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설(話說). 송(宋)시절의 남양 땅에, 한 사람의 어진 선비가 있었으니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전(佺)이었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라 십세 전에 문필(文筆)이 뛰어남에 당시 사람들이 추앙하는 바이었고, 그 부친 운수간 선생은 염결적직하여 부귀를 부운(浮雲)같이 알아 산림(山林)에 처하여 살았다. 천자께서 이를 들으시고 간의대부를 제수하시되 굳이 사양하고 산중미록(山中麋鹿)으로 벗을 삼아 음풍영월(吟諷詠月)하며 세월을 보내니 이런 고로 형세가 청한(淸閑)하였다.
3
하루는 김생이 벗을 전송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반하수에 이르러 보니 어부들이 그물을 쳐 고기를 잡는데, 마침 거북을 잡아 구워 먹으려 하거늘 김생이 보고 말려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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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매우 이상한 동물이니 죽이지 말라."
6
"비록 이상하나 저희들이 종일토록 고기 잡은 것이 없고, 잡은 것이 다만 이 것뿐입니다. 또한 시장하기로 구워 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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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기맹이 거북을 다시 보니 이마에 천(天)자가 있고 배에 왕(王)자가 분명하였다. 그 거북이 눈물을 머금고 김생을 우러러 보며 죽기를 아끼는 듯 하거늘, 생이 불쌍히 여겨 비싼 값을 주고 거북을 사서 물에 넣어 주니, 거북이 거듭 김생을 돌아보며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 김생이 양양 땅에 벗을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운교 다리를 건너다가 마침 물이 크게 불어 다리가 무너져 그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이 다 빠져 죽게 되었는지가 김생이 여러 사람을 붙들고 앙천통곡(仰天慟哭)하며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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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는데, 문득 보니 깊은 물 속으로부터 매판같은 것이 나와 자기 앞을 향하여 섰거늘 생이 사세(事勢)급하여 그 위에 올라서니 그것이 변하여 꼬리를 치고 네 발을 허위여 물가에 임하였다. 생이 뭍에 나려 정신을 차려 보니 분명 반하수에 넣어주던 거북이었다. 생이 절하여 사례하니 거북이 입으로 안개를 토하여 생이 앞에 무지개가 서는지라 생이 황홀하여 무수히 절하였는데 문득 그 기운이 사라지며, 제비알 같은 구슬이 놓여 있거늘 자세히 보니 오색광채 찬란하고 그 속에 은은한 글자 있으되, 하나는 목숨 수(壽)자요, 하나는 복 복(福)자였다. 김생이 생각하되, '전에 반하수에서 구해준 은혜로 이 구슬을 줌이라.'하고 가지고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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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의 나이 약관(弱冠)에 이르렀으나 집이 가난하여 아내를 두지 못하였다. 형초 땅에 장희란 사람이 있어 본디 공경자손(公卿子孫)으로 가세가 매우 넉넉하였으며, 슬하에 다만 한 딸을 두어 손바닥 안의 보배와 같이 지극히 사랑하여 각별히 사위를 고르던 차에 김생의 이름을 듣고 통혼(通婚)하였다. 생이 이를 허락하고 운교에서 얻은 구슬로 빙폐하니 장희부인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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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렇듯 빈한(貧寒)한 사람과 결혼시키려 하니 어찌 애타지 않겠습니까?"
13
"혼인에 재물을 의논함은 오랑캐의 풍속입니다. 김생의 상모와 풍채가 비상하니 장래 재상의 풍도가 있을뿐더러 이 빙물은 만금(萬金)으로고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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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장인(匠人)을 불러 옥지환을 만드니 광채가 황홀 찬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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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일(吉日)을 가리어 성례(成禮)할 새 김생부부의 단아 준일한 풍채는 과연 천장배필이라 장희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십여 년 만에 장회부처가 갑자기 병을 얻어 마침내 함께 세상을 떠나니, 김생부부는 향화를 극진히 받들어 삼상을 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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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가산(家産)은 풍족하였으나 다만 일점혈욱이 없어 매양 차탄하여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정성으로 기도 드리더니 칠월 보름에 김생부처가 완월루에 올라 달을 구경하는데, 홀연 하늘로부터 흰 꽃 한 가지가 떨어져 장씨 앞에 내려오거늘 자세히 본즉 행화도 아니요, 매화도 아니었다. 맑은 향취가 웅비함으로 장씨부부가 이상히 여기고 있노라니 문득 광풍이 크게 일어나 그 꽃이 흩어졌다. 장씨가 차탄하고 들어와 자더니 그 밤 꿈에 달이 떠오르며, 금두꺼비가 장씨 품에 들었다. 장씨가 놀라 깨어 꿈 얘기를 생더러 이르니 생이 말하기를,
17
"나의 꿈에도 계화가 그대 앞에 떨어지고 금두꺼비가 품에 드는 게 보였으니 얼마 안 있어 자식을 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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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과연 그 달부터 잉태하여 십삭이 차니 이 때는 사월 초파일이었다. 이날 밤에 오색구름이 집을 두르고 향내 진동하며 선녀 한 쌍이 촉(燭)을 들고 들어와 김생더러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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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상서로운 기운이 집안에 가득하였다. 생이 기이하게 여겨 내당(內堂)에 들어가 보니 장씨는 이미 순산(順産)하였고, 선녀가 유리병의 향수(香水)를 기울여 아기를 씻겨 누이며 말하기를,
21
" 이 아기는 월궁소아로서 상제께 죄를 짓고, 태을선군과 인간 세계에 적강(謫降)하였으니 귀히 길러 하늘이 정하심을 어기지 마십시오, 이 아이의 배필은 낙양 이상서집 아들이니 이는 태을입니다. 저희 이제 그리로 가오니 이 아기의 이름은 숙향이라 하고 자(子)는 소아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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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홀연히 가거늘, 생이 들어가 아기를 보니 설부화용이요, 탈속비범(脫俗非凡)하나 다만 여자임을 섭섭히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을 숙향이라 하고 자는 소아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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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향이 다섯 살 되던 때에 병란(兵亂)이 일어나 형주를 침로(侵擄)하니 백성들이 피란하였다. 김생도 가족을 데리고 강릉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도적을 만나 행장노복(行裝奴僕)을 다 잃어버리고 다만 부인과 함께 숙향을 업고 가다가 도적이 점점 가까이 오는지라 생이 능히 달아나지 못하고 부인더러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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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세(司稅) 위급하니 숙향을 바위틈에 감추어 두고 갔다가 도적이 간 후에 데려감이 어떻겠습니까?"
26
"첩은 숙향과 함께 죽을 것이니 낭군은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28
"어찌 그대를 버리고 홀로 가리오? 차라리 셋이 함께 죽읍시다."
30
"장부가 어찌 아녀자를 위하여 죽음을 취하겠습니까? 빨리 가십시오."
31
하였다. 생이 종내 응하지 아니 하니 장씨가 어쩔 수 없이 숙향을 반야산 바위틈에 앉히고 꼈던 옥지환 한 짝을 숙향의 옷 안고름에 채우고 찬밥을 표주박에 담아 주며 말하기를,
32
"이것을 먹고 기다리고 있으면 내일 와서 데려 갈 것이니 울지 말고 기다려라."
33
하니 숙향이 발을 구르며 울며 말하기를,
34
"모친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35
하며 따르거늘, 김생이 무수히 달랠 즈음 돌아보니 도적이 멀지 아니 하거늘 숙향을 어쩔 수 없이 그 바위틈에 버리고 장씨를 이끌고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도적이 다달아 숙향을 보고 물었다.
36
"네 부모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앉아 울고 있느냐?"
37
숙향이 그 말을 다 일러 말하니 도적이 죽이려 하였다. 그런데 그 중 한 늙은 도적이 말리며 말하기를,
38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를 죽여 무엇하겠는가? 내가 그 아이 상(相)을 보니 훗날 귀히 될 것이니 죽이지 말게."
40
숙향이 어찌할 바를 몰라 길가의 가시덤불 밑에 앉아서 부모를 부르며 울고 있노라니 행인들이 불쌍히 여겨 밥도 주고 또 물도 주며 위로하며 말하기를,
41
"너를 데리고 가고 싶으나 내 자식도 간수(看守)하기가 어려우니 불쌍은 하다마는 어쩔 수가 없구나."
43
이 때는 추구월(秋九月)이었다. 한풍(寒風)이 쌀쌀하여 밤이 되자 몸이 추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노라니, 홀연 황새 한 쌍이 날아와 날개로 덮어 주므로 마음속으로 이상히 여겼으나 그 따스한 기운에 잠을 자고 깨어나 보니 날이 이미 밝았는지라 부모를 생각하여 부르짖으며 울었다. 문득 까치가 날아와 숙향의 무릎 위에 않아 울고 날아 거거늘 숙향이 괴이하게 여겨 까치 가는 데로 따라가 여러 산을 넘어 한 곳에 다달으니 큰 마을이 있는지라 숙향이 울고 헤매이었다. 이를 보고, 마을 사람이 물었다.
46
"부모님께서 '내일 와서 데려 가마' 하더니 아직까지도 오지 아니하기에 속절없이 울고 있습니다."
49
하고 먹을 것을 주고 갔다. 숙향이 갈 바를 몰라 주저하는데, 홀연 잔나비가 삶은 고기를 물어다가 주기에 받아먹으니, 배고픈 것을 진정할 수 있었다.
50
이 때에 김생이 장씨를 깊이 숨기고 밖에 나가서 숙향을 찾았으나 종적이 없었다. 돌아와 이 소식을 전하니 장씨 듣고 기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생이 위로하여 말하였다.
51
"숙향이 만일 죽었으면 시신(屍身)이 있을 것인데 다만 그 종적이 묘연(杳然)하니 누군가가 데려간 것이 분명합니다. 전일(前日) 왕균의 말을 생각하여 이제 그만 설움을 억제하십시오."
53
"한 순간이라도 어찌 차마 잊겠습니까?"
55
이 때에 숙향이 정처 없이 다니다가 날이 저물어 나무를 의지하여 앉아 울더니, 문득 푸른 새가 꽃봉오리를 물고 숙향의 손등에 앉았다. 숙향이 그 꽃봉오리를 받아먹었더니 배가 고프지 아니하고 정신이 황연하여졌다. 문득 청조(靑鳥)가 날아가거늘 새를 따라 한 곳에 이르러 보니 굉장한 궁전이 있고 청조가 문으로 들어가고 난 뒤 이윽고 한 노파가 나와서 같이 들어가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숙향이 노고(老姑)를 따라 전(殿)앞에 이르니, 한 부인이 머리에 화관을 쓰고 몸에 칠보장복을 입고 의자에서 내려와 숙향을 맞이하여 말하기를,
56
"선녀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와 계시더니 저를 몰라 보시는 군요."
59
하니, 시녀 마노종에 호박배를 받쳐 드리거늘 숙향이 받아 마시니 정신이 상활(爽闊)하여지며 천상(天上)에서의 일과 인간세계로 적강(謫降)하던 일이 뚜렷이 생각났다. 이에 부인께 사례하여 말했다.
60
"첩이 죄를 얻어 인간 세상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데 부인께서 너그러이 대하여 주시니 더없이 감사합니다."
62
"여기는 또한 명사계(冥司界)요, 첩은 후토부인입니다. 선녀께서 인간 세상에서 고행하시기에 잔나비와 황새, 까치와 청조를 보냈는데 만나 보셨습니까?"
66
"비록 인간세상에서 고초를 겪으시기로 어찌 그렇듯 겸손의 말씀을 하십니까?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여기 머물렀다가 내일 가십시오."
67
하고 잔치를 벌여 관대하는 것이었다. 숙향의 정신이 점점 황연하여 부인에게 물었다.
68
"전에 들으니 명사계에는 시왕(十王)이 계시다고 하던데 과연 옳은 말입니까?"
72
"첩의 인간 세상에서의 부모가 저를 버리고 갔는데 만약에 돌아가셨다면 필시 시왕전에 와 계실 터이오니 찾아뵙고 싶습니다."
74
"그대의 부모도 또한 선군(仙君)으로서 아랫 세상에 적강한 터이므로 시한(時限)이 차면 다시 천상으로 돌아가시게 되는 고로 이 명사계에는 오지 않았습니다."
76
"그러하다면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78
"월궁에 계실 때 규성이라 하는 선녀가 옥황께 여쭈어 부인을 구하려다가 죄를 얻어 인간세상에 내려왔으니 부인이 장승상집에 가서 규성선녀의 전생 은혜를 다 갚은 후에 태을을 만나야 부모의 거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자연 십 오 년이 걸릴 것입니다."
80
"인간 세상에서의 고행은 일각이 여삼추(如三秋)같은데, 이제 십 오 년을 어찌 지내겠습니까?"
82
"그대 마음이 아무리 바쁠지라도 이미 하늘이 정하신 신수(身數)이니 참고 견디며 이제 다섯 번 죽을 액(厄)을 지내고 나면 자연 예전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제 빨리 가십시오."
84
"인간 세상의 길을 모르니 누구의 집에 가서 의탁하여야겠습니까?"
86
"가실 길은 제가 지시하겠습니다. 장승상 집으로 먼저 가십시오."
87
하고, 금분(金盆)에 심은 나무 한 가지를 꺾어 사슴의 뿔에 매고 숙향에게 말하기를,
88
"이 사슴을 타고 가다가 내리는 곳에서 배고프거든 이 열매를 먹으십시오."
89
하고, 문득 온데 간데 없었다. 숙향이 사슴의 등에 오르니 그 사슴이 구름을 헤치고 가니 그 가는 바를 모르겠더라. 한 곳에 이르러 멈추어 서기에 숙향이 사슴 등에서 내려 배고픔을 느껴 그 열매를 먹으니 배부르고 천상 갈 일이 까마득해지는 것이었다. 갈 곳을 몰라 모란나무 포기를 의지하여 잠깐 졸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장승상집 동산이었다.
90
승상은 남군 땅 사람으로 나이 어릴 때 과거에 급제하여 삼십전에 정승을 하여 명망이 일세를 덮었었으나 신종황제 재에 이르러 간신의 참소(讒訴)를 입어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에 돌아와 한가롭게 지내고 있었다. 슬하에 다만 일점 혈육이 없어 늘 마음 속으로 쓸쓸해 하던 중에 하루는 부인의 꿈에 한 선녀가 내려와 계화(桂花) 한 가지를 주므로 놀라 깨어났다. 이 말을 숭상께 고하니 숭상이 말했다.
92
그리고 나서 후원에 가 꽃을 구경하노라니 문득 채운이 어리고 향내가 진동하였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모란 나무포기 가운데 한 아이가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승상이 크게 놀라 부인을 부르려고 시비를 찾는 소리에 그 아이가 잠을 깨었다. 승상이 아이에게 물었다.
93
"너는 어떤 아이인데 이곳에 와서 졸고 있느냐? 네 이음은 무엇이고 집은 어디냐?"
95
"제 이름은 숙향이요, 집은 어디인지 모르고 부모를 난중에 잃어버리고 전전유리(轉轉流離)하며 다녔는데 어떤 짐승이 저를 업어다가 여기 두고 갔습니다."
98
하였다. 부인이 자세히 보니 꿈속에 보던 선녀의 얼굴 같거늘 기이히 여겨 말하기를,
99
"이는 하늘이 우리 부부에게 주신 아이입니다."
100
하고, 친히 안고 들어가 품에 넣어 친자식같이 길렀다. 숙향이 점점 자라서 십 세에 이를 무렵에는 행실과 재질이 자연 진선진미(眞善眞美)하였다. 승상부부는 숙향을 지극히 사랑하여 집안 일을 다 맡기고 매양 어진 배필을 구하여 후사(後事)를 부탁하고자 하니 집안의 비복들이 모두 마음 속으로 이를 따랐다. 그러나 사향이란 시비만이 본디 집안 일을 도맡아 오다가 숙향이 들어온 후로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양 숙향을 해할 뜻을 품고 있었다.
101
이 때 숙향의 나이 십 오 세였다. 하루는 승상 양위를 모시고 영춘당에 올라 춘경(春景)을 구경하다가 문득 저녁 까치 한 마리가 낭자의 앞을 향하여 세 마디를 울고 가거늘 낭자가 놀라 말했다.
102
"저녁까치는 계집의 넋이라 모든 사람 중에 유독 나를 향해 울고 가니, 장차 내게 무슨 불길한 일이 있을 징조로다."
104
이 날 사향이 틈을 타서 부인의 침소에 들어가 금봉차와 옥장도를 훔쳐 낭자의 사사로운 그릇 속에 감추어 두었다. 그 후에 부인이 잔치를 가기 위해 봉차를 찾으니 간데 없는지라 괴이하게 여기고 세간을 내여 살펴보니, 장도 또한 없거늘 모든 시녀를 죄 주었다. 이 때 사향이 들어오며 말하기를,
107
"옥장도와 금봉차가 없으니 어찌 찾지 않겠느냐?"
108
사향이 부인 곁에 나아가 가만히 고하여 말하기를,
109
"저번에 숙향아씨께서 부인의 침소에 들어가 세간을 뒤지더니 무엇인가 치마 앞에 감추어 가지고 자기의 침방으로 갔으니 수상합니다."
111
"숙향의 빙옥같은 마음에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
113
"숙향아씨가 예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나 근간 혼인 의논을 들은 후로는 당신의 세간을 굳히노라 그러하온지 가장 부정함이 많습니다. 어쨌든 숙향아씨 세간을 뒤져보십시오."
114
하였다. 부인이 또한 의심하여 숙향을 불러 말하였다.
115
"봉차와 장도가 혹 네 방에 있나 살펴보아라."
117
"소녀의 손으로 가져온 일이 없사오니 어찌 소녀의 방에 있겠습니까?"
118
하고, 그릇을 내어놓고 친히 찾게 하니 과연 봉차와 장도가 그릇 속에 있는지라 부인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119
"네 아니 가져 왔으면 어찌 장도와 봉차가 네 그릇에 들어 있느냐?"
121
"숙향을 친딸같이 길렀으나 이제 장도와 봉차를 가져다 제 함 속에 넣고 종시 몰라라 하다가 제게 들켰사오니 봉차는 계집의 노리개니 이상하지 않으나 장도는 계집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 그 일이 가장 수상합니다. 어찌 처치하면 마땅하겠습니까?"
122
하였다. 사향이 곁에 있다가 고하여 말하였다.
123
"요사이 숙향아씨 거동을 보오니 혹 글자도 지으며, 바깥 사람이 자주 드나드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125
"제 나이가 찼음에 필연 바깥 사람과 상통(相通)하는 것입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집안에 불측한 일이 있을 것이니 빨리 쫓아내십시오."
126
하였다. 부인이 나와서 숙향을 보니 머리를 싸고 누워 있거늘 부인이 불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127
"우리 부부가 자녀 없기로 너를 친자식처럼 길러 어진 배필을 얻어 네 몸도 의탁하고 우리의 후사와 허다한 가산(家産)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내 마음이 가장 불량하니 장차 어찌하겠느냐? 나는 너를 오히려 아끼나 승상께서는 크게 노하셨으니, 이제 의복을 가지고 근처에 가 있으면 내 조용히 말씀드려서 다시 데려오겠다."
128
하며 눈물을 흘리니 숙향이 울며 말하기를,
129
"소녀 다섯 살 때에 부모를 잃고 동서유리(東西流離)하옵다가 천행으로 승상과 부인의 애휼하심을 입사옴에 그 은혜 망극하온지라 종신토록 지성으로 받들기를 소원하였는데 천만의외로 이런 일이 있사오니 모두 소녀의 팔자입니다. 이제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요인(妖人)의 간계(奸計)로 소녀를 죽이려 하옴이나 부인은 살펴주십시오, 이제 소녀의 누명을 드러내 밝히기 어려운지라 차라리 부인의 눈앞에서 죽고자 합니다. 부인은 소녀의 원(願)대로 배를 헤쳐 저잣거리에 달아 주십시오.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소녀의 억울함을 알아줄 것이니 더러운 이름에 씻으면 지하에 가서라도 눈을 감을까 하나이다."
130
하거늘, 부인이 그 경색을 보고 문득 크게 깨달아 말하였다.
131
"너를 시기하는 자가 음해(陰害)한 것이로다. 내 미처 이것을 생각지 못하여 네 심사를 상하게 하였으니 어찌 내 불찰이 아니겠느냐?"
132
사향이 거짓 승상의 말로 고하여 말하였다.
133
"'숙향의 행실이 불측하여 내 벌써 내치라 하였거늘 뉘라서 감히 내 뜻을 거역하느냐?'하고 대로(大怒)하시더이다."
135
"승상이 저렇게 노하시니 잠깐 몸을 피하여 있으면 사세(事勢)를 보아 너를 데려오겠다.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
137
"부인의 두호하심이 간절하시나 승상의 노책이 엄절하시니 소녀의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을 듯 합니다."
139
"승상께서 '숙향을 바삐 보내고 아뢰라.' 하시더이다."
140
부인이 더욱 애련하여 시녀 금향을 명하여,
141
"숙향이 입던 의복과 쓰던 기물(器物)을 다 주라."
143
"부모를 다시 못뵈옵고 오늘은 또 이러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오니 다만 이것이 한이 될 뿐입니다."
145
"내 승상께 여쭈어 무사토록 하리라."
146
하니, 사향이 그 모습을 보고 부인이 주선(周旋)할까 겁내어 말하기를,
147
"승상이 '숙향을 그냥 두었다.' 하여 대로 하시더이다."
150
하고 승상께 들어가니 승상이 부인을 보고 말하기를,
151
"내 지난 밤 꿈에 벽도(碧桃)가지에 앵무새가 깃들었더니, 한 중이 도끼를 가지고 가지를 베어 내리쳐 앵무새가 놀라서 날아가 버리니, 꿈이 불길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부인은 술을 가져오십시오."
155
"얼마전 장도와 봉차를 첩이 숙향의 그릇에 넣고 망연이 잊은 탓으로 애매히 누명을 얻어 저가 몹시 슬퍼하니 불쌍합니다."
158
하였다. 사향이 이 말을 듣고 대경하여 급히 나와 숙향을 재촉하여 말하기를,
159
"승상께서 자네를 '그저 두었다.'하여 부인을 크게 책망하시니 급히 나가라."
161
"부인이 나오시거든 하직하고 가겠노라."
162
하니, 사향이 소리 질러 구박하여 말하기를,
163
"승상과 부인이 너를 호의호식(好衣好食)으로 길러 친자식같이 하셨거늘 무엇이 부족하여 몹쓸 욕심으로 도적질하고자 하느냐? 부인도 승상께 노책을 받으시고 나오실 일이 없고 나도 '너를 더디 보낸다.'하여 죄를 얻겠으니 바삐 나가라."
164
하니, 숙향이 천지 아득하여 침소에 들어가 손가락을 깨물어 벽 위에 하직하는 글을 쓰고 눈물을 뿌려 차마 일어나지 못하니 사향이 말하기를,
165
"근처에 있지 말고 멀리가라. 만일 승상이 알으시면 큰 일이 나리라."
166
하거늘, 숙향이 멀리 가도록 승상집을 돌아보고 울며 가더라. 한 곳에 다달아 보니 문득 큰 강이 있으니 이는 표진강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강변으로 헤매이다가 날은 저물고 행인은 드문지라 사면을 돌아봐도 의지할 곳이 없는지라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다가 손에 깁수건을 쥐고 치마를 거두쳐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행인이 놀라 급히 구하려 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지라 모두 탄성을 내며, 그 곡절을 알고자 하였다.
167
이 때 숙향이 물에 뛰어드니 검은 소반 같은 것이 물밑으로부터 숙향을 태우고 물 위에 섰는데 편하기가 만석 같았다. 이윽고 오색구름이 일어나며 사양머리를 한 계집아이가 연엽주(蓮葉舟)를 바삐 저어 숙향을 향하여 재배하고 말하기를,
168
"귀하신 몸을 어찌 이렇듯 가벼이 버리십니까? 저희는 항아(姮娥)의 명으로 부인을 구하러 오다가 옥하수에서 여동빈 선생을 만나 잠시 술을 마셨는데. 하마터면 부인을 구하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169
하고 용녀(龍女)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172
"전에 사해 용왕이 수정궁에 모여 잔치할 때 저의 사랑하는 시녀가 유리종을 깨뜨렸기에 행여 죄를 얻을까하여 감추었더니 부왕(父王)이 알으시고 노하여 첩을 반하수 내치심에 수변(水邊)으로 다니다가 어부에게 잡히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김상서의 구함을 업어 살아났으나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어제 부왕이 옥경에서 조회할 때 옥제 말씀을 듣사오니 '소아가 천상에서 득죄하여 김전의 집에 적강한 뒤로 도적의 칼 아래 놀라게 하고, 표진강에 빠져 죽을 액을 당하고, 노전에서 화재를 만나고, 낙양옥중에서 죽을 액을 지낸 후에야 태을을 만나게 하라.' 하시고 물 지키는 관원을 명하여 '기다렸다가 죽이지는 말고 욕만 뵈어 보내라.' 하시기에 제가 특별히 상서의 은덕을 갚고자 하여 자원(自願)하여 왔습니다. 이제 그대가 또 와서 구하시니 저는 가겠습니다."
174
"그는 어떠한 사람인데 강물을 평지같이 다닙니까?"
176
"그는 동해 용왕의 딸로서 전일 부인의 부친 은덕으로 살아났음에 이제 와서 부인을 구하고 가는 것입니다."
178
"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남의 집에서 고행하다가 더러운 이름을 쓰고 차마 세상에 있지 못하여 이 물에 빠져 죽으려 한 것인데 그대들이 멀리까지 와서 수고로이 구하여 주시니 감격하여이다."
180
"부인께서 인간진애(人間塵埃)에 잠겨 저희를 몰라 보십니다."
182
"이를 먹으면 자연 알게 되실 것입니다."
183
숙향이 받아 먹으니 그제야 월궁소아로서 태을과 글을 지어 창화하고 월연단을 훔쳐 태을을 준 죄로 인간 세상으로 적강한 일과 그 아이 둘이 부리던 시녀였던 것이 기억났다. 말미암아 붙들고 반기며 말하기를,
184
"내가 전생의 죄가 중한 탓으로 부모를 잃고 고생은 하려니와 장승상 댁에서 얻은 누명은 무슨 일이냐?"
186
"부인은 한(恨)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모두 하늘이 정하신 것입니다. 장승상집 인연도 다만 십년 뿐이었습니다. 사향이 부인을 모함한 죄로 옥제께서 진노(震怒)하시어 이에 벼락을 내려 죽였으며, 부인의 애매함도 이미 장승상집에서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시켜 들에 와서 부인을 찾다가 못 찾고 도로 갔으나 모든 것이 이미 밝혀졌거니와 앞에 또 두 횡액(橫厄)이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188
"지난 일도 망극한데 또 두 액을 어찌하리오? 승상과 부인이 나의 애매함을 알았다고 하니, 그리로 가서 액을 면하고자 하노라."
190
"이는 다 하늘이 정하신 것으로 임의로 못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태을이 있는 것이 장승상집과 거리가 삼천 삼백 리니 서로 만날 길이 아득하고 태을이 아니면 인간 부모도 다시 못 볼 것입니다."
192
"태을이 어디에 있으며 인간 성명은 무엇이냐?"
194
"저번에 항아의 말씀을 들으니 '태을은 낙양 땅에 위공의 자식이 되어 부귀를 누린다.' 합니다."
196
"동시에 적강하여 태을은 어이 영화로이 되고, 나는 어찌 고생하느냐?"
198
"당초 부인이 먼저 죄를 지었으므로 궁곤함을 겪게 하였고, 태을은 상제를 근시(近侍)하던 선관으로 상제께서 몹시 사랑하시어 항아의 청으로 부득이 적강은 시켰으나 귀히 점지하셨습니다."
200
"태을이 있는 곳이 삼천삼백 리라 하니 태을을 만나기 전에는 어디가 의탁하며, 우리 부모는 어디가 만나겠느냐?"
202
"부인이 홀로 가시면 득달(得達)키 어려우니 저희 연엽주(蓮葉舟)를 타시면 순식간에 가실 것이요, 또 천태산 마고선녀가 부인을 구하려고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203
하고 말을 마치며 능파곡을 부르고 배를 띄우니, 빠르기가 쏜살같아 순식간에 한 곳에 다달으니 선녀가 말하기를,
204
"부인은 여기서 내려 동쪽으로 가십시오. 자연히 구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205
하고 동정귤 같은 것 두 알을 주며 말하기를,
207
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니, 숙향이 사례하고 배를 내려 동쪽으로 향하여 갔다. 배가 고파 선녀가 주던 것을 먹으니, 배가 부르고 천상 일은 다 망연이 잊어버려 인간 일만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되, '젊은 계집이 외로이 홀로 가다가 욕을 보기 쉬우리라.' 하고 촌가에 비단 옷을 주고 헌 옷으로 바꾸어 입고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한 눈을 감고 한 다리를 저는 체하며 막대를 짚고 갔다.
208
각설. 이보다 앞서 장승상이 부인께 숙향의 애매함을 듣고 궁측히 여겨,
210
하거늘, 부인이 듣고 기뻐하여 즉시 시비를 시켜 숙향을 부르니 사향이 이를 듣고 놀라 들어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211
"그렇게 할 줄은 모르셨을 것입니다."
212
하고 혀를 차며 괴탄(怪歎)하거늘 부인이 묻기를,
215
"부인이 들어가신 사이에 숙향아씨께서 제 방으로 들어가 무엇인지 뭉쳐 옆에 끼고 문 밖으로 내달아 곤두박질치며 달아나므로 소비(小婢)가 따라 가온즉, 행여 잡힐까 하여 더욱 급히 달아나므로 따르지 못하고 다만 소리쳐 말하기를, '어찌 부인을 아니 뵈옵고 가십니까?' 하온즉 숙향아씨께서 하는 말이 '나를 구박하여 내치거늘 내 어찌 하직하겠느냐?' 하더이다."
216
하니 사향이 부인 보는 데에서는 바삐 가는 체하고 내달아 마을의 다른 집에 있다가 이윽고 바삐 오는 체하고 숨을 헐떡이며 말하기를,
217
"벌써 멀리 갔사오나 소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쫓아가 부인 말씀을 전하온즉 숙향아씨께서 입을 삐쭉이며 말하기를, '나를 불러 무엇하려 하느냐? 이만한 얼굴과 재주를 가지고 어디에 간들 의식(衣食)이 없겠느냐?'하며 부인을 무수히 원망하고 어떤 남자와 난만하게 희롱하며 가오니 그 망측한 일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습니다."
218
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흔들 즈음에 문득 헌 누비옷을 입은 중이 밖으로부터 천연히 내당(內堂)으로 들어오거늘 승상이 그 모습이 비범함을 보고 일어나 맞아들이니 중이 읍(揖)하고 앉거늘 승상이 물어 말하기를,
219
"선사(禪師)께서는 어디에 계시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221
"저는 하늘로부터 온 중으로서 상제의 명으로 승상집 옥석(玉石)을 가려내려고 왔습니다. 가족비복(家族婢僕)을 모두 불러 주십시오."
223
"제 집에는 옥석을 가릴 일이 없는데 천승(千僧)께서 수고로이 오셨습니다."
225
"승상이 숙향의 일을 이미 알고 계십니까?"
226
하니, 승상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니 사향이 내달아 말하기를,
227
"이 중은 어디로부터 온 중이기에 숙향의 말을 곧이 듣고 재상가(宰相家)에 무례히 출입하여 무슨 엉뚱한 말을 하느냐? 승상은 바삐 저 승상을 잡아내려 치죄(治罪)하십시오."
228
하니, 천승이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말하기를,
229
"네 승상집 집안 일을 주장(主掌)하되 도적질로 업을 삼다가 숙향이 들어온 후로는 네 임의로 못하자 숙향을 원망하여 누명을 씌워 내치니 승상은 속았거니와 하늘조차 속일소냐?"
230
하고 소매에서 조그마한 불수레를 내어놓고 그 위에 올라서니 문득 우레 진동하며 큰비가 담아 붓듯이 오고 벽력소리 요란하며 공중에서 큰 횃불간은 불덩이 내려와 사향을 내여 놀고 제 죄악을 낱낱이 수죄(受罪)케 하고 짓밟아 죽이니 승상 양위와 집안의 모든 사람이 다 기절하였다. 이윽고 부인이 정신을 차려 말하기를,
231
"사향은 제 죄 때문에 죽었거니와 가련한 숙향은 어디로 갔는가?"
232
하며 숙향이 있던 방에 가보니, 벽 위에 혈서(血書)가 있는지라 그 혈서에 하였으되,
233
"슬프다! 승상과 부인의 은혜, 십 년 길러 준 정을 갚지 못하고 누명을 쓰고 하지도 못한 채 사향의 구박이 급함에 속절없이 죽으러 가는구나."
234
하였거늘 부인이 그 글을 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235
"불쌍하도다 숙향이여! 어디 가 살아 있으면 요행으로 다시 보려니와 만일 죽었으면 어디 가 시체나 거두겠느냐?"
236
하니, 승상이 또한 눈물을 흘리고 부인을 위로하였다. 이 때 승상의 족질(族姪) 장원이 이 말을 듣고 승상께 고하여 말하였다.
237
"소질이 아까 이리로 올 때 여차여차한 여자가 표진강변에서 주저(躊躇)하더니 숙향이 바로 그 아이인가 합니다."
238
승상이 듣고 바삐 노자(奴子)들에게 분부하여,
241
"아무리 찾아도 없고, 근방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아까 한 아이 하늘을 우러러 보고 통곡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하옵니다."
242
하였다. 부인이 이를 듣고 수차 기절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서 말하기를,
243
"이제는 어디 가 숙향을 다시 보리오?"
244
하고 식음을 전폐하니 승상이 민망히 여겨 화사(畵師)를 청하여 숙향의 화상(畵像)을 그려 부인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이 때 늙은 종 장석이 고하여 말하였다.
245
"숙향씨가 열 살이 안되었을 때에 소인이 업고 노죽정에 그네 구경갔다가 장사 땅에 사는 조적이라고 하는 화원(花園)이 숙향씨를 보고 놀라 말하기를, '내 천고국색(千古國色)의 화상을 많이 보았으나 이 아니 얼굴같은 이는 처음이다.' 하고 숙향씨 모습을 그려 갔사오니 이 사람을 찾아 화상을 구하십시오."
246
승상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조적에게 구하니 조적이 핑계를 대고 쉽게 팔지 아니 하였다. 장석이 돌아와 고하고 나서 다시 황금 백 냥을 가지고 가 바꾸어 오니 과연 숙향이 다시 살아 온 듯한지라, 부인이 안고 뒹굴며 슬퍼하여 침방에 걸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제(祭)를 지내었다.
247
차설. 숙향이 울며 동쪽으로 가더니 한 곳에 다달으니 수천리 갈대 숲이 하늘에 닿았고 인적이 없는지라 홀로 갈대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데 날이 이미 저물어 사면이 어둑하거늘 갈대 포기를 의지하여 졸았다. 이윽고 광풍(狂風)이 크게 일고 화광(火光)이 사면으로 에워들어 왔다. 숙향이 놀라 깨었으나 천지가 아득하여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는데, 문득 한 노인이 막대를 짚고 와서 물어 말하기를,
248
"너는 어떤 아이인데 무인심야(無人深夜)에 화재를 만났느냐?"
250
"소녀 동서유리하옵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이곳에 와 생각지도 못한 화재를 만나 죽게 되었사오니, 바라건대 노인은 신명(身命)을 구제하십시오."
252
"내 이미 이 정도의 불은 견딜 수 있으나 사세(事勢)가 위급하니 네 옷을 벗어버리고 내 등에 오르라."
253
숙향이 옷을 벗고 노인의 등에 오르니 불꽃이 벌써 있던 곳에 닿았는지라 노인이 소매로부터 홍선(紅扇)을 내어 부치며 무슨 주문을 외니 화염이 범치 못하였다. 노인이 숙향을 업어다가 노전(盧田)을 건너 놓고 옷소매를 베어 주며 말하기를,
254
"이것으로 앞을 가리우고 동쪽으로 가면 구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255
하였다. 숙향이 배사(拜謝)하며 말하기를,
256
"감히 묻겠습니다. 노인은 누구십니까?"
258
"나는 남천문 밖에 사는 화덕진군(火德眞君)이다. 내가 아니었던들 화재는 고사하고 삼천 리 갈대밭을 어찌 지날 수 있었겠느냐?"
259
하고 간 데 없었다. 숙향이 공중을 향하여 무수히 사례하고 동으로 향했다. 날은 저물고 벌거벗은 몸에 배도 고파 갈 수 없어 주저할 즈음에 한 노파가 광주리를 옆에 끼고 지나다가 숙향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260
"너는 어떤 여자인데 벌거벗고 노변에 앉아 우느냐? 도적을 만나 가진 것을 잃었거나 누구에게 무슨 일로 쫓겨났느냐?"
262
"저는 본디 부모를 잃고 동서유리하는 걸인으로 남의 것 도적하가다 쫓겨난 일도 없고 불한당 만난 일도 없이 자연 그러합니다."
264
"난중에 부모를 잃고 다니니 내치나 다르며, 장승상집에서는 봉차와 장도 일로 나왔으니 도적이나 다르며, 노전에서 의복을 불태웠으니 불한당을 만난 것과 다르겠느냐?"
265
하였다. 숙향이 이 말을 듣고 놀라 물어 말하기를,
266
"할미가 어찌 저의 일을 그토록 자세히 아십니까?"
268
"자연히 알거니와 너는 이제 어디로 가려 하느냐?"
270
"갈 곳이 없는 혼자 몸이니 나와 함께 감이 어떠하냐?"
271
숙향이 그 할미 거동이 비상함을 보고 다른 의심이 없는지라 대답하여 말했다.
272
"할미께서 저를 버리지 아니하니 어찌 사양하리오마는 제가 이리 벗고 배 고프니 민망합니다."
273
노파가 광주리에서 삶은 나물을 주거늘 숙향이 먹으니 과연 배가 불렀다. 또 위에 입었던 옷을 벗어 숙향에게 입히고 데려갔다. 숙향이 할미를 따라 두어 고개를 넘어 가니 한 촌락이 있는데 가장 부유하고 정결하였다. 그 곳을 지나 한 뫼(山) 아래 다다르니 수 칸짜리 모옥(茅屋)이 있고 사립문을 반개(半開)하였는데, 노파를 따라 들어가니 집은 작으나 가장 깔끔하고 세간은 많지 아니하나 또한 소담하며, 집안에 다른 사람은 없고, 다만 청삽사리 문지방을 베고 누웠다가 전에 숙향을 본 듯이 꼬리를 흔들며 반길 뿐이었다. 노파가 숙향을 방에 앉히고 의복 한 벌을 내어 입히고 저녁을 갖추어 먹었다. 숙향이 이로 인하여 이곳에 머물러 있은 지 오래 되었으나 세수를 아니하고 마치 병인(病人)인 체하니 하루는 노파가 말하기를,
274
"내가 너의 거동을 보니 본시 병신이 아니라 명월이 구름에 가린 듯 보이거늘 종시 병신 행세를 하느냐? 나 또한 병들지 아니하였고 또 내 집은 주가(酒家)라 여러 사람이 왕래하거늘 저렇듯 더러이 하고 있으면 보는 사람이 다 추하게 여길 것이다."
275
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숙향이 여러 날 있어 동정을 살펴보니 남자는 없고, 밖에 사람이 출입하나 안과 밖이 현격하여 별로 상관이 없었다. 이 때서야 비로소 세수하고 약간 아미(蛾眉)를 다스리고 의상을 고쳐 입고 사창을 의지하여 수를 놓는 것이었다. 이 때 노파가 들어와 숙향을 보고 갑작스레 안으며 말하기를,
276
"불쌍하구나 내 딸이여! 전생에 무슨 죄로 광한전을 이별하고 인간 고행을 겪느냐?"
278
"할미께서 저를 친딸같이 여기시니 어찌 사실을 감추겠습니까? 저는 과연 사부(士夫)의 자식으로 난중에 부모를 잃고 의탁할 곳이 없어 길을 헤매었던 바 행여 욕(辱)을 볼까 두려워하여 병신인 체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할미를 만남에 부모같이 섬길 것이니 원컨대 서로 속이지 말고 몸을 그릇되게 하지 마십시오."
280
노파가 정색을 하고 대답하여 말하기를,
281
"낭자의 말씀이 과연 옳습니다. 어찌 낭자의 일생을 그르게 하겠습니까?"
282
하고 이로부터 공경하고 더욱 사랑하였다.
283
숙낭자 본시 타고난 재주로 모르는 것이 없고 일찍 수를 놓아 값을 받으니 집이 가장 부유하였다. 이럭저럭 사월 망간(望間)이 되었다. 하루는 할미가 술을 팔러 나가고 낭자 혼자 사창을 의지하여 수를 놓고 있는데 문득 청조가 날아와 매화에 앉아 울거늘 낭자가 말하기를,
284
"저 새도 나와 같이 부모를 잃었는가 어찌 저리 슬피 우는가?"
285
하고 자연 마음이 비감(悲感)하여지다가 잠깐 졸았는데 꿈에 청조가 낭자더러 말하기를,
286
"그대 부모께서 저기 계시니 나를 좇아 오라."
287
하였다. 낭자가 청조를 따라가니 백옥 연못 가운데 한 누각이 있으되 산호 기둥, 유리 들보, 호박 주초로 되어 있어 휘황찬란하였다. 낭자가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주저하는데 이윽고 서쪽으로부터 오색 채운이 일어나며 모든 선관과 선녀들이 학도 타고 혹, 봉(鳳)도 타고 차례로 들어가는데, 여섯 마리 용을 멍에삼고 오는 이가 바로 옥황상제였다. 그 뒤로 삼태성과 여래와 관음이 시위(侍衛)하여 들어가고 여러 선관이 지나가되 본 체도 아니 하였다. 그 중 한 선녀 연꽃을 쥐고 앉았으니 이는 항아였다. 숙향을 보고 말하기를,
288
"반갑다 소아여, 인간 재미 어떠하냐? 전일 놀던 곳을 다시 보아라."
289
하여, 숙향이 항아를 따라 들어가니 궁전의 굉장한 곳에 보살이 소년 선관을 인도하여 들어와 복지(伏地)하니 상제가 말하는 것이었다.
290
"태을아, 인간 고락이 어떠하며 소아를 보았느냐?"
291
태을이 황공하여 사례하니 항아가 아뢰어 말하기를,
292
"소아가 이미 누차 죽을 액을 지냈사오니 이제 그만 죄를 사(赦)하소서."
304
"아들은 정승(政丞)이 되고 딸은 황후(皇后)가 되게 하나이다."
307
하셨다. 태을이 두 손으로 받으며 소아를 눈 주어 보니 소아가 부끄러워 몸을 두르치다가 옥지환의 진주를 떨어뜨렸다. 소아가 진주를 잡고자 할 때 태을이 먼저 집어 손에 쥐는지라 소아가 할 수 없이 전상(殿上)으로 돌아올 즈음에 할미가 들어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 할미가 웃으며 말했다.
308
"낭자께서 요지경(瑤池鏡)을 보니 어떻습니까?"
312
"자연히 알거니와 그런 경지를 보고 그저 버려 두기 아까우니 낭자의 재주로 수(繡)를 놓아 그 경치를 남겨 놓음이 어떻습니까?"
313
하였다. 낭자 옳게 여겨 즉시 그 경치를 수로 놓으니 할미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314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거든 팔겠습니다."
315
하고 수를 가지고 시장(市場)에 나가니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더니, 장사 땅 조적이란 사람이 물정(物情)을 아는지라 이 수를 보고 말하기를,
322
"낙양 동촌 술 파는 집이 내 집입니다."
328
"이 수놓은 수품과 그림 경치는 만금(萬金)으로도 부족하나 백금(百金)을 드리겠습니다."
330
"이 그림은 천상 요지경인데, 할미 딸이 어찌 이러한 재주를 지니고 있겠습니까? 반드시 범상한 사람의 수품이 아닐 것입니다."
331
하였다. 할미가 돌아와 조적의 이야기를 전하니 낭자가 놀라 말하기를,
332
"그 수(繡)의 뜻을 알아보니 과연 박물군자입니다."
334
화설. 낙양 땅에 한 명공(名公)이 있으니 이름이 이모(李某)였다. 대대로 공후자손(公侯子孫)으로 공에게 이르러서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고 또 황제가 위공(魏公)에 봉(封)하니 명망이 조야(朝野)에 파다하고 재물이 또한 일세에 으뜸이었다. 다만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어 애달아 하더니 부인이 친정에 갔다가 대성사 부처가 영험하다는 말을 듣고 향촉(香燭)을 갖추어 아이 낳기를 빌고 돌아 왔더니 이날 밤 꿈에 한 부처가 와서 말하기를,
335
"상서가 전생에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기에 자식이 없도록 점지하였으나 그대 정성이 지극하므로, 귀자(貴子)를 점지하노라."
338
하니 부인이 사례하다가 깨어났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부모께 하직하고 집에 돌아오니 상서가 맞이하여 물어 말하기를,
339
"부인은 어찌 이렇게 더디 오셨습니까?:
341
"대성사 부처께서 신통이 영험하다는 말을 듣고 자식 낳기를 빌고 왔습니다."
343
"자식을 빌어서 낳을 량이면 천하에 자식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344
하더니 그날 밤 꿈에 붉은 곤룡포를 입은 선관이 채운을 타고 내려와 재배하여 말하기를,
345
"소자는 옥제 앞에서 옥제를 모시던 태을진인으로 죄를 지어 인간 세상으로 내치심에 의탁할 곳이 없더니 대성사 부처님이 지시(指示)하기에 이리로 왔습니다."
346
하는 것이었다. 상서가 놀라 깨어나 부인더러 말하기를,
347
"부인이 대성사로 가 기도하고 나서 몽사(夢事)가 이러하니 기이합니다."
348
하였다. 과연 그 날부터 잉태하여 십 삭이 차니 이 때는 사월 초파일이었다. 문득 채운(彩雲)이 집을 두르고 이상한 향기가 집에 가득하거늘 부인이 이상하게 여겨 시비로 하여금 집안을 청소하게 하였다. 오시(午時)쯤 되어 선녀가 부인의 방으로 들어오며 말하기를,
349
"때가 되었으니 부인은 편히 누우소서."
350
하고 붙들어 구호하였다. 이윽고 일개 옥동(玉童)을 순산하는지라, 선녀가 옥병을 기울여 아기를 씻겨 누이거늘 부인이 물어 말하기를,
353
"우리는 해산을 돕는 선녀로서 오늘 태을선군이 하강하기로 왔습니다. 이 아이의 배필은 남양 땅 김전의 딸 숙향입니다. 숙향이 월궁소아로서 이제 하강하기에 그리로 가나이다."
355
이 날 위공이 궐내(闕內)로부터 집에 돌아와 아이를 보니 꿈에 보던 선관 같거늘 이름은 선이라 하고 자(子)는 태을이라 하였다. 선이 점점 자라 팔구 세에 이르니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재주가 있고 기골이 비상하여 공경대부(公卿大夫)로서 딸을 둔 이들은 모두 구혼을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선이 매양 자부하여 말하기를,
356
"월궁선녀 아니면 취처(娶妻)치 않으리라."
357
하고 부모 또한 택부(擇婦)하기를 신중하게 하였다.
359
"과거일이 멀지 아니하니 한 번 응시(應試)하고자 합니다."
361
"네 재주는 남음이 있으나 일찍 등과(登科)함이 불가하니 아직 더 기다려라."
362
하니 선이 울민(鬱悶)하여 산수(山水)에 놀기를 일삼다가 한 곳에 이르니 그곳은 대성사라는 절이었다. 두루 유람하다가 몸이 피곤하여 난간을 의지하여 졸고 있는데 부처가 말하기를,
363
"금일 서왕모 잔치에 모든 선관 선녀들이 모이니 그대는 나를 따라와 구경하라."
364
하고, 한 곳에 다다르니 연화 만발하고 누각(樓閣)이 의의한지라 부처가 말하기를,
365
" 내 먼저 들어가리니 그대는 뒤를 따르라."
367
"동서를 구분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368
하였다. 부처가 웃고 대추같은 것을 주거늘 선이 받아먹으니 정신이 황연하여 전생 일이 뚜렷한지라 부처를 따라 들어가 옥제를 뵈오니 상제께서 물어 말했다.
369
"태을아 인간 재미 어떠하며 소아를 만나 보았느냐?"
370
이선이 땅에 엎드려 사죄하니 상제께서 한 선녀를 명하여,
372
하시어 선녀 옥반에 받들어 주거늘 이선이 이를 받으며 선녀를 눈 주어 보니 선녀 부끄러워 몸을 두루치다가 옥지환의 진주를 떨어뜨렸다. 선이 진주를 집어 손에 집을 즈음에 그 절 저녁 북소리에 놀라 잠을 깨니 호접춘몽이었다. 꿈을 깨고도 요지경이 눈에 완연하고 꿈에 집어 들었던 진주를 손에 그대로 쥐고 있어, 기이하게 여겨 글을 지어 기록하였다. 이 다음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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