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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靑春) ◈
◇ 12 ◇
해설   목차 (총 : 17권)     이전 12권 다음
1926년
나도향
 

12

 
2
일복은 그 이튿날 해가 떨어지려 할 때 양순의 물긷는 우물을 향하여 갔다.
 
3
어제 동진에게 엄영록이가 자기 누이동생 양순을 자기에게 허락하였다는 말을 듣기는 듣고 당장에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는 하였으나, 한옆으로 부끄러웁고 또 한옆으로 점잖은 생각이 나서 그날 바로 가지는 못하고 오늘 하루종일 주저하다가 겨우 해 떨어지려 할 때 그 우물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집에서 떠나기는 오정 때나 되었었으나 공연히 빙빙 돌아다니느라고 그날 해를 다 보내었다.
 
4
그는 우물 옆에 서서 오리라고 기대하는 양순을 기다릴 때 이슬같이 흐르는 반웃음이 입 가장자리에 돌아 보는 이의 단침을 삼키게 할 듯하였다. 그리고 또는 고대하는 가슴이 따갑게 타서 불난 곳에 화광(火光)이 하늘에 퍼지는 것 같이 그의 가슴의 불길이 하얀 피부 밑으로 살짝 밀렸을 그의 용모는 술 취한 신랑같이 보였다.
 
5
그는 북국(北國)의 회색 천지에서 석죽색(石竹色) 공중에 연분홍 정조(情調)가 떠도는 남국(南國)에 온 것 같이 껴안고 딩굴 만치 흘러 넘치는 희열이 도리어 그를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흥분시키며 입에 윤기가 흐를 만치 오감(五感)에 감촉되는 모든 것을 껴안고 입맞추고 싶었다.
 
6
그는 우물에 허리를 구부리고 물 한 두레박을 퍼먹었다. 그러고 나니까 흥분되었던 것이 조금 가라앉았다.
 
7
사람의 기척만 나도 그쪽을 보고서 속으로,
 
8
'오는가?'
 
9
하다가 아니 오면 무참히 고개를 돌리기를 몇 번이나 하였는지, 어떤 때는 벌떡 일어서려다가 다른 곳을 보고서 군소리까지 한 일이 있었다.
 
10
사면은 조용하다. 저쪽 포플라 그늘 속으로 대구서 오는 자동차가 읍을 향하여 달아나고는 또다시 무엇으로 탁 때린 듯이 조용하다.
 
11
멀리서 저녁짓는 연기가 공중으로 오르지 않고 땅 위로 기어간다. 아마 비가 오려는가 보다.
 
12
그러나 양순의 그림자는 볼 수 없었다. 일복은 우물 옆 잔디 위 넓죽한 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양순의 집을 머릿속으로 보고 앉았었다. 양순의 오라비 엄영록은 무엇을 하는가? 마루 위에 벌떡 드러누워 아리랑 타령을 하지 않으면 땔나무를 끌어들이렷다. 양순의 어머니는 무엇을 하는가? 부엌에서 솥뚜껑을 열어 보고서 옆에서 가로 거치는 개란 놈의 허구리를 한 발 툭 차며 '이 가이!' 하고 소리를 지르렷다. 그러고 보자, 양순은 지금 마루 끝에 내려섰다. 그러면서 혼자 속마음으로 '오늘도 또 그이가 안 왔으면 어떻게 하노? 그가 와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면서 툇마루 위에 놓았던 또아리를 휘휘 감아 가리마 어여쁘게 탄 머리 위에 턱 얹고서 허리를 굽혀 물동이를 이렷다. 그럴 때 그만 잘못 또아리가 비뚤어지니까 그 옆에 있던 오라비더러 그것을 고쳐 놓아 달라고 두 팔로 물동이를 공중을 향하여 번쩍 들고 있으렷다. 그러면 그 오라비는 자기 누이 곁으로 와서 그 또아리를 바로 놓아 주면서 자기 누이가 새삼스럽게 어여쁘기도 하고 또 이 나하고 혼인할 것을 생각하매 아주 좋아서,
 
13
'저것이 시집을 가면 흉만 잡힐 터이야. 또 쫓겨나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쫓겨오지! 쫓겨 와! 얘, 양반 남편 섬기기가 어떻게 어려운데 그러니?'
 
14
하며 놀려먹으면 양순은 얼굴이 그만 빨개져서 물동이를 내던질 만치 부끄러워 저의 오라비에게 달려들며,
 
15
'에그, 난 싫어. 오라버니두, 그럼 난 물 안 길러 갈 테야'
 
16
하다가 그래도 나를 못 잊어 문 밖을 나서렷다. 지금 나섰다. 그리고 걸어 온다. 지금 오는 중이다.
 
17
일복은 혼자 눈을 감고서 머리속에서 양순의 걸음 걸어오는 것을 하나 둘 세고 있다. 그리고 지금쯤은 그 수양버들나무 밑을 걸어오렷다. 지금은 밭이랑을 지났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요 모퉁이 돌아섰다. 양순은 지금 나를 보면서 이리로 온다. 왔다. 이만하면 눈을 떠야지. 이 눈을 뜨면은 양순이 바로 내 앞에 있을 터이지.
 
18
일복은 눈을 떴다 . 정말 양순이 서 있다. 그러나 저를 보고서 '악'하고 서 희롱삼아 깜짝 놀라며 가만가만 상글상글 웃으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는 돌아서서 울고 있었다.
 
19
이게 웬일이냐? 일복은 벌떡 일어나서 양순의 등 뒤로 가서,
 
20
"왜 그래?"
 
21
하며 두 어깨를 껴안을 듯이 두 손으로 쥐었다.
 
22
그러나 양순은 자꾸 울고 있을 뿐이다.
 
23
"왜 울어, 응?"
 
24
일복은 귀 밑에서 소곤거려 물었다.
 
25
그래도 말이 없다.
 
26
"말을 해야지?"
 
27
일복은 두 어깨를 재촉하듯이 흔들었다. 그때야 겨우 울음 섞인 목소리로,
 
28
"아녜요."
 
29
"아니라니, 집에서 꾸지람을 들었나?"
 
30
"아뇨."
 
31
"그럼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나?"
 
32
"아녜요."
 
33
"그럼 내가 오지 않어서 그래?"
 
34
"그것도 아녜요."
 
35
"그럼 무엇야?"
 
36
양순은 눈물을 두 뺨 위에 흐르는 채 그대로 내버려 두고서 긴 한숨을 힘없이 쉬더니 일복을 바라보며,
 
37
"여보세요."
 
38
그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보지 못하던 애수가 뭉켰었다.
 
39
"왜 그래?"
 
40
일복의 감정은 이유없이 양순의 애수에 전염되어 그도 울고 싶었다.
 
41
"당신은 양반이지요?"
 
42
"그게 무슨 소리야."
 
43
"저는 상사람의 딸입니다."
 
44
일복은 속으로 껄껄 웃었다. 그러나 양순은 말을 계속하여,
 
45
"저를 생각하시는 것은 도리어 당신 명예나 신상에 이롭지 못합니다. 저를 잊으시는 것이 도리어 당신이 저를 생각하여 주시는 정예요. 오늘부터 저를 잊어 주세요."
 
46
일복은,
 
47
"그게 무슨 소리야. 양순이가 없으면 내가 없는데 나는 어디까지든지 양순을 잊을 수는 없어. 내가 잊지 않으려는 것 아니라 잊어지지 않는 것을 어찌하나?"
 
48
"여보세요. 나는 당신을 섬길 마음이 간절하지마는 저는 내일⋯아녜요.
49
저는 당신을 섬길 몸이 못 되지요. 너무 천한 몸예요."
 
50
양순은 내일이라는 말을 하다가 다시 말을 고쳐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일복은 의심이 생기어,
 
51
"무엇야, 내일 어째?"
 
52
양순은 이 말을 듣더니 눈물이 새로이 떨어지며 울음이 복받쳐 올라온다.
 
53
"여보세요? 당신은 저를 참으로 생각하시지요? 그러면 저를 데리고 어디로든지 가 주세요. 저는 내일 돈 백 원에 팔려 가는 몸예요. 우리 어머니는 돈 백 원에 나를 장돌뱅이에게 팔었어요. 그래서 내일은 그 장돌뱅이가 와요."
 
54
"무엇?"
 
55
일복의 몸과 혼이 한꺼번에 떨리기 시작하였다. 일복의 가슴에 몸을 기댄 양순의 몸까지 부리나케 떨린다.
 
56
"정말야?"
 
57
일복은 다시 물었다. 그러다가는 양순의 귀 밑에 입을 대고,
 
58
"거짓말이지? 응?"
 
59
그것이 거짓말이지 참말일 리는 없었다.
 
60
"거짓말이지? 거짓말?"
 
61
"왜 거짓말을 해요?"
 
62
일복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에서 형광(螢光)같은 불빛이 번쩍이며,
 
63
"여! 금수(禽獸)! 독사다! 내가 그런 짐승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자기 딸의 살과 피를 뜯어먹고 빨어먹는 귀신이다. 에! 그런 것을 그대로 두어?"
 
64
그는 당장에 그쪽으로 향하여 가려 하였다. 그가 힘있는 발을 한 걸음 내놓았을 때,
 
65
"왜 이러세요."
 
66
양순은 일복의 팔을 붙잡았다.
 
67
"우리 오라버니는 황소 하나를 드는 기운을 가진 이예요. 당신이 가시면 당장에 큰일나세요."
 
68
"아냐. 내가 가서 그까짓 것들은 모조리 처치를 할 터이야."
 
69
"가지 마세요. 글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세요."
 
70
일복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양순은 한참 있다가,
 
71
"여보세요! 저는 당신의 몸이지요?"
 
72
"왜 그것을 거퍼 물어?"
 
73
"글쎄 대답을 하세요."
 
74
"그래."
 
75
"그러면 저를 죽이시거나 살리시거나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으니까 저를 어디로든지 데불고 멀리 가 주세요."
 
76
"어디로?"
 
77
"어디로든지."
 
78
"죽을 때까지?"
 
79
"죽어도 좋아요. 당신과 같이 죽으면…"
 
80
양순은 일복의 허리에 착 감기며 잠깐 바르르 떨더니,
 
81
"여보세요. 나는 결심했습니다. 저의 한 가지 길은 그것밖에 없어요."
 
82
일복의 마음은 무엇으로 부수려 할지라도 부술 수 없이 단단하여졌다. 온 우주의 정령과 세력의 정화(精華)가 그의 가슴에 엉키어 만능의 힘을 가지게 된 듯하였다. 그리고서 형광 같은 신앙의 불길이 그 앞에서 붙으며 최대의 세력이 그 전 관능(全官能)을 지배하는 듯하였다.
 
83
"나도!"
 
84
그의 부르짖음은 굳세었다. 그리고 투사(鬪士)가 모자(gage)를 던진 그 찰나와 같이 아무 세력도 그의 의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85
"그러면!"
 
86
일복은 말을 꺼냈다.
 
87
"오늘 저녁에라도 달아날까?"
 
88
"네!"
 
89
양순은 몸을 턱 일복의 팔에 실면서 대답하였다.
 
90
"저를 저기서 해가 넘어가는 저 산 뒤까지라도 데려다 주세요. 그리고 언제든지 같이 가세요. 저는 당신이 계실 때는 조금도 무서운 것이 없으나 당신이 없으시면 무서워 죽겠어요."
 
91
"그러지, 그래. 어디든지 데리고 가지. 같이 가고 같이 살고 같이 죽지! 응?"
 
92
양순은,
 
93
"네"
 
94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95
일복은 벌개진 서천(西天)을 한탄 있는 눈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96
"그렇다, 그렇지!"
 
97
하며 손뼉을 탁 치더니,
 
98
"옳지, 옳아"
 
99
하며 무엇을 혼자 깨달은 듯이,
 
100
"이것 봐! 그러면 좋은 수가 있어! 만일 어머니에게 내가 돈 백 원을 주면 고만이지! 그렇지? 그래그래, 그러면 고만야. 자, 오늘 그러면 어머니에게 나는 의논을 할 테야."
 
101
양순은,
 
102
"글쎄요. 그러나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셨어요?"
 
103
"그것야 어디 가서든지 변통을 하여 오지! 그것은 염려 없어. 그러나 그것을 저쪽에서 물러 줄는지가 의문이지."
 
104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이 멀리 가지 않어도 괜찮지요?"
 
105
"그것야 말할 것도 없지!"
 
106
"정말요?"
 
107
"그럼."
 
108
양순은 눈물 방울을 방울방울 눈썹에 달고서 좋아 못 견디어 나오는 웃음을 웃으면서,
 
109
"그러면 저는 공연히 울었어요"
 
110
하고 두 손등으로 눈을 씻었다.
【원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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