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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靑春) ◈
◇ 11 ◇
해설   목차 (총 : 17권)     이전 11권 다음
1926년
나도향
 

11

 
2
집에 돌아온 일복은 쓸쓸히 빈 방에 혼자 누웠었다. 그러나 누르는 듯한 공포가 가끔가끔 공중에서 자기 가슴을 누르는 듯할 때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3
"아 ── 그 책임은 내가 가져야 할 것이지!"
 
4
혼자 중얼거리는 그에게는 온 방안이 자기 몸에 피가 때때로 타는 듯이 고조(高調)로 긴장할 때마다 암흑하게 눈에 비친다.
 
5
'그가 죽은 것이 과연 나의 잘못으로 인함일까?'
 
6
한참 있다가 다시 멀리 보이는 강물을 실없이 내다보다가,
 
7
'그가 정말 나로 인하여 죽었다 하자!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가지고서 나에게 그 책임을 질 만한 증거를 내세울 수가 있는가?'
 
8
그는 다시 초조한 감정을 내려 앉히고서 아주 침착하고 냉정한 생각으로 그것을 순서 있고 조리 있게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9
일개 여성의 생명! 더구나 꽃 같은 청춘 여자의 끔찍한 생명! 인생의 무한한 생의 관맥(管脈) 중의 하나인 정희의 생명! 그 생명은 나의 이 생명과 조금도 다름없이 두 번 얻기 어려웁게 귀한 생명이다! 그러면 그와 같은 생명을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똑똑한 의식으로 사(死)의 선언을 하고 또한 자기 자신으로서 그것을 집행한 그 생명 소유자의 고통! 그것은 얼마나 정 있는 자의 동정을 받을 만하였을까? 그 동정할 만한 고통의 동기가 나에게 있다 하면 다른 몇 만 사람의 동정보다 더욱 많은 동정을 정희에게 부어 주어야 할 것이다.
 
10
그러고 보자. 내가 비록 정희의 몸에 손을 대거나 또는 흉기를 대어 죽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또한 그의 생명을 빼앗으리라는 마음은 비록 먹지 않았다 할지라도 오늘의 그 결과는 어떠한가? 정희는 어떻든 죽은 것이 아닌가? 정희라는 여자가 자기의 생명이 끊길 만큼 원동적(原動的) 원인은 나에게 없다하더라도 그만큼 반동적 원인을 가진 자 되는 것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11
물론 내가 법률상으로는 죄를 면할 수 있고 또는 양심으로 보아서 내가 허물이 없지마는 인간성의 보배 중 하나인 인정으로 보아서 나는 그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12
나 때문에 초민하고 나 때문에 고통하고 나 때문에 울고 또한 나 때문에 죽고 내가 있으므로 그의 인생이 의의 있을 수 있었고 또한 내가 있어 그의 생애가 능히 무가(無價)할 수 있는, 즉 내가 있으므로 그의 생이 죽고 살 수 있는 그를 오늘날 생명까지 끊게 한 나는 오늘에 이렇게 살아 있어 자기의 생을 누리고 또한 자기의 사랑을 사랑할 만치 무책임한 자이며 몰인정한 자일까? 자기의 생명을 귀중히 알면은 또한 남의 것도 그렇게 알아야 할 것이다.
 
13
그는 새로이 따가운 인정이 그의 전신을 따뜻하게 싸고 돌기 시작하였다.
 
14
그리고서 그 전에는 그렇게까지 보기도 싫어하던 정희의 모든 것을 다시 불러내어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만나 보고 싶도록 그리운 생각이 나기 시작하였다.
 
15
그는 최근의 그를 보던 때와 또는 최초에 그를 만나던 때를 번개같이 머리 속에서 중동을 끊어 영사(映寫)하는 활동사진 필름같이 보았다.
 
16
그리고 어제 저녁 자기 앞에서 흘린 눈물 방울이 떨어진 방바닥을 한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고, 또는 어저께 정희가 신 벗어 놓았던 마루끝을 여전히 그 신이 있는 듯이 내려다 보았다.
 
17
'그리고 어제 저녁에 이 방문을 정희가 나갈 적에 나의 이 손이 한 번만 붙잡았더라면 오늘 그가 그대로 이 세상에, 더구나 나와 가까운 안동읍에 살아 있을 걸!'
 
18
하고서 문지방과 문설주를 만져 보기도 하였다.
 
19
그리고서 그는 다시 정희가 그 옆에 앉아서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듯이 '정희!'하고 불러 보았을 때 그 <정>하는 음의 종성(終聲)인 <ㅇ> 음이 피아노의 <파>음이 연하고 부드럽게 울려나오는 듯하였다. 그래서 그는,
 
20
'정희! 정! 정!'
 
21
두어 번 거푸 혼자 중얼거렸다.
 
22
그러나 대답이 없고 다만 새파랗게 개인 공중에 두어 점 구름이 미끄러지는 듯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것이 눈에 보일 뿐이다.
 
23
그러매 그는 고적한 듯한 생각이 나며 또는 여태까지 자기를 칭찬하고 숭모(崇慕)까지 하던 온 안동 전읍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떠나 자기를 욕하고 비웃고 나중에는 저주까지 하는 듯이 생각이 들 때 그는 암야(暗夜)에 귀신 많은 산골을 지나가는 듯이 머리끝이 으쓱할 만큼 무서움을 깨달았다.
 
24
그리고 자기를 누가 있어 두 어깨를 답삭 들어 천인절벽(千仞絶壁) 밑 밑 없는 음부(陰府)에 내려던지려고 지금 그 위에 번쩍 들고 있어 대롱대롱 매달린 듯하다.
 
25
그는 그러나 그 무서움 속에서도 억울함이 있었다. 몸이 떨리는 중에서도 그 비(非)를 반발하고 자기의 시(是)를 호소할 만한 정의를 주재하는 이를 찾아보고 싶었다.
 
26
그는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과 자기의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떨림을 어떻게 무엇으로든지 이길 것을 찾으려 애썼다.
 
27
그는 방에 들어앉은 것이 지옥에 들어앉은 듯하였다. 그래서 그 지옥을 벗어나기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28
밖에 심은 푸성귀 향내. 저쪽 우물에서 물 길어올리는 두레박에서 흐르는 물방울. 먼 산에서 바람에 춤추는 허리 굽은 장송(丈松). 빨래하는 못 속에 비친 촌녀(村女)의 불겅 저고리, 검은 치마.
 
29
그는 지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유열(愉悅)과 환락(歡樂)이 흐르는 천당에는 들지 못하였다. 태우는 몰약(沒藥)에 혼을 사르고 피우는 볼삼(bolsam)에 영을 취(醉)케 하는 듯한 몽중(夢中)에 들지는 못하였으나, 배암의 혀끝에서 흐르는 듯한 독액(毒液)을 빠는 듯하고 삼 척(三尺) 긴 칼끝에 묻은 독약을 피 솟는 가슴에 받은 듯한 고통은 잊었다.
 
30
그는 발을 정처없이 옮겨 놓았다. 그러나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오라고 하는 곳도 없었다.
 
31
새로운 공기와 향기로운 풀 내음새가 저으기 초민에 타는 듯한 가슴을 문질러 줄 뿐이다.
 
32
'어찌할꼬? 내가 책임을 져? 진다 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책임을 진다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단념하는 수밖에 없거니와 그렇지 않고는 무슨 다른 도리가 있을까? 그러면 정희가 나로 인하여 죽었으니 나도 또한 정희를 위하여 죽을까?'
 
33
그것을 생각한 일복은 혼자 껄껄 웃으며, '죽는다니 어리석은 일이지. 내가 생에 대한 집력(執力)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어리석은 희생자는 되기 싫어!'
 
34
그러면 또 무엇이냐? 나를 사랑하여, 즉 사랑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바친 정희를 위하여서는 나는 사랑을 바치는 것밖에는 없지? 그렇지. 나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할지라도 나의 사랑은 바쳐야 할 것이다.
 
35
그러면 사랑을 바친다 함에는 다만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즉 소극적으로 내가 일평생 다른 여성을 사랑하지 않고 나의 정신과 육체로써 정희를 위하여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36
그는 길을 새 길로 취하였다. 초가집 담 모퉁이를 돌고 밭고랑을 지날 때 그는 자기의 그림자가 땅 위에 비쳐 있어, 자기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37
그리고는 또다시 '사랑은 생의 일부분이지!'하면서 고개를 들어 저쪽 영호루를 보았다. 그러자 그의 머리에는 또다시 양순이가 보였다. 그 양순의 자태가 자기 눈앞에서 춤추는 듯 환영이 보일 때 그는 또다시,
 
38
'사랑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을 만치 강한 것이다. 불이 나무에 붙을 수 있는 것이지마는 그 나무를 능히 사를 수 있는 것 같이 사랑도 생 있는 연후에 작열할 수 있는 것이지마는 능히 그 생을 불살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39
그때 자기 어깨를 탁 치며,
 
40
"어디를 가시오?"
 
41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일복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에는 이동진이가 한턱 내라는 듯이 웃으며 서 있었다.
 
42
"어째 여기까지, 이렇게?"
 
43
하며 일복은 조금 주저하는 중에도 반가와 손을 내밀었다.
 
44
"네, 나는 일복 씨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읍니다."
 
45
일복은 그 좋은 소식이란 양순과 자기 사이의 연담이 그 공을 이룬 줄로 추상되었을 때 그의 맥을 풀리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반가운 표정도 보이지 못하고 도리어 침착하게,
 
46
"무슨 소식을요?"
 
47
"녜, 반가운 소식입니다. 엄영록은 그것을 승낙하였읍니다. 당장에 쾌락하였읍니다."
 
48
"그러나 때는 이미 틀렸읍니다. 내가 또다시 다른 여성을 사랑할 권리는 있지마는 나는 그 권리를 나로 인하여 죽은 여성을 위하여 내버리려 합니다."
 
49
이동진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서는 일복에게,
 
50
"그것은 어째서요?"
 
51
하고 물었다.
 
52
"그것은 동진 씨도 아시겠지마는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한 사람입니다."
 
53
이동진은 입을 크게 벌리며 또다시 웃더니,
 
54
"나는 알겠읍니다. 정희 씨가 죽은 까닭이겠지요?"
 
55
일복은 남이 그 말을 하는데 너무 감정이 감상으로 변하여 눈물이 날 듯하였다. 그러나 억지로 그것을 참고서,
 
56
"네"
 
57
하고 먼 산을 보았다.
 
58
동진은 얼굴빛을 교회사(敎誨師)처럼 엄숙한 중에도 정이 어리게 하며,
 
59
"여보세요! 일복 씨! 정희 씨가 죽은 것이 당신으로 인하여 죽은 줄 아십니까? 물론 그 외면적 원인은 일복 씨에게 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희씨 그이는 자기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사랑을 완전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만들기 위하여 죽은 것입니다. 지금 만일 그 정희 씨의 혼령이 있어 우리가 그 의견을 들을 수 있다 하면, 그는 당신에게 호소할 것도 없는 동시에 또한 원망도 없을 터이지요. 그는 옛날에 순교자가 폭군의 칼날도 무서워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을 위하여 죽은 것과 같이 자기의 사랑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은 것이지요."
 
60
일복은,
 
61
"그렇지만 내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까요."
 
62
동진은 다시 힘있게,
 
63
"그렇지요. 그 책임이 있다 하면 있겠지요. 그리고 없다 하면 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일복 씨가 또다시 다른 여성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하시니 당신은 그 무가치한 인정 ── 이 경우에만 말씀입니다. ── 그것으로 인하여 일평생 당신은 사랑을 못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사랑을 하는 사람이어야만 이 세상에서 강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위대한 세력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또 없으니까요! 사랑은 생(生)보다 적으나 온 생을 포괄하고 또한 지배할 수 있읍니다. 마치 우리 인생이 우주의 일부분에 불과하나 능히 그 영(靈)으로서 온 우주를 포괄할 수 있는 것 같이! 나는 적은 인정을 이겨 큰 사랑을 하시라 권합니다. 인정이 물론 우리 인류의 꽃이지만 사랑은 여왕입니다. 만일 신심깊은 목사가 어떠한 매춘부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하면 그것을 동정이나 연민이라 할지언정 사랑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동정이나 연민으로 인하여 도리어 자기가 죄짓기를 원치 않을까. 일복 씨! 정희 씨는 정희 씨의 사랑을 위하여 순(殉)하였읍니다. 일복 씨는 또한 일복 씨의 사랑을 위하여 최후까지 강하게 나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64
이 말을 들은 일복은 새로운 광명이 자기 앞에서 번득거리는 것 같았다.
 
65
그래 그는 동진의 손을 잡고서,
 
66
"동정은 사랑이 아니지요? 나는 나의 사랑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지요? 사랑을 하여야 참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우리 인간미를 영의 나라에서 참으로 맛볼 수가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나는 그러면 지금에 잘못 길을 들려 할 때 동진 씨가 그것을 가르쳐 주심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67
동진은,
 
68
"아뇨, 천만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어떻든 나는 당신의 장래할 행복이 영원하기를 빕니다. 오늘 엄영록은 당신에게 행복의 문을 열어 놓았읍니다."
【원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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