁宗이 卽位하매, 郞家와 佛家와 其他 武將과 詩人輩가 奮起하여 稱帝하고 北伐하기를 强硬히 主張함에 이르렀다. 稱帝北伐論의 領袖는 一曰 尹彦頤(윤언이)니, 尹彦頤(윤언이)는 곧 尹瓘(윤관)의 子로 唯一한 郎家의 系統이라. 本論의 領袖됨이 必然코 當然한 일이나 尹彦頤(윤언이)가 稱帝北伐論을 主張할 때의 上疏와 建議는 高麗史 本傳에 모두 削除를 當하고, 오직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 後 自明䟽만 揭載되어 後人으로 하여금 尹彦頤(윤언이)가 稱帝北伐論者의 一人임만 알고 그 詳細는 알지 못 하니 어찌 可惜치 않은가? 二曰 妙淸(묘청)이니, 妙淸(묘청)은 西京 僧徒로 圖讖의 說을 傅會하여 西京에 遷都하고 帝號와 年號를 稱한 後 北으로 金을 伐하는 者이며, 三曰 鄭知常(정지상)이니 鄭知常(정지상)은 七歲에 「何人把新筆乙字寫江波」의 江鳧詩를 咏하던 神童으로 當時에 擅名하던 詩人이요 近世 林白湖(백호 임제)와 같이 疆土의 擴大를 夢想하던 人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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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 三人이 稱帝北伐에 對한 意見은 同一 하나, 다만 妙淸(묘청)과 鄭知常(정지상)은 西京 遷都까지를 主張하였고, 尹彦頤(윤언이)는 그것에 不同意하던 바이다. 「妙淸傳」에는 妙淸(묘청), 白壽翰(백수한), 鄭知常(정지상) 三人이 다 西京人이므로 西京人 金安(김안) 等이 尊奉하여 西京 三聖이라 稱하였다 하나, 白壽翰(백수한)은 妙淸(묘청)의 弟子라 따로 一派를 칠 것이 없어 此에 擧論치 않는다.
 
 

六. 妙淸(묘청)의 狂妄한 擧動ㅡ西京의 擧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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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에 妙淸(묘청)을 妖賊이라 하였다. 이는 妙淸(묘청)이 陰陽家의 風水說로 平壤 遷都를 唱함에 因함이라 한다. 大槪 新羅 末葉부터 平壤 林原驛은 大華의 勢라. 여기에 遷都하면 三十六國이 來朝하리라는 秘訣이 流行하였다. 아마 高句麗가 亡하고 平壤 舊都가 荒廢함에 新羅의 卑劣한 外交를 憤히 아는 不平家들이 此 一段의 秘訣을 造作하여 居然히 世間의 一種 迷信이 되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新羅 憲德王 十四年의 金憲昌(김헌창)과 十七年의 金梵文(김범문)이 모두 平壤 建都에 托하여 叛兵을 擧하였으며, 그 뒤 弓裔(궁예)도 理想의 新都는 平壤이었으며, 高麗 太祖도 그 訓要에 平壤은 地德의 根本이라 하여 後王의 四仲 巡駐를 勸하였으며, 惠宗은 아주 平壤에 宏大한 宮闕을 짓고 都邑을 옮기려 하였으며, 睿宗도 前述한 바와 같이 平壤에 新闕을 創作하였다. 이 같이 平壤 建都가 歷代 王朝의 企圖하던 바이나, 其實은 平壤에 遷都하면 北寇에 密邇하니, 萬一 敵騎가 鴨綠江을 건너는 때는 都城이 먼저 兵火의 要衝이 되므로 中央의 根本이 動搖하여 一番의 小挫만 있어도 全國이 震驚할 것이라. 平壤은 實로 當時 都城될 地點에 萬萬不宜한데, 稱帝北伐論者가 매양 平壤 遷都를 前提로 함은 非常한 失策이니, 尹彦頤(윤언이)가 前者를 主張하고 後者에 不同意함은 果然 卓見이라 이를 것이다. 그러나 秘訣과 風水說로 平壤 遷都를 主함은 妙淸(묘청)으로서 始함이 아니니, 이로써 妙淸(묘청)을 妖賊이라 함은 너무 抑屈한 判決이다. 妙淸(묘청)이 風伯과 雨師를 能히 指揮한다 이르며, 大同江底에 油餠을 沈하고 神龍의 吐涎이라 하여 百宮의 表賀를 請함이 어찌 妖賊의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일은 高麗 以前 常有한 일이니, 古代에 宗敎上·政治上 人物들이 매양 茫然한 天神을 託하여 群衆을 籠絡하던 것이라. 이것으로 妙淸(묘청)을 罪함도 또한 公言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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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찌하여 妙淸(묘청)을 狂妄하다 하였는가? 睿宗本紀나 妙淸傳으로 보면 當時 稱帝北伐論에 傾向한 者가 거의 全國人의 半이 지나며 政治勢力의 中心인 君主 仁宗도 十의 九分은 妙淸(묘청)을 信하였다. 비록 金富軾(김부식), 文公裕(문공유) 等 幾個人의 反對者가 外寇의 形勢를 盛히 鋪張하며, 그 傳統的 事大主義의 壁壘를 固守하려 하나 이를 攻破함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거늘, 이제 이 같이 成熟한 時機를 善用치 못하고 문득 金富軾(김부식)의 一疏로 仁宗이 遷都의 計를 停止함에 怒하여, 西京에서 兵을 擧하고 天遣忠義軍이라 自稱하며 國號를 大爲라 하고 年號를 天開라 하고, 平壤을 上京으로 定하고 仁宗에게 上京 新闕로 移御하여 그 國號 그 年號를 받기를 求하니, 그 時代 人臣의 禮로 그 얼마나 跋扈한 行動인가? 이 같이 跋扈한 行動을 取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 內部가 鞏固하고 實力이 雄厚한 뒤에 發表할 것이 아닌가? 妙淸(묘청)의 擧兵한 密謀에 尹彦頤(윤언이)와 鄭知常(정지상)이 共參치 못하였을 뿐더러, 妙淸(묘청)의 心腹 弟子인 白壽翰(백수한)까지도 松都에 있어서 進行의 內幕을 漠然히 알지 못하고, 그 共謀者가 不過 西京에 偶留하던 兵部尙書 柳旵(유창)·分司侍郞 趙匡(조광) 等 뿐이요. 突然이 西京兵馬使 李仲(이중)을 執囚하고 그 兵을 奪하여 擧事하였으니, 仁宗이 비록 懦弱하나 어찌 大爲國 皇帝의 虛名을 貪하여 跋扈한 人臣의 根據地인 西京으로 즐기어 移御하였을 것인가? 尹彦頤(윤언이)가 비록 妙淸(묘청)의 稱帝北伐論에 同意하던 一人이나, 어찌 이같이 狂妄한 擧動에야 一致할 수 있을 것인가? 尹彦頤(윤언이)의 一派는 姑舍하고 妙淸(묘청)의 親黨인 文公仁(문공인) 等도 擧兵의 報가 처음 松都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此事의 絶無를 信함에 至하였다. 그러나 事實이 차차 的確하여 옴에, 稱帝北伐論者는 모두 瓦解되고 反對者 等이 雀躍하여 金富軾(김부식)이 元帥로 妙淸(묘청) 討伐의 途에 上하며 鄭知常(정지상)·白壽翰(백수한) 等은 出兵 前에 金富軾(김부식)에게 被殺되며, 尹彦頤(윤언이)는 妙淸(묘청)과 같은 稱帝北伐論者임에도 不拘하고 金富軾(김부식)의 幕下가 되어 妙淸(묘청) 討伐者의 一人이 되게 되었다. 鄭知常(정지상)은 詩才가 古今에 絶倫하여 文藝家의 崇拜를 받다가 金富軾(김부식)에게 죽었으므로 後來의 詩人들이 不平히 여겨 그에 대한 逸話가 많이 流行한다. 그 一二를 들겠다. 金富軾(김부식)이 鄭知常(정지상)의 「琳宮擊磬罷天色淨琉璃」 兩句를 달라하다가 鄭知常(정지상)이 許치 않으므로 殺害하였다고도 하며, 或은 鄭知常(정지상)의 「그대가 술 있거든 부디 나를 부르소서.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또한 청하오리. 그래서 우리의 百年 歲月을 술과 꽃 사이에서」 이 時調 一首를 지었더니, 金富軾(김부식)이 보고 이놈이 時調도 나보다 잘한다 하여 殺害하였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文藝의 猜忌도 한 原因이 될지도 모르나 大體는 金富軾(김부식)은 事大主義의 魁요 鄭知常(정지상)은 北伐派의 健將이니, 萬一 鄭知常(정지상)을 살리어 그 作品의 流行을 許한다면 或 그 主義가 復活할지도 모르는 것이라. 이것이 金富軾(김부식)이 鄭知常(정지상)을 殺害한 最大의 原因이다.
 
 

七. 妙淸(묘청)의 敗亡과 尹彦頤(윤언이)의 末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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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宗 十三年 正月에 妙淸(묘청)이 西京에서 擧兵함에 仁宗이 金富軾(김부식)으로 討逆 元帥를 拜하고 金正純(김정순)·尹彦頤(윤언이) 等이 副가 되어 中軍을 率하고 金富儀(김부의)·金旦(김단) 等은 左右 兩軍을 거느려 往征할 때, 不過 數十日에 趙匡(조광)이 妙淸(묘청)을 斬하여 乞降하거늘 匡(조광)의 使者 尹瞻(윤첨)을 下獄하니, 匡(조광)이 다시 抗守하여 그 翌年 十二月에야 비로소 城을 陷하고 趙匡(조광)을 斬하였다. 처음에 金富軾(김부식)이 行軍하는 中路에 寶山驛에 至하여 軍事會議를 開하고 攻擊 緩急의 可否를 諸將에게 물었다. 尹彦頤(윤언이) 等 諸將은 모두 急攻을 主張하나, 金富軾(김부식)은 妙淸(묘청)의 凶謀를 懷抱함이 五六年인즉 그 守備가 完固하니, 幾個日間에 攻拔할 바가 아니라 하여 緩攻을 定하였다. 그러나 妙淸(묘청)은 실상 陰謀를 쌓아 온 것이 아니고, 다만 그 狂妄한 생각에 西京을 據하고 擧兵하여 仁宗의 遷都를 促하면 金富軾(김부식) 等 事大主義者는 自然 驚散하고 仁宗은 할 일 없이 來臨하리라 한 것이, 意外로 討伐軍이 이르자, 그 徒黨이 妙淸(묘청)에 對한 信望이 突落하여 드디어 妙淸(묘청)을 斬하여 乞降함이니, 이는 事實의 明證하는 바이다. 趙匡(조광) 等이 妙淸(묘청)을 斬한 뒤에 朝廷의 赦意 없음을 보고 이에 倉卒히 叛하여 據戰하였으니, 金富軾(김부식)이 萬一 尹彦頤(윤언이)를 信用하였으면 時日間에 討平하였을 것이거늘, 富軾(김부식)이 終是 彦頤(윤언이)를 猜疑하여 緩攻의 計를 쓰다가 末乃에 兩年에 亘토록 勝算이 없어 內로 仁宗의 疑懼가 적지 않고 外로 金國 來侵의 念慮가 急함에, 彦頤(윤언이)의 말을 들어 工人 趙彦(조언)이 製한 石砲로 城門을 부수고 火毬를 던져 陷城의 功을 奏하였으니, 《高麗史》에 妙淸(묘청)·尹彦頤(윤언이)·金富軾(김부식) 三傳을 詳察하면 本 戰役의 成功은 모두 尹彦頤(윤언이)의 策에서 出함이요, 金富軾(김부식)은 寸功이 없음이 明白하다. 尹彦頤(윤언이)가 妙淸(묘청)과 同一한 稱帝北伐論者로서 이제 도리어 妙淸(묘청) 討伐에 盡力하니, 主義를 負함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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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妙淸(묘청)의 咎요 尹彦頤(윤언이)의 責이 아니라 할 것이다. 妙淸(묘청)의 行動이 狂妄하여 그 同黨 鄭知常(정지상) 等을 속여 死地에 빠지게 하고 其他 모든 同主義者를 進退兩難의 境에 서게 하여 稱帝北伐의 名詞까지도 世人의 忌諱하는 바가 되게 하였으니, 尹彦頤(윤언이)가 비록 天才인들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凱旋 後에 金富軾(김부식)이 尹彦頤(윤언이)를 鄭知常(정지상)의 親友라 하여 構殺코자 하여 戰功의 賞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六個年 遠謫에 處하였다가 간신히 生還하였다. 尹彦頤(윤언이)의 自明表에 「在壬子年西幸時上請立元稱號 … 緊是立元之稱本乎尊王之誠在我本朝有太祖光宗之故事稽諸往牒雖新羅渤海以得爲」라 하여, 立元(年號) 一事만 辨明하고 稱號(帝號)의 一件은 黙過하였으니, 稱帝北伐의 論者로 事大主義의 朝廷에서 苟活하려 하니, 그 身勢의 거북함과 言論의 不自由함을 想見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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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彦頤(윤언이)傳에 據하면 尹彦頤(윤언이)가 晩年에 佛法을 酷好하여 僧 貫乘(관승)과 空門友가 되어 貫乘(관승)이 일찍 一蒲團을 製作하여 尹彦頤(윤언이)와 누구든지 兩人 中 先死者가 蒲團을 쓰기로 相約하였더니, 一日은 尹彦頤(윤언이)가 貫乘(관승)을 찾고 돌아오매, 貫乘(관승)이 蒲團을 보내었거늘 尹彦頤(윤언이)가 웃으며 師가 約을 負치 않는다 말하고 一書를 壁에 써 가로되, 「春復秋兮花開葉落 東復西兮善養眞君 今日途中反觀此身 長空萬里一片閑雲」이라 하고, 蒲團에 坐하여 永眠하였다. 그 壁에 쓴 글이 表面으로는 一個의 佛偈와 같으나, 其實은 主義上 失敗한 憤怒가 言外에 넘친다. 一不而殺六通은 天下의 至痛한 일이라. 妙淸(묘청)이 비록 그 行動이 狂妄하였으나 그 主義上 不朽의 價値는 金富軾(김부식) 類에 比할 者가 아니거늘, 前史에 貶辭만 있고 살린 말은 全無하니 이는 公論이 아니다.
 
 

八. 本戰役後 《三國史記》 編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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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淸(묘청)이 敗亡하여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이 結末되자, 金富軾(김부식)이 드디어 輸忠·定難·靖國·賛化·同德功臣 徽號에 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事·兼吏禮部事의 榮職에 또 集賢殿 太學士·監修國史의 文任을 맡아 高麗 當時의 國史를 監修하는 同時에 羅·麗·濟 《三國史記》를 編撰하였다. 先儒들이 말하되, 三國의 文獻이 모두 兵火에 없어져 金富軾(김부식)이 考據할 史料가 不足하므로 그의 編撰한 《三國史記》가 그렇게 疏漏함이라 하나, 其實은 歷代의 兵火보다 金富軾(김부식)의 事大主義가 史料를 焚滅한 것이다. 金富軾(김부식)의 때 檀君의 神誌나 扶餘의 金簡玉牒이나 高句麗의 留記나 新集이나 百濟의 書記나 居柒夫(거칠부)의 新羅史 같은 것이 남아 있었는지 與否는 알 수 없으나, 이제 《三國史記》 引用書目으로 보면 《海東古記》·《三韓古記》·《高麗(高句麗)古記》·《新羅古事》·《仙史》·《花郞世記》 等은 다 金富軾(김부식)의 及見한 것이며, 高句麗와 百濟가 滅亡하여 新羅와 渤海가 竝峙한 지 不過 二百年만에 高麗 王氏朝가 되었는즉 麗·濟·羅·渤의 古碑 遺文과 民間 傳說이 많이 遺傳되었을 것인즉 이것도 모두 採集할 수 있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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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라 金富軾(김부식) 以後 五六百年만에 外國人의 手로 著作한 《盛京志》·《直隸通志》 等 書에도 高句麗 對 隋唐 戰爭의 古蹟인 高麗城·高麗營·蓋蘇屯·唐 太宗 陷馬處·謊糧臺 等이 多數히 記載되었은 즉 金富軾(김부식)의 當時에는 史料될만한 古蹟이 더욱 豊富하였을 것이니, 金富軾(김부식)이 遼宋에 往來할 때 마음대로 收拾할 수 있을 것이며, 金富軾(김부식)以後 數百年 곧 高麗 末葉에 著作한 《三國遺事》에는 吏讀文의 詩歌를 多數 揭載하였고, 李朝 初葉 編撰한 《高麗史》에는 高句麗의 來遠城과 百濟의 無等山(兩種도 다 吏讀文의 詩歌)를 그 意義를 解讀한 證據가 있은 즉 金富軾(김부식)의 때는 이보다 豊富한 三國의 國詩인 吏讀文의 詩歌를 網羅할 수 있을 것이건만, 이는 다 金富軾(김부식)의 仇讐視하는 바이요 採錄코자 하는 史料가 아니다. 何故인가 하면, 金富軾(김부식)의 理想的 朝鮮史는 (一) 朝鮮의 疆土를 바싹 줄여 大同江 或 漢江으로 國境을 定하고, (二) 朝鮮의 制度·文物·風俗·習慣 等을 모두 儒敎化하여 三綱五倫의 敎育이나 받고, (三) 그런 뒤에 政治란 것은 오직 外國에 使臣 다닐 만한 卑劣한 外交의 辭令이나 堪任할 人을 養成하여 東方君子國의 稱號나 維持하려 함이다. 그러나 金富軾(김부식) 以前에 朝鮮史는 거의 金富軾(김부식)의 理想과 背馳되어 疆土는 遼河를 건너 東蒙古까지 連接한 때가 있으며, 社會는 郞家의 宗敎的 武士風을 받아 孔·孟의 遺訓과 다른 方面이 많으며, 政治界에는 往往 廣開土王·東城大王·眞興大王·沙法名(사법명)·乙支文德(을지문덕)·淵蓋蘇文(연개소문) 같이 外國과 挑戰하는 人物이 間出하여 金富軾(김부식)의 頭痛꺼리가 一二三 뿐만이 아니더니, 이제 千載一時로 西京戰(서경천도운동) 後에 勝利한 뒤를 機會삼아 그 事大主義를 根據하여 《三國史記》를 作할 때, 그 主義에 合하는 史料는 敷演讚嘆 或 改作하며 不合하는 史料는 論貶塗改 或 刪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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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을 不信하거든 《三國史記》를 보라. 扶餘와 渤海를 拔去할뿐 아니라 百濟의 慰禮는 稷山이라 하고, 高句麗의 州郡을 太半이나 漢江 以南에 옮기고 新羅의 平壤州를 削除하여 北方 疆土를 外國에 割讓함에 그 理想에 맞추려 함이 아닌가? 朝鮮의 固有한 思想으로 發展한 花郞의 聖人인 永郞(영랑)·夫禮郞(부례랑) 等은 姓名도 記載하지 않고 唐朝 留學生으로 거의 唐에 同化한 崔致遠(최치원) 等을 崇拜하며, 唐과 血戰한 扶餘 福信(복신)은 列傳에 올리지 않고 投降한 黑齒常之(흑치상지)를 特載함이 그 理想에 맞추려 함이 아닌가? 其他 이 같은 種類가 許多하여 枚擧할 수 없다. 大槪 自家의 理想과 背馳되는 時代의 歷史에서 自家 理想에 符合하는 事實만을 收拾하려 한즉 그 史料도 艱乏하려니와, 또 不得已 孔丘(공구)氏의 筆削主義를 써 그 事實을 加減 或 改作할 밖에 없을 것이다. 그 中 가장 刪削을 당한 者는 儒敎徒의 事大主義의 正反對되는 獨立思想을 가진 郞家의 歷史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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噫라, 李勣(이적)과 蘇定方(소정방)이 麗·濟의 文獻을 掃蕩하였다 하지만 그 史學界의 刧運이 어찌 金富軾(김부식)의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의 結果에 及하랴? 金富軾(김부식)이 花郞의 歷史를 憎惡하였을 것인데, 何故로 《三國史記》 中에 그 事實을 全削치 않았는가? 金富軾(김부식)은 大槪 中國史를 尊重히 여기는 者라. 花郞의 事實이 唐人의 《新羅國記》·《大中遺事》 等 書에 記載된 고로 金富軾(김부식)이 不得已 몇 줄의 郞家典故를 적어 줌이다. 郞家에서 女敎師를 源花라 하고 男敎師를 花郞이라 한 것이거늘, 《三國史記》에는 源花와 花郞의 區別을 混同하였으며, 「斯多含傳」에 斯多含(사다함)이 眞興王 二十六年에 花郞이 되었거늘, 本紀에 眞興王 二十七年에 源花·花郞이 始하였다 하여 그 年代를 錯誤하였으며, 花郞은 高句麗 皁衣仙人을 模倣한 者거늘 그 來歷을 抹殺하였으니, 可惜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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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찍이 《高麗圖經》을 閱한즉, 그 目錄에 「仙郞」이 있거늘 매우 반갑게 그 篇을 披覽하니, 全部가 一字도 없이 缺頁이 되고 말았다. 中華(중국)人의 三國과 渤海에 關한 記事로 《東蕃志》·《渤海國志》 等이 許多하였지만 一卷도 傳한 것이 없고 그 傳하여 온 書籍에도 우리의 要求하는 바, 朝鮮이 자랑할 만한 事實로 《三國史記》나 《高麗史》에 빠진 記事는 매양 缺頁되어 《南齊書》에 적힌 東城大王과 沙法名(사법명)의 戰史가 二頁이 缺하고 《高麗圖經》에 仙郞典故의 數頁이 缺하였다. 이 어찌 後의 故意로 한 者가 아닌가?
 
 

九. 《三國史記》가 唯一한 古史된 原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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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古記인 《仙史》와 《花郞世記》 等은 모두 滅種되고 오직 《三國史記》란 一書가 世間에 傳하였으니, 이는 彼等 諸史의 價値가 모두 《三國史記》보다 劣한 明證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本書의 優劣로 생긴 結果가 아니라 대개 以下 數種 事件에서 原因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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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의 뒤에 다시 第二의 南京戰役이 나지 못하여 尹彦頤(윤언이)·鄭知常(정지상) 等 一流의 人物은 誅死가 아니면 竄逐을 當하여 다시 그 主義로 社會에 提供치 못하게 되자, 郞佛 諸家의 著史는 다시 讀者의 要求가 못될 뿐더러 또는 金富軾(김부식)이 《三國史記》를 編撰한 뒤에 一切의 史料를(곧 前述한 古記 等) 宮中에 秘藏하여 他人의 閱覽의 길을 끊어 自己의 博學者인 名譽를 保全하는 同時에, 國風派의 思想 傳播를 禁止하는 方法을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三國史記》가 홀로 當時 社會의 唯一한 流行의 歷史가 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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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三國史記》가 流行된 以後에 高麗의 國勢가 더욱 衰弱에 向하여 不過 百餘年만에 蒙古가 勃興하여 그 勢力이 歐·亞 兩 大陸에 橫絶하여 中華(중국)를 倂合하자 高麗가 오직 卑辭厚幣로 그 國號를 維持하게 되다가 마침내 彼의 壓迫이 政治 以外 各 方面에 미쳐 「皇都」·「皇宮」 等의 名詞를 廢하게 되며, 심지어 八關會에 쓰는 樂府詩歌까지 가져다가 「天子」·「一人」 等의 句語를 고치게 하고, 王建 太祖 以來의 實錄을 가져다가 許多한 竄削을 行하니, 이에 오직 《三國史記》 같은 史冊에 據하여 우리가 自古로 事大의 誠意가 있다는 자랑을 하게 된 때 宮中 秘藏의 古史가 더욱 深藏하게 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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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蒙古의 勢力이 屛逐되자 高麗朝의 運命도 또한 告終하였다. 李氏朝가 創業하자 비록 內政과 外交를 다 自主하여 他方의 掣肘를 받지 아니 하였으나, 다만 그 創業의 始因이 威化島의 回軍이 되므로 《三國史記》 以外의 歷史를 世上에 公布할 意氣가 없어서 松都의 秘藏이 다시 漢陽의 秘藏이 될 뿐이었다. 鄭道傳(정도전)이 《高麗史》를 編撰할 때, 《三國史記》의 書法을 奉承하여 蒙古帝朝에서 미쳐 다 竄改치 못한 나머지까지 竄改하더니, 그 뒤에 世宗이 金宗瑞(김종서)·鄭麟趾(정인지) 等을 命하여 太祖 以來 實錄 가운데 「詔」·「朕」 等 字 곧 鄭道傳(정도전)의 「敎」·「予」 等 字로 改한 者를 다시 原文대로 恢復하였다. 그러나 그 全部가 거의 鄭道傳(정도전)의 竄改한 原本이었으니, 하물며 蒙古 帝朝의 竄削을 當한 者야 어찌 恢復하였으랴? 그런즉 高麗의 史料도 史料될만한 史料는 三國의 史料와 같이 모아 秘藏 속에 갇혀 있게 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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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中國書는 本朝史를 自由로 著作치 못하는 惡習이 있었거니와, 우리 朝鮮에는 前述과 같이 前代史까지도 官史나 準官史 以外에는 마음대로 보거나 쓰거나 하지 못하는 恠習이 있었다. 그러므로 悔齋 李彦迪(회재 이언적)이 일찍 《沙伐國傳》을 지어서 秘密히 家藏하였다가 偶然히 親友의 携去한 바가 되어 大禍를 當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上古 以來 歷代의 秘藏이 數百年來 景福宮 中에 숨어 內外하는 處女的 書籍이 되었다가 壬辰亂(임진왜란, 1592)의 兵火에 葬하고 말았을 것이니, 三國의 史料될 諸史가 모두 滅種되고, 오직 《三國史記》만 傳하여 온 것이 上述한 數種 原因에 不出할 것이다. 或은 말하기를 그러면 《三國遺事》는 어찌 流傳하였는가? 이는 다만 佛敎의 源流를 叙述하고 政治에는 或 語及하였어도 大禮가 《三國史記》를 依倣할 뿐이요, 事大主義의 意見과 衝突된 곳이 없는 까닭이다. 大覺國師(대한국사)의 《三國史》는 金富軾(김부식) 《三國史記》 以前의 著述인데 《李相國集》 가운데, 《東明王篇》 註에 引用한 者로 보면 그 史料될 價値가 《三國遺事》보다 倍勝할 것이나, 이것도 마침내 滅種됨은 金富軾(김부식)의 《三國史記》와 趣旨가 같지 않은 까닭이다. 《高麗史》는 鄭道傳(정도전)이 撰하다가 逆誅하고 金宗瑞(김종서)가 이어서 完成하였으나, 그도 또한 政變에 죽으므로 世祖가 드디어 鄭麟趾(정인지)의 撰이라 名하여 行世한 것이다.
 
 

十. 結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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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 叙述한 바를 다시 簡略히 總括하여 말하면 朝鮮의 歷史가 元來 郞家의 獨立思想과 儒家의 事大主義로 分立하여 오더니, 突然이 妙淸(묘청)이 佛敎徒로서 郞家의 理想을 實現하려다가 그 擧動이 너무 狂妄하여 敗亡하고 드디어 事大主義派의 天下가 되어 郞家의 尹彦頤(윤언이) 等은 겨우 儒家의 壓迫 下에서 그 殘命을 苟保하게 되고, 그 뒤에 蒙古의 亂을 지나매 더욱 儒家의 事大主義가 得勢하게 되고, 李朝는 創業이 곧 이 主義로 成就되매 郞家는 아주 滅亡하여 버렸다. 政治가 이렇게 되매, 宗敎나 學術이나 其他가 모두 事大主義의 奴隸가 되어 佛敎를 信하면 依樣의 棒喝을 傳授하는 太古(태고)나 普愚(보우)가 날지언정 平地에서 突起하는 元曉(원효)가 날 수 없으며, 儒敎를 從한다 하면 程朱의 規矩를 恪遵하는 退溪(퇴계 이황)나 栗谷(율곡 이이)이 될지언정 門路를 自立하는 鄭竹島(죽도 정여립)는 存立할 곳이 없으며, 비록 世宗의 正音이 製造된 뒤일지라도 原郞徒의 頌歌가 나지 않고, 唐人의 月露를 吟하는 漢詩家가 充斥하며, 비록 甲午·乙未의 時機를 際遇할지라도 眞興大王 같은 經世家가 일어나지 않고, 外勢를 따라 轉移하는 社會될 뿐이니, 아아 西京戰役(서경천도운동)의 지은 原因을 어찌 重大하다 아니하리오?
【원문】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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