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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치상지 ◈
◇ 죽음보담 슬프다 ◇
해설   목차 (총 : 8권)     처음◀ 1권 다음
1939년
현진건
 

1. 죽음보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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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로로 숯재 탄현(炭峴)를 지나 황산벌로 해서 짓쳐 들어온 신라군 오만 명과, 수로로 기벌포(伎伐浦)를 거쳐 사자수(泗.水, 사차수)를 거슬러 올라온 13만 당병(唐兵)은 서로 합세하여 물밀듯 소부리(所夫里) 서울을 에워싸고 어렵지 않게 사자성을 무찔렀다. 26세 성왕이 웅진(熊津)에서 도읍을 옮긴 지 123년 동안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자랑하던 사자성도 당(唐). 라(羅)연합군 앞에 낙성이 되고 만 것이다.
 
3
웅진으로 파천했던 마지막 임금 의자왕(義慈王)도 대세가 글러진 것을 깨 닫고, 당장 소정방(蘇定方)의 군문에 나아가 항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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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신라 무열왕 6년,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18년, 백제 의자왕 19년 경신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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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당년에는 고구려와 두 손길을 마주잡고 승병백만(勝兵百萬)을 몰아 북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유연(幽燕)을 들부수고, 서로 황해를 건너 오. 월(吳越)을 짓밟던 크고 강하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풀끝의 이슬보담도 더 하잘것없이 스러졌다.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고구려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나라를 일으킨 후 678년, 역대(歷代)는 의자왕까지 31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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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군사의 발굽은 사나운 이리떼 모양으로 호기롭게 오만하게 잔인하게 백제의 산과 강과 들과 집을 자욱자욱이 피로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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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망할 제 빚어내는 크고 작은 비극. 그 가운데는 드러난 비극보 담 숨은 비극이 더 많을 것은 다시 이렁성거릴 필요도 없으리라. 이 숨은 비극에야말로 사람의 뼈를 저며내는 듯한 물기 한 방울 없이 보송보송하게 메마른 슬픔과, 숨이 막히고 피가 끓어오를 원한과, 차마 바루 보지 못할 악착함이 겹겹이 접히고 쌓인 것이다. 드러나기엔 너무도 지긋지긋한 비극 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숨은 비극을 그리기 전에 위선 가장 드러난 비극 두어 개를 적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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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색에 미친 왕을 간(諫)하고 또 간하다가 필경엔 좌평(佐平)이란 높고 귀한 지위로 마치 흉칙한 도적놈과 같이 옥에 갇히 는 몸이 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말라 죽은 성충(成忠). 그래도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는 나머지에 숨이 거의거의 지면서 상소를 올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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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나니 원컨대 한 마디만 더 아뢰고 죽어지 이다. 신이 일찍이 세상의 형세를 살피오매 난리는 반드시 일어날 줄 아옵니다 무릇 군사를 쓰자면 . 반드시 지세를 잘 알고 골라야 하나니, 상류에서 적을 막아야 보전할 수 있으리라.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쳐들어오거든 뭍으론 숯재를 못 넘게 하시고, 물길로는 기벌포까지 들이지 마소서."하는 뜻을 아뢰었건만 임금은 들은 체도 아니하여, 그의 피눈물이 얽힌 마지막 경륜도 물거품에 돌아갔으니, 애닯은 비극은 비극이로되, 뒤늦게나마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임금은 발을 굴러 뉘우쳤고, 더구나 그의 앞을 내다보는 밝음과 갸륵한 정성은 만고에 빛을 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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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적은 군사로 두 나라의 전군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존망을 뉘 알리요. 살아서 욕보느니 차라리 죽음의 쾌함만 같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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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한 부르짖음을 남기고 처자 귄속(妻子眷屬)을 한칼에 베어 버린 계백(階伯) 장군. 오천 정병을 이끌고 신라의 오만 대병을 맞아 일당백(一當百) 의 의기로 네 번 싸워 네 번 이겼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에 그의 몸은 황산벌판의 저녁 노을과 같이 사라졌으나, 그 무쇠 덩이 같은 결심과 하늘에 사무치는 절개는 지금도 늠름히 살아 있지 않은가! 낙화암 머리에서 떨어진 무수한 애젊은 궁녀들! 환락과 영화에 지치던 생활도 한바탕 봄꿈! 적병이 뿌리는 피비린내가 아직도 식지 않은 술잔에 풍기자 아닌 밤중에 임을 따라 버선발로 궁중을 뛰쳐나오긴 나왔으나 생사관두(生死關頭)에 오른 임은 그들을 거느리고 돌보아줄 힘도 경황도 없었다. 바쁘고 빠른 임의 옥보는 그들의 연약하고 허둥거리는 발길을 기다리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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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어둠 속에 임의 자최는 벌써 아득하게 멀어지고 적병의 함성은 한 시각 한 시각 가까워 온다. 갈 곳을 몰라질팡갈팡하다가 매운 결심으로 죽을 자리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 넘실거리는 강물을 바라보고 큰 바위 위로 몰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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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보라에 비단 치맛자락을 날리며 금비녀 옥비녀가 우수수 떨어지자 풀어진 머리칼이 흰 얼굴에 휘감긴 채,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몸을 던지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창자가 오그라 붙을 노릇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임 향한 붉은 마음과 깨끗한 몸을 끝까지 지킬 수가 있었다. 미친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애처로우나 아름답게 흩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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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인생의 한끝 가는 슬픔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러나! 드러난 죽음의 비극은 오히려 빛나고 향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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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삶의 비극은 너무도 악독한 희생을 요구하였다. 고량부리(古良夫里)큰거리로 지나가는 저 당병의 한 떼와 잡혀 가는 백제의 관원과 백성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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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량부리라면 백강을 건너 서울 소부리와 마주보는 고을. 큰 강이 갈리었다 뿐이지 이수로(里數) 말하면 오십리 안팎,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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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을은 그 지리상 관계로 용하게 혹독한 병화는 입지 않았다. 서울과 동안이 뜬 탓에 사자성이 함락이 될 때에도 직접 싸움터가 되지 않아 도륙(屠戮)을 면하였고, 또 가까운 탓에 이 고을을 지키던 장수와 병정들이 모조리 서울로 몰려가고 이렇다 할 딴 방비가 없었다. 더구나 백성들까지도 소문을 빨리 듣고 묵직묵직한 가장집물(家藏什物)들을 꾸려 가지고 피란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끔찍스럽게 길가에 가루누운 즐비한 송장도 없고 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노릿한 사기황 냄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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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의 공기는 오히려 맑고 깨끗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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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 구름 한 점 없이 갠 하늘은 너무도 청청하다. 잎사귀는 거의 다 떨어지고, 따다가 남긴 감들이 앙상한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쨍쨍한 햇발을 받고, 그 농익은 붉은 뺨이 아늘아늘 곧 터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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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에 늘어선 텅 빈 집들엔 어리친 개아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허둥지둥 도망질을 치느라고 흘리고 버리고 빠뜨리고 간 허접쓰레기 피륙 오래기와 수지쪽들이 이따금 바람을 따라 더부렁더부렁 춤을 출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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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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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빠진 사립문과 어훙하게 열린 대문과 풍풍 뚫리고 찢어진 창호 구녕에서 도깨비라도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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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으스스하고 무시무시한 적막은 별안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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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렁거리는 우렁차고 사나운 말 소리, 둔하고 무딘 소 울음, 고래고래 꾸짖고 호령하는 사이로 꿀꺽꿀꺽 눈물을 삼키는 그윽한 떨림, 잉잉하고 채 쪽이 울자 찢어지는 듯한 비명, 쟁그랑 철렁 쇠붙이의 울림, 요란한 인마의 자국이 와글와글 물 끓듯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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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병의 한 떼가 노략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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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마지막 승전을 하자 군사들에게 며칠 말미를 주었다. 이 말미란 것이 싸움 이긴 뒤에 있어서의 무엇보담도 큰 상이었다. 곧 저희들 멋대로 마음대로 노략질을 하라고 군율의 굴레를 벗겨 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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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미야말로 병정들에겐 다시 없는 기회였다. 지금까지 군율에 얽히어 굶주리고 참고 죽음도 무릅쓰고 더구나 불같은 수욕(獸慾)도 눌렀지만, 한 번 말미를 얻은 다음에야 저희들 판이요, 저희들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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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병정에 뽑히기는 이름이 좋아 간선이지 실상인즉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요행수로 공을 세워 입신양명(立身揚名) 하자는 마음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하늘에 별을 따기보담 더 어려운 것, 노략질이야말로 병정된 가장 큰 목적이요 보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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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박차고 뛰어나온 사나운 짐승의 떼와 같이 그들은 방방곡곡으로 눈에 불을 켜고 쏘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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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부터 욕심 많은 그들, 더구나 남의 나라 남의 땅 다른 백성, 실낱만한 인정사정을 보고 염치코치를 차릴 까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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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뜨이는 어느 것 하나 그들의 구미를 당기고 탐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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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보화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는 의복 나부랭이 같은 것조차 그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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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돼지와 양과 닭은 그들의 입에 한결 기름지고 달았다. 별스러운 술 맛은 그들의 창자까지 향기롭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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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여자 ─ 이국 계집의 살은 더욱 미끄럽고 보드라웠다. 얼굴은 개 개이 절색이요, 늙은 것, 젊은 것까지 구별조차 할 수 없었다. 앙탈을 하고 항거를 하고 버르적거리며 자반뒤집기를 하는 것이 도리어 욕심의 불길에 기름을 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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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짜는 번개같이 빠르다. 말미의 기한은 오늘로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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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본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같이 쌓인 사냥한 물건을 잡아먹고 남은 소에게 바리바리 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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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냥한 것은 물건과 짐승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은 사람 사냥이었다. 그중에 젊은 어여쁜 여인이 으뜸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주 꼬부라진 늙은이나 젖먹이 어린애가 아니면 계집 명색 치고는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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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사내라고 기운 꼴이나 쓸 만한 장정과 부리기 좋을 만한 애놈들까지 주워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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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가기에는 거추장은 스러웠지만, 종으로 팔면 사람값이 변변하지 않은 보물보담 나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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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서북쪽에서 소부리 서울을 가려면 대개 이 고량부리 거리를 거치기 때문에 시방 노략질을 마친 당병의 한 떼가 이리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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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군사의 행진이지 옳은 항오(行伍)조차 차리지 않았다. 혹은 서넛, 혹은 대여섯씩 무더기 무더기 덩치를 지었다. 가뜩이나 호들갑스럽고 야단스러운 그 족속들의 수작인 데다가 호기가 날 대로 났으니, 꺼덕대고 떠드는 품이 산이라도 떠나갈 듯하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손바닥에 침을 칵칵 배앝아 보이기도 하고, 화타(華陀)에게 활촉을 빼는 관운장(關雲長) 모양으로 팔을 부르걷어 뽐내기도 한다. 장비(張飛)의 본을 받아 눈을 고리처럼 부릅뜨고 잡아먹을 듯이 동료를 노려보다가 너털웃음을 내어놓고 손짓 발짓으로 무슨 시늉을 그려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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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얘기에 신이 나서 야단법석인데 곤드레만드레한 대강이를 친구의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인 채 천하태평으로 꾸벅꾸벅 졸며 다리를 질질 끌어가는 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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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달모 달린 벙거지를 뒤로 벌렁 젖힌 채 허리띠를 느슨하게 끌러서 허벅지까지 흘러 나린 고의를 끌어올리려고도 아니하고, 발길로 제 바짓가랑이를 지근지근 밟으면서 자욱을 옳게 못 떼어놓는 위인은 과식과음(過食過飮) 한 탓에 제 배를 추스를 수 없는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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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개 빠진 허리를 잘 가누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져서 먼 산만 바라보며 그 몽총한 얼굴에 혼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빙글빙글 흘리는 것은 지나간 음탕한 꿈을 새김질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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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정들은 그래도 앞장을 선 축들이다. 바루 그 뒤에는 노략질한 물품을 실은 소바리가 꼬리를 물고 잇달았다. 이 약탈품을 앞에도 안 세우고 뒤에도 안 세우고 한복판쯤 실린 것을 보아도, 그들이 재물이라면 사죽을 못 쓰고 얼마나 끔찍이 아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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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를 몰고 가는 이는 모두 백제 백성들로 사 오십 세 되는 중늙은이와 열 서너 살 되는 소년들이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탓에 항거하는 것이 쓸데없는 줄 알아 고분고분히 그들의 말을 잘 듣고, 또 나이 어려서 자기들 이라면 기급을 하는 것을 골라 뽑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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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미심다웠는지 소바리 양 가에는 가죽 채쪽과 창대를 든 당병들이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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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몰이들은 고개를 틀어메고 땅바닥만나려다보며 푸줏간에 끌려가는 양 과 같이 풀기 하나 없이 걸어가건만, 양 가에 늘어선 당병의 성난 눈초리는 그들의 일거일동에 번쩍였다. 아무 까닭도 없이 이따금 채찍은 그들의 등줄기와 종아리에 떨어졌다. 맞은 사람이 웬 영문인지 모르고 깜짝 놀라 힐끗 돌아다보는 날이면 큰일이다. 그 사정없는 채찍은 얼굴에 정강이에 홱홱 바람을 날리며 수없이 떨어진다. 맞으면 맞는 대로 아까 몸 자세를 그대로 지키고 갈 길을 가야 한다. 사람은 소를 몰고 당병은 사람을 몰았다. 소 모는 사람은 아무 까닭 없이 소를 때리지 않았지만, 사람을 모는 당병은 아무런 이유 없이 실상인즉 자기들의 심심풀이로 사람을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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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만도 못한 학대받는 목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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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 중에는 참고 참았던 울음이 복받쳐 나와 제법 엉엉 소리를 내다가 제 스스로 질겁을 하고 울음을 물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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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바리 뒤에는 백제 장정들이 묶여간다. 더러는 쇠사슬로 혹은 오랏줄 참 밧줄 있는 대로 마주 묶였다. 초벌로 셋씩 손과 손을 단단히 결박을 지은 다음에 다시 세 줄을 세워 아홉 사람을 한 덩치로 만들어 가지고 그 사이를 두 자쯤 띄워서 다시 기다란 줄로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의 팔을 떠꿰어서 전후 좌우로 두 벌로 결박을 돌려놓았다. 이 큰 결박의 무더기가 댓 개는 넘었다. 장정들의 좌우에는 당병들이 더 엄하게 더 촘촘하게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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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정들은 성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마에 칼자국이 시뻘겋게 남은 이도 있고, 머리통 한복판이 쩍 갈라져서 골이 허옇게 내다 비치는 이도 있었다. 귀가 반이나 찢어져 피딱지가 덕지덕지 앉은 것, 두 뺨이 퉁퉁 부어 오르고, 한 눈이 튕겨 나온 것, 절름절름 저는 다리, 옳게 못 쓰는 고개 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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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름이 떨어지고 갈기갈기 찢어진 옷자락이 펄렁거리는 대로 드러나는 맨 살엔 모두 멍든 자리요 피 흐른 흔적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모진 목숨이 붙은 탓으로 잡혀오는 것이다. 아주 죽은 송장이야 들메고 오 지도 않겠지만 너무 맞아서 병신이 된 것은 내어버리고, 그러고 성한 장정 이라고 골라 잡아온 것이 이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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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결박한 줄 때문에 앞뒤로 당기고 또 옆으로 켕기어 걸음을 걸을래야 걸을 수도 없었건만, 창대와 칼등은 다친 다리와 멍든 자국 위에 또다시 새로운 살을 묻혀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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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받치어 아픈 줄도 모르는지 그들의 뻘겋게 핏발선 눈은 아무리 모진 매를 맞아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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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벌도 아니요, 두 벌씩 엮어 놓고도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백제 장정 뒤에는 서리 같은 창검을 번쩍이며 말 탄 당병이 여남은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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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겐 사람 잡는 병상기는 풍성풍성하였지만 사람 얽는 기구는 동이 났던지 이 말꼬리조차 이용하기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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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감생심 자기네들에게 대항거리를 한 포로 중에도 제일 밉고 거센 놈은 그 머리를 풀어서 이 말꼬리에다가 친친 매어달았다. 이것은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다. 첫째로 얽는 데 귀한 사슬과 줄이 들지 않았고, 둘째는 벌을 주사면 힘들여 매질할 것도 없이 말만 달리면 고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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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는 못 당할 욕을 당하고 끌려가는 백제 부녀들. 사내 포로와 달라 대우는 자못 융숭하다. 손과 발을 묶지도 않았고, 붉고 푸른 피륙을 찢어서 띠처럼 허리들을 날씬하게 졸라매었다. ‘세류(細柳)같이 가는 허리’의 풍정을 이런 판에도 맛보려는 것이리라. 둘씩 둘씩 짝을 지어 한데 얽기는 얽었으나 얽은 고를 느슨하게 늦추어서 몸 놀리는데 그리 거북지 않게 맨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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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풀어 산발한 이, 입술을 깨물어 앙다문 흰 이빨에 피가 고인이, 젖먹이를 업고 아이가 보챌 적마다 홉뜬 눈으로 당병의 기색을 살피는 어머니, 아귀적아귀적 부서진 엉치를 못 쓰는 처녀, 짚쑤세미가 다 된 치마를 밝은 날을 보기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가린 안해, 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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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죽은 듯이 종용하게 고개를 수그리고 발길을 옮기었다. 그러나 어디선지 꿀꺽꿀꺽 눈물 삼키는 소리가 흘러들면 체했던 울음이 흑흑 터져 나 오고, 가슴이 메어지는 한숨이 회호리바람처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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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탄(長歎)과 홍루(紅淚)는 미인에게 붙어 다니는 것인 줄 알았음이리라.
 
63
당병은 이 여인들의 눈물에 대해도 매우 관대하였다. 사나운 호령과 불 같은 채 쪽이 좀처럼 나려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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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부녀 뒤에는 말 탄 여자가 몇몇 있었다. 대개는 너울너울하는 긴 소맷자락으로 얼굴들을 가렸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맨두리와 차림차림과 소매에서 빠져 나온 가늘게 떠는 분결 같은 손을 보면 좌평(佐平)이나 달솔(達率) 따위의 백제 귀인의 집 부인이나 딸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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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귀부인들의 말을 몰고 가는 마부는 물론 백제 사람이지만 어떤 자는 치장이 자못 혼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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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놓은 비단 대수삼(大袖衫)을 떨쳐 입고 버젓하게 은화(銀花) 붙은 관을 쓰고 자줏빛 허리띠에 가죽 목화를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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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짓궂은 당병이기로 높고 아름다운 여자의 탄 말을 어거한다 하여 그 마부까지 이대도록 굉장한 치장을 해놓을 수 없으리니, 그렇다면 바루 어제까지도 호기를 부릴 대로 부리던 고관대작이 오늘날 여자의 말몰이로 신세를 바꾼 모양이다. 더구나 그가 끌고 말 위에 탄 사람이 바로 그의 안 해나 딸인지도 모른다.
 
68
이 여자들 중에는 제 남편이나 아버지가 군사를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외로운 성을 지키다가 무참한 당병의 칼날에 쓰러지고 자결할 겨를도 없이 사로잡혀 오는 충신의 가속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도성이 함락될 때, 또는 함락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임금도 버리고 나라도 버리고 제 한 목숨 살겠다고 가족을 데리고 피란을 한다고 한 것이 어찌어찌 당병의 눈에 띄어 끌려나온 화상들이었다.
 
69
백명의 여느 백성을 잡는 것보담 한 명의 관장을 잡는 것이 당병에겐 더 큰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70
"우리 사냥엔 이런 큰 것도 잡혔네."
 
71
하고 자랑삼아서 일부러 관복을 뒤져내어 입혀 가지고 마부를 맨든 것이었다.
 
72
백제 귀부인은 곱고 어여쁘다. 이들을 병정의 손에 맡길 수 없다. 말까지 태워놓고 도위(都尉) 따위의 당장 두셋이 역시 말을 타고 갑옷 투구에 위의를 갖추고 아름다운 포로의 곁을 지싯지싯대어섰다.
 
73
모든 사람들이 우는 빛이요 풀이 죽은 가운데, 마상의 귀부인 하나만 수색이란 찾으랴 찾을 수 없고 그 아름답고 번화한 얼굴에 오히려 방글방글 웃음살을 퍼뜨린다. 나이는 이십 남짓, 꽃잎 같은 입술이 유난히 붉고 간 잔 주런한 눈썹이 그린 듯이 반달 모양을 지은 것을 보면 이 난장판에도 그 귀부인만 새로 단장한 지가 오래지 않은 것을 알으킨다.
 
74
그는 저와 말고삐를 나란히 한 얼굴 긴 당장에게 살금살금 추파까지 보내었다.
 
75
말상 지은 당장은 그 귀부인의 눈웃음을 알아보자, 시방 막 꿈을 깬 듯한 부루퉁한 상판에 벙긋이 웃음을 띠우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번 하였다.
 
76
"고단도 하실 테지, 어규! 입도 크기도 해라."
 
77
거진 귀밑까지 찢어져 올라간 떡 벌린 당장의 아가리를 바라보며 그 귀부인은 혼자 시시덕거린다.
 
78
눈물이 글썽글썽하도록 하품을 하고 난 당장은 제 귀 뒤에 손을 대고 아래턱을 번쩍번쩍 쳐들며,
 
79
"뭐? 뭐?"
 
80
하고 묻는 눈치다.
 
81
"입도 크단 말씀이에요. 원 세상에 알아들어야지."
 
82
귀부인은 깔깔대었다.
 
83
"응? 응?"
 
84
이번에는 귀를 한 치라도 더 가깝게 당겨 가려고 고개를 기우뚱하게 귀부인의 남실거리는 입술 위에 기울이며 채쳐 묻다가 당어(唐語)로,
 
85
"천연 꾀꼬리가 지저귀는 것 같구나. 이거야 어디 알아들을 수 있나."
 
86
혼자 흥얼거리고 한판을 벌렸다가오그리며 그 음흉스러운 콧등을 찡긋찡긋해 보였다. 껴안아 주려 하는 뜻이리라.
 
87
"아이 망측스러워라."
 
88
귀부인은 살짝 눈을 흘겨 보이었다.
 
89
당장은 그 예쁘장한 눈매를 꼴딱 집어삼킬 듯이 마주보다가 바싹 말을 채 쳐 부치고 그 기름한 손가락으로 분빛 새로운 귀부인의 뺨을 가볍게 튀기었다.
 
90
귀부인은 매우 아픈 듯이,
 
91
"아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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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보얀 목덜미를 길게 빼어 달아나며 앵돌아진 양을 한다. 당장은 눈을 감는 듯이 지긋이 뜨고 히히 웃다가 털이 숭숭 난 손등으로 계집의 아른아른한 볼을 문질러 준다.
 
93
"어휴, 가엾어라. 그렇게 아프단 말이냐? 쉬쉬."
 
94
하고 달래는 셈이리라.
 
95
"몰라요, 난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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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은 또 한 마디 톡 쏘기는 쏘았으나, 머금었던 웃음을 픽픽 터뜨리고 만다.
 
97
어느새 사내의 늘인 팔은 계집의 날씬한 허리가 휘청하도록 안아 당기었다. 계집의 몸이 이쪽으로 홱 돌아오는 서슬에 비뚝하며 몸이 쏠리어 말 등에서 미끄러지게 되었다. 엉겁결에 사내는 또 한 팔로 떨어지려는 계집의 몸을 잡아 멈추어서 낙마는 면하였으나, 그 사품에 사내는 제가 잡았던 제 말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98
귀부인의 팔딱거리는 젖가슴은 아직도 비스듬히 당장의 팔 안에 안겨 있는데, 당장은 그 귀부인의 말을 몰고 가는 한다하게 채린 마부를 나려다보고 고래고래 뇌까리었다.
 
99
"이놈아, 눈이 멀었느냐! 그 떨어진 말고삐를 어서 집어 올리지 못하고 지근지근 밟고 가느냐?"
 
100
귀인 마부는 힐끗 돌아다보고 말은 분명히 못 알아들었으나마, 눈치로 당장의 뜻을 짐작하고 불야불야 말고삐를 주워서 두 손으로 바치었다.
 
101
그 백제 귀인마부는 오십을 지나 육십을 바라보는 듯 귀밑털이 희끗희끗 세었지만 아주 눈이 어두워서 앞을 못 볼 낫세는 아니었다.
 
102
당나라 장수와 백제 귀부인 이해 가지고 있는 꼴이 그 마부의 눈에 아니 뜨일 수 없었다. 눈에 뜨이다 뿐이냐. 그 해참한 광경이 이글이글다는 쇠끝 모양으로 그의 눈시울 속 깊이 들어와 박히었으리라.
 
103
귀부인은 되우 놀랬던지 하하 가쁘게 숨을 쉬고 제 말구종이 돌아다볼 때 나, 고삐를 집어 바칠 때나 눈은 감은 채 거들떠보지도 안 하였다.
 
104
"장군이 아니더면 말께 떨어져 죽을 뻔했지. 아이 고마워라."
 
105
아직도 제 어깨 위에 얹힌 당장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나려 만지작만지작 한다.
 
106
당장은 가려운 데를 긁어 줄 때처럼 눈을 스르르 감았다.
 
107
"왜 주무셔요? 저런, 저런, 눈을 못 뜨시네. 호호."
 
108
당장은 그 말귀를 알아들었던지 말이 가는 대로 몸을 흔들흔들하며 졸립다는 듯이 정말 고개를 끄덕거린다.
 
109
"아이 정말 조시네."
 
110
하고 쇳조각이 생선 비늘처럼 덕지덕지 붙은 갑옷 자락을 제법 소리가 나도록 퐁퐁 두들겼다.
 
111
"아야야!"
 
112
이번에는 당장이 엄살을 하고 또다시 귀부인을 얼싸안는다. 비단 옷자락에 갑옷 닿는 소리가 버석버석 났다.
 
113
"에그머니! 또 말께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오!"
 
114
귀부인의 아양은 말끝을 길게 빼는 데에도 흐뭇이 풍기었다.
 
115
"후우!"
 
116
귀인 말구종의 입에서는 마츰내 가슴을 쥐어짜는 한숨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117
"내가 이 꼴을 보다니! 이 꼴을……후우."
【원문】죽음보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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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진건(玄鎭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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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