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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설 춘향전 (一說 春香傳) ◈

◇ 사랑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1925년
이광수

1. 사랑

 
1
몽룡은 안절부절을 못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이 책 저 책 공연히 책장만 벌꺽벌꺽 넘기며 논어에서 한 대문 맹자 에서 한 대문, 주역에서 한 대문, 이 모양으로 정신없이 읽 어 그래도 상방에 들릴이만큼 글 소리를 끊이지 아니하니, 부사는 아들이 쉬지 않고 글 읽는 것이 맘에 흡족하여 웃목 에 앉았는 낭청더러,
 
2
"여보 낭청, 어린것이 기특하지 않소? 저렇게 불철주야하 고 글을 읽으니 저도 적어도 내 걸음은 하겠지?"
 
3
낭청은 오늘 부사를 따라 조종 산성에 놀이를 나갔던 까닭 에 늙고 병약한 몸이라 식곤증이 나서 졸고 앉았다가 부사 의 소리에 번쩍 깨며 그러나 부사의 말은 다 듣지 못하였으 므로,
 
4
"내가 늙었지마는 걸음이야 사또를 못 따라가겠소? 그만 것을 그리 기특하다고 할 것도 없지요."
 
5
하고 생 딴전을 친다.
 
6
부사는 어이가 없어,
 
7
"누가 낭청더러 기특하다오? 우리 몽룡이가 기특하단 말 이지."
 
8
하고 혀를 끌끌 찬다.
 
9
낭청은 송구하여 바로 앉으며 눈을 크게 뜨고,
 
10
"예, 자제 말씀이시오? 자제야 말씀하실 것도 없지요."
 
11
부사는 맘에 기뻐서,
 
12
"재주가 그만하여 공부를 그만치하여 소년 등과는 염려없 을까 보오."
 
13
낭청은 과연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듯이 몸을 뒤로 잦히고 어성을 높이며,
 
14
"소년 등과하다 뿐이요? 자제로 말하오면 이마와 코가 좋 지요. 그렇게 나고야 소년 등과하고 청백리 되고 명재상 안 되는 법이 없지요."
 
15
하고 칭찬하는 말에 부사는 더할 수 없이 맘이 흡족하여 반쯤 몸을 일으켜 비스듬히 안석에 기대어 앉으며,
 
16
"허, 낭청 과연 지인지감이 있는걸—상도 볼 줄 아는구 려."
 
17
"마의상서(麻衣相誓) 권이나 보았지요."
 
18
하고 낭청은 겸양한다.
 
19
"여바라!"
 
20
하고 부사는 통인을 불러,
 
21
"술 한 상 차려 올려라."
 
22
하고 분부를 내리더니,
 
23
"여보, 식후에 술을 먹는것이 좋지 않지요?"
 
24
하고 낭청에게 묻는다.
 
25
"모르는 사람은 식후에 먹는 술이 좋지 않다고 하지요마 는 아는 사람은 식후 술이 좋다고 하지요. 식후 술은 식독 을 친다고 하지요."
 
26
하고 낭청은 나오려던 술이 도로 들어갈 것이 무서워서 식 후 술이 좋은 것을 말한즉 부사는 의아하는 듯이,
 
27
"여보, 식독이라 하니 밥에 무슨 독이 있단 말이요?"
 
28
"밥에 독이 있지요. 더구나 준민 공혈하여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밥에는 무서운 독이 있다고 하지요."
 
29
부사 적이 불쾌한 빛을 봉이며,
 
30
"그렇기로 내 밥에야 독일 있을 리가 있소?"
 
31
하고 낭청을 노려본다.
 
32
낭청은 시치미 뚝 떼고 몇 개 안되는 아랫수염을 쓰다듬어 가며,
 
33
"사또께서 잡수시는 진지에도 과히 독일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34
이 말에 부사 화를 내며,
 
35
"여보,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이요? 그러면 내가 준민 고혈 하는 탐관 오리란 말이요. 어허, 고이한 말을 다 듣겠군."
 
36
하고 고개를 돌린다.
 
37
"사또께서 탐관 오리까지야 되겠소마는 저번 통진에 두섬 지기와 파주 논 석섬지기 사신 것은 잘못이지요. 그 돈이 어디서 난지는 모르되 백성들이 알 양이면 좋게 생각 할 리 는 없지요."
 
38
낭청의 말에 부사가 맘이 홱 풀려 껄껄 웃으며,
 
39
"어, 과연 낭청의 말이 옳소. 내 생일에 선물 받은 것으로 그것을 샀소마는 낭청의 말을 들으니 어심에 부끄럽소. 내 곧 그것을 팔아다가 곤고에 붙이려오."
 
40
하고 심히 흡족하여,
 
41
"여바라, 술 올려라."
 
42
하고 술을 재촉한다.
 
43
낭청도 하마터면 못 얻어 먹을 뻔하다가 술을 먹게 된 것 이 기쁘지마는 그 빛은 보이지 아니하고 더우기 충성을 보 이노라고,
 
44
"주마가편이란 말일 있지 아니하오니까."
 
45
"어 그렇지요."
 
46
"사또께서 목민지관이 되시었으니 날마다 세 번 살피시어 할 것이요, 또 자제도 더욱 몸을 삼가고 공부를 힘쓰도록 매양 훈계를 하시어야 하지요."
 
47
"어 그렇지요. 과연 낭청의 말이 절절 탄목할 만하오."
 
48
하고 부사는 누웠다 일어나며,
 
49
"여바라!"
 
50
하고 통인을 불러 문갑 속에서 초 두 자루를 내어 통인에 게 주며,
 
51
"너 이것 갖다가 책방 도련님께 드리고 오늘 밤 이 초 두 자루가 다 닳도록 글을 읽으시되 글 소리가 상방에 들리도 록 읽으시라고 하여라."
 
52
"여이."
 
53
하고 통인이 나간 뒤에 부사는 다시 베개에 누우며,
 
54
"여보, 몽룡이도 벌써 열 여섯 살이나 되었느니 이제는 장가를 들일 생각도 하여야 안하겠소?"
 
55
"그도 그러하옵지요마는 사나이가 색을 알게 되면 공부는 못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56
"과연 낭청 말이 옳소. 나도 곧잘 공부를 하다가 열일곱 살에 처음 기생 오입맛을 보고는 그만 미치어서 공부도 다 덮어 놓고 선친께서 잠만 드시면 살짝 빠지어 나가선 기생 집에서 밤을 새우고 들어오니 무슨 공부할 정신이 있었겠 소? 허허허, 그래서 과거가 늦었지요. 나도 재주가 남만하고 문벌이 남만하여 그렇지만 아니하였더면 소년 등과하여 벌 써 벼슬이 삼공에는 못 미치더라도 판서깨는 하였을 것을 지금 망륙지년에 겨우 일개 부사로 있으니 가탄이지요."
 
57
하고 부사는 후회하는 빛을 보인다.
 
58
낭청도 입맛을 쩍쩍 다시며,
 
59
"다 팔자지요. 사또는 기생 오입이나 하다가 과거가 늦으 시었거니와 나는 기생은 커녕 색주가한테 술 한 잔 사먹지 못하고도 칠십을 바라보아 머리가 허연 것이 사또를 따라다 니며 책방 웃목에서 종이노나 꼬고 있으니 내 신세가 더 딱 하지요."
 
60
하고 휘유 한숨을 진다.
 
61
술상이 들어온다.
 
62
"압다 낭청 술이나 자시오. 우리네는 인제 늙었으니 아이 들 자라나는 것이나 낙으로 삼지요."
 
63
낭청은 술을 받아 쭉 들이키고 웃수염에 묻은 것까지 쪽쪽 빨아 들인 뒤에,
 
64
"사또는 좋은 자제나 두시었으니 낙도 되시려니와, 나같 이 아들놈은 나는 대로 난봉이요, 손자놈 하나도 남만 못한 병신을 둔 사람이야 낙이 무슨 낙이오니까."
 
65
"하기는 나도 저만 나이 적에 기생 오입도 하였지마는 몽 룡이야 설마 그렇겠소?"
 
66
하고 혼자 웃는다.
 
67
낭청은 그렇다는 뜻인지 안 그렇다는 뜻인지 고개를 끄덕 끄덕하며,
 
68
"허기야 자제야 설마 그러하오리까."
 
69
하고 지금까지 점잔빼던 태도는 다 없어지고 뼈만 남은 두 어깨가 축 처진다.
 
70
몽룡은 하도 글을 읽기는 싫고 춘향의 모양만 눈에 알른거 려 읽던 책 위에다가 아까 광한루에서 받은 춘향의 글을 펴 놓고 보고 또 보고 외우고 또 외우고, 그래도 시원치 아니 하여 마침내 종이를 내어놓고 춘향의 글씨를 그리기를 시작 하여 마지막 성 춘향이라는 춘자를 그리노라고 열이 났을 때에 방자가,
 
71
"도련님! 큰일났소!"
 
72
하고 창밖에서 부른다.
 
73
"오냐, 큰일이 무슨 큰일이냐. 파루 소리가 났느냐, 상방 에 불을 물렸느냐?"
 
74
하고 몽룡이 창을 여니 방자는 초 두 자루를 내어밀면서 퉁명스럽게,
 
75
"파루가 다 무엇이요? 아직 초경도 안 되었소. 상방에 불 을 물리기는 커녕 사또께서는 이 초 두 자루가 다 닳도록 도련님 글 읽으시는 소리를 들으시고야 불을 물리시거나 말 거나 하신다오."
 
76
몽룡은 초를 받아 방바닥에 홱 내던지며,
 
77
"이놈아 누가 널더러 이것 가지고 오라든? 늙은이가 참견 도 퍽도 하네."
 
78
하고 화를 낸다.
 
79
"압다, 그렇게 화를 내실 것이 무엇이요?"
 
80
하고 방자가 빈정거린다.
 
81
"어찌해 화가 안 난단 말이냐. 이 초 두 자루를 다 태이 려면 노루 꼬리만한 여름 밤을 다 새지 않겠느냐."
 
82
고 고개를 숙인다. 그것을 보고 방자는 혼잣말 모양으로,
 
83
"멀었소."
 
84
몽룡이 고개를 번쩍 들며,
 
85
"무엇이 멀어?"
 
86
"도련님 아직 기생 오입하기 멀었단 말이요."
 
87
"왜?"
 
88
"그렇게 서서 똥누게 꼿꼿해 가지고 시하에 계신 미장가 전 도련님이 기생 오입을 어찌한단 말이요?"
 
89
하고 방자는 돌아서면서 조롱하는 듯이 픽 웃는다.
 
90
방자의 말을 듣고 생각하니 과연 그렇다. 아버지를 속이기 전에는 춘향이 집에 갈 도리가 없을 것이다.
 
91
"얘, 그러면 어찌하면 좋으냐—좀 가르치어 다오."
 
92
하고 몽룡은 몸을 문지방에 기대고 방자를 가까이 올라고 손짓을 한다.
 
93
방자는 짐짓 못 들은 체하고 하늘만 바라보며,
 
94
"내일은 비가 오겠는걸."
 
95
하고 딴전을 친다.
 
96
몽룡은 좀 소리를 높여,
 
97
"여바라!"
 
98
하고 부른즉 방자는 껑충 뛰며
 
99
"여이."
 
100
하고 소리를 지른다.
 
101
"이놈아, 왜 그리 소리를 질러? 이리 오너라—눈치 없는 놈 같으니."
 
102
방자 가까이 가며,
 
103
"버릇이 되어서, 여바라 소리만 들으면 그렇게 큰 소리가 저절로 나가는구려."
 
104
"얘, 어찌하면 좋으냐?"
 
105
하고 몽룡이 탁탁이 묻는다.
 
106
"그것 힘 안 드는 일이요. 도련님께서 사또 분부를 반만 치라도 들으실 생각이 있으시면 그 초 두 개를 한꺼번에 켜 놓고 글을 읽으시어도 좋고 그렇지 않고 사또 분부는 잠깐 집어치우고 어서 춘향이 집에만 가고 싶으시거든 사또께서 초저녁 잠 드시기를 기다려서 그 초 두 자루를 소매에 넣고 춘향이 집에 가시어서 춘향의 방에다 턱 켜 놓고 밤이 새도 록 노시면 안 좋소. 내일 아침에 다 닳은 초 밑둥 둘만 가 지고 들어가서 사또 보시게 하면 그만 아니요?"
 
107
방자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나 자식된 도리에 어버이 를 속이는것이 죄스러워,
 
108
"얘, 부모를 속이는 것이 죄가 안 될까?"
 
109
"죄다뿐이겠소?"
 
110
"그러면 네가 날더러 불효의 죄를 지으란 말이로구나."
 
111
"그러길래 소인이 아뢰었지요—아예 광한루에 나가시지도 말고 춘향을 보실 생각도 마시라고."
 
112
"하지마는 춘향을 안 보고는 못 배기겠구나."
 
113
"그러시거든 오늘 밤에는 저 초 두 자루가 다 닳도록 공 부를 하시어서 내일 하실 효도까지 오늘 밤에 다 해 놓으시 고 내일 밤에 춘향을 찾아가시구려."
 
114
몽룡이 이윽히 생각하여 보더니,
 
115
"얘, 그럴게 아니다. 어떻게 내일까지 참는단 말이냐. 노 을 밤에는 부명을 거역하고라도 춘향을 찾아가고 내일 네 말대로 이틀 효도를 한꺼번에 해버리련다."
 
116
방자 킥 웃으며,
 
117
"그것도 좋소. 도련님같이 글공부를 잘하시면 그런 묘책 도 나나 보오."
 
118
몽룡은 그렇게 결심을 하여 놓고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두어 대문 읽다가,
 
119
"여바라!"
 
120
"여이."
 
121
"상방에 불 물렸나 보아라."
 
122
"초저녁에 불은 무슨 불을 물려요?"
 
123
몽룡은 서전을 펴놓고 또 두어 대문 읽다가,
 
124
"여바라!"
 
125
"여이."
 
126
"얘, 너 상방에 가서 사또 주무시나 엿보고 오너라."
 
127
방자 상방에 갔다 오더니,
 
128
"사또께서 낭청 나리하고 약주 잡수십디다."
 
129
몽룡은 이번에는 시전을 펴놓고 또 두어 장 읽다가,
 
130
"여바라."
 
131
"여이."
 
132
"상방에 가서 사또 주무시나 보아라."
 
133
"금시 이야기하시던 어른이 금시에 어떻게 주무시오?"
 
134
하고 방자 역정을 낸다.
 
135
"여바라."
 
136
"여이."
 
137
"어떻게 사또를 주무시게 할 수가 없느냐?"
 
138
"낭청 나리 때문에 좀체로 못 주무시겠읍디다. 사또게서 잠이 드실 만하면 이야기를 꺼내고 또 잠이 드실 만하면 이 야기를 꺼내는 모양이니 아마 파루 치기 전에는 주무실까 싶지 아니합니다."
 
139
"여바라."
 
140
"여이."
 
141
"얘, 파루 치는 놈을 술을 한잔 먹이고 지금 곧 치라고 하려무나—얘 내가 마음이 졸여서 감수하겠구나."
 
142
방자 어이없어 껄껄 웃으며,
 
143
"내 어디 사방에 가 보고 오리다. 약주를 잡수시었으니 노인들이라 금시에 곯아 떨어지었는지도 모르지요."
 
144
하고 사뿐사뿐 동헌으로 간다.
 
145
이윽고 방자 돌아오더니,
 
146
"되었소 되었소."
 
147
하고 소리를 지른다.
 
148
도련님 좋아라고,
 
149
"주무시더냐?"
 
150
"곯아 떨어지었읍니다. 사또께서는 코를 고시고 낭청나리 는 잠꼬대를 하시니 이 일이 안 되고 무엇이 되었소."
 
151
하고 떠든다.
 
152
"이놈아, 떠들지 말아라. 모처럼 곤하게 드신 잠 깨실라.
 
153
늙은이들이 잠귀가 밝아서 자면서도 듣나니라."
 
154
"어림도 없소. 묶어가도 모르겠읍디다. 자! 가시려거든 어 서어서 나서시오. 다른 사람 자는 것을 보니 내가 졸려서 못 견디겠소."
 
155
몽룡은 남편 잠든 새에 도망하는 여편네 모양으로 소리도 안 나게, 그러고도 빠르게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고 나선다.
 
156
"자! 가자! 문소리 내지말고 살그머니 나가자."
 
157
삼문 밖에 나서서 방자는 사초롱에 불 켜 들고 앞서고 몽 룡은 뒤를 따라 나가니 뒤에서 무엇이 따라와서 뒷덜미를 짚는 듯하여서 몽룡은 공연히 발이 이리 놓이고 저리 놓이 어 두어 번이나 방자의 신 뒤축을 밟는다. 방자 웃고 고개 를 돌리며,
 
158
"도련님 웬 일이요. 풍이 동하시었소! 왜 발이 제 길을 못 찾소?"
 
159
"얘, 상방에 들릴라."
 
160
"상방은 왜, 상방에 발이 달려서 따라옵디까. 상방은 벌써 여기서 십리나 되오."
 
161
그제야 몽룡이 마음을 놓고 걸음을 헌거로이 걸으며,
 
162
"얘, 너도 아버지 있느냐?"
 
163
"소인도 아비가 있길래 낫겠지요마는, 아비가 퍽 성미가 급했든지 소인이 뱃속에 있을 때에 벌써 소인의 아비는 땅 속으로 들어갔다 하오."
 
164
"그러면 네가 유복자로다. 잘 되었다. 나도 유복자나 되었 더면 좋겠다."
 
165
초생달은 벌써 넘어간지 오래고 천지는 깜깜한데 수없는 별만 졸리는 듯이 깜박깜박하고 부중 민가에서도 거의다 불 을 끄고 여기저기 한두 집 등잔불이 반짝반짝하는 것은 앓 는 사람이나 있는 집인가. 오래 그리워하던 사람이 만나서 밤 깊는 줄도 모르고 끝없는 정담이나 하는 집인가. 또는 일이 뜻같이 아니 되어 밝는 아침에는 서로 동서로 갈릴 사 람들이 아마 이별의 회포를 이기지 못하여 서로 붙들고 서 로 맥맥히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집인가. 이러한 생각을 할 때에 비감한 생각이 나서,
 
166
"얘."
 
167
하고 방자를 불렀다.
 
168
"왜 그러시오?"
 
169
"웬 일인지 내 마음이 바감하여지는구나."
 
170
너무 기쁘면 슬퍼도 집니다. 기쁨과 설움은 쌍동이라 하고 웃음과 눈물은 오누이라 하오.
 
171
"과연 그런가보다. 사람이란 나면 늙고, 늙으면 죽되 늙으 면 다시 젊을 수가 없고,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 날 수 가 없구나. 인생 백년이 하루살이 같지 아니하냐. 만나면 떠나 고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인생 백년에 기쁠 날이 없는 모양 이다."
 
172
"도련님, 왜 그렇게 흉한 소리를 하시오? 동방 화촉야에 절대 가인을 만나 백년 해로하시기를 언약하니 인생이 여기 서 더 기쁜 일이 없거든 왜 그런 슬픈 생각을 하시오. 나 같으면 있다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오겠소. 슬픈 것 괴로운 것 모든 좋지 못한 것은 이 팔자 사나운 방자놈이 도매로 다 맡아 울 것이니 도련님은 기쁜 생각만 하고 거드 럭거리고 잘 노시오."
 
173
하고 방자 얼씬얼씬 춤을 추며 노랫가락으로,
 
174
"이날이 어떤 날이냐. 도련님께서 동방 화촉야에 고운 님 만나시는 날이로구나. 인생이 몇 날이리. 초로 같은 인생일 진대 풀잎에 이슬 방울이 지기 전에 마음대로 놀것이 아니 냐.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을씨구."
 
175
"얘, 남 볼라."
 
176
"보면 어떠오?"
 
177
"고맙다."
 
178
"무엇이 고마와요?"
 
179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단 말이다."
 
180
"고마운 것 있소? 나도 내 멋에 그렇지요."
 
181
"거진 다 왔니?"
 
182
"이 천변 끼고 내려가서 배다리만 건너면 고대요."
 
183
천변을 끼고 내려가서 배다리를 건너 늙은 향나무를 지나 니 어디서 개가 콩콩 짖는다.
 
184
방자 몽룡을 돌아보며,
 
185
"춘향이 집 청삽살이요."
 
186
하고 웃는다.
 
187
"선방(仙尨)이로구나. 개도 나오는 줄을 아나 보구나."
 
188
"개야 무얼 알겠소? 아무나 와도 짖지."
 
189
마침내 춘향 문전에 다다라 방자가 우뚝 섰다. 안은 고요 하고 불빛조차 없다. 등불 빛에 '국태'라, '민안'이라 하고 대문에 써 붙인 입춘이 보이고,
 
190
'계마문전류(繫馬門前柳)'
 
191
라고 대문 기둥에 써 붙인 것도 보인다. 과연 문전에는 애 버들 한 그루가 섰다.
 
192
몽룡은 마음에 가득하여,
 
193
"왜 섰느냐?"
 
194
하고 얼빠진 듯이 섰는 방자더러 묻는다.
 
195
"그러면 앉아요?"
 
196
하고 방자 퉁명을 부린다.
 
197
"어떻게 들어가게 해주어야지."
 
198
"들어갈 줄도 모르시오? 집에 들어갈 때에는 대문으로 들 어가는 법이니 대문으로 들어가시구려."
 
199
몽룡이 손수 대문을 밀어 보니 꼭 닫혀서 삐걱 소리도 아 니 난다.
 
200
"얘, 대문이 걸렸구나."
 
201
"지금 한밤중에 대문 안 걸린 집이 객사 동대청 말고야 어디 있어요?"
 
202
"그러면 어찌하면 좋으냐?"
 
203
"대문을 열라시거나 그럴 뱃심도 없으시거든 저 담을 넘 어가시구려. 넘어가신다면 나도 거들어는 드리리다."
 
204
"얘, 담이야 어떻게 넘느냐. 네가 문을 좀 열게 하려무 나."
 
205
이렇게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에 개는 더욱 콩콩콩콩 짖는다.
 
206
"문까지 날더러 열어 달라시니 있다가는 춘향이 옷까지 날더러 벗겨 달라겠구려."
 
207
방자의 말은 차차 버릇이 없어진다.
 
208
"얘, 춘향의 옷을랑 내가 벗길께 너는 문이나 열어다오.
 
209
애먹이지 말고."
 
210
방자가 등을 번쩍 높이 들더니 솥뚜껑 같은 발을 들어 대 문을 쾅쾅 차며,
 
211
"문 열어라! 춘향아 문 열어라!"
 
212
하고 모가지에 시퍼런 핏줄이 솟도록 소리를 지르니 대문 은 부서질 듯이 소리를 내고 동넷집 개들까지 일시에 짖는다.
 
213
몽룡이 민망하여 눈살을 찌푸리며,
 
214
"이놈아, 그다지 야단을 할 것이야 무엇이냐. 가만가만 부 를 게지."
 
215
"가만가만히 부르면 잠든 사람이 듣소."
 
216
하고 또 한 번 아까보다도 더 힘있게 대문을 차며,
 
217
"춘향아, 문 열어라!"
 
218
하고 소리를 지른다.
 
219
고요하던 집안에 인적이 나고 불이 켜지더니,
 
220
"이 개!"
 
221
하고 짖는 개를 꾸짖으며 신 끄는 소리가 나고 중문 열리 는 소리가 나고 대문간으로 오더니 대문 빗장을 손으로 잡 기만 하고 열지는 아니하면서,
 
222
"거 누구야? 누가 이 아닌 밤중에 호기스럽게 문 열어라 하고 남의 집을 헐려 들어?"
 
223
분명 월매의 소린 줄은 방자는 안다.
 
224
"쉬! 어서 문 열어라."
 
225
"쉬라는 거는 누군데 누구더러 쉬래!"
 
226
방자는 웃음을 참으면서, 또 한 번,
 
227
"쉬!"
 
228
"또 쉬야! 쉬라니! 어디 구렁이가 나왔단 말이냐. 어린 애 기 오좀을 누인단 말이냐. 누구라고 말은 아니하고 쉬가 무 슨 쉬야?"
 
229
하고 가장 분이나 난 듯이 떨걱하며 빗장을 열더니 방자가 섰는 것을 보고,
 
230
"이녀석 네드냐—못된 녀석 같으니. 내 집에 왔거든 아주 머니 문 열어 줍시오 하는 것이 아니라 문 열어라는 무엇이 며 쉬는 다 무엇이냐."
 
231
"쉬! 나보다 높으신 양반이 오시었소."
 
232
월매 놀라는 듯이 소리를 낮추며,
 
233
"너보다 높으신 양반이라니 누구시란 말이냐?"
 
234
"우리 도야지놈하고 애꾸 눈이 마누라 밖에야 조선 팔도 에 두 발 달린 사람 치고 나보다 안 높은 사람이 어디 있겠 소마는 정말 대단히 높으신 양반이 오시었소—책방 도련님 행차시오!"
 
235
책방 도련님이란 말에 월매 깜짝 놀라는 듯이 고개를 내밀 어 보니 아무도 없다.
 
236
"이녀석 거짓말이다. 어디 계시냐?"
 
237
방자도 뒤를 돌아보니 계셔야만 할 도련님이 간 곳이 없다.
 
238
도련님이 간 곳이 없음을 보고 방자도 놀라는 듯이 눈이 둥그레지며,
 
239
"문을 열라면 열 게지 공연히 늙은이가 물색 없이 불공한 입을 놀려서 도련님께서 노여시어 돌아가시었소.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요. 나는 모르우. 나는 모르우."
 
240
하며 어슬렁어슬렁 돌아나간다.
 
241
월매 바짓바람으로 대문 밖으로 뛰어나오며,
 
242
"얘, 방자야,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늙은 것이 물색 없어선 그랬으니 네가 어서 따라가서 모시고 오너라. 애곡 내 일이야. 들어오는 복을 내 주둥아리로 갑슬러 버렸구 나."
 
243
하고 쩔쩔매고 돌아갈 때에 몽룡이 담모퉁이에서 썩 나서 며,
 
244
"낼세, 아니 가고 여기 있네."
 
245
월매 잠깐 몽룡에게 허리를 굽히고 어두운 그늘로 피하여 서며,
 
246
"에그 이를 어찌하나. 치마도 안 입었는데—도련님께서 행 차하시는 줄을 미리 분부나 계시어 알았더라면 이럴 리는 없을 것을. 애고 이를 어찌하나."
 
247
몽룡이 대문 앞으로 가까이 오며,
 
248
"늙은이가 아무러기로 상관 있나. 내가 도리어 미안하 이."
 
249
월매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250
"아가 상단아—아니다 아가! 자느냐. 일어나거라. 책방 도 련님이 너를 보시려고 행차 하시었다. 상단아? 상단아! 일어 나 불 피어라—아니다 불 켜고 불 피어라. 애고, 이 일을 어 찌하나. 어찌하면 도련님도 오신다는 선문도 없이 이렇게 오신담—자 도련님 어서 들어오시오.—이리로 들어오시오. 아 차 내가 아직도 치마를 아니 입고 발광을 하네."
 
251
하고 월매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춘향이 중문까지 나와 몽룡을 맞으며,
 
252
"이리 들어오십시오."
 
253
하고 고개를 숙일 때에 방자 곁에 있다가 초롱을 들어 춘 향의 얼굴을 비추고 한 번은 몽룡의 얼굴을 비춘다.
 
254
몽룡은 춘향의 수그린 얼굴을 초롱불에 번뜻 보고 공연히 낯을 붉히면서,
 
255
"내가 오늘 밤에 찾아올 줄 몰랐더냐?"
 
256
하고 춘향에게 말을 붙인다.
 
257
춘향이 고개를 잠깐 들어 몽룡을 보며 수삽은 태도로,
 
258
"오실 줄은 알았사오나 밤이 깊도록 아니 오시기로 내일 이나 오시나 하였읍니다."
 
259
하고 또 고개를 숙이며,
 
260
"들어오십시오."
 
261
한다.
 
262
몽룡은 어서어서 말 한 마디라도 더 붙이고 싶고 춘향의 말소리를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서,
 
263
"네가 앞서라."
 
264
"도련님 먼저 들어가시오."
 
265
"매사는 간주인이라니 주인이 앞서라."
 
266
"매사는 간주인이라니 주인하라는 대로 합시오."
 
267
방자 옆으로 돌아서며,
 
268
"이러다가는 중문간에서 밤을 새우시겠소."
 
269
하고 웃는다.
 
270
마침내 몽룡이 앞서고 춘향이 뒤를 다라 화계 앞을 지나 향나무 밑을 지나 '부용당(芙蓉堂)'이라고 액자를 붙인 춘 향의 방 마루에 올랐다.
 
271
몽룡이 잠깐 마루에 섰는 동안에 춘향은 먼저 방에 들어가 자리를 바르고,
 
272
"누추하오나 이리 들어옵시오."
 
273
하고 몽룡을 청하여 들인다.
 
274
몽룡은 꿈인가 의심하여 춘향이 시키는 대로 방에 들어가 춘향이 시키는 대로 아랫목에 앉고, 춘향도 금시에 밖으로 나가려는 듯이, 마치 어른한테 걱정 들으러 들어온 어린 아 이 모양으로 문 밑에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275
그렇게 앉은 모양도 좋다.
 
276
몽룡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할는지 몰라 공연히 무릎만 들었 다 놓았다 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277
"왜 거기 그렇게 앉았느냐?"
 
278
춘향이 잠깐 눈을 들어 몽룡을 바라보며,
 
279
"여기도 좋습니다."
 
280
하고는 또 여전히 고개를 숙인다. 몽룡은 또 한참이나 무 릎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방안도 휘휘 둘러 살피다가 또 한 번 기운을 내어,
 
281
"이리 좀 가까이 와 앉으려무나!"
 
282
춘향은 또 잠깐 눈을 들어 몽룡을 보며,
 
283
"여기도 좋습니다."
 
284
방자 문 밖에서 이 광경을 엿보다가 가깝한 듯이 혼잣말 로,
 
285
"허, 모두 타락송아지들이로구나."
 
286
하고 어디로 가버린다.
 
287
아무리하여도 춘향과 말이 어울리지 아니하여 몽룡은 겁겁 증이 났다. 그러나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또 한 번 기운을 내어,
 
288
"나이 몇 살이냐?"
 
289
하고 물었다.
 
290
"열 여섯 살이요."
 
291
"허, 나와 동갑이로구나. 생일은 언제냐?"
 
292
"삼월 초하룻날이요."
 
293
"참 신통도 하다. 생일까지 같구나."
 
294
"어느 시에 났느냐?"
 
295
"유시요."
 
296
"네가 유시에 났으면 나보다 한나절 떨어지어 났구나, 나 는 인시다.—참 신통도 하다. 시간까지 같았더라면 너와 나와 사주 동갑될 뻔하였구나."
 
297
그리고는 또 말문이 막혀 버렸다.
 
298
몽룡은 사벽에 붙인 그림도 보고, 장지에 바른 글씨도 보 고, 세간도 보고, 문갑 위에 쌓인 책과 문방 제구도 보고, 웃목 구석에 세운 거문고도 보고, 장판도 보고, 깔고 앉은 보료도 만지어 보고, 벽에 걸린 춘향의 치맛자락도 만지어 보고, 그리고는 또 춘향의 소곳하고 앉았는 양을 보고, 이리 하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를 하여도 말문이 열리지를 아니하 여 겁겁증이 나서 할 때에 알맞추 월매가 상단이에게 술상 을 들리고 나온다.
 
299
월매 술상을 앞에 놓고 웃어 가며,
 
300
"도련님, 이렇게 내 집에 오시기 참으로 의외요. 안주는 없으나 약주나 한 잔 잡수시고 가시오."
 
301
하고 춘향을 보며,
 
302
"아가, 도련님이 너 글 잘한다고 소문 들으시고 널 보시 러 이렇게 찾아 오시었는데 왜 그리고 앉았느냐. 에그, 이를 어찌해. 담배도 아직 안 붙이어 드렸구나."
 
303
하고는 다시 몽룡을 향하여,
 
304
"도련님 노여 마시오. 이 애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또 집 구석에서 열인 못하고 자라나서 이렇게 수줍어 그래요."
 
305
하고는 다시 춘향을 향하여,
 
306
"아가, 도련님 약주나 따라 드리려무나."
 
307
하고 술주전자를 춘향의 앞으로 밀어 놓는다.
 
308
춘향이 마지 못하여 돌아앉으며 주전자를 들어 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두 손으로 몽룡을 주며,
 
309
"약주 잡수세요."
 
310
하고 낯을 붉힌다.
 
311
몽룡이 춘향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 마시지 아니하고 상 위 에 놓으며,
 
312
"술을 먹기 전에 내가 한 마디 할 말이 있네, 그 말을 들 어 주면 내가 이 술을 먹겠지만 그 말을 안 들어 주면 이 술을 먹을 수가 없네."
 
313
월매는 웬 영문을 모르고 잠깐 놀라는 듯이,
 
314
"무슨 말씀이신데 이렇게 허두가 대단하시오?"
 
315
하고는 다시 상긋 웃는다.
 
316
몽룡은 하도 가슴이 설레어 잘 두서도 차리지 못하고,
 
317
"다른 말이 아니라 춘향을 나를 주게."
 
318
월매 깔깔 웃으며,
 
319
"에그 도련님도 우스운 말씀도 하시오. 춘향을 내가 약낭 에 넣어 두었단 말이요, 벽장에 감추어 두었단 말이요? 여 기 앉았는 춘향을 누구더러 달라시오?"
 
320
"아닐세. 그런 것이 아니라 춘향과 나와 인연을 맺어 백 년 해로하게 하여 달란 말일세. 내가 춘향을 보니 나와 천 정 배필이니, 안 보았으면 모르거니와 이렇게 보고는 놓고 갈 수 없네. 춘향을 내게 허락하소!"
 
321
월매 문득 시무룩하여지며,
 
322
"도련님은 그런 말씀을랑 마시오—그것은 할 수 없소."
 
323
하고 몽룡의 청을 뚝 잡아뗀다.
 
324
몽룡이 언성을 높이며,
 
325
"어찌하여 못한단 말인가?"
 
326
월매 길게 한숨지며,
 
327
"말씀하지요—못할 연유를 말씀하지요. 이 애가 비록 월매 의 딸로 태어났으나 근본은 양반이요. 회동 성참판 염감이 보의로 남원에 좌정하여 나를 수청을 들이시었다가 몇 달만 에 이조 참판으로 승차하여 내직으로 들어가실 적에 날더러 가자고 하시는 것을 노모가 계신고로 못 가고, 이별한 그달 부터 잉태하여 이 애를 낳았는데 그 연유로 영감께 고목하 였더니, 젖줄 떼는 대로 이 애를 데려가마 하시더니 운수 불길하여 영감께서 그해 겨울에 별세하시니 하릴없이 이 애 를 내가 기를제 금이야 옥이야 중문 밖에도 안 내놓고 꼭 글공부만 시켰지요. 이 애도 근본이 양반의 씨라 재주로나 행실로나 어느 대갓댁 아가씨한테 밀리지 아니하지요. 이렇 게 힘써 애써 고이고이 기른 딸을 양반 집에 주자하니 내 지체가 부족하고 상사람을 주자 하니 내 딸이 아깝구려. 그 렇다고 남의 첩으로나 주기는 죽어도 싫고, 이리하여 상하 사 불급으로 혼기만 늦어가니 낸들 아니 걱정이요? 도련님 은 명문의 귀공자로 춘절 나비 꽃 본 듯이 일시는 이 애를 사랑하시나 사또께서 내직으로 승차시와 올라가시는 날이면 도련님도 따라가실 것이니 그때에 이 애를 생각이나 하시겠 소? 그리되면 옥 같은 내 딸은 생과부가 되어 송죽 같은 그 절개로 개가할 리 바이 없고 일생에 독수공방 눈물로만 지 낼 터이니 그 아니 딱하고 못할 일이요? 그러니 도련님은 그런 말씀 아예 마시고 약주나 잡수시고 놀다가는 가시 오."
 
328
하고 칼로 베는 듯이 잡아떼인다.
 
329
월매의 말은 도리어 몽룡의 마음을 끌었다.
 
330
"알아들었네. 그러면 이리하게. 춘향도 미혼전 처녀요, 나 도 미장가전 총각이니 우리 둘이 혼인하세. 부모 허락 안 계시니 육례는 못 이루거니와 대장부 한 번 말하면 변할 리 만무하니 내 맹세함세—평생에 춘향이를 백년 해로할 아내 삼기로 맹세함세. 불충 불효하기 전에야 하늘이 무너진들 그 맹세 저바릴 내 아니로세."
 
331
몽룡의 말에 월매 솔깃하여 춘향을 보며,
 
332
"아가, 도련님 말씀 너도 들었으니 네 뜻에는 어떠하 냐?"
 
333
하고 묻는다.
 
334
춘향은 더욱 고개를 숙일 뿐이요, 말이 없다.
 
335
월매 싱그레 웃으며,
 
336
"말 없으면 좋다는 뜻으로 본다."
 
337
하고 몽룡을 보며,
 
338
"도련님께서 진실로 그러시면 나도 허락하지요."
 
339
하고 잠깐 쉬어서,
 
340
"그렇지만 육례도 못 이루니 혼서예장 겸 사주단자 겸 필 적이나 한 장 써 주시오."
 
341
하고 지필을 끌어당기어 몽룡의 앞에 놓는다.
 
342
몽룡은 서슴치 않고 붓을 들어 백릉운화간지에 글씨도 뚜렷하게,
 
 
343
"천장지구(天長地久)
344
해고석란(瀣枯石爛)
345
천지신명(天地神明)
346
공증차맹(共證此盟)
347
상지 삼년 오월 오일(上之三年五月五日)"
 
348
이라고 썼다.
 
349
월매 그 종이를 들어 춘향을 주며,
 
350
"아가, 도련님 쓰신 것 보아라. 내야 진서를 아느냐."
 
351
춘향은 몽룡이가 쓴 때에 벌써 보았다.
 
352
"에그, 어머니도."
 
353
하고 종이를 손으로 밀친다.
 
354
월매는 그 종이를 꼭꼭 접어 허리춤에 넣고,
 
355
"자 도련님, 인제는 내 사위요, 약주나 잡수오."
 
356
하고 춘향을 향하여,
 
357
"아가, 이 술은 식었으니 딴 잔에 부어라."
 
358
춘향이가 다른 잔에 술을 부어 두 손으로 몽령을 권하니 몽룡이 그 잔 받아 들고 월매를 권하며,
 
359
"내가 먼저 받을 수 있소? 장모 먼저 받으오."
 
360
월매 선뜻 그 잔을 받으며,
 
361
"새 사위가 권하는 잔을 안 받을 수가 있나. 그러면 내가 먼저 먹소."
 
362
하고 무심코 한 모금을 마시더니 잔을 입에서 떼어 손에 들고 비창한 빛을 보이며 치맛고름으로 눈물을 씻는다.
 
363
몽룡이 놀래어,
 
364
"장모, 웬 일인가?"
 
365
월매 술을 엎지를까 보아 잔을 상 위에 놓으며,
 
366
"이런 좋은 날을 당하니 돌아가신 영감 생각이 나는구려.
 
367
영감이 생존하시어서 이날을 보시었더면 오죽 기뻐하실까.
 
368
하고 연해 눈물을 씻는다."
 
369
월매가 우는 것을 보고 춘향도 일생에 보지도 못한 아버지 를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씻는다.
 
370
몽룡은 말없이 두 사람이 우는 양을 보다가,
 
371
"여보, 장모 울지 마오. 장인 영감 생각하고 슬퍼하는 것 도 당연하지마는 새 사위 나를 보아 우지마오. 가는 자는 물과 같으니 아니 가든 못할 것이요, 가고 아니 오더라도 슬퍼하기 부질없소. 자 술이나 드오."
 
372
월매 눈물을 거두며,
 
373
"도련님, 노여 마시오. 기뻐 웃어야 할 때에 눈물을 보이 는 것이 도시 늙은이의 망녕이오."
 
374
하고 상긋 웃으며 놓았던 잔을 들이마시고 손수 주전자를 당기어 잔 가득 부어 몽룡을 권하며,
 
375
"옜소. 늙은 장모의 술 한 잔 잡수오."
 
376
몽룡이 잔을 받아 단숨에 쭉 들이키고 춘향더러,
 
377
"장모 술은 먹었으니 인제는 네 술 한 잔 먹자. 잔 가득 부어라."
 
378
춘향이 주전자를 들어 잔 가득 부어 두 손으로 받들어 몽 룡을 권한다.
 
379
"잡수시오!"
 
380
몽룡이 잔을 받으려고도 아니하고,
 
381
"아니다. 내가 오늘 너를 만나 백년 가약을 맺고 네 손에 첫번 잔을 받을 때에 무미하게 그냥 마실 수가 있느냐, 권 주가나 하나 불러라."
 
382
몽룡이 권주가를 부르라는 말에 춘향은 들었던 잔을 놓을 수도 없고 내밀었던 팔을 돌이킬 수도 없어 엉거주춤하고 얼굴만 붉히며,
 
383
"몰라요."
 
384
한다. 몽룡이 춘향의 뜻 알아차리고,
 
385
"내가 널더러 권주가 부르라 하니 혹 너를 기생으로나 여 기고 희롱하는 줄 아나 보다마는, 내가 어찌 평생 배필을 희롱할 리가 있느냐. 영가무도라 하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은 옛 성인도 가르치신 배라, 후일에 나는 백수 재상이 되 고 네가 정경 부인이 되더라도 노래 한 마디는 부를 것이니 나삐 알지 말고 한 마디 불러라."
 
386
이 말에 춘향이 한 무릎 세우고 단정히 앉아 사양 아니하 고 권주가를 부른다.
 
387
"잡으시오. 잡으시오. 이 술 한잔 잡으시오. 이 술 한잔 잡으시면 만수 무강하오리다. 이 술이 술이 아니라 한무제 승로반에 이슬 받은 것이오니 쓰나 다나 잡으시오. 인간 영 욕 헤아리니 묘창해지일속이라, 술이나 취코 노사이다. 꽃을 꺾어 주를 놓고 무궁무진 잡으시오. 우리 한 번 돌아가면 뉘라 한 잔 먹자 하리. 춘풍에 지는 꽃은 봄이 되면 다시 피되 우리 한 번 백발되면 다시 젊기 어려워라. 백년 신세 는 아침 이슬이요, 일대 부귀는 한바탕 꿈이로다. 아니 취코 무엇하리. 술이나 취코 노사이다."
 
388
몽룡이 다 듣고 나서 한 손으로 무릎 치고 한손으로 잔 받 으며,
 
389
"좋다! 노래도 좋거니와 목소리 더욱 좋의. 네가 주는 술 을 쓰나 다나 안 먹을 수 있느냐."
 
390
하고 고개를 번쩍 들고 남아답게 쭉 들이킨다.
 
391
몽룡이 손수 잔에 술을 부어 춘향을 주며,
 
392
"이것이 합한주니 나만 먹으랴. 너도 한 잔 먹어라."
 
393
"먹을 줄 몰라요. "
 
394
하고 춘향은 하얀 손을 들어 술잔을 막는다.
 
395
"술독 먹을 줄 알고 모르고가 있느냐. 물 먹을 줄 알면 술 먹을 줄 아는 게지."
 
396
"그래도 먹을 줄 몰라요."
 
397
월매 곁에서 딱하여,
 
398
"아가, 도련님이 주시는 술을 사양도 한두 번이지 어서 받으려무나."
 
399
몽룡이 웃으며,
 
400
"아차, 내가 잘못하였다. 부부는 일체라 널더러는 권주가 를 하라고 하고 나는 아니해서 쓰겠느냐. 나도 권주가 하 마."
 
401
하고 부른다—.
 
402
"대장부 세상에 나서 하올 일이 무엇이냐. 위로 성주를 도와 국태 민안하고 각급인 좋게 하온 후에 아래로는 덕 있 고 재주 있는 절대 가인 만나 나비와 꽃이 서로 즐기듯, 거 문고 비파 서로 화하듯, 주고 받고 받고 주고 즐겁게 사오 리라. 만일에 유자 생녀하여 효자 충신 문장 열녀 문흐를 빛낼진댄 그 더욱 좋을씨고. 나도 장부로 나서 오늘에 절대 가인 너를 만나 백년 인연 맺었으니 기쁨도 그지없네. 저 님아 이 술 한 잔 받으시라. 이 술이 여남은 술이 아니라 백년 해로 맹세주니 쓰나 다나 받으시라. 취코 놀까 하노 라."
 
403
노래를 마치고 잔을 춘향에게 주니 춘향이 마지못하여 받 아 마신다.
 
404
"도련님이 권주가도 잘하서거니와 아가, 너도 술을 곧 잘 먹는구나."
 
405
하고 월매는 맘에 흡족하여 웃는다.
 
406
이 모양으로 사오 순배가 돌아가니 워낙 술도 좋은 술이어 니와 몽룡이나 춘향이나 주량이 클 리가 만무하여 모두 낯 에는 홍훈이 돌고 어음에 취태가 보인다.
 
407
월매도 늙었는지라 기쁨과 술을 아울러 마시니 반장이나 넘어 취하여 딸 자랑 사위 아양 늙은 잔소리가 끝없이 나온다.
 
408
이런 때에는 월매가 눈치를 채고 안으로 들어가 주었으면 좋으련마는 늙은이가 눈치도 무디어 좀체로 잔소리가 끝날 것 같지 아니한 것을 보고, 몽룡은 춘향더러 술상을 물리라 고 눈짓을 하니 춘향이 알아듣고 방자를 불러 술상을 내어 준다.
 
409
그제야 월매도 눈치를 채고,
 
410
"늙으면 입에만 힘이 올라서 걱정이야. 도련님 지리해하 시는 눈치도 모르고 잔소리만 하여서 잔뜩 미움만 받았 지."
 
411
하고 일어나며,
 
412
"도련님 편히 주무셔오. 아가, 불 더 때래랴?"
 
413
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나가 버린다.
 
414
춘향이 월매를 따라 마루 끝까지 나가서,
 
415
"어머니 넘어지시리다."
 
416
월매의 신 소리가 멀어질 만한 때에 몽룡은 다리 쭉 뻗고 안석에 기대어 앉으며,
 
417
"내 집 늙은이나 남의 집 늙은이나 참견하고 잔소리만 말 았으면 좋을러라."
 
418
춘향은 월매 나가기를 기다렸던 듯이 마루에서 들어오는 길로 장문을 열고 맛좋은 진안초 한 줌을 내서 놓더니 그 중에서 한 잎사귀를 골라내어 꿀물에 훌훌 뿜어서 왜간죽 부산죽에 너흘지게 담아 들고, 청동 화로 재를 살짝 헤치고 빨간 백탄 숯불에 잠깐 데워 불그레한 입술로 한 모금 담박 빨고 치마꼬리로 물뿌리를 싹 씻어 둘러 잡아 몽룡을 주며,
 
419
"옜소. 도련님 담배 잡수."
 
420
몽룡이 황송한 듯이 안석에 기대었던 몸을 벌떡 일으켜 두 손으로 받아 퍽퍽 빨면서,
 
421
"허허, 이게 꿈이냐 생시냐?"
 
422
춘향이 몽룡의 곁으로 와 앉으며,
 
423
"꿈이어서야 하겠소?"
 
424
"아마도 이것이 꿈이로다. 꿈이면 깨지를 말아라!"
 
425
이때 방자 먹다 남은 술과 안주 배껏 양껏 다 먹고,
 
426
"도련님, 소인 들어갑니다. 춘향 아씨 나 들어가오."
 
427
"오 오늘 애썼다. 안목이나 단단히 살펴 보아라."
 
428
"도련님 대사나 평안히 지내시오."
 
429
하고 충충거리고 나가 버린다.
 
430
월매도 가고 방자도 가니 밤은 벌써 깊어 삼경이 지났다.
 
431
춘향이 일어나 비를 들어 먼지 안 일이만큼 방을 치우고
 
432
'어쩔까나'하는 듯이 웃목에 우두커니 서서 몽룡을 바라 보더니,
 
433
"들어가세요?"
 
434
하고 묻는다.
 
435
"누가?"
 
436
"도련님이."
 
437
"내가 어디로 들어가?"
 
438
하고 몽룡의 눈이 둥그레지는 것을 보고 춘향이 웃으며,
 
439
"그러면 여기서 주무시고 들어가세요?"
 
440
하고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441
몽룡이 웃으며,
 
442
"내가 아나? 마누라 처분이지."
 
443
춘향이 보에 싸 얹었던 금침을 내어 활활 펴고, 아랫에는 큰 베개 놓고 그 곁에 조그마한 낡은 베개를 놓고 나서 몽 룡의 곁에 와 서며,
 
444
"옷 끄르세요."
 
445
몽룡이 일어나 띠 끄르고 도포 벗으니 춘향이 받아 차곡차 곡 개어 병풍에 걸어 놓고,
 
446
"곤하신데 어서 주무세요."
 
447
"너는 안 잘래?"
 
448
"먼저 옷 끄르고 누세요. 그러면 나도 자지요."
 
449
몽룡이 여자 앞에서 옷 벗기가 장히 거북하여,
 
450
"너 먼저 벗고 누워라."
 
451
"어서 도련님 먼저 벗으세요."
 
452
몽룡이 저고리 고름에 손을 대이다가 그치고,
 
453
"아니다. 네가 주인이니 네가 먼저 벗어라."
 
454
춘향이 웃으며,
 
455
"주인 말대로 어서 도련님 먼저 벗으세요."
 
456
몽룡이 하릴없이 춘향이 항라는 대로 바지저고리 벗어 놓 고 중의 적삼 바람으로 우두커니 서서,
 
457
"자, 인제는 너도 벗어라."
 
458
"내 불 끄고 눕게 어서 들어가 누세요."
 
459
몽룡이 잠깐 어찌할 줄 모르고 두리번거다가 나는 듯이 춘 향의 뒤로 돌아가서 춘향의 겨드랑 밑으로 손을 넣어 저고 리 고름, 치마 고름 활활 끌러 벗긴 후에 듬썩 안아다가 이 불 속에 넣고 한삼 소매를 들어 놋등경에 옥등잔 불을 확 끄고는 더듬더듬 자리 속에 들어갔다.
 
460
"꼬끼요. 꼬끼요."
 
461
하고 닭이 운다. 한 홰 울고 두 홰 울고 세 홰 울 때에 일 찍 깨인 파리 소리 나고 동창이 훤하여지며 노고지리 지저 귀는 소리 들린다.
 
462
"도련님! 도련님!"
 
463
하고 춘향은 곤하게 잠든 몽룡의 귀에 입을 대고 두어마디 부르나 대답이 없으므로 손으로 어깨를 가만가만히 흔들며,
 
464
"도련님! 도련님!"
 
465
하고 깨운다.
 
466
그제야 몽룡이 눈을 번쩍 뜨며 춘향의 손을 잡고,
 
467
"왜?"
 
468
"어서 일어나세요. 사또 걱정하시지요. 사또 기침하시시 전에 어서 들어가세요."
 
469
하고 춘향이 몽룡의 옷을 끌어다가 몽룡의 곁에 놓는다.
 
470
몽룡이 마지못하여 일어나며,
 
471
"사또가 무엇이냐. 아버지지."
 
472
하고 춘향의 등을 만지니 춘향은 몽룡의 아버지를 아버지 라고 못 부르는 것이 설은 듯이 한숨을 지며,
 
473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좋은가요?"
 
474
하고 눈물을 떨군다.
 
475
춘향이 비감하여 눈물을 흘림을 보고 몽룡이 한 손으로 눈 물을 씻어 주며,
 
476
"왜 울어? 내가 제일이지 아버지가 제일이야?"
 
477
하고 위로한다.
 
478
춘향이 고개 들어 몽룡을 보며,
 
479
"그렇지요. 도련님만 나를 안 버리시면 나는 복 있는 사 람이요. 육례를 못 이루면 어떠며 첩의 첩이라면 어때요. 도 련님댁 종의 종이 되더라도 한이 없지요."
 
480
"그런 생각마라. 누가 널더러 첩이랄 리가 있느냐. 지금은 비록 육례를 못 이루더라도 우리 둘이 맘맞아 백년을 맹약 하였으니 그것이면 그만이지, 그까진 퀴퀴하고 뒤숭숭한 육 례는 다 무엇 말라 죽은 것이냐. 네 뜻만 변치마라, 내 뜻이 야 변할소냐."
 
481
"도련님 뜻이 변하면 변하지 내 뜻이야 변하겠소?"
 
482
"네 뜻만 안 변할 양이면 나는 네 집 더부살이 놈의 더부 살이가 되어도 좋다."
 
483
하고 소세하고 옷을 입고 일어나려 할 때에 춘향이 몽룡의 소매를 붙들며,
 
484
"잠깐 기다리세요."
 
485
"아나 상단아! 도련님 소세하시었다."
 
486
상단이 자개로 아로새긴 통영 칠반에 짤짤 끓는 미음 한 그릇 강능 석청을 덤뿍 치고 따뜻한 약주 두어 잔 과일 한 접시 놓아 내어온다.
 
487
"마시세요."
 
488
하고 춘향이 숟가락 들어 권하니 몽룡이 감지덕지하여,
 
489
"너도 먹어라."
 
490
"나는 나중에 먹어요."
 
491
"이것 내가 다 못 먹겠다. 같이 먹자."
 
492
"잡숫다가 남기세요."
 
493
몽룡이 약주 한 잔 먹고 과일 두엇 집어 먹고 미음은 반그 릇쯤 마시곤 일어나며,
 
494
"나는 간다. 저녁에 또 오마."
 
495
하고 나갈 적에 춘향이 중문까지 따라 나가며,
 
496
"안녕히 가세요—길이나 아시나."
 
497
"길 모를까. 어서 들어가 편히 쉬어라—곤하겠다."
 
498
"안녕히 가세요."
 
499
"파루 치거든 오마."
 
500
몽룡의 발자취 소리 안 들릴 때까지 마루 끝에 우두커니 동천에 해 떠오르는 붉은 구름을 바라보고 섰는 춘향의 토 양은 수심을 띈 듯 부끄러움을 머금은 듯하였다.
 
501
이로부터 몽룡은 밤이면 춘향의 집에 와서 놀고, 이야기하 고 자고 새벽이면 춘향이가 정성으로 만들어 주는 잣죽이나 깨죽이나 양즙이나 미음이나 원미나 약주 한 잔 받치어 마 시곤 들어갔다.
 
502
날이 갈수록 사랑은 더욱 깊어 가고 피차에 수줍은 생각도 더욱 줄어 드니 친구같이 내외같이 어떤 때에는 이야기 동 무, 어떤 때에는 글 동무 글씨 동무, 또 어떤 때에는 장난 동무 가댁질 동무 또 어떤 떼에는 변변치 아니한 일로 옥신 옥신 말다툼도 하다가 춘향이 울면 몽룡이가 빌고 몽룡이 간다고 일어서면 춘향이가 울고 붙들었다.
 
503
"아버지가 아마 내가 밤이면 빠지어 나오는 눈치를 채었 는지 오늘 밤 안으로 이 책 한 권을 외어서 내일 아침에는 아버지 앞에서 따로 외어 바치라는데 이것 큰일 났다."
 
504
하고 밤일 깊도록 글을 읽으면 춘향은 몽룡이 글 외는 정 신 헛갈릴까봐 자는 듯 죽은 듯 그린 듯이 가만히 앉아 책 이나 보고 혹 일어나 나갈 일이 있으면 아기 재우고 일어나 는 어머니처럼 바싹 소리도 안 나게 일어나서 발끝으로만 사뿐사뿐 문도 사르르 가만히 열고 나가고 그러다가 어찌어 찌하여 무슨 소리를 내면 춘향은,
 
505
"이를 어찌하나."
 
506
하는 듯이 나무로 깎은 사람 모양으로 우뚝 서서 곁눈으로 몽룡의 눈치를 보아 몽룡이가 여전히 글을 읽으면 그제야 안심한 듯이 휘 숨을 내어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는다.
 
507
몽룡이 비록 글 외우기에 잠심한다 하더라도 맘의 절반은 항상 춘향에게 있으니 춘향이가 이렇게 하는 일동 일정을 모를 리가 있으랴. 죄다 알고 있다. 그러다가 이따금 부러 귀찮은 듯이,
 
508
"이거 부스럭거려서 어디 글 읽어 먹겠나."
 
509
하고 픽 돌아 앉으며 춘향을 흘겨보면 춘향은 정말로만 여 기고 낯을 붉히며,
 
510
"잘못했소."
 
511
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린다.
 
512
춘향이가 밖으로 나가 벌리면 몽룡은 정신이 어디로 빠져 달아난 것 같아선 공부도 안 되고 몸이 찌뿌드드해지고 하 품만 난다. 제가 가면 어디를 가랴, 곧 돌아오리라, 돌아오 거든 한 번 놀래 주리라 하고 가만히 병풍 뒤에 들어가 쯔 그리고 앉아 있노라면 춘향도 몽룡이가 자기를 기다릴 줄을 짐작하고 발소리 안 나게 가만가만 들어온다. 와 본즉 몽룡 은 간 곳이 없다. 춘향이 놀라며,
 
513
"에그 노해서 가셨나뵈."
 
514
하고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병풍에 걸린 몽룡의 옷을 보고,
 
515
"옷은 여기 있는데."
 
516
하며 이리저리 돌아볼 때에 몽룡이,
 
517
"어흥!"
 
518
하고 병풍 뒤에서 뛰어 나와 뒤로서 춘향의 눈을 두 손으 로 꽉 가리우면 춘향이 웃으며,
 
519
"아이고 깜짝이야. 숨겠거든 옷을 감추고 숨어야지 옷을 두고 숨으면 누가 속소?"
 
520
몽룡이 춘향을 놓고 아랫목에 두 손으로 깍지 껴 베개하고 네 활개 쭉 뻗고 나가 자빠지며,
 
521
"어이구 공부하기 싫어! 공자 맹자가 내 큰 원수요, 우리 아버지가 내 적은 원수다."
 
522
"공부가 하기 싫으면 무엇을 하고 싶소—바느질이나 하시 랴오?"
 
523
하고 춘향이가 짓다가 둔 몽룡의 세모시 적삼을 마저 지으 려고 반짇고리를 끌어당기어 동경 앞에 앉으며 물으면, 몽 룡은 누운 대로 등잔불에 비치인 춘향의 얼굴을 모으로 보 고 콧마루 예쁘다 하면서,
 
524
"응 나도 공부니 무에니 다 집어치고 종일 너하고 마주 앉아서 바느질이나 했으면 좋을 터라."
 
525
춘향이 실 끝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 똑 끊어 바늘귀를 꿰면서,
 
526
"숭해라! 누가 대장부가 바느질을 하오?"
 
527
"얘 절에서는 중들은 제 손으로 모두 옷을 짓는다더라.
 
528
그 가사라고 안 있느냐. 조각보 같은 것 말이다—그것도 다 중들이 짓는다더라."
 
529
"그러면 도련님도 중이 되시랴오?"
 
530
"공부만 안한다면 중도 되고 싶다. 뗑 뗑 종이나 치고 새 벽 일찌기 일어나서 긴 장삼 입고 나무아미타불 에헤헤 하 는 것도 보기 좋더라."
 
531
춘향이 실을 꿰어 적삼 겨드랑 솔기를 감치며,
 
532
"숭해라! 도련님 중 되시면 나는 어찌하고?"
 
533
"너도 승 되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딱딱."
 
534
하고 몽룡이 벌떡 일어나 합장하는 흉내를 낸다.
 
535
춘향이 힐끗 돌아보고 한 번 웃고 여전히 감치면서,
 
536
"숭해라! 왜 하라는 공부는 아니하고 숭한 소리만 하고 앉았소? 중도 아내 있고 중도 남편 있소?"
 
537
"참 그렇구나. 중은 안 될란다. 너도 애어 승 될 생각은 말어라."
 
538
"숭해라! 누가 승 된다오? 어서 글이나 읽으시오. 어린애 소리 그만하고."
 
539
몽룡이 한참 글을 읽으나 글에 맘이 없다. 또 돌아앉아 구 석에 세운 거문고를 가리키며,
 
540
"저게 무엇이냐?"
 
541
춘향이 시끄러운 듯이 고개도 안 돌리고,
 
542
"무엇 말이요."
 
543
"저기 저 구석에 시커먼 자루를 쓰고 섰는 저놈 말이다.
 
544
내가 네 집 처음 온 날부터 저놈이 무엇인지 몰라 항상 무 시무시하였다."
 
545
춘향이 돌아보며,
 
546
"그거 어비요. 도련님 공부 아니하고 잔소리만 하시면 어 흥 하는 어비요."
 
547
"천하 만물에 이름 없는 것 어디 있느냐. 어비라 하니 성 은 어가 이름은 외자 이름으로 비란 말이냐?"
 
548
"어비는 기생 모양으로 성은 없고 이름뿐이라오."
 
549
"이름이 무엇이냐?"
 
550
"거문고."
 
551
"거문고랑 하니 옷칠한 게냐?"
 
552
"검어서 거문고가 아니라 줄 타는 것이요."
 
553
"줄은 타면 하루 얼마나 가느냐?"
 
554
"가는 것이 아니라 뜯는 것이요."
 
555
"종일 잘 뜯으면 몇 조각이나 뜯느냐?"
 
556
"그렇게 뜯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줄을 이렇게 이렇게 희 롱하면 풍류 소리가 난다오."
 
557
하고 춘향이 웃으니 몽룡이 춘향 곁으로 앉은걸음으로 가 까이 오며,
 
558
"정녕 그러할 양이면 한 번 들어 볼 만 하구나."
 
559
몽룡이가 하도 거문고를 타라곤 보채니 춘향이 마지 못하 여 바느질감에 바늘 꽂아 반짇고리를 한구석으로 밀어놓고 치마 떨고 일어나, 칠현금 거문고를 내리어 무릎 위에 비스 듬히 안공 술대를 빼어 스르릉 둥당 줄을 고르고 흰 손을 넌짓 들어 큰 줄을 울리니 '둥'하고 청학의 울음이다.
 
560
춘향이 손을 멈추고,
 
561
"오늘 공부는 다했소."
 
562
"염려 마라! 내일 아침 안 외어지거든 머리가 아프다거나, 배가 아프다거나 꾀병하면 그만이지, 나도 외아들이라, 아프 다고만 하면 아버지도 끔쩍 못한다. 어서 한곡조 들려라."
 
563
춘향이 일변 타고 일변 부르니,
 
564
"님은 창송이 되고 나는 목죽이 되어, 나목한천에 우리 둘만 푸르러 있어, 천산에 잎진 초목들을 부러하게 하리라."
 
565
몽룡도 풍류를 아는 남자라 거문고 소리를 들으니 흥이 나 서 무릎을 툭 치며,
 
566
"좋다, 너 혼자 하느냐. 내 소리도 들어 보아라. 구절마다 거문고를 높게 맞추어라."
 
567
하고 천자 뒤풀이를 내인다.
 
568
"높음도 높을사, 넓음도 넓을시고, 대장부 기개같이 호호 탕 하늘천.
 
569
높으면 산이요, 깊으면 바다로다, 만물을 생육하니 어머니 의 덕이로구나, 자비할손 따지.
 
570
삼월이라 삼진날 춘풍세우 날릴 적에 강남 갔던 옛 제비 옛 주인을 찾아오니, 어허 너도 정 있구나 가뭇가뭇 가물현.
 
571
김제 만경 너른 벌에 추풍 건듯 불어가니, 고개 숙인 벼이 삭이 굽실굽실 물결진다, 금년 농사도 잘되었네 벼이삭이 누르황.
 
572
뫼시옵고 우리 둘이 금술좋다, 고대광설 집우.
 
573
안득광하 천만간 억조창생 집주.
 
574
한강수 푸른 물이 하늘에 닿아 넓을홍.
 
575
부귀영화 믿지 마라 황당할사 거칠황.
 
576
오늘 가고 내일 가 이팔청춘 다 늙네, 진시황의 채찍 얻어 붙들고저 날일.
 
577
강릉에도 경포대 둥두렷한 달월.
 
578
수령방백 인두영치 호반한 양전통 암행어사 삼마패 절대가 인 울금향 나 같은 서생일랑 필랑이 제격이란 주룽주룽 찰영.
 
579
잔 가득 술 부어라 넘쳐간다 기울책.
 
580
북두칠성 북극성 멍에 다문 보재기 쌍태성 삼태성 하늘 가 득 별진.
 
581
원앙베개 비취 이불 활짝 벗고 잘숙.
 
582
이틀 이레 안성장에 팔로물화 벌렬.
 
583
야만무인 사창하에 온갖 정담 베풀장.
 
584
백설이 만건곤하니 독수공방 찰한.
 
585
어허 그날 참도 찰사 어서 오너라 올래.
 
586
동지섣달 차다 마소. 유월염천 더울서.
 
587
정든 님 언제 올꼬 기약이나 두고 갈왕.
 
588
금풍이 소슬한데 잎 떨리는 가을추.
 
589
님 손수 지은 농사 내 손 대어 거둘수.
 
590
춘하추풍 다 보내고 어허 춥다. 겨울동.
 
591
밤을 새어 지은 옷을 입을 님은 안 오시네. 홍안에 두줄 눈물 장문 열고 감출장.
 
592
천시에도 군것 있다 삼년 일차 윤달윤.
 
593
님 가신데 어드메나. 천리 만리 남을여.
 
594
이 몸이 훨훨 날아가서 만나기나 이룰성.
 
595
일년 열 두달 삼백 예순 날 이리저리 다 보내고 송구영신 햇세.
 
596
본처 박대하지 마소. 대전통편 법칙률."
 
597
소라를 다 맞추고 몽룡이,
 
598
"어떠냐?"
 
599
"그 무슨 소리요? 참 재미있소."
 
600
"또 하나 하랴."
 
601
"잘하신다니까 아주신이 나셨구려. 그럼 또 하나 하오—— 꼭 한마디만 더 하고는 공부해야 되어요."
 
602
"그까진 공부는 아무 때 하면 못하랴. 뒷간에 가서 할일 없는 때나 하기로 하고 흥난 길에 소리나 하고 놀자. 거문 고 타라, 아까 것과는 좀 장단이 다르것다."
 
603
"어서 소리나 하오. 내 걱정은 말고."
 
604
춘향이 거문고를 다시 무릎 위에 올려 놓으며,
 
605
"이번에는 또 무슨 좋은 소리를 하시랴오?"
 
606
"이번에는 좀 점잖은 소리를 하여볼란다. 만고, 영웅, 호 걸, 충신, 절사, 일색들을 모아 보리라."
 
607
"참 듣지 못하던 별소리요. 어서 하오 타오리다."
 
608
"타라!"
 
609
하고 몽룡이 소리를 낸다—
 
610
"성터에는 속절없이 벽산 달만 비치이고, 고목은 모두 창 오구름에 쌓였어라 하던 이 태백으로 한짝 치고, 저소리 관 산달에 삼년을 울었으니 만국이 싸우는 바람에 초목조차 설 어 울다 하던 두 자미로 한짝 치고, 저녁 놀에 외기러기 날 고, 가을물은 하늘과 한빛일세 하던 왕 자안으로 웃짐 치고, 이슬은 강에 빗겼는데 물빛은 하늘에 닿았것다 하던 소 동 파로 말 몰려라. 둥덩둥덩덩 징지루 덩징덩, 날이 맞도록 나 무 그늘에, 맑은 냇물에 이 몸을 씻었노라 하던 한 퇴지로 한짝 치고, 세 번 악양에 오되 아는 이 없사오며 부질없이 읖조리고 동정호를 지나니라 하던 여 동빈으로 한짝 치고, 잔을 곡수에 흘릴제 봄바람이 더욱 조희 하던 왕 희지로 웃 짐 치고, 늠실늠실 금물결에 벽 그림자 잠겼세라 하던 범중 암으로 말 몰려라. 어양비고 울어 올제 예상우의 가엾구나 하던 백 낙천으로 한짝 치고, 떠날 때 자네 줄 것 일편심뿐 이로세 하던 맹호연으로 한짝 치고, 울밑에 국화를 따다가 멀거니 남산을 바라노라 하던 도 연명으로 웃짐 치고, 만고 의 영웅을 내 다 알고 제왕의 흥망을 내 보노라 하던 사마 천으로 말 몰려라.
 
611
국은을 갚기 전에 몸이 먼저 죽단 말가 하던 장순으로 한 짝 치고, 이 몸은 죽을지언정 절의야 변할 소야 하던 허원 으로 한짝 치고, 머리카락은 하늘로 뻗고 눈초리 찌어지던 번쾌로 웃짐 치고, 충의는 하늘에 뻗고 정성은 금석을 뚫어 맹세코 송 나라를 회복하리라던 악 풍기로 말 몰려라.
 
612
오호 편주 흘리 저어 범 송백을 따라가던 서 시로 한짝치 고, 한 번 상긋 웃는 웃음 온갖 아양 다 나오니 융궁에 모 든 미인 안색이 없을 터라 하던 양 옥진으로 한짝 치고, 해 하영 옥장 밑에 항왕을 부여잡고 추파에 눈물지던 우 미인 으로 웃짐 치고, 영웅의 굳은 뜻을 일조에 이간하던 초선으 로 말 몰려라.
 
613
궁 뜰에 봄 깊으니 백화 우거진데 연작은 날아와서 기쁘다 지저귀네 하던 이 소화로 한짝 치고, 님 위하는 충성된 맘 혼이라도 넋이라도 따르리라, 떠날 것가 하던 가춘운으로 한짝 치고, 북파 영중에 달 그림자 흐르놋다 옥문관 외에 봄빛이 희구나 하던 심 뇨연으로 웃짐 치고, 청수담에 수절 하니 음곡에 봄이 오다 하던 백 능파로 말 몰려라.
 
614
벽담에 추월 같고, 녹파에 부용 같고, 글 읽으라고 밤낮 잔 소리하는 춘향으로 한짝 치고, 낙양 과객 풍류호사 놀기만 좋아하는 이 도령으로 한짝 치고, 춘향의 무릎 베고 비스듬 히 누워 있어 이 도령의 소리 맞추는 거문고로 웃짐 치고, 오월오일 광한루에 월로승 되던 방자놈으로 말 몰려라."
 
615
춘향이 거문고를 내려 놓으며,
 
616
"다요?"
 
617
"왜 더 듣고 싶으냐?"
 
618
"아니 더 듣고 싶든 않소마는 잘도 하오. 대관절 그게 어 디 본때나 있는 소리요? 도련님이 되는 대로 꾸며대는 소리 요?"
 
619
"만고 문장 이 몽룡이 남 지은 노래를 부를 리가 있느 냐?"
 
620
"어쨋든 용하시오—잘도 줏어대시오. 그런데도 다 무슨 뜻 이 있으니 신통하오."
 
621
몽룡이 목이 마른 듯이 입을 다시더니,
 
622
"무얼 좀 먹고 싶구나."
 
623
춘향이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상단을 부르니, 상단이 벌써 알아 차리고 준비하였던 밤 참 상을 들고 나온다.
 
624
상에 술이 없는 것을 보고 몽룡이 픽 돌아 앉으며,
 
625
"이건 누가 굶어 다니는 줄 아느냐. 밤낮 배부를 것만 주 니 내가 개걸 주머니나 차고 다니는 줄 아나 보구나."
 
626
춘향이 새침해지며,
 
627
"그럼 이 훌랑 안 드리지요. 아따 상단아. 이 상 물려 라."
 
628
하고 춘향도 다른 창을 향하고 돌아 앉는다.
 
629
두 사람은 등을 지고 말이 없는데 등잔불만 춤을 춘다.
 
630
춘향이가 먼저 말을 붙이었으면 하고 기다리다 못하여 몽룡이 먼저 돌아 앉으며,
 
631
"또 노였구나. 왜 그렇게 발끈하기를 잘하느냐?"
 
632
춘향은 더욱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며,
 
633
"나는 그래도 정성껏 해드리는 것을 칭찬은 못해도 그렇 게 퉁명 부릴 게야 무엇이요?"
 
634
"허 네가 모른다. 사내란 아내 보고 퉁명 부리는 맛에 사 는 것이란다."
 
635
춘향도 웃고 돌아 앉으며,
 
636
"여편네도 남편한테 발끈하고 잔소리하는 맛에 산답니 다."
 
637
"그도 그렇구나. 그러면 내 퉁명과 네 발끈과 쓱싹 에워 버리고 술이나 한 잔 다오."
 
638
춘향 잠깐 눈쌀을 찡기며 뾰롱뾰롱하게,
 
639
"글쎄 공부하는 이가 오늘밤에 해야 할 공부는 두고 술만 찾으니 어찌하오?"
 
640
"그래 안 줄 테야."
 
641
"안돼요."
 
642
"이런 말이 있느니라—본처 두고 첩하는 놈, 첩한다고 강 짜하는 년, 아내더러 술 내라고 조르는 놈, 내라는술 안 준 다고 떼는 년 다 못쓴다더라. 한바탕 소리를 했더니 목이 갈하구나 한 잔 다오."
 
643
춘향이 마지못하여 술을 내온다. 몽룡이 손수 병을 들고 큰 잔에 부어 거푸 두 잔을 마시곤 또 한 잔을 따르려는 것 을 춘향이 막으니,
 
644
"삼배에 통대도라고 이 태백이 말하였고, 한 잔 술에 눈 물난다는 말도 있으니 한 잔만 더 먹자."
 
645
술을 먹고 나니 또 공부할 맘은 없어지고 놀 맘만 생긴다.
 
646
그래도 춘향의 잔소리가 무서워 억지로 책을 보자니 취한 눈에 글자가 바로 보이지를 아니한다.
 
647
몽룡이 책을 닫히고 돌아 앉으며,
 
648
"어디 배가 불러 공부가 되나, 밥이나 내릴 겸 우리 수수 께끼 하나 하자."
 
649
"수수께끼라니 저 먼산 보고 절하는 것 그런 것 말이 요?"
 
650
"그까짓 게 무슨 수수께끼냐. 내 하나 할께 알아 보아라.
 
651
홍두깨 알 낳는 게 무에냐?"
 
652
"그게 무에요. 모르겠소."
 
653
"총 놓는 것이니라."
 
654
춘향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방그레 웃으며,
 
655
"참 그렇구려. 내 하나 할께 알겠소?"
 
656
"어디."
 
657
"타러 갈 제 타고 가서 타면 못 타고 못 타면 타는 것이 무엇이요?"
 
658
"얘 그건 과연 모르겠다."
 
659
"그것이 환상 타러 가는 소라. 환상을 타러 갈 제는 소를 타고 가지요? 환상을 타면 못 타고 오고 원님이 유고하여 환상을 못 타면 타고 오지 않소?"
 
660
"참 그렇구나. 시골 수수께끼를 내가 알 수 있느냐."
 
661
"걸뜻하면 시골이라지—시골 덕으로 사는 줄 모르고."
 
662
"참 그도 그렇구나. 천지를 지으시는 하느님 덕, 나화덕, 인황씨는 수덕이요. 천하 태평하니 상감님 덕이요. 몹쓸놈의 배은망덕 단단한 목덕이요. 물렁물렁한 쑥덕이오 너 낳아 주기는 장모덕이요. 이 도령 술 먹을 제 말 덕벌덕이요......
 
663
가만 있자 내 무슨 소리를 하려다가 잊었니? 옳다. 우리네 가 먹고 입기는 시골 농사군의 덕이로구나."
 
664
"밤낮 그런 재담 생각만 하니 무슨 공부가 되겠소? 내 신 세도 꺼벅꺼벅하오."
 
665
몽룡이 먹은 술이 점점 취하여 올라오니 솟는 흥을 걷잡을 수가 없다.
 
666
"수수께끼 따위로 부른 배와 솟는 흥을 누를 수가 없으니 춤을 좀 추어야겠다. 영가무도라 하였으니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성인의 일이라 나도 성인을 배우는 사람이니 입으로만 배워 쓰겠느냐. 몸소 행하여 보리라."
 
667
하고 일어나 얼씬얼씬 춤을 추다가,
 
668
"혼자 추니 무미하구나. 부창부수라니 지아비 하라는 대 로 너도 일어나 추어라."
 
669
하고 춘향을 끌어 일으킨다.
 
670
춘향도 처음에는 몽룡이가 끄는 대로 억지로 끌려 돌아갔 으나 본래 배웠던 춤이라 점점 흥이 나서 한바탕 어울어져 추었다.
 
671
"좋다 인생행락이 마땅히 이러할 것이다. 너만 나고 내가 안 났어도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고, 나만 나고 네가 안 났 어도 또한 그러하리라. 하늘이 우리 둘을 내신 것이 어찌 뜻이 없으시겠느냐. 좋다!"
 
672
몽룡이 한참 동안 춤을 추더니 흥을 견디질 못하는 듯이 어머니가 아기를 안는 모양으로 덤석 춘향을 들어 안고 아 기를 달래는 듯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아랫목에서 웃목으 로 웃목에서 아랫목으로 얼씬얼씬 춤을 추며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673
"어허둥둥 내 사랑이야 네가 내 사랑이로구나.
 
674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이다. 아무리 보 아도 내 사랑이로구나. 어허둥둥 내 사랑.
 
675
앉거라 보자 내 사랑 서거라 보자 내 사랑이다. 들고 보아 도 내 사랑 놓고 보아도 내 사랑 어허둥둥 내 사랑 사랑 사 랑 내 사랑, 아무리 하여도 내 사랑 이생에서도 내 사랑, 저 생에서도 내 사랑 극락엘 가거나 지옥엘 가거나 어디를 가 도 내 사랑. 너를 두고는 못 살리라 어허둥둥 내 사랑."
 
676
춘향이 발을 버둥거리며,
 
677
"팔 아프시겠소. 그만하고 내려 놓으시오."
 
678
"가만 있거라. 한 마디 더하자. 어허둥둥 내 사랑이로구 나. 무산 선녀도 나는 싫어, 서시 옥진도 나는 싫여. 아무도 나는 싫다. 어허둥둥 내 사랑 네가 오직 내 사랑."
 
679
"에그 그만해요. 팔 아프시겠소."
 
680
하고 춘향이 몽룡의 팔을 뿌리치고 방바닥에 내려선다.
 
681
"이번에 날 좀 안고 사랑의 노래를 불러다오."
 
682
"무거워서 어떻게 안소?"
 
683
"그러면 업고—"
 
684
"숭해라!"
 
685
"안 숭하다."
 
686
하고 몽룡이 춘향의 등에 업힌다.
 
687
춘향이 머리채를 앞으로 끌어오고 몽룡을 업고 외씨 같은 발을 안짱다리로 사뿐사뿐 옮겨 놓으며,
 
688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689
몽룡이 등 위에서,
 
690
"내가 네 아들이냐. 자장자장은 다 무에야. 사랑가! 사랑 가."
 
691
"에그 퍽도 보체네. 그럼 두어 마디만 하리다."
 
692
하고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693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로구나 우리 도련님 내 사랑 어허둥둥 내 사랑.
 
694
천상 선관도 나는 싫소. 삼공 육경도 나는 싫소. 어허둥둥 내 사랑 도련님이 내 사랑.
 
695
한강수 물결같이 끊임 없는 내 사랑. 동해 바다 푸른물 끝 모르는 내 사랑 어허둥둥 내 사랑.
 
696
남산 칡덩굴같이 엉키고 엉킨 내 사랑. 연평 바다에 조기 잡는 그물같이 맺히고 맺힌 내 사랑. 아무리 보아도 내 사 랑. 어허둥둥 내 사랑."
 
697
"자요 그만 내리오."
 
698
"좋다. 한 마디만 더해라."
 
699
하고, 몽룡은 춘향의 어깨에 꼭 달라 붙는다.
 
700
춘향이 또 얼씬 얼씬 몽룡을 업고 거닐면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701
"높고 높은 하늘에 닿고 남는 내 사랑, 삼천대천세계에 차고 남는 내 사랑. 죽고 나고 죽고 나 삼생을 두루 돌아도 변칙 않는 내 사랑. 북망산 일분토살과 뼈가 다 썩어도 썩 지 않는 내 사랑이야. 님께 들인 내 사랑이로구나. 어허둥둥 내 사랑."
 
702
"좋다."
 
703
"자 인제는 내리오. 아이고 팔이야."
 
704
몽룡이 춘향의 등에서 내려오며,
 
705
"나를 업어 보니 어린애 업고 싶은 생각 안 나느냐?"
 
706
"숭해라!"
 
707
"왜 숭해? 하나 낳아라. 네가 낳으면 반드시 좋은 아이가 나리다."
 
708
"지금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이 아이를 낳았다고 남들이 웃지 아니하오?"
 
709
"남모르게 이 방에다 감추어 놓고 우리 둘이만 들여다 보 고 앉았지."
 
710
"감추어 두면 모르오? 아이가 울면 우는 소리가 안 들리 오?"
 
711
"그도 그렇구나."
 
712
"그렇게 어느 새에 아들이 보고 싶소?"
 
713
"네가 낳은 것이라면 오줌똥을 받으면서라도 안아 주고 업어도 주고 싶구나."
 
714
춘향이 시무룩해지며,
 
715
"아기가 나도 걱정이요."
 
716
"왜?"
 
717
"호적에도 못 오르고 나 모양으로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 어 천덕군이가 되겠으니 어떻게 갓을 쓰고 다니겠소?"
 
718
몽룡이 춘향의 등을 어루만지며,
 
719
"언짢아 마라. 내 힘써 공부하여 늦어도 삼년 안에는 대 과급제하여 너를 서울로 데려갈 터이니 행여 언짢아 말아라."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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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아저* (49.166.***.**)
2021-04-07 17:03:22
『일설 춘향전』은 『춘향전』의 여러 계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여러 『춘향전』의 계보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가장 최종의 『춘향전』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그리고 이는 식민사회에서 조선적 전통을 기획하겠다는 포부에 맞닿은 것이며, 그러한 전통을 기획하는 절대적인 지위에 작가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교보문고(해설)
필아저* (49.166.***.**)
2021-04-07 17:02:30
『일설 춘향전(一說春香傳)』은 ‘춘향’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1925년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총 96회 분량으로 연재되었다. 1925년 『동아일보』는 『춘향전』을 “조선 사람의 전통적 정신”을 계승하는 작품으로 설정하고 이를 다시 씀으로써 “참된 국민문학”을 만들어낼 것을 이광수에게 요청하고, 이러한 개작의 방향은 계몽주의적 태도를 전제로 하는 이광수의 창작의 방식과 교호하면서 근대적인 문학의 체제를 갖춘 새로운 『춘향전』을 탄생시킨다. 『일설 춘향전』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기본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하되, 식민사회에서 요청되었던 조선적 전통을 기획하는 과정의 일환으로서 『일설 춘향전』의 창작은 적층적이고 서민적인 형태로 유통되었던 『춘향전』에 작가적 주체의 자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근대적인 소설의 형태로 확정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 교보문고(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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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아저* (49.166.***.**)   
2021-04-07 17:03:22
『일설 춘향전』은 『춘향전』의 여러 계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여러 『춘향전』의 계보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가장 최종의 『춘향전』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그리고 이는 식민사회에서 조선적 전통을 기획하겠다는 포부에 맞닿은 것이며, 그러한 전통을 기획하는 절대적인 지위에 작가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교보문고(해설)
필아저* (49.166.***.**)   
2021-04-07 17:02:30
『일설 춘향전(一說春香傳)』은 ‘춘향’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1925년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총 96회 분량으로 연재되었다. 1925년 『동아일보』는 『춘향전』을 “조선 사람의 전통적 정신”을 계승하는 작품으로 설정하고 이를 다시 씀으로써 “참된 국민문학”을 만들어낼 것을 이광수에게 요청하고, 이러한 개작의 방향은 계몽주의적 태도를 전제로 하는 이광수의 창작의 방식과 교호하면서 근대적인 문학의 체제를 갖춘 새로운 『춘향전』을 탄생시킨다. 『일설 춘향전』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기본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하되, 식민사회에서 요청되었던 조선적 전통을 기획하는 과정의 일환으로서 『일설 춘향전』의 창작은 적층적이고 서민적인 형태로 유통되었던 『춘향전』에 작가적 주체의 자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근대적인 소설의 형태로 확정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 교보문고(해설)
필아저* (106.240.***.***)   
2021-03-11 12:23:29
춘향전 중에 최고의 작품인 것 같습니다. 고전 소설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한 작품 중에는 이광수의 '허생전 (이광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광수 허생전 강추...
“게시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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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일설춘향전 [제목]
 
이광수(李光洙) [저자]
 
1925년 [발표]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이광수의 장편소설 (1925)
 
춘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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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04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